특집 | 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 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 교사들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내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글
현유림
초등 교사이자 노동자
나는 기간제 교사다. 학교에서의 일이 3년 차이지만, 이제서야 한 호봉을 인정받은 기간제 초등 교사다. 임용 시험 공부를 하고 있지만 언제 정교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비정규직 교사로 지내고 있는 나에게는 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어떤 입장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에서 꼭 이야기되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교권’이라는 말이 불편하다. 정부에서 교권 보호를 명분으로 학생인권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며 이제는 더 이상 학생인권의 반댓말로 교권이 쓰이게 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긴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보고 겪은 것은, 많은 선생님들이 연차와 상관없이 굉장히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사에게 학생을 개인적으로 벌할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사의 노동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과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작년에 담임이 여러 번 바뀐 고학년 교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학생들 대다수는 수업을 듣지 않았고, 반 1/3에 달하는 학생들이 성적인 농담을 일삼으며 낄낄대는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학교 관리자에게 처음으로 어렵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관리자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주변 교사들은 나를 위로한답시고 ‘이래서 애들을 때릴 수 있어야 하는데’라고도 했고,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애들을 못 잡아서 그렇다’라고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매일 자책을 했다. ‘이게 정말 내 탓인 걸까? 이 학교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정말 내가 어리고 물러서이기 때문일까?’ 나는 억울했다. 관리자에게 면담 및 상담으로 불려 가느라 정작 수업 준비하는 시간은 다 빼앗기고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분들이 마련해 주는 대책은 없었다. 잠을 자기 전에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어린이들을 때리지 못하고, 무섭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결국은 동료 교사와 관리자의 말처럼 내가 ‘무능’한 교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괴로운 걸까? 그렇다면 나의 괴로움은 다 내 탓이 되는 거다. 내가 죽거나, 숨을 못 쉬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그냥 내 탓이다.
힘든 학생들로 인해 정말 괴로웠고, 그 학생들을 진심으로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관리자에게서 단지 상담과 조언만이 아닌 다른 방식의 지원을 받고 싶었다. 예를 들면 교감 선생님께서 따로 학생들과 수업을 해 주시거나,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서 교사 혼자 또는 두셋이 팀을 이루어 학습 분위기를 원만히 조성할 수 있는 그런 실질적인 방법들 말이다. 나는 어린이의 인권을 짓밟고 찾는 평화는 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은 학교의 또 다른 취약한 구성원인 저연차 교사 또는 여성 교사, 또 다른 비정규직 교사에게도 폭력으로 돌아올 것이다. 교사에게 어린이를 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사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권리가 아니라 위력이 될 뿐이다.
5년 전, 나는 스쿨 미투의 물결에도 함께 참여했었다. 그때 가해 교사들이 했던 말들이 ‘그건 다 교육 목적이었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이 예뻐서 한 거였다’ 등이었다. 지금 많은 교사들이 주장하는 아동학대 면책과 같은 방법은 교사에게 ‘아동학대를 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아주 이상한 말을 붙이는 것밖에 안 된다. 나는 이 말이 수치스럽다. 내가 계속해서 기간제이든 정규직으로 발령을 받든 어디에서도 ‘아동학대를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2023년 9월 4일 49재 집회 현장 ⓒ 최승훈 기자
학급당 학생 수가 20명만 넘어도 대부분의 교사가 정말 힘들어한다. 점심시간만 지나도 온몸의 진이 다 빠져 쌓인 업무를 건드릴 수조차 없는 날이 반복된다. 하지만 교육부는 낮은 출생률 운운하면서 교사 수를 계속 줄이고만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괴로운 담임 교사들이 병 휴직을 내도 기간제 교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누적된 불만과 교육 현장 개선의 교사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교원 임용 TO는 대폭 줄 예정이다. 결국 정부는 돈은 쓰기 싫고 아무런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같다. 교사들은 말을 잘 들으니까, 20만 명 넘게 모이는 집회에서도 청소 잘했다고 경찰한테 칭찬받았다고 으쓱해하니까, 대충 학생인권이랑 싸움 붙이고 학대해도 괜찮은 사람 만들어 주는 걸로 권리를 보호해 주는 척하며 예산과 노력은 들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학교 노동자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학교 노동자다. 나에게는 인권이 있고 노동하는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교사는 성직자가 아닌 노동자다. 성직자는 성당에 있고, 절에 있고, 교회에 있다. 나는 월급을 받고 (비록 기간제이지만) 일을 하러 학교에 간다.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나는 노동자로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부는, 정부는 학생을 적으로 돌리는 이상한 말과 대책 말고 학교의 주체들이 모두 평화롭고 안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집 | 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 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 교사들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내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글
현유림
초등 교사이자 노동자
나는 기간제 교사다. 학교에서의 일이 3년 차이지만, 이제서야 한 호봉을 인정받은 기간제 초등 교사다. 임용 시험 공부를 하고 있지만 언제 정교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비정규직 교사로 지내고 있는 나에게는 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어떤 입장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에서 꼭 이야기되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교권’이라는 말이 불편하다. 정부에서 교권 보호를 명분으로 학생인권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며 이제는 더 이상 학생인권의 반댓말로 교권이 쓰이게 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긴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보고 겪은 것은, 많은 선생님들이 연차와 상관없이 굉장히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사에게 학생을 개인적으로 벌할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사의 노동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과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작년에 담임이 여러 번 바뀐 고학년 교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학생들 대다수는 수업을 듣지 않았고, 반 1/3에 달하는 학생들이 성적인 농담을 일삼으며 낄낄대는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학교 관리자에게 처음으로 어렵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관리자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주변 교사들은 나를 위로한답시고 ‘이래서 애들을 때릴 수 있어야 하는데’라고도 했고,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애들을 못 잡아서 그렇다’라고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매일 자책을 했다. ‘이게 정말 내 탓인 걸까? 이 학교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정말 내가 어리고 물러서이기 때문일까?’ 나는 억울했다. 관리자에게 면담 및 상담으로 불려 가느라 정작 수업 준비하는 시간은 다 빼앗기고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분들이 마련해 주는 대책은 없었다. 잠을 자기 전에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어린이들을 때리지 못하고, 무섭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결국은 동료 교사와 관리자의 말처럼 내가 ‘무능’한 교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괴로운 걸까? 그렇다면 나의 괴로움은 다 내 탓이 되는 거다. 내가 죽거나, 숨을 못 쉬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그냥 내 탓이다.
힘든 학생들로 인해 정말 괴로웠고, 그 학생들을 진심으로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관리자에게서 단지 상담과 조언만이 아닌 다른 방식의 지원을 받고 싶었다. 예를 들면 교감 선생님께서 따로 학생들과 수업을 해 주시거나,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서 교사 혼자 또는 두셋이 팀을 이루어 학습 분위기를 원만히 조성할 수 있는 그런 실질적인 방법들 말이다. 나는 어린이의 인권을 짓밟고 찾는 평화는 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은 학교의 또 다른 취약한 구성원인 저연차 교사 또는 여성 교사, 또 다른 비정규직 교사에게도 폭력으로 돌아올 것이다. 교사에게 어린이를 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사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권리가 아니라 위력이 될 뿐이다.
5년 전, 나는 스쿨 미투의 물결에도 함께 참여했었다. 그때 가해 교사들이 했던 말들이 ‘그건 다 교육 목적이었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이 예뻐서 한 거였다’ 등이었다. 지금 많은 교사들이 주장하는 아동학대 면책과 같은 방법은 교사에게 ‘아동학대를 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아주 이상한 말을 붙이는 것밖에 안 된다. 나는 이 말이 수치스럽다. 내가 계속해서 기간제이든 정규직으로 발령을 받든 어디에서도 ‘아동학대를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2023년 9월 4일 49재 집회 현장 ⓒ 최승훈 기자
학급당 학생 수가 20명만 넘어도 대부분의 교사가 정말 힘들어한다. 점심시간만 지나도 온몸의 진이 다 빠져 쌓인 업무를 건드릴 수조차 없는 날이 반복된다. 하지만 교육부는 낮은 출생률 운운하면서 교사 수를 계속 줄이고만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괴로운 담임 교사들이 병 휴직을 내도 기간제 교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누적된 불만과 교육 현장 개선의 교사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교원 임용 TO는 대폭 줄 예정이다. 결국 정부는 돈은 쓰기 싫고 아무런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같다. 교사들은 말을 잘 들으니까, 20만 명 넘게 모이는 집회에서도 청소 잘했다고 경찰한테 칭찬받았다고 으쓱해하니까, 대충 학생인권이랑 싸움 붙이고 학대해도 괜찮은 사람 만들어 주는 걸로 권리를 보호해 주는 척하며 예산과 노력은 들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학교 노동자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학교 노동자다. 나에게는 인권이 있고 노동하는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교사는 성직자가 아닌 노동자다. 성직자는 성당에 있고, 절에 있고, 교회에 있다. 나는 월급을 받고 (비록 기간제이지만) 일을 하러 학교에 간다.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나는 노동자로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부는, 정부는 학생을 적으로 돌리는 이상한 말과 대책 말고 학교의 주체들이 모두 평화롭고 안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