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호[후속] 교육과 노동 사이, 살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란희, 신운섭

2026-02-12
조회수 272

후속 | 3학년 2학기, 공백과 비틀거림의 시간

 

교육과 노동 사이,

살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영화 〈3학년 2학기〉 이란희 감독 인터뷰

 


날짜 및 장소

2025년 11월 6일, 서울 복합문화공간에무

 

참가

이란희 감독, 신운섭 프로듀서

 

진행·정리

이민정 본지 편집위원, 설원민 본지 기자

 

사진

최승훈 본지 기자

 

 



“살게 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란희 감독이 영화 〈3학년 2학기〉를 기획하게 된 출발점은 전작 〈휴가〉를 상영할 때였다. 당시를 돌아보며, 이 감독은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는 감각을 점점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감각은 특정한 장소나 직업군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기보다,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에 가까웠다. “메인스트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게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어요.” 그 무렵, 이 감독은 〈휴가〉 상영 이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현장실습생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영화 속 한 장면에 대한 유가족의 발언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해고자의 딸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걸 보시고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왜 우리 애를 실업계로 보내서 이렇게 죽게 했을까.’ 이 발언은 단순한 감정 표현으로 들리지 않았어요.”


이 감독은 그 유가족이 구조적인 문제를 모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현장실습 제도의 위험성, 산업 재해의 구조적 원인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관련 활동도 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일 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뒤, 유가족들이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고 했다. 구조적 문제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 모든 책임이 개인의 선택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오래전에 적어 두었던 메모 하나가 떠올랐다고 한다. ‘연소 노동자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문장이었다. 막연한 문제의식으로만 남아 있던 메모였지만, 그 순간 영화의 출발점으로 다시 떠오른 것이다.


“어린데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아이들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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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문제고,

노동 환경이 문제여도,

어쨌든 우리는

삶을 중단할 수

없잖아요.

- 이란희

 

 

처음부터 방향이 분명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과 관련된 기록들을 읽기 시작했고, 여러 보고서와 기사, 증언 들을 검토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반복해서 ‘죽음 이후의 이야기’만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게 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아이들이 영정 사진처럼 액자 속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실제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이 감독이 말하는 ‘살게 되는 이야기’는 희망담이나 성공담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사고 이후가 아니라, 사고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삶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결심 후, 실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쇳밥일지》 등은 그 과정에서 만난 책이었다. 그 속에는 사고나 비극보다도, 일상적인 하루의 리듬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이 감독이 영화로 보여 주고자 한 것은 바로 그런 일상이었다. 비극의 재현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는 삶의 시간.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관심과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관심도 생기고 그다음에 정책 이야기도 나올 수 있잖아요. 현장실습이라는 제도 안에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거예요.”


이 감독은 〈3학년 2학기〉는 현장실습 제도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를 말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분명히 했다. 제도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충분히 존재하지만, 그 논쟁 속에서 정작 제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현재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식은 영화의 결말을 구성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영화는 어떤 해결책이나 반전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은 같은 자리에 머문 채로 계속 살아간다.


“제도가 문제고, 노동 환경이 문제여도, 어쨌든 우리는 삶을 중단할 수 없잖아요.”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 ― 낯섦과 불안

 

〈3학년 2학기〉를 본 관객들은 “조마조마했다”, “계속 불안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불안이 영화의 사건 전개나 연출의 긴장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 ‘공장’이라는 공간 자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공장의 노동 현장은 관객들에게 낯선 장소이며, 그 낯섦은 곧 불안으로 전환된다. 이란희 감독은 이 반응이 단지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우리가 노동을 인식해 온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노동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사전적인 노동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투쟁이나 노동조합과 동의어로 생각해요. 조금 넓히면 블루칼라의 노동 정도까지.”


실제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오랫동안 ‘일상의 경험’이 아니라 ‘사건’이나 ‘문제’로만 호출돼 왔다. 파업, 산재, 투쟁의 이미지 속에서 노동은 늘 비극이나 갈등의 언어로 소비됐고, 그 결과 공장은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위험한 장소’로 각인됐다. 〈3학년 2학기〉를 보는 동안 관객들이 느낀 불안도, 영화 속 장치보다 먼저 작동하는 사회적 기억에서 기인한다. 신운섭 프로듀서(피디) 역시 관객 반응을 보며 같은 지점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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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불안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어요. 그런데 굉장히 불안하게 보세요.(……)

유독 불안해하시는 분들을 보면 이쪽 현장(공장)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 신운섭

 

 

“영화를 보면서 불안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어요. 그런데 굉장히 불안하게 보세요. 유독 불안해하시는 분들을 보면 이쪽 현장(공장)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그는 공장이 일상에 포함된 사람들에게는 그 풍경이 특별한 긴장으로 읽히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기계 소리, 야근하는 불빛, 반복되는 작업의 리듬은 누군가에게는 매일의 배경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언제든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 된다. 같은 공간이 전혀 다른 감각으로 읽히는 것이다. 이 감독도 이 차이가 ‘현장 위험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 의학 드라마의 수술 장면보다 더 마음을 졸이면서 봤을 거예요. 그건(수술 장면은) 너무 익숙하잖아요.”


수술실은 피와 칼, 생사의 경계가 오가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이미 수없이 소비된 장면이다. 반면 공장은 그렇지 않다. 익숙하지 않기에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더 위험해 보인다. 그래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영화에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농담하는 일상의 장면을 여러 차례 배치했다고 한다. 공장을 ‘사고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다시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장면들이 쌓이며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노동 현장을 얼마나 제한된 이미지로만 상상해 왔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 제한된 상상은, 교육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고3’이라는 말이 호출하는 얼굴들 속에, 공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열아홉 살은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은 정말 현장이 위험해서인가, 아니면 그 현장이 우리에게 너무 오래 낯설게 남아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이 질문은 곧, 교육이 무엇을 가르쳐 왔고 무엇을 가르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정말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3학년 2학기〉 가 던지는 질문은 노동 현장에서 시작되지만, 교육에 닿아 있다. 이란희 감독은 교육이 전제하고 있는 한 문장과 불화한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문장이 희망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다수의 삶을 설명하지 못하는 언어라는 점이다. 한번은 인천에서 열린 교사 연수에서 상영 후 이 고민을 꺼냈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되게 다양한 계급의 아이들을 만나는데, 늘 ‘노력(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게 어차피 퍼센티지가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성공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이. 그럼 성공하지 못할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을 텐데, 정작 그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학교에서 하지 않더라고요.”


이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진단에 가깝다. 대학 입시처럼 성공이 상대적 순위로 정의되는 이상,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교육은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다’며 학생들을 몰아세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그렇다면 성공하지 못하는 다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교육의 테이블 위에 오르지 않는다.


“그러면 걔들은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어렸을 때부터 뭔가 속근육을 키워 주는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속근육’은 성취의 기술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 이후의 삶을 견디는 감각일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구조적으로 이 감각을 가르칠 수 없다. 교사들은 성공을 향한 경로를 설명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 경로에서 벗어났을 때의 삶, 성취하지 못했을 때의 삶, 실패 이후의 삶, 혹은 애초에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해나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감독의 문제의식에 대한 교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매우 끄덕끄덕하시긴 하는데, ‘이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라는 표정을 지으시더라고요.”


이 감독은 비슷한 자리에서 같은 반응을 반복해서 목격했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교육은 선택과 배제의 구조를 갖는다. 크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이동하는 과정마다 솎기를 반복하고 “솎아 내진 아이들” 발생한다. 그 과정은 자연스러운 선별처럼 여겨진다. 이 감독은 교사들과의 대화를 거치며, 이 문제가 단지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절대 다수가 톱(top)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삶을 살 거잖아요. 그런데 교육은 계속 ‘톱으로 올라갈 수 있어, 노력해 봐’ 이러고 있는 거고. 그런데 톱으로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런 교육을 받았으니까 내가 되게 별거 아닌 사람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거죠.”


이 인식은 곧 노동의 문제로 연결된다. ‘톱’으로 오르지 못한 삶이 반복되면서 ‘별거 아닌 삶’으로 학습될 때, 그다음에 놓이는 일자리와 노동 조건의 열악함 역시 쉽게 정당화된다. 다칠 수 있는 곳,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로 밀려나는 과정은 현재의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교육이 실패 이후의 삶을 가르치지 않는 순간, 그 삶은 보호받지 못하는 영역으로 점점 이동한다.


 

“성공하지 못한 삶도 가르쳐야 한다”

 

이란희 감독이 학교에서 연극 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한 학생이 “유재석 같은 개그맨이 되고 싶다”라고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학생에게 이 감독은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한다.


“너는 유재석처럼 되지 못할 확률이 더 커. 그런데 넌 개그맨이 되고 싶은 거잖아? 그러면 유재석처럼 유명하지 않아도 네가 개그맨으로서 행복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돼.”


이 말은 꿈을 꺾기 위한 조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결말만을 상정해 온 교육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다른 쪽으로 틀어 보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문제는 많은 경우, 교육이 이 두 번째 질문을 아예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게 필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성공하면 가장 좋지만, 그렇다고 성공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어요. 성공하지 못했다고 온 평생을 벌받듯이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치 판단이 아니다. 교육은 구조적으로 다수가 ‘톱’에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학생들은 실패를 경험했을 때, 실패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감각을 배우지 못한 채 사회로 나가게 된다.


영화가 포착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주인공 창우와 그의 친구들은 특별히 큰 꿈을 꾸지 않는다. 대신 하루의 노동 속에서, 아주 작은 변화와 성취를 경험한다. 공구 하나를 새로 다룰 수 있게 되고, 작업 속도가 조금 빨라지고, 그렇게 제 몫을 하며 칭찬도 듣게 된다. 이 감각은 학교에서는 거의 받지 못했던 경험일 수 있다. 이 감독은 현장실습을 취재하며 만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가서 뭐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하면 뭔가 늘잖아요. 어쨌든 그렇게 느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있더라고요. 그게 마치 창우의 모습과 같은 거였거든요.”


물론 이 성취가 ‘현장실습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중요한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지금의 교육이 제공하지 못한 감각을 노동 현장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는 실패로 분류됐던 아이들이, 다른 공간에서는 처음으로 ‘할 수 있음’을 체감하는 역설. 이 장면은 교육이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가르치지 않았는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


“그 친구들이 학교에서는 그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은 좀 들죠.”


교육이 성공을 향한 사다리만을 제시할 때, 사다리를 오르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잃는다. 이 감독이 말하는 “성공하지 못한 삶도 가르쳐야 한다”는 명제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최소한의 요청에 가깝다. 성공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공하지 않았을 때도 삶은 계속되고, 그 삶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자는 제안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설계된 조기 취업

 

현장실습은 제도적으로는 ‘교육과정’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 감독이 취재 과정에서 반복해서 확인한 것은, 이 제도가 실제로는 교육의 논리가 아니라 고용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가 봤을 땐, 조기 취업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아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유럽의 한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네 영화는 좀 이상하다. 어떻게 학교에서 학생들 취업 알선을 하느냐. 학교는 취업을 알선하는 곳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해서 약간 좀 불쾌했어요.”


이 한 문장은 현장실습을 둘러싼 현실을 가장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실습생들은 학생의 신분으로 현장에 들어가지만, 현장에서 요구받는 역할은 명확히 ‘노동자’다. 교육을 전제로 한 체험이라기보다, 노동력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가깝다. 물론 제도는 교육을 표방한다. 현장실습을 앞두고 업체 신청을 받고, 노무사가 파견돼 기업을 점검하며, 학교와 업체가 함께 커리큘럼을 짠다. 그렇게 만들어진 커리큘럼을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현장실습을 보낼 때 매뉴얼이 있어요. 업체 신청을 받고, 교육부에서 노무사를 파견해서 괜찮은 기업인지 확인하고, 학교랑 업체가 공동 커리큘럼을 짜요. 실습 1주 차, 2주 차, 3주 차 이렇게요. 그런데 실습이 시작되면 그 커리큘럼은 완전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제가 취재한 학생들 중에 그 커리큘럼에 뭐가 써 있었는지 기억하는 애들이 거의 없었어요.”


교육의 이름으로 설계된 장치들이 현장에 들어서는 순간 기능을 멈춘다는 점에서, 현장실습은 ‘교육 과정의 연장’이라기보다 ‘고용 이전 단계’에 더 가깝다. 이때 학생들은 교육의 보호도, 노동자의 권리도 온전히 갖지 못한 채 현장에 놓인다. 현장 관리 방식 역시 이 구조를 강화한다. 신운섭 피디는 취재 과정에서 들었던 한 공장 관계자의 말을 떠올린다.


“그런(위험한) 건 다 바깥에서 해서 가지고 와요. 그래서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아요.”


위험한 작업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다른 업체에서 하기 때문에 자신의 공장은 안전하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전’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작업을 외부로 밀어내는 구조다. 위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동한다. 공장 내부에서는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위험한 작업은 하청과 외주, 다른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실습생들은 그 구조 안에서 ‘보호 대상’이기보다는, 비교적 값싸고 교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배치된다.


이란희 감독은 이 과정을 두고, 교육이라는 말이 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노동 조건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실습이라는 말은 임금, 안전, 책임의 문제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 결과 현장실습은 교육도, 온전한 취업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유지된다.


물론 영화는 제도의 존폐를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 감독 역시 영화가 특정한 정책적 결론을 내리기 위한 작업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제도 안에 이미 학생들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올해 3학년 2학기가 되면 다시 출근하고, 일하고, 다치고, 버텨 갈 것이다.


현장실습을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혹은 조기 취업이라고 불러야 하는가는 단순한 용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아이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학생으로서 보호할 것인가,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할 것인가. 영화는 그 질문을 미루지 않고, 현장의 시간 속으로 직접 데려간다.


 

이 또한 ‘성장’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3학년 2학기〉에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인물도, 제도를 바꾸는 결정적 행동도 없다. 대신 영화는 현장에 익숙해져 가는 주인공 창우의 변화를 따라간다. 창우 옆에는 감독이 “가장 바람직한 성장을 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성민이 있다.


“나름 굉장히 바람직한 성장을 한 인물이 아마 성민일 건데, 성민이는 사실 취재를 통해서 얻은 캐릭터는 아니에요. 특성화고노조에 가서 현장실습생 얘기로 영화를 만들 건데, 당신들이 꼭 넣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는 걸 담아 달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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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희 감독(우)과 신운섭 피디(좌)



성민은 처음부터 문제의식을 갖춘 주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에 빠르게 적응한 노동자에 가깝다. 위험한 작업 앞에서도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태도를 내면화하고, 현장의 규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태도는 무책임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 속에서 학습된 생존 방식에 가깝다. 성민의 변화는 단일한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수호의 산재 사고는 그에게 처음으로 ‘관계된 책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수호가 위험한 작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냥 익숙한 노동자들처럼 ‘말해 봤자 소용없다’고 넘겼던 순간들, 그런 태도들이 쌓여서 수호가 죽었을 거라는 어떤 책임감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이 책임감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성민은 계속 출근하고, 야근을 할 준비도 되어 있다. 영화는 이 지점을 서둘러 판단하지 않는다. 성민은 현장을 떠날 준비도, 맞설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는 또 다른 사고, 창우의 부상이다.


창우가 다친 뒤, 성민은 응급 처치를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시간을 겪는다. 그러다 교육청에서 파견된 노무사가 현장을 점검하러 온 날, 집에서 쉬고 있던 다친 창우를 불러 일을 시키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순간 성민은 처음으로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노무사에게 그 상황을 알린다. 하지만 그 선택 이후의 시간을 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얘는 열아홉이잖아요. 아무리 성숙해 보이게 연출해도 열아홉이잖아요. 그걸로 회사랑 싸우고 어른들 얼굴 보고 불편한 감정으로 계속 현장에 있을 자신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짐 싸서 도망가는 거죠. 멋있게 그만두는 게 아니라, 사실은 도망간 거예요.”


성민은 투사가 되지 못했고,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패 역시 중요한 성장의 일부다. 그는 처음으로 책임을 인식했고, 그 책임을 말로 옮겼으며, 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한 채 현장을 떠났다. 이 모든 과정은 완결된 서사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성민이 아니라 창우다.


“만약 성민이가 주인공이었으면 관객들이 그렇게 공감하면서 보지 않았을 거예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사람이니까요. ‘난 현장에서 저렇게 못 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창우는 성민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 일을 ‘겪은 사람’으로 남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창우가 지게차를 운전하는 모습은, 그가 곧 성민처럼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도, 희망의 선언도 아니다. 다만 이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선택의 예고에 가깝다. 〈3학년 2학기〉가 그리는 성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끝까지 싸우지 못해도, 영웅이 되지 못해도, 어떤 순간에 책임을 인식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 영화는 그것 역시 성장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보여 주지 않은 이유

 

영화에는 결정적인 장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추락의 순간도, 사고의 현장도, 관과 묘지도 화면에 담기지 않는다. 산업 재해를 다루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죽음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끝내 선택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연출상의 절제가 아니라, 감독의 윤리적 판단이라고 했다.


“수호가 죽었잖아요. 그런데 수호가 추락하는 장면도 안 보여 줬고, 관도 묘도 안 보여 줬어요.”


이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사고의 충격을 극대화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사회는 수없이 많은 산재 이미지와 비극적 서사를 소비해 왔다. 문제는 더 잔혹한 장면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어떤 삶에서 비롯됐는지,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였다. 죽음을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무게를 관객의 현재로 끌어오려고 했다. 그래서 영화는 죽음 이후의 장면 대신, 살아남은 사람의 시간을 따라간다. 상갓집을 다녀온 뒤, 창우가 혼자 기타를 치는 장면이 그러하다.


“창우는 감정 표현을 안 한다기보다 자기감정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죽음, 현장실습에서의 경험, 그리고 자신이 처한 현실까지. 감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에 이름 붙일 언어는 아직 없는 거죠. 기타 연주는 그 언어의 공백을 채우는 유일한 통로일 수도 있어요.”


말하지 못할 감정이 손끝으로 흘러나오는 시간, 그 장면을 뒷모습으로만 처리한 이유는 분명했다.


“왜 뒷모습이냐면, 수호가 죽었잖아요. 그런데 수호가 추락하는 장면도 안 보여 줬고 관도 묘도 안 보여 줬어요. 그렇다면 수호의 죽음을 조금 더 표현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주인공이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게 해서, 사람들이 창우가 아니라 수호를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이 선택에는 유가족에 대한 고민도 포함돼 있었다.


“유가족분들 입장에서는 죽는 장면이 나오면 그건 정말 못할 짓인 거잖아요. 동시에, 죽음을 전혀 다루지 않는 것 역시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들이 기억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고 순간’이 아니라 ‘일하고 돌아와 파스를 붙이고 자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다루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거예요.”


 

“이런 고3도 떠올리면 좋겠다”

 

〈3학년 2학기〉가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해법이나 대안이 아니다. 이 영화는 현장실습 제도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교육 정책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너무 쉽게 생략해 온 얼굴 하나를 사회의 시야 한가운데로 데려온다. 학교 안에서 성공을 준비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실패의 서사로도 환원되지 않는 얼굴. 이미 노동하고 있고, 이미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고3의 얼굴이다.


이 영화가 반복해서 거부하는 것은 ‘약속된 희망’이다. 열심히 하면 달라질 것이라는 서사, 견디면 보상받을 것이라는 메시지, 제도가 곧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남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 내는 청소년의 시간이다. 완전히 숙련되지도, 완전히 좌절하지도 않은 상태로 하루를 버티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성장이나 비극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교육이 성공만을 전제할 때, 노동은 늘 실패의 결과처럼 배치되어 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순서를 뒤집는다. 이미 일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의 삶은 지금 이 사회에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게 한다. 교육은, 정책은 그 다음에야 질문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삶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끝내 가르치지 않을 것인가.


이란희 감독이 말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영향력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고3’을 떠올릴 때, 늘 같은 이미지만을 호출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고3을 떠올릴 때, 이런 고3은 잘 안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런 고3도 떠올리면 좋겠어요. 그게 제가 이 영화를 통해서 바라는 최소한의 사회적 영향력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최소한의 영향력’은 정책의 언어보다 먼저,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말을 꺼내는지에서 감지된다. 〈3학년 2학기〉의 상영 현장에서는 의미를 해석하는 질문보다, 그동안 말해 본 적 없던 자기 삶을 꺼내 놓는 증언이 먼저 나온다. 영화가 호출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래 비워 두었던 ‘삶의 모습’과 그 삶에 대한 공적 발화의 가능성이었다.

 


‘자기 서사’를 꺼내는 관객들

 

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방식에는 보통 일정한 관성이 있다. 의미를 묻고, 상징을 해석하고, 감독의 의도를 확인하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3학년 2학기〉 상영 현장에서는 그 관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관객들은 의미를 묻지 않고 자신의 서사를 풀어 냈다.


“우리 상영 현장에서는 ‘제가 저런 곳에서 일을 했어요. 그 시절 저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많아요. 한 번도 다뤄지지 않는 자신의 서사를 영화에서 다뤄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들이죠.”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본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애가요. 저한테 계속 저게 그라인더다, 저건 뭐 하는 거다, 저 용접할 때 뭘 어떻게 해야 된다, 이런 걸 자꾸 설명해요.”


아들에게 영화는 자신의 언어로 설명 가능한 세계였다. 공구 이름과 사용법, 위험을 피하는 방법까지 안다는 자부심이 화면 밖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된다. 이 감독은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골랐다.


“잘 모르겠어요. 약간 자랑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웃음)”


그 ‘자랑’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염려와, 그 속에서도 무언가를 익혀 가는 아이에 대한 자부심이 겹쳐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반응의 핵심은 ‘공장’이라는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자기 삶의 중심이었고 그 삶이 그동안 공적인 언어로 잘 다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다뤄지지 않는 자신의 서사”를 대신 꺼내 준 순간, 관객은 질문자가 아니라 증언자가 된다. 이때 관객의 말은 감상에 머물지 않고, 존재의 확인으로 확장된다.


상영 공간이 달라지면 관객의 마음도 달라진다. 신운섭 피디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한 노동조합에서 인근 특성화고 학생들을 초대해 함께 본 상영회였다. 당일 그 노동조합 간부의 짧은 소감은,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방식이 ‘설득’이 아니라 ‘사과’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는 영화 속 창우를 보며 “너무 잘 헤쳐 나가고 있다”며 곧바로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여러분들, 미안하다. 내가 한 30년 살아 봤는데, 현장에 있어 봤는데 노동 현장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여러분, 이거 내가 미안하다. 선배로서 어른으로서 아버지로서 미안하다.’ 영화가 그려낸 ‘첫 노동’의 현실을 더 오래 살아온 사람이 ‘미안함’으로 받아안은 순간, 학생들은 그 말을 훈계가 아니라 인정으로 받아들이는것 같았어요.”


그다음에 벌어진 상황은, 상영이 사회적 접점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학생들이 노조 조끼 입은 아저씨들한테 가서 막 사진 찍어요. 애들이 ‘여기 취업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용접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런 얘기를 막 물어보더라고요.”


그는 이런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영화가 끝난 뒤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되는 것, 다른 세계를 ‘정보’가 아니라 ‘사람’으로 만나 보게 되는 것. 또 이런 상영을 통해 “시민사회와 학교, 청소년들이 영화를 같이 보게끔” 만들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가 단번에 구조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리, 그 자리가 생겨 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화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라고.

 


“흡연 예방 교육처럼 자요”

 

상영 환경은 단순한 조건이 아니라, 관객의 감각 자체를 규정하는 요소다. 신운섭 피디는 “자꾸만 학교에서 (영화를) 보겠다고 그러는데 그게 재미있겠어요?”라고 말하며, 학교 시청의 한계를 지적한다. 극장이 ‘별천지’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스크린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낯선 사람들과 같은 장면을 함께 보고, 웃고, 숨을 삼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 그 공동의 시간 속에서 영화는 정보가 아니라 사건이 된다. 반대로 학교에서의 시청은 ‘교육 콘텐츠’로 편입되면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이미 정답이 정해진 과제로 변질되기 쉽다. 같은 영상이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사건이 되는 이유다. 이란희 감독은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


“학교에서 보면, 애들 다 흡연 예방 교육처럼 자요.”

 

 


* 〈3학년 2학기〉 상영 문의 - 작업장 봄, @studio_bom22, truths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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