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기도하는, 공경하는, 사랑하는
윤상혁 ysh2084@hanmail.net
본지 편집자문위원,
서울 영림중 교장

서정홍 씀,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교육공동체 벗, 2025
기도하는 마음
“흙에서 길어 올린 농부 시인의 사유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정홍 산문집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를 읽었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오늘처럼 살맛 나는 날은 처음이오’, 2부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 3부는 ‘세상이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 4부는 ‘마지막 유언’이다.
농부 시인은 어떤 인연으로 숲이 우거진 고즈넉한 수련원에서 혼인 주례를 서게 되었다. 혼인을 올리는 신랑이 자신과 같은 산골 농부인 데다가 신부도 앞으로 농사지으며 산다는 말에 흔쾌히 승낙했다. 주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한 신랑, 신부가, 이 시대 ‘성직’인 농부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예식장에 작은 소동이 났다. ‘하찮은 농사꾼’을 이 시대 성직이라고 우러러보는 말에 결혼 예식에 참석한 나이 든 산골 농부들이 감동한 것이다. 어떤 농부는 “오늘처럼 살맛 나는 날은 처음”이라고까지 말했단다. 왜 그랬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농사(農事 혹은 農士)의 길을 걷는 이들의 심정을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는 사람, 사소한 것에도 감사의 마음을 갖는 사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 그가 바로 농부이겠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고 자식 키우듯이 물을 주고 정성껏 가꾸다 보면 농부 마음을 느끼게 되고, 느끼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면 물과 햇볕과 지렁이와 같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고, 고마운 마음이 들면 머리가 숙여지고, 머리가 숙여지면 ‘사람 마음’을 되찾게 되고
- 본문 63쪽
저자는 문득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란 것을 깨닫고 ‘농부’가 되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고 믿으며 ‘시인’이 되었다. 그는 ‘봄날샘’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교사’이기도 하다. 경상남도 합천군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열매지기공동체’와 청소년과 함께하는 ‘담쟁이인문학교’를 열어 가르침과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 책에도 인용되고 있는 그의 가르침 중에 ‘선택은 네 몫이 아니라 내 몫이라’가 기억에 남는다. 특히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학교/언론/종교/정치/나라가 좋은 학교/언론/종교/정치/나라”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집을 마련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자동차를 사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사업 잘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자식을 대학에 붙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승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 본문 89쪽
그들과 달리 농부 시인은 배제된 이들, 탈락한 자들을 떠올린다. 힘차게 솟아오르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는 누런 잎들을 떠올린다.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누가 기도하지? 길거리에서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마셔야만 하는 존재들을 위해서는 누가 기도하지? 파산 위기에 몰린 사람을 위해서는? 대학에 붙지 못한 학생을 위해서는? 취직하지 못한 청년은? 결국 스스로 가난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교육자/언론인/목회자/정치인이 되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다는 것이 농부 시인의 지론이다.
그런데 그게 그들만의 문제랴. 교육과 미디어, 종교와 정치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후 위기와 재난, 농촌을 비롯한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는 지금, 지구 위에 거주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은 가난한 시인의 마음이다. 서로를 북돋는 농부의 기도다.
공경하는 마음
농부 시인에게는 자신을 ‘봄날샘’이라고 부르는 청년 농부들이 있다. 청년 농부 서와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반’을 이끌어가는 반장이다. 청년 농부 수연은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봄날샘에게 〈청춘 예찬〉이라는 노래를 불러 준다.
다시 길을 잃어도 나는 두렵지 않아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갈 거야
다른 누군가를 따라가지 않을래
나만의 길을 찾아 갈 거야
정해진 길로만 다니지는 않을래
나의 길을 찾아 갈 거야
- 수연, 〈청춘 예찬〉 중
청년 농부들에게 봄날샘 서정홍은 밤하늘의 별이다.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기후 위기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날씨에 밭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에도 봄날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별문제 아니라는 듯이 밭에 나와 부지런히 괭이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을 공경하는 마음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봄날샘에게 밤하늘의 별은 아내다. 바쁜 농사철 꼭두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밭을 매다가 밥 먹을 힘도 없어 자리에 누워버린 아내를 보다가 문득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평생 밥 짓고, 빨래하고, 애들 뒷바라지하고,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내 발을 처음 주물러 주게 된 것이다. 40년 넘도록 한 이불 덮고 살면서 한 번도 아내 발을 주물러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동안 생명이니 평등이니 어쩌고저쩌고 떠들며 돌아다닌 내가 참 부끄러웠습니다.”(본문 131쪽)
이제 봄날샘의 시선은 남자라는 이름으로 용납되는 불평등한 현실로 이어진다. ‘유모차(乳母車)’를 ‘아기차’라고 하면 안 될까? ‘남녀’를 ‘여남’으로 하면 안 될까? 처가는 그냥 ‘처가’라 하는데 왜 시가는 ‘시댁’이라 하는가? 남성을 우월하게 만드는 말들의 감옥을 부수고 나오면서 이러한 현실을 당연한 듯 긴긴 세월 살아 내신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께 머리 숙인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 가지 않고
이상을 잃게 될 때 비로소 늙어 간다.
- 사무엘 울만, 〈청춘〉 중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와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이것은 단지 청춘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온 자를 먼저 온 자보다 더욱 귀히 여기고 환대하는 교사의 감수성이다. 봄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과 제자를 기다리는 교사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
농부 시인이 흙 속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문장들 속에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번은 전북 진안 진성중학교, 전교생이 고작 9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강연 시간에 말하지 못한 날씨와 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슬기로운 이웃집 할머니와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사람을 실리는 것은 대통령이나 판검사가 아니라 흙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농촌에서 흙을 밟고 살아가는 진성중학교 현수야, 단우야, 수빈아, 난연아, 범준아, 수연아, 현아야, 도현아, 동현아! 작은 학교, 작은 농촌에 산다고 기죽지 말자. 가슴 펴고 당당하게 살자. 만물을 살리는 흙이 너희들 곁에 있으니.
- 본문 236쪽
20년 가까이 학생이 한 명도 없는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 경남 창원 합포여자중학교 교사 3명이 학생 20명을 데리고 ‘문학기행’을 온 사례도 등장한다.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너무 맑고 좋았다는 아이, 햇볕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는 아이, 태어나서 논에 처음 들어와 봤는데 어쩐지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느낌이 부드럽다는 아이, 낮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감을 따는 아이, 혼자 개울에 앉아 말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아이, 슬며시 농부 시인 곁으로 다가와 구절초 한 송이 주고 가는 아이,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 “봄날샘, 제 손 한 번만 잡아 주세요. 요즘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아서요. 농사짓는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이라 했잖아요. 그 손으로 제 손을 잡아 주면 힘이 날 것 같아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본문 254쪽) 중학생이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다는 것도 놀랍지만 농사짓는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이라 믿는 것은 더욱 놀랍다. 아직 희망이 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농부 시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교육과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교사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교사와 농부는 동지이다. 동지일 수밖에 없다. “교사는 학교에서, 농부는 들녘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니까 말이다. 물론 미래가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 대한 환상도 금물이다. ‘미래’라는 수식어로 아이들의 조악한 ‘현실’을 가려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농촌’과 ‘마을’, ‘자연’과 ‘생태’에 대한 과대 포장도 경계해야 한다. 농촌은 잠시 쉬었다 가는 여가 상품이 아니다. 농촌공동체에 청소년과 청년이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미래 세대가 없이 어떻게 미래가 가능하겠는가.
“봄날샘, 제가 94년 개띠니까 올해 서른한 살이잖아요. 농사짓고 산 지 어느덧 10년이나 됐더라고요. 농사짓다 보니까 기후 위기가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절벽 끝에 서 있는 듯 아주 위태롭게 말이에요. 한 해 한 해가 크게 달라요. 농부들의 일터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어요. 저는 다만 다음 해에도 씨앗에 싹을 틔우고, 새싹을 기다리고, 마침내 세상에 고개를 내민 연둣빛 생명을 돌보고 싶어요.”
- 본문 285쪽
청년 농부 서와의 고백은 위태롭지만 아직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가난과 자연을 벗 삼아 온갖 기쁨과 희망, 때론 고단함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산골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웃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열매지기공동체 청년 농부들이 있기 때문이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청년들과 함께 희망을 일구는 담쟁이인문학교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2026년을 응원하면서 동시에 내가 속한 영림중학교를 생각한다. 위태롭지만 아직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을 떠올린다. 꼬마 농부반과 동물 사랑반, 기후 행동 동아리 그린 루리와 사회적협동조합 여물점 그리고 ‘태양과 물과 바람의 학교’까지. 사람 옆에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봄날샘이 전하는 소중한 메시지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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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분들이나 청소년들은 월 회비 납부를 조정하거나 유예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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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기도하는, 공경하는, 사랑하는
윤상혁 ysh2084@hanmail.net
본지 편집자문위원,
서울 영림중 교장
서정홍 씀,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교육공동체 벗, 2025
기도하는 마음
“흙에서 길어 올린 농부 시인의 사유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정홍 산문집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를 읽었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오늘처럼 살맛 나는 날은 처음이오’, 2부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 3부는 ‘세상이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 4부는 ‘마지막 유언’이다.
농부 시인은 어떤 인연으로 숲이 우거진 고즈넉한 수련원에서 혼인 주례를 서게 되었다. 혼인을 올리는 신랑이 자신과 같은 산골 농부인 데다가 신부도 앞으로 농사지으며 산다는 말에 흔쾌히 승낙했다. 주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한 신랑, 신부가, 이 시대 ‘성직’인 농부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예식장에 작은 소동이 났다. ‘하찮은 농사꾼’을 이 시대 성직이라고 우러러보는 말에 결혼 예식에 참석한 나이 든 산골 농부들이 감동한 것이다. 어떤 농부는 “오늘처럼 살맛 나는 날은 처음”이라고까지 말했단다. 왜 그랬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농사(農事 혹은 農士)의 길을 걷는 이들의 심정을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는 사람, 사소한 것에도 감사의 마음을 갖는 사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 그가 바로 농부이겠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고 자식 키우듯이 물을 주고 정성껏 가꾸다 보면 농부 마음을 느끼게 되고, 느끼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면 물과 햇볕과 지렁이와 같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고, 고마운 마음이 들면 머리가 숙여지고, 머리가 숙여지면 ‘사람 마음’을 되찾게 되고
- 본문 63쪽
저자는 문득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란 것을 깨닫고 ‘농부’가 되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고 믿으며 ‘시인’이 되었다. 그는 ‘봄날샘’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교사’이기도 하다. 경상남도 합천군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열매지기공동체’와 청소년과 함께하는 ‘담쟁이인문학교’를 열어 가르침과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 책에도 인용되고 있는 그의 가르침 중에 ‘선택은 네 몫이 아니라 내 몫이라’가 기억에 남는다. 특히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학교/언론/종교/정치/나라가 좋은 학교/언론/종교/정치/나라”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집을 마련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자동차를 사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사업 잘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자식을 대학에 붙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승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 본문 89쪽
그들과 달리 농부 시인은 배제된 이들, 탈락한 자들을 떠올린다. 힘차게 솟아오르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는 누런 잎들을 떠올린다.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누가 기도하지? 길거리에서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마셔야만 하는 존재들을 위해서는 누가 기도하지? 파산 위기에 몰린 사람을 위해서는? 대학에 붙지 못한 학생을 위해서는? 취직하지 못한 청년은? 결국 스스로 가난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교육자/언론인/목회자/정치인이 되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다는 것이 농부 시인의 지론이다.
그런데 그게 그들만의 문제랴. 교육과 미디어, 종교와 정치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후 위기와 재난, 농촌을 비롯한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는 지금, 지구 위에 거주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은 가난한 시인의 마음이다. 서로를 북돋는 농부의 기도다.
공경하는 마음
농부 시인에게는 자신을 ‘봄날샘’이라고 부르는 청년 농부들이 있다. 청년 농부 서와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반’을 이끌어가는 반장이다. 청년 농부 수연은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봄날샘에게 〈청춘 예찬〉이라는 노래를 불러 준다.
다시 길을 잃어도 나는 두렵지 않아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갈 거야
다른 누군가를 따라가지 않을래
나만의 길을 찾아 갈 거야
정해진 길로만 다니지는 않을래
나의 길을 찾아 갈 거야
- 수연, 〈청춘 예찬〉 중
청년 농부들에게 봄날샘 서정홍은 밤하늘의 별이다.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기후 위기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날씨에 밭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에도 봄날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별문제 아니라는 듯이 밭에 나와 부지런히 괭이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을 공경하는 마음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봄날샘에게 밤하늘의 별은 아내다. 바쁜 농사철 꼭두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밭을 매다가 밥 먹을 힘도 없어 자리에 누워버린 아내를 보다가 문득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평생 밥 짓고, 빨래하고, 애들 뒷바라지하고,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내 발을 처음 주물러 주게 된 것이다. 40년 넘도록 한 이불 덮고 살면서 한 번도 아내 발을 주물러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동안 생명이니 평등이니 어쩌고저쩌고 떠들며 돌아다닌 내가 참 부끄러웠습니다.”(본문 131쪽)
이제 봄날샘의 시선은 남자라는 이름으로 용납되는 불평등한 현실로 이어진다. ‘유모차(乳母車)’를 ‘아기차’라고 하면 안 될까? ‘남녀’를 ‘여남’으로 하면 안 될까? 처가는 그냥 ‘처가’라 하는데 왜 시가는 ‘시댁’이라 하는가? 남성을 우월하게 만드는 말들의 감옥을 부수고 나오면서 이러한 현실을 당연한 듯 긴긴 세월 살아 내신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께 머리 숙인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 가지 않고
이상을 잃게 될 때 비로소 늙어 간다.
- 사무엘 울만, 〈청춘〉 중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와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이것은 단지 청춘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온 자를 먼저 온 자보다 더욱 귀히 여기고 환대하는 교사의 감수성이다. 봄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과 제자를 기다리는 교사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
농부 시인이 흙 속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문장들 속에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번은 전북 진안 진성중학교, 전교생이 고작 9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강연 시간에 말하지 못한 날씨와 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슬기로운 이웃집 할머니와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사람을 실리는 것은 대통령이나 판검사가 아니라 흙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농촌에서 흙을 밟고 살아가는 진성중학교 현수야, 단우야, 수빈아, 난연아, 범준아, 수연아, 현아야, 도현아, 동현아! 작은 학교, 작은 농촌에 산다고 기죽지 말자. 가슴 펴고 당당하게 살자. 만물을 살리는 흙이 너희들 곁에 있으니.
- 본문 236쪽
20년 가까이 학생이 한 명도 없는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에 경남 창원 합포여자중학교 교사 3명이 학생 20명을 데리고 ‘문학기행’을 온 사례도 등장한다.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너무 맑고 좋았다는 아이, 햇볕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는 아이, 태어나서 논에 처음 들어와 봤는데 어쩐지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느낌이 부드럽다는 아이, 낮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감을 따는 아이, 혼자 개울에 앉아 말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아이, 슬며시 농부 시인 곁으로 다가와 구절초 한 송이 주고 가는 아이,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 “봄날샘, 제 손 한 번만 잡아 주세요. 요즘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아서요. 농사짓는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이라 했잖아요. 그 손으로 제 손을 잡아 주면 힘이 날 것 같아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본문 254쪽) 중학생이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다는 것도 놀랍지만 농사짓는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이라 믿는 것은 더욱 놀랍다. 아직 희망이 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농부 시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교육과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교사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교사와 농부는 동지이다. 동지일 수밖에 없다. “교사는 학교에서, 농부는 들녘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니까 말이다. 물론 미래가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 대한 환상도 금물이다. ‘미래’라는 수식어로 아이들의 조악한 ‘현실’을 가려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농촌’과 ‘마을’, ‘자연’과 ‘생태’에 대한 과대 포장도 경계해야 한다. 농촌은 잠시 쉬었다 가는 여가 상품이 아니다. 농촌공동체에 청소년과 청년이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미래 세대가 없이 어떻게 미래가 가능하겠는가.
“봄날샘, 제가 94년 개띠니까 올해 서른한 살이잖아요. 농사짓고 산 지 어느덧 10년이나 됐더라고요. 농사짓다 보니까 기후 위기가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절벽 끝에 서 있는 듯 아주 위태롭게 말이에요. 한 해 한 해가 크게 달라요. 농부들의 일터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어요. 저는 다만 다음 해에도 씨앗에 싹을 틔우고, 새싹을 기다리고, 마침내 세상에 고개를 내민 연둣빛 생명을 돌보고 싶어요.”
- 본문 285쪽
청년 농부 서와의 고백은 위태롭지만 아직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가난과 자연을 벗 삼아 온갖 기쁨과 희망, 때론 고단함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산골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웃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열매지기공동체 청년 농부들이 있기 때문이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청년들과 함께 희망을 일구는 담쟁이인문학교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2026년을 응원하면서 동시에 내가 속한 영림중학교를 생각한다. 위태롭지만 아직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을 떠올린다. 꼬마 농부반과 동물 사랑반, 기후 행동 동아리 그린 루리와 사회적협동조합 여물점 그리고 ‘태양과 물과 바람의 학교’까지. 사람 옆에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봄날샘이 전하는 소중한 메시지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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