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호[오늘의 교육을 열며] 내가 고른 공약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전세란)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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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을 열며


내가 고른 공약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전세란

본지 편집위원, 서울 초등 교사




지방 선거를 며칠 앞둔 5월의 화요일이었다. 그날 도덕 시간에는 ‘양심’을 주제로, 양심을 팔아 문구류를 사는 ‘양심 문방구’에 관한 동화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러분도 혹시 양심을 팔아 본 경험이 있나요? 아니면 주변 사람이 양심을 판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정말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네! 학습지 숙제를 안 해 놓고 한 척했어요!”

“저희 오빠요. 제 아이스크림을 먹고 양심도 없이 안 먹은 척했어요!”

“제 동생이요! 자기가 사고 쳐 놓고 저한테 뒤집어씌웠어요.”


어린이들의 입장에서는 사소하지만 절실한 문제들이 쏟아지는 사이,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정원오요!”

“정원오? 낄낄. 권영국이요!”


순간, 나의 촉이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왜 정원오와 권영국이라고 이야기했어?”

“아, 엄마가 정원오가 양심이 없다고 그랬어요.”

“게임에서 사람들이 권영국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그랬구나. 그렇게 들었구나.”


생각과 반응을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종이 쳤다. 그날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도덕 시간에 일어났던 장면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4학년 어린이들이 양심 없는 사람으로 특정 후보를 꼽으며 이름을 이야기한 것 자체보다는, 그 발화에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지가 우려스러웠다. 우리가 정치를 접하고 선거에 참여하는 방식, 즉 가정이나 지역에서 비판 없이 전승되고 SNS나 디지털 세상에서 익히게 되는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판단 같은 것들 말이다. 진도가 빠듯하기도 하고 아직 4학년 1학기에는 민주주의도 배우지 않은 터라, 이번 지방 선거 계기교육은 따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기 말이 바빠지더라도 이 장면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시간을 내기로 마음을 바꿨다.



얼굴 없는 공약의 힘


급하게 짧은 수업을 기획했다. 복잡한 것은 덜어 내고 수업의 목표를 ‘후보자들의 공약 점검하기’로 삼았다. 우선 투표권이 있는 나부터 후보자들의 공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있었다. 좋은 말만 담긴 공보물만 보고서는 누구를 뽑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서울시장 후보와 서울시 교육감 후보 가운데 여론 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던 후보를 각각 네 명씩 골라 5대 공약집을 내려받고 꼼꼼히 읽어 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후보들이 실천하고자 하는 정책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공약집에는 성인인 나도 이해하기 어렵거나 잘 모르는 정책과 용어가 많았다.


AI의 도움을 받아 각 후보의 5대 공약을 4학년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간단히 정리했다. 후보들의 정당을 나타내는 색깔과 기호 번호 순서를 뒤섞었고, 시장 후보와 교육감 후보의 공약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각각 한 장에 모았다. 성별도 다양하게 구성해 볼까 생각했지만, 아이들의 선택에 성별 요인이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었다. (씁쓸하게도 실제 여론 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던 8명의 후보 가운데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선거 전날,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어떤 말로 동기를 유발하고 어떤 질문을 던질지 이리저리 구상했다. 직접 만든 시장 후보와 교육감 후보의 포스터도 학생 수만큼 준비했다. 수업 당일에는 다음 날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 알고 있는지, 이전에 부모님을 따라 투표소에 가 본 적이 있는지를 물으며 가볍게 수업을 시작했다.


“여러분은 학급 회장이나 전교 임원을 뽑을 때 무엇을 고려하나요?”

“공약이 중요해요!”

“지킬 수 있는 공약인지가 중요해요. 지킬 수 없는데도 인기를 끌려고 공약을 말하기도 해요!”

“평소에 친하거나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뽑으면 안 돼요.”


이처럼 어린이들도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공약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인물이나 정당에 대한 선호에 따라 투표하곤 한다. 지방 선거를 앞두고 가짜 뉴스와 음모론, 다른 후보에 대한 비방 등이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


“(……) 그래서 우리 반이 서울시장·서울시 교육감 공약 평가단의 어린이 대표로 선정되었어요!”

“우와, 진짜요?”

“진짜겠냐! 선생님이 그냥 만드신 거지.”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투표권은 없지만, 내일의 선거 결과는 어린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선생님과 함께 공약을 읽어 보고 후보들의 공약을 점검해 봅시다!”



공약은 당선, 편견은 낙선?!


공약 점검 기준으로는 ‘① 실현 가능한가, ② 구체적인가, ③ 꼭 필요한가, ④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가’ 네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모두에게 교육감 후보 포스터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고, 하나하나 함께 읽어 보며 질문을 주고받았다.


아이들은 연필을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필기하며 공약을 세세히 살폈다. 그리고 각자 적은 내용을 바탕으로 모둠에 모여 후보별 공약의 좋은 점과 우려스러운 점을 나누고 발표했다.


“저는 AI를 강조하는 건 다 우려스러워요. 왜냐하면 AI한테 우리 뇌를 맡기게 되고 어린아이들한테는 안 좋은 영향이 많아요.” 

“교과 선생님이 많아지는 건 별로예요. 학생들 입장에서 이동 수업이 많아지면 너무 힘들어요.” 

“모든 청소년 자산 지원은 실현하기 어려워 보여요. 돈이 많이 들 것 같은데 그만한 예산이 어디서 나나요?” 

“AI를 이용해 정기적으로 학력을 평가하는 건,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너무 높아질 것 같아서 반대해요.” 

“중학교를 서울 어느 지역으로든 선택해서 갈 수 있다면, 학생들이 지원하는 게 한 곳으로만 너무 몰릴 것 같아서 별로라고 생각해요.”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면 학생의 인권은 없어지고 선생님만 생각한다는 거 같아서 저는 좀 아닌 거 같아요.”


열띠고 신랄한 의견이 이어졌다. 어린이들의 시선에서는 이 공약들이 이렇게 읽히는구나 싶어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시간이 부족해 시장 후보 포스터에 담긴 공약은 각자 읽어 보게 했다. 공약 점검 결과를 바탕으로 각자 판단할 시간을 준 뒤 모의 투표를 진행했다.


“우리 반에서는 교육감으로 기호 ○번, 시장으로 기호 ○번이 당선되었어요! 여러분이 점검한 후보들이 각각 누구인지는 내일 지방 선거 결과가 모두 발표된 후에 공개하겠어요.”


그날 나는 아이들이 어떤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했는지에 주목했다. 우리 반의 모의 투표 결과, 당선된 교육감 후보는 ‘공동체’와 ‘마음 건강’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 후보였고, 시장 후보는 ‘환경’, ‘안전한 노동’, ‘평등’을 중요한 정책 방향으로 삼은 후보였다.


지방 선거 다음 날, 자신들이 뽑은 후보가 누구일지 궁금해하며 등교한 아이들에게 각 후보의 정체를 공개했다. 자신이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후보가 가족이 열렬히 지지하던 후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는 혼란스러워했다. 또 다른 아이는 ‘게임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소회를 내게 슬쩍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선택한 가치가 던진 질문


아이들이 제 손으로 피드백을 꼼꼼히 적은 포스터를 둘러보고, 저들끼리 모둠 활동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모의 선거 결과를 확인하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4학년인 우리 반 아이들은 차별에 민감했고, 경쟁이나 발전, 성장보다는 협력과 평등, 공동체라는 가치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고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이러한 가치 지향을 유지할까.


재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6학년 교실을 떠올려 보면, 소수자에게 제공되는 복지를 ‘역차별’이라고 말하거나 능력에 따른 차등적 성취가 가장 공정하다는 목소리가 더러 있었다. 남중이나 남고에서 근무하는 주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고 능력주의 담론을 논리적으로 포장하는 정치인과 그가 속한 정당의 인기가 눈에 띄게 높다고 했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변화의 과정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은 어떤 환경에 놓이고 어떤 압박을 받게 되는 것일까. 4학년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치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는 걸까.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모의선거교육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나는 몇 번이나 망설였고 말에 ‘쿠션’을 몇 겹이나 깔았다. 가장 기본적인 민주시민교육임에도 내가 수업 중에 했던 말이 꼬투리가 되어 민원이 제기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수업 자료나 후기를 공유했을 때도 주변 선생님들로부터 ‘용감하다’는 말을 들었다.


왜 이러한 기초적인 민주주의 교육 앞에서도 ‘용감함’이 필요한가. 학교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오랫동안 왜곡된 방식으로 적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민주주의 교육을 이어 가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교사에게 부과된 과도한 침묵의 의무는 결국 교실을 민주주의의 진공 상태로 만든다.


지방 선거가 지나고 그 주 금요일, 우리 반의 글쓰기 주제는 ‘내가 교육감이 된다면 실현하고 싶은 공약’이었다.


· 생태 체험실이 있으면 좋겠다. 문을 열자마자 자연 그대로의 숲처럼 펼쳐져 있고 온갖 생물이 사는 곳. 그곳에 생태 책을 들고 가서 이곳저곳을 관찰하고 배우면 좋겠다.

· 차별이나 폭력이 없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 우선 교과서나 책에 차별과 폭력에 관한 내용이 더 정확하게,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 학교마다 필수적으로 ‘학생 마음 쉼터’를 만들겠다. 분노와 슬픔 같은 무거운 감정에 눌린 내 마음을 쉬게 해 주는 공간이 학교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어린이인권조례’를 만들겠다. 어린이의 인권을 더 중요시하게 하겠다.


온 세상이 AI와 미래 교육에 온 에너지를 쏟고 있는 마당에, 아이들이 품고 있는 중요한 ‘가치’에도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그 가치들은 민주적인 교실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 본 경험 속에서 비로소 자란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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