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호[후속] 정책이 조장한 학부모와 교사의 동상이몽 (변진경)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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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_ 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정책이 조장한 학부모와 교사의 동상이몽

- 교육-보육 논쟁과 연결하여 본 서이초 사건

 


변진경

alm242@sisain.co.kr

《시사IN》 사회팀장

 



매우 뜨거운 날이었다. 서이초 교사가 학교에서 숨진 사건이 알려진 다음 날, 추모하는 교사들이 서이초 앞으로 모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SNS상에서 퍼졌다. 바쁜 마감날이었지만 급히 가 보았다.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주변은 검은 상복의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추모객이 국화꽃 한 송이를 교문 앞에 놓기 위해 7월 말 땡볕 아래 서서 학교를 둘러싼 길고 긴 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꽃집 트럭도 계속 밀려들었다. 전국의 울분한 ‘교사 일동’들이 주문한 근조 화환을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학교 담장의 3면의 길 양가에 화환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하나씩 세어 보니 2,000개에 달했다. ‘교권 잃은 동료 교사 일동’, ‘어느 초등 교사 선배가’, ‘후배님 지켜 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선생님을 지키지 못한 동료로부터’,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고 있는 못난 동료 교사’, ‘공교육 죽었습니다’, ‘제발 적당히들 합시다’, ‘지은 죄와 업보를 대대손손 갚기를’……. 슬픔과 분노와 한탄과 저주의 문구 2,000여 개가 화환 리본에 궁서체로 적혀 있었다.

길가를 가득 채운 화환과 추모객에도 불구하고, 서이초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추모객의 조금씩 흐느끼는 소리, 벌겋게 얼굴이 익어 멘트를 따기 위해 돌아다니는 기자들의 인터뷰 청하는 나지막한 목소리, 학교 담장에 붙은 포스트잇 따위를 찍는 언론사 카메라 셔터음 정도만 섞여 들렸다. ‘소리 없는 통곡’이라는 표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슬픔과 분노의 기운이 터져 흘러 넘실대고 있는데 모두가 입을 틀어막고 꺽꺽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도 몇몇 추모객에게 조용히 인터뷰를 청했다. 모두 교사들이었다. 1~2년 차 신규 교사도 있었고 15년 차 경력 교사도 있었다. 20대 신규 교사는 “비슷한 일을 겪는 교사들이 너무 많아요. 어떻게 계속 이 일을 해야 할지 너무 무섭고 공포스러워요”라고 말했다. 40대 경력 있는 교사는 “제가 신규일 때 비슷한 일을 겪고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그냥 참자 하고 넘겨 왔어요. 그게 너무 미안해요. 선배들이 그냥 참고 넘겼기에 후배들에게 그대로 반복되는 거 같아서요”라고 말했다. 누가 누구를 연필로 긁었느니, 일기장과 업무 수첩에 어떤 말이 적혀 있었느니, 누가 누구에게 언제 전화를 하고 하이톡 메시지를 남겼느니 진실 공방이 이어졌지만 사실 교사들 입장에서 서이초 사건의 디테일은 사실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가 나’였기 때문이다. 숨진 서이초 교사의 비극에 모두가 자신의 교직 생활을 투영하고 있었다.

 

학부모의 잘못된 행동을 제지할 시스템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느껴 가던 중이었다. 교사는 학부모 집단을, 주변의 학부모는 교사 집단을 경계하고 불신하고 헐뜯는 모습이 점점 자주 목격되었다. 개인적으로 겪은 사소하지만 불쾌한 사건, 옆 반(옆집)에서 겪었다고 전해 주는 황당한 사건, 옆 학교(옆 동네)에서 들려오는 경악스러운 사건 속에서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점점 높고 두꺼운 벽이 쌓여 가고 있었다. 학부모 입장에서 전해지는 말들에선 교사의 잘못이, 교사 입장에서 전해지는 말들에선 학부모의 잘못이 부각되었지만 그 둘 사이 분명한 차이를 하나 발견했다. 잘못된 교사의 행동에 대해서는 적어도 사회적인 ‘브레이크’가 있었다. 교장 선생님에게 호소할 수도 있고 교육청, 안 되면 교육부, 안 되면 국민권익위 같은 데라도 민원 게시글을 쓰면 응답이 돌아오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그런데 잘못된 학부모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 ‘브레이크’가 없었다. 상식적인 범위를 벗어난 학부모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가로막을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폭주’가 가능했다. 교사에게 밤늦게 전화하고 학교에 찾아가고 교육청, 교육부, 국민권익위, 경찰 등지에 거짓을 고해도 교사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그 무력감이 오죽할까 싶었다. 대다수 선량한 학부모들 역시 방관자로서의 무력감과 죄책감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았다. “◯◯ 엄마, 그러지 마요”라고 말을 꺼내는 순간 괜히 그 사달에 휘말리게 될까 봐 멀찍이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분노와 증오와 무기력과 죄책감이 뒤범벅된 교사-학부모 관계가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다 서이초 사건을 마주했다.

사건 이후 교사들의 증언을 들으며 오랜 기간 교육을 취재해 온 기자로서,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로서 교사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죄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여태껏 몰랐고 또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교사들의 고통이 너무도 깊고 컸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가장 놀랐던 점은 교사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억울한 일로 학부모로부터 민원 폭탄을 받고, 고발·고소당하고, 경찰서·검찰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재판정에 피고인으로 선다고 해도 모두 교사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전해 듣고 잘 믿기지가 않았다. ‘네 교실 안에서 일어난 일은 네가 알아서’에 학교 내외 모든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상태였고 교사들 역시 스스로 받아들이고 참아 내며 버텨 가고 있었다.

기자의 일에 대입해 상상해 보았더니 교사들의 울분이 금세 이해가 되었다. ‘만약 정당한 취재나 보도 과정에서 생긴 일로 누가 나에게 민원을 제기하고 형사·민사 소송을 거는데 회사에서 ‘네가 취재하다 생긴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한다면?’ 이 말도 안 되는 고립무원의 고통 속에 많은 교사들이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수 선량한 학부모가 그랬듯, 옆 반 교사든 교감이든 교장이든 교육감이든 교육부 장관이든 모두가 방관하고 조금 안타까워만 할 뿐 손 내밀고 도와주기는커녕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마저 회피해 왔다. 얼마나 외롭고 서럽고 무서웠을까. 매주 토요일 종로에 모이는 검은 옷의 교사 무리에서 그 삼킨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증오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많은 국민이 서이초 사건 이후 비로소 교사들의 고통에 제대로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필요했고 중요한 일이었으나 다만,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위험 신호가 보였다. 피해자 대 가해자의 개별 사건들로만 이 갈등이 다루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교사를 괴롭히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가해자는 특정 학생, 특정 학부모로 표적이 찍혔다. 인스타그램에 가해자(추정)와 그 가족의 신상과 얼굴 사진이 ‘털리고’ 그들이 사는 집 앞, 다니는 직장, 운영하는 영업장 앞에 온갖 욕과 저주의 말이 쓰인 포스트잇이 붙었다. 익명의 ‘정의의 사도’가 가리키는 방향은 종종 틀리기도 했고, 전하는 사건의 경위는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학부모’라는 단어 앞에 자동으로 ‘괴물’, ‘몬스터’, ‘진상’, ‘맘충’, ‘극혐’이 따라붙었다. 모든 교실 내 갈등은 ‘(약자)피해자 교사-(강자)가해자 학부모(학생)’의 구도로 정의되었다. 걱정스러웠다.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 이 개별적 사적 복수극은 언젠가 다시 교사 집단에 부메랑처럼 되돌아가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최근 교사의 학생 성추행이나 부정 비리 등을 전하는 뉴스 기사 아래 학부모를 향하던 험한 댓글들이 다시 교사를 향해 방향을 트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증오와 혐오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시소처럼 반작용으로 올라가고 내려가며 양쪽을 모두 물들이게 된다.

우리는 안다. 학부모는 모두 악마가 아니다. 교사가 그렇듯이. 마찬가지로 교사도 모두 악마가 아니다. 학부모 대다수가 그렇듯이. 세상 사람 중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괜찮고 선량하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대부분의 선한 사람들이 곧 교사이고 학부모이기도 하다는 것을. 더군다나 아마도 사람의 선함을 가장 믿는 부류 중 하나가 교사 집단이 아니던가. 성선설을 믿고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믿고 ‘원래 나쁜 사람은 없다’는 긍정성과 낙관주의로 무장한 많은 이들이 교사라는 직업을 택했을 것이다. 학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우주 하나를 탄생시키고 운영하는 것과 다름없는 ‘아이 낳아 키우기’를 택하고 수행해 온 사람들 아니던가. 나와 다른 타자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신경 쓰며 애정을 주는 일의 경이로움을 배우고 스스로를 성장시켜 온 경험을 해 가는 사람이 부모라는 존재 아닌가. 이 두 신실하고 경건한 주체가 만났을 때 사실은 좋은 일이 나쁜 일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이미 많이들 경험했고 그 좋은 기억들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나쁜 기억 하나가 좋은 기억 100개를 덮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신뢰와 선의가 오갈 수 있는 관계의 본질에도 불구하고, 교사와 학부모는 언제부터 왜 이렇게 사이가 틀어지게 된 걸까? 나름대로 분석해 본 그 기원을 ‘학부모는 어쩌다 공공의 적이 되었나’(《시사IN》 제831호)라는 기사에 몇 가지 밝혀 놓았다. 1980년대생 학부모의 특성, 오은영식 ‘존중’ 육아법의 오용, 무상 보육의 경험, 교육 ‘서비스’주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후유증 등이 세간에서 거론되는 요즘 학부모-교사 간 갈등의 원인이었다. 각각의 분석마다 타당성이 있고 한계도 있다. 하나로만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고, 아마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었다. 다만 한 가지, 개인적으로 주목되는 가설이 있었다. 기사에서는 여러 가설 중 하나로 기술했지만 사실 가장 심증이 가는 가설이었다. 바로 학부모와 교사의 ‘동상이몽’이었다. 둘 사이 학교(교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비단 최근에만 두드러진 현상이 아니다. 코로나19 시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학교 내에서 발생한 갈등의 주요 축에 바로 이 ‘동상이몽’의 마찰이 존재했다.

 

돌봄 서비스형 교육 정책이 조장한 학부모와 교사의 동상이몽

 

이를테면 이런 일이다. 한 초등학교 학부모 A가 담임 교사에게 불만이 쌓였다. 자녀가 초등학교 1학년이고 돌봄교실을 이용한다. 아이가 하교할 즈음 학교 돌봄전담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오늘 ○○이가 학교 수업 시간에 배변 실수를 했대요. 담임 선생님이 수업이 끝난 뒤 저에게 연락을 해 와서 제가 가서 닦아 주고 돌봄교실에 있던 여벌 옷으로 갈아입혔어요. 알고 계시라고 연락 드려요.” 학부모는 이 일로 담임 교사에게 연락해 상담 혹은 민원 혹은 항의를 할까 말까 고민스러워했다. “선생님이 아이 배변이 더러워서 처리하기 힘들 수는 있다. 이해한다. 그런데 실수한 채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을 때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차라리 바로 나에게 전화를 해서 와서 도와 달라고 하지, 기다렸다가 돌봄전담사에게 배변 처리를 시킬 건 또 뭔가. 교사는 고귀해서 똥 닦을 수 없고 돌봄전담사는 되는 건가?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담임 교사가 직접 나에게 연락해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이걸 돌봄전담사를 통해 듣는 상황도 잘 이해가 안 된다.”

반면 교사들의 입장은 다르다. 교사들이 증언하는 ‘교권 침해 사례’에서 가장 많이 본 것 중 하나가 ‘자녀의 배변 실수를 처리해 달라는 진상 학부모’였다. 혹은 아이 약을 챙겨 보낼 테니 시간 맞춰 먹여 달라거나, 아침을 제대로 못 먹고 갔는데 간식을 싸서 보냈으니 배고파 하면 먹여 달라거나, 아이가 땀이 많으니 체육 활동 후 옷이 젖었으면 감기 걸리지 않게 여벌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거나 하는 요구들에 교사들은 자괴감을 호소했다. ‘내가 가르치며 수업하려고 교사가 되었지, 애들 똥 닦고 밥 먹이고 옷 갈아입히며 돌봐 주러 교사가 되었나’라는 하소연도 많이 들렸다.

극단적이고 무리한 학부모의 요구를 걷어 내더라도, 이른바 ‘교육-보육’ 논쟁은 학교 현장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오래된 불씨였다. 코로나19 시기에는 긴급 돌봄이나 방과후교실 등을 둘러싸고 학부모-교사-돌봄전담사(방과후교실 강사) 사이 날선 말들이 오갔다. 이번 정부가 추진하는 ‘늘봄학교’도 비슷하게 갈등의 뇌관이다. 교사는 학생의 ‘정규 수업 시간’을 바라보며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는데, 학부모는 자녀가 아침에 등교해 오후(혹은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그 모든 시간 안에서 교사의 역할과 책임을 요구한다.

과거 학부모가 학교에 바라던 점은 비교적 단순했다. 우리 아이 잘 공부시켜서 좋은 상급 학교로 진학시켜 주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공부도 잘 시키지만, 밥도 맛있게 먹여 주고 특기 적성도 계발시켜 주고 체험 프로그램도 경험시켜 주고 교우 관계도 잘 만들어 주고 학폭으로부터 안전하게도 해 주고 마음도 잘 돌봐 주고 몸도 튼튼하게 해 주고 진로 코칭도 잘해 주는, 집처럼 편안하고 학원·컨설팅 업체처럼 전문적이고 복지 시설처럼 풍족하고 문화·체육센터처럼 다양한 그런 곳을 기대한다. 한 교원단체 간부가 기자 회견에서 “학교가 잠자고 밥 먹고 쉬고 노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학교 기능을 돌려놓아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학부모들이 의아해했다. ‘응? 학교는 그런 곳 아니었어?’

학부모들이 자기 멋대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 10년 사이 교육부나 교육청 등지에서 학교 관련 비전과 정책을 발표할 때 쓰인 수식어들을 살펴보자. ‘원스톱’, ‘토탈’, ‘맞춤케어’, ‘수요 맞춤형 서비스’, ‘아침부터 저녁까지’, ‘1:1 토탈케어’……. 지금 학부모들의 기대치는 교육 당국이 홍보하고 선전하고 약속한 내용 그대로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지방선거든 교육감 선거든, 진보, 보수, 중도 가리지 않고 학부모들에게 약속한 내용은 동일했다. ‘낳기만 하면 다 책임져 줍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실무가 많은 부분 어디로 다 떠넘겨졌느냐, 바로 학교다.

교사들 입장에서는 팔짝 뛸 노릇이다. 돌봄, 특기 적성 교육, 무상 급식, 복지 서비스, 진로 계발, 심리 상담, 체육 문화 여가 활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모두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학교라는 체제와 공간에서 중요한 터줏대감인 교사들에게 한 번도 동의를 구한 적 없이 말이다. ‘나는 수업하는 사람이고 학생들과 재미있고 전문적인 수업을 하기 위한 투자와 노력을 할 시간도 부족한데, 동네 아동센터나 문화센터, 식당, 학원에 가서 그러듯 똑같이 자신의 개별적 민원을 끊임없이 전달하는 학부모를 상대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교대나 사범대에서 한 번도 배우거나 대비한 적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들이 당연한 듯이 일어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서로 다른 계약 조건을 알고 있는 둘 사이에는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게 지금 교사와 학부모 관계다.

교사의 탓도 학부모의 탓도 아니다. 교장만의 책임도 교육청 교육부만의 직무 유기도 아니다. 정부 부처로 치면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행정안전부 등 모든 부처의 책임이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대통령이고, 국회고 언론이고 시민단체고 일반 국민이고 모두가 n분의 1만큼의 책임이 있다.

 

학교의 변화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교육의 문제는 그 안에서만 탄생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코로나19로 등교가 제한되던 시기, 보호자 없는 집에서 라면을 끓이다 큰 화상을 입은 ‘라면 형제’ 사건을 보며 많은 어른들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누구의 책임일까? 긴급 돌봄을 제대로 운영하지 않은 학교의 책임일까? 아이들을 방치하고 나간 싱글맘의 책임일까? 감염병이 창궐하든 말든 집에 돌볼 아이가 있든 없든 출근을 강요하는 회사들이 너무나 많은 우리 사회 평균적인 노동 환경은 무죄일까? 사각지대투성이인 우리나라 복지 시스템은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 촘촘하게 짜인 복지망이 없는, 고립되고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 보호자들은 점점 더 바빠지고 아이들은 점점 더 방치되고 있다. 그걸 어떻게 학교가 모두 해결할 수 있을까? 더구나 수십 년 전 틀과 체제는 하나도 바꾸지 않고서, 변화를 위해 제대로 된 투자도 하지 않으면서, 그 틀 그대로 바뀐 세상에 대응만 해 달라고 학교에 요구만 해 댈 수 있을까.

그제는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문득 눈물까지 글썽이며 ‘담임 선생님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교과도 너무나 재미있게 가르쳐 주시고 다양한 특별 프로그램도 많이 마련해 주고 누가 뭘 잘못하면 단호하되 부드럽게 잘 훈육해 줘서 반 분위기가 이제껏 경험해 본 중에 제일 좋다며, 이 선생님과 함께할 올해가 끝날 걸 생각하니 너무 섭섭하다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거였다. (그 마음을 편지로 적어서 드려 보라고 하니 부끄러워서 못 하겠다며 도망을 갔다.)

‘공교육 정상화의 날’ 직후 있었던 2학기 학부모 상담을 고민하다 신청하지 않았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건너뛰어도 된다’는 안내에 따라, 선생님이 바쁘고 부담스러울까 봐, 살짝 아쉽긴 했지만 신청서를 그냥 접어서 책꽂이에 넣었다. 이번에 아이가 한 말을 선생님께 전하면 힘이 나지 않을까, 하이톡 메시지라도 쓸까 고민하다가 ‘이것마저 혹여나 부담이 되면 어쩌나 싶어 이번에도 마음을 접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불만의 민원만 접수하는 학부모만 남는다면 선생님은 그것만 전부로 여기게 되는 건 아닐까. 표현하지 않는 진심과 감사의 마음도 과연 전달이 될까. 어떤 경로로 어떻게 전달을 해야 실례도 부담도 ‘오버’도 아닌 학부모의 ‘좋은’ 민원이 될 수 있을까……. 학부모와 교사 사이 ‘불가근 불가원’이 최대 덕목이 된 시기, 선의를 가진 사람들만 한참 주저하고 멈칫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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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