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나중에 퇴장하는 불구의 미래를 그리며
앨리슨 케이퍼 씀, 이명훈 옮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오월의봄, 2023
나영정(타리) taripink@gmail.com
퀴어활동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가족구성권연구소
앨리슨 케이퍼라는 실천적 이론가가 집필한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는 2013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래 학제 간 연구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비판적 장애 이론이 어떻게 상호적으로 침투하며 어떻게 서로의 정치학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지 사유하게 한다. 특히나 저자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운동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면서 불구의 시간과 미래성[ref] 앨리슨 케이퍼는 미래와 미래성을 둘러싼 담론을 치열한 정치적 논쟁의 장으로 가져온다. 역자 이명훈은 이 책에서 미래/미래성이 쓰이는 맥락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본문 24, 31쪽 역주를 참조할 수 있다.[/ref]을 탐구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비로소 그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던 미래를 발음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로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고민하고 제시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불구라는 개념은 제도화된 장애 정체성과 불화하면서 제도가 규정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의 경험과 관점을 여타의 사회 정의 운동과 결합하면서 정치적인 지향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ref] 이 책의 원제에서처럼 불구는 crip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불구를 저항적이며, 다양한 운동의 교차와 연합의 정치로 제시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장애여성공감의 창립 20주년 선언문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2018)가 있다.[/ref]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퀴어 정치가 부상했을 때와 유사한 정동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서 정치적 의미가 탈색되고 단지 문화적인 코드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나에게 불구, 퀴어한 불구는 정상성과 생산성 규범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정체성’이자 운동적 지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은 재생산 정의를 둘러싼 중요한 논쟁들을 농인과 시각장애인의 경험에 기반해 분석하면서 장애운동, 퀴어운동, 페미니즘운동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통로들을 만들어 낸다. 사회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광고판을 분석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지배 규범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퀴어페미니즘이 그린 사이보그주의와 에코페미니즘을 퀴어장애학의 관점으로 비판하면서 사이보그의 유산과 환경주의를 불구화한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사회운동 안에서 어떻게 반-비장애중심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바람직한 퀴어/페미니스트/불구의 세계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을지를 실험한다. 그것을 위해 트랜스젠더퀴어의 화장실 접근, 환경 정의, 재생산 권리 및 재생산 정의를 탐구한다. 이 책이 이명훈의 사려 깊고 끈질긴 번역 노동을 거쳐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페미니스트장애학, 퀴어페미니즘, 퀴어장애학이 넓혀 왔던 사고의 지평을 과연 사회운동의 실천에 충분히 적용했는가를 돌아볼 시점이라고 느꼈다.
제도로의 통합과 제도의 ‘불구화’ 사이 긴장
앨리슨 케이퍼는 임신 중지를 둘러싼 투쟁에서, 동성 결혼을 둘러싼 투쟁에서 찬성과 반대 진영 모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싸운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사회운동이 권리, 정의, 욕구, 자율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관한 것으로 수렴되는 것을 비판하는 리 에델만의 논의를 소개한다.[ref] 리 에델만이 비판하는 재생산 미래주의는 이성애 핵가족만이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생산성을 가지며, 이들이 자녀를 재생산하는 행위를 통해서 바람직한 미래가 구축된다고 여기는 이데올로기이다.[/ref] 그러나 곧바로 리 에델만을 비판하는데, 그때 등장하는 아이의 형상은 ‘백인’의 ‘건강한’ 아이이기 때문에 미래를 상상할 때 장애인은 종종 시간 밖으로 내던져지거나 혹은 진보의 길을 가로막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퀴어 아이들, 유색인 아이들, 거리에 있는 아이들을 비롯해 재생산 미래주의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은 모두 끊임없이 아프고 병적이고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치부되어 왔다”(본문 97쪽)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생학적 분리와 인종, 계급, 장애로 인해 강제로 미래성이 제거된 이들의 위치에서 과거와 현재의 억압을 문제화하고, 권리의 언어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퀴어가 경험해 온 차별을 모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이러한 범주들이 서로에 의해 구성한다고 주장하려고 한다”(본문 99쪽)라고 했다. 나는 앨리슨 케이퍼의 이러한 논지에 깊이 동의한다. 서로가 경험하는 억압이 서로에 의해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억압을 설명할 수도, 억압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고안할 수도 없다. 이러한 논지는 이 글을 쓸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불구의 정치로서 재생산 미래주의를 비판해 나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재생산 정의 운동과 가족구성권 운동을 동시에 해 나가는 활동가로서, 이 질문은 여러 가지 영역을 관통하여 다가온다. 불구의 정치는 빈곤한 가족이 생존하기 위해서 오히려 스스로 가족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도록 강요하는 복지 제도를 바꾸고, 탈가정한 청소년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주거권 보장을 위해서 싸우며, 가족구성권은커녕 프라이버시조차 박탈당한 시설 수용을 중증장애인이 강요당하지 않도록 운동하며, 결혼 중개 업체를 통해 결혼 이주를 하려면 HIV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고, 국경을 넘는 이유가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결혼의 진정성임을 증명해 내야 하는 이주여성들에게 가까이 간다. 법적인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할 수 없도록 만든 현재의 신분-가족-결혼 제도를 바꾸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결혼을 선택하고 그 가족을 국가나 제3자의 개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생존해 나갈 수 없는 이들과, 애초에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 수 있는 해방이 무엇인지 답을 구하는 것이다.
동성 결혼 법제화를 위한 운동은 관계성을 인정받지 못해서 서로를 보호할 수 없는 고통, 관계가 인정되지 않아서 국가, 혈연 가족이나 제3자로부터 부당한 개입과 차별에 대해서 대처할 수 없는 고통,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사회적 권리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짐에 따라서 사회 보장의 혜택에서 제외되는 차별을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불구들의 운동은 이러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동성 커플도 혼인 지위를 획득하는 것, 혼인에 대한 선택권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이 정상가족 체제를 바꿈으로써 고통의 근원을 해소해 나가는 운동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 이 또한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하다고 주장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퀴어를 포함하는 불구들은 혼인이 국가와 인구를 구성하고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언제나 불화해 왔고, 혼인과 혈연 관계만을 정상으로 삼는 신분 제도가 소수자들에게 얼마나 큰 질곡이 되었는가 또한 생생히 겪어 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혼인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 제도로부터 이탈한 이들과 퀴어들은 또 다른 정치적인 연합을 구성하고 결속과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왔고, 현재도 그러한 미래를 열망하며 추진해 나가고 있다. 초점이 다른 운동은 서로를 보충하고 때로는 경합하면서 진정으로 모두에게 열린 접근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ref] 가족구성권연구소는 2023년 7월부터 9월까지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통해 “퀴어가족정치의 장, 사회적 재생산 위기에 응답하다”라는 제목으로 여섯 편의 글을 연재했다. 동성 결혼이나 생활동반자 등록법 등 법적 논의로 수렴될 수 없는 가족 정치-가족 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가족구성권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는 기사였다.[/ref]
나는 책을 읽으면서 대구 지역의 에이즈 운동이 왜 중고령의 감염인들을 법적 장애인으로 등록하려는 데 온 힘을 다 쏟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ref]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레드리본인권연대 등은 2022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HIV 감염인 장애 인정을 위한 기자 회견’을 열고 법적 장애 인정과 권리를 요구했다. “차별 속 HIV 감염인, 장애 인정은 언제쯤”, 〈웰페어뉴스〉, 2022년 4월 22일.[/ref] 중고령의 피엘[ref] People Living with HIV/AIDS, HIV/AIDS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줄임말.[/ref]은 가족과 사회적 관계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고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차별을 겪어 왔으며, 감염 이후 지속되는 빈곤한 삶에 지치고, 무참하게 반복되는 의료 기관에서의 진료 거부와 차별을 반복적으로 겪어 왔다. 또한 대구 지역의 진보적 장애인 운동과 만나면서 사회가 강요하는 고립된 삶을 거부하는 이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충분히 해석되지 않은 경험들이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HIV/AIDS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깝다는 것을 감각하게 한 것 같다.
“돌봄과 서비스가 반복적으로 거부되는 시간, 자신의 경험이 계속해서 부인되는 시간, 서서히 증상이 악화되는 시간, 인정도 진단도 받지 못하는 시간, 기다림의 시간”(본문 111쪽)을 거쳐 온 중고령의 감염인들은 법적 장애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이 인정과 생존의 열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제도로 포섭된다는 것은 적법한 대상인지를 심사하는 권한을 국가에 넘겨준다는 것이고, 그 제도에 부합하는 사람인지 증명해 낼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인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고령 피엘의 법적 장애인 등록 운동이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 되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 포함될 것이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 온 사회복지 정책이 당사자를 모욕하는 구조적 한계 또한 당장 철폐되기 어렵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장애인이 되기 위한 투쟁 안에 이 모욕을 끝장내는 투쟁을 포함하는 것이다. 제도를 불구화하는 것, 그럼으로써 불구들이 덜 소외되고 사회적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투쟁이다.
불구들의 미래를 상상하기
불구 미래성의 정치를 제안하고, 상상되는 미래와 생동하는 현재를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 이 책 전반에서 정치를 더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한 사유의 틀로 사용했다. 또한 더 접근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면서 나는 장애를 정치적이고 가치 있으며 완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어딘가’, ‘언젠가’를 갈망한다.
- 본문 31~32쪽
앨리슨 케이퍼의 문장을 읽고 질문을 떠올린다. 장애를 가진 이들은 미래를 그릴 수 있는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해석된 현재와 미래는 비장애중심주의 세계관에 균열을 내고 있는가? 장애가 포함된 해방적 비전은 과연 진보적 운동이 그리는 비전에 통합되고 있는가? 정상성과 생산성에 도전하는 불구의 정치는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정신성이 강제적 이성애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이 지향하는 미래와 대안적인 사회의 모습을 그릴 때 장애를 미래에서 삭제해 왔던 그 지배 서사에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사회운동 전반에는 어떤가? 진보와 성장은 여전히 유효한가? 기후정의운동은 체제 전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앨리슨 케이퍼가 비판하는 장애인에게 닫힌 미래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다. 이 불확실함은 장애를 가진 이들이 기후 위기의 가장 ‘선한’ 피해자임을 넘어 대안 사회를 상상할 때 이들이 가진 필요와 욕구가 ‘특수한’ 필요로 치부되지 않고,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원칙 속에 통합될 수 있는지 알기 어렵게 한다. 이 어려움은 기후정의운동과 다른 운동이 관계를 맺기 어렵게 한다. 당신은 장애운동이 규정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 관심이 있는가? 퀴어운동이 전망하는 미래가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가? 그 미래가 단지 장애인과 퀴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장애가 더 많이 포함된, 퀴어한 방식으로 몸과 관계가 변형된 미래라면 그 미래는 여전히 당신에게 진보적 미래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저자가 질문했던 것처럼 현재의 장애와 퀴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현재 우리가 진보에 대해서 어떻게 사고하는지, 더 나은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언젠가 지구에서 멸망해야 할 인류를 생각한다. 특히 기후 정의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바라볼 때, ‘멸종 저항’ 등 기후 부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사회운동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영원히 지구에 산다는 인간 중심적 전제는 그 어떤 정당성도 현실성도 없어 보인다. 점점 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저항과 사회운동은 정의로운 멸망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멸망조차 부정의할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적 종말론적 세계관과는 가장 거리가 먼 미래관이다. 이후에 도래할 완전한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종말이 아니다. 내가 이 책과 함께 상상하는 불구의 미래는 멸망의 접근 가능성과 멸망의 방식에 개입하는 정치학을 통해 실현하는 미래이다. 나는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 가장 마지막에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문을 닫고 이 세계에서 퇴장하는 것을 열망한다. 오로지 성장이 아니라 퇴장을 위한 미래를 그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고 느낀다. 그 미래를 준비하는 불구의 속도와 방식을 고안하면서 기만적인 ‘지속 가능한 발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싶다. 그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고 싶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과제는 미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그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것”(본문 102쪽)이라는 저자의 주장과 통한다고 느낀다. “장애인을 미래 없음이라는 미래의 표지로 보고, 그들을 시간 밖으로 내쫓지 않으며, 미래를 다른 대안적 시간성의 일부로 상상하는 것”(본문 102쪽)이다. 다만 그 미래가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개별적인 생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종말을 함께 상상하고 준비함으로써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성취하기 어려운 실천들을 감행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퀴어와 불구가 조용히 사라지길 바라는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조금은 도식적으로 말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불구 이론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3장에서 분석했던 것처럼 많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는 장애도 질병도 없는 것이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퀴어의 권리 또한 마치 계급성이 없는 것처럼 단지 문화적인 경합인 것처럼 여겨진다. 퀴어에 대한 혐오를 분석할 때에도 혐오 세력이 가진 주류 권력에 대한 비판은 포함하지만 그 권력이 계급 등과 교차하면서 퀴어에게 어떻게 불균등하게 작동하는지는 거의 분석되지 않는다. 불구화된 퀴어는 다른 범주인 것처럼 여겨지거나 트랜스젠더 자체가 불구인 것처럼 환원된다.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우리가 가진 속성에서 기인한 것인 듯 환원하는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선 불구의 정치와 연합하는 것이 절실하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라는 제목이 책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방법론이라고 밝힌다. “나는 장애를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와 함께 분석의 범주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더 큰 목표는 차이에 관한 이런 범주들 내에서, 그리고 이 범주들을 통해서 장애가 어떻게 파악되는지를 다루는 것이다”(본문 62쪽)라고 밝힌다.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에서 장애는 어떻게 해방의 비전으로 그려지는가.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을 불구화하는 것은 단지 장애운동과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성과 생산성의 위계와 계급성을 운동의 지향과 방법론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이 새로운 정상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정한 해방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계속 심문하고 실험하기 위한 것이다.
접근성을 정치적 투쟁의 도구이자 지향으로 삼기
권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 권리가 거짓 성장에 복무하지 않고, 긴 퇴장을 준비하기 위한 개입이나 실천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와 함께 미래로부터 탈락된 존재들이 연대하며 삶에 대한 접근성을 함께 증진시키는 운동을 떠올린다. 앨리슨 케이퍼는 7장에서 여러 운동이 연합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재생산 정의 운동에서 장애인이 프로라이프(Pro-life) 운동을 향해 “내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장애를 가진 이들의 생명이 사소하게 다루어지는 구조적 폭력에 연합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임신 중지 운동의 정당성과 결집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프로라이프는 종교 권력과 시설 운영의 인프라를 이용해 장애인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면서 ‘생명’ 담론을 전유하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 권력의 기만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장애인과 부랑인의 탈시설 운동과 시설 폐쇄 운동의 연합도 반드시 필요하다. 재생산 정의 운동을 벌이는 현장에 장애인이, 한센인이, 부랑인이, ‘윤락여성’이, 미혼모가, 입양인이, 퀴어가 함께할 수 없다면, 임신·출산에 대한 선택권은 기존의 지배 질서를 전혀 넘어서지 않는, 허락받은 범위 내에서 행사하는 권리 아닌 권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낙태죄 폐지 운동에 장애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장애운동은 국가의 우생학적 가족 계획과, 국가가 임신 중지에 대한 여성의 결정을 죄악시하고 시민을 범죄화하면서 성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점을 폭로했다. 더불어 이러한 성적 질서가 장애를 가진 여성은 성적 주체로부터 배제하는 법적인 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ref]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성과재생산포럼 기획(2018),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후마니타스.[/ref] 윤락의 우려가 있는 여성들이 시설에 감금되고, 남성 부랑인과 합동 결혼을 거쳐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역사, 미혼모가 시설에서 아이를 강제로 입양 보낸 후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던 역사와 겹쳐진다. 최근 보호 출산제가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는 낙태죄 폐지를 통해서 열어 갈 미래를 훼손하는 백래시다. 이는 미혼모가 낳은, 양육이 어려운 조건에 놓인 이들, 장애나 질병을 가진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강제 이주시키려는 기획이다.[ref] 보호 출산제에 대한 문제는 다음의 성명을 참조하라. 〈[공동 성명] 여성과 아동, 누구도 보호하지 못하는 ‘보호 출산제’ 통과를 규탄한다 - 익명 출산이 대안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 나갈 것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2023년 10월 10일; 〈[성명] 보호 출산제는 정상가족주의를 보호할 뿐이다. 출생/출산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양산하는 보호 출산제 통과를 규탄한다〉, 가족구성권연구소, 2023년 10월 11일.[/ref] 이러한 반격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가가 보호 출산제로부터 숨겨진 존재가 어떻게 삶의 접근성을 확보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모두의 화장실 운동 또한 접근성과 관련된 보다 확대된 전선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와 퀴어가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은 물리적으로 장애인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논의와 결합하면서 모두의 화장실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의 맥락에서 화장실에 대한 인종 분리와 차별에 관한 역사와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운동이 만나면서 힘을 가지는 것처럼(본문 384쪽) 여기에서도 화장실을 둘러싼 복합적인 권력을 분석하고, 화장실에서 배제된 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도시 공간은 생산성을 중심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정상성을 보호하는 문화가 곧바로 안전으로 치환되어 왔기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은 단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장애인이 도시 공간을 이용할 것이라는 전제는 장애인이 지하철을 언제나 이용할 것이라는 전제와 만나고, 타인과 관계 맺고 일할 권리로 나아간다. 주민등록증 없이 살아가는 이가혜 님은 공원 공중화장실에 터를 잡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화장실을 관리한다. 그는 화장실 내에 설치된 넓은 장애인 화장실에 자신의 짐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그 화장실에서는 여러 명의 여성 홈리스가 살다가 자리를 옮겼다.[ref]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기획(2023),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 후마니타스, 11~31쪽.[/ref] 여전히 외곽 지역 터미널과 야외 화장실에서는 글로리홀을 이용해 섹스하는 이들이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시스젠더 여성을 위협하는가라는 허구적인 대립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 화장실을 자는 데, 먹는 데, 섹스하는 데 시용하는 불구들과 함께 모두의 화장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함께 규정하고, 안전을 재정의하는 노력이 접근성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들과 다 함께 모여 접근성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마지막으로 노프라이드(No-pride) 파티[ref] 노프라이드 파티에 대한 정보와 후기는 다음을 참조하라. linktr.ee/nopride2023; “‘프라이드’가 부끄럽게 여기는 불법 존재들의 삶과 정치 드러내기”, 〈비마이너〉, 2023년 7월 28일.[/ref]의 현장을 떠올린다. 2023년 7월 1일 서울 합정역 부근 카페에서 열린 이 파티는 정상성과 화합하는 성소수자 자긍심이 다양성이 아니라 배제의 정치라는 점을 주장하고,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이 책 덕분에 노프라이드 파티를 접근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감각하는 기획으로 다시 생각해 보았다. 프라이드 정치에서 배제되고 단속과 감금의 대상이 되는 약물 사용자, 성노동자, HIV 감염인, 전형적이지 않은 트랜스젠더퀴어, 그리고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구금에 반대하는 활동가 들이 중심이 되어서 준비했고, 농인들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통역 방식을 고민하지 않는 통역을 ‘시설화된 통역’이라고 비판하며 통역 접근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퀴어 농인 단체가 참여했다. 또한 당일 행사에서 자유 발언을 신청한 많은 퀴어들은 “강제적 비장애정신성”(본문 61쪽)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었다. “어딘가에 갇힌 삶, 초국적 기업의 착취 대상인 삶, 경찰의 단속 대상인 삶, 삶의 조건이 불법인 삶”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경찰의 통제와 초국적 제약회사의 핑크워싱이 없는 일시적인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누군가는 그곳에 존재할 수 있었다. 이 파티가 정기적으로 지속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다른 세계로 통하는 접근성을 조금은 확보했을까. 프라이드가 없는 불구적 미래를 더 많이 상상하고 추동해 나가는 것이 접근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넓히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접근성을 급진화한다는 것이 규범적인 힘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접근의 방식과 의미를 전방위적으로 넓히고 문턱을 없애고 의미를 해방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긴 인용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장애인은 미래의 바깥에서 소환되고 아무도 원치 않는 미래의 표지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나와 우리는 불구의 미래를 상상해야만 한다. 장애인이 삭제된다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장애인, 특히 발달적·정신적 손상이 있는 사람, 빈곤한 사람, 젠더 일탈자, 그리고/또는 유색인, 생존을 위해 전형적이지 않은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강제불임, 분리, 시설화, 공평한 교육과 의료 및 사회적 서비스 거부, 폭력 및 학대, 시민권 보류 등을 경험해왔다. 이런 관행들은 여전히 너무 많이 행해지고 있으며, 각각의 관행들은 장애인의 미래를 크게 제한하고, 문자 그대로 미래를 단축해버리기도 한다. 우리 모두를 돌보지 않고, 포용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는 것은 나의 손실이자 우리의 손실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현재를 기대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장애를 탐구해야 한다.
- 본문 132~133쪽
세계에서 가장 나중에 퇴장하는 불구의 미래를 그리며
앨리슨 케이퍼 씀, 이명훈 옮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오월의봄, 2023
나영정(타리) taripink@gmail.com
퀴어활동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가족구성권연구소
앨리슨 케이퍼라는 실천적 이론가가 집필한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는 2013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래 학제 간 연구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비판적 장애 이론이 어떻게 상호적으로 침투하며 어떻게 서로의 정치학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지 사유하게 한다. 특히나 저자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운동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면서 불구의 시간과 미래성[ref] 앨리슨 케이퍼는 미래와 미래성을 둘러싼 담론을 치열한 정치적 논쟁의 장으로 가져온다. 역자 이명훈은 이 책에서 미래/미래성이 쓰이는 맥락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본문 24, 31쪽 역주를 참조할 수 있다.[/ref]을 탐구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비로소 그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던 미래를 발음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로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고민하고 제시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불구라는 개념은 제도화된 장애 정체성과 불화하면서 제도가 규정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의 경험과 관점을 여타의 사회 정의 운동과 결합하면서 정치적인 지향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ref] 이 책의 원제에서처럼 불구는 crip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불구를 저항적이며, 다양한 운동의 교차와 연합의 정치로 제시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장애여성공감의 창립 20주년 선언문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2018)가 있다.[/ref]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퀴어 정치가 부상했을 때와 유사한 정동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서 정치적 의미가 탈색되고 단지 문화적인 코드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나에게 불구, 퀴어한 불구는 정상성과 생산성 규범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정체성’이자 운동적 지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은 재생산 정의를 둘러싼 중요한 논쟁들을 농인과 시각장애인의 경험에 기반해 분석하면서 장애운동, 퀴어운동, 페미니즘운동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통로들을 만들어 낸다. 사회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광고판을 분석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지배 규범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퀴어페미니즘이 그린 사이보그주의와 에코페미니즘을 퀴어장애학의 관점으로 비판하면서 사이보그의 유산과 환경주의를 불구화한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사회운동 안에서 어떻게 반-비장애중심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바람직한 퀴어/페미니스트/불구의 세계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을지를 실험한다. 그것을 위해 트랜스젠더퀴어의 화장실 접근, 환경 정의, 재생산 권리 및 재생산 정의를 탐구한다. 이 책이 이명훈의 사려 깊고 끈질긴 번역 노동을 거쳐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페미니스트장애학, 퀴어페미니즘, 퀴어장애학이 넓혀 왔던 사고의 지평을 과연 사회운동의 실천에 충분히 적용했는가를 돌아볼 시점이라고 느꼈다.
제도로의 통합과 제도의 ‘불구화’ 사이 긴장
앨리슨 케이퍼는 임신 중지를 둘러싼 투쟁에서, 동성 결혼을 둘러싼 투쟁에서 찬성과 반대 진영 모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싸운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사회운동이 권리, 정의, 욕구, 자율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관한 것으로 수렴되는 것을 비판하는 리 에델만의 논의를 소개한다.[ref] 리 에델만이 비판하는 재생산 미래주의는 이성애 핵가족만이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생산성을 가지며, 이들이 자녀를 재생산하는 행위를 통해서 바람직한 미래가 구축된다고 여기는 이데올로기이다.[/ref] 그러나 곧바로 리 에델만을 비판하는데, 그때 등장하는 아이의 형상은 ‘백인’의 ‘건강한’ 아이이기 때문에 미래를 상상할 때 장애인은 종종 시간 밖으로 내던져지거나 혹은 진보의 길을 가로막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퀴어 아이들, 유색인 아이들, 거리에 있는 아이들을 비롯해 재생산 미래주의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은 모두 끊임없이 아프고 병적이고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치부되어 왔다”(본문 97쪽)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생학적 분리와 인종, 계급, 장애로 인해 강제로 미래성이 제거된 이들의 위치에서 과거와 현재의 억압을 문제화하고, 권리의 언어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퀴어가 경험해 온 차별을 모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이러한 범주들이 서로에 의해 구성한다고 주장하려고 한다”(본문 99쪽)라고 했다. 나는 앨리슨 케이퍼의 이러한 논지에 깊이 동의한다. 서로가 경험하는 억압이 서로에 의해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억압을 설명할 수도, 억압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고안할 수도 없다. 이러한 논지는 이 글을 쓸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불구의 정치로서 재생산 미래주의를 비판해 나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재생산 정의 운동과 가족구성권 운동을 동시에 해 나가는 활동가로서, 이 질문은 여러 가지 영역을 관통하여 다가온다. 불구의 정치는 빈곤한 가족이 생존하기 위해서 오히려 스스로 가족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도록 강요하는 복지 제도를 바꾸고, 탈가정한 청소년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주거권 보장을 위해서 싸우며, 가족구성권은커녕 프라이버시조차 박탈당한 시설 수용을 중증장애인이 강요당하지 않도록 운동하며, 결혼 중개 업체를 통해 결혼 이주를 하려면 HIV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고, 국경을 넘는 이유가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결혼의 진정성임을 증명해 내야 하는 이주여성들에게 가까이 간다. 법적인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할 수 없도록 만든 현재의 신분-가족-결혼 제도를 바꾸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결혼을 선택하고 그 가족을 국가나 제3자의 개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생존해 나갈 수 없는 이들과, 애초에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 수 있는 해방이 무엇인지 답을 구하는 것이다.
동성 결혼 법제화를 위한 운동은 관계성을 인정받지 못해서 서로를 보호할 수 없는 고통, 관계가 인정되지 않아서 국가, 혈연 가족이나 제3자로부터 부당한 개입과 차별에 대해서 대처할 수 없는 고통,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사회적 권리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짐에 따라서 사회 보장의 혜택에서 제외되는 차별을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불구들의 운동은 이러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동성 커플도 혼인 지위를 획득하는 것, 혼인에 대한 선택권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이 정상가족 체제를 바꿈으로써 고통의 근원을 해소해 나가는 운동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 이 또한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하다고 주장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퀴어를 포함하는 불구들은 혼인이 국가와 인구를 구성하고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언제나 불화해 왔고, 혼인과 혈연 관계만을 정상으로 삼는 신분 제도가 소수자들에게 얼마나 큰 질곡이 되었는가 또한 생생히 겪어 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혼인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 제도로부터 이탈한 이들과 퀴어들은 또 다른 정치적인 연합을 구성하고 결속과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왔고, 현재도 그러한 미래를 열망하며 추진해 나가고 있다. 초점이 다른 운동은 서로를 보충하고 때로는 경합하면서 진정으로 모두에게 열린 접근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ref] 가족구성권연구소는 2023년 7월부터 9월까지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통해 “퀴어가족정치의 장, 사회적 재생산 위기에 응답하다”라는 제목으로 여섯 편의 글을 연재했다. 동성 결혼이나 생활동반자 등록법 등 법적 논의로 수렴될 수 없는 가족 정치-가족 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가족구성권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는 기사였다.[/ref]
나는 책을 읽으면서 대구 지역의 에이즈 운동이 왜 중고령의 감염인들을 법적 장애인으로 등록하려는 데 온 힘을 다 쏟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ref]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레드리본인권연대 등은 2022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HIV 감염인 장애 인정을 위한 기자 회견’을 열고 법적 장애 인정과 권리를 요구했다. “차별 속 HIV 감염인, 장애 인정은 언제쯤”, 〈웰페어뉴스〉, 2022년 4월 22일.[/ref] 중고령의 피엘[ref] People Living with HIV/AIDS, HIV/AIDS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줄임말.[/ref]은 가족과 사회적 관계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고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차별을 겪어 왔으며, 감염 이후 지속되는 빈곤한 삶에 지치고, 무참하게 반복되는 의료 기관에서의 진료 거부와 차별을 반복적으로 겪어 왔다. 또한 대구 지역의 진보적 장애인 운동과 만나면서 사회가 강요하는 고립된 삶을 거부하는 이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충분히 해석되지 않은 경험들이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HIV/AIDS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깝다는 것을 감각하게 한 것 같다.
“돌봄과 서비스가 반복적으로 거부되는 시간, 자신의 경험이 계속해서 부인되는 시간, 서서히 증상이 악화되는 시간, 인정도 진단도 받지 못하는 시간, 기다림의 시간”(본문 111쪽)을 거쳐 온 중고령의 감염인들은 법적 장애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이 인정과 생존의 열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제도로 포섭된다는 것은 적법한 대상인지를 심사하는 권한을 국가에 넘겨준다는 것이고, 그 제도에 부합하는 사람인지 증명해 낼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인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고령 피엘의 법적 장애인 등록 운동이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 되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 포함될 것이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 온 사회복지 정책이 당사자를 모욕하는 구조적 한계 또한 당장 철폐되기 어렵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장애인이 되기 위한 투쟁 안에 이 모욕을 끝장내는 투쟁을 포함하는 것이다. 제도를 불구화하는 것, 그럼으로써 불구들이 덜 소외되고 사회적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투쟁이다.
불구들의 미래를 상상하기
앨리슨 케이퍼의 문장을 읽고 질문을 떠올린다. 장애를 가진 이들은 미래를 그릴 수 있는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해석된 현재와 미래는 비장애중심주의 세계관에 균열을 내고 있는가? 장애가 포함된 해방적 비전은 과연 진보적 운동이 그리는 비전에 통합되고 있는가? 정상성과 생산성에 도전하는 불구의 정치는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정신성이 강제적 이성애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이 지향하는 미래와 대안적인 사회의 모습을 그릴 때 장애를 미래에서 삭제해 왔던 그 지배 서사에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사회운동 전반에는 어떤가? 진보와 성장은 여전히 유효한가? 기후정의운동은 체제 전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앨리슨 케이퍼가 비판하는 장애인에게 닫힌 미래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다. 이 불확실함은 장애를 가진 이들이 기후 위기의 가장 ‘선한’ 피해자임을 넘어 대안 사회를 상상할 때 이들이 가진 필요와 욕구가 ‘특수한’ 필요로 치부되지 않고,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원칙 속에 통합될 수 있는지 알기 어렵게 한다. 이 어려움은 기후정의운동과 다른 운동이 관계를 맺기 어렵게 한다. 당신은 장애운동이 규정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 관심이 있는가? 퀴어운동이 전망하는 미래가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가? 그 미래가 단지 장애인과 퀴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장애가 더 많이 포함된, 퀴어한 방식으로 몸과 관계가 변형된 미래라면 그 미래는 여전히 당신에게 진보적 미래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저자가 질문했던 것처럼 현재의 장애와 퀴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현재 우리가 진보에 대해서 어떻게 사고하는지, 더 나은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언젠가 지구에서 멸망해야 할 인류를 생각한다. 특히 기후 정의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바라볼 때, ‘멸종 저항’ 등 기후 부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사회운동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영원히 지구에 산다는 인간 중심적 전제는 그 어떤 정당성도 현실성도 없어 보인다. 점점 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저항과 사회운동은 정의로운 멸망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멸망조차 부정의할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적 종말론적 세계관과는 가장 거리가 먼 미래관이다. 이후에 도래할 완전한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종말이 아니다. 내가 이 책과 함께 상상하는 불구의 미래는 멸망의 접근 가능성과 멸망의 방식에 개입하는 정치학을 통해 실현하는 미래이다. 나는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 가장 마지막에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문을 닫고 이 세계에서 퇴장하는 것을 열망한다. 오로지 성장이 아니라 퇴장을 위한 미래를 그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고 느낀다. 그 미래를 준비하는 불구의 속도와 방식을 고안하면서 기만적인 ‘지속 가능한 발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싶다. 그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고 싶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과제는 미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그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것”(본문 102쪽)이라는 저자의 주장과 통한다고 느낀다. “장애인을 미래 없음이라는 미래의 표지로 보고, 그들을 시간 밖으로 내쫓지 않으며, 미래를 다른 대안적 시간성의 일부로 상상하는 것”(본문 102쪽)이다. 다만 그 미래가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개별적인 생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종말을 함께 상상하고 준비함으로써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성취하기 어려운 실천들을 감행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퀴어와 불구가 조용히 사라지길 바라는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조금은 도식적으로 말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불구 이론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3장에서 분석했던 것처럼 많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는 장애도 질병도 없는 것이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퀴어의 권리 또한 마치 계급성이 없는 것처럼 단지 문화적인 경합인 것처럼 여겨진다. 퀴어에 대한 혐오를 분석할 때에도 혐오 세력이 가진 주류 권력에 대한 비판은 포함하지만 그 권력이 계급 등과 교차하면서 퀴어에게 어떻게 불균등하게 작동하는지는 거의 분석되지 않는다. 불구화된 퀴어는 다른 범주인 것처럼 여겨지거나 트랜스젠더 자체가 불구인 것처럼 환원된다.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우리가 가진 속성에서 기인한 것인 듯 환원하는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선 불구의 정치와 연합하는 것이 절실하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라는 제목이 책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방법론이라고 밝힌다. “나는 장애를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와 함께 분석의 범주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더 큰 목표는 차이에 관한 이런 범주들 내에서, 그리고 이 범주들을 통해서 장애가 어떻게 파악되는지를 다루는 것이다”(본문 62쪽)라고 밝힌다.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에서 장애는 어떻게 해방의 비전으로 그려지는가.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을 불구화하는 것은 단지 장애운동과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성과 생산성의 위계와 계급성을 운동의 지향과 방법론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이 새로운 정상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정한 해방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계속 심문하고 실험하기 위한 것이다.
접근성을 정치적 투쟁의 도구이자 지향으로 삼기
권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 권리가 거짓 성장에 복무하지 않고, 긴 퇴장을 준비하기 위한 개입이나 실천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와 함께 미래로부터 탈락된 존재들이 연대하며 삶에 대한 접근성을 함께 증진시키는 운동을 떠올린다. 앨리슨 케이퍼는 7장에서 여러 운동이 연합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재생산 정의 운동에서 장애인이 프로라이프(Pro-life) 운동을 향해 “내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장애를 가진 이들의 생명이 사소하게 다루어지는 구조적 폭력에 연합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임신 중지 운동의 정당성과 결집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프로라이프는 종교 권력과 시설 운영의 인프라를 이용해 장애인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면서 ‘생명’ 담론을 전유하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 권력의 기만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장애인과 부랑인의 탈시설 운동과 시설 폐쇄 운동의 연합도 반드시 필요하다. 재생산 정의 운동을 벌이는 현장에 장애인이, 한센인이, 부랑인이, ‘윤락여성’이, 미혼모가, 입양인이, 퀴어가 함께할 수 없다면, 임신·출산에 대한 선택권은 기존의 지배 질서를 전혀 넘어서지 않는, 허락받은 범위 내에서 행사하는 권리 아닌 권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낙태죄 폐지 운동에 장애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장애운동은 국가의 우생학적 가족 계획과, 국가가 임신 중지에 대한 여성의 결정을 죄악시하고 시민을 범죄화하면서 성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점을 폭로했다. 더불어 이러한 성적 질서가 장애를 가진 여성은 성적 주체로부터 배제하는 법적인 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ref]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성과재생산포럼 기획(2018),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후마니타스.[/ref] 윤락의 우려가 있는 여성들이 시설에 감금되고, 남성 부랑인과 합동 결혼을 거쳐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역사, 미혼모가 시설에서 아이를 강제로 입양 보낸 후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던 역사와 겹쳐진다. 최근 보호 출산제가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는 낙태죄 폐지를 통해서 열어 갈 미래를 훼손하는 백래시다. 이는 미혼모가 낳은, 양육이 어려운 조건에 놓인 이들, 장애나 질병을 가진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강제 이주시키려는 기획이다.[ref] 보호 출산제에 대한 문제는 다음의 성명을 참조하라. 〈[공동 성명] 여성과 아동, 누구도 보호하지 못하는 ‘보호 출산제’ 통과를 규탄한다 - 익명 출산이 대안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 나갈 것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2023년 10월 10일; 〈[성명] 보호 출산제는 정상가족주의를 보호할 뿐이다. 출생/출산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양산하는 보호 출산제 통과를 규탄한다〉, 가족구성권연구소, 2023년 10월 11일.[/ref] 이러한 반격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가가 보호 출산제로부터 숨겨진 존재가 어떻게 삶의 접근성을 확보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모두의 화장실 운동 또한 접근성과 관련된 보다 확대된 전선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와 퀴어가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은 물리적으로 장애인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논의와 결합하면서 모두의 화장실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의 맥락에서 화장실에 대한 인종 분리와 차별에 관한 역사와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운동이 만나면서 힘을 가지는 것처럼(본문 384쪽) 여기에서도 화장실을 둘러싼 복합적인 권력을 분석하고, 화장실에서 배제된 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도시 공간은 생산성을 중심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정상성을 보호하는 문화가 곧바로 안전으로 치환되어 왔기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은 단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장애인이 도시 공간을 이용할 것이라는 전제는 장애인이 지하철을 언제나 이용할 것이라는 전제와 만나고, 타인과 관계 맺고 일할 권리로 나아간다. 주민등록증 없이 살아가는 이가혜 님은 공원 공중화장실에 터를 잡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화장실을 관리한다. 그는 화장실 내에 설치된 넓은 장애인 화장실에 자신의 짐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그 화장실에서는 여러 명의 여성 홈리스가 살다가 자리를 옮겼다.[ref]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기획(2023),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 후마니타스, 11~31쪽.[/ref] 여전히 외곽 지역 터미널과 야외 화장실에서는 글로리홀을 이용해 섹스하는 이들이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시스젠더 여성을 위협하는가라는 허구적인 대립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 화장실을 자는 데, 먹는 데, 섹스하는 데 시용하는 불구들과 함께 모두의 화장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함께 규정하고, 안전을 재정의하는 노력이 접근성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들과 다 함께 모여 접근성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마지막으로 노프라이드(No-pride) 파티[ref] 노프라이드 파티에 대한 정보와 후기는 다음을 참조하라. linktr.ee/nopride2023; “‘프라이드’가 부끄럽게 여기는 불법 존재들의 삶과 정치 드러내기”, 〈비마이너〉, 2023년 7월 28일.[/ref]의 현장을 떠올린다. 2023년 7월 1일 서울 합정역 부근 카페에서 열린 이 파티는 정상성과 화합하는 성소수자 자긍심이 다양성이 아니라 배제의 정치라는 점을 주장하고,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이 책 덕분에 노프라이드 파티를 접근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감각하는 기획으로 다시 생각해 보았다. 프라이드 정치에서 배제되고 단속과 감금의 대상이 되는 약물 사용자, 성노동자, HIV 감염인, 전형적이지 않은 트랜스젠더퀴어, 그리고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구금에 반대하는 활동가 들이 중심이 되어서 준비했고, 농인들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통역 방식을 고민하지 않는 통역을 ‘시설화된 통역’이라고 비판하며 통역 접근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퀴어 농인 단체가 참여했다. 또한 당일 행사에서 자유 발언을 신청한 많은 퀴어들은 “강제적 비장애정신성”(본문 61쪽)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었다. “어딘가에 갇힌 삶, 초국적 기업의 착취 대상인 삶, 경찰의 단속 대상인 삶, 삶의 조건이 불법인 삶”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경찰의 통제와 초국적 제약회사의 핑크워싱이 없는 일시적인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누군가는 그곳에 존재할 수 있었다. 이 파티가 정기적으로 지속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다른 세계로 통하는 접근성을 조금은 확보했을까. 프라이드가 없는 불구적 미래를 더 많이 상상하고 추동해 나가는 것이 접근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넓히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접근성을 급진화한다는 것이 규범적인 힘을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접근의 방식과 의미를 전방위적으로 넓히고 문턱을 없애고 의미를 해방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긴 인용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