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후속 | 법화사회와 교육] 법은 사회적 관성에 따라 흐른다 | 새시비비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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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법화사회와 교육


법은 사회적 관성에 따라 흐른다

- 소수자에게 법의 보호는 아직 부족하다

 

새시비비

ericrow@daum.net

전북 중등 교사,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1-1

학교 도서관에 검색을 위한 컴퓨터들이 있다. 그 옆 벽에는 학생들이 학습 목적 이외의 용도로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게임 금지”라고 쓰여 있다. 어느 날인가 보니 누군가 “ㅁ”을 지웠다. “게이 금지”가 되었다. 학생들이 그 앞에서 서로 손가락질하며 “너는 금지야. 여기 들어오지 마”라고 한다. 다들 웃고 있다. 이 순간에 웃고 있었던 학생 가운데 하나가 A다. 그리고 이 순간을 목격한 교사 ㄱ은 얼마 전 A에게 커밍아웃을 받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교사인 ㄱ은 일단 학생들을 제지한 뒤, “ㅁ”을 빨간 글씨로 다시 채워 넣고 밑에 이렇게 쓴다. “성소수자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장난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학생들은 조용히 인사하고 흩어진다. A는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서 ㄱ에게 울면서 말한다. 너무 힘들다고. ㄱ은 이건 폭력이라고 말해 주지만 A는 아직 보호자들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았고, 사실을 알리게 되면 학교도 못 나올지 모른다면서 집엔 알리지 말라고 한다. ㄱ은 폭력에 대한 피해를 주장하려면 반드시 보호자에게 알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자신이 싫어진다. 언제까지 A에게 참으라고 해야 할까? 지속적으로 성소수자 인권에 관련한 내용을 인권교육뿐 아니라 교과 수업에 넣어서 교육하고 있지만 학생들의 행동에 큰 변화가 없다. 심지어 교육과정 설명회 때 한 보호자는 “게이 금지”와 관련하여 지도한 ㄱ의 행동을 문제 삼아 교장에게 학생의 성적 지향에 혼란을 주는 행위를 하는 교사라고 말하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고 ㄱ은 두 번에 걸쳐 조사를 받는다. 비록 조사 결과는 정당한 교육 활동으로 나왔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스트레스와 피로로 일단 관련한 교육 내용을 다음 학기에서 제외한다. ㄱ은 여전히 “게이냐”와 같은 폭력이 아닌 ‘장난’에 노출되며 ‘평범’하게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1-2

여학생 C와 남학생 D가 싸운다. 말싸움 중에 D는 C에게 명백한 성희롱 발언을 한다. 교사 ㄴ은 C의 신고를 받고 학교폭력 절차를 진행하고 이어 학교전담경찰관에게 신고한다. D의 보호자는 ㄴ에게 전화를 걸어 “학폭만 진행하면 되지 왜 경찰에 신고까지 하냐”고 소리친다. “우리 D를 괴롭히려고 신고했냐”며 몰아붙인다. ㄴ은 D의 보호자에게 성폭력 사안은 경찰 신고가 의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신고했다는 것을 D의 보호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져서 물어보자 D의 보호자는 담임 교사로부터 들었다고 말한다. ㄴ은 충격을 받았지만 어쨌든 일을 해야 하니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한다. 곧 학교전담경찰관이 도착해 간단한 조사를 진행한 후 직장이 아닌 곳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은 처벌법이 없으므로 학교폭력 처리 절차대로 진행하면 되고 D 학생에게 성희롱 예방을 위한 간단한 교육을 한 뒤 훈방 조치하고 복귀한다. 경찰이 가고 난 뒤,
D의 보호자는 ㄴ에게 더 화를 낸다. “어차피 형사적으로 처벌받지도 않는데 뭐 하러 경찰까지 불러서 겁을 주냐”고 한다. 그러고는 “경찰에게 조사받은 것만으로도 큰 가르침이 되었고 또 법도 없는데 학교장 자체 종결로 처리하고 생활지도를 잘하면 되지 않겠냐”는 식으로 마무리하자고 한다. C 학생의 보호자는 같은 자식 키우는 입장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한다. C 학생의 보호자는 이주 여성이다. 일단 한국어로 의사소통은 되지만 통역 등의 도움이 없으면 법적인 용어들이나 학교폭력 처리 절차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13개월 정도 되어 보이는 유아를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매우 버거워 보인다. C는 전에도 피부색을 이유로 주변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때도 절차를 최대한 설명했지만 많이 힘들어했고 결국 학교장 자체 종결 동의서에 서명했다.

 


학생과 보호자 그리고 교사 모두에게 법의 보호가 부족하다

 

이 사례들은 인권 침해 결정례 또는 제보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을 조합하여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기에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앞의 두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련한 폭력 사안이 입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나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과 같이 헌법보다 구체적으로 성소수자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함을 규정하는 기본법이 없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는 사회 전반의 법 감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정상성’에 부합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은 심각한 것으로 반드시 처벌해야 할 범죄로 인식되지만 그렇지 않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피해를 당한 소수자의 부주의 또는 소수자의 폭력 유발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에 대한 폭력 다수가 그러했고 특히 성소수자의 경우 ‘게이 패닉 방어’나 ‘트랜스 패닉 방어’ 개념이 이미 학생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어서 입법이나 판례가 성립되지 않은 성소수자 관련 학교폭력의 경우는 그 피해가 드러나지조차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의 상태에서도 이런 사건들의 신고가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신고가 되었다고 해도 학교폭력 처리 절차에서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많은 학교폭력 사안들이 처리 과정에서 신고자의 신원이 노출되는 경우가 많고, 조사 과정에서 관련 학생이 교무실 등 노출된 환경에서 확인서를 작성하는 등 기본적인 보호 조치조차도 지켜지지 않는다. 심지어 학교폭력 신고 의사를 학교전담경찰관에게 확인할 때 스피커폰으로 교사가 내용을 듣고 있는 상황에서 통화를 한 학생의 사례가 있을 정도다. 이렇게 인권이 잘 보호되지 않는 환경을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한 학생들이 자신의 민감한 사생활이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절차를 진행할 리 만무하다.

피해 학생의 보호자가 이주 여성이면 더 적극적인 권리 보장을 위한 장치가 필요한 것이 당연한데도 오히려 통역 제공 등의 조치를 학교에서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다수이고, 생각해 본다 해도 관련한 예산을 세우는 것조차 어렵다. 장애 학생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상태에서도 장애 학생의 당연한 권리를 시혜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관련 예산을 배정하는 데 인색한 학교 환경에서 이주배경의 학생도 아닌 보호자를 위한 통역 관련 예산을 요구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인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1-1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성소수자 학생의 보호자의 경우는 아예 자신이 보호하는 아동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이 보호자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도, 학생의 안전을 위해서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에 학교폭력 처리 절차를 진행하기 쉽지 않다.

교사가 성폭력에 대한 신고 의무를 이행했을 때 처음 겪게 되는 반응은 학교 내에서 조용히 해결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료 교사들의 비난 또는 곁눈질이다. 심지어 교사가 성폭력의 피해자인 경우에도 학생들의 장래에 해가 되는 결정에 부담을 느끼도록 하는 주변의 권유와 설득이 이어진다. 1-2 사례에서도 가해 학생을 신고한 것이 교사의 의무임에도 학생의 미래를 고려해 신고는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D의 학부모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신고를 해도 큰 불이익을 받지 않는데 왜 신고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지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회복적 사법, 회복적 해결 과정이기도 하다. 회복적 해결 과정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공동체의 민주적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 구성원 모두의 관심과 참여도 필요하다. 특히 가해자의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우물에서 숭늉 찾는 일 아닌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 위와 같은 사례를 언론 보도로 접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있다고 해도 대개는 가해 학생의 보호자들의 행위만 부각되어 교사에 대한 갑질 사례가 된다. 피해 학생과 그 보호자에 대한 보호 및 지원은 충분한가? 그리고 ㄴ의 신고 사실을 알린 D의 담임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만일 D의 담임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문제를 삼으면 또 다른 큰 사건이 된다. 그리고 동료 교사의 ‘사소한’ 실수를 눈감아 주지 못하고 사법적으로만 해결하려는 부적응 교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변호사가 말하기를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피해자들은 회사를 그만둘 각오로 문제를 제기한다고 한다. 교사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과연 공익 제보, 학교폭력 신고를 한 교사들에 대한 보호가 잘 된다면 지금보다 투명한 학교 운영이 이뤄지지 않겠는가? 교권 보호보다 중요한 것이 이런 교사를 잘 보호해 주는 것 아닌가?

 


법의 해석과 집행은 결국 사회의 관성에 따라 흐른다

 

물론 입법도 되어 있고 사법적 절차가 갖춰져 있어도 그 절차를 실행하는 주체들에 의해서 피해를 호소하거나 보호를 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역시 실제 사례들을 조합하여 만들었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 사례들을 검토하면 좋을 것이다.

 

2-1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B 학생이 ㄷ 교사에게 찾아와 신고할 것이 있다고 한다. 모범생으로 알려진 E(그의 보호자는 학교운영위원장이다)가 상습적으로 후배들 머리나 등을 때리면서 ‘기강’을 잡는데 교사들이 알아도 그냥 놔두는 것 같다고 한다. 오늘도 자율학습 시간에 시끄럽게 해서 방해가 된다며 E가 F의 머리를 때렸다고 한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서 무섭다고 한다. ㄷ에게 어떻게 좀 해 달라고 한다. ㄷ은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117로 신고한다. 신고하면서 교사들이 사건을 은폐,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으니 신고자인 자신에게 먼저 연락해 달라고 부탁한다. 다음 날 학교전담경찰관이 학교에 조사하러 왔는데 ㄷ은 이를 알지 못한다. 경찰관은 학교폭력 담당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신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간다. ㄷ이 그 소식을 접하고, 왜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냐고 하니, 절차대로 했을 뿐 문제 없다고 한다. 경찰관은 학교폭력 담당 교사가 신고자가 누군지 물었지만 자신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며, 자신에게 고마워하라고 한다.
F의 보호자가 뒤늦게 사안을 듣고 학교에 찾아와 CCTV를 보여 달라고 한다. 절차를 거쳐 학교폭력 담당 교사는 며칠 뒤 열람을 위해 내교할 것을 F의 보호자에게 요청한다. 열람 중 학교폭력 담당 교사는 ‘다른 학생에 가려서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잘 보이지 않고 각도상으로 어깨를 친 것 같다. 별다른 폭력적인 상황 없이 그냥 툭 치고 가는 것이니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보호자에게 말한다. ‘F가 ADHD 약을 복용하고 있고, 자주 수업 방해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도 학교에서 넘어가 주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라’고도 말한다. F의 보호자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만 이후에 어떻게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밀린 직장 일과 집안일도 부담스럽고 변호사 비용도 얼마나 들지 몰라 이쯤에서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신고 의사 철회를 확인해 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2-2

학생 G가 쉬는 시간에 갑자기 교무실로 와서 담임 교사 ㄹ에게 학교폭력을 신고하고 싶다고 한다. G는 학생 H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이 없는데 다른 학생들이 H에게 G가 H를 좋아한다고 놀리자 ‘어디 OO 주제에 날 좋아하냐, 나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네’라고 다 들리게 큰소리로 말해서 창피하고 죽고 싶은 심정이고, H와 다른 학생들을 모욕과 따돌림으로 신고하고 싶다고 한다. G는 조부모와 살고 있고, 부모와는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한다. G는 억울한 일을 겪어도 조부모는 자신을 충분히 보호할 수 없다고 느끼며, 종종 자신의 억울함을 폭력적으로 주변에 호소한다. 책상을 뒤집고 죽어 버릴 거라고 소란을 피운다든지,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보복하겠다고 위협한다. G의 담임은 그런 G가 매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평상시 별 문제 없는 H에 비해 G는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도 않았다. 담임은 G가 일방적으로 고백을 해서 H를 불편하게 한 점도 있으니 신고한다고 다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쁜 일이지만 심한 장난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담임이 꼭 H가 사과하도록 지도하겠다고 한다. 그 순간 폭발한 G는 담임에게 욕설을 하고 신고를 받아 주지 않았으니 112로 신고해도 뭐라 하지 말라고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간다. 이 문제로 G는 교권보호위원회에 불려 갔고, 출석 정지 처분을 받는다. H와 담임은 아무런 조치를 받지 않는다.

 

위 두 사례에서 F 학생과 G 학생 모두 자신이 받은 폭력에 대한 법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자신의 피해를 주장하기 위한 안전한 환경을 제공받지 못했고,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주체들(교사와 경찰관)이 학생에게 불리한 행동을 해도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항할 여유도 자원도 부족한 상태에 있다. 진술 과정을 조력받는다든지,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더 기대하기 어렵다. 법의 도움이 꼭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공익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든지,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는다든지, 학교 내 관련이 없는 교사에게 조언을 듣는다든지 하는 다른 경로도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여러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학생인권조례에는 학생들의 보다 안전한 진술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도 있다.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고자 노력하는 학교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여기에는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난 학생들의 권리는 보호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F 학생은 ADHD로 문제를 자주 일으키고 자율학습을 방해한 학생이라는 이유, G 학생은 자신의 억울함을 폭력적으로 호소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교사에게도 욕설을 한 학생이라는 이유로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학교폭력과 관련한 문제로 변호사와 상담을 하게 되어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여도 평소 수업을 자주 빠진다든지, 전에 학교폭력 가해 전력이 있다든지 하는 경우 피해를 호소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변호사들은 답변해 준다. 학교의 방침이나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학생다움에 부합하는 학생일수록 피해 호소를 잘 들어 주고, 그를 위한 보호도 강해진다. 여성에 대한 폭력 사안들과 유사하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다움, 피해자다움에 부합하는 경우는 잘 들어 주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에 대해서 오히려 피해자를 의심하고 피해자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학생의 경우 피해자다움에 부합되지 않는 피해 학생은 ‘구타 유발자’라고 하거나 ‘맞아도 싼 학생’으로 불리게 된다. 오히려 이런 학생은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한 학생으로 낙인찍혀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외면받기 쉽다. 여기에 보호자들 사이에서 소문까지 나면 그 학교에 발붙이고 살기 어렵다. 피해 학생의 보호자들 역시 고립되기 쉽고 그래서 피해 학생을 도울 자원이 더 없어진다. 피해 학생은 이미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고 학교 이미지를 망치고 있는 철부지고, 학습권을 침해한 가해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해 학생의 경우를 보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학생다움에 잘 부합된다.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잘 노는 학생, 거기에 자신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학습 분위기까지 나서서 형성하고자 노력하는 학생이다. E의 보호자는 학교를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학교운영위원장이다. E는 공동체에 기여도가 높은 가족의 구성원이며, H는 적어도 사회가 생각하는 정상 가족에 부합하는 가족에 속해 있다. 이들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해를 하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어린 나이에 ‘개념 없는 애들’(‘잼민이’, ‘금쪽이’이라고 부를 것이다)에게 ‘정의감’으로 과한 행동(이런 행위를 ‘참교육’ 또는 ‘사이다’라고 부르기도 할 것이다)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는 기회가 더 주어져야 하고, 청소년기의 불안정한 특성을 감안하여 회복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특성들을 보이면서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이들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양심 없는 학생들이거나,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더 이상 답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

이처럼 사회의 관성이 흘러가는 방향은 일상적으로 학생들에게도 교육되고 있다.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할 때 한 교사가 이렇게 교육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물건을 빌려 가고 갚지 않는 것은 갈취이고 명백한 학교폭력이지만 어떤 학생이 회의 중에 시끄럽게 해서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그 학생이 계속 시끄럽게 해서 화가 나서 한 대 때린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고 공동체 차원에서 조정을 통해 해결할 문제라고.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해 학생은 자신의 가해를 스스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거꾸로 자신의 피해를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기고 지속적인 피해에 계속 노출될 수도 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이것은 가스라이팅이다. 이것은 학교폭력 예방 교육이 아니고 ‘학교폭력 정당화 교육’이다. 이렇게 학교폭력을 바라보다 보면 그 절차도 당연히 학교폭력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특히 학교폭력 처리 절차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관성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폭력이 정당화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2-1 사례에서의 학교폭력 담당 교사와 학교전담경찰관이 그렇고, 2-2 사례에서의 담임 교사가 그렇다. 물론 주변에서 비슷한 상황을 묵인했던 교사들과 학생들, 보호자들 모두 그 흐름에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은 쪽이 권력을 가진 쪽이라는 점이고 그리고 이 논리에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도 동의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이거나 상관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가 매우 용이하다. 화를 내지 않아도, 큰 소리로 호소하지 않아도 자신의 억울함을 잘 들어 준다. 아니 거꾸로 잘 들어 주기 때문에 화를 낼 필요도 큰소리를 낼 필요도 없다. 반면 억울한 사람들은 화를 내고, 큰소리를 치고, 흥분하게 된다. 물론 권력이 있기 때문에 소리치고 화를 내는 것이 편한 경우도 있다. 이 역시 그래도 잘 들어 주기 때문에 그래도 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사회적 관성에서 벗어난 사람은 피해자다움을 보여 주지 않으면 권리를 구제받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권이다. 지금은 그 인권마저도 무력화되어 가는 상황이다.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개념 없는 사람들로 오인된다.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금쪽이’들이 되어 버렸다. ‘금쪽이’들에게 참교육을 하려면 인권이 방해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학생인권조례를 없애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의 시대적미션이다. 이것이 지금 사회의 관성이고 법의 절차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사법적 절차는 강화되어도 사회적 관성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는 같다. 그리고 학생인권조례의 폐지는 원치 않지만 교권도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관성에 동조하고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는 한 침묵하는 입장처럼 보인다.

 


구조적 폭력을 외면하고 개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국가

 

이제 마지막으로 입법적 절차를 보완하고 사회적 관성을 거슬러 공동체의 민주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도 결과가 좋지 않은 사례를 살펴보면 좋겠다. 역시 여러 사례들을 조합하고 상상력을 더해 만든 사례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3-1

먼저 1-1의 사례가 학생인권조례에 성적 지향을 사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또 교사가 인권센터에 인권 침해로 제3자 구제 신청을 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검토해 보는 것이다.

피해 학생이 피해 진술도 했고, 다행히 보호자가 커밍아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절차가 잘 진행된다. ‘ㅁ’을 지운 학생과 “나가”라고 놀렸던 학생 모두 특별 교육을 권고받고, 학교에도 특별 교육 권고가 이뤄진다. 그러나 특별 교육은 왜 받는지도 모르게 평상시 인권 교육처럼 이뤄지고, 가해 학생들의 보호자들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간다. 피해 학생의 권리 구제는 이뤄진 것일까?

 

3-2

체육 교사 ㄹ은 체육복을 입지 않은 학생들에 대해 훈육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 반 전체 학생들에게 토끼뜀을 시켰고 이를 힘들어하던 학생 J가 담임 교사 ㅁ과 상담 중에 말을 한다. 담임 교사는 인권센터 학생인권팀에 신고했고 며칠 뒤 조사가 나온다. 조사 결과 토끼뜀을 시킨 사실이 있지만 체육 수업의 일환이었고 학생들도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인권 침해가 아니라는 판단이 나온다. 문제 제기가 계속되자 ㄹ은 토끼뜀을 그만두고 대신 체력 단련을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오리걸음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두 사례 모두 학생인권조례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 금지, 체벌 금지 등이 명시된 전북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각색한 것이다. 입법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강화된 곳임에도 여전히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ref]전북 학생인권조례에서 직권 조사 기능이 사라짐에 따라 그나마 있던 작은 실질적 효과마저도 사라졌다. 학생들이 구제 신청을 하지 않으면 충분히 정보가 있고, 인권 침해가 심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ref] 그리고 각 사례의 교사들은 학생인권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하며 권리 구제를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그럼에도 왜 결과는 앞의 사례와 큰 차이가 없을까?

3-1은 성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에 대한 조치가 없이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들 간의 문제로 보고 구제 절차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학교의 특별 인권교육이 그나마 구조적 차별에 대한 대응책이 될 것인데,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교육은 사라지고 일반적인 수준의 인권교육으로 대체되어서 그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3-2는 ㄹ이 지속적으로 인권 침해를 했을 때, 그를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는 교장, 교감, 교육청 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보호자들 역시 좀 지나치기는 하지만 무리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보호자들이 다수여서 말할 수 없는 분위기인 탓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ㄹ 교사 개인에게 그 책임을 물었을 때, 과연 ㄹ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행동을 교정하려고 할 것인가? 폭력이 구조적으로 만성화되어 있는 학교에서 몇몇 개인을 처벌하거나 몇몇 개인의 피해를 구제하는 것만으로 학교를 변화시킬 수 없다. 다른 개인들로 대체될 뿐 구조가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로 입법의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이 있고 공동체 내의 민주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교사들이 소수 존재한다고 해도, 사회적 관성을 포함한 구조적 폭력을 정면으로 다루려는 공동체의 노력이 충분한 정도의 세기와 지속성을 갖고 발현되려면 정말 많은 자원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 노력을 국가가 하지 않아 몇몇 지자체에서 조례를 통해 그 씨앗을 뿌리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교폭력법)을 비롯해 국가가 학교에 제공한 것은 구조적 폭력에 대한 외면과 개인에 대한 책임 전가다. 입법의 방향과 권리 구제를 위한 절차의 방향은 명백하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폭넓은 입법 그리고 권리 구제를 위한 사회적 관성의 차단과 위계 구조의 완화 및 해체다. 물론 현재 국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폐지하고 학교폭력법은 처벌을 강화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그리고 내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학교들은 지나치게 사법화된 적이 없다. 아직도 법의 보호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과 구조화된 폭력에 대응하지 못하는 허술한 법망을 보았을 뿐이다. 흔히들 학교의 사법화가 강해졌다고 평가하지만 구조적 폭력에 대응할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책임 전가하는 처벌 말고 더 강해진 사법화는 내가 보기엔 없다. 그리고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았던 중요한 전제가 하나 더 있다. 법의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교사와 경찰관, 교장, 교감, 학교폭력 조사관, 인권 침해 조사관 등)과 피·가해 학생과 보호자들 모두 선의를 가지고 공공선을 위해 덕성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그들이 그렇다면 법은 필요 없을 것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을 늘리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민주 사회의 원리가 법치인 것은 왜인지, 민주시민 교육은 왜 법치주의를 중시하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특히 학생,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관성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일 수도 있는 우리는, 다수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과 구조화된 폭력에 대해 충분한 법적 보호를 받고 있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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