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시] 백합 외 | 임덕연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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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백 번 합을 맞춰야 피는 꽃

 

얼마나 그리워해야 꽃으로 피어날까

얼마나 합을 맞춰야 인연이 될까

이생에 못 맞춘 합

다음 생에서라도 맞춰질까

 

이름 획순으로 합을 맞춰보던 그대

혈액형으로 합을 맞춰보던 그대

별자리로, 열두 띠로 합을 맞춰보던 그대

사주 궁합으로 합을 맞춰보던 그대

 

오늘도 깊은 마음속 그리움을 불러내어

합을 맞추고 맞춰보는

그대, 백합

 

 


 

 

마늘종을 뽑다가

 


저 밑 깊숙이 가장 약한 곳에서

툭 끊어져 부드럽게 올라오는 동안

나는 최대한 힘을 약하게 주어

그 가늘게 떨면서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보이는

너의 속살을 바라보는 것이

정말 짜릿한 기쁨이었다

 

너의 중심에 자란 꽃대만 뽑고 싶었지만,

간혹 아주 드물게

굳게 움켜쥐고 살던 흙을 내려놓고

뿌리째 뽑히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지 않는 안타까움이었다

 

물과 장과 초를 일대일대일로 섞어

너를 뿍 잠기게 하고 한 서너 주 숙성시키면

단짠맵신 오묘한 맛과 질감을 즐길 수 있으리라

 

그러다 심연의 속마음은커녕

겉으로 드러난 매력도 제대로 못 보듯

뚝 하고 새끼손가락만 하게 끊어지는

허망함도 맛보는구나

 

야, 근디 니는 마늘종 뽑다가 뭐 한다냐

고것도 일이라고 힘드냐

아따, 천생에 땅만 파먹고 살 놈!

 

누군가 내 마음을 잡고 쭉 뽑아 당겨 가면

모른 척하고 따라갈까

오만 정 툭 끊어버릴까

내 삶 온전히 뿌리째 놓고 달려갈까

 

마늘종을 뽑으며

내 맘 쭉 뽑아 갈 이 있는 듯하여

하늘 한 번 쓱 쳐다본다.

 

 


 

 

고욤나무

 


감나무인지 고욤나무인지

내 어찌 아나

감나무라 해서 한 그루 사 와

뜰에 심었지

 

달달한 홍시를 기다리고

아삭한 단감을 기다리다

 

석삼년 기다리다 열린

작고 까만

 

고욤이네

 

고얀 놈이란 욕이 절로 나오려는데

떫은 것이 목에 걸려

고얌 고우얌

 

아, 어!


 


 

시작노트

지난가을에 심은 중부지방 마늘은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자라나 유월쯤이면 마늘 꽃대가 쭉 올라온다. 우리는 이 꽃대를 종이라 한다. 마늘은 종나면 끝이다. 이제 머지않아 마늘을 수확해야 할 시기가 된다. 마늘종 중간에 씨방이 생겨 새끼손톱만 한 마늘씨가 생기는데 이걸 씨로 심는 농부는 거의 없다. 대개 뿌리 쪽 마늘을 쪼개 심는다. 사람들은 마늘종 나면 일삼아 그 종을 뽑아낸다. 그래야 마늘 알이 더 굵어진다고 여긴다. 다음 생을 위해 마늘이 온 힘을 모아 씨를 만드는데 여기에 영양과 신경을 쓰다 보면 뿌리 쪽 마늘이 부실해질까 봐 그러는 것이다.

마늘종은 끝만 똑똑 자르는 것이 아니라 저 밑 깊숙이부터 뽑아내야 한다. 바늘로 밑부분 찔러 놓고 뽑으면 길게 뽑을 수 있다는 말들을 듣고 해 봤는데 일도 더디고, 꼭 바늘 찌른 곳이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마늘 대까지 끊어지는 경우도 있어 별로였다. 곧 수확을 앞둔 마늘이 뿌리째 뽑히는 일은 참 안타깝지만 의도하지 않게 종종 일어난다.

누군가가 나를 뽑아 간다면 좋아해야 할까. 거부해야 할까. 도마뱀 꼬리 자르고 도망가듯 정을 똑 끊고 냉정해야 할까. 마늘종을 뽑으며 마늘종 입장이 되어 보았다. 살면서 좋은 자리에 뽑혀 가 앉기도 하고, 그렇게 뽑혀 간 자리가 자기 삶을 송두리째 뽑히는 ‘쫑’ 자리가 될 수도 있다. 어디 뽑혀 가는 곳이 좋은 자리인지 뭔지 모르지만 냉정하게 거부하고 살던 대로 사는 것이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임덕연(sigolanduk@korea.kr) 1963년 충주생. 《산책》, 《남한강 편지》 등의 시집을 냈고, 《속담 하나 이야기 하나》 같은 옛이야기 책 서너 권, 《똥 먹은 사과》 같은 환경 동화도 서너 권 지었다. 여주에서 텃밭을 일구고 사는데 심은 작물보다 풀이 더 많다. 시를 쓴다고 하지만 다른 시인 시를 더 많이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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