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특집] 가난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워졌나 (채효정)

가난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워졌나

- 빈자의 교육과 가난한 학교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책 소개



수제비를 끓인다. 오늘 우리 집 청소년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다. 태풍 때문에 임시 휴교를 하고 수업을 원격 수업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학교 점심시간에 맞춰 오후 수업 전에 밥을 먹어야 한다. 교육청에서 문자 연락이 온 것은 어제 오후다. 점심 준비가 좀 늦어졌다. 수제비를 먹는 중에 오후 수업이 시작됐다. 청소년은 컴퓨터 앞으로 가서 출석 체크를 하고 와서 밥을 마저 먹는다. 5교시는 자율 학습이라고 한다. 코로나19로 한 학기 원격 수업을 해 보고 나서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 반토막 5교시는 금방 끝난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채팅으로 연결된 아주 잠깐, 청소년은 깔깔 거리고 웃는다. 


원격 수업 대체는 지난 학기부터 시작됐지만, 이번 학기에는 긴급하게 원격 수업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주에도 태풍이 예고되어 원격 수업을 할 거라고 한다. 어지간해선 휴교를 하지 않던 학교들이 예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등교 여부를 쉽게 결정을 내리는 것 같다. 코로나19 비상사태로 원격 수업이란 차선책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부는 한시적 조치였던 원격 수업을 전면 도입할 것이라 밝혔다. 


안전 제일주의가 우선 원칙이 되고, 안전 담론이 평등과 민주주의 원칙들을 집어삼킨다. 모두가 안전하기 위한 선택이 어떤 이들을 위험에 빠트린다면 어떻게 되는가? 정작 코로나19 이후의 상황은 그동안 ‘미래 학교’를 대표하던 원격 수업 모델이 가진 문제점을 폭로하고 있다. 모두가 ‘똑같은’ 스크린을 보고 있지만, 스크린 바깥에 펼쳐진 상황은 똑같지 않았다. 인터넷 강의를 편하게 들을 자기만의 방이 없는 아이들이 있었고, 남루한 집 안이 노출되는 것이 싫어 줌 강의를 거부하거나 비디오를 켜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재난은 가난을 찾아내고, 가난은 낙인을 피해 다시 숨는 숨바꼭질이 벌어진다. 미래 교육 혁신주의자들은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친구들과’ 배우는 학교를 구태의연한 낡은 교육으로, 획일적 수업으로 비판했지만, ‘같은 공간과 친구들’을 아이들은 그리워하고 있다. ‘같음(평등)’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해진 상황이다.


학교는 갑자기 쉬는데, 직장에서 갑자기 쉴 수 없는 노동자 부모와그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이들에겐 집이 가장 안전한 곳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겐 집이 학교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가정 안으로 들어온 빈곤, 실업, 폭력, 학대, 불안정 노동, 돌봄 노동의 위기 등 노동·사회·계급적 문제가 총망라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가정과 학교는 계급 정치의 최전선이며,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학교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학교로 연장되고 침투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교육 담론에서 ‘빈곤’ 문제가 사라졌다.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혁신 교육, 미래 교육, 창의 인재 교육 등의 담론들이다. 기술주의 혁신론이 부상하면서 빈곤 문제는 교육학적 주제에서 밀려났고, ‘가난’은 교육 영역에서 복지 영역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진로, 인권, 환경, 젠더, 비폭력 등 다른 의제들이 교육 담론의 중심을 차지했다.



가난은 어떻게 학교에서 지워졌나


‘가난’과 ‘폭력’은 근대 이후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가난과 폭력을 길들이고 퇴치하는 것이 시민과 노동자를 ‘양민’으로 양성하는 공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교육은 가난에서 벗어날 중요한 사다리로 여겨졌다.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상태 자체가 문제지만, 교육을 통해 그런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탈출 신화는 ‘개천’을 바꾸는 집단 저항의 힘을 성공의 ‘등용문’을 향한 경쟁으로 전환시켰다. 오늘날 학교는 약자들의 단결과 집단 저항을 사전 봉쇄하는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적 신념과 적자생존의 경쟁 논리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통치 기구다. 독재 시대의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 교육은 개인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최우선에 두는 소비-자유주의 교육으로 변모했다. 공동체교육은 한편으로는 국가주의적 공 교육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주의적 사私 교육에 의해 파괴되었다.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는 말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바람직한 계몽주의적 이상을 담은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는 노동자 계급의 불만이 지배 계급을 향한 분노와 투쟁의 방식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자기 억제와 기회라는 출구를 통해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야성을 억누르는 교육적 통치 기술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신화가 유지되기 위해서 학교는 가장假裝이라도 기회의 평등을 전시해야 했다. 부잣집의 ‘귀한’ 도련님과 가난한 집 ‘미천한’ 자식이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사에게, 같이 배우고, 같이 시험으로 평가를 받는다는 형식상의 평등은 ‘형식적으로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다. 국가가 제공하는 공교육의 틀 안으로 모든 국민을 끌어들이는 것은 끊임없이 국가가 배당한 ‘정상 위치’에서 벗어나려는 ‘위험한 불량자들’을 ‘양민’으로 순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노동자의 재생산에서도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지배 계급에도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형식적 평등의 조건에서조차, 지덕체의 어떤 탁월함도 핏줄이나 신분에 새겨져 있는 게 아니란 것이 종종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뛰어난 아이들’은 부자와 권력자들이 늘 말해 왔던 ‘우리가 탁월하기 때문에 다스린다’는 지배 원리를 근본에서 위협했다. 그것은 피지배 계급에겐 희망과 자부심을 주고 지배 계급에겐 불안과 낭패감을 안겨 주었다. 학교가 조금만 평등해져도 탁월성의 원리는 금방 훼손되었다. 성과 인종의 차별적 위계도 마찬가지였다. 여학생은 남학생을 이겼고, 흑인은 백인을 이겼다.


상징이 깨트려지고 예외가 탄생할 때마다 신화는 무너진다. 약자의 작은 승리가 지배의 균열에 가하는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 지금까지의 지배층이 계속 지배할 수 있는 탁월성의 신화를 재생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조금 평등해진 영역에서 빈자와 소수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거나 따라잡으면 부자들은 새로운 장벽을 만들어 냈다. 경제적 장벽과 문화적 장벽, 그리고 새로운 신화가 동원된다. ‘아이들을 공부만 잘하는 것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 ‘전인적 교양을 갖춘 창의적 인재가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점수 평가는 잘못되었다’, ‘과정 평가를 하자’. 이 또한 추격 당하는 상층 계급을 위한 새로운 신화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신화가 무너지면 다른 신화로 대체하면서, 학교는 똑똑한 사람들의 지배라는 신화의 원형을 지켜야 했다. 지성이 세습된다는 사회적 우생학을 입증하기 위해 게임의 규칙들이 계속 새롭게 발명되고 변경되었다. 교육 담론에서 가난이 사라진 것은 그와 관련 있다. 새로운 신화를 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지식정보산업과 금융자본주의 시기를 통해 성장한 ‘세습 중산층’이다. 금융-문화자본주의는 지식과 금융을 결합한 부유한 중간 계급 지식층을 탄생시켰다. 담론 투쟁과 제도적 혁신을 통해 교육을 자기의 계급 재생산에 유리하게 변용한 것도 이 신지식층 자유주의 부르주아였다.



평등에서 공정으로


지난 20년간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소득 격차와 함께 교육 격차를 급격히 심화시켰다. 빈곤과 불평등은 항시 연관되며, 가시화된 불평등은 빈곤 문제에 내재된 사회적 폭발력을 언제든 터뜨릴 수 있는 뇌관이다. 학교는 ‘기회의 평등’과 ‘경쟁의 공정함’을 전시적으로 입증하는 것을 통해 이 뇌관의 ‘안전핀’ 역할을 했다. 가난과 불평등이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공정한 경쟁에서 탈락한 개인의 실패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공정한 규칙’을 계속 개발하는 것이다. 불평등이 문제가 되면 ‘더 공정한’ 규칙을 도입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규칙의 공정성에 대한 방법적 논쟁이 가열될수록 가난과 불평등의 진짜 원인은 논의의 장에서 사라진다. 부자와 빈자,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간의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평등’의 문제는 제거되고, 도입되는 것은 언제나 개인들의 공정 시합이다. 평등에 대한 빈자의 정치적 요구는 언제나 ‘공정한 게임의 룰’로 변질된다. 제도 내에서 공정성에 대한 요구와 공정에 대한 상호 감시가 강력해지면, 상류층은 다시 제도 밖에서 불평등의 조건을 생산하고 강화한다. 평등한 학교를 원하지 않는 것은 최상류층만이 아니다. 새롭게 지배 계급으로 편입된 지식 중산층의 ‘계급 세습’ 욕망은 불안정한 기반만큼이나 더욱 강력하다. 이들 중산층은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그리고 그것이 공정해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대의명분과 납득할 만한 이유를 붙여 새로운 제도에 논리와 언어를 제공하는 것은 대부분 지식 분야에 종사하는 중산층 부르주아다.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는 〈미국 백인 부모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란 글이 실렸다.(리처드 카이저 씀, 한국판 2020년 9월) 경쟁이 심화된 시기 학벌 경쟁에서 줄어든 몫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 미국 백인 부모들의 행태는 한국의 중산층 부르주아에서 나타났던 전략과도 매우 흡사하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실리콘 밸리에 고학력 전문 직종 이주 인구와 비서구 상류층의 교육 목적 이민이 늘어나자 전통적인 상류층 거주지의 사립 명문 학교들에서 아시아계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경쟁에서 밀리자 백인 부모들은 ‘그들만의 성소’로 대피한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들의 몫을 잠식하지 않았을 때는 두각을 나타내는 아시아계 학생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아시아적 가치’를 칭찬하던 관용주의자였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자 돌변하여, ‘중국식 교육법’, ‘호랑이 엄마’, ‘시험 기계’ 등 인종주의와 경쟁심을 뒤섞은 비난을 숨김없이 퍼붓는다. 


성적 지상주의를 비난하는 우아한 중상류층이 ‘반교육적인 경쟁을 피해’ 아이들에게 독서와 운동과 사교를 제공할 수 있는 곳으로 찾아낸 도피처는 근교의 공립 학교다.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양상과 동일하다. 새로운 중산층이 유입된 공립 학교 인근은 집세가 오르고, 도시 인프라가 상류층의 기호와 소비 양식에 맞게 재구성되면서 원래 살던 가난한 주민들과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밀려나게 된다. 한국에서 신도시와 혁신학교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도 이와 마찬가지다. 신도시가 개발되고 아파트의 계급성이 학교에 침투하면, 원주민들은 주변화되고 이등 시민이 된다. ‘빌거’, ‘휴거’는 일부 ‘못된’ 아이들이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이등 시민에 대한 점령자의 감각이 탄생시킨 용어다. 학교는 중산층 자녀들이 ‘표준’이 되는 학교가 된다. 하층계급화한 이들은 자신에 의해서도, 타인에 의해서도 비가시화된다.


❶ 가난한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교육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다. 노동자 가정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신자유주의적 교육 파괴 사례는 브래디 미카코의 《아이들의 계급투쟁》 (사계절, 2019)을 참고.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계급 경쟁은 대학 입시 경쟁과 연결되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함께 부상한 것이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는 교수 대 학생 비율이 높은 소규모의 학부 대학이다. 중산층 부모들은 경쟁이 덜한 공립 학교에서 충분한 독서와 운동으로 소양을 닦은 다음, 유명 종합대 대신 교양 전문 단과대인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경쟁을 피하는’ 대안으로 택했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졸업 후에 하버드나 스탠포드로 진학하기에도 용이했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는 미국의 ‘리버럴’들이 새로 개척한 대학 진학 루트였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이 진보적인 중산층 부모들은 ‘경쟁’에 반대하고, 연구 중심 대형 대학의 문제점과 미국 고등교육의 폐해를 비판하며, 인문교육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바로 그런 대안적 교육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루트는 한국으로도 건너왔다. 2010년을 전후해서 한국에서 ‘교양대학’ 설립 붐이 일어날 때,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모델이 ‘모범 사례’로 종종 등장하곤 했다. 오늘날 ‘미네르바 스쿨’처럼, 그때는 ‘리버럴 아츠 스쿨’이 인기였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는 입시 경쟁, 교육 경쟁에서 탈주하려는 사람들의 ‘소박한 작은 학교’처럼 소개되었지만, 연간 평균 약 6500만 원에 달하는 높은 학비와, 문화·경제적 배경이 다른 계급의 진입을 봉쇄한 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입학사정관제’가 입시에서 사회·경제적 지위 배경의 가중치를 높이면서 가난한 학생들을 필터링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입학사정관제의 필요성과 논리를 제공했던 것은 누구였을까? ‘가혹한 입시 경쟁’을 비판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성적에 의해 재단되지 않고 다양한 개성과 재능을 인정받기를 원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 제도가 가난한 학생들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당시에도 명백했다. 하지만 마치 모든 학생들에게 입학사정관 앞에서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입증해 보일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호도되었고, 피해 계층의 문제는 ‘농어촌 할당제’나 ‘지역 균형 선발제’ 같은 구제책 정도로 보완되었을 뿐이다. 제도협의회나 공청회, 토론회 등 공론장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서울 중산층’이다. ‘서울 시민 모델’이 전국 표준이 된다. 우파 집권기에는 반체제적 기조를 보이던 시민단체들도 진보 정권에서는 체제 협력적 태도로 전환하고, 그럴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대변될 수 있는 통로는 점점 줄어든다.


당시 시민사회와 교육운동 진영에서는 우려는 표했지만, 제도 자체를 강력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수능 입시 제도와 그에 따른 학교교육 파행을, 이 제도가 해결은 못해도 완화 정도는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논점은 제도 운영에서의 ‘공정성, 객관성, 투명성’이었다. 공론장의 쟁점은 불공정성에 대한 우려와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방법적으로 보완할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 논의에 치중되었다. 교육 빈부 격차에 미칠 영향, 즉 이것이 ‘가난한 학생’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 계급적으로 어떤 불평등을 야기할지와 같은 교육 정치학의 주제는 치열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계급 불평등 해소 문제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선발 과정에 개입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를 개발하는 데 집중되었다. 같은 시기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자율형 사립고는 사실상 고교 서열화를 부활시켰다. 이때가 한국에서 교육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와 반대 투쟁이 전개된 마지막 계기였을 것이다. 이후 교육 담론에서는 빈곤과 불평등 문제가 주요 의제에서 빠지고 미래 교육, 혁신 교육, 창의 교육 등의 교육 혁신론이 전면에 들어섰다. 이후로 교육 의제는 보수 정권이나 진보 정권이나 별반 차이 없이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충실하게 확장해 왔다.



빈자의 교육과 부자의 교육


이명박 시대는 빈자의 교육과 부자의 교육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마지막 항전기였다. 당시 교육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전면화했던 두 가지 이슈가 있었는데, 자립형 사립고 도입(2010)과 무상 급식 도입(2012)이 그것이다. 빈자의 교육은 전자에선 졌고 후자에선 이겼다. 잘살건 못살건, 모든 학생이 ‘똑같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 평등의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무상 급식 운동에서도 실은 교육 평등보다는 ‘교육 복지’에 더 무게가 실렸다.


정치적 의제를 경제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통치의 고유한 문법이다. 이명박 정부는 자립형 사립고를 추진하면서 ‘다양성’과 ‘수월성’의 논리를 내세워 평등 교육을 ‘획일성’과 ‘하향 평준화’로 공격했다. ‘탁월성’을 ‘수월성’으로 바꿔 부른 전략은 대중적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개념 자체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데 기여했다. 다양성의 논리는 수월성의 논리를 뒷받침했는데, 그것은 다양한 상품들이 경쟁할 때 혁신이 이루어지고 탁월한 발명품이 창조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시장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고교 서열화를 고교 다양성으로 바꾸었고, 고교 다양성이 선택의 다양성을 보장한다고 선전했다. 높은 선택 비용이 선택의 장벽이 된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고교 간 경쟁이 더 나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호도했다. 이명박 정권은 학교를 브랜드화하고, 교육을 서비스로, 학생·학부모를 소비자로 완벽히 변신시켰다. 


이에 대한 자유주의 진보적 교육운동 진영의 대응은 고교 서열화 철폐와 대학 평준화가 아니라 혁신학교라는 다른 선택지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다양성과 수월성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다른 다양성 교육’과 ‘다른 수월성 교육’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입시 및 대학의 영역에서도 학벌 철폐와 입시 폐지 등 대학 서열화 폐지 운동은 퇴조하고 입시 제도 개선과 고교 교육 정상화가 주제가 되었다. 교육 불평등 문제는 사회의 구조적 개혁에서 미시적 제도 개혁 문제로 축소되었다.


학교 간 경쟁과 서열화를 조장했던 ‘선택의 다양성’은 학교 안으로도 침투했다. 플립 러닝, 거꾸로 학습법, 블렌디드 교육, 코칭 교육 등 ‘다양한’ 교수-학습법과 교육 프로그램이 교실 안에서 경쟁했다. 이런 교수-학습법 논쟁은 교사의 역량 강화와 자기 계발 경쟁을 강화했으며 이런 논쟁이 교육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빈곤이나 불평등 문제는 완전히 증발했다. 학교와 사회에서 빈곤 청소년과 빈곤 가정은 불평등을 폭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교육평등권의 권리 주체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성 청소년들의 ‘생리대’ 문제나, ‘빌거’, ‘휴거’ 논란에서 나타난 ‘빈곤 혐오’의 사례가 보여 주듯이, ‘빈자의 교육’은 정치적 주제가 되지 못했고, 가난은 대개 동정과 원조의 대상으로 표상되었다.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에 포섭된 빈곤 담론은 가난한 사람들을 ‘내부의 아프리카’ 로 만들었다. 


이 시기 부상한 청년 담론도 계급 담론보다는 세대 담론과 결합하여 청년 세대를 빈곤 세대로 일반화함으로써 청소년/청년 집단 내부의 계급 격차를 은폐했다. 청년 담론을 주도한 계급 자체가 빈곤층이 아니라 중산층이었다. 빈곤층에서 실업과 소득 하락 문제는 외환 위기 사태 이후부터 심각한 문제였지만, 청년 실업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은 여론 주도층에게 실감으로 닥쳐왔던 시기, 즉 중산층 자녀들의 학벌 취득과 상위권 대졸자들의 취업 경쟁이 불안정해진 시점부터다. 인문·교양교육을 강조하면서 설립된 교양교육대학의 취지는 불과 몇 해 만에 인문·사회 계열 정원을 축소하면서 취업에 용이하다는 이과 정원을 확대하는 방침으로 전환됐다. 대학교육에서 학문적 구도는 전통적인 ‘문과/이과’나 ‘사회과학/자연과학’ 구도에서 ‘경영/기술’ 구도로 재조정되었다.


대학에서 경영학과 정원은 인문·사회 계열 정원을 흡수하면서 계속 늘어났고 취업난 시대에 부전공, 복수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경영학이 사실상의 공통 교양, 필수 교양이 되었다. 이런 변화는 대학 졸업자들의 전반적인 시장주의적 전향과 보수 우경화를 촉진했는데, 진보 교육 진영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교육 내용에서 보면 정치적 사안을 두고서는 보수-진보가 치열하게 격돌했지만, ‘경영학’이 대학생 필수 교양이 되고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전 국민의 교사가 되는 동안, 진보적 교육운동은 그에 대한 대응에는 무력했다. 뿐만 아니라 ‘기업가 정신’이나 ‘자기 혁신’, ‘역량 계발’, ‘사회적 투자’, ‘청년 창업’ 등의 개념을 진보적 가치와 뒤섞으면서 경제적 합리성을 최우선으로 행동하는 21세기형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지금 공정성 논리로 차별을 옹호하는 반평등주의자들은 다른 곳에서 온 괴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진보 교육감 시대의 민주시민교육 안에서 태어났다.


우파의 교육 정책이 지배층의 논리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교육의 불평등을 지지했다면, 중간 계급 지식층 자유주의자들의 교육 혁신론은 불평등을 비판하면서 평등을 가장했다. ‘빈자의 교육’ 관점에서 보자면 노골적으로 ‘부자의 교육’ 논리를 들이대는 전자보다, 교육 불평등을 비판하면서도 그 대안은 ‘공정한 경쟁’ 같은 시장주의적 타협에서 찾는 후자의 경우가 훨씬 싸우기 힘든 대상이다. 입학사정관제, 자율형 사립고, 혁신학교, 자유 학기제, 고교 선택제, 고교 학점제 등 노무현 정부 이후 추진되어온 교육 제도 개편은 전반적으로, 진보든 보수든 어떤 정권에서든지 10%의 계급 재생산에 복무하는, 모두 중상류층의 계급 재생산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제도적 혁신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빈자의 교육’은 완전히 도태되었다. 가난한 아이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다. 점수로 줄 세우기가 스펙으로 줄 세우기로 대체되고 도농 간·계급 간 격차가 점점 심화되었던 이 시기는, 학교 현장에서 보자면 학업 외 운동, 싸움, 놀이, 인기, 리더십 등 다른 분야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분배되던 ‘공부 아닌 1등’의 몫이 사라진 시기였고, 성적 우등생이 모든 분야의 우등생이 되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시민교육, 민주교육, 인문교육 등의 이름으로 수행된 ‘시민교양교육’이 진보적 교육 실천을 대표했지만, 그 안에 노동자·민중의 철학, 사상, 문화, 예술을 탈환하려는 민중교육, 노동자 인문학의 자리는 없었다. 


진보적 교육운동은 국정 교과서 반대 투쟁 사례에서 보듯이 반일 대 친일,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의 구도 안에서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교육 투쟁’에서는 중산층 진보의 한계에 계속 부딪혔다. 여기에는 교사 집단을 비롯한 지식인 집단의 중산층화와 계급성 변화, 지식이 금융 자산으로의 환금성을 갖게 되면서 강남 좌파 같은 ‘부유한 지식층’이 출현한 것, 자본의 지식 계급에 대한 적극적 포섭 및 진보적 의제의 선점과 포획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교사가 부동산 투자를 할 수있는 계급이 되었다는 것은 학교의 가난한 아이들에겐 자신들을 이해하고 지지해 줄 조력자를 만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가난한 학교가 필요하다


노동인권교육에서 많이 사용하는 그림이 있다. 그림 속에는 나쁜 엄마와 좋은 엄마가 등장한다. 첫 번째 컷에서 한 엄마가 청소 노동자를 보며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된다.” 다음 컷에서 다른 엄마가 그 몰지각한 엄마를 가리키며 “너 공부 안 하면 저런 무식한 아줌마 같은 사람 된다”고 아이에게 말한다. 그러고는 청소 노동자를 가리키며, “너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저런 분들도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야 해”라고 말한다. 그림 속의 두 엄마는 보수와 진보의 논리를 대표한다. 


이 대화 속에서 ‘진보적 엄마’는 과연 좋은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보기엔 모두 — 이런 사례에서 시민을 여성인 ‘엄마’로 재현하는 데는 분명 성적 편견도 들어 있다 — ‘반노동적’ 관점을 대변하는 것이다. 청소 노동자는 둘 다로부터 ‘저런 사람’으로 호명된다. 한 사람은 경멸을 표하고, 한 사람은 동정을 표하지만, 빈자를 대상화하고 낮춰 보는 건 마찬가지다. ‘훌륭한 시민이 되어서 약자를 돕는 사람이 되겠다’거나, ‘사회적 기업가가 되어서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학생들은 나도 대학에서 많이 보았다. 이 ‘착한 학생들’은 ‘착한 시민교육’과 ‘중산층 진보’가 만들어 낸 체제 순응 진보주의자의 얼굴이었다.


청년 창업 프로젝트에서도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논리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하고 싶다는 이중 욕망을 충족시켜 줄 사례는 시장에 넘쳐난다. 진보와 혁신을 뒤섞은 자유주의 혁신 그룹의 진로교육 멘토들은, 좋은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자본주의 유지에 기여하면서 자본주의 폐해도 개선하겠다는 중산층 진보의 위선적 욕망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준다. 청년들에게서 저항의 날개를 잘라 내고, ‘가난을 팔아서’ 성공한 ‘청년 유누스’를 창조하는 것이 그들이 제공하는 최선의 모델이다. 


❷ 빈곤층을 대상으로 소액 대출을 해 주는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의 설립자. 그라민 은행을 통해 무하마드 유누스 일가는 큰돈을 벌었지만, 방글라데시의 빈곤층은 대출과 상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❸ [라미아 카림, 박소현 옮김(2015), 《가난을 팝니다》, 오월의봄] 참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 개혁가로 불리며, ‘극단을 피하는 합리적인 진보주의자(혁신주의자)’의 모델이 된다. 우파에 의해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주의 진보주의자들에겐 동정과 배려의 대상이다. ‘노동 존중’이 노동자를 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우위에서 노동자를 대상화하고 약자화하는 개념이듯이, 이런 혁신주의는 늘 가난을 혁신의 재료와 대상으로 동원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빈자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빈자의 교육’이다. 그것은 부자들에게 자신의 선의를 베풀 기회와 자부심을 주는 교육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주는 교육, 지배당하지 않을 기술과 저항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교육이다.


학교 밖 청소년 거리 조사 활동을 할 때 한 상담 교사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교직 초기의 열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던 그는 장기 결석을 막기 위해 결석 3일째가 되면 가정 방문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 그는 ‘가난을 처음 보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와 너무 다른 동네 풍경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반지하 주택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런데 가정 방문을 가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자동차로 출근해서 학교 근무를 마치면 다시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원거리 근무자들에겐, 주변 지역도, 이동하는 거리에서 펼쳐지는 삶의 모습도 마주칠 기회가 없다.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처럼 주거지에서 근무지로 이동하는 자동차의 이동성은, 어떤 곳에 대한 구체적 장소성을 감각에서 분리한다. 교사의 계급성 변화와 함께 이와 같은 주거의 격리와 거리의 격차도 교사들이 학교에서 가난의 문제를 인식하고 교육의 과제로 삼기에 힘든 요인이 된다. 오늘날 많은 학교와 교사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평등교육, 민주교육으로서의 ‘참교육’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학교 안에는 분명히 ‘가난’이 있다. 학교 밖에서 안으로 가난은 끊임없이 들어온다. 교육 현장에서 그 가난은 어떻게 드러나고 다뤄지고 있는가. 오늘날 교육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지난 20년간 계속 심화되어 온 빈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반교육’과 싸우는 것이다. 물론 빈곤이나 청년 실업이나 불평등 문제를 교육과정에서 해결할 수는 없다. 진로교육으로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평등교육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운동은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을 시작하는 곳이 될 수는 있다. 가난한 동네에 벽화 그려 주기처럼 낡은 학교의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기자재와 교구를 바꿔 주는 그런 지원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겐 가난한 학교와 가난한 교사가 필요하다. 전태일에겐 전태일들의 학교가, 김용균에겐 김용균들의 학교가 필요하다.


코로나19는 학교에서 은폐되었던 가난을 다시 찾아냈다. 비가시화되었던 존재들은 계속 가시화될 것이다. 어떻게 드러나게 할 것인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교육과정에서는 곳곳에 스며 있는 빈자에 대한 혐오와 동정을 양산하는 논리와 관점에 맞서 싸워야 한다. 기업·시장·금융의 관점을 주입하는 교육 담론이 학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과거 친일 사관과 역사 교과서 왜곡에 맞서 싸웠듯이, 그리고 독재를 미화하고 복종을 가르치는 노예의 도덕교육에 맞서 민주시민교육을 요구했듯이, 능력자meritos에게 무능한 자를 복종시키는 자본주의적 메리토크라시 교육에 맞서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빈자의 교육’에서 빈자란 단순한 소득 분포상에서의 하위 계층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이 개념을 롭 닉슨의 ‘빈자의 환경주의’ 개념에서 가져왔다.


❹ 롭 닉슨, 김홍옥 옮김(2020),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에코리브르.



빈자는 ‘느린 폭력’에 의해 서서히 자신의 역능과 존엄을 잃게 된 사람들이다. 느린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잘 인식되지 않는 제도화된 구조적 폭력을 일컫는다. 느린 폭력은 빈자의 불행과 도태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든다. 닉슨은 이 개념을 환경주의에 적용했지만, 오늘날 우리의 교육 제도 역시 빈자에 대한 거대한 폭력이다. 빈자는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며 계속해서 ‘없는 자’로 생산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능력 없는 자’, ‘쓸모없는 자’를 생산하고 그들이 스스로 패배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은 교육의 실패라기보다 전략이다. 쓸모없는 자들은 탁월한 자들의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필수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빈자의 교육’은 탁월성의 지배 논리에 저항할 가난한 사람들의 지식·학문·예술을 위한 교육을, 자본주의적 지배적 문화 양식에 대항하는 다양한 하위문화 및 반문화의 문화적 투쟁을 위한 교육 담론과 실천을 요청한다. 가난의 기술을 저항의 기술로 다시 되찾고, ‘가난한 학교’를 중심과 목표에 놓자는 것이다. 1%가 지배하고, 10%가 그 지배에 조력하는 사회다. 교육이 그 구조를 재생산한다. 빈자의 교육은 그것을 뒤집는 교육이다. 우리에겐 90%를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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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