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특집]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 학생인권, 교육 불가능에서 찾아낸 가능의 언어 | 박복선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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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학생인권,

교육 불가능에서 찾아낸

가능의 언어

 

박복선

pbs6201@gmail.com

전환교육연구소 소장,

본지 편집자문위원


 

학생인권조례, 그게 뭐라고

 

충남과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격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실소가 나왔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도대체 저들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학생인권조례가 싫었을 것이다. 싫으니 없애 버리는 거다. 주변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득표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내 계산은 좀 다르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찍어 주는 사람들이 그깟 학생인권조례를 내버려뒀다고 안 찍을까? 소위 중도층의 표심에는 별 영향을 미칠 거 같지 않다. ‘꼴통’ 이미지만 강화하는 거 아닌가? 결국 ‘긁어 부스럼’?

다른 가능성도 있겠다. 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어떤 ‘가능성’, 그러니까, 학교에 인권운동의 장이 열리는 것을 방지하는 것. 사실 지금은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학교가 소란스럽지는 않다. 수업을 못 하겠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는 요지부동이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는 인화성이 높다.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 청소년들이 인권을 요구하며 학교에서,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꼴은 정말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저들은 나 같은 입만 바쁜 진보적인 사람들보다 학생인권조례를 잘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절박했던 것이다.


 

그렇게 막은 올랐는데……

 

솔직히 나는 학생인권조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생인권 보장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학교를 떠난 사람에게 절실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체벌이 사라지고 두발 규제 같은 거 없애는 건 좋은 일이지만, 조례가 학교를 바꾼다는 말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너무 늦었고, 너무 미지근하다는 느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학교를 바꾼 인권 선언 –학생인권조례의 거의 모든 것》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이후 나온 몇 가지 실태 조사를 검토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낸다.

 

학생인권조례는 분명 학교 현장과 사회 인식 전반을 바꾸었고 학생인권을 신장시켰다. 그 효과는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한 지역에서 더 뚜렷하고,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지역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온전하지 않고, 학생인권조례에 명시된 권리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눈에 띄게 변화한 것은 두발 복장 규제를 비롯한 학교생활규정 같은 부분이다. 반면, 차별의 감소나 민주적 참여 등의 영역에서는 뚜렷한 효과가 확인되지 않는 점은 학생인권조례의 한계다. 그러므로 학생인권조례가 인권 침해를 감소시키고 억제하긴 했으나,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학교에 민주적·인권적인 원칙과 문화가 뿌리내렸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ref]공현·진냥(2024), 《학교를 바꾼 인권 선언 –학생인권조례의 거의 모든 것》, 교육공동체 벗, 192쪽.[/ref]

 

체벌이 사라지고, 두발 규제가 사라진 것만으로 큰 변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도 이견이 없다(‘큰’이라는 수식어를 쓰지는 않겠다). 체벌 금지와 두발 자유를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은 다 중요하다. 다만 그러한 외형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내면의 변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변하고 문화로 스며들지 않으면 학교는 변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우선 학교 안에서 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해결해 가는 주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학생인권조례는 인권운동 활동가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이에 대한 진보 교육감의 응답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학생인권조례의 역사를 쓴다면 오래전부터 학생인권운동을 해 온 청소년들의 분투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나? 대표적인 진보적 교사 조직인 전교조가 학생인권조례를 대놓고 반대할 리 없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가 열어 놓은 공간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전교조 교사들이 얼마나 있을까?

성문화된 인권을 현실에 더 많이 적용할수록, 시민들의 권리 의식도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인권 의식은 새로운 욕구를 산출하고, 그 욕구는 다시 인권의 새로운 목록을 요구한다”[ref]조효제(2008), 《인권의 풍경》, 교양인, 25쪽.[/ref]는 것이다. 이러한 말 안에 법이라는 형식의 강점과 약점이 모두 담겨 있다. 법의 힘은 강하다.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을 때만 그렇다.

 

A 교사는 자신이 소속된 학교가 학생들을 성적에 의해 차별하고 있다며 조사를 요청했다. 해당 학교는 성적순으로 자습실의 자리를 배정하고 있었으며 매번 시험 성적에 따라 자리를 이동시켰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의 동기 부여를 위해 시행한 조치라 하였으나 학생인권옹호관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후 성적에 따른 자습실 자리 배정 규칙은 폐기되었다.[ref]공현·진냥(2024), 앞의 책, 185쪽.[/ref] 


이런 활동이, 그리고 이런 활동이 널리 알려지는 것이, 이런 활동에 호응하는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 살아 있는 인권교육이다.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인권운동이다. 이런 활동을 학생들과 ‘함께’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이 글만 보아서는 어땠는지 알 수 없다). 인권에 대한 수업이나 강의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존엄’이라는 언어로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러한 인권교육이 병행되지 않는 학생인권조례는 ‘큰’ 변화를 이끌 수 없다.


 

불온하지 않은 학생인권조례

 

국민의힘 쪽 의원들이 잘 모르는 거 같은데, 학생인권조례는 착하고 순하다. 조례는 학생도 사람이고 존엄하다는 급진적인 정신을 담고 있지만, 학교 안에서 그것이 구현되는 방식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이 학생인권조례를 체벌 금지, 복장과 두발의 자유를 보장하는 규칙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물론 오독에 가깝지만, 실제로 그런 것만 건드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학생인권조례는 학교라는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사실상 국가의 교육 독점, 말단 관료로서의 교사, 병영과 같은 학교생활, ‘파이프라인 모델의 학습 방식’을 승인한다.

근대 학교는 자본과 결탁한 국가의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교육의 결과가 개인의 입신양명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했다. 이른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학교는 서열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구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은 상식이다. (물론 이렇게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공교육 시스템은 시민들이 쟁취한 진보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자본과 국가가 지배하는 공간이지만 늘 해방의 틈새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를 바꾸자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학교는 태생적으로 반인권적이다.


“선생님! 학생인권이고 체벌 금지고 이런 거 저는 관심 없어요. 어차피 학교는 공부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고 공부하는 놈들을 위한 곳이죠. 저 같은 애들은 체벌 금지, 학생인권 이런 거 보장된다고 인간 취급을 받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솔직히 인권 이야기할 때 웃겨요. 학교에서 인권이라니……. 수업 시간의 선생님의 눈빛, 공부 못해서 받는 멸시……. 결국 때리지 않는다는 것 빼고는 학교가 어떤 인권을 보장할 수 있죠? (……) 전 솔직히 학교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그게 최고의 학생인권이에요.”[ref]정용주(2011), 〈인권의 한계가 교육의 한계다〉, 《오늘의 교육》, 창간준비호, 29쪽.[/ref] 


2011년에 한 초등학교 교사는 중학생이 되어 찾아온 제자의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학생인권조례가 결국 ‘학교 가치에 순응하는 모범생’들의 인권을 제도화한 것이라는 가혹한(?) 평가를 했다. ‘학교가 없어지는 것이 최고의 학생인권’이라고 외치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 자체에 도전하지 않는 학생인권조례는 학교를 변화시킬 수 없다. 한때 ‘학교는 늙은 아버지 같다’며 학교를 ‘탈(脫)’한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배울 권리’에 대한 논의의 장을, 대안교육운동이라는 흐름을 만들어 냈다. 금지된 것을 상상하게 하는 불온함이 없다면 학생들에게 힘을 줄 수 없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메리토크라시 장치로서의 학교가 잘(?) 돌아가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과학적 진리고, 교육의 총량이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지나친’ 경쟁이 문제지만, 경쟁에서 이긴 사람(열심히 노력한 사람 =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부와 권력을 몰아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낙오자가 생기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완벽한 시스템은 아닐지 몰라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가장 가까운 방식이라고 믿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식탁은 달라도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었고, 급여는 달라도 누구나 일자리가 있었을 때는 메리토크라시의 작동 방식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다중적 위기가 심화하면서 ‘근대라는 기획’의 조력자였던 학교도 파탄이 났다. 교육 불가능이다!

교육 불가능은 학교 안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고, 당연히 학교를 조금 바꾼다고 해소될 문제도 아니다. 교육 불가능은 ‘지속불가능’의 변주적 표현이다. 메리토크라시 이데올로기의 유효 기간이 곧 종료될 시점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학교를 자꾸 수선하려고 할 게 아니라 학교의 역할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청소년기후행동은 3월 13일 정부와 국회에 기후 헌법소원을 청구하여 정부의 기후위기 방관이 국민의 특히나 청소년들의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기후 재난을 막을 수준으로 강화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 기후 헌법소원을 통해 기후 위기가 단순히 환경 문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임을 확산시켰습니다. 또한 모두가 기후 위기의 당사자이지만 더 오랫동안 기후 위기의 피해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청소년이 기후 위기의 당사자임을 사회 전반에 알렸습니다.[ref]청소년기후행동 웹페이지(youth4climateaction.org/changemakers).[/ref] 

 

학생인권은 ‘전환의 언어’가 될 수 있다. “기후 위기를 지구, 생태, 빙하, 해수면, 북극곰의 문제로 프레임하기보다 사람들 자신의 인권 문제로 프레임하는 것이 기후 행동을 촉발할 수 있는 효과가 크다.”[ref]조효제(2020), 《탄소 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15쪽.[/ref] 우리 시대에 인권은 새로운 삶을 담지한 대안 사상이다. 망가진 세상에서 세상을 망가뜨린 학교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그레타 툰베리의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 학생들의 파업으로 이어진 것은 얼마나 상징적인가!).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방법은 세상을 다시 그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조효제의 말처럼 인권은 “사회적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억압·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모두가 존엄한 삶을 사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다. 유토피아적 비전이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찾아낸 가능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지금 학생들과 둘러앉아 모두의 존엄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학생들과 자본 동맹을 향하여 소리 지르기. How d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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