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학생인권에 반대하게 하는
‘교권’의 함정
학생인권법에 반대하는 교원단체들에 대한 비판
김진
unlive93@hanmail.net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
아침부터 교무실 전화벨 소리가 차갑게 울린다. 언제부터인지 전화가 울리면 긴장이 먼저 된다. 학기 초에 이미 전화번호를 공개했기에 나를 찾는 전화는 아닐 텐데도 말이다. 교무실에 있다 보면 다른 반 담임 교사들의 전화 통화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듣게 된다. 담임 교사들은 하루에 한두 건씩 문제(?)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대부분 혼자 떠안게 된다. 다른 교사들도 각자의 문제 상황을 안고 있기에 서로를 돌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말 몇 마디로 해결 가능하지만, 어떤 일은 1~2시간을 이야기해도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다.
학생들과 양육자들을 만나는 일은 해마다 훨씬 더 어려워지고 있다. 거기다 돌아서면 수북히 쌓여 있는 업무 메신저와 업무 포털에 쌓인 공문까지, 보고 있자면 숨이 막혀 온다. 많은 선생님들이 정신과 상담을 받았거나, 지금 받고 있거나, 받고 싶어 한다.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는 매일 한두 번씩 듣거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소위 ‘교권’에 대한 관심과 보장 방안이 쏟아져 나왔다지만, 그 어떤 것도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교무실 안 분위기는 오늘도 침울하다. 교사들은 지금 힘들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교권’이라는 함정
하지만 지금 학교에서 교사들이 겪는 힘듦이 사실이라고 해서 학생인권조례나 학생인권법을 반대하고 나선 교원단체들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인권은 상충되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은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이고 헌법적인 권리로, 그 대상이 누구냐를 가리지 않으며 가려서도 안 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사람들은 자꾸 ‘교권’과 ‘학생인권’이 상충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함정은 ‘교권’에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교권’이 마치 ‘교사의 인권’을 말하는 것처럼 쓰이지만, 같은 뜻으로 보기 어렵다. 지금 이야기되는 ‘교권’은 보편적 권리가 아닌 ‘교사’만이 가지는 ‘특수한 무엇인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굳어 가고 있다. 이는 교원단체들의 주장을 따져 보면 더 분명해진다. 전교조가 최근 발표한 학생인권법에 대한 성명을 보자.
현재 발의된 학생인권법의 특정 생활지도 금지, 제한 조항은 기존 학생 생활지도 고시와 상충하는 내용으로서, 학교 현장에 큰 혼란과 분쟁을 발생시킬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학생 생활지도를 위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생활지도 고시와 충돌하는 특별법이 제정될 경우, 교사의 생활지도 권한이나 교육 활동이 매우 위축되고, 정당한 교육 활동마저 인권 침해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습니다.[ref]전교조(2024),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학생 인권 관련 법안에 대한 전교조 입장〉, 2024년 7월 10일.[/ref]
우선, ‘기존의 학생 생활지도 고시가 학생인권법과 상충’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에 이미 인권 침해 요소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이는 학생인권 침해 요소가 있는 생활 지도와 교육 활동조차 ‘정당한’ 생활 지도로 보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활 지도란 학생인권이라는 보편적 권리가 지켜질 때에만 ‘정당’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교사들의 생활 지도 권한이나 교육 활동이 매우 위축”될 것이라며 학생인권법이 ‘특별법’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특별법’이라는 용어를 부각시켜 마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권리를 ‘특권’처럼 왜곡시키고, ‘교권’이라는 특수한 ‘권한’ 또는 ‘권력’이 보편적 권리인 것처럼 뒤바꿔 놓는 착시 효과를 낳고 있다.
한편, 전교조의 이 성명은 올해 4월에 전교조가 발표한 충남·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한 성명과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이다. 충남·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해 전교조는, “학생인권과 교권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며, “학생인권조례 유무와 교육 활동 침해 사례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했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학생인권법의 내용은 학생인권조례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데, 이를 모를 리 없는 전교조가 학생인권조례는 지켜야 하고 학생인권법은 반대한다는 이상한 성명을 내놓은 것이다. 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 성명은 전교조가 ‘교권’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여론에 끌려다니고 있는 자신의 미래를 미리 비판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전교조는 모든 학생이 성별, 종교, 나이, 성적 등 그 어떤 이유에서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비롯한 학생인권을 지지하며, 인권 친화적인 학교를 지향합니다. 그렇기에 차별 금지 조항 등을 이유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한 세력의 공격에 맞서 왔습니다”[ref]전교조(2024), 앞의 글.[/ref]라고 밝혔듯 그동안 전교조는 학생인권의 우군이었다. 그런데 “현재 발의되고 있는 학생인권법의 내용은 조례 제정 이후 10여 년간 급변한 학교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변명 속에 이제 학생인권을 반대하는 세력과 한편이 되려 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의 교육
얼마 전, 전북교사노조 위원장은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기 싫은 것을 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교육의 본질이기에, 교육의 과정에서 학생의 권리가 일부 제한될 수밖에 없는 면이 반드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그것은 교육의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하나 짚어 줄 수도 있겠다. 특히 우리는 권리의 제한이 꼭 정당한 이유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노동기본권과 정치기본권이 없는 교원으로서 몸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북교사노조 위원장의 이 말은, 어쩌면 지금의 교육 목적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기도 한다. ‘교육의 본질’ 앞에 생략된 말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육, 특히 학교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다. 학교는 자본주의 체제의 질서를 교육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며, 권력을 배분하고 계급을 재생산한다.
학교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노동자가 되지만 ‘기업가 정신’을 교육하고, 끝도 없는 경쟁을 통해 능력주의를 내면화한다. 일상적인 평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근거로 한 차별은 ‘공정’으로 포장된다. 이를 통해 학교는 학생들이 시대가 바라는 착취당하기 좋은 노동자가 되도록 교육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모든 것을 직접 실행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교사, 교육 노동자다. 교육 노동자들은 체제가 요구하는 서비스를 안전(?)하게 방해(?)받지 않고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입시 경쟁이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학생들이 경쟁에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짜는 것도, 정부의 교육 정책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도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학교라는 시스템 속에서 튀지 않고 제 기능을 하며 인정받고 싶은 교사들의 욕망일 수 있다.
이러한 욕망과 정권의 의중이 일치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였다. 2023년에 고시안이 나왔을 때 교원단체들은 대체로 환영했다. 그들은 정말 몰랐을까? ‘학생을 수업 중에 분리시키는 것’과 ‘휴대전화를 학생과 분리시키는 것’이 ‘교사의 인권’을 보호하는 길이었을까? 최근 휴대전화 수거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교사들보다 양육자들 쪽에서 훨씬 더 높다. 우리 학교는 1년 전 규정을 개정하여 휴대전화를 자율 관리하고 있는데, 당시 교사들은 대체로 자율 관리를 찬성했다. 그런데 올해 다시 학생생활규정개정심의위원회가 열려 휴대전화를 수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교사들은 회의 결과를 들을 때까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야 휴대전화를 수거하라는 양육자들의 끈질기고 집요한 요구가 1년 동안 있었음을 알게 됐다. 이는 학생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휴대전화 전면 수거를 강행할 강력한 명분이 된다. 서이초 사건 1주기, 교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윤석열 정권은 뻔뻔스럽게도 “현장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ㄹ했다. 그가 보기에는 정말 긍정적 변화였을 것이다.
한편, 개인의 휴대전화는 그토록 문제가 된다고 말하면서, 정부가 나눠 주는 태블릿이나 디지털 교과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아이러니에는 관심이 없다. 학교가 기업의 거대한 상품 시장이 되어 가고 있다. ‘안 쓰더라도 디지털 교과서는 반드시 신청해야 한다’는 것이 디지털 교과서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이야기였다. 이렇게 교사의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견고히 지키고 있다. 결국 학교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터가 되고 있다. 우리가 놓친 수많은 안타까운 목숨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강요된 죽음이다.
‘교권’과 선 긋기
다시 ‘교권’ 문제로 돌아가 보자. 과거부터 ‘교권’이라는 말은 학생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용어였다. 이를 다르게 사용하려고 애썼던 것은 사실 전교조 같은 교원단체들이었다. ‘노동권’이라는 용어를 부담스러워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동권’이나 ‘인권’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교권’이 사용되었다. 전교조의 과거 성명이나 논평에서 교권이 언급된 경우는 대부분 관리자나 정부의 노동권·인권 침해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를 걷어차 버리고 원래의 권위적인 ‘교권’을 되살려 낸 것 역시 전교조 등 교원단체들이다.
이제 ‘시대적 변화’를 운운하며 ‘교권’에 대립하는 말로 ‘학생인권’을 점찍었다면, 지금의 ‘교권’은 더 이상 ‘교사의 인권’이나 ‘노동권’으로 해석될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나 학생인권법이 ‘교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권’을 ‘교사의 인권’이라고 착하게 해석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권’과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 안의 모든 주체들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인권적 시각에서 ‘권위’나 ‘권력’을 의미하는 ‘교권’은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권’을 지키려는 세력은 정권과 자본이다. 보수와 혐오 세력,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은 이미 알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인권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발휘되는 효과는 강력하다. 학생인권이 중요하지 않은 학교는, 지금보다 더 효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학생에 대한 지원 역시 함께 줄인다. 이는 다시 교육 노동자를 줄이고, 공적 책임을 줄인다. 양육자들은 사교육에 의존하는 비율을 올리고, 사교육비를 벌어들이기 위해 체제에 순응한다. 끊임없이 자본과 정권이 ‘학생인권조례 폐지’로 단결하고, ‘교권을 지키겠다’며 애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 동조하고 나선 교원단체들 역시 학교 구성원들을 각자의 이해관계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이를 노동조합이나 단체가 조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교원단체들은 이익 집단의 특권적 요구가 되어 버린 ‘교권’을 서로 더 경쟁적으로 주장하며 자본주의 체제 강화에 기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성원들을 더욱 각자도생하도록 내몰고 있다. 이러한 ‘교권’이 더는 사회 변혁적 요구일 수 없다. 이를 주장하는 교원단체 역시 변혁적 운동의 주체로 볼 수 없다.
동등한 주체로 만나기 위한 성찰과 연대
현재 교사들은 힘겹게 자신의 노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여전히 양육자, 학생과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은 교육 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민원 대응이라는 행정적 절차가 소통을 대체해 버린 듯하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양육자와 교사의 관계는 더욱 갈등의 골만 깊어졌다.
한편 교육부는 지난 5월, 〈17개 시도교육청 학교 민원 응대 조성 현황〉을 발표하며 교육청·교육지원청 통합민원팀 100% 조치 완료라고 했다. 하지만 현장 교사 94.8%는 민원실 사용 경험이 없다고 응답했고, 학교 민원에 대해 교사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의 대응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학교에는 민원 상담실은커녕 상담 공간도 없어서, 양육자가 상담을 이유로 학교를 방문할 경우 교무실의 모든 교사가 함께 그 내용을 듣게 되며 가시방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렇듯 교육부가 마련했다는 대책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학습권이 걱정이라면, 왜 교사들을 충원하지 않는가? 왜 학생들에게 더 많은 정서적 지원을 위한 방안은 마련하지 않는가? 왜 양육자들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시간을 보장해 주지 않는가? 왜 입시 경쟁을 제외한 것들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적 환경을 개선하지 않는가? 교원단체들은 이제 다른 질문들로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서이초 사건 이후 이제 1년이 지났다. 모두가 알고 있듯 해결된 것은 없다. 교사들의 삶이 불행한 것처럼, 학생과 양육자의 삶도 불행하다. 또한 학교에서는 교사만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교육 노동자들도 존재하고 우리는 서로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 교원단체들은 우리 교육의 문제는 윤석열 정권과 자본주의 체제 때문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그들에게 ‘교권’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직시하길 바란다. ‘학생인권 대 교권’ 프레임이 무엇을 망치고 있는지 정확히 보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운동의 중심에 있었다고 자부해 왔던 전교조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또한 그동안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왔다’는 학생에 대한 시혜적인 태도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것은 때로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는 전략을 구성하고 실행하는 이유가 되고, 때로는 보편적 인권에 반대하거나 차별과 폭력에 찬성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생과 양육자, 학교 안의 비교사 교육 노동자들을 동등하고 평등한 주체로, 동지로 대하는 것은 서로의 신뢰를 회복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사만이 교육의 전문가라는 전문가주의 또는 능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육은 학교 안의 또는 학교 밖의 모든 장면에서 일어난다. ‘수업을 하는 교사만이 교육을 한다’고 말하고, ‘돌봄은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는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재확인해야 한다. 교육 주체의 연결과 연대는 자본과 정권의 분리-분할 통제의 프레임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아 줄 것이다.
특집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학생인권에 반대하게 하는
‘교권’의 함정
학생인권법에 반대하는 교원단체들에 대한 비판
김진
unlive93@hanmail.net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
아침부터 교무실 전화벨 소리가 차갑게 울린다. 언제부터인지 전화가 울리면 긴장이 먼저 된다. 학기 초에 이미 전화번호를 공개했기에 나를 찾는 전화는 아닐 텐데도 말이다. 교무실에 있다 보면 다른 반 담임 교사들의 전화 통화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듣게 된다. 담임 교사들은 하루에 한두 건씩 문제(?)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대부분 혼자 떠안게 된다. 다른 교사들도 각자의 문제 상황을 안고 있기에 서로를 돌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말 몇 마디로 해결 가능하지만, 어떤 일은 1~2시간을 이야기해도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다.
학생들과 양육자들을 만나는 일은 해마다 훨씬 더 어려워지고 있다. 거기다 돌아서면 수북히 쌓여 있는 업무 메신저와 업무 포털에 쌓인 공문까지, 보고 있자면 숨이 막혀 온다. 많은 선생님들이 정신과 상담을 받았거나, 지금 받고 있거나, 받고 싶어 한다.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는 매일 한두 번씩 듣거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소위 ‘교권’에 대한 관심과 보장 방안이 쏟아져 나왔다지만, 그 어떤 것도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교무실 안 분위기는 오늘도 침울하다. 교사들은 지금 힘들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교권’이라는 함정
하지만 지금 학교에서 교사들이 겪는 힘듦이 사실이라고 해서 학생인권조례나 학생인권법을 반대하고 나선 교원단체들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인권은 상충되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은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이고 헌법적인 권리로, 그 대상이 누구냐를 가리지 않으며 가려서도 안 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사람들은 자꾸 ‘교권’과 ‘학생인권’이 상충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함정은 ‘교권’에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교권’이 마치 ‘교사의 인권’을 말하는 것처럼 쓰이지만, 같은 뜻으로 보기 어렵다. 지금 이야기되는 ‘교권’은 보편적 권리가 아닌 ‘교사’만이 가지는 ‘특수한 무엇인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굳어 가고 있다. 이는 교원단체들의 주장을 따져 보면 더 분명해진다. 전교조가 최근 발표한 학생인권법에 대한 성명을 보자.
현재 발의된 학생인권법의 특정 생활지도 금지, 제한 조항은 기존 학생 생활지도 고시와 상충하는 내용으로서, 학교 현장에 큰 혼란과 분쟁을 발생시킬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학생 생활지도를 위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생활지도 고시와 충돌하는 특별법이 제정될 경우, 교사의 생활지도 권한이나 교육 활동이 매우 위축되고, 정당한 교육 활동마저 인권 침해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습니다.[ref]전교조(2024),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학생 인권 관련 법안에 대한 전교조 입장〉, 2024년 7월 10일.[/ref]
우선, ‘기존의 학생 생활지도 고시가 학생인권법과 상충’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에 이미 인권 침해 요소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이는 학생인권 침해 요소가 있는 생활 지도와 교육 활동조차 ‘정당한’ 생활 지도로 보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활 지도란 학생인권이라는 보편적 권리가 지켜질 때에만 ‘정당’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교사들의 생활 지도 권한이나 교육 활동이 매우 위축”될 것이라며 학생인권법이 ‘특별법’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특별법’이라는 용어를 부각시켜 마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권리를 ‘특권’처럼 왜곡시키고, ‘교권’이라는 특수한 ‘권한’ 또는 ‘권력’이 보편적 권리인 것처럼 뒤바꿔 놓는 착시 효과를 낳고 있다.
한편, 전교조의 이 성명은 올해 4월에 전교조가 발표한 충남·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한 성명과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이다. 충남·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해 전교조는, “학생인권과 교권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며, “학생인권조례 유무와 교육 활동 침해 사례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했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학생인권법의 내용은 학생인권조례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데, 이를 모를 리 없는 전교조가 학생인권조례는 지켜야 하고 학생인권법은 반대한다는 이상한 성명을 내놓은 것이다. 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 성명은 전교조가 ‘교권’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여론에 끌려다니고 있는 자신의 미래를 미리 비판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전교조는 모든 학생이 성별, 종교, 나이, 성적 등 그 어떤 이유에서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비롯한 학생인권을 지지하며, 인권 친화적인 학교를 지향합니다. 그렇기에 차별 금지 조항 등을 이유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한 세력의 공격에 맞서 왔습니다”[ref]전교조(2024), 앞의 글.[/ref]라고 밝혔듯 그동안 전교조는 학생인권의 우군이었다. 그런데 “현재 발의되고 있는 학생인권법의 내용은 조례 제정 이후 10여 년간 급변한 학교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변명 속에 이제 학생인권을 반대하는 세력과 한편이 되려 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의 교육
얼마 전, 전북교사노조 위원장은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기 싫은 것을 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교육의 본질이기에, 교육의 과정에서 학생의 권리가 일부 제한될 수밖에 없는 면이 반드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그것은 교육의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하나 짚어 줄 수도 있겠다. 특히 우리는 권리의 제한이 꼭 정당한 이유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노동기본권과 정치기본권이 없는 교원으로서 몸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북교사노조 위원장의 이 말은, 어쩌면 지금의 교육 목적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기도 한다. ‘교육의 본질’ 앞에 생략된 말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육, 특히 학교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다. 학교는 자본주의 체제의 질서를 교육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며, 권력을 배분하고 계급을 재생산한다.
학교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노동자가 되지만 ‘기업가 정신’을 교육하고, 끝도 없는 경쟁을 통해 능력주의를 내면화한다. 일상적인 평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근거로 한 차별은 ‘공정’으로 포장된다. 이를 통해 학교는 학생들이 시대가 바라는 착취당하기 좋은 노동자가 되도록 교육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모든 것을 직접 실행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교사, 교육 노동자다. 교육 노동자들은 체제가 요구하는 서비스를 안전(?)하게 방해(?)받지 않고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입시 경쟁이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학생들이 경쟁에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짜는 것도, 정부의 교육 정책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도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학교라는 시스템 속에서 튀지 않고 제 기능을 하며 인정받고 싶은 교사들의 욕망일 수 있다.
이러한 욕망과 정권의 의중이 일치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였다. 2023년에 고시안이 나왔을 때 교원단체들은 대체로 환영했다. 그들은 정말 몰랐을까? ‘학생을 수업 중에 분리시키는 것’과 ‘휴대전화를 학생과 분리시키는 것’이 ‘교사의 인권’을 보호하는 길이었을까? 최근 휴대전화 수거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교사들보다 양육자들 쪽에서 훨씬 더 높다. 우리 학교는 1년 전 규정을 개정하여 휴대전화를 자율 관리하고 있는데, 당시 교사들은 대체로 자율 관리를 찬성했다. 그런데 올해 다시 학생생활규정개정심의위원회가 열려 휴대전화를 수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교사들은 회의 결과를 들을 때까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야 휴대전화를 수거하라는 양육자들의 끈질기고 집요한 요구가 1년 동안 있었음을 알게 됐다. 이는 학생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휴대전화 전면 수거를 강행할 강력한 명분이 된다. 서이초 사건 1주기, 교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윤석열 정권은 뻔뻔스럽게도 “현장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ㄹ했다. 그가 보기에는 정말 긍정적 변화였을 것이다.
한편, 개인의 휴대전화는 그토록 문제가 된다고 말하면서, 정부가 나눠 주는 태블릿이나 디지털 교과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아이러니에는 관심이 없다. 학교가 기업의 거대한 상품 시장이 되어 가고 있다. ‘안 쓰더라도 디지털 교과서는 반드시 신청해야 한다’는 것이 디지털 교과서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이야기였다. 이렇게 교사의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견고히 지키고 있다. 결국 학교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터가 되고 있다. 우리가 놓친 수많은 안타까운 목숨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강요된 죽음이다.
‘교권’과 선 긋기
다시 ‘교권’ 문제로 돌아가 보자. 과거부터 ‘교권’이라는 말은 학생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용어였다. 이를 다르게 사용하려고 애썼던 것은 사실 전교조 같은 교원단체들이었다. ‘노동권’이라는 용어를 부담스러워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동권’이나 ‘인권’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교권’이 사용되었다. 전교조의 과거 성명이나 논평에서 교권이 언급된 경우는 대부분 관리자나 정부의 노동권·인권 침해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를 걷어차 버리고 원래의 권위적인 ‘교권’을 되살려 낸 것 역시 전교조 등 교원단체들이다.
이제 ‘시대적 변화’를 운운하며 ‘교권’에 대립하는 말로 ‘학생인권’을 점찍었다면, 지금의 ‘교권’은 더 이상 ‘교사의 인권’이나 ‘노동권’으로 해석될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나 학생인권법이 ‘교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권’을 ‘교사의 인권’이라고 착하게 해석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권’과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 안의 모든 주체들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인권적 시각에서 ‘권위’나 ‘권력’을 의미하는 ‘교권’은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권’을 지키려는 세력은 정권과 자본이다. 보수와 혐오 세력,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은 이미 알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인권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발휘되는 효과는 강력하다. 학생인권이 중요하지 않은 학교는, 지금보다 더 효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학생에 대한 지원 역시 함께 줄인다. 이는 다시 교육 노동자를 줄이고, 공적 책임을 줄인다. 양육자들은 사교육에 의존하는 비율을 올리고, 사교육비를 벌어들이기 위해 체제에 순응한다. 끊임없이 자본과 정권이 ‘학생인권조례 폐지’로 단결하고, ‘교권을 지키겠다’며 애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 동조하고 나선 교원단체들 역시 학교 구성원들을 각자의 이해관계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이를 노동조합이나 단체가 조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교원단체들은 이익 집단의 특권적 요구가 되어 버린 ‘교권’을 서로 더 경쟁적으로 주장하며 자본주의 체제 강화에 기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성원들을 더욱 각자도생하도록 내몰고 있다. 이러한 ‘교권’이 더는 사회 변혁적 요구일 수 없다. 이를 주장하는 교원단체 역시 변혁적 운동의 주체로 볼 수 없다.
동등한 주체로 만나기 위한 성찰과 연대
현재 교사들은 힘겹게 자신의 노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여전히 양육자, 학생과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은 교육 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민원 대응이라는 행정적 절차가 소통을 대체해 버린 듯하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양육자와 교사의 관계는 더욱 갈등의 골만 깊어졌다.
한편 교육부는 지난 5월, 〈17개 시도교육청 학교 민원 응대 조성 현황〉을 발표하며 교육청·교육지원청 통합민원팀 100% 조치 완료라고 했다. 하지만 현장 교사 94.8%는 민원실 사용 경험이 없다고 응답했고, 학교 민원에 대해 교사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의 대응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학교에는 민원 상담실은커녕 상담 공간도 없어서, 양육자가 상담을 이유로 학교를 방문할 경우 교무실의 모든 교사가 함께 그 내용을 듣게 되며 가시방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렇듯 교육부가 마련했다는 대책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학습권이 걱정이라면, 왜 교사들을 충원하지 않는가? 왜 학생들에게 더 많은 정서적 지원을 위한 방안은 마련하지 않는가? 왜 양육자들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시간을 보장해 주지 않는가? 왜 입시 경쟁을 제외한 것들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적 환경을 개선하지 않는가? 교원단체들은 이제 다른 질문들로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서이초 사건 이후 이제 1년이 지났다. 모두가 알고 있듯 해결된 것은 없다. 교사들의 삶이 불행한 것처럼, 학생과 양육자의 삶도 불행하다. 또한 학교에서는 교사만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교육 노동자들도 존재하고 우리는 서로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 교원단체들은 우리 교육의 문제는 윤석열 정권과 자본주의 체제 때문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그들에게 ‘교권’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직시하길 바란다. ‘학생인권 대 교권’ 프레임이 무엇을 망치고 있는지 정확히 보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운동의 중심에 있었다고 자부해 왔던 전교조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또한 그동안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왔다’는 학생에 대한 시혜적인 태도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것은 때로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는 전략을 구성하고 실행하는 이유가 되고, 때로는 보편적 인권에 반대하거나 차별과 폭력에 찬성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생과 양육자, 학교 안의 비교사 교육 노동자들을 동등하고 평등한 주체로, 동지로 대하는 것은 서로의 신뢰를 회복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사만이 교육의 전문가라는 전문가주의 또는 능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육은 학교 안의 또는 학교 밖의 모든 장면에서 일어난다. ‘수업을 하는 교사만이 교육을 한다’고 말하고, ‘돌봄은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는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재확인해야 한다. 교육 주체의 연결과 연대는 자본과 정권의 분리-분할 통제의 프레임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