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이야기
오늘의 교육
2024 5·6 vol.80
연구 노동자로 일하다 잠깐 쉬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써야지 했던 계획과 달리 대부분의 시간을 드러누워 드라마 시리즈를 몰아서 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은 이야기’를 쓰려고 보니 드라마 〈감사합니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기업 내 비리를 감사하는 감사팀 이야기인데요. (추천할 만큼의 명작은 아닙니다.) 80호의 〈학생인권이 부딪혀 온 ‘유리장벽’〉과 특집 ‘돌봄 사회로의 전환과 교육의 과제’를 읽으면서, 드라마 6화 속 기술개발부서에서 일어난 ‘직장 내 괴롭힘’ 신고에 관한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장 지시로 중요 행사 이후로 조사를 미루기로 한 감사팀장에게 한 팀원이 “시연회가 중요하다고 해도 개인의 고통을 묵살할 만큼은 아니라고 본다”면서 “기술 유출 같은 큰 사건”이면 조사하지 않겠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현실에서도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존재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인권이 중요하지 않게 치부되는 일은 어쩌면 학교라는 사회에서 학생은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는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했던 연구에서 정당 활동을 하는 한 청소년으로부터 ‘비청소년인 동료 당원들이 자신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고 어린 사람 취급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청소년이 활동하고 출마하는 비교적 진보적인 정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소한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특정한 존재들, 힘없고 약한 존재들에게 가하는 사회적 폭력일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과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은 교사들의 심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중미의 글 〈우리가 아는 돌봄, 우리가 하고자 하는 돌봄〉에서 어린이는 ‘돌봄 대상자’가 아니며, 돌봄과 관련한 숱한 논쟁 속에는 돌봄의 주체인 어린이가 없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돌봄이 누군가에게만 필요한 것이라는 발상에서부터 이미 학교교육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 혹은 비전문적인 영역으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봄의 과정이 곧 사회화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아동, 장애인과 같은 특정 존재에게만 필요한 영역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인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른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단지 생존을 위해서도 동물과 식물에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인간은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독립적이고 완전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사고의 비약일 수 있겠지만 고민은 남성,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산층으로 대변되는 근대 주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돌봄은 근대 주체에서 빗겨 난 존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서 근대 주체에게 돌봄이 중요하지 않은 영역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요. 그런 점에서 장인하의 〈교사는 전문직을 꿈꾸는가?〉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돌봄과 교육의 대립 구도 자체가 늘 불편했는데, 돌봄과 교육을 분리할 수밖에 없는 “교사들의 모순적 위치와 정체성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가 된다고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백영경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돌봄과 교육〉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느끼며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중심에 돌봄”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것은 교육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존재의 취약함과 의존성을 받아들여야만 “돌봄의 커먼즈”로의 전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수입하자”라는 말이 나오는 게 현실이라니, 참 답답합니다. 끊임없이 구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요? 어쨌든 백영경의 말처럼 “이미 구획된 돌봄 의제에 갇히지 말고” “돌봄이란 무엇”인지 진지한 논의와 실천, 실천의 실패들이 쌓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기획 ‘이주배경 학생과 함께하는 학교’에서 소개한 실천, “다름과 함께하는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한채민 교사와 ‘모두의 다양성’ 활동가의 이야기를 감동하며 읽었습니다. 또 발랑의 〈전혀 다른 목소리, 학부모와 청소년〉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쌓여 돌봄의 커먼즈를 위한 재배치가 가능해질 거라고 희망을 가져 봅니다.
- 김시시(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읽은이야기
오늘의 교육
2024 5·6 vol.80
연구 노동자로 일하다 잠깐 쉬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써야지 했던 계획과 달리 대부분의 시간을 드러누워 드라마 시리즈를 몰아서 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은 이야기’를 쓰려고 보니 드라마 〈감사합니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기업 내 비리를 감사하는 감사팀 이야기인데요. (추천할 만큼의 명작은 아닙니다.) 80호의 〈학생인권이 부딪혀 온 ‘유리장벽’〉과 특집 ‘돌봄 사회로의 전환과 교육의 과제’를 읽으면서, 드라마 6화 속 기술개발부서에서 일어난 ‘직장 내 괴롭힘’ 신고에 관한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장 지시로 중요 행사 이후로 조사를 미루기로 한 감사팀장에게 한 팀원이 “시연회가 중요하다고 해도 개인의 고통을 묵살할 만큼은 아니라고 본다”면서 “기술 유출 같은 큰 사건”이면 조사하지 않겠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현실에서도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존재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인권이 중요하지 않게 치부되는 일은 어쩌면 학교라는 사회에서 학생은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는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했던 연구에서 정당 활동을 하는 한 청소년으로부터 ‘비청소년인 동료 당원들이 자신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고 어린 사람 취급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청소년이 활동하고 출마하는 비교적 진보적인 정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소한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특정한 존재들, 힘없고 약한 존재들에게 가하는 사회적 폭력일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과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은 교사들의 심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중미의 글 〈우리가 아는 돌봄, 우리가 하고자 하는 돌봄〉에서 어린이는 ‘돌봄 대상자’가 아니며, 돌봄과 관련한 숱한 논쟁 속에는 돌봄의 주체인 어린이가 없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돌봄이 누군가에게만 필요한 것이라는 발상에서부터 이미 학교교육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 혹은 비전문적인 영역으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봄의 과정이 곧 사회화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아동, 장애인과 같은 특정 존재에게만 필요한 영역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인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른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단지 생존을 위해서도 동물과 식물에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인간은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독립적이고 완전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사고의 비약일 수 있겠지만 고민은 남성,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산층으로 대변되는 근대 주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돌봄은 근대 주체에서 빗겨 난 존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서 근대 주체에게 돌봄이 중요하지 않은 영역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요. 그런 점에서 장인하의 〈교사는 전문직을 꿈꾸는가?〉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돌봄과 교육의 대립 구도 자체가 늘 불편했는데, 돌봄과 교육을 분리할 수밖에 없는 “교사들의 모순적 위치와 정체성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가 된다고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백영경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돌봄과 교육〉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느끼며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중심에 돌봄”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것은 교육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존재의 취약함과 의존성을 받아들여야만 “돌봄의 커먼즈”로의 전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수입하자”라는 말이 나오는 게 현실이라니, 참 답답합니다. 끊임없이 구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요? 어쨌든 백영경의 말처럼 “이미 구획된 돌봄 의제에 갇히지 말고” “돌봄이란 무엇”인지 진지한 논의와 실천, 실천의 실패들이 쌓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기획 ‘이주배경 학생과 함께하는 학교’에서 소개한 실천, “다름과 함께하는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한채민 교사와 ‘모두의 다양성’ 활동가의 이야기를 감동하며 읽었습니다. 또 발랑의 〈전혀 다른 목소리, 학부모와 청소년〉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쌓여 돌봄의 커먼즈를 위한 재배치가 가능해질 거라고 희망을 가져 봅니다.
- 김시시(교육공동체 벗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