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특별게재] 재난 시대, 학교의 가치 (엄기호)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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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게재

재난 시대, 학교의 가치

 

엄기호 uhmkiho@gmail.com

본지 편집자문위원, 사회학자

 



지역 사회의 중심이었던 학교

 

1970년대 초등학교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시골의 경우 면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면 인근 마을에서는 그 동네 개들도 전부 운동회 구경하러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학교 바깥으로는 장터가 펼쳐지고 학부모들은 나무 그늘 밑으로 돗자리를 깔았다. 자식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 모두가 구경을 왔다. 마을의 축제였다.


다른 문제에서도 학교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특히 학교는 ‘계몽’의 중심지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 바깥은 온갖 미신과 반과학적인 전통과 믿음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계몽되지 못한 태도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조국 근대화’의 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학교는 미신 타파와 악습 철폐를 위한 근대화의 전진 기지가 되어야 했다. 학생들부터 위생 관리와 영양 관리를 국가의 ‘과학’에 따라야 했다. 분식이 장려되었다. 도시락 검사도 있었다. 용모 검사를 할 때 손톱 밑에 때가 있으면 자로 아프게 맞았다. 위생과 식량 보호를 위해 쥐를 잡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꼬리를 잘라 와야 했다. 기생충 예방을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인분으로 비료를 주면 안 된다고 말하라고 학생들에게 시키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완장을 찼다. 미신 타파라는 이유로 무당이나 점집에 돌을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위생을 위해 일요일 아침에 아이들은 마을 청소에 동원되었다. 쓰레기를 줍고 버려진 비닐을 수거하고 시궁창에서 병을 꺼내기도 했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아이들을 동원하여 조국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당연히 이런 일련의 일들은 국가의 폭력적인 ‘동원’이었다. 학생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고 참여하지 않았을 때 감시와 처벌이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동원’과 ‘참여’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심연이 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마을 역시 계몽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학교는 근대화와 ‘계몽’을 위한 국가의 선봉대였고 학생들은 그 돌격대였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는 지역 사회의 중심이기도 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동원’이었지만 ‘사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학교는 지역 사회에 분명하고도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사회’의 입장에서라는 말은 국가의 강요뿐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가 ‘학교’의 지역 사회 내 역할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학교는 지역 사회의 사회적 삶을 활성화하고 좋은 삶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여 아이들의 말은 어른들에게도 들렸다. 어린이들은 동네 어른들이 비위생적인 일을 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했다. 어른들이 “누가 그러디?”라고 하면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랬어요”라고 대답했다. 어린이들이 이렇게 말할 때 “쓸데없는 소리 하네”라고 말하는 어른들보다는 “아이고, 학교에서 좋은 거 배웠네”라며 칭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이것이 국가의 완장질이었다는 것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말이다.


사실 이 모델은 지금도 제3세계 국가에서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몇 년 전 몽골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서몽골의 산간 오지를 방문하였는데 그때 마침 울란바토르에서 공부하다 방학을 맞아 집에 온 대학생이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 ‘마을’의 아이들이 초원을 뛰어놀다 들어와서 방문객들을 보고 신기해하며 뭔가를 먹으려고 하자 이 대학생이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손을 펼쳐 보고 “손을 씻고 먹어야지”라고 말했다. 이처럼 학교는 전염병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공중 보건과 위생에서 ‘과학적’ 지식과 태도를 지역 사회에 전파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학교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코로나19 팬데믹의 시대에 학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담론을 보면 기이할 정도로 지역 사회에서의 학교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학교가 문제가 안 될까를 고민하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학교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팬데믹 속 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오로지 어떻게 학교를 이 팬데믹에서 ‘안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와 무사히 입시를 치를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에 더해 시시때때로 해야 하는 전면적 비대면/온라인 교육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학력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 보자. 팬데믹에서 학교는 학교를 ‘안전’하게 하는 것, 그리고 정해진 ‘교육 일정’을 안전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은 과연 없는 것일까? 한국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데 학교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일까? 1970년대 공중 보건과 위생을 위해 ‘동원’된 전초 기지였던 학교에서 ‘동원’을 제거하고 ‘기여’의 부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학교가 재난의 시기에 좋은 삶을 위해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아니 솔직히 학교의 사회적 기여에 대해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을 듣자마자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이 “기여는 무슨. 학교 너나 잘하세요”일 테니까 말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학교에 아무런 역할도 기대하지 않는다. 당연히 학교에 있는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사고나 특목고가 주변의 집값을 상승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을 빼면 말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말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시대에 이 팬데믹을 헤쳐 나가는 데 학교와 학생들의 기여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면 모두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며 또한 서로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것은 학교와 학생을 팬데믹의 시한폭탄 같은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지역 사회 내에서 학교는 아무런 ‘사회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 그 학교에 있는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며 이번 팬데믹에 보다 더 확실해졌을 뿐이다. 사실 지금 코로나 국면에서 사회적으로 학교에 대한 담론은 학교를 바이러스의 ‘배양 접시’라고 전제해 두고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어디이든 바이러스의 배양 접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학교와 학생들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말이다.

 


재난 시대, 진지로서의 학교

 

나는 이런 점에서 ‘공’교육의 위기 담론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의 공은 흔히 사적이지private 않은 공공적인public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그러나 ‘공’의 의미에는 다른 한 가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쓰는 개념으로 하면 ‘공’에는 공번된catholic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말은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성이라는 뜻이다. ‘공’교육의 가치는 공적 자산이 투입된 공적인 과정이라는 말을 넘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교육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보편적 가치’가 가진 위험함도 있다. 언제나 보편성은 어떤 국지적 지식이나 인식이 마치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인 양 행세하며 다른 타자를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자의, 백인의, 중산층의,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것이 마치 진짜 보편인 것처럼 굴 때 여성의, 장애인의 지식과 경험은 특수한 것으로 간단히 무시될 수 있다. 존재론적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런 인식론적 폭력으로서의 보편성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지향’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보편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근대 사회가 인류의 역사에서 획기적으로 도달한 방법론이 ‘과학’이다. 과학을 맹신하고 절대화하는 것을 피한다면 보편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과학만큼 탁월한 방법론이 없다. ‘학문’으로서의 과학만이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유 방식으로서의 과학이며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방법으로서의 과학이며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논쟁하며 협력을 이끌어 내는 토대로서의 과학이다.


보편적 지식을 지향하는 한 과학은 인간의 인식과 지식을 부족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계몽’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성의 빛에 의해 구습이나 미신, 무지몽매와 같은 부족주의적 ‘지식’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 근대 교육의 핵심적 가치다. (물론 이 계몽이 계몽 자체를 계몽하지 않을 때 엄청난 폭력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말이다.) 근대 학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런 ‘과학’의 진지였다는 점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재난의 시대에 과학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유언비어와 가짜 뉴스가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하는 시대에는 말이다. 네트는 광활하지만 네트 안에서 각각 행위자들의 연결망은 ‘우물 안’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내가 믿고 보고 듣는 사람들의 정보망에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념을 빌리면 광활한 네트 안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부족주의적 행태를 보이며 부족이 결성되고 있는 셈이다. 인터넷이 온갖 인종주의와 혐오의 소굴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재난의 시대에 또 다른 재난이다. 다시 바우만의 개념을 빌리면 재난에 이은 ‘파생적’ 재난이다. 원인을 가지고 있는 첫 번째 공포는 통제할 수 있지만 공포로부터 나온 2차적 공포인 ‘파생적’ 공포는 대처할 수 없는 것처럼 ‘파생적’ 재난 역시 대처하기가 지극히 힘들다. 부족주의에 대한 ‘광신적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 부족의 실체는 사실상 컬트cult에 가깝다.


근대 ‘공’교육의 가치는 학교가 이런 부족주의적 미신과 가짜 뉴스에 맞서는 강력한 ‘진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모습은 있었다. 손을 자주 씻고, 손을 씻지 않은 상태에서는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지 말아야 하고, 물은 반드시 끓여 마셔야 하고, 인분을 비료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등. 이 모든 것을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웠고 또 지역 사회에 전파하는 매체가 되었다.


지금 필요한 것도 이런 것이다. 과학적 지식으로 재난에 대처하는 것을 방해하는 부족주의적 태도에 맞서는 것이다. “기후 위기란 없다”거나 “백신을 맞으면 죽는다”거나 “코로나19는 그저 독한 감기다” 같은 주장, 그리고 이 주장을 반복적으로 전파하며 재난에 대한 대처를 방해하고 협력을 교란하는 행위들. 사실 인류 역사에서 재난이 닥쳐오면 동시에 언제나 외면과 회피로서 이런 반과학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유언비어와 가짜 뉴스가 범람했다.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재난은 그 규모가 더 커질 수도 있고, 속력이 빨라질 수도 있다. 이것이 파생적 재난이다.


파생적 재난의 한 특징이 ‘부족주의’다. 일차적으로 재난은 ‘외부’로부터 온다. 그것이 아무리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재난에 대해 그 재난의 원인과 성격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외부’인 중국에서 왔다. 그것이 한국의 교회나 선교 네트워크를 통해 급속도로 번졌다고 하더라도 ‘일단’ 외부에서 온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재난은 기본적으로 외부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외부’에 대한 혐오와 공포는 ‘외부인’에 대한 잔인한 살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이 그랬다.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공포를 전가하기 가장 손쉬웠던 상대가 ‘외부인’인 조선인들이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전역에서 조선인 대학살이 벌어졌다. 일본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학살되었다. 이처럼 재난의 시기에는 수많은 인종주의적 폭력과 학살이 벌어지기 쉽다.

 


학교의 사회적 역할

 

공교육은 ‘공’의 의미에 맞게 이런 파생적 재난에 맞서는 진지가 될 수 있을까? 학교가 바이러스의 배양 접시이냐, 아니냐의 논정 –그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등교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서 좀 더 확장되어 우리 사회 전체를 바이러스의 배양 접시로 만들고 있는 이 부족주의에 맞서는 진지가 될 수 있을까?


기후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무슨 실천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천을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통해 지역 사회로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누군가는 기후 위기가 개인적인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학교를 통한 교육이 만사를 ‘개인적 실천화’의 문제로 돌린다고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학교의 한계이자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냉소적’으로 구조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반대로 개인적인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안 바뀌는지를 깨닫게 될 때 더욱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다. 구조는 부딪치면서 실감하는 것이지 멀리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조’를 이야기하는 ‘냉소적 허무주의자’를 누구보다 경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서로에게 던져 볼 만한 좋은 질문이 있다. 우리는 이 팬데믹의 시대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이/청소년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을 기대하는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가? ‘아이’가 뭘 배웠는가가 아니라 그 ‘아이’로부터 어른인 당신이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는 기대 말이다. 반대편으로 돌려 보면 학교는 어린이/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동네 사람들에게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는 기대 속에서 교육을 하고 있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말이 없다면, 교육과 마을이니 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사실 마을이 학교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 학교가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는 말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재난일 것이다. 학교와 학생이 아무런 사회적 역할도 없고 누구에게도 기대받지 않으며 누군가의 ‘돌봄’과 ‘대책’을 바라기만 하는 ‘문제’로 전락했다는 말일 테니 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존재에 기여하는 것을 통해 존재감을 고양한다. 기여하는 바가 없다면 존재감을 고양할 방법이 없다. 존재감 역시 사라지고 활동적 삶이 아니라 위축된 삶만 살아가야 한다. 동원이 아니라 참여의 방식으로, 학교가 이 팬데믹에서 사회에 기여할 방법이 없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가 학교가 부족주의에 맞서는 과학의 진지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더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적 자원의 공public교육에서 보편성에 대한 지향으로서의 과학적 사유와 태도, 토론하는 역량을 양성하는 교육으로서의 공catholic교육으로.




❶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다’라는 뜻을 지닌 ‘공변되다’ 의 옛말. ‘가톨릭(보편적)’이란 의미로 쓰인다. 1880년 발간된 《한·불자전》은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catholique’를 ‘공번되다’로 번역했으나 지금은 ‘공번되다’ 대신 ‘공변되다’ 혹은 ‘보편되다’라고 많이 쓴다. 〈가톨릭 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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