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특집] 《오늘의 교육》 주요 담론 톺아보기_근본을 사유하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다

202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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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주요 담론 톺아보기

 

근본을 사유하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다

 - 교육 불가능에서 코로나 시대의 교육까지

 



 01

정직하게 절망을 응시하다

- 교육 불가능과 희망의 페다고지

 

이진주

본지 기자


《오늘의 교육》 창간호(2011년 3·4월) 특집의 주제는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잠식된 교육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자기 계발’, ‘자기 책임’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정용주)과 승자독식의 룰이 강화되면서 자녀들을 경쟁의 승자로 만들기 위해 입시에 뛰어든 매니저 엄마의 실상(박소진), 학교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빈곤층 10대 여성들이 만들어 내는 비유예 문화(민가영) 등 신자유주의가 교육 주체들의 내면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다각도로 추적하고 있지만, 많은 독자들에게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인상 깊게 다가갔던 것은 이계삼의 글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였다. 이 글에서 이계삼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교실 붕괴 담론과는 다른 의미로서 ‘교육 불가능’을 사유한다. 교실 붕괴 현상이 민주화와 경제 성장으로 자유주의적 분위기에서 양육되고 소비문화에 노출된 세대가 학교로 진입하면서 권위적인 학교교육과 충돌하면서 생긴, 문화적 성격이 짙었다면, 교육 불가능은 한국의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연관된 심층적 현상으로 훨씬 광범위하고 짙은 농도로 학교 공간을 발본적으로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 이계삼의 해석이다. 이계삼은 학교가 교육 불가능의 공간이 되어 가는 상황이 학교를 통해 무언가를 얻을 게 있는 사람에게는 재앙일 수 있지만,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계삼의 글은 “나도, 우리들 모두도 폐허 위에 있지만 또한 출발점에 서 있다”라고 맺고 있지만, 많은 독자들, 특히 교사 독자들에게 교육 불가능은 절망의 언어로 다가갔던 것 같다. 다음 호(2011년 5·6월)에 실린 안준철의 글(〈이계삼 선생님께 -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를 읽고〉)에서는 이계삼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당혹스러움과 저항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서신 교환의 형태로 구성된 지면에서 “그래도 학교가 희망”이고 “지금 여기서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안준철의 다짐과 “어설픈 희망의 언어는 절망적인 현실을 유지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라는 이계삼의 답변이 부딪히는데, 이는 이후 이어지게 되는 교육 불가능에 대한 논쟁의 전조이기도 하다. 이후 《오늘의 교육》 지면을 통해 이계삼의 문제의식을 학교교육에 한정해서 사고하는 문제나 가능과 불가능의 이분법적 틀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글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당시의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드러났다. 이후에도 한동안 교육 불가능에 대한 리뷰는 주로 교사들의 언어로, 교육 현장의 문제로 사유된다(4호(2011년 9·10월)의 〈‘교육 불가능’과 《녹색평론》적 사유에 대한 소고〉(윤지형), 6호(2012년 1·2월)의 특집 ‘교육 불가능 시대, 교사는 가능한가’와 기획 ‘절망에서 희망을 읽다 -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읽고’ 등).

 


담론으로서 교육 불가능

 

17호(2013년 11·12월)에서 이혁규는 교육 불가능을 하나의 담론으로서 분석하기를 시도한다(〈‘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이 글은 주로 현장에서, 교사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 불가능 논쟁을 좀 더 학문의 영역으로, 연구자의 시선으로 옮겨 온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이자 교육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내부인이자 외부인인 경계인으로서 이혁규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글이기도 하다. 이혁규는 이 글에서 기존의 교실 붕괴 담론과 비교하여 교육 불가능이 가진 담론으로서 취약성을 꼬집는다. 이계삼은 이미 안준철에게 보낸 편지글을 통해 “교육 불가능이 하나 마나 한, 추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어차피 총론이고 세부적인 각론은 이후의 글쓰기와 실천으로 채워 놓으면 될 일”이라고 변호했지만, 이혁규는 분석 글을 통해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는 담론이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이기는 하지만, 담론으로서의 체계성이나 엄밀성이 다소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이혁규가 이계삼의 논지를 놓친 것인지 의도적으로 탈락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그의 글은 여러 의미 있는 해석을 담고 있다. 이혁규의 분석에서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라는 주장을 둘러싼 대립은 학교 현실에 대한 진단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 실천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혁규는 이 글에서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라는 주장이 곧바로 교육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학교교육을 곧 교육 일반과 등치시키는 학교 중심적인 사고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은 이어진다.

19호(2014년 3·4월)에서 정용주는 〈두려움을 넘어 희망을 조직하기〉라는 글을 통해 “교육 불가능성 테제는 학교를 넘어 우리 시대 교육에 대한 성찰인데, 학교교육/교사 담론으로 축소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24호(2015년 1·2월)에서 석영 역시 〈교육 불가능의 시대, 평생교육은 가능한가?〉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이 학교라는 제도만을 문제시하고 있지 않”은데,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을 둘러싼 논의 지형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은 사실상 학교교육의 문제와 위기에 대한 비판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교육 불가능 담론을 다시 사유할 때 필요한 관점은 교육의 문제를 학교라는 시공간 안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둘러싼 이 사회, 이 시대를 분석함으로써 어째서 교육이 불가능한 일이 되어 가고 있는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기회가 된다면, 이혁규와 정용주, 석영의 문제의식을 잇는 다양한 레퍼런스들이 생산되면 좋겠다.



학생/청소년의 관점으로 읽은 교육 불가능

 

이혁규의 글과 같은 호에 실린 공현의 글 〈교사 탓으로 보지 아니함〉, 그리고 19호(2014년 3·4월)의 ‘기획 - 교육 불가능 깊게 읽기, 다르게 읽기’ 중 청소년운동 활동가들의 좌담은 그동안 교사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교육 불가능 담론을 학생/청소년의 시선으로 옮겨 온 기획이다. 두 꼭지를 통해서 교사들이 교육 불가능성을 들었을 때 느끼는 직관과 학생/청소년의 그것이 온도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사들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갔던 교육 불가능이 학생/청소년에게는 굉장히 공감이 가는 진단이었다는 것이다. 공현은 글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은 아주 명쾌하게 다가온다”라고 말한다. 특히 좌담에서 “(교육 불가능은) 교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떻게 사회와 학교를 바꿀지 얘기하자는 적극적인 논의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교육 불가능을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왜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이야기만 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비관적인 것 같다”고 말하는 대목은, 교육 불가능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본질을 가장 잘 꿰뚫은 말이 아닐까 한다. 좌담을 진행한 공현은 “청소년들의 대화 속에서 교육 불가능이 일종의 ‘교육 무용론’으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는 거부감은 찾기 어려”웠다며, “교육 불가능을 현재 학교교육의 당연한 전제로 생각하고, 학교가 무의미한 청소년들과 함께 청소년운동이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는 한 참가자의 말을 전한다. 요컨대 ‘교육 불가능’과 관련하여 교육공동체 벗 안에서 만들어져 있는 쟁점들 그 자체가 하나의 편향성이나 ‘느낌’이 반영된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좌담에서 한 참석자는 교육 불가능이라는 언어가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로 “교육받는 입장에서의 서술이 아니”기 때문을 꼽는데, 또한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 시즌 2

 

이후 《오늘의 교육》에서 교육 불가능을 직접 다룬 글들은 많지 않다. 47호(2018년 11·12월)의 〈섬멸의 시대, 선언 불가능한 ‘교육 불가능’에 대하여〉라는 글 한 편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하늘은, “새로운 교육 토대와 질서를 향한 상상과 실천마저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존의 구조에 매료되고 말았다”고 토로한다. ‘근본적 사유’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이든 절대적 자본주의로 회귀할 뿐이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 전후로 한동안 《오늘의 교육》 지면에서 교육 불가능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미 그것은 모든 기획의 전제이기도 했다. 실상, 2010년대 한국 사회의 풍경은 교육 불가능성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 기후 위기, 조국 사태, 코로나19……. 다음에 이어지는 최경미의 글과 ‘키워드로 읽는 한국 교육 10년’의 여러 글에서 증언하고 있듯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회를 목도하고 있다”는 10년 전 이계삼의 진단은 지금 읽어도 전혀 생경하지 않다. 특히 2019년의 이른바 조국 사태 때 교육계는 학교교육의 실상을 통렬하게 반성해야 했지만, 진영 싸움으로 비화하면서 논쟁은 엉뚱한 데로 흘렀고 교육계는 성찰의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입시의 첨병으로 전락한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은 교육운동 진영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고, 설립 취지와 목적은 흔적도 없어지고 ‘우수한’ 학생들의 스펙 쌓아 주기가 학교의 존재 이유가 돼 버린 특목고에서도 교사들의 입을 통한 어떠한 증언이나 내부 고발 따위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한 2019년 11·12월의 특집 〈공정은 평등을 향하는가〉는 ‘교육 불가능의 시대, 시즌 2’라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다. 김종구는 〈조국 사태 이후, 불평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통해 숙명여고 소동, 드라마 〈SKY 캐슬〉 그리고 조국 사태를 경유하여 드러난 건 “더 이상 입시 개혁을 통해 교육 불평등을 시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최근 교육 불가능에 대한 논쟁이 뜸해진 것은, 이미 한국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것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독자들이 이계삼의 글에서 “학교는 이제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와 함께 가장 많이 밑줄을 그은 것은 아래 문장일 것이다.

“이제 그저 껍데기뿐인 학교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국가는 학교에 교육비를 내려보낼 것이고, 교사들은 월급을 받아야 하고, 부모는 아이를 맡겨야 하며, 아이들은 그래도 졸업장은 받아 두어야 하니까.”

너무 직설적이고 통렬해서 더 아픈 이 대목은, 거꾸로 학교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2020년 코로나 시대를 경유하면서 우리는 학교가 멈추었을 때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학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학교에서 어떤 삶을, 교육을 만들어 갈지에 대한 질문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 불가능에 대한 논쟁이 한창일 때 교육공동체 벗 카페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은 ‘종말론’인가?”라는 글을 통해 엄기호는 ‘선언과의 단절’과 ‘새로운 페다고지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페다고지, 《오늘의 교육》 시즌 2는 어쩌면 ‘선언’과의 단절, 즉 (좀 가혹하게 말하면) 교육 불가능성과의 단절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담론의 시효성이 다해서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인식에 속하는 담론으로부터 페다고지로의 이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용주 역시 앞의 글에서 교육 불가능의 문제는 “희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대한 인식 속에서 새로운 실천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단행본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펴내며, ‘희망의 페다고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교육 불가능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했던 것은 은유나 역설법이 아니었다.

  



02

담론을 넘어 실천의 장을 개척하다

- 생태적 전환과 교육농

 

최경미

본지 편집위원, 성미산학교 교사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근대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요구하고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교육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개발주의로 구축된 각자도생 사회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세계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동기를 만들어 통제하고 관리하여 인적 자본을 양성하는 입시 중심의 체제가 더 이상 부분적 개혁으로는 유지 가능하지 않은 시대라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단절을 결단해야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오늘의 교육》이 이런 방향성과 당위를 내세워 담론을 만들어 온 지 10년이 되었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 앞에 삶의 근원을 뒤흔드는 재난과 사건들이 몇 차례 도래했다. 이미 도래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교육 불가능 이후의 세계와 교육에 대해 다양한 시도들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오늘의 교육》이 새로운 담론의 방향과 교육운동의 제안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만들어 온 과정을 되돌아보고 구체적인 실천의 장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생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교육

 

앞의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교육 ‘불가능’은 지금 체제와 삶의 질서로는 교육은 불가능하다는 각성이었다. 기후 변화, 노동의 문제, 다양한 격차와 불평등이 야기하는 삶의 위기를 직시하고 체제와 사회에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교육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선언은 교육운동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무수한 해석을 오가며 공론의 장에 머물게 되었다.

얼마 뒤 3.11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재앙 그 자체였으며 삶에 대한 총체적인 위기를 감지케 한 사건이었다. 후쿠시마 사태는 근대 문명의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자 우리에게 ‘이대로 살아도 좋은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이 파국에 대해 교육은 직시하고 사유해야 했다. 따라서 후쿠시마 사태는 교육 불가능 선언을 질문으로 바꾸는 주요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기대어 살던 삶의 양식과 조건이 지속 가능하거나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삶의 위기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삶이 가능하지 않을 재난 시대에 교육은 무슨 의미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4호(2011년 9·10월)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은 처음 등장했다. 자연과 인간의 공멸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비전은 ‘생태 사회로의 전환’이며 교육은 ‘당연히’ 이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담론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56호(2020년 5·6월)에서 박복선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우리가 만든 세상에 대한 반성과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과 좋은 삶에 대한 구체적 상상으로 기획하는 혁명”에 비견된다고 했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이므로 교육의 힘을 빌어야 가능하다고 말하며 죽임이 아니라 살림을,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분리가 아니라 연결을 지향하는 생태교육으로 전환하자고 강조해 왔다.

이런 새로운 의제의 구체적인 실천의 장을 만들어 낸 것이 교사 농사 아카데미 ‘농사학림’이다. 2012년 2월에 시작한 농사학림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가능성의 하나로 교육에서 농農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새롭게 ‘교육농農’이라고 표현했다. 농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방향이자 뿌리라는 생각에, 충남 홍성에서 교사들이 모여 순환과 공생의 원리에 기초한 지속 가능한 농사를 배우고 1년 동안 농적 삶의 방식을 경험하였다. 교육농은 농이 가지고 있는 전인적, 통전적, 생태적 가치에 주목해 농을 교육적으로 선용하는 일이다. 교사들은 농을 통해 생명, 생태, 공동체, 협동 경제, 먹거리교육 등 지금 시대에 필요한 교육, 지금 시대가 ‘망각’하고 있는 것을 ‘교육적으로 대화’하는 법을 체득해 나갔다. 특히 정용주는 학교 안의 작은 텃밭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교육적 경험을 공유하였다. ‘교육과정’도 ‘평가’도 없는 텃밭 농사에서 국가 교육과정의 속 빈 구상 대신 삶의 역동성이 피어났다. 무원칙과 자율성이 기반이 된 텃밭에서 만들어진, 스스로를 통치하고 누구에 의해서도 대의되지 않는 정치적 공간의 탄생을 통해 민주시민교육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정치적 실천으로서 텃밭 농사〉, 24호(2015년 1·2월)).

이렇게 학교 텃밭으로 실험을 확장하며 지역에서 커뮤니티 텃밭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갔다. 이런 기반을 바탕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육농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 협동조합을 통해 다양한 교육농 사례를 발굴하고 심포지엄을 열어 공유하고 서로의 경험을 연결하는 자리를 만들어 왔으며 교사 연수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그리고 학교 텃밭을 넘어 이후 새로운 삶의 터전과 방식으로 로컬과 반농반X 등을 실험하는 진로농으로서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실험 사례들을 발굴하였다.

 


3.11과 4.16, 다르지만 같은

 

교육농이라는 매개로 다양한 시도들을 해 왔지만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무엇이고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가 하는 우리의 고민은 여전하였다. 그러다 불현듯 도래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으로 다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사태와 세월호 사건은 3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사건이지만 동시대적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삶과 희생 시스템에 기반한 이 두 사건은 우리가 이 파국적 현실을 어떻게 기억하고 연대해야 하는지, 근대적 삶에 기반한 패러다임을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지 다시 질문하였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삶의 위기 앞에서 교육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면했다. ‘가만히 있으라’로 상징되는 세월호 이전의 교육은 세월호 이후에 생존과 안전제일에 포획되어 더욱 가만히 있게 되어 버렸고 삶의 불안과 무기력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 전과는 다른 위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부해야 소용없고 삶이 좋아지거나 사회가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냉소를 총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함을 인정해야 이후 삶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래서 26호(2015년 5·6월)에서는 ‘다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불러 세우며 성장 시대의 종언이라는 시대정신을 확인하고 근대 산업 기술 문명 시대에서 인간적 삶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우리는 생태 위기가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보편적인 문제이므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당연히 교육운동의 보편적 과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며 주체를 전환하는 운동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교육을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의 생태적 전환, 더 나아가서 문명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살폈다.

특히 학교 중심적 교육을 벗어나는 새로운 사유로서, 기존의 반생태적 학교 제도와 교육 조직의 이해관계와 맞서는 과정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의식들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였다. 그때까지의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담론과 실천이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매개로 교육농을 중심으로 진행됐다면, 이후에는 마을 학교, 페미니즘, 민주시민교육, 교육 불평등과 공공성 등으로 변주하고 교차하여 그물망을 만들어 가는 데 중심을 두게 되었다.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 다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생각한다

 

그렇게 2020년, 우리의 삶과 관계를 잠식해 버린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재난과 기후 위기는 외면할 수 있었으나 코로나19 사태는 어떤 재난보다 교육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학교를 멈추게 했지만 무한 경쟁의 위험에는 쉽게 노출되었고 생존에 대한 불안과 불평등은 가속화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지, 기존 삶의 불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교육을 통해 질문하고 궁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 낼 수 있는 자립 능력, 공동체와 마을을 만들어 내는 능력, 다른 사람과 협동하고 다른 생명을 돌볼 수 있는 능력, 생태적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은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아는 것을 확인하고 답을 맞히는 것을 넘어서서 서로 질문하고 상상하고 대화를 나누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도록 생각을 나누며 실험하고 작당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게 하려면 생태적 전환이 절박한 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고 실험하는 공유지와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육공동체 벗은 교육농협동조합에 이어 ‘오늘의 교육 연구소’를 제안했다. 지금은 코로나 이후에 대해 너무 빨리 답을 내지 말고 기후 위기를 공부하고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서둘러 학교 문을 열려고만 하지 말고, 상황에 밀려 해 본 온라인 수업이 미래의 교육이라고 우기지 말고, 이 시기에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고,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오늘의 교육》은 지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시대적 전망과 교육 철학을 제안했으며, 재난과 위기의 사건들을 사유하고 연결시켜 구체적인 접점을 만들면서 담론과 실천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교육공동체로서 교육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하기로 의지를 낸 사람들이며 《오늘의 교육》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왔다. 앞으로도 《오늘의 교육》이 생태적 전환에 대한 ‘사상의 고향’이자 생각과 실천의 아지트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03

《오늘의 교육》이 만들고, 《오늘의 교육》을 만들어 온

- 학생인권과 학교 민주주의

 

공현

본지 기자

 

출발점에 있는 학생인권

 

《오늘의 교육》이 학생인권 문제를 주되게 다룬 것은 창간 준비호 때부터였다. 학생인권은 《오늘의 교육》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2011년 1월에 나온 창간 준비호의 기획 주제가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인권’으로 체벌 금지와 학생인권조례 등을 다루었다. 이어진 창간호에도 한창 진행 중이던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오늘의 교육》이 교육 전문 매체로 시작하면서 교육 관련 논의의 변방에 있던 학생인권 이슈를 중심에 둔 것은 상당한 도전이었다고 평할 만하다. 《오늘의 교육》이 학생인권 이슈를 조명한 것은 단지 소외되어 있던 주제를 부각시킨 것 이상으로, 교육을 바꾸기 위한 근본적인 질문으로서 학생인권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창간 준비호에서 박복선 편집위원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현실적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 특히 선의를 가진 교사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

지금이야말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교육이 무엇인지, 학교가 무엇인지, 교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불편하다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해소하는 중장기적 기획을 내야 하고, 그것이 진보적 교육운동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

- 박복선, 《오늘의 교육》, 창간 준비호(2011년 1월)

 

《오늘의 교육》 2호부터 한동안은 학생인권을 중심 주제로 내걸진 않았다. 하지만 교육 불가능 논의나 학교폭력에 관한 논의에서도 학생인권에 관한 문제의식은 계속 담겨 있었고, ‘‘가르치는’ 인권을 넘어서’(2호), ‘절반의 성공 –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3호) 등 학생인권조례, 인권교육 등이 기획 지면의 주제로 등장했다. 주로 학생인권조례에 관해 학교 현장에서 혹은 교사의 입장에서 탐색하는 내용, 인권 친화적 학교에 관해 교사들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내용이었다. 인권과 교육의 관계를 고민하고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을 보장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청소년들과 교사들, 활동가들의 탐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들은 2012년 단행본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으로 결실을 맺기도 했다.

 


교육과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

 

학생인권과 관련된 기획을 다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였다. 이때의 논의는 학생인권보다는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전개되었다. 12호(2013년 1·2월) 특집 ‘연습인 삶은 없다’에서는 교육운동에서의 청소년의 위치를 성찰함으로써 교육과 교육운동의 주체와 대상의 자리에 누가 있는지 물었다. 문제의식은 14호(2013년 5·6월) 등을 통해 민주적인 학교와 교실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담과 통찰로 발전했다. 민주주의는 탁월함에 대한 저항이며 평등이 그 토대라고 선언한 정용주의 글이나, 담임 교사로서 교실의 성군이 되려 했던 흑역사를 고백하고 공동체의 1/n이 되고자 한다는 고민을 담은 조영선의 글이 교육공동체 벗 내외에서 많은 논의를 촉발시켰다. 이는 학생인권을 학교에서의 구체적인 권력관계의 문제로, 학생의 주체성과 학교 안에서의 위치의 문제로 풀어내려는 기획이었다. 학교 민주주의를 학생 자치 활동이나 학급 운영 등의 틀에서 벗어나 교사-학생 관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할 문제로 이야기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학생이 교육의 주체라는 원칙적 선언이 현실로 구현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하고 고민을 밀고 나가려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담론들은 보강을 거쳐 2017년 단행본 《가장 민주적인, 가장 교육적인》으로 이어졌다.

‘교육과 민주주의, 그 사이의 긴장들’이라는 《오늘의 교육》 16호의 특집 제목이 보여 주듯, 이는 교육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나 학교의 현실과 불편한 긴장을 만들어 냈다. 때문에 《오늘의 교육》의 학생/청소년인권 담론이 관념적·당위적이고 학교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정의진의 리뷰가 게재되기도 했다. 박복선이 창간 준비호에서 말한 ‘선의를 가진 교사들을 불편하게 하는’ 학생인권 담론의 효과가 톡톡히 발휘되었던 셈이다. 이 논쟁은 다시 《오늘의 교육》과 교육공동체 벗의 성격이나 방향성에 대한 논의로도 옮아갔는데, 당시의 논쟁이 더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학생인권과 학교 민주주의(또는 교육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교육관이나 교사-학생 관계, 교사상에 대한 탐구를 이제라도 재차 이어 가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더 폭넓은 청소년인권과 운동에 대한 논의로

 

《오늘의 교육》의 담론은 학생인권에서 더 폭넓은 청소년인권에 대한 탐구로, 학교 안에서 학교 바깥 사회 전반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가령 20호(2014년 5·6월), 21호(2014년 7·8월)에서는 가족 안에서의 청소년들의 문제 그리고 독립과 해방의 문제를 다루었다. 34호(2016년 9·10월)에서는 나이주의 비판을 특집 주제로 삼아 청소년운동 활동가들이 연구하고 다듬어 온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았다. 나이주의와 청소년 혐오, 청소년 보호주의 등의 개념을 소개한 글들은 교육공동체 벗 외부에서도 SNS나 온라인을 통해 많은 반향을 불러왔다. 이러한 논의는 학교 안에서의 인권 보장이라는 각론 이상으로 우리 사회의 청소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입시 제도나 대학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학거부자들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글들이 꾸준히 실렸다. 이를 통해 여러 위치에서 대학 입시 문제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그리고 대학을 거부하거나 입시 경쟁을 비판하는 청소년-청년들이 이에 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가 공유될 수 있었다.

청소년인권운동 자체를 기록하고 살펴보는 흐름도 꾸준히 이어졌다. 지역에서 활동한 청소년운동 활동가들, 학교 현장에서 분투하고 실천한 학생들, 광장에서 목소리를 낸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에세이로, 기획으로 《오늘의 교육》에 담겼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은 《오늘의 교육》의 색깔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인터뷰를 통해서 정리한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가 연재되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등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이해가 가능케 했다. 또한 청소년인권운동 또는 사회와 정치의 주체로 나선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외면하지 않을 권리》,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 《광장에는 있고 학교에는 없다》 등으로도 엮였다.

 


청소년이 사회와 교육의 주체라는 것

 

학교 민주주의나 청소년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정치적 주체성의 문제로도 발전했다. 이전에도 학교 안에서의 학생들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문제나 광장에 나선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문제가 자주 글감으로 등장했고,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관념을 비판하면서 교사의 정치적 권리 문제 말고도 정치 활동을 하는 청소년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2017년 이후에는 《오늘의 교육》에 민주시민교육과 정치, 그리고 청소년 참정권을 주제로 한 글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는 한국 사회의 관심사 변화에 따른 것이자, 청소년인권운동의 핵심 의제 변화를 반영한 변화였다. 청소년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이 민주주의의 한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고 학교 안팎에서 생활하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간의 주제 의식이 참정권이라는 이슈로 초점이 맞춰졌다고도 볼 수 있다. 《오늘의 교육》은 선거권 연령을 낮추는 것 외에도 청소년이 정치의 주체, 사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이야기해 왔다. 또한 광장 등 운동의 현장에서 다듬어진 언어를 교육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 선거권 연령 하향 이후 학교에서의 쟁점들이나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고민들로 지면을 채웠다.

학생인권은 《오늘의 교육》의 출발점이었고, 《오늘의 교육》과 꾸준히 교류하면서 상호작용해 온 대표적 운동이 바로 청소년인권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참정권이나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각론들이, 《오늘의 교육》이 처음 던진 화두와 같이, 교육과 학교와 교사의 역할을 묻는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은 듯싶다. 이는 청소년인권운동이 청소년이라는 소수자들의 권리 운동일 뿐 아니라, 교육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인식이기도 하다. 교육의 ‘오늘’과 ‘내일’을 논하면서 청소년인권, 청소년의 사회적 위치 등의 문제를 피해 가선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고민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교육》이 그동안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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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