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호[특집] 대학과 ‘나’, 삶의 연결 고리 (진냥)

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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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대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학과 ‘나’, 삶의 연결 고리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너는 오지 말라는 말


나는 어릴 때부터 대학을 몹시 소망하던 사람이었다. 책 읽고 공부하는 걸 좋아했지만, 외국어처럼 무작정 외워야 하는 활동이나 몸을 쓰는 활동은 못하기도 했고 정말 지극히 싫어했는데, 사람들이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한 가지 공부만 하면 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생물학 공부를 너무 너무 하고 싶어서.


중학교에 가서 생물을 좀 더 배우며 나는 보다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내용, 따지자면 세부 전공 같은 걸 정했다. 그리고 그 내용과 관련된 학과를 둔 대학이 한국에 몇 개 없었기에, 가고 싶은 대학도 일찍 정해졌다. 요즘은 일반적이지만 그때는 거의 없던, 중고생 대상 진로 캠프를 내가 가고 싶어 했던 대학에서 개최했고, 그 학교 근처에 살던 외삼촌의 지원으로 진로 캠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캠프는 낮에는 교수들의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대학생들과 동아리 활동 같은걸 하는, 대학 생활 체험으로 운영되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내게 미적분을 기본으로 들이대는 교수들의 수업은 너무 어려웠다. 그러다 한 교수가 물었다. 너는 중학생인데 왜 벌써 여기에 왔냐고, 그러면서 어차피 한국에서 공대 나온 여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오지 말라고 말했다. 너무 당황스러웠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부하려면 취직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


그랬던 나는 자라서 교대에 진학해 버렸다. 하고 싶은 전공 공부만 할 수 있는 날을 그렇게 기다렸는데, 도·국·수·사·과·체·음·미· 실·영을 모두 하는 교대라니. 입학하기 전부터 교대가 너무 싫었고 교사가 되기 싫었던 나는, 전공 중 ‘교육학 심화 전공’이 제일 덜 초등 교사스러워 보여 선택했다. 내 촉은 틀리지 않아서 한 교수로부터 교육학 심화 전공은 원래 교원 자격증을 주지 않는 분반으로 설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만들 때는 초등교육학을 계속해 나갈 연구자 집단을 양성하는 과로 생각했는데, 통합 선발하고 입학할 때 전공을 나누는 교육대학교의 운영 방식에서 한쪽은 교원 자격증을 주고 다른 쪽은 주지 않는 것이 제도적으로 차별적 조치에 해당했기 때문에 결국 교육학 심화 전공은 원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전공이 되었다고 교수는 말했다.


그 말이 뭔가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연구자 집단을 양성하는 과는 왜 교원 자격증을 주지 않는 건가? 왜 교사를 하게 되면 공부를,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도 돈을 벌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1학년 때부터 학회에서 논문을 쓰던 나는 교대 다니는 내내 불렸던 ‘예비 교사’라는 말을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다른 진로를 찾지 못하고 결국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공부와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공부가 어디에 필요해?”라는 말


하지만 시간이 가도 새로운 걸 계속 알고 싶었고, 더 많이 공부하고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더 명확하게 보고 싶었다. 내 경험을 더 정확하게 설명할 언어를 갖고 싶었고 나와 공명할 수 있는 학문적 동료를 찾고 싶었다. 다만 학력과 학벌로 인한 권력을 더 가지고 싶진 않았다. 내가 정말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어디서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위 과정에 진학하진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학문과 연구에 관련된 자원들은 대학에 집중되어 있었고 비수도권에서 자율적인 학문 공동체를 만나고 지속해 나가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푸코의 책을 읽을 때는 프랑스가 너무 부러워졌다. 푸코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였는데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 교수로 임용되지만 소속된 학생은 단 1명도 없다. 콜레쥬 드 프랑스는 사회 전체의 인문적 교양을 위하여 모든 시민에게 개방되는 무료 강의만을 하는 대학이다. 왜 한국에는 이런 게 없을까?


고민 끝에 결국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내 고민을 들은 한 사람은 “그게 어디에 필요해?”라고 물었다. 그리고 승진에 필요하다면 학위는 어디서든 돈 주면 가질 수 있다고도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한국의 대학은 지금 그러하니까. 학술적이고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지만 승진하거나 교수를 하고 싶은 건 아니라는 내 말에, 그 사람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라는 말을 알아는 들었겠지만 그 뜻이 와닿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사회 전반이 공부에 관심이 없는 거였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로 대변 되듯이, 한국 사회는 모르면 무시당하고 아는 게 권력인 문화가 강하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는 지식에는 관심이 없다. 한국이 교육열이 높다는 건 거짓말이다. 한국은 ‘학벌열’이 높을 뿐이다. 공부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공부는 그냥 입시 경쟁을 준비하는 것이고, 과학 기술 발전에 집착하지만 소위 ‘고부가 가치 산업’, 즉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혹은 그럴 것이라고 기대되는 지식의 경제성에만 주목한다. 진학이나 취업에 관련 없는 학문은 어리석거나 지나치게 순수한 일로, 또는 경제적·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하는 여가 생활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TV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가 인기를 끌고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이 지상파 프로그램에 섭외되는 것을 보면, ‘교양’ 에 대한 갈증은 이미 대중적인 욕구다. 당장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 빛깔을 만드는 지식들에 사람들은 목말라 한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문명의 첫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간석기나 토기 같은 대답을 예상했지만 미드는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라고 답했다고 한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다리가 부러졌다면 위험을 피할 수 없고 음식을 구할 수도 없어 죽었을 테지만,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는 그 사람이 다 나을 때까지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는 대답이었다. 미드의 이 말은 무언가를 생산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소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지식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당장의 효용성을 따지지 않고 세상을 탐구하고 연구하며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축적되어서 어느 순간 ‘반짝!’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지식이 세상에는 필요하다. 그리고 대학은 그런 지식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공간을 주고 서로 만나 동료가 되게 하는 토양이자 기반이다. 대학은 직업을 얻기 위한 관문의 의미와 더불어,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다.



대학의 공백


40년을 살던 대구를 떠나 경남으로 와서 당황했던 것 중 하나는 대학과 병원에 관한 것도 있었다. 나는 경남의 도청 소재지인 창원에 살지만 그래도 병원이 적었다. 나는 아직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가 어딘지 모른다. 그냥 일상생활의 동선에서 정형외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대구는 의대가 인구 규모에 비해 많았다. 대구에 있는 4년제 종합 대학 전부에 의대가 있다. 이 말은 배출되는 의사가 많다는 의미고 종합 병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해 국토교통부가 발표하는 〈국토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지역마다 의료 접근성 차이가 뚜렷하다. 응급 의료 시설까지 평균 거리가 서울은 2.94km, 대구는 9.26km, 경남은 17.47km이다. 경남에 오고서 병원이 적게 보인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욕먹을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2020년에 신천지발 코로나19 감염 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역시라서 도 지역보다는 커버할 면적이 좁고, 의사와 종합 병원이 많은 ‘메디시티’라서 그래도 저 정도로 버티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대가 많아 전국에서 자원 활동을 하러 달려오는 선후배 의사들도 많을 것 같았고. 물론 그때 대구의 상황은 정말 심각했다. 신천지 사태 직전에 대구에 있는 엄마가 심장 수술을 하고 예후가 썩 좋지 않아 우리는 언제든 응급실로 갈 준비를 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산 속에 대구의 모든 응급실이 셧다운된 날도 있어서 온 가족이 달달거리기도 했다. 두려움에 달달거리고 있던 사람이 우리 가족만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만약 대학 병원이 하나도 없는 경북이었다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의대와 병원의 부족만 공백으로 느껴진 것도 아니었다. 코로나19의 유행으로 그 전까지 수립해 놓은 교육 정책들이 다 맞아 들어 가지 않을 때, 전국의 교육청들은 연구자 집단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교육청은 실시간으로 밀려드는 상황에 대응하기에도 바빴지만, 누군가 지금의 상황들을 기록하고 분석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제시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연구자였으니까. 경남에서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 어디가 이 상황의 핵심인지 콕집어 줄 수 있는 ‘전문가’, ‘교수님’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경남에는 대학의 수 자체가 적었고(알다시피 대학은 ‘다’ 수도권에 있으니까) 그나마 있는 대학들에는 취업에 직결되는 학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경남에 있는 모든 대학 이름을 하나하나 넣어 가며 코로나19로 인한 사회 변화에 대한 칼럼이나 발표 자료를 찾아봤지만, 경남 소재 대학의 교수들 중에서는 단 1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비수도권 대학에는 취업과 직결되는 학과들의 비율이 훨씬 더 높고 기초 학문 학과들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만이 아니다. 거듭되는 학교 불법 촬영 때문에 고민 하던 중, 경남에서는 포괄적 성교육 교사 연수를 열어 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지역에서 마땅한 강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새롭게 제안되고 있는 담론과 이론을 이야기해 줄 사람으로 거론되는 이들은 다 서울, 수도권에 있었다. 하지만 전 과정의 강사를 모두 서울에서 섭외하는 것은 재정상 무리였다. 아니, 예산이 확보된다고 해도 전 과정을 다른 지역 강사로 구성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지역의 맥락이 반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남에서는 올해 ‘교육 인권 영향 평가’를 시도하고 있는데, 평가 지표 개발 연구를 맡을 대학이 없었다. 연구소는 정부 소속 연구소 두어 곳밖에 없고 연구 재단은 아예 없다. 결국 서울의 한 연구 재단이 용역을 맡았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경남 지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이 지역에 어떤 현안들이 있었는지, 어떤 쟁점들이 주목받고 어떤 쟁점들은 가시화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다 따로 자료를 만들어 제공하고 여러 차례 설명해야 했다. 연구가 끝난 후에도 연속적인 관계를 만드는 일이나 피드백은 아마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그야말로 사회적 비용의 증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의 공공성


지방 자치 시대에 각 지역에서 개발하고 평가하고 발전시켜야 할 정책이 얼마나 많고, 분석할 데이터는 또 얼마나 많을까. 이수형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공무원이나 학자나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설계하는 일”이란 점에서다. 정책이 그냥 몇몇 사람들의 판단이나 인상 비평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따라서 자료를 잘 수집하고 분석하고 가공하는 일은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노동이다.


또, 시민들이 알아야 할 정보는 또 얼마나 많은가. 모든 사람이 모든 영역의 전문가가 될 순 없기에 세금과 정치인 비리를 분석해서 설명해 주고 예산 감시 노하우를 알려 주는 유튜브 채널 ‘세금판다’처럼 먼저 연구하고 공부해서 지식을 가공해 주는 누군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수사 기관들은 각 영역 연구자들의 자문을 자주 받곤 한다. 자문을 쉽고 빠르게 받을 수 있다면 수사도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 역시 전문가 자문 없이 만들어질 수 없다. 공부하고 탐구하는 노동을 전문적이고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 즉 연구자는 우리의 일상에 관여하는 사람이고 연구자들이 모여 있는 대학은 연구 기관이자 교육 기관으로서 모든 개인의 삶에 관련된다.


그래서 대학과 지역 사회는 인구나 상권으로만 연결되어 있지 않다. 청소년노동인권 실태 조사를, 공공 기관에서는 하지 않고 있지만, 노동권을 전공하는 한 학과가 매해 꾸준히 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 지역 사회 전체 시민을 대상으로 공연과 포럼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거나 학기별로 시민 강좌를 여는 대학도 있다. 대학의 공공성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학생’이나 ‘직원’으로 대학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시민’으로서 대학과 연결되는 지점들이 더많아지는 것이야말로 대학의 공공성일지도 모르겠다. 산책할 때 나무가 많아 좋다는 말 말고도 설명할 게 많은 대학, 사제 관계만이 아닌 공부하는 동료를 만날 수 있는 대학, 지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대학, ‘몽실’거리거나 혹은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 주는 대학……. 그렇게 ‘입시’ 말고도 이야기할 게 많은 곳이 ‘대학’이 되길 바란다.




❶ 명인, “‘돌봄’에 관한 단상”, 〈한겨레〉, 2021년 5월 24일

❷ ““서울대서 뭘 배웠나 모르겠다” 세계 대회 우승한 여성의 일침”, 〈중앙일보〉, 2021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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