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속 | 법화사회와 교육
사법의 시각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 전담 조사관 등 학교폭력 대책 도입 후 현장 리포트
강물
paneepink@hotmail.com
경기 중등 교사
학교란 곳은 참 이상한 곳이다. 교육이라는 큰 그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맡은 한 조각을 보다 보면 큰 그림은 잊어버리고 조각에만 몰두하게 된다. 올해 내가 맡은 조각은 ‘학교폭력’이다.
학교폭력 업무는 모두 알다시피 기피 업무다. 내가 이 업무를 맡게 된 것은 업무 희망원 5순위쯤에 ‘학교폭력’ 업무를 썼기 때문이고 5순위나마 쓴 사람은 나 포함 2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5순위에라도 썼던 이유는 이 일이 학생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을 만나는 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내년에도 이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이렇게 모두로부터 밀려난 후에 이 업무가 누구에게 가는지 살펴보면, 대부분의 학교에서 저경력 교사나 기간제 교사가 맡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폭력 업무는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기도 하지만 경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복잡한 법적 절차와 규정들을 이해하고 항의하는 학부모,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학생에게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능력치가 필수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 줄 누군가가 있지 않다. 학교폭력 책임교사(책임교사)가 사안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런데 이런 업무를 신규 교사나 기간제 교사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나는 현재 10년 차를 훌쩍 넘긴 경력 교사인데도 이 업무가 버겁다.
얼마나 기피 업무였던지 올해부터는 수업 시수를 줄여 주기 위해 교육청에서 강사비를 지원하고, 조사 업무를 덜어 주기 위해 전담 조사관 제도라는 것도 신설했다. 왜 업무를 나눠 맡을 교사를 추가로 배치하지는 않는가? 예산 때문인가? 교원의 수를 줄여 나가야 하기 때문인가? 그러다 올해 전담 조사관 제도가 도입되며 공방의 시간은 더 길어지고 사안은 교사로부터 더 멀어졌다.
전담 조사관 투입이 오히려 업무를 가중시키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2023년 10월 대통령과 현장 교사들의 간담회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있었던 학교폭력 업무 외부 이관 요청에 대한 후속 조치로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한다. 충분한 고민과 준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된 제도였기에 도입 초기부터 비판이 많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교육청 연수에 참여한 각 학교의 책임교사들은 예상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이야기했고, 실제로 대부분 현실이 되었다.
졸속으로 만들어진 제도이기에 단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해 봤다. 그래도 방향성이 맞다면 초기의 진통을 감수하더라도 기다려 볼 수는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2개월간 10여 건의 사안을 처리하면서 방향성 자체가 틀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일단 바로 나타난 표면적인 문제점들은 이런 것들이다. 사안마다 다른 조사관이 배정되기 때문에 그 때마다 교육청을 통해 조사관과 연락하고 조사관과 학생, 학부모와의 면담 시간을 조율하고, 조사관이 조사 업무를 수행했음을 확인하는 서류를 작성해서 교육청에 보내고, 조사관이 추가로 가져간 자료(학생 확인서, 학부모 확인서 등)의 목록을 정리한 문서를 만들어서 보관하는 등 조사관 제도가 생기면서 각종 자잘한 업무들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자잘하다고 말하지만 원래도 하나의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는데 거기에 일이 네댓 개 덧붙여진 셈이어서 책임교사들은 업무가 줄어든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고 호소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조사관이 학생과 면담하기 위해서는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고 조사관이 조사 활동을 할 동안, 책임교사는 적어도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늦어진다. 조사관과 학생, 학부모의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언제 퇴근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업무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는 더 중요한 문제를 낳는다. 대체로 조사관은 하루에 1명의 학생을 만날 수 있고, 학생과 조사관의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빠르면 하루 안에 조사를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이 사흘, 나흘, 길면 일주일까지도 길어지게 된다. 학교폭력 사안은 되도록 빠르게 처리될수록 좋다. 사안 처리를 기다리는 동안 피·가해를 겪은 학생들이 한 공간 안에서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사안 접수와 동시에 즉시 분리 조치를 시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최대 기간인 7일이 지나도록 조사조차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분리가 끝난 가해 학생이 다시 돌아온 후에도 사안은 그대로 진행 중이다. 수시로 학생들을 살피며 추가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사 기간이 길어지면 덩달아 학교폭력 전담 기구 개최도 늦어진다. 사안 접수 후 2주 안에 전담 기구를 열어야 하는 원칙이 있는데 올해 대부분의 사안은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해 전담 기구 개최를 연기하는 공문을 추가로 남겨야 했다. 이것 또한 조사관 제도로 인해 추가된 업무 중 하나다.
전담 조사관은 학교 현장을 모른다
전담 조사관 제도로 학교폭력 사안을 잘 처리할 수 있고 학생들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면 업무 증가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천천히 개선책을 찾아 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담 조사관 제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점 의문이 커지고 있다.
첫째, 전담 조사관의 대부분은 학교 현장을 잘 알지 못한다. 퇴직 교원인 경우도 있지만, 퇴직 경찰, 청소년 전문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조사관을 맡게 되었다. 두 달 동안 8~9명의 조사관을 만났는데 학교와 청소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는 경우는 좋게 보아 2명 정도였다. 청소년들의 생태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조사관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내가 학생들을 만나 조사한 내용이나 학교의 상황을 조사관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학교에 대해 알지 못하고, 청소년들의 관계나 행동 패턴, 학생들의 문화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매뉴얼만 가지고 조사를 진행하는 게 과연 공정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의문스럽고 답답한 상황들이 많았다.
둘째, 전담 조사관의 조사 활동이 소극적이다. 학교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면담 약속을 하고 학교에 방문해야 하는 상황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사관은 가·피해 학생을 각각 면담하고 학부모와 통화하는 것 외에는 추가적인 조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학부모 확인서도 학교에서 미리 받아 달라는 요구를 교육청으로부터 받았다. 학교폭력 사안은 복잡한 상황이 많기 때문에 목격한 학생들의 진술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3월 초 첫 번째 사안에서 조사관이 목격자의 진술을 받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난 이후부터는 내가 먼저 나서서 목격 학생의 진술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안이 잘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업무 간소화를 위해 조사관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 때로는 조사관으로부터 목격 학생의 진술을 받아 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하였다. 제도의 취지대로 조사관이 직접 진술을 받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조사 기간이 더 늘어날 뿐만 아니라 목격 학생이 진술을 어려워할 수도 있기 때문에(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교육청에서 나온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심각한 일로 여기고 두려워한다) 결국 내가 학생들을 만나 진술을 받았다.
만약 책임교사가 조사관 제도의 도입 취지 그대로 사안 접수만 하고 이후의 조사를 전부 조사관에게만 맡겨 두면 피상적인 조사만 이루어진 채 사안이 종료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나는 사안 접수 단계에서부터 자세하게 조사하고 목격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통화하는 일 등을 모두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사관이 완성해서 보내 온 조사 보고서를 보면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내용이 거의 없었다. ‘이럴 거면 조사관이 왜 필요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조사관이 의미 있다고 여겨진 경우는 피·가해 학생이 여러 학교에 걸쳐 있는 경우뿐이었다. 동일한 조사관이 각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을 만나기 때문에 좀 더 일관성 있게 사안 처리가 될 수 있다(여러 교육청이 걸쳐 있는 사건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조사관은 각각의 교육청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교육청 심의위원회에서 해결할 수 있거나 이런 경우에만 조사관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조사관 제도가 도입된 결과, 책임교사의 업무량은 늘어났고 사안 처리 과정이 길어졌다. 조사관은 사안 처리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했다.[ref]나만 그런가 싶어 기사를 검색해 보니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다만 울산에서는 교육감 직속 학교폭력 컨트롤타워가 원스톱 대응 체계를 구축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었다. 도입의 배경이 된 2023년 10월의 대통령-현장 교사 간담회에서 교사들이 요구했다고 하는 “학교폭력 업무 외부 이관”이 이루어진 것일까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업무 경감이나 신속한 대응은 경험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다.[/ref]
사람의 일이 숫자와 업무로 보이기 시작할 때
학교폭력이라는 업무는 사실 평화로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출발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이 일이 평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아니 사실은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원래 이 업무는 평화가 아니라 사실 확인, 법적 조치, 생활기록부 같은 것들과만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닐까.
학교폭력 책임교사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업무’로 보게 되는 것, 교육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법적 효력이 없는 일은 힘이 없어서 물증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학생들을 점점 미워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 그런 시간들을 겪는 일이다.
4월 말 현재 총 12건의 사안이 접수되었다. 학기 초에 사안이 많이 발생한다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예년보다도 많은 숫자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아직까지는 올해만의 이슈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다른 학교 학생과의 다툼이거나 해묵은 갈등이 터져나온 경우 혹은 작년부터 이어져 오던 갈등 등이기 때문이다. 12건의 사안 중 학기 초 새로 형성되는 관계와의 부딪힘에 해당하는 건은 넓게 보아도 2개뿐이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2건의 사안을 처리하려다 보니 어느 날은 하루 동안 10명이 넘는 학생들을 만나 면담하고 또 10명이 넘는 학부모와 통화했다. 추가로 교육청과 연락하고 관련 교사와 협의하고 조사관과 연락하고 공문을 처리하는 등의 일도 해야 한다. 그런 날들을 보내다 보면 사안이 접수되었을 때 ‘아, 또……’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학생과 학부모를 대할 때는 최대한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일을 잘 해결하려는 의지를 모아 보지만 참았던 스트레스가 어디론가는 튀게 된다. 피해 쪽이든 가해 쪽이든 학교폭력 사안과 관련된 이야기가 기분 좋을 리 없고 어떤 경우에는 과격한 민원을 직접 듣게 되기도 한다.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사과의 말을 하게 되기도 하고, 상대의 마음을 살펴 주려고 애를 쓰다 보면 퇴근길에는 녹초가 되어 있다. 민원 응대 업무를 하시는 분들의 심신의 피로를 절감하게 되고, 이러다 내가 병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두 달째여서 학생과 학부모, 교사의 어려움을 같이 고민할 에너지를 겨우 짜내고 있는데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각각의 사안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그냥 숫자와 업무로만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일을 쉽게 처리하려고 학생의 고통과 사안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게 되는 건 아닐까 겁이 난다.
사라지는 교육의 시간을 바라보며
학교폭력 신고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상대를 처벌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하다. 사안 처리 과정에서 화해를 하게 될 수도 있고 처벌받지 않고 종결될 수도 있지만, 접수 단계에서 만나 본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는 처벌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미 신고까지 왔다는 것은 그 이전의 노력들이 실패했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처벌의 수위가 높을수록 처벌받은 내용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기간도 길어진다. 그 사실을 피·가해 측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 사안이 접수되면 양측 모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책임교사나 학교 측에서 어떤 실수나 빌미를 제공하게 되면 상황이 어려워지고 학교나 교사가 책임을 져야 하거나 절차상 문제로 인해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교사의 눈으로 볼 때 피·가해가 명확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가해 측에서 결백을 주장하고 있고 증거도 없는 경우, 가해 측의 학생을 지도하거나 교육하게 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으로 접수된 사안이 아니라면 진실을 말할 학생들도 학교폭력 사안이 되면 입을 다물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많다. 진실을 말할 경우 자신이 받게 될 처벌이 커지기 때문이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결과, 교육의 기회도 사라지고 학생들이 반성할 기회도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봤을 때는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할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에 하나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공정한 수사관’의 위치에 서서 학생과 학부모들을 만난다. 양측의 말이 다 진실일 수 있음을 가정하고 ‘확인된’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만 한다. 학교폭력 사안으로 접수되고 난 이후에는 담임 교사나 학년 부장 등 다른 교사가 개입하기 어렵다. 공은 학교폭력 전담 기구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양측의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교육의 시간은 사라진다.
닫힌 문 앞에서 증거를 찾아 헤매다
사례 1. 목격 학생의 진술 거부
언어 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 신고로 조사를 시작했다. 목격 학생이 있었으나 조사 과정에서 진술을 거부했다. 가해자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목격자의 진술은 비밀이 엄수되며 원하는 경우 온라인이나 서면으로만 진술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알렸음에도 결국 학부모님들의 반대로 진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부모님들이 학교를 믿지 못하는 마음, 비밀리에 진술하더라도 보복 행위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이해한다. 그래서 더 이상 진술을 부탁하지 못했다. 결국 목격 진술 없이 양측이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결론으로 보고서가 쓰였다. 피해 측에서 징계보다는 화해와 재발 방지를 원했고 가해 학생도 동의하여 학교장 자체 해결로 끝났지만 피해 측에서 보복의 두려움이 없었다면 과연 그렇게 끝냈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그리고 사안이 마무리된 후 가해 측의 학부모는 오히려 자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며 학교에 항의했다. 거기에 대해 목격자들이 있어서 가해가 확실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격자 학생들이 자신이 드러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기에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원칙을 지켜서 진행되었다는 설명과 보호자의 화난 마음을 달래 주는 말뿐이었다. 법 때문에 생긴 구멍을 법에 기대면서 해결하는 식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 날의 퇴근길은 유난히 마음이 힘들다.
사례 2. 따돌림 사건에서의 목격자 찾기
따돌림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 신고로 조사를 시작했다. 목격 학생이 다수이나 몇 명의 학생들은 목격한 바가 없다고 말해 피해를 입증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몇 명의 학생들이 축소된 내용이나마 진술을 해 주었다. 가해 학생은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여러 번의 따돌림 상황이 있었으나 어떤 경우는 같은 자리에 있었던 학생들 전원이 가해 학생의 친구여서 모두가 입을 모아 그런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경우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하는 학생들을 계속 의심하고 몰아세울 수는 없다. 거짓말을 하고 교무실을 나서는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만약 자기 편에 서서 진술해 줄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경우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버텨 낼 수 있을까……. 이런 경우 내가 하는 일은 평화를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다. 피해자는 법과 학교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매뉴얼대로 진행된 이후에 결국 가해가 ‘입증’되지 않아 피해가 인정되지 않고 피해의 회복도, 가해자의 책임도 없는 경우가 생긴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안타까워할 수 있을 뿐 피해 학생을 위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례 3. 가해가 있었지만 법적 ‘혐의 없음’으로 끝난 사건
1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이다. 피해와 가해가 발생했다. 여러 정황상 가해가 분명한 상황임에도 복잡하고 지리한 시간을 보낸 후에 결국 최종적으로는 가해가 인정되지 않았다. 교육청에서 결정한 가해 학생에 대한 조치도 모두 취소되었다. 법이 인정한 ‘혐의 없음’에 대해 교사들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해 학생은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가 겨우 한 일은 피해 학생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전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피해 학생이 앞으로 학교와 사회에 도움을 청하려고 할까? 이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빠르게 물증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어떻게 하면 진실을 말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떤 물적 증거가 남아 있을까 혹은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내 직업이 교사인지 수사관인지 헷갈린다. 그렇다고 수사관이기에는 너무 얼치기라 이 상황 자체가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학생들을 점점 미워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
나쁜 일을 하고, 나쁜 일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반성도 변화도 없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점점 학생들에 대한 신뢰가 줄어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에는 선함이 있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학생들을 만나 왔는데 그런 믿음이 전혀 힘이 없게 느껴진다. 학생들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어른들(교사-학부모-사회)이 학생들의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누구라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믿음에 힘이 없다. 일단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행동을 반복하는 어떤 학생을 보고 ‘걔는 이미 틀려먹었어’라고 단정짓는 어른들의 시선이 얼마나 많은지. ‘부모도 어쩌지 못하는 애를 우리가 어떻게 해’, 나도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그럼 그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나? 부모도 바르게 키우지 않고 학교도 손을 떼면 누가 그 아이를 잡으려고 할까. 그렇다고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헌신하고 매달려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나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럼 아이는?’이라는 질문을 버릴 수 없다. 심의 결과 가장 큰 처벌인 강제 전학[ref]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퇴학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강제 전학이 가장 큰 처벌이 된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퇴학 처분이 이루어진다. 퇴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학교를 떠난 학생의 삶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ref] 처분을 받고 학교를 떠난 학생은 새로운 학교에 가서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강제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과 강제로 학교에 들어온 학생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전학을 가고 나면 우리 학교의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진다. 우리 학교로 전학 온 학생에 대해서도 과거의 일로 학생을 지도하거나 교육할 수 없다. 무슨 일로 전학 처분을 받았는지 공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건너 건너 소문을 듣고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그런 소문은 학생에 대한 선입견만 보태 줄 뿐이다.
책임교사인 나는 종일 학생들의 나쁜 행동에 대해 듣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다가 수업 시간이 되면 갑자기 모드를 변경해 교실에 들어간다. 학생들과 웃으며 즐겁게 수업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짜내 본다. 시시각각 인격이 바뀌는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나를 보며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싶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다가 생각한다. 내가 오늘 한 일은 학교의 평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처벌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만든 건 아닐까, 좀 더 유리한 조건을 갖기 위해 협상하는 대화를 조율해 준 건 아닐까, 학생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데도 ‘원칙이 이래서 어쩔 수 없어, 규정상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라고 대답했던 건 아닐까. 보복성 ‘맞폭’인 것을 알면서도 원칙대로 사안을 접수한 것이 피해 학생을 더 괴롭게 한 것은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답을 찾을 시간이 없다. 만나야 할 학생들, 통화해야 할 학부모들, 보내야 할 공문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에 지친 나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조각에서 떨어져 나와 큰 그림을 보려고 해 보자. 우리가 하려는 일은 학생들이 안전하게 생활하고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잘못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바른 방향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물론 모든 제도들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깊은 고민과 성찰이 없고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제도와 각종 규정들이 실제 현장에서 아무 힘 없이 문서로만 남거나 혹은 애초의 취지와는 멀어진 채 학교의 구성원들을 괴롭히기만 하는 사례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학교폭력 사건’이라는 결과만 바라보며 가해자를 촘촘하게 가려내고 강력한 처벌을 내리는 방식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학교의 모든 일을 사법 절차가 해결해 줄 수 없다. 학생들의 삶에 사법 절차가 촘촘하게 들어올수록 피해자, 가해자, 학교, 교육청 모두 각자가 촘촘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후속 | 법화사회와 교육
사법의 시각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 전담 조사관 등 학교폭력 대책 도입 후 현장 리포트
강물
paneepink@hotmail.com
경기 중등 교사
학교란 곳은 참 이상한 곳이다. 교육이라는 큰 그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맡은 한 조각을 보다 보면 큰 그림은 잊어버리고 조각에만 몰두하게 된다. 올해 내가 맡은 조각은 ‘학교폭력’이다.
학교폭력 업무는 모두 알다시피 기피 업무다. 내가 이 업무를 맡게 된 것은 업무 희망원 5순위쯤에 ‘학교폭력’ 업무를 썼기 때문이고 5순위나마 쓴 사람은 나 포함 2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5순위에라도 썼던 이유는 이 일이 학생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을 만나는 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내년에도 이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이렇게 모두로부터 밀려난 후에 이 업무가 누구에게 가는지 살펴보면, 대부분의 학교에서 저경력 교사나 기간제 교사가 맡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폭력 업무는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기도 하지만 경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복잡한 법적 절차와 규정들을 이해하고 항의하는 학부모,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학생에게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능력치가 필수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 줄 누군가가 있지 않다. 학교폭력 책임교사(책임교사)가 사안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런데 이런 업무를 신규 교사나 기간제 교사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나는 현재 10년 차를 훌쩍 넘긴 경력 교사인데도 이 업무가 버겁다.
얼마나 기피 업무였던지 올해부터는 수업 시수를 줄여 주기 위해 교육청에서 강사비를 지원하고, 조사 업무를 덜어 주기 위해 전담 조사관 제도라는 것도 신설했다. 왜 업무를 나눠 맡을 교사를 추가로 배치하지는 않는가? 예산 때문인가? 교원의 수를 줄여 나가야 하기 때문인가? 그러다 올해 전담 조사관 제도가 도입되며 공방의 시간은 더 길어지고 사안은 교사로부터 더 멀어졌다.
전담 조사관 투입이 오히려 업무를 가중시키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2023년 10월 대통령과 현장 교사들의 간담회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있었던 학교폭력 업무 외부 이관 요청에 대한 후속 조치로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한다. 충분한 고민과 준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된 제도였기에 도입 초기부터 비판이 많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교육청 연수에 참여한 각 학교의 책임교사들은 예상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이야기했고, 실제로 대부분 현실이 되었다.
졸속으로 만들어진 제도이기에 단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해 봤다. 그래도 방향성이 맞다면 초기의 진통을 감수하더라도 기다려 볼 수는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2개월간 10여 건의 사안을 처리하면서 방향성 자체가 틀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일단 바로 나타난 표면적인 문제점들은 이런 것들이다. 사안마다 다른 조사관이 배정되기 때문에 그 때마다 교육청을 통해 조사관과 연락하고 조사관과 학생, 학부모와의 면담 시간을 조율하고, 조사관이 조사 업무를 수행했음을 확인하는 서류를 작성해서 교육청에 보내고, 조사관이 추가로 가져간 자료(학생 확인서, 학부모 확인서 등)의 목록을 정리한 문서를 만들어서 보관하는 등 조사관 제도가 생기면서 각종 자잘한 업무들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자잘하다고 말하지만 원래도 하나의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는데 거기에 일이 네댓 개 덧붙여진 셈이어서 책임교사들은 업무가 줄어든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고 호소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조사관이 학생과 면담하기 위해서는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고 조사관이 조사 활동을 할 동안, 책임교사는 적어도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늦어진다. 조사관과 학생, 학부모의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언제 퇴근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업무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는 더 중요한 문제를 낳는다. 대체로 조사관은 하루에 1명의 학생을 만날 수 있고, 학생과 조사관의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빠르면 하루 안에 조사를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이 사흘, 나흘, 길면 일주일까지도 길어지게 된다. 학교폭력 사안은 되도록 빠르게 처리될수록 좋다. 사안 처리를 기다리는 동안 피·가해를 겪은 학생들이 한 공간 안에서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사안 접수와 동시에 즉시 분리 조치를 시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최대 기간인 7일이 지나도록 조사조차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분리가 끝난 가해 학생이 다시 돌아온 후에도 사안은 그대로 진행 중이다. 수시로 학생들을 살피며 추가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사 기간이 길어지면 덩달아 학교폭력 전담 기구 개최도 늦어진다. 사안 접수 후 2주 안에 전담 기구를 열어야 하는 원칙이 있는데 올해 대부분의 사안은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해 전담 기구 개최를 연기하는 공문을 추가로 남겨야 했다. 이것 또한 조사관 제도로 인해 추가된 업무 중 하나다.
전담 조사관은 학교 현장을 모른다
전담 조사관 제도로 학교폭력 사안을 잘 처리할 수 있고 학생들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면 업무 증가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천천히 개선책을 찾아 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담 조사관 제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점 의문이 커지고 있다.
첫째, 전담 조사관의 대부분은 학교 현장을 잘 알지 못한다. 퇴직 교원인 경우도 있지만, 퇴직 경찰, 청소년 전문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조사관을 맡게 되었다. 두 달 동안 8~9명의 조사관을 만났는데 학교와 청소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는 경우는 좋게 보아 2명 정도였다. 청소년들의 생태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조사관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내가 학생들을 만나 조사한 내용이나 학교의 상황을 조사관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학교에 대해 알지 못하고, 청소년들의 관계나 행동 패턴, 학생들의 문화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매뉴얼만 가지고 조사를 진행하는 게 과연 공정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의문스럽고 답답한 상황들이 많았다.
둘째, 전담 조사관의 조사 활동이 소극적이다. 학교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면담 약속을 하고 학교에 방문해야 하는 상황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사관은 가·피해 학생을 각각 면담하고 학부모와 통화하는 것 외에는 추가적인 조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학부모 확인서도 학교에서 미리 받아 달라는 요구를 교육청으로부터 받았다. 학교폭력 사안은 복잡한 상황이 많기 때문에 목격한 학생들의 진술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3월 초 첫 번째 사안에서 조사관이 목격자의 진술을 받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난 이후부터는 내가 먼저 나서서 목격 학생의 진술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안이 잘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업무 간소화를 위해 조사관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 때로는 조사관으로부터 목격 학생의 진술을 받아 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하였다. 제도의 취지대로 조사관이 직접 진술을 받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조사 기간이 더 늘어날 뿐만 아니라 목격 학생이 진술을 어려워할 수도 있기 때문에(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교육청에서 나온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심각한 일로 여기고 두려워한다) 결국 내가 학생들을 만나 진술을 받았다.
만약 책임교사가 조사관 제도의 도입 취지 그대로 사안 접수만 하고 이후의 조사를 전부 조사관에게만 맡겨 두면 피상적인 조사만 이루어진 채 사안이 종료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나는 사안 접수 단계에서부터 자세하게 조사하고 목격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통화하는 일 등을 모두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사관이 완성해서 보내 온 조사 보고서를 보면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내용이 거의 없었다. ‘이럴 거면 조사관이 왜 필요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조사관이 의미 있다고 여겨진 경우는 피·가해 학생이 여러 학교에 걸쳐 있는 경우뿐이었다. 동일한 조사관이 각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을 만나기 때문에 좀 더 일관성 있게 사안 처리가 될 수 있다(여러 교육청이 걸쳐 있는 사건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조사관은 각각의 교육청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교육청 심의위원회에서 해결할 수 있거나 이런 경우에만 조사관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조사관 제도가 도입된 결과, 책임교사의 업무량은 늘어났고 사안 처리 과정이 길어졌다. 조사관은 사안 처리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했다.[ref]나만 그런가 싶어 기사를 검색해 보니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다만 울산에서는 교육감 직속 학교폭력 컨트롤타워가 원스톱 대응 체계를 구축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었다. 도입의 배경이 된 2023년 10월의 대통령-현장 교사 간담회에서 교사들이 요구했다고 하는 “학교폭력 업무 외부 이관”이 이루어진 것일까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업무 경감이나 신속한 대응은 경험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다.[/ref]
사람의 일이 숫자와 업무로 보이기 시작할 때
학교폭력이라는 업무는 사실 평화로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출발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이 일이 평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아니 사실은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원래 이 업무는 평화가 아니라 사실 확인, 법적 조치, 생활기록부 같은 것들과만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닐까.
학교폭력 책임교사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업무’로 보게 되는 것, 교육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법적 효력이 없는 일은 힘이 없어서 물증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학생들을 점점 미워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 그런 시간들을 겪는 일이다.
4월 말 현재 총 12건의 사안이 접수되었다. 학기 초에 사안이 많이 발생한다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예년보다도 많은 숫자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아직까지는 올해만의 이슈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다른 학교 학생과의 다툼이거나 해묵은 갈등이 터져나온 경우 혹은 작년부터 이어져 오던 갈등 등이기 때문이다. 12건의 사안 중 학기 초 새로 형성되는 관계와의 부딪힘에 해당하는 건은 넓게 보아도 2개뿐이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2건의 사안을 처리하려다 보니 어느 날은 하루 동안 10명이 넘는 학생들을 만나 면담하고 또 10명이 넘는 학부모와 통화했다. 추가로 교육청과 연락하고 관련 교사와 협의하고 조사관과 연락하고 공문을 처리하는 등의 일도 해야 한다. 그런 날들을 보내다 보면 사안이 접수되었을 때 ‘아, 또……’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학생과 학부모를 대할 때는 최대한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일을 잘 해결하려는 의지를 모아 보지만 참았던 스트레스가 어디론가는 튀게 된다. 피해 쪽이든 가해 쪽이든 학교폭력 사안과 관련된 이야기가 기분 좋을 리 없고 어떤 경우에는 과격한 민원을 직접 듣게 되기도 한다.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사과의 말을 하게 되기도 하고, 상대의 마음을 살펴 주려고 애를 쓰다 보면 퇴근길에는 녹초가 되어 있다. 민원 응대 업무를 하시는 분들의 심신의 피로를 절감하게 되고, 이러다 내가 병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두 달째여서 학생과 학부모, 교사의 어려움을 같이 고민할 에너지를 겨우 짜내고 있는데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각각의 사안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그냥 숫자와 업무로만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일을 쉽게 처리하려고 학생의 고통과 사안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게 되는 건 아닐까 겁이 난다.
사라지는 교육의 시간을 바라보며
학교폭력 신고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상대를 처벌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하다. 사안 처리 과정에서 화해를 하게 될 수도 있고 처벌받지 않고 종결될 수도 있지만, 접수 단계에서 만나 본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는 처벌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미 신고까지 왔다는 것은 그 이전의 노력들이 실패했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처벌의 수위가 높을수록 처벌받은 내용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기간도 길어진다. 그 사실을 피·가해 측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 사안이 접수되면 양측 모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책임교사나 학교 측에서 어떤 실수나 빌미를 제공하게 되면 상황이 어려워지고 학교나 교사가 책임을 져야 하거나 절차상 문제로 인해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교사의 눈으로 볼 때 피·가해가 명확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가해 측에서 결백을 주장하고 있고 증거도 없는 경우, 가해 측의 학생을 지도하거나 교육하게 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으로 접수된 사안이 아니라면 진실을 말할 학생들도 학교폭력 사안이 되면 입을 다물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많다. 진실을 말할 경우 자신이 받게 될 처벌이 커지기 때문이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결과, 교육의 기회도 사라지고 학생들이 반성할 기회도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봤을 때는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할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에 하나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공정한 수사관’의 위치에 서서 학생과 학부모들을 만난다. 양측의 말이 다 진실일 수 있음을 가정하고 ‘확인된’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만 한다. 학교폭력 사안으로 접수되고 난 이후에는 담임 교사나 학년 부장 등 다른 교사가 개입하기 어렵다. 공은 학교폭력 전담 기구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양측의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교육의 시간은 사라진다.
닫힌 문 앞에서 증거를 찾아 헤매다
사례 1. 목격 학생의 진술 거부
언어 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 신고로 조사를 시작했다. 목격 학생이 있었으나 조사 과정에서 진술을 거부했다. 가해자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목격자의 진술은 비밀이 엄수되며 원하는 경우 온라인이나 서면으로만 진술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알렸음에도 결국 학부모님들의 반대로 진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부모님들이 학교를 믿지 못하는 마음, 비밀리에 진술하더라도 보복 행위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이해한다. 그래서 더 이상 진술을 부탁하지 못했다. 결국 목격 진술 없이 양측이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결론으로 보고서가 쓰였다. 피해 측에서 징계보다는 화해와 재발 방지를 원했고 가해 학생도 동의하여 학교장 자체 해결로 끝났지만 피해 측에서 보복의 두려움이 없었다면 과연 그렇게 끝냈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그리고 사안이 마무리된 후 가해 측의 학부모는 오히려 자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며 학교에 항의했다. 거기에 대해 목격자들이 있어서 가해가 확실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격자 학생들이 자신이 드러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기에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원칙을 지켜서 진행되었다는 설명과 보호자의 화난 마음을 달래 주는 말뿐이었다. 법 때문에 생긴 구멍을 법에 기대면서 해결하는 식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 날의 퇴근길은 유난히 마음이 힘들다.
사례 2. 따돌림 사건에서의 목격자 찾기
따돌림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 신고로 조사를 시작했다. 목격 학생이 다수이나 몇 명의 학생들은 목격한 바가 없다고 말해 피해를 입증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몇 명의 학생들이 축소된 내용이나마 진술을 해 주었다. 가해 학생은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여러 번의 따돌림 상황이 있었으나 어떤 경우는 같은 자리에 있었던 학생들 전원이 가해 학생의 친구여서 모두가 입을 모아 그런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경우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하는 학생들을 계속 의심하고 몰아세울 수는 없다. 거짓말을 하고 교무실을 나서는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만약 자기 편에 서서 진술해 줄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경우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버텨 낼 수 있을까……. 이런 경우 내가 하는 일은 평화를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다. 피해자는 법과 학교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매뉴얼대로 진행된 이후에 결국 가해가 ‘입증’되지 않아 피해가 인정되지 않고 피해의 회복도, 가해자의 책임도 없는 경우가 생긴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안타까워할 수 있을 뿐 피해 학생을 위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례 3. 가해가 있었지만 법적 ‘혐의 없음’으로 끝난 사건
1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이다. 피해와 가해가 발생했다. 여러 정황상 가해가 분명한 상황임에도 복잡하고 지리한 시간을 보낸 후에 결국 최종적으로는 가해가 인정되지 않았다. 교육청에서 결정한 가해 학생에 대한 조치도 모두 취소되었다. 법이 인정한 ‘혐의 없음’에 대해 교사들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해 학생은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가 겨우 한 일은 피해 학생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전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피해 학생이 앞으로 학교와 사회에 도움을 청하려고 할까? 이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빠르게 물증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어떻게 하면 진실을 말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떤 물적 증거가 남아 있을까 혹은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내 직업이 교사인지 수사관인지 헷갈린다. 그렇다고 수사관이기에는 너무 얼치기라 이 상황 자체가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학생들을 점점 미워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
나쁜 일을 하고, 나쁜 일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반성도 변화도 없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점점 학생들에 대한 신뢰가 줄어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에는 선함이 있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학생들을 만나 왔는데 그런 믿음이 전혀 힘이 없게 느껴진다. 학생들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어른들(교사-학부모-사회)이 학생들의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누구라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믿음에 힘이 없다. 일단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행동을 반복하는 어떤 학생을 보고 ‘걔는 이미 틀려먹었어’라고 단정짓는 어른들의 시선이 얼마나 많은지. ‘부모도 어쩌지 못하는 애를 우리가 어떻게 해’, 나도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그럼 그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나? 부모도 바르게 키우지 않고 학교도 손을 떼면 누가 그 아이를 잡으려고 할까. 그렇다고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헌신하고 매달려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나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럼 아이는?’이라는 질문을 버릴 수 없다. 심의 결과 가장 큰 처벌인 강제 전학[ref]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퇴학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강제 전학이 가장 큰 처벌이 된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퇴학 처분이 이루어진다. 퇴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학교를 떠난 학생의 삶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ref] 처분을 받고 학교를 떠난 학생은 새로운 학교에 가서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강제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과 강제로 학교에 들어온 학생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전학을 가고 나면 우리 학교의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진다. 우리 학교로 전학 온 학생에 대해서도 과거의 일로 학생을 지도하거나 교육할 수 없다. 무슨 일로 전학 처분을 받았는지 공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건너 건너 소문을 듣고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그런 소문은 학생에 대한 선입견만 보태 줄 뿐이다.
책임교사인 나는 종일 학생들의 나쁜 행동에 대해 듣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다가 수업 시간이 되면 갑자기 모드를 변경해 교실에 들어간다. 학생들과 웃으며 즐겁게 수업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짜내 본다. 시시각각 인격이 바뀌는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나를 보며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싶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다가 생각한다. 내가 오늘 한 일은 학교의 평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처벌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만든 건 아닐까, 좀 더 유리한 조건을 갖기 위해 협상하는 대화를 조율해 준 건 아닐까, 학생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데도 ‘원칙이 이래서 어쩔 수 없어, 규정상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라고 대답했던 건 아닐까. 보복성 ‘맞폭’인 것을 알면서도 원칙대로 사안을 접수한 것이 피해 학생을 더 괴롭게 한 것은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답을 찾을 시간이 없다. 만나야 할 학생들, 통화해야 할 학부모들, 보내야 할 공문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에 지친 나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조각에서 떨어져 나와 큰 그림을 보려고 해 보자. 우리가 하려는 일은 학생들이 안전하게 생활하고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잘못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바른 방향으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물론 모든 제도들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깊은 고민과 성찰이 없고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제도와 각종 규정들이 실제 현장에서 아무 힘 없이 문서로만 남거나 혹은 애초의 취지와는 멀어진 채 학교의 구성원들을 괴롭히기만 하는 사례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학교폭력 사건’이라는 결과만 바라보며 가해자를 촘촘하게 가려내고 강력한 처벌을 내리는 방식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학교의 모든 일을 사법 절차가 해결해 줄 수 없다. 학생들의 삶에 사법 절차가 촘촘하게 들어올수록 피해자, 가해자, 학교, 교육청 모두 각자가 촘촘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