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에세이] 다시, 시를 만날 시간 (이상대)

2019-01-01
조회수 3557

에세이 


다시, 시를 만날 시간


이상대
서울 금옥중

applebighead@naver.com

어느덧 원로 반열에 올랐다.

아이들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가르치기보다 수다를 떠는 데 소질이 있다.

요즘엔 아이들 타로를 봐 주며(용하다고 소문이 짜하다)

그들을 꼬드겨 중딩 연애 소설을 쓰는 데 골몰하고 있다.



한 해가 벼락같이 지나갔다.

 

방학을 맞아 동료와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학교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올해는 뭘 했는가. 딱히 정리할 것도 없으면서 연말이면 자꾸 이렇게 되묻는 것은 분명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다. 별다른 투지도 없이 나이만 먹는다는 초조감이 은근히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이다.

 

뭘 하며 지냈는가. 소소한 일상사 말고는 뭐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간 해오던 시 읽기 수업의 맥을 끊지 않고 끌고 왔다는 것. 올해는 비담임이라는 여유가 생겨 몇 반을 더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시를 읽지 않고 어찌 사람 구실을 하겠느냐는 잔소리가 먹혔는지, 지난 해 친구들에 비해 시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따습고 정겨웠다. 그러나 매주 2백 권의 시 공책을 읽고, 2백 개의 댓글을 다는 일이 실은 엄청난 일이어서 하반기에는 슬슬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누가 들여다보며 박수를 쳐 주는 일도 아니어서 처음의 다짐도 시들해지고 늦게 퇴근하는 길은 자못 쓸쓸하기까지 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막 그럴 무렵에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서 송승훈 선생의 글을 보았다.

 

세상이 망가져 가더라도 교사는 학생들과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있으면 세상의 어둠을 이겨 낼 듯한 마음이 듭니다. 이 친구들이 좋은 사람이 되어 나중에 세상을 다시 좋게 만들어 가겠구나, 하고 꿈을 꾸게 되어 그렇지요. 

 

몇 마디 되지도 않는 짧은 글인데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졌다. 물론 나에게 한 얘기는 아닐 것이나, 그럼에도 ‘학생들과 무언가 좋은 일’이라는 말이 공연히 반갑고 고마웠다. 어린 친구들과 지지고 볶으며 시를 읽는 것도 ‘망가진 세상을 견디는 무언가 좋은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은근히 기분이 쫄깃해져서 기운을 내어 시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사는 게 힘들거나, 외롭고 헛헛할 때는 누가 슬쩍 손만 흔들어 줘도 이토록 고마운 것이다.

 

 

 ‘무언가 좋은 일’

 

국어 시간에 시를 읽기 시작한 게 2005년 무렵이니까 벌써 십 년이 다 됐다. 처음에는 여유 시간에 시를 읽었으나, 요즘엔 아예 요일을 박아 놓고 읽는다. 누군가 그 이야기를 듣고 ‘수업의 대강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이렇게 요약을 해 주었다.

 

“중학교 국어 선생인 나는 매주 국어 네 시간 중 한 시간을 떼어 시를 읽는다. 올해는 2학년 세 반에 3학년 네 반, 도합 일곱 반과 시를 읽었다. 왜 시인가. 본디 시는 삶의 상처, 고통의 절정에서 길어 올린다. 그런 만큼 살아가면서 위로와 용서, 나아가 사람답게 사는 길의 상상력을 얻을 수 있는 장치로 시만 한 것이 없다. 정도전도 이런 시를 썼다잖은가. ‘소매에 감춰 놓은 몇 수의 시, 방황하는 인생을 위로해 주네.’ 그러나 어린 친구들은 ‘시는 어렵다’는 주술에 걸려 선뜻 움직이지 않는다. 때문에 무엇보다 시와 친해지는 것이 시 읽기 수업의 관건이 된다. 친해지려면 편하게 자주 읽어야 한다. 우리가 시인을 만들려고 시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 시 수업의 목표는 평생 시 독자를 만드는 것이다. 일단 시 읽는 시간이 되면 70여 권의 시집이 담긴 바구니를 풀어놓고, 마음대로 가져가서 읽게 한다. 아이들은 시집을 읽다가 딱 꽂히는 시가 있으면, 그걸 시 공책에 옮기고, 왜 그 시가 눈에 들어왔는지 그 사연을 곁들여 감상을 쓴다. 필사와 글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좀 익숙해지면 아이들은 교과서 수업보다 이 시간을 훨씬 좋아한다. 교과서를 안 해도 되고, 각자 편하게, 혹은 옹기종기 모여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다른 행사에 밀려 이 시간이 빠지게 되면 어떻게든 찾아 먹으려고 법석을 떤다. 나는 아이들이 쓴 시 공책을 그때그때 읽고 돌려주어야 하니, 매주 2백 권의 시 공책을 읽고 2백 편의 댓글을 써야 한다. 일이 밀린 날은 집으로 가져와서 쓰기도 한다. 덕분에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 하지만 나름 감흥이 실리는 때가 많다. 읽고 쓰다 보면 그들의 삶과 연대하고 있다는 살가운 온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아 가면서 공부를 해서(뭘 물어서 모르면 머리통이나 따귀를 때렸단다) 지금도 책을 펴면 가슴이 먼저 뛴다거나, 장사를 말아먹은 아빠가 하루걸러 엄마와 뭘 집어 던지며 싸우는데, 자기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하는 사연을 대할 때는 가슴이 턱 막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너 번 시 공책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거치면 이후의 국어 수업은, 그게 고전이 되었든 문법이 되었든 마치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식구들처럼 편해진다. 덕분에 개기고 나대도 크게 노여움이 일지 않는다.”

 

 

 왜 시인가

 

항상 시 공책을 붙들고 있는 내게 누군가 물었다.

 

“너무 시에 치우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에 대해 사실 쥐뿔도 아는 게 없다. 나는 다만, 글뿐 아니라 수업에도 집필 관점, 지향指向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국어 선생으로서 나의 지향은 ‘글을 통한 소통과 연대’이다. 물론 국어는 문학과 실용문, 문법적 이해 등을 바탕으로 쓰기, 읽기, 말하기 등의 다양한 영역이 망라되는 교과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중심을 잡는 ‘집필 관점’이 있어야 그를 중심으로 밀고 당기면서 절정으로 치닫는 구성이 가능해진다. 수업은 이야기이다. 모든 글귀에 밑줄을 치다가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다. 젊은 시절이 그러했다. 매 시간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전력 질주했다. 시간마다 수십 개의 분필을 부러뜨리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학년 말에 돌아보면 딱히 손에 쥐어지는 게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경력이 20년을 넘어서면 수업 정도는 어렵지 않게 끌고 나갈 수 있다. 어느 타이밍에서 풀고, 어느 지점에서 조일지, 어느 대목에서 어떤 에피소드를 활용하고 어느 단원에서 어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 것인지에 한껏 능란해지고, 게다가 교과서 업체에서 만들어 준 시디(참 친절하고 삼빡하다)를 적절히 활용하면 단원 정리도 깔끔하게 해낼 수 있다. 매끈하고 무난하다. 문제없다. 그런데 그럴수록 하……, 남는 게 없다. 학년 말이면 물 빠진 자리처럼 허전하고, 방학 때 하루 나와서 서랍 정리하고, 수행평가 자료 모아서 휴지통에 던지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끄읕! 곧 아이들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씨발!” 이렇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친구들 몇 빼고는 대부분 기억 밖으로 빠져나간다.

 

뭐가 문제인가. 서로의 삶에 대한 교감이 없는 것이다. 언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삶을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언어로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어루만질 수 없다면, 국어 수업은 뭣에 써 먹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떤 언어로 이들의 삶과 마주할 것인가, 궁리 끝에 택한 것이 시였다.

 

삶은 기본적으로 주문이나 기도를 수반한다. 주문이나 기도에서 시가 출발했으니 사는 것은 본디 ‘시적’인 것이다(손석춘, 《사람은 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쓸까》, 2015). 그렇게 삶의 절정을 포착한 시편은 우리 곁을 바짝 지키고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 말없이 손을 내밀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시를 일상에 끌어들이는 순간 삶은 낡은 먼지를 털고 서서히 긴장하게 된다. 당장 우리만 해도 슬슬 배에 기름이 오르고, 텔레비전 주말 연예 프로그램 앞에 껌처럼 붙어살다가 이런 시를 대하면 번쩍 정신이 들지 않는가.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최승호, <북어> 일부

 

그렇다고 대뜸 시를 읽자고 하면, 아이들이 알아서 척척 시심詩心의 바다로 빠져드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화려한 언변으로 시 읽기의 매력을 설파했다 해도 시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피곤하고 ‘조낸’ 어려운 것이다. (나중에 시 수업 후기를 받아 보면, 처음에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시를 읽겠다고 했을 때는 ‘귀찮았다’거나 ‘당황했다’, ‘짜증이 확 났다’는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올해 국어는 조졌다는 생각을 했다’는 아이도 있다) 게다가 감상을 쓰라는데 뭘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입부는 선배들이 남겨 둔 시 공책을 돌려 보는 것으로 문을 연다. 백 마디 말보다 실물 하나의 효과가 월등하다. 이런 내용이 적힌 선배들의 시 공책을 보는 순간 아이들은 척 감을 잡는 것이다.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 손택수, <거미줄> 전문

 

“어제 엄마하고 영어 학원 때문에 싸웠다. 막 짜증이 터져서 공책에 엄마 욕을 잔뜩 쓰다가, 저녁 8시 다른 아이들이 학원에서 공부할 시간에 아픈 척 잠을 잤다. 문 밖에서 ‘하여튼 이놈의 기집애 이번 시험 못 보면 알아서 해!’ 막 이러던 엄마는 두어 시간이 지나자 슬며시 들어와 내 몸을 확인하고 방 온도를 높여 주었다. 나는 방이 너무 더워 구시렁대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좀 미안했다. 시에 나오는 것처럼, 맨날 툭탁거려도 엄마와 자식 사이에는 거미줄 같은 뭐가 있는 것 같다.” (2학년 박지윤)

 

 

시 읽기의 추임새

 

시 읽기가 시작되면, 교사의 반응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어찌 댓글을 다느냐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밖에서야 중2병이니, 질풍노도니 하지만 이 친구들 속을 들여다보면 하염없이 여리고 무르다. 별거 아닌 일에도 불안하고 두려워서 쩔쩔맨다. 그래서 댓글을 쓸 때는 가능한 훈계를 내려놓고 공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때로는 개드립도 불사하면서. 아이들의 감상 글은 대부분 실패담이거나 고난에 찬 삶과 대적하려는 필사적인 몸짓이다. 이에 대해 상투적인 훈계나 충고로 일관하면 시 공책은 순식간에 ‘∼해야겠다’ 식의 착한 다짐문으로 바뀐다. 영혼 없는 글을 읽는 것만큼 고역도 없다. 피차 금세 지친다.

 

시 공책으로 만날 때만큼은 계급장 떼고 만나기, 한 명도 빼지 않고 단 한 줄이 되더라도 댓글 쓰기, 내용이 빈약할수록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 이런 원칙을 세워 놓고 시 공책을 읽고 댓글을 단다. (얼굴을 익힐 때까지는 담임에게 부탁해서 얻은 아이들 사진을 앞에 놓고 시 공책을 읽는다.)

 

마르틴 부버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 방식에는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나-너’의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서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너의 유기적인 만남이고,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방의 존재를 기능적인 어떤 것으로 여긴다. 이때 상대방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언제든 다른 대상으로 대체할 수 있으며, 수단, 도구로 간주된다. 이성우 선생 같은 이는 ‘요즘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나―너의 관계에서 나―그것의 관계로 급속하게 옮겨 가고 있다’고 분석한다(《교사가 교사에게》, 2015). 맞다. 이런 경우 시 읽기에서 교사의 진심어린 화답은 관계 맺기의 망을 ‘나―너’로 되돌리는 유력한 손짓이 된다. 나와 너로 만날 때 관계가 열리고, 그 관계가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교육의 발화 지점은 ‘관계’에 있지 아니한가.

 

그런 바탕만 구축되면 그 다음부터 시 공책으로 나누는 대화는 출렁출렁 물살을 탄다. 말문이 터진 아이들의 이야기는 개인의 존재감, 친구, 가정 문제, 진로, 연애 등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때로는 쿨하게, 때로는 구구절절하게. 이쯤 되면 세상의 싸가지를 향해 같이 격분할 수도 있고, 이크! 와우! 같은 감탄사로 댓글을 대신할 수도 있다.



때때로 번뜩이고 뜨끈하고 달달한

 

이 숯도 한 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 타다모토, <이 숯도 한때는> 전문

 

“난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다. 시인들은 참 놀랍다. 그러고 보니 많은 게 있다. 이 가죽은 한때 악어였겠지, 이 모피는 한때 여우였겠지. 나도 한때는 아주 재미있는 웃음보따리였다. 말만 하면 친구들이 웃었다. 그런데 요새 친구들은 폰만 한다. 게임을 모르면 이야기에 끼지도 못한다. 그래서 폰이 없는 나는 침묵…… 그냥 조용히 짜져서 산다.” (2학년 황도연)

 

이런 친구는 그 많은 시 중에서 이런 시를 찾아낸 안목에 박수를 쳐 준다. 그런 뒤 복도에서 만나면 슬쩍 팔짱을 끼고 교무실까지 데이트를 한다. 폰이 왜 없어? 뺏겼어? 그러면서 폰에 얽힌 그의 서러운 흑역사를 공유한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털어놓는 친구도 있다.

 

 억압을
 벗어나

 자유를
 선택해

      - 하상욱, <사각팬티> 전문

 

 

“(아, 짧은 시 완전 좋아!) 나는 주로 스판 팬티를 입는다. 가끔 사각팬티를 입기도 한다. 두 팬티를 비교하면 우선 스판 팬티는 답답하다. 가끔 털이 낄 때가 있다. 그러면 얼른 손을 넣어 빼내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이에 비해 사각팬티는 헐렁해서 털이 낄 일이 없다. 그렇지만 바지를 입으면 항상 위로 당겨 올라와 있어서 내리기 바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스판 쪽으로 결정했다. 좀 답답하지만 우리는 활동량이 많으니까 스판이 낫다. 털이 자주 끼는 것도 아니고.” (3학년 김남자)

 

여기엔 동네 아저씨 버전으로 댓글을 단다. “음하핫! 그래도 남자에게는 사각팬티가 갑!이지. 샘 아버지께서 늘 그러셨거든. ‘거시기 밑에 땀 차는 놈한테는 돈도 꿔 주지 말라’고. 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만큼 남자한테는 통풍이 중요하다는 말씀! 샘은 솔직히 너희들 쫄바지를 보면 심각하게 걱정스러워. 저것들이 생식 능력을 갖출 수 있을라나? 뭔 말인지 모르겠으면 샘에게 번개같이 달려올 것!”


때로는 일상을 넘어 목울대를 뜨끈하게 적시는 글도 있다.

 

이별은
별이 되는 것

 

이 한 칸 띄우고 별
한 칸, 그래
한 걸음 멀어졌을 뿐이다

 

그 별도 아니고
저 별도 아니고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빛나는 별

 

너는 나의
별이 되었을 뿐이다

                      - 이장근, <이별> 전문

 

“오늘은 4월 16일, 세월호 1주기.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빛나는 별……. 혹시 엄마가 자기를 못 알아볼까 봐 학생증을 손에 꼭 쥐고 죽었다는 그 선배들은 별이 되었을까?” (3학년 김유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비감해져 짧게 덧붙인다. “이 황당한 나라도 무섭고, 이런 나라에서 무사하게 잘 살고 있는 나도 무섭다.” 그리고는 이 친구를 불러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같은 책을 한 권 쥐어 준다. 우린 슬픔으로 동지가 된다. ‘슬퍼할 줄 알면 희망이 있다’는 말을 믿어 본다.


시간이 좀 지나 분위기가 편안해지면 많은 학생들은 연애 이야기 쪽으로 무대를 옮긴다. 열여섯 이팔청춘, 꽃봉오리 피듯 몸과 마음이 피어나는 때 아닌가. 

 

한순간이라도
당신과 내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당신도
알게 될 테니까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D. 포페 <단 한순간만이라도>

 

“어…… 쪽팔리지만 난 지금 짝사랑에 빠져 있다. (아, 오그라들어) 내 이상형은 웃는 게 예쁘고 손이 예쁜 남자인데 그런 애가 나타난 거다. 같은 반이니까 자주 보고 친하게 지내기는 하는데, 솔직히 난 감정을 숨기고 이런 거를 잘 못 해서 티가 팍팍 난다. 그런데 걔는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번엔 좀 심각하다. 공부를 해도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 항상 보고 싶다. 솔직히 그 애가 밉기도 하다. 난 저 때문에 일상이 엉망진창이 됐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좀 억울하고 그렇다. 정말 이 시처럼 한순간이라도 서로 바뀌어, 내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건 시 공책이고 상대 쌤이랑 나만 보는 거니까 여기에다 써야겠다. ― 좋아해♡♡ 진짜!! 하지만 내 맘도 모르는 넌 참 개새끼인 듯 해!” (3학년 박유민)

 

편하게 답장을 쓴다. “드디어 ‘그분’이 오셨군. 축하! 근데 그 ‘개새끼’는 뉘기여? 완전 궁금한데? 여튼 그 자식이 계속 모른 척하면 그때 매점 과자 한 봉 사 들고 샘한테 올 것! 타로를 봐 주겠다는 말씀!” 작년에 배워 둔 타로가 이런 때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지금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타로 보러 오는 친구들 때문에 점심시간에 쉴 짬이 없다.

 

 

 다시 ‘무언가 좋은 일’


요즘엔 빈 교무실에서 몇 년치 시 공책을 쌓아놓고 다시 읽고 있다.

 

아이들이 공책 끝에 붙인 ‘시 수업 후기’는 말 그대로 보너스다. 물론 선생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의도도 있겠지만, “몇 달 동안 시를 읽고 내 생각을 쓰면서 내 속에 있던 오래되고 망가지고 부서진 짐들을 정리해서 하나씩 꺼내 놓는 기분이었다”거나, “일 년 동안 시를 읽으면서 ‘시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시라면 절대 사절이었다. 너무 어렵고 시험 때도 시가 나오면 죄다 틀렸다. 지금도 시험 보면 막 틀리지만, 옛날보다 시가 훨씬 좋아졌다. 설레기도 하고, 공감이 되는 시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는 후기를 읽으면 은근히 속이 든든해진다. 언감생심 이들과 ‘우정’의 경지를 꿈꿔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달달한 추킴을 듣고자 시 공책을 뒤지는 것은 아니다. 작년 올해 시 공책에서 주류를 이루는 이야기는 공부와 연애 쪽이었다. 특히 연애 이야기, 차마 이걸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없어서 책으로라도 엮어 볼까 궁리를 하고 있다(사실은 이미 2010년도에 시 감상을 추려 책을 낸 적이 있다. 중딩들의 아프고 절절한 이야기를 혼자 읽기 아까워 ‘중학생이 사랑하는 시’라는 부제를 달아서 책을 냈다. 그러나 나중에 ‘역시 시는 안 된다’는 출판사 책임자의 고민을 전해 듣고는 크게 낙담을 했다. 시를 잊은 세상에 무엇을 기대할까). 그럴지라도 다시 털고 나설 수밖에 없다. 그저 가진 재주라곤 어린 청춘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세상에 전하는 것밖에 없으니 어쩌랴. 이제 막 자기 자신과 타인을 보듬고 어루만지는 경험이 피어나는 시기, 그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시기, 그 은밀하고 놀라운 성장을 그냥 공책 안에 묻어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걸 다 덮으라고, 연애는 사치라고,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할 때라고 막무가내로 채근하는 것에 어떤 식으로든 맞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도 ‘무언가 좋은 일’이라면.

 

아이들의 연애 이야기를 뽑아 읽으면서, 나는 지금 열여섯 살로 돌아와 있다.

 

그럼에도…… 잘 모르겠다. 뭐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가 길었으나(이렇게 애쓰지 않는 교사가 어디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무리 괴테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했다지만, 아이들에 싸여 이게 죽인지 밥인지 분간이 어려울 때가 많고, 이 방식이 최선인지 확신도 서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울력이 아이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지, 장차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지 나 자신조차 모호하다. 세상이 망가지는 징조뿐이어서 더 그렇다. 다만 ‘사상마련事上磨鍊’ ― 일 위에서 연마하고 단련하라는 왕양명의 말을 새길 뿐이다. 일 위에서 다듬고 조율하면서, 때로 낙담하고 때론 모색하고 극복하면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십 년 넘게 시 바구니를 끌고 다니며 참 철없게도 ‘끼니마다 시가 넘치는 착한 세상’을 꿈꾸었으니, 나는 시인들에게 술 한잔 얻어먹을 자격은 있다)

 


※ 혹시 학교에서 학생들과, 혹은 동료들과, 혹은 가족들과 시를 읽고 싶은 벗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시라. 가진 자료를 기꺼이 나눌 수 있다. 벗 카페 – 중학교국어(두더지연구소) 게시판에 올리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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