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특집] 교육은 계급 투쟁의 장인가? (홍세화)

20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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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교육과 불평등 


교육은 계급 투쟁의 장인가? 

 

글 

홍세화 

hongshenx@hanmail.net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의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역설 

 

“교육은 계급 투쟁의 장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은 절반만 맞을 것이다. 그 맞는 절반도 마르크스주의자가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서다.


누가 지배 계급이 되고 누가 지배당하는가. 누가 자본가, 법률가, 의사, 고위 관료가 되고, 누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가. ‘10:90’ 또는 ‘20:80’의 사회에서 누가 10 또는 20에 들고, 누가 80 또는 90에 속하게 되는가. 이것이 치열한 교육 경쟁을 통해 정해진다고 여전히 믿는다면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파도만 볼 뿐 앞으로 조류의 흐름이 어떻게 바뀔지 보려고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 경쟁은 그 치열한 양상에 있어서 세계에서 으뜸을 다툰다. 그래서 “교육은 계급 투쟁의 장”이라는 명제가 사람들에게 그럴듯 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국에서도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 클로드 파스롱이 말했듯이, 우리 교육도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정당 화하는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반세기 앞서 현장 연구를 통해 학생들의 출신 집안과 교육의 상관관계를 확인하였다. 학교는 유복한 사회 범주의 문화 모델을 재생산함으로써 그것에 쉽게 적응할 수있는 학생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게 그들이 내린 결론 중의 하나였다.


(당시 연구자들 중에는 학생 평가에서 수학의 가중치를 3배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다. 모든 교과목에서 학생의 성적이 부모의 영향 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그중 언어-문화적으로 가장 먼 수학 과목의 상관관 계가 가장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열기 위한 궁여지책의 요구였는데,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사례는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덧붙이자면, 프랑스 교육사회학계의 이와 같은 연구 업적과 1968년 5월 혁명이라는 변혁적인 국면이 만나서 프랑스 대학은 평준화 그리고 노동자의 자식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는 대학교육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육은 사회의 생산력을 키울 수 있으나, 교육을 통해 사회적 불평 등이 해소된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이는 세계 곳곳에서 교육이 보편화, 장기화되고 있지만 인류로 하여금 전쟁을 멈추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국 사태가 말해 주는 것 

 

우리는 2019년 하반기부터 조국 사태라는 기이한 현상과 마주하고 있다. 조국 가족의 두 자녀는 1990년대생으로 미국 유학을 거쳤는데 국내 대학의 의학 전문 대학원에 입학했거나 법학 전문 대학원에 지원했다.


한국 사회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괜찮은 일자리’에 속하는 의사, 법률가가 되려는 것으로 우연한 선택이 아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리처드 리브스는 《20 VS 80의 사회》에서,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에 사는 것, 능력 본위를 강조하는 대학 입시, 인턴 기회의 불공정한 배분 등세 가지를 ‘기회의 사재기’라고 불렀다. 그는 상위 20%가 이 기회의 사재기를 통해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면서도 이를 자녀의 머리와 재능, 노력의 대가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또 석·박사 학위를 “세대 간 지위 전승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 “상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통해 계급을 재생산”하고, “자신이 공명정대하게 승리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조국 가족의 경우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최근 《세습 중산층 사회》를 펴낸 조귀동은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90년대생의 세계에서 부모 세대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자녀 세대인 그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수준 으로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86세대가 경험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부모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자녀는 명문대 졸업장도 어려운데, 조국 부부의 두 자녀는 의전원, 법전원에 입학했거나 지원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부모의 경제적 자본은 물론, 부모한테 다양한 스펙 품앗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 관계 자본이 없는 노동자나 서민 층의 자식이 의전원, 법전원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 기보다 더 어려운 불가능의 영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 고 했던 한국의 교육이 반세기 전 프랑스처럼 계층의 대물림을 합리화해 주는 과정으로 바뀐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수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치열한 경쟁의 질곡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조국 가족의 특혜 품앗이와 탈법을 통한 스펙 쌓기에 분노하는 대신 “우리가 조국이다!”를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탈 진실’ 사회에서 미디어의 작용(오늘날 한국의 미디어 화면은 사회 상층의 서사와 발언, 신변잡기로 채워지는 반면, 노동자 서민의 서사나 발언은 보기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생각 세계에도 없다out of sight, out of mind .’ 사회 구성원들의 감정 이입은 옆이나 아래가 아니라 위를 향한다. 연대는 진보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인데, 계급 의식이 없다면 감정 이입을 통한 연대를 기대해야 하는데 감정 이입이 상층 구성원에로의 일방으로만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가 조국 이다!’와 ‘우리가 김용균이다!’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반응을 비교해 보라)은 물론, 교육을 통한 지배 기제인 상징 폭력이 관철되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개념화한 상징 폭력은 피지배자들에게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지배자들에게 복종 하도록 이끄는 지배 기제다. 몸에 대한 물리적 폭력 행위가 그 순간의 복종을 이끌어 내는 반면에, 상징 폭력은 지속적으로 복종을 이끌어 낸다. 가령 일용직 노동자나 저소득층의 아이는 학교에서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가 부모한테서 들어 온 언어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교사의 언어가 고급한 것, 지배적인 것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언어 체계가 사유 체계이고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할 때, 아이는 교사의 세계관을 가지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세계관에 의해 자신을 부정적인 존재로 여기 거나 열등감이나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이 상징 폭력이다. 노동자와 서민들은 상징 폭력을 당해 지배자의 세계관, 의식과 욕망을 자기 것으로 하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존감이나 긍지를 갖기 어렵고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우리는 어쩌면 이 사회를 10:90 또는 20:80보다 10:30:60의 사회로 더 구분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즉, 교육 경쟁을 통해 계층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10’에 진입할 수 없다고 할 때, 중간 ‘30’에 속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미 획득한 ‘30’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조국이다!”를 외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60’에겐 구매력이 없으니 시민단체 회원이나 구독자가 되기 어렵다. 그들에겐 사회적 발언권이 없는 것이다. ‘30’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우리가 조국이다!”라는 목소리는 여론의 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여기에 새로이 기득권 화한 정치 세력, 미디어 장사꾼들, 사이비 지식인들이 각기 제 몫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교육 경쟁은 계층 상승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믿음을 주어 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앞으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착시를 거쳐 허상으로 귀결될 것이며, 계층 세습의 경향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과거 유럽의 중세 사회에서 왕족-귀족-평민-농노의 신분 ‘질서’를 정당화했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이데올로기였다(가령 ‘order’는 ‘질서’와 ‘명령’의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오늘날 교육은, 지배당하는 대중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네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잘못’ 탓으로 돌리게 함으 로써 지배 세력에 복종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역설로 “교육은 계급 투쟁의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나 할까? 

 


계급(의식)의 형성 

 

존재 조건으로서 즉자적인 노동자 계급은 한국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계급 의식을 가진 노동자는 거의 없다. 마르크스는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개인들은 다른 계급에 맞선 공동의 투쟁을 고무할 때에만 계급을 구성한다”고 썼다. 그는 “존재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개별화된 개인을 구성할 뿐이고, 그들의 존재 조건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계급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단순 명료한 이유로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한다”고 썼는데, 한국의 노동자들의 현실이 그와 같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저자 E. P. 톰슨의 말대로 계급은 ‘역사적 현상’이며 주로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역사적 현상이므로 영국이나 프랑스 또는 한국에서 노동자 계급은 다른 조건과 환경 아래 놓인다. 가령 “1780년부터 1832년까지의 여러 해 동안 영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그들의 지배자와 고용주들에 맞서서 자기네들 사이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쓴 톰슨은 계급과 계급 의식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계급적 경험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계급 의식은 이러한 경험들이 문화적 맥락에서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 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


영국은 명예혁명을 통해 신분 귀족들이 스스로 자본가의 길을 갔던 반면, 대혁명을 치른 프랑스는 다른 길을 걸었다. 왕정복고 등 반동의 시간을 반세기 이상 보낸 뒤 1848년 2월 혁명으로 구체제 Ancien Regime 가 그체제의 지배 계급이었던 귀족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면서, 유산자 계급과 무산자 계급이 확연히 분리된 뒤 자본주의 체제 아래 계급 갈등의 역사를 밟았다. 영국보다 반세기가량 늦게 노동자 계급이 형성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 의식의 출발점을 쉽게 표현해 “내 부모처럼 나도 노동자이고 내 자식도 나처럼 노동자가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유럽에 비해 그 기간이 훨씬 짧았으며, 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기도 했던 지금까지의 한국에서는 계급 의식의 출발점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 


 

궤적 

 

분단 이후 한국 사회 구성원의 계급과 의식 사이, 그리고 교육이 어떻게 작용하거나 작용하지 않았는지 그 상관관계에 관해 거칠게 살펴보 기로 하자.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당시 남한을 지배했던 미국 군정청의 여론국이 38선 이남 주민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질문 항목 중에 “귀하는 어느 것을 찬성 합니까?”라는 물음이 있었다. 다음은 이 물음에 대한 답변 분포다.

 

㈎ 자본주의 1,189인(14%) 

㈏ 사회주의 6,037인(70%) 

㈐ 공산주의 574인(7%) 

㈑ 모른다 653인(8%)

 


❶ 김기협(2012), 《해방일기 4》, 너머북스, 435쪽. 



절대 다수 사회 구성원이 생산 수단의 공유를 지지했다. 그 의식은 당시의 주된 생산관계에서 소농 또는 소작농의 처지에 있던 그들의 처지 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일제의 굴레에서 막 벗어났고 새로운 지배 세력의 지배 이념이 교육이나 미디어, 관변 조직을 통해 전파되기 이전이 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강조했던 문화적 헤게모니가 관철되지 않아,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명제가 왜곡되지 않고 적용될 수 있었다. 그람시에 따르면, 산업 사회는 노동자들의 정신 속에 ‘가짜 의식’을 주입할 목적을 가진 문화적 헤게모니의 수단을 갖고 있는데, 학교, 교회, 정당, 매스 미디어 등이 그런 것들이다. 요컨대, 지배 세력이 학교를 비롯한 문화적 헤게모니 수단을 활용하기 전이어서 사회 구성원들이 가질 수 있었던 의식이었고 그 의식으로 사유 재산권을 경자유전의 원칙으로 누르고 농지 개혁을 가져왔다. 한국이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요인들 중 국민 다수가 교육의 기회를 갖게 된 점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길을 열어 준 게 이농지 개혁이었다.


1960년대에 시작된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농촌 젊은이들은 대도시의 ‘공돌이’가 되었다. 백년 이상 세계 노동자들이 외쳤던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외침은 이 땅에서 오래가지 않았다. 20세기 말, 노동의 분할이 강퍅하게 이뤄지면서, 박점규가 《노동여지도》에서 말했듯이, “흑백 필름 시절 모두 같이 공돌이였던 울산의 노동자는 이제 중대형 아파트에 살며 그랜저를 모는 직영 계급, 소형 임대 주택에서 아반떼를 타는 하청 계급, 이 공장 저 공장 떠돌아다니는 알바 계급으로 나뉘었다”.


이제 《세습 중산층 사회》를 쓴 조귀동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오늘날 20대들은 첫 일자리로 사실상 ‘신분’이 결정된다.” “지방대생과 고졸자들은 20대 집단 내에서 ‘주변부’를 형성한다. 서울 소재 명문대라는 ‘중심부’, 서울과 수도권의 4년제 및 지방 거점 국립대라는 ‘반주변부’에 밀려 사회로부터 소외된 변방”이 된다. “한번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공무원이 라는 ‘내부자’가 되면 웬만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내부자로 남는다. 반면, 중소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기타 비정규직-일용직 등이 되면 끝까지 ‘외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부당 세습》이라는 저작에서 19세기 영국의 상위 계층 16세 소년의 평균 키가 하위 계층의 또래 소년들보다 22cm 나 더 컸다는 사실을 소개한 매튜 스튜어트의 말도 들어 보자. “60년 전에는 고졸 이하 학력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20%만이 한 부모 가정 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이 수치가 거의 70%에 이른다. 대졸 부모 가구에서는 한 부모 비율이 10%를 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디스토피아를 피할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교육자라면, 하위 계층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계층 상승이라는 헛된 희망을 갖게 하기보다는 계급 의식과 함께 상징 폭력에 맞설 수 있는 비판적 안목을 갖도록 모색할 것이다. 


 

맺으며 

 

노동자와 서민 계층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갇혀 자식을 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자식이 학교에서 형성하는 의식은 계급 의식이 아니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초·중·고 사회 교과 시간에 자본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조차 품지 않는다. 몇 해 전에 전교조 조합원인 사회 교과 교사들이 고등학생들이 노동과 노동자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 조사했다. 고등학생들은 노동을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의 첫째로 꼽았고, 나중에 노동자가 되리라고 전망한 학생은 단지 5%에 불과했다. 오늘 대다수 학생들은 조물주 위 건물주를 희망하고 있다.


내 자식은 프랑스의 중3 교실에서 ‘모의 노사 협의’를 했는데 학생 29명 중 대부분이 노조 대표를 지망했다. 고2 교실에서는 노동조합이 민주 주의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글을 썼다.


이는 무엇보다 민주시민교육이 이뤄지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민교육에서 시민교육으로 탈바꿈하는 대신, 학교의 학원화, 학부모와 학생이 고객이 되는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신자 유주의 기조에 교육 경쟁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헛된 믿음이 결합되어 나타난 모습이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이 그런 시대는 완료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마르크스의 말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있을 것이다. “철학은 프롤레타리아한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에서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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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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