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기획] 민주시민교육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다 (호야)

20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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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학교 민주주의 설계도 ③

 

민주시민교육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다


호야 

neojacobin@naver.com

청소년활동가. 어린년으로 살기가 영 녹록지 않습니다.



나는 지난해 2월부터 수원시 민주시민교육협의회 ‘빛길’이라는 단체에서 코디로 활동하고 있다. 빛길은 학교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고민을 지역 사회와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시도로서 2013년 10월에 구성된 조직으로, 수원 지역 15개 시민단체와 수원시교육청이 협력하여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 3월부터 빛길은 지역 사회와 학교의 연계를 위해 2개 학교에 민주시민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 중에 있다. 나는 이중 1개 학교의 동아리 활동에 함께하며 단체들이 진행하는 교육을 모니터링하고 학생들의 요구를 빛길에 전달하는 일종의 소통책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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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터 빛길은 내부 워크숍 등을 통해 민주시민교육의 키워드 - 민주주의, 평화, 인권, 의사소통, 함께하는 삶 - 를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주시민 동아리 강좌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그 커리큘럼과 교육 내용은 각 단체가 다루는 의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2015년 상·하반기에 걸쳐 각 단체가 돌아가며 강의나 체험활동을 진행하는 것이 이 동아리 운영의 핵심이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좋아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지난 10개월간 빛길의 동아리 운영에 함께하며 빛길이 진행하는 민주시민교육 프로그램과 민주시민교육 자체에 대한 고까움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빛길이 보여 준 민주시민교육의 한계

 

사실 빛길의 교육을 민주시민교육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기는 한다. 왜냐하면 빛길 구성원들은 민주시민이 무엇인지 함께 논의를 거쳐 정의해 낸 바가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교육은 빛길에 소속된 각 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요 의제로 1~3회 정도의 교육을 기획·진행하는 것에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운영 계획표에서 전체적인 흐름이 잡히지 않는 것과 연결된다. 위 계획표 중 강의 파트의 내용은 내가 코디로 들어오기 전 이미 짜여 있었다. 초안에서 다시 조율을 거쳐 완성하기는 했으나 순서나 일정 정도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 동아리는 정규 시간 외에 학생들이 따로 시간을 내서 참여하는 자율 동아리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이후 일정상 1시간가량의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교육이 매우 빠르게 압축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왜 내가 굳이 내 시간 내서 7교시 도덕 수업을 하나 더 해야 하냐”는 식의 불만을 종종 얘기했는데, 이는 빛길이 동아리 운영 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학생의 의견을 묻지 않은 것의 한계, 정규 교육 시간 외의 시간을 쥐어짜내야만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현실의 한계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유로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기 어렵다면 최소한 강사들의 태도에서 어떤 공통된 ‘민주시민적’ 관점이라도 드러났어야 할 것 같지만, 각 단체가 진행하는 교육은 빛길 내부의 점검을 딱히 거치지도 않은 채로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제각각의 주제와 방식, 태도였다. 코디와 해당 강의의 진행자가 차시마다 평가서를 쓰고 공유하기는 하지만 회의 자리에서 같이 읽거나 이야기되지는 않았다. 민주시민교육을 하겠다는 건지 학교에 들어가서 청소년과 만나겠다는 건지 목표마저도 불분명하다. 오직 뭔가 했고 청소년을 만났다는 데에서 보람을 느꼈던 것일까. 이런 졸속 운영임에도 빛길 안에서 유일하게 매 차시 학교 현장을 모두 모니터링했던 코디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빛길은 지역의 시민단체와 지역 교육청, 학교라는 세 주체가 협력하여 민주시민교육을 해내고 있는 ‘사례’로서 민주시민교육 단체와 연구자들 사이에서 촉망받고 있었다.


주전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가장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와 유사하게 학교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빛길의 교육에 기대를 걸고 긍정했다. 나는 나의 권한 없음에서 비롯한 절망감과 싸우느라 아등바등하고 있었는데도. 게다가 지역 시민사회에서 별 영향력 없는 젊은 여성 활동가인 나는 학교 현장을 모니터링함과 동시에 빛길 내부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존중받기 위한 인정투쟁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나에 대해서도 다른 구성원과 동등한 호칭을 붙이라는 요구부터 모임 연락을 다른 활동가에게 간접적으로 듣게 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이는 두 번 절망적인 것이었다. 나는 빛길의 교육을 긍정하고 성과라 말하는 사람들이 수치를 알았으면 좋겠다. 빛길의 활동을 어떤 사례로서 말하고자 한다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최소한 제대로 듣기라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조차 없이 빛길의 동아리 운영을 성과로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비단 나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학생과 담당 교사 또한 이 지난한 동아리 운영 과정 속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게 정말 교육적인지, 당장 내일의 동아리는 얼마나 재미있을지, 재미없다면 어떤 식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지와 같은 고민 말이다. 문제는 현장에서 빛길이나 교육청의 존재감은 미미했지만 커리큘럼 결정권 등 대부분의 권한이 현장에 없는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빛길이 동아리 코디를 둔 것은 현장의 욕구를 알아내어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실상 미리 짜인 커리큘럼을 바탕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현장의 욕구가 반영될 수 있는 여지는 너무나 적었다. 이 권한의 차이, 현장에서 만나는 실질 주체들에게 오히려 권한이 없는 모순은 자연히 비민주성을 만들었다.


동아리 담당 교사에게서 작년의 동아리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작년에는 독서 동아리를 운영했는데 교사의 제안으로 시작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야기나 고민을 나누는 모임으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학생들의 제안으로 독서 동아리로 방향을 잡아 나갔다고. 올해 빛길이 운영했던 동아리와 가장 비교되는 것은 당시에는 ‘학생들이’ 필요할 때 담당 교사를 불렀으나, 지금은 ‘담당 교사가’ 학생들을 빠지지 말고 오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학생들과 담당 교사에게 너무 죄송했다. 구성원들의 자율성이 꽤나 존중되던 동아리에 빛길이 들어와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예산, 강의의 흐름과 배치, 강사의 일정 등을 모두 대략적으로 결정한 틀을 가지고 학교에 가서 “여러분은 어떤 강의를 원하나요?”라고 묻는다 한들 얼마나 많은 구성원들의 욕구를 실제로 반영할 수 있겠는가. 전체 커리큘럼이 구성원들의 욕구를 아예 배반할 때 그것을 뒤엎고 새로운 활동을 기획하는 것도 어려울 게 불 보듯 뻔하다. 이에 대한 지적이 없지 않았지만 빛길은 적극적으로 타개책을 논의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분명 의견을 내 왔다. 재미있고 몸을 많이 움직이며 자신들이 주로 얘기할 수 있는 활동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런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틈과 역량이 빛길에게는 없었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의견을 내더라도 그것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현실은 그들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대한 효용감을 얻을 수 없게 한다. 이때 민주시민교육으로 전하려는 이야기와 실제 행동은 따로 놀게 되고 그야말로 민주주의는 허울뿐인 말로 남는다. 학생·청소년의 동아리에서 그들의 욕구보다 비청소년들의 욕구가 중심이 될 때, 동아리는 학생·청소년의 자율적인 모임이 아닌 비청소년을 위한 실험의 장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자연히 학생들은 동아리 운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격하된다. 학생들의 욕망은 설 자리를 잃고 욕망과 함께 사라진 자율성의 자리는 담당 교사의 ‘빠지면 안 된다’는 압박이 메운다.


나는 빛길의 동아리 운영을 통틀어 자신의 욕구를 배반하는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고 도망간 학생들이 가장 민주시민의 모습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도망가는 것은 언뜻 보면 일탈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학생·청소년의 일상적인 권한 없음 상태에서 비롯되는 모순일 뿐, 그들은 활동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잘 발휘한 것뿐이다. 청소년도 비청소년처럼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된다면 ‘도망’이라고 불리지 않는 훨씬 고고한 방식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테고 말이다. 활자가 아닌 현실에서의 민주주의는 이처럼 결코 비청소년의 눈에 바람직하지만은 않게 발현되기도 한다. 민주시민교육은 이것을 인정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는가? ‘민주시민’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불어넣고 있으며 그것은 누구의 기준으로 짜인 것인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혹시 그 ‘시민’의 범주 안에 어린이·청소년은 없는 게 아닌지.

 

 

민주주의를 실험한다?

 

많은 비청소년들이 학교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싶어 한다. 민주주의는 유보해 두었다가 보강해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지금 - 여기에서 각 주체들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실천적인 것임에도. 청소년에게 어떤 장을 마련해주면 그들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청소년은 언제나 지금 - 여기의 주체, 시민으로서 존재하지만 비청소년이 그들을 비주체, 교육의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있는데도.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사회를 개탄하기도 한다. 학교에서 가장 적은 권한을 가진 학생의 인권에는 무심하면서도.


그래서 나는 의아하다. 민주주의를 원하고 학생·청소년과 동등한 주체로서 만나기를 원한다면, 그들을 교육하는 게 아니라 비청소년 스스로의 시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교육해야 할 텐데.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참여가 어떤 것인지 가르치겠다면서 왜 도망가는 학생이나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을 보면 짜증이 솟구치는지, 말 잘 듣는 성실한 학생을 선호하게 되는지 자기반성부터 해 보는 것이다. 대체 왜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학생들이 교육을 들을지 말지 스스로 판단하는 민주주의는 누리지 못하게 하는지 말이다. 이런 자각 없이 그저 어린이·청소년에게 민주주의를 알려 주려는 마음만 앞선다면 민주주의는 살아 움직이는 삶의 양식으로서 존재하지 못한 채 어떠한 답으로 고정되고 변질될 것이다. 그 어떤 효용감도 남기지 못한 채로.


어린이·청소년을 민주사회의 주체로 양성한다면서 비청소년이 주도하여 진행하는 교육이 많다. 이때 그들로 하여금 원하는 주장을 해 보라고, 바뀌었으면 하는 것을 말해 보라고 하면 왕왕 ‘쓰레기 줍기’나 ‘금연 캠페인’, ‘깨끗한 동네’ 같은 것들이 나온다. 나는 이것이 비청소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육의 한계이자 실패를 보여 주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물론 청소년도 깨끗한 동네와 원치 않은 간접흡연을 당하지 않기를 욕망하고 주장할 수야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따진다면 훨씬 자신의 삶과 밀접하며 간절한 욕망이 있을 법하다. 그 밀접함과 간절함을 밀어내고 저것들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청소년이 비청소년과의 논쟁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비정치적이면서도 삶과 연관된 주제를 채택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주체적으로 해 보라고 한다고 어린이·청소년이 비청소년과 동등한 주체, 시민으로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해봐라” 소리를 듣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그들은 주도하는 비청소년의 시선 안에서 적당히 뭔가를 해내고 비위를 맞춰 주는 역할을 갖는다. 비청소년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뭐든 주체적으로 해 봐라! 자유롭게! 다 지지한다”라는 비청소년의 외침은 너무나도 기만적이고 공허하다. 마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처럼 어린이·청소년은 비청소년이 허락한 참여, 비청소년이 허락한 주체성의 틀에 붙잡히는 것이다. 그 틀을 깨기 위해서 어린이·청소년에게 무언가를 더 교육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을 점검하지 못하는 비청소년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민주시민교육이 별개의 교과로 존재할 것이 아니라 학교 – 사회에서의 일상이 어린이·청소년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여 구성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전달하는 내용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이 이야기되는 과정에서부터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세월호를 추모하라며 학생에게 노란 리본 달기를 강제하는 학교와 노란 리본을 단 학생에게 벌을 주는 학교 그 어느 쪽도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주의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를 경계하는 사상이다. 한 조직,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 자체가 있는 그대로 존중되고, 존재들의 의사가 충분히 이야기되며 결정 과정에 반영되는 것이 민주적인 게 아닌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 여기의 각 주체들 사이에서 발현된다. 이것은 유보할 수도 실험할 수도 없는 속성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학생들을 교육하기를 관두고 잠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어린 사람부터 미리미리 교육을 해야 올바른 시민으로 양성된다는 허황된 믿음의 출처는 무엇인지. 혹시 어린 사람들을 지금 - 여기를 살아가는 동등한 시민으로 보지 않고 백지장 같은 존재, 교육으로 쉽게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여기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학교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학생의 권한, 권력,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현실은 아닌지.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인정과 지지가 아닌지 말이다. 나는 어린이·청소년인권에 대한 고찰 없이 민주시민교육을 계속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이자 삽질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시민교육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다

 

경기도교육청에서는 2013년에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를 발간했고, 얼마 전에는 각 학교에 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하는 학교민주시민교육진흥조례가 통과되었다고 한다. 이것들은 이전 교육감 때 추진되었던 것들이라 현 교육감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할지 의문이기는 하다. 빛길의 경우도 중간에 교육감과 장학사가 바뀌면서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미약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민주시민교육을 하나의 교과목으로 만들고 교과서를 확대 배포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로 인해 학생에게 학습 부담만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학생이라는 존재와 그들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시선 점검이 우선으로 되어야 한다. 오히려 역으로 청소년단체, 청소년활동가가 교사와 비청소년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청소년인권교육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은 어떤가? 학교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학생들이 권한, 권리 그리고 권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굳이 먼 길 돌아갈 필요 없다. 가장 작은 목소리를 가진 주체가 누구인지 뻔히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는 것’에서 오는 바쁨과 성실함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대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며, ‘하지 않음’은 불성실, 방임, 도피로 여겨진다. 그래서 가만히 있기를 부정하고 뭐든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하지 않음은 마냥 부정적인 가치인가? 하는 것이 과잉되어 있기 때문에 역으로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하지 않음’을 좀 있어 보이는(?) 말로 바꾸면 아마 ‘거부’일 것이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투명가방끈’은 매년 대학거부 선언을 하는 단체로 획일적인 입시·경쟁 교육과 대학 중심적인 사회문화, 학력·학벌 차별 등에 반대한다. 이 반대를 말하기 위해 투명가방끈이 택하는 방법은 바로 입시와 대학을 거부 – 하지 않고, 관두고, 때려치우는 - 하는 것이다. 이때 거부는 ‘하지 않음’이 ‘함’과 동등한 위치에서 온전한 선택으로서 고려, 존중되지 못해 왔다는 것을 환기하고 적극적으로 하지 않음을 택함으로써 ‘함’을 기준으로 한 기존의 틀을 흔든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했던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고 도망간 학생’ 또한 하지 않음을 통해 이 활동이 누구의 욕망인지 질문을 던지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기 결정권을 회복한다. 나는 민주시민교육을 그만두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빛길의 사례가 성과로서 회자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어떤 절망을 안겨 주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들의 절망으로 누군가들에게 행해지는 폭력 ― 비민주적 교육, 청소년의 대상화, 어떻게 빠질까를 고뇌하는 시간들 ― 을 막을 수 있다면 보다 충분히 절망해도 좋지 아니한가?


동료 활동가 중 하나가 지금의 민주시민교육은 마치 시멘트 바닥에 씨를 뿌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이 실험일 수 있지만 씨앗에게는 하나뿐인 생명을 빼앗기는 폭력이다. 씨앗을 시멘트 바닥에 마구 뿌려 싹을 틔워 시멘트에 균열을 내기를 염원하지 말고 그냥 시멘트를 깨부수자. 청소년의 경험을 예비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민주주의를 실험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가는 동등한 시민이자 교육의 주체로 인정하자. 그게 어떤 모습일지 감이 잘 안 잡힌다면 청소년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는 거다. 특별한 교육을 만들어 내지 말고 지금 학교의 비민주적 구조를 파괴 - 해체하려 노력하자. 이 ‘함’에서 의미 찾기를 그만두라. 민주시민교육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다.


➊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대학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 임, 관악청소년연대 여유, 노원지역연합 청소년인권동아리 화야, 정당 청소년위원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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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