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증언과 고백 ③
정치적이나 정치적이지 않다
최병우
전남 순천 팔마중
jayooh@hanmail.net
교직 처음에는 학생들과 첫사랑처럼 만나 일요일 저녁 때는 월요일 만남을
떠올리며 가슴 설렜으나 지금은 순도가 예전 같지 않음.
정년 4년 반을 남긴 이제 다시 처음 4년 반처럼 학생들을 만나고 싶어함.
인간의 삶은 경제가 근본이고 그 경제를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정치이다. 그래서 경제와 정치는 동전의 양면이다. 여기서 파생하여 인간관계에서 누구에게 힘이 쏠리느냐 또는 원만하거나 불편함을 결정하는 행위들도 일상에서는 ‘정치적’이라 표현한다.
인간이 모여 사는 모든 곳에는 정치적 요소가 담겨 있고, 학교의 교육 활동도 정치 활동의 하나이다. 학교에서 나는 정치적인가?
수업의 완성형을 지켜 내려
나는 도덕교사로서 서울에서 20년, 전라북도에서 11년을 살았고, 올 3월부터 전라남도에서 살고 있다. 서울에서는 전교조를 지키기 위한 투쟁, 합법화 이후 학교에서의 민주화 싸움들이 정치적 이슈였다면 전북에서는 서울과 달리 평가와 가부장문화가 이슈였다. 두 지역의 이슈 이면에는 공통된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평등’이다.
서울에 있을 때 내 교육관은 두 번 바뀌었다. 교직 초기에는 지식 중심의 강의를 했다. 해직을 거쳐 복직 후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도덕이 학생들에게 실천되지 않는 한갓된 지식에 머문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이후 몇 년의 시행을 거쳐 도덕 교과의 핵심 주제들(인격, 민주주의, 정의 등)을 추렸다. 한 주제를 가지고서 1~2개월 동안 집중해서 강의, 토론, 연극, 노래, 춤 등 다각도로 접근하였다. 나는 이 수업을 ‘주제 수업’이라 이름하고 수행평가를 학생들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동기부여 방법으로 삼았다. 협동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조별로 과제를 하게 했다. 조별 점수 차를 줄여 점수 부담을 낮추고, 학기당 8회 ~ 15회 정도 실시했다. 중간고사 없이 학기 말에 치러지는 난이도 낮은 지필평가는 ‘오픈 북’으로 하였는데 일부 학생은 어떤 이유에선지 시험시간 내내 교과서를 뒤적였다(너무 쉬워서 정말 이게 답일까 하는 의심이었던 것 같다). 전체 평가는 지필평가 30퍼센트, 수행평가 70퍼센트 비율로 하였는데 학기말 학생들의 평균 점수는 85점 내외, 최하 70점 이상, 최고 98점 정도로 항아리 모양의 분포였다. 학생들은 대체로 점수에 만족하였다. 나는 한국사회가 가야 할 현실적 모델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간 계층이 대다수이고 소수가 조금 더 부유한, 삶의 자존감을 잃지 않을 정도의 평균보다 조금 낮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수업은 대다수가 비교적 높은 평균 점수를 받고 구성원 전체가 점수 차가 크지 않은 학교 현장을 만들어 가는 길이었으며, 그 핵심이 수행평가였다.
전라북도의 한 중학교로 근무지를 옮겨 서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였다. 서울과 달리 전라북도는 고등학교 시험이 있어서 교과서를 중심에 두지 않는 수업이 학생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교과서 중심으로 수업을 하고 수행평가를 5 ~ 8회 하는 방식으로 타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교장이 수행평가에 대해 반발하였다. 수행평가 비율을 50퍼센트로 줄이길 요구했다. 학교에 오지도 않는 심신장애 학생에게 만점을 준 것에 대해서도 심히 분노하였다. 심신장애 학생에 대해서는 학기 초 학생들의 동의(약자 배려)를 얻어 만점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학교장은 이를 문제 삼았다. 내가 설득이 되지 않자 성적관리위원회를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학교장이 심히 화를 낸 후 밖으로 나가면 이어서 동료교사들이 집단으로 공격을 하였다. 서울과 달리 전라북도는 회의에서 학교장의 의견에 이견을 다는 교사가 전혀 없었다. 일색이었다. 학교장 위촉으로 성적관리위원회에 참여한 한 학부모는 자기 이력을 자랑한 후 한참을 비난하더니 대답은 하지 말라는 말로 끝냈다. 전교조 조합원인 동료들은 침묵하거나 일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평등이 그렇게 중요하세요?”
학교장은 매우 집요했다. 어느 날 낯선 학부모가 찾아와서 “전쟁이 나면 교사를 제일 먼저 죽입니다……”라며 모욕을 주고, 또 어느 날은 장학사가 와서 유신 시대 음산한 지하실에서 취조하듯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협박하였다. 학교운영위원회에서는 어느 학부모 위원이 나를 거명하며 비난하였다고 한다.
1학기 말 성적을 제출하자 학교장은 직접 자신이 원하는 비율로 바꿔 다시 입력하였다. (상황에 따라 교장의 요구도 수용도 가능했겠지만, 당시 70퍼센트를 끝까지 고집한 것은, 우선 학교장이 교사의 평가권에 개입하는 게 부당했기에 이를 환기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수행평가 비율을 높일수록 지필평가 비율이 줄어든다. 학생들의 점수 차를 좁히면 공부 못 하는 학생들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상향 평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수행평가 70퍼센트 중 35퍼센트는 개별의 도덕 행위에 대한 평가로 학교나 집에서 도덕적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를 했을 때 조금씩 가감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거의 만점을 맞고 수행평가도 당시 5점 이상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러니 지필평가는 조금만 맞아도 전체 점수가 70점이 넘었다.) 2학기 말에는 학교장의 요구로 남원교육청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다음 해 3월 징계와 함께 군산으로 강제 전출되었다. (전출된 곳은 상고였다. 이곳에서도 교감이 수행평가 비율을 줄이라 하여 몇 번 싸우기도 했다. 더욱이 이 학교는 성적이 80퍼센트 미만이었다. 점수가 아니라 사랑이 필요한 곳이었다. 만일 지필평가만 가지고 시험을 치르면 0점이나 10점대가 수두룩할 것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점수를 후하게 줌으로써 편안하게 해 줄 필요(배려)가 있었다. 수업시간은 10분~15분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학생들은 대부분이 힘들어 하고 잠을 잤다. 수업이 불가능하였다.)
강제 전출 뒤 다시 도가니 속에
2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남원의 한 학교는 지리산 자락으로 경상남도와 접경인 오지에 자리한 중고 통합학교였다. 승진 점수가 필요한 교사들이 선호하는 학교로 지역 특성상 반 이상이 한 부모 가정, 조손 가정 학생들이었다. 중1부터 고3까지 모든 학생이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보충수업, 특기적성, 방과후활동 및 연구학교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하지 않겠다고 하면 교사가 학부모에게 전화하여 종용하고 보충수업 시간에 수행평가를 하거나 진도를 나가기에 안할 수가 없다는 증언이 있었다. 또 이 학교는 전라북도에서 6년간 리코더 경연에서 1등을 하였다는데 학생들은 아침에도 리코더, 점심 때도 리코더, 수업 시간에도 리코더를 불었다면서 이제 ‘리’자만 들어도 싫다고 하였다. 언젠가 교무회의에서는 방학 중 보충수업을 하지 않겠다고 교장실에 찾아온 학생에게 보충수업을 하지 않는 대신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서를 제출하라 하여 결국 보충수업에 참여시켰다는 학교장의 자랑이 있었다.
부임 첫해 가을, 학교장이 주최한 ‘내년도 학교 교육 개선을 위한 교사토론회’에 나는 전체 학생 대상 설문 조사 결과(한 학년 학생 수가 평균 10~25명, 6개 학년 총 학생 수는 100명 정도이다. 이중 약 20퍼센트 학생들만 현재에 긍정적인 답을 했다. 설문은 보충수업, 방과후활동, 특기적성 교육의 효과와 필요성 유무를 묻는 것이었다)를 토대로 현재 전 학생에게 실시하는 보충수업, 특기적성교육, 방과후활동을 원하는 학생에 한해 특화된 맞춤 교육을 하고 연구시범학교 사업을 하지 말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교사들의 반응이 전혀 없었다. 딱 하나,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한 교사의 “나는 지금대로 진행하면 좋겠습니다”라는 짤막한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리고 비밀투표 결과 스무 명 가까운 교사 중 나를 포함 세 명만이 찬성을 해 부결되었다. 그런데 부결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때부터 학교장과 대부분 교사가 내게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2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교장은 수행평가 비율을 줄일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수행평가 70퍼센트는 도덕 수업의 완성형이었다. 그러자 교장은 성적관리위원회를 열어 매우 집요하고 거친 공격을 하였다. 또 학교 아닌 직업훈련원에서 기술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수행평가(광주를 직접 두 번 찾아가 평가) 점수를 만점 준 데 대해 학교에 있는 학생들이 손해를 본다며 점수 고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만일 이게 문제라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라고 하였으나 학교장은 집요하고 거칠게 교사들과 함께 밀어붙였다. 학교장이 회의석상에서 하는 말이 하도 거칠어 항의를 하니 “너 기분 나쁘라 그런다!”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학교장은 전교조 초기에 전북지부장을 지냈고 도교육위원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당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일점일획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였다. 그는 때때로 회의를 열어 거친 공격을 주도하였고 동료교사들은 모두 학교장과 입장을 같이 하였다. 그들은 회의 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로 공격하기도 하고 욕설은 물론 웃통을 벗어제끼며 따라 나오라며 교장실을 뛰쳐나가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학교장이 교장실로 부르기에 가 보니 교장, 교감과 한 담임 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심히 무례한 학생을 복도에 세워 놓은 데 대해 무조건 교실로 들여보내라며 욕설과 모욕을 가하였다. 그들이 조폭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정신과 치료를 받더라도
학교장과 동료 교사들은 왜 그리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보이면서 집단 공격을 하였을까?
추측컨대 교육관의 차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모든 교육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말끔한 학교인데 그 이면에는 학생들에게 지나친 강제를 하고 있고 내용이 없는 형식들(교무실 책꽂이에는 교육청에 보여줄 노란 서류파일들이 즐비하였는데 사업 관련 서류와 그 서류의 근거가 되는 또 한 묶음의 서류파일, 그 근거 서류의 근거 서류들이었다)이 들킨 데 대한 불편함, 즉 돈과 승진을 향한 잔치판에 속없이 끼어들어 모래를 끼얹는 자에 대한 집단 자위권 발동이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 이런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강제 보충수업뿐 아니라 거짓으로 서류를 꾸며 돈을 타냈고 심지어는 술자리 성폭력을 피해 젊은 여교사가 한 시간 동안 화장실에 숨는 일이 있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비리의 도가니였다. 그렇게 끈끈한 그들끼리는 서로 술자리뿐 아니라 교무실에서도 늘 “○○야!”, “△△이 형!” 등으로 불렀다. 그러한 그들에게 나는 매우 위험한 공공의 적이지 않았나 싶다.
정치는 때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한다. 그래서 타협은 때로 정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세속적 권력을 가진 교육감, 그와 유사한 권력을 형성한 전교조전북지부 이 둘은 모두 상황 개입을 거부하였다.
(도교육청에 그동안 보았던 학교의 파행적 운영 사례, 폭력들을 적어 진정을 냈으나 도교육청 장학사는 나도 다친다며 그냥 지나가길 권유했다. 내 거듭하는 요구에도 교육청에서는 아무런 조처 없어 결국 감사요청서를 들고 김승환 교육감을 직접 찾아갔으나 교육감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한편 그 해 전라북도교육청과 전교조전북지부 사이에 단체협약을 맺었는데 학교에서 벌어진 폭력 사안에 대해서는 전교조와 교육청이 함께 조사하는 것도 있었다. 이 조항을 들어 전교조전북지부에 함께 하길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에 비해 화이부동하지 못한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전라북도에서 두 번의 갈등 모두 피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껏 4년 반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분석을 하던 정신과 의사가 다시 그러한 상황이 오면 어찌 하겠느냐 묻기에 나는 똑같이 행동할거라고 답하였다.
옛 그리스 땅에서는 자신과 국가의 정치적 신념이 다르면 다른 나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곤 하였다는데, 지리산 자락을 찾아 서울을 벗어나 전라북도에 갔던 나는 11년 후 다시 전라남도로 옮겼다. 전라북도에서는 모든 힘을 다 소진하여 이제 어떤 마음도 남지 않아서이다.
학교에서 나는 정치적인가?
나의 수업은 정치적이고, 나는 정치적이지 않다.
특집/ 증언과 고백 ③
정치적이나 정치적이지 않다
최병우
전남 순천 팔마중
jayooh@hanmail.net
교직 처음에는 학생들과 첫사랑처럼 만나 일요일 저녁 때는 월요일 만남을
떠올리며 가슴 설렜으나 지금은 순도가 예전 같지 않음.
정년 4년 반을 남긴 이제 다시 처음 4년 반처럼 학생들을 만나고 싶어함.
인간의 삶은 경제가 근본이고 그 경제를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정치이다. 그래서 경제와 정치는 동전의 양면이다. 여기서 파생하여 인간관계에서 누구에게 힘이 쏠리느냐 또는 원만하거나 불편함을 결정하는 행위들도 일상에서는 ‘정치적’이라 표현한다.
인간이 모여 사는 모든 곳에는 정치적 요소가 담겨 있고, 학교의 교육 활동도 정치 활동의 하나이다. 학교에서 나는 정치적인가?
수업의 완성형을 지켜 내려
나는 도덕교사로서 서울에서 20년, 전라북도에서 11년을 살았고, 올 3월부터 전라남도에서 살고 있다. 서울에서는 전교조를 지키기 위한 투쟁, 합법화 이후 학교에서의 민주화 싸움들이 정치적 이슈였다면 전북에서는 서울과 달리 평가와 가부장문화가 이슈였다. 두 지역의 이슈 이면에는 공통된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평등’이다.
서울에 있을 때 내 교육관은 두 번 바뀌었다. 교직 초기에는 지식 중심의 강의를 했다. 해직을 거쳐 복직 후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도덕이 학생들에게 실천되지 않는 한갓된 지식에 머문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이후 몇 년의 시행을 거쳐 도덕 교과의 핵심 주제들(인격, 민주주의, 정의 등)을 추렸다. 한 주제를 가지고서 1~2개월 동안 집중해서 강의, 토론, 연극, 노래, 춤 등 다각도로 접근하였다. 나는 이 수업을 ‘주제 수업’이라 이름하고 수행평가를 학생들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동기부여 방법으로 삼았다. 협동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조별로 과제를 하게 했다. 조별 점수 차를 줄여 점수 부담을 낮추고, 학기당 8회 ~ 15회 정도 실시했다. 중간고사 없이 학기 말에 치러지는 난이도 낮은 지필평가는 ‘오픈 북’으로 하였는데 일부 학생은 어떤 이유에선지 시험시간 내내 교과서를 뒤적였다(너무 쉬워서 정말 이게 답일까 하는 의심이었던 것 같다). 전체 평가는 지필평가 30퍼센트, 수행평가 70퍼센트 비율로 하였는데 학기말 학생들의 평균 점수는 85점 내외, 최하 70점 이상, 최고 98점 정도로 항아리 모양의 분포였다. 학생들은 대체로 점수에 만족하였다. 나는 한국사회가 가야 할 현실적 모델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간 계층이 대다수이고 소수가 조금 더 부유한, 삶의 자존감을 잃지 않을 정도의 평균보다 조금 낮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수업은 대다수가 비교적 높은 평균 점수를 받고 구성원 전체가 점수 차가 크지 않은 학교 현장을 만들어 가는 길이었으며, 그 핵심이 수행평가였다.
전라북도의 한 중학교로 근무지를 옮겨 서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였다. 서울과 달리 전라북도는 고등학교 시험이 있어서 교과서를 중심에 두지 않는 수업이 학생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교과서 중심으로 수업을 하고 수행평가를 5 ~ 8회 하는 방식으로 타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교장이 수행평가에 대해 반발하였다. 수행평가 비율을 50퍼센트로 줄이길 요구했다. 학교에 오지도 않는 심신장애 학생에게 만점을 준 것에 대해서도 심히 분노하였다. 심신장애 학생에 대해서는 학기 초 학생들의 동의(약자 배려)를 얻어 만점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학교장은 이를 문제 삼았다. 내가 설득이 되지 않자 성적관리위원회를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학교장이 심히 화를 낸 후 밖으로 나가면 이어서 동료교사들이 집단으로 공격을 하였다. 서울과 달리 전라북도는 회의에서 학교장의 의견에 이견을 다는 교사가 전혀 없었다. 일색이었다. 학교장 위촉으로 성적관리위원회에 참여한 한 학부모는 자기 이력을 자랑한 후 한참을 비난하더니 대답은 하지 말라는 말로 끝냈다. 전교조 조합원인 동료들은 침묵하거나 일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평등이 그렇게 중요하세요?”
학교장은 매우 집요했다. 어느 날 낯선 학부모가 찾아와서 “전쟁이 나면 교사를 제일 먼저 죽입니다……”라며 모욕을 주고, 또 어느 날은 장학사가 와서 유신 시대 음산한 지하실에서 취조하듯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협박하였다. 학교운영위원회에서는 어느 학부모 위원이 나를 거명하며 비난하였다고 한다.
1학기 말 성적을 제출하자 학교장은 직접 자신이 원하는 비율로 바꿔 다시 입력하였다. (상황에 따라 교장의 요구도 수용도 가능했겠지만, 당시 70퍼센트를 끝까지 고집한 것은, 우선 학교장이 교사의 평가권에 개입하는 게 부당했기에 이를 환기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수행평가 비율을 높일수록 지필평가 비율이 줄어든다. 학생들의 점수 차를 좁히면 공부 못 하는 학생들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상향 평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수행평가 70퍼센트 중 35퍼센트는 개별의 도덕 행위에 대한 평가로 학교나 집에서 도덕적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를 했을 때 조금씩 가감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거의 만점을 맞고 수행평가도 당시 5점 이상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러니 지필평가는 조금만 맞아도 전체 점수가 70점이 넘었다.) 2학기 말에는 학교장의 요구로 남원교육청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다음 해 3월 징계와 함께 군산으로 강제 전출되었다. (전출된 곳은 상고였다. 이곳에서도 교감이 수행평가 비율을 줄이라 하여 몇 번 싸우기도 했다. 더욱이 이 학교는 성적이 80퍼센트 미만이었다. 점수가 아니라 사랑이 필요한 곳이었다. 만일 지필평가만 가지고 시험을 치르면 0점이나 10점대가 수두룩할 것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점수를 후하게 줌으로써 편안하게 해 줄 필요(배려)가 있었다. 수업시간은 10분~15분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학생들은 대부분이 힘들어 하고 잠을 잤다. 수업이 불가능하였다.)
강제 전출 뒤 다시 도가니 속에
2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남원의 한 학교는 지리산 자락으로 경상남도와 접경인 오지에 자리한 중고 통합학교였다. 승진 점수가 필요한 교사들이 선호하는 학교로 지역 특성상 반 이상이 한 부모 가정, 조손 가정 학생들이었다. 중1부터 고3까지 모든 학생이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보충수업, 특기적성, 방과후활동 및 연구학교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하지 않겠다고 하면 교사가 학부모에게 전화하여 종용하고 보충수업 시간에 수행평가를 하거나 진도를 나가기에 안할 수가 없다는 증언이 있었다. 또 이 학교는 전라북도에서 6년간 리코더 경연에서 1등을 하였다는데 학생들은 아침에도 리코더, 점심 때도 리코더, 수업 시간에도 리코더를 불었다면서 이제 ‘리’자만 들어도 싫다고 하였다. 언젠가 교무회의에서는 방학 중 보충수업을 하지 않겠다고 교장실에 찾아온 학생에게 보충수업을 하지 않는 대신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서를 제출하라 하여 결국 보충수업에 참여시켰다는 학교장의 자랑이 있었다.
부임 첫해 가을, 학교장이 주최한 ‘내년도 학교 교육 개선을 위한 교사토론회’에 나는 전체 학생 대상 설문 조사 결과(한 학년 학생 수가 평균 10~25명, 6개 학년 총 학생 수는 100명 정도이다. 이중 약 20퍼센트 학생들만 현재에 긍정적인 답을 했다. 설문은 보충수업, 방과후활동, 특기적성 교육의 효과와 필요성 유무를 묻는 것이었다)를 토대로 현재 전 학생에게 실시하는 보충수업, 특기적성교육, 방과후활동을 원하는 학생에 한해 특화된 맞춤 교육을 하고 연구시범학교 사업을 하지 말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교사들의 반응이 전혀 없었다. 딱 하나,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한 교사의 “나는 지금대로 진행하면 좋겠습니다”라는 짤막한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리고 비밀투표 결과 스무 명 가까운 교사 중 나를 포함 세 명만이 찬성을 해 부결되었다. 그런데 부결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때부터 학교장과 대부분 교사가 내게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2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교장은 수행평가 비율을 줄일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수행평가 70퍼센트는 도덕 수업의 완성형이었다. 그러자 교장은 성적관리위원회를 열어 매우 집요하고 거친 공격을 하였다. 또 학교 아닌 직업훈련원에서 기술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수행평가(광주를 직접 두 번 찾아가 평가) 점수를 만점 준 데 대해 학교에 있는 학생들이 손해를 본다며 점수 고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만일 이게 문제라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라고 하였으나 학교장은 집요하고 거칠게 교사들과 함께 밀어붙였다. 학교장이 회의석상에서 하는 말이 하도 거칠어 항의를 하니 “너 기분 나쁘라 그런다!”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학교장은 전교조 초기에 전북지부장을 지냈고 도교육위원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당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일점일획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였다. 그는 때때로 회의를 열어 거친 공격을 주도하였고 동료교사들은 모두 학교장과 입장을 같이 하였다. 그들은 회의 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로 공격하기도 하고 욕설은 물론 웃통을 벗어제끼며 따라 나오라며 교장실을 뛰쳐나가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학교장이 교장실로 부르기에 가 보니 교장, 교감과 한 담임 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심히 무례한 학생을 복도에 세워 놓은 데 대해 무조건 교실로 들여보내라며 욕설과 모욕을 가하였다. 그들이 조폭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정신과 치료를 받더라도
학교장과 동료 교사들은 왜 그리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보이면서 집단 공격을 하였을까?
추측컨대 교육관의 차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모든 교육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말끔한 학교인데 그 이면에는 학생들에게 지나친 강제를 하고 있고 내용이 없는 형식들(교무실 책꽂이에는 교육청에 보여줄 노란 서류파일들이 즐비하였는데 사업 관련 서류와 그 서류의 근거가 되는 또 한 묶음의 서류파일, 그 근거 서류의 근거 서류들이었다)이 들킨 데 대한 불편함, 즉 돈과 승진을 향한 잔치판에 속없이 끼어들어 모래를 끼얹는 자에 대한 집단 자위권 발동이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 이런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강제 보충수업뿐 아니라 거짓으로 서류를 꾸며 돈을 타냈고 심지어는 술자리 성폭력을 피해 젊은 여교사가 한 시간 동안 화장실에 숨는 일이 있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비리의 도가니였다. 그렇게 끈끈한 그들끼리는 서로 술자리뿐 아니라 교무실에서도 늘 “○○야!”, “△△이 형!” 등으로 불렀다. 그러한 그들에게 나는 매우 위험한 공공의 적이지 않았나 싶다.
정치는 때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한다. 그래서 타협은 때로 정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세속적 권력을 가진 교육감, 그와 유사한 권력을 형성한 전교조전북지부 이 둘은 모두 상황 개입을 거부하였다.
(도교육청에 그동안 보았던 학교의 파행적 운영 사례, 폭력들을 적어 진정을 냈으나 도교육청 장학사는 나도 다친다며 그냥 지나가길 권유했다. 내 거듭하는 요구에도 교육청에서는 아무런 조처 없어 결국 감사요청서를 들고 김승환 교육감을 직접 찾아갔으나 교육감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한편 그 해 전라북도교육청과 전교조전북지부 사이에 단체협약을 맺었는데 학교에서 벌어진 폭력 사안에 대해서는 전교조와 교육청이 함께 조사하는 것도 있었다. 이 조항을 들어 전교조전북지부에 함께 하길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에 비해 화이부동하지 못한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전라북도에서 두 번의 갈등 모두 피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껏 4년 반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분석을 하던 정신과 의사가 다시 그러한 상황이 오면 어찌 하겠느냐 묻기에 나는 똑같이 행동할거라고 답하였다.
옛 그리스 땅에서는 자신과 국가의 정치적 신념이 다르면 다른 나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곤 하였다는데, 지리산 자락을 찾아 서울을 벗어나 전라북도에 갔던 나는 11년 후 다시 전라남도로 옮겼다. 전라북도에서는 모든 힘을 다 소진하여 이제 어떤 마음도 남지 않아서이다.
학교에서 나는 정치적인가?
나의 수업은 정치적이고, 나는 정치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