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노래하다
- 제주 4.3과 사북항쟁, 창작 뮤지컬 수업
안사을
saeul.ahn@kakao.com
전북 완주 고산고 교사
수석 교사실 문을 두드렸다. 한창 일에 열중하고 계신 선생님께 툭 던지듯 제안했다.
“선생님. 저랑 같이 춘향전 해 보실래요?”
“응? 갑자기 뭔 소리야?”
“선생님은 한국사 시간에 춘향전과 관련된 역사를 가르치고, 저는 뮤지컬로 만들어서 아이들하고 공연하고요.”
선생님의 얼굴에 꽃이라도 피어오르는 줄 알았다. 눈동자와 입이 동시에 동그랗게 열리더니 호들갑을 부리셨다.
“너무 좋지. 진짜 너무 좋지. 내가 평생을 꿈꿔 오던 수업이었어.”
“어떤 꿈이요?”
“지식을 습득하고, 토론이나 현장 체험 학습으로 내면화하고, 결국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거야. 그런 수업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그건 나 혼자서는 절대 못 하잖아. 그래서 환상이나 꿈 같은 것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지.”
“통합 기행과도 연계하면 딱이네요!”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주제 통합 수업이 시작되었다. 6~7개의 과목이 서로 얽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프로젝트였다.
제주 4.3과 사북항쟁을 노래하다

사진 설명. 수석 교사가 직접 해설사가 되어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학생들을 견학시키고 있다.
최초로 생각했던 춘향전 대신 2022년의 주제는 ‘제주 4.3’이 되었다. 그해 겨울,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회복적 정의에 기반한 생활교육’ 3급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동료 교사 10여 명과 함께 제주도에서 열린 연수에 참여했다. 그때 1948년 전후 제주에서 벌어진 핏빛 참사에 대해 생생하게 듣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음악적 영감이 밀려왔다.
마침, 한국사 시간에 국가 폭력과 대항 폭력에 대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주 4.3을 주제 통합 수업으로 제안했다. 관련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전되었다. 통합 기행 교과도 함께하기로 했다. 통합 기행은 2학년 전체 학생이 80L 크기의 배낭을 메고 7박 8일 동안 여행을 떠나는 교육과정이다. 배낭 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식사와 잠자리를 학생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2022년에는 제주도에서, 2023년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학생들은 제주 4.3과 사북항쟁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고,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도 들으며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특히, 2023년에는 2학년 부장 교사가 되면서 뮤지컬과 통합 기행을 동시에 맡게 되어 더 뜻깊었다. 본격적으로 주제 통합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나의 가슴속에 수업 소재로 자리 잡은 사북항쟁을 주제로 삼았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 일대를 사전 답사하며, 학생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걸을 수 있는 경로도 직접 짤 만큼 열심히 준비했다.

사진 설명. 《내 사랑 사북》(2005, 사계절)을 쓴 이옥수 작가와 사북항쟁 당시 지도부 역할을 했던 이원갑 님을 모시고 북콘서트를 진행했다.
그렇다고 통합 기행과 뮤지컬을 기계적으로 연결하진 않았다. 학생들은 제주도에서도, 강원도에서도 역사를 잠시 잊고 풍경과 동화되어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역사의 현장을 마주하며 수업 시간에 배운 아픈 과거를 상기시킬 때면 사뭇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사북의 ‘도롱이 연못’이 그랬다. 수면 위로 단풍이 물든, 탄성이 절로 나오는 비경 속을 걸을 때도 학생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남편이나 아들을 탄광에 보낸 아낙네들이 무사 귀환을 간절하게 빌던 장소라고 하니,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또 동화된 것이리라. 때론 고되고 힘든 여정이었을 테지만, 나는 통합 기행을 통해 학생들이 매 순간 느끼고 경험한 작은 소중한 깨달음들이 한데 엉켜 커다란 배움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 설명. 도롱이 연못. 1970년대 석탄을 캐던 갱도가 지반 침하로 주저앉으면서 만들어진 생태 연못이다. 도롱이란 이름은 화절령 일대에 살고 있던 광부 아내들이 이곳 연못의 도롱뇽이 살아 있으면 남편도 무사할 거라는 믿음으로 기도했던 데서 유래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3월, 시작은 아무것도 없이
창작 뮤지컬은 그 특성상 연습할 수 있는 악곡이 없다. 첫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면 교사나 학생이나 공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건 매한가지다. 나는 오히려 이런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오늘, 이 시간에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의 당황스러운 눈빛과 행동에서 역설적으로 무한한 생동감을 느낀다. 그 상황을 대화로 옮기면 대충 이렇다.
“쌤, 오늘 뭐 해요?”
“할 수 있는 게 없어.”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할 게 없다니요. 그럼 그냥 놀아요?”
“아니, 놀다니. 신성한 수업 시간에 말이야. 당연히 수업을 해야지.”
“할 게 없다면서요.”
“맞아. 우리가 같이 만들어야 해. 곡이 없는데 연습을 어떻게 하겠니? 대본도, 가사도, 안무도 우리가 같이 만들어야 해. 지금부터 말이지.”
시쳇말로 학생들을 ‘멘붕(멘탈의 붕괴)’ 상태로 만들어 놓고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으로 강제해 경직된 내용으로 시작하는 수업은 사실 재미가 없다. 적어도 예술과 창작 교과만큼은 머릿속을 하얗게 비우고 손과 발을 늘어트린 채, 최대한 무(無)에서 아기와 같은 발걸음으로 시작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수업은 상담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학생을 한 명씩 만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1. 뮤지컬 수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 세 가지가 있다면?
2. 뮤지컬 수업, 공연 등 모든 과정에서 배려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3. 어색하거나 어려운 친구가 있는지?
첫 번째 질문인 ‘이루고 싶은 세 가지’는 학생 개인별 과제로 주어진다. 뮤지컬과 관련이 있다면 매우 사소한 것도 괜찮다. 난이도 점수가 있기에, 학생들은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 가장 도전적인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어떤 학생은 ‘뮤지컬 안무를 위해 살을 7kg 빼겠다’는 무시무시한 목표를 세웠다. 춤을 추며 무대를 뛰어다니면 관절 건강이 걱정되는 아이여서 적절한 과제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다. 어떤 학생은, “무대 공포증이 있는데 연습과 실제 공연을 통해서 극복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체중 감량처럼 정량 평가를 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고민했지만 이것도 통과시켰다. 학기 말 상담이나 동료 평가를 통해 충분히 정성 평가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인 ‘배려받고 싶은 점’에 대한 것은 학생들의 상처와도 관련이 있다. 음악 수업을 준비할 때면 항상 ‘학생들이 상처를 받게 될까 봐’ 걱정하곤 했다. 교사의 의도가 아무리 교육적이어도 정작 학생들은 수업 및 상호작용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뮤지컬 같은 예술, 특히 학생들의 정의적 영역을 많이 건드릴 수밖에 없는 수업이라면 더욱 잠재적 교육과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인지 끄덕거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음악 수업이 즐거운 시간이었을 수도, 두렵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세 번째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의 학생은 쭈뼛거리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오늘 나눈 대화는 철저히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말문을 연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안전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감정을 다루는 수업이기 때문에 불편한 친구와의 협업은 매우 어렵다. 사전 정보를 통해 이러한 부적절한 상황을 미리 제거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몰래 사귀었다가 헤어진 커플이 상대역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정보를 모르고 그 둘에게 이중창 곡을 맡겼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학생들의 손에서 출발하는 뮤지컬 창작
우리 학교의 창작 뮤지컬이 특별한 이유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주 4.3을 다룬 〈4.3의 언덕 너머에는〉에서는 무대 의상을 학생들이 손수 만들었다. 움직이는 무대 배경 그림도 모두 학생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사북항쟁을 다룬 〈내 사랑 사북〉에서는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에도 참여했고, 특히 인물의 대사는 모두 학생들이 썼다. 뮤지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안무를 만드는 데도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복잡한 동선이 포함된 학년 전체의 안무는 뮤지컬 강사가 만들었지만,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각 학급의 안무는 학생들이 직접 만들었다.
극 전체의 줄거리가 한 학생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는 일도 있었다. 〈4.3의 언덕 너머에는〉을 준비할 때였다. 본격적으로 대본을 만들기 전, 대략적인 내용과 구성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던 중 한 학생이 내 의견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쌤. 줄거리가 너무 어두워요. 발랄한 장면 없어요? 뮤지컬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어쩔 수 없어. 4.3 이야기 자체가 그런 걸 어떡해.”
“그래도 싫어요. 우리 반은 발랄한 곡 하고 싶어요!”
그 학생은 볼멘소리와 협박을 적절히 섞어 가며 나를 압박했다. 고민해 보겠다는 나의 대답에도 영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녀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쌤! 좋은 생각이 났어요! 들어 봐요. 진짜 완전 대박이에요.”
“진짜? 뭔데? 들어나 보자. 나도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그 학생의 의견은 이랬다. 다른 반의 무대를 통해 역사적 장면을 보여 주고, 자신의 학급에서는 시점을 현재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다. 역사 수업 시간에 제주 4.3을 배우는 장면으로 전환하여 발랄한 신규 교사와 천진난만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순간 막혔던 체증이 확 뚫리면서 온 교실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학생의 최종 승인(?)을 거쳐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 〈4.3의 언덕 너머에는〉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전체 학생의 무대(오프닝 넘버) : 제주 4.3의 역사적 배경을 가사와 음악으로 표현.
2) 2-1 무대
① 무장대가 되어 산으로 들어간 청년 ‘성태’와 같은 마을에 살았던 ‘정희’의 이별 이야기.
② 끔찍한 일들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와중 두려워 떠는 마을 청년들의 모습.
③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와 평화뿐이라는 절규.
3) 2-3 무대
① 많은 주민을 죽음에서 지켜 낸 ‘문형순’ 경찰 서장에 관한 이야기.
② 억울하게 옥에 갇혀 어려움을 겪는 마을 사람들.
③ 문형순 서장에 의해 풀려나지만 결국 4.3이라는 광풍에 다시 휩싸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4) 2-2 무대
① 2023년 현재의 교실, 역사 수업 시간.
② 학교에서 제주 4.3을 배운 한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그 내용을 나누는 장면.
③ 제주 도민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가 깃들기 바란다는 학생들의 염원.
5) 전체 학생의 무대(피날레) : “제주여 평화로우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웅장한 합창.

※ 큐알코드. ‘2022 고산고 창작 뮤지컬 〈4.3의 언덕 너머에는〉 공연 실황
2023년 창작 뮤지컬 〈내 사랑 사북〉을 준비할 때는 학생들이 만들어 준 가사가 음악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작곡과 작사를 동시에 생각하다 보면 타성에 젖게 되는데, 다른 사람이 써 준 가사로 악상을 떠올리니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사를 써 준 학생에게 두 시간 만에 전화를 걸어 아이처럼 외쳤던 일이 아직도 선하다.
“인아야! 와서 들어 볼래? 완성했음!”
“진짜요? 대박, 대박!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달려갑니다!”
작사는 두 학생이 해 주었다. 학생들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시어를 전달해 주었다. 그 가사들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꽉 막혔던 머릿속에 작은 숨구멍을 내 주었다. 주옥같은 가사들 중 하나를 골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인아 학생이 쓴 가사인데 정말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인아가 졸업한 후에도 적절한 비용을 내고서라도 계속해서 가사 창작을 요청하고 싶을 만큼.
〈검은 사람들〉
좁은 굴에서 나와 좁은 길을 따라서
지친 나의 발걸음 오늘도 눈물의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초라한 나의 집으로 향하네
좁은 땅 좁은 하늘 날 가두듯 둘러싸인 높은 산
우리들의 웃음과 행복을 앗아 가는 감시와 억압
그 속에서 사는 삶은 어둠에 어둠을 덧칠하는 듯해
검은 사람들 어두운 삶 속에서
빛나는 건 오로지 우리의 두 눈뿐
두 눈 번쩍 빛내며 이제는 이 어두운 장막을 거두어야 할 때
함께 모여 이 어두운 탄광촌을 빛으로 밝히리
빛나는 사람들 우리의 삶 속에서
더 이상 패배는 없어 분노의 저항뿐
두 눈 번쩍 빛내며 이제는 이 어두운 장막을 거두어야 할 때
함께 모여 이 어두운 탄광촌을 빛으로 밝히리

※ 큐알코드. ‘2023 고산고 창작 뮤지컬 〈내 사랑 사북〉 공연 실황
내면화한 아픈 역사를 예술과 해학으로 외면화하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희극이다. 주제에 따라서 결말이 어두운 경우도 있지만 중간에 반드시 관객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장면이 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뮤지컬과 비극인 오페라의 차이점이다. 나는 여기에서 뮤지컬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발견한다.
알다시피 〈4.3의 언덕 너머에는〉의 후반부는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벌어지는 내용이었다. 역사 수업 시간에 초임 교사와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매우 발랄한 곡으로 연결되고,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이 책상 위로 올라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물론 관객의 반응을 예상하고 넣은 의도된 대사와 연출이었다.
마찬가지로 사북항쟁을 그린 〈내 사랑 사북〉의 첫 장면에서도 중학생인 수하와 광호 이야기가 익살스럽게 펼쳐진다. 청년 광부인 ‘정욱’을 짝사랑하는 수하로 인해 이루어진 삼각관계가 흥미진진한데, 천연덕스러운 학생들의 연기가 더해져 관객들은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수하의 방을 치우면서 구시렁대는 수하 엄마의 모습 또한 웃음 포인트였다.

사진 설명. 〈4.3의 언덕 너머에는〉 공연 중 가장 밝은 악곡을 노래하는 장면. 곧이어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오른쪽에서세 번째)이 단상으로 올라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외치자 관객들이 폭소를 터트린다.
1년짜리 긴 과제를 부여하며 애초에 학생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끈기와 인내를 익히고, 커다란 과제를 완성해 보는 경험과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사, 통합 기행, 뮤지컬을 중심으로 한 주제 통합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내가 의도한 것을 확실히 배운 듯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완성할 수 있을지 불안했던 순간도 모두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그런데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가장 큰 배움이 되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픈 역사에 대한 배움을 예술과 해학으로 외면화하여 발산하고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며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던 시간 동안, 공연 당시 관객과 함께 폭소를 터트린 시간 동안 말이다.
사실 참혹한 역사적 사실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가끔은 내 정신과 영혼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밤잠을 못 이루고 악몽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완성한 두 작품은 나와 학생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주었다. 그것은 바로 아픈 역사를 ‘즐겁게’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심리적 효능감이다.
우리는 아픈 역사 속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에서 현재로 불쑥 튀어나와 시를 쓰고 춤을 만들었다. 가사와 멜로디에 관현악을 옷 입혔고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대변했다. 끔찍하고 처참한 채로 두지 않고 말랑하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머릿속, 마음속에서 몸 밖으로 분출시켰다. 나는 이것을 ‘극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학생들과 함께 역사를 극복하는 방법을 체득했다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거운 순간들이 있다. 수업을 진행한 교사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픈 인간사를 수업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새로운 세대가 미래의 주역이 될 때, 역사를 기억하되 상처투성이로서가 아니라 그 정신을 계승하며 극복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참, 그럼 ‘춘향전’은 언제 하느냐고? 올해 주제 통합 수업의 주제로 삼았다. 어두운 역사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의 각종 문화와 예술에 대해 배우고, 해학과 사랑이 넘치는 이야기를 음악으로 써 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노래하다
- 제주 4.3과 사북항쟁, 창작 뮤지컬 수업
안사을
saeul.ahn@kakao.com
전북 완주 고산고 교사
수석 교사실 문을 두드렸다. 한창 일에 열중하고 계신 선생님께 툭 던지듯 제안했다.
“선생님. 저랑 같이 춘향전 해 보실래요?”
“응? 갑자기 뭔 소리야?”
“선생님은 한국사 시간에 춘향전과 관련된 역사를 가르치고, 저는 뮤지컬로 만들어서 아이들하고 공연하고요.”
선생님의 얼굴에 꽃이라도 피어오르는 줄 알았다. 눈동자와 입이 동시에 동그랗게 열리더니 호들갑을 부리셨다.
“너무 좋지. 진짜 너무 좋지. 내가 평생을 꿈꿔 오던 수업이었어.”
“어떤 꿈이요?”
“지식을 습득하고, 토론이나 현장 체험 학습으로 내면화하고, 결국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거야. 그런 수업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그건 나 혼자서는 절대 못 하잖아. 그래서 환상이나 꿈 같은 것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지.”
“통합 기행과도 연계하면 딱이네요!”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주제 통합 수업이 시작되었다. 6~7개의 과목이 서로 얽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프로젝트였다.
제주 4.3과 사북항쟁을 노래하다
사진 설명. 수석 교사가 직접 해설사가 되어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학생들을 견학시키고 있다.
최초로 생각했던 춘향전 대신 2022년의 주제는 ‘제주 4.3’이 되었다. 그해 겨울,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회복적 정의에 기반한 생활교육’ 3급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동료 교사 10여 명과 함께 제주도에서 열린 연수에 참여했다. 그때 1948년 전후 제주에서 벌어진 핏빛 참사에 대해 생생하게 듣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음악적 영감이 밀려왔다.
마침, 한국사 시간에 국가 폭력과 대항 폭력에 대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주 4.3을 주제 통합 수업으로 제안했다. 관련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전되었다. 통합 기행 교과도 함께하기로 했다. 통합 기행은 2학년 전체 학생이 80L 크기의 배낭을 메고 7박 8일 동안 여행을 떠나는 교육과정이다. 배낭 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식사와 잠자리를 학생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2022년에는 제주도에서, 2023년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학생들은 제주 4.3과 사북항쟁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고,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도 들으며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특히, 2023년에는 2학년 부장 교사가 되면서 뮤지컬과 통합 기행을 동시에 맡게 되어 더 뜻깊었다. 본격적으로 주제 통합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나의 가슴속에 수업 소재로 자리 잡은 사북항쟁을 주제로 삼았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 일대를 사전 답사하며, 학생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걸을 수 있는 경로도 직접 짤 만큼 열심히 준비했다.
사진 설명. 《내 사랑 사북》(2005, 사계절)을 쓴 이옥수 작가와 사북항쟁 당시 지도부 역할을 했던 이원갑 님을 모시고 북콘서트를 진행했다.
그렇다고 통합 기행과 뮤지컬을 기계적으로 연결하진 않았다. 학생들은 제주도에서도, 강원도에서도 역사를 잠시 잊고 풍경과 동화되어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역사의 현장을 마주하며 수업 시간에 배운 아픈 과거를 상기시킬 때면 사뭇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사북의 ‘도롱이 연못’이 그랬다. 수면 위로 단풍이 물든, 탄성이 절로 나오는 비경 속을 걸을 때도 학생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남편이나 아들을 탄광에 보낸 아낙네들이 무사 귀환을 간절하게 빌던 장소라고 하니,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또 동화된 것이리라. 때론 고되고 힘든 여정이었을 테지만, 나는 통합 기행을 통해 학생들이 매 순간 느끼고 경험한 작은 소중한 깨달음들이 한데 엉켜 커다란 배움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 설명. 도롱이 연못. 1970년대 석탄을 캐던 갱도가 지반 침하로 주저앉으면서 만들어진 생태 연못이다. 도롱이란 이름은 화절령 일대에 살고 있던 광부 아내들이 이곳 연못의 도롱뇽이 살아 있으면 남편도 무사할 거라는 믿음으로 기도했던 데서 유래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3월, 시작은 아무것도 없이
창작 뮤지컬은 그 특성상 연습할 수 있는 악곡이 없다. 첫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면 교사나 학생이나 공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건 매한가지다. 나는 오히려 이런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오늘, 이 시간에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의 당황스러운 눈빛과 행동에서 역설적으로 무한한 생동감을 느낀다. 그 상황을 대화로 옮기면 대충 이렇다.
“쌤, 오늘 뭐 해요?”
“할 수 있는 게 없어.”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할 게 없다니요. 그럼 그냥 놀아요?”
“아니, 놀다니. 신성한 수업 시간에 말이야. 당연히 수업을 해야지.”
“할 게 없다면서요.”
“맞아. 우리가 같이 만들어야 해. 곡이 없는데 연습을 어떻게 하겠니? 대본도, 가사도, 안무도 우리가 같이 만들어야 해. 지금부터 말이지.”
시쳇말로 학생들을 ‘멘붕(멘탈의 붕괴)’ 상태로 만들어 놓고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으로 강제해 경직된 내용으로 시작하는 수업은 사실 재미가 없다. 적어도 예술과 창작 교과만큼은 머릿속을 하얗게 비우고 손과 발을 늘어트린 채, 최대한 무(無)에서 아기와 같은 발걸음으로 시작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수업은 상담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학생을 한 명씩 만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1. 뮤지컬 수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 세 가지가 있다면?
2. 뮤지컬 수업, 공연 등 모든 과정에서 배려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3. 어색하거나 어려운 친구가 있는지?
첫 번째 질문인 ‘이루고 싶은 세 가지’는 학생 개인별 과제로 주어진다. 뮤지컬과 관련이 있다면 매우 사소한 것도 괜찮다. 난이도 점수가 있기에, 학생들은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 가장 도전적인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어떤 학생은 ‘뮤지컬 안무를 위해 살을 7kg 빼겠다’는 무시무시한 목표를 세웠다. 춤을 추며 무대를 뛰어다니면 관절 건강이 걱정되는 아이여서 적절한 과제라고 생각하여 통과시켰다. 어떤 학생은, “무대 공포증이 있는데 연습과 실제 공연을 통해서 극복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체중 감량처럼 정량 평가를 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고민했지만 이것도 통과시켰다. 학기 말 상담이나 동료 평가를 통해 충분히 정성 평가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인 ‘배려받고 싶은 점’에 대한 것은 학생들의 상처와도 관련이 있다. 음악 수업을 준비할 때면 항상 ‘학생들이 상처를 받게 될까 봐’ 걱정하곤 했다. 교사의 의도가 아무리 교육적이어도 정작 학생들은 수업 및 상호작용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뮤지컬 같은 예술, 특히 학생들의 정의적 영역을 많이 건드릴 수밖에 없는 수업이라면 더욱 잠재적 교육과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인지 끄덕거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음악 수업이 즐거운 시간이었을 수도, 두렵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세 번째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의 학생은 쭈뼛거리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오늘 나눈 대화는 철저히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말문을 연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안전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감정을 다루는 수업이기 때문에 불편한 친구와의 협업은 매우 어렵다. 사전 정보를 통해 이러한 부적절한 상황을 미리 제거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몰래 사귀었다가 헤어진 커플이 상대역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정보를 모르고 그 둘에게 이중창 곡을 맡겼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학생들의 손에서 출발하는 뮤지컬 창작
우리 학교의 창작 뮤지컬이 특별한 이유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주 4.3을 다룬 〈4.3의 언덕 너머에는〉에서는 무대 의상을 학생들이 손수 만들었다. 움직이는 무대 배경 그림도 모두 학생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사북항쟁을 다룬 〈내 사랑 사북〉에서는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에도 참여했고, 특히 인물의 대사는 모두 학생들이 썼다. 뮤지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안무를 만드는 데도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복잡한 동선이 포함된 학년 전체의 안무는 뮤지컬 강사가 만들었지만,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각 학급의 안무는 학생들이 직접 만들었다.
극 전체의 줄거리가 한 학생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는 일도 있었다. 〈4.3의 언덕 너머에는〉을 준비할 때였다. 본격적으로 대본을 만들기 전, 대략적인 내용과 구성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던 중 한 학생이 내 의견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쌤. 줄거리가 너무 어두워요. 발랄한 장면 없어요? 뮤지컬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어쩔 수 없어. 4.3 이야기 자체가 그런 걸 어떡해.”
“그래도 싫어요. 우리 반은 발랄한 곡 하고 싶어요!”
그 학생은 볼멘소리와 협박을 적절히 섞어 가며 나를 압박했다. 고민해 보겠다는 나의 대답에도 영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녀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쌤! 좋은 생각이 났어요! 들어 봐요. 진짜 완전 대박이에요.”
“진짜? 뭔데? 들어나 보자. 나도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그 학생의 의견은 이랬다. 다른 반의 무대를 통해 역사적 장면을 보여 주고, 자신의 학급에서는 시점을 현재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다. 역사 수업 시간에 제주 4.3을 배우는 장면으로 전환하여 발랄한 신규 교사와 천진난만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순간 막혔던 체증이 확 뚫리면서 온 교실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학생의 최종 승인(?)을 거쳐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 〈4.3의 언덕 너머에는〉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전체 학생의 무대(오프닝 넘버) : 제주 4.3의 역사적 배경을 가사와 음악으로 표현.
2) 2-1 무대
① 무장대가 되어 산으로 들어간 청년 ‘성태’와 같은 마을에 살았던 ‘정희’의 이별 이야기.
② 끔찍한 일들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와중 두려워 떠는 마을 청년들의 모습.
③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와 평화뿐이라는 절규.
3) 2-3 무대
① 많은 주민을 죽음에서 지켜 낸 ‘문형순’ 경찰 서장에 관한 이야기.
② 억울하게 옥에 갇혀 어려움을 겪는 마을 사람들.
③ 문형순 서장에 의해 풀려나지만 결국 4.3이라는 광풍에 다시 휩싸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4) 2-2 무대
① 2023년 현재의 교실, 역사 수업 시간.
② 학교에서 제주 4.3을 배운 한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그 내용을 나누는 장면.
③ 제주 도민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가 깃들기 바란다는 학생들의 염원.
5) 전체 학생의 무대(피날레) : “제주여 평화로우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웅장한 합창.
※ 큐알코드. ‘2022 고산고 창작 뮤지컬 〈4.3의 언덕 너머에는〉 공연 실황
2023년 창작 뮤지컬 〈내 사랑 사북〉을 준비할 때는 학생들이 만들어 준 가사가 음악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작곡과 작사를 동시에 생각하다 보면 타성에 젖게 되는데, 다른 사람이 써 준 가사로 악상을 떠올리니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사를 써 준 학생에게 두 시간 만에 전화를 걸어 아이처럼 외쳤던 일이 아직도 선하다.
“인아야! 와서 들어 볼래? 완성했음!”
“진짜요? 대박, 대박!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달려갑니다!”
작사는 두 학생이 해 주었다. 학생들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시어를 전달해 주었다. 그 가사들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꽉 막혔던 머릿속에 작은 숨구멍을 내 주었다. 주옥같은 가사들 중 하나를 골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인아 학생이 쓴 가사인데 정말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인아가 졸업한 후에도 적절한 비용을 내고서라도 계속해서 가사 창작을 요청하고 싶을 만큼.
〈검은 사람들〉
좁은 굴에서 나와 좁은 길을 따라서
지친 나의 발걸음 오늘도 눈물의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초라한 나의 집으로 향하네
좁은 땅 좁은 하늘 날 가두듯 둘러싸인 높은 산
우리들의 웃음과 행복을 앗아 가는 감시와 억압
그 속에서 사는 삶은 어둠에 어둠을 덧칠하는 듯해
검은 사람들 어두운 삶 속에서
빛나는 건 오로지 우리의 두 눈뿐
두 눈 번쩍 빛내며 이제는 이 어두운 장막을 거두어야 할 때
함께 모여 이 어두운 탄광촌을 빛으로 밝히리
빛나는 사람들 우리의 삶 속에서
더 이상 패배는 없어 분노의 저항뿐
두 눈 번쩍 빛내며 이제는 이 어두운 장막을 거두어야 할 때
함께 모여 이 어두운 탄광촌을 빛으로 밝히리
※ 큐알코드. ‘2023 고산고 창작 뮤지컬 〈내 사랑 사북〉 공연 실황
내면화한 아픈 역사를 예술과 해학으로 외면화하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희극이다. 주제에 따라서 결말이 어두운 경우도 있지만 중간에 반드시 관객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장면이 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뮤지컬과 비극인 오페라의 차이점이다. 나는 여기에서 뮤지컬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발견한다.
알다시피 〈4.3의 언덕 너머에는〉의 후반부는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벌어지는 내용이었다. 역사 수업 시간에 초임 교사와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매우 발랄한 곡으로 연결되고,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이 책상 위로 올라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물론 관객의 반응을 예상하고 넣은 의도된 대사와 연출이었다.
마찬가지로 사북항쟁을 그린 〈내 사랑 사북〉의 첫 장면에서도 중학생인 수하와 광호 이야기가 익살스럽게 펼쳐진다. 청년 광부인 ‘정욱’을 짝사랑하는 수하로 인해 이루어진 삼각관계가 흥미진진한데, 천연덕스러운 학생들의 연기가 더해져 관객들은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수하의 방을 치우면서 구시렁대는 수하 엄마의 모습 또한 웃음 포인트였다.
사진 설명. 〈4.3의 언덕 너머에는〉 공연 중 가장 밝은 악곡을 노래하는 장면. 곧이어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오른쪽에서세 번째)이 단상으로 올라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외치자 관객들이 폭소를 터트린다.
1년짜리 긴 과제를 부여하며 애초에 학생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끈기와 인내를 익히고, 커다란 과제를 완성해 보는 경험과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사, 통합 기행, 뮤지컬을 중심으로 한 주제 통합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내가 의도한 것을 확실히 배운 듯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완성할 수 있을지 불안했던 순간도 모두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그런데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가장 큰 배움이 되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픈 역사에 대한 배움을 예술과 해학으로 외면화하여 발산하고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며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던 시간 동안, 공연 당시 관객과 함께 폭소를 터트린 시간 동안 말이다.
사실 참혹한 역사적 사실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가끔은 내 정신과 영혼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밤잠을 못 이루고 악몽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완성한 두 작품은 나와 학생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주었다. 그것은 바로 아픈 역사를 ‘즐겁게’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심리적 효능감이다.
우리는 아픈 역사 속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에서 현재로 불쑥 튀어나와 시를 쓰고 춤을 만들었다. 가사와 멜로디에 관현악을 옷 입혔고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대변했다. 끔찍하고 처참한 채로 두지 않고 말랑하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머릿속, 마음속에서 몸 밖으로 분출시켰다. 나는 이것을 ‘극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학생들과 함께 역사를 극복하는 방법을 체득했다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거운 순간들이 있다. 수업을 진행한 교사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픈 인간사를 수업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새로운 세대가 미래의 주역이 될 때, 역사를 기억하되 상처투성이로서가 아니라 그 정신을 계승하며 극복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참, 그럼 ‘춘향전’은 언제 하느냐고? 올해 주제 통합 수업의 주제로 삼았다. 어두운 역사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의 각종 문화와 예술에 대해 배우고, 해학과 사랑이 넘치는 이야기를 음악으로 써 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