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한 우리 모두에게

김영희 씀, 《전기, 밀양 - 서울》, 교육공동체 벗, 2024
공혜원 hyewonkk9686@gmail.com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의 연대자이자 탈핵탈송전탑세미나 활동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사무국장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과 관련한 구술이나 책,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당시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게 버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에겐 기록에 담기지 않거나, 담기지 못하는 경험들이 더 짙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구술은 중요하게 기록되는 한편, 누군가에게는 그 시기를 꺼내 보거나 적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나 역시 꽤 오랜 시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해 왔지만, 여전히 나의 경험을 어떻게 꺼내고, 나누고, 스스로 소화해 낼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그래서 투쟁 경험에 대한 인터뷰나 원고, 발언을 요청받을 때 소극적으로 응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밀양을 마주하며 《전기, 밀양 - 서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2014년 행정대집행 이후 10년이 지난 2024년에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여전히 경제 성장이나 국익을 위한다는 개발 현장에서 밀양 주민들이 겪어 온 국가폭력이 반복되고 있으며, 밀양 송전탑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약 을 이행하기는커녕, 탈핵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모두 폐기하고, 기후 위기의 대안이랍시고 핵발전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송전탑 반대 운동을 이어 가고 있는 주민들이 ‘송전탑이 건설되었으니 투쟁은 끝났다’는 비아냥 속에서도 파괴된 마을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에너지 정의를 위한 운동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 밀양 - 서울》은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주민들이 겪어 온 국가폭력, 한국전력과 밀양시의 합의 종용과 이로 인한 마을공동체 파괴 과정을 담았다. 투쟁 과정에서 주민들의 ‘나랏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탈송전탑과 탈핵 운동으로 운동의 목적이 확장되며 노동, 환경, 인권 등의 시민사회운동과 연대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밀양 주민들은 이렇게 투쟁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건 ‘연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는데, 당시 정말 수많은 연대자들이 밀양에 함께했다. 행정대집행 10주년을 맞이하여 《전기, 밀양 - 서울》을 통해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한 각자의 경험들을 돌아보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나아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이 더 다양한 ‘우리의 이야기들’로 채워졌으면 한다.
도시로 오는 전기와 ‘나랏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2년 故 이치우 밀양 주민의 분신 자결이었지만, 밀양 주민들은 2005년부터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이어 왔다. 2000년 ‘제5차 장기전력수급계획’ 이후 2003년에 경과지로 선정되었으나, 2005년 환경영향평가 주민 설명회 개최 소식을 듣고서야 주민들은 처음으로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설명회에 참여한 주민들은 1%가 채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소문으로 송전탑 건설과 그로 인한 피해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전력은 주민 설명회를 개최해 의견을 수렴했다고 주장하지만, 주민 설명회 이후 주민들은 노선 변경과 지중화 등의 대안을 요구했다. 요구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송전탑 건설 백지화 투쟁을 벌였음에도 공사는 강행되었다. 공사 강행을 저지하던 이치우 주민은 용역들의 폭력과 욕설, 비아냥에 시달리다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내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하게 된 계기도 故 이치우 밀양 주민의 분신 자결이었다. 당시 재학 중이던 성미산학교에서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에 집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2012년부터 밀양과 연대해 왔다. 처음으로 밀양에 가던 날을 떠올려 보자면, ‘모두가 전기를 소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님비가 아닌가’ 하면서도, 서울에서 편하게 전기를 소비하는 사람으로서 현장에 방문하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전기가 부족하다는 정부와 한전의 주장과 더불어 에너지 생산을 위한 지역들의 희생이 개인의 죄책감으로 다가올 무렵, 아랍에미리트에 핵발전소를 수출하기 위해 신고리 핵발전소 3·4호기 및 송전탑 건설과 가동이 이뤄져야 하고, 페널티를 물지 않기 위해 기간 내에 완공해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탈핵운동가’로서 함께 밝혀낸 주민들과의 만남과 이야기를 통해 그제야 탈핵, 탈송전탑 운동으로 밀양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십 년 전부터 국가, 혹은 국가와 자본이 결합한 모든 개발의 시도들은 이 ‘주인 없는 땅’을 수탈지로 삼아 이루어졌다.
- 본문 24쪽
“시청 다니는 아-들 있는 집에는 한전에서 전화를 해갖꼬 ‘할매가 데모 나가면 아들내미 모가지 잘린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기라.”
- 본문 63쪽
“회관에 마 먹을 거 내려놓고, 집에다 선물 갖다 놓고 그라고 그냥 사인 좀 해 달라고 조르는 기지. 매일같이 와, 매일같이.”
- 본문 81쪽
국가는 전력난 해소가 아닌, 핵발전소 수출을 위해 핵발전소와 초고압 송전탑을 건설하고자 했다. ‘나랏일’이라는 명목하에, 개발과 건설을 위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자원을 수탈했고, 이를 위해 투입되는 자본은 ‘밀어붙이기 쉬운 대상’들의 삶을 통제하고 압박하며 다방면으로 개입했다. 밀양에서는 한국전력의 사업임에도 밀양시 공무원들이 개인적인 관계망까지 동원하여 합의를 위해 온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한국전력은 지금 합의하지 않으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주민들을 이간질하고, 합의금인지 보상금인지 알 수도 없는 ‘돈지랄’을 해 댔다. 아직도 모든 과정에 투입된 돈의 항목이나 세부 내역, 지급 기준은 알 수 없다. 이는 단지 밀양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도시를 지탱하기 위해 일명 ‘시골’로 불리는 곳에서, 개발에 맞서 투쟁하는 지역에서, 북반구의 윤택한 삶을 위해 착취당해 온 남반구 국가들에서, 모두 ‘경제 성장’을 위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다.
국가폭력과 부서진 마을
오르기 벅찼던 산길, 경찰을 피해 기어 가던 비탈길, 경찰들이 방패로 바닥을 치던 소리, 헬기가 뜨는 소리, ‘사람 살려’ 외치는 주민과 연대자들, 추운 날 용역과의 대치가 끝나고 피운 모닥불을 경찰이 소화기로 끄던 날, 공사 차량을 막다 경찰이 밀어 배수로에 빠진 날, 경찰들 뒤에 지나가던 용역들이 씨익 웃던 모습, 불침번을 서며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겁을 먹던 날……. 약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선명한 기억들이다.
밀양에서 마주한 국가폭력은 공권력만이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밀양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용역의 폭력과 이를 방관하며 폭력에 동참한 경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9년, 밀양과 청도 송전탑 건설에 관한 경찰청 인권 침해 사건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10월부터 2014년 6월까지 현장에 투입된 경찰은 약 38만 명 이상이었다. 2014년 6월 11일에 행정대집행을 저지하던 주민과 연대자는 약 260명 정도였으나, 경찰은 총 2,100여 명 동원됐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집회·시위 대처 유공으로 표창을 받은 경찰 64.6%가 밀양 송전탑 현장에 투입된 경찰들이었으며, 경찰이 인권을 침해했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수환 밀양경찰서장은 2023년에 경찰청장 다음으로 높은 계급인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동네가 뭔 분열이라면 우아한 소리고, 그냥 동네가 쪽사리 난 상황이지.”
- 본문 138쪽
“길 가다 마주치도(마주쳐도) 서로 눈도 한번 흘깃 안 하고 가는데, 뭐. 인자 끝장났어.”
- 본문 139쪽
밀양의 ‘파괴된 마을’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개인들 사이의 앙금이나 상처, 혹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 유발된 갈등의 결과가 아니라 명백하게 ‘국가폭력’이 지속되는 증거요, 현장이다.
- 본문 300쪽
뿐만 아니라 밀양에서는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서울에 한번 다녀오면 지난주에 함께 밥을 먹으며 투쟁 전략을 고민했던 주민이, 감을 함께 따며 식구가 된 사람들이, 이번 주에는 합의한 주민이 되어 있었다. 밀양에 많은 연대자들이 찾아오자 ‘밀양에 외부 세력이 와서 주민들을 선동한다’는 기사가 쏟아졌고, 이에 연대자들은 ‘우리가 밀양’이라며 구호를 외쳤다. 나 역시도 ‘밀양의 내부 세력’이라 주장했지만, 파괴되어 가는 마을공동체를 지켜보며, 파괴된 마을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을 접하며, ‘연대자’로서의 역할을 다시금 고민하게 됐다.
마을공동체에 속해 살아온 사람이 아닌, 연대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또한 ‘국가폭력’임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전기, 밀양 - 서울》은 전기가 흐르는 송전탑을 마주하고, 삶의 모든 과정에 함께한 공동체 구성원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평생 일궈 온 삶의 기반에서 고립된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밀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백하게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며, 송전탑 건설 시도부터 결과까지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와 승인으로 ‘정의’가 확인되고 실현되는 과정 없이는 ‘국가폭력’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깊이 공감하며 덧붙여 언젠가는 한국전력과 밀양시, 공권력과 주민들 사이, 주민과 주민 사이만이 아니라, 주민과 연대자, 연대자와 연대자 사이 기록에 담기지 않거나 담기지 못하는 경험들을 포함한 운동 과정에 대해서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탈핵, 탈송전탑 그리고 기후 ‘정의’
밀양 주민들은 탈핵·탈송전탑 운동가로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대응하고,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전력 시스템을 위한 ‘초고압 송·변전 시설 반대 전국네트워크’를 함께 출범했다.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 이후로는 시즌 2를 선언하며 미니팜 협동조합 설립, 탈핵과 탈송전탑 교육 진행, 시민사회운동과의 연대 등을 이어 가기도 했다. 나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계기로 환경, 에너지 관련 단체 등에서 활동했다. 송전탑이 모두 건설된 이후 주민들과 ‘저 송전탑 뽑아서 엿 바꿔 먹으면 그동안 왔던 연대자들 다 나눠 주고도 평생 먹어도 다 못 먹을 엿이 나오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이는 정말 내 삶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핵’을 주제로 환경 외 시민사회운동과의 접점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연대하긴 어려웠다. 연결 고리를 함께 찾아가 보려 해도 ‘에너지, 핵, 송전탑, 전기는 너무 어렵다’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에너지 관련 정책이나 법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주저했고, 전문성이 있나 의심했고, 내가 하는 활동에 자신이 없었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나서야 내가 ‘전문가’가 되고 싶었나 돌아보게 되었고, 이후 우리의 경험과 투쟁을 바탕으로 ‘정의’를 위한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기후 위기 대응과 기후 정의를 촉구하는 운동이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어렵다’거나, ‘나의 문제로 잘 와닿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눈다.[ref] 필자의 기후 정의 운동에 관한 고민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의 이슈페이퍼 12월호 〈기후정의와 재생산정의를 단단하게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srhr.kr/issuepapers)에서 읽어 볼 수 있다. [/ref] 그렇지만 이제 이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진 않는다. 이전의 나는 탈핵, 탈송전탑 운동을 위해 핵발전 원리부터 공부했다면, 이제는 기후 정의와 탈핵, 에너지 정의 운동을 위해 각자의 경험과 이야기들로 ‘정의’의 내용을 채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도 어느 마을 주민인지, 연령대나 주거 환경, 재산 현황 등에 따라 모두 다른 경험을 했고, 연대자들도 어떤 주민을 만났는지, 어느 농성장에 방문했는지에 따라 다른 경험을 했다. 이런 서로 다른 경험들과 이야기들이 만나 마을공동체를 파괴한 국책 사업의 실체와 공권력이 ‘국가폭력’이라고 밝혀낼 수 있었고, 탈핵과 탈송전탑 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발전소나 송전탑 인근 지역 주민들의 피해도, 개발에 맞서는 투쟁 현장의 피해도, 기후 위기로 인한 피해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 삶의 조건과 맥락에 따라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들이 모여 사회 구조적으로 연결 고리를 맺어 가는 것이 바로 연대를 넘어 ‘정의’를 위한 운동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어떤 전문적인 용어, 정책이나 법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와 경험으로 채워 가는 운동들이 서로 만나고 더욱 확장되길 바란다.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한 우리 모두에게
김영희 씀, 《전기, 밀양 - 서울》, 교육공동체 벗, 2024
공혜원 hyewonkk9686@gmail.com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의 연대자이자 탈핵탈송전탑세미나 활동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사무국장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과 관련한 구술이나 책,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당시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게 버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에겐 기록에 담기지 않거나, 담기지 못하는 경험들이 더 짙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구술은 중요하게 기록되는 한편, 누군가에게는 그 시기를 꺼내 보거나 적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나 역시 꽤 오랜 시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해 왔지만, 여전히 나의 경험을 어떻게 꺼내고, 나누고, 스스로 소화해 낼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그래서 투쟁 경험에 대한 인터뷰나 원고, 발언을 요청받을 때 소극적으로 응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밀양을 마주하며 《전기, 밀양 - 서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2014년 행정대집행 이후 10년이 지난 2024년에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여전히 경제 성장이나 국익을 위한다는 개발 현장에서 밀양 주민들이 겪어 온 국가폭력이 반복되고 있으며, 밀양 송전탑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약 을 이행하기는커녕, 탈핵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모두 폐기하고, 기후 위기의 대안이랍시고 핵발전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송전탑 반대 운동을 이어 가고 있는 주민들이 ‘송전탑이 건설되었으니 투쟁은 끝났다’는 비아냥 속에서도 파괴된 마을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에너지 정의를 위한 운동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 밀양 - 서울》은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주민들이 겪어 온 국가폭력, 한국전력과 밀양시의 합의 종용과 이로 인한 마을공동체 파괴 과정을 담았다. 투쟁 과정에서 주민들의 ‘나랏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탈송전탑과 탈핵 운동으로 운동의 목적이 확장되며 노동, 환경, 인권 등의 시민사회운동과 연대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밀양 주민들은 이렇게 투쟁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건 ‘연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는데, 당시 정말 수많은 연대자들이 밀양에 함께했다. 행정대집행 10주년을 맞이하여 《전기, 밀양 - 서울》을 통해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한 각자의 경험들을 돌아보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나아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이 더 다양한 ‘우리의 이야기들’로 채워졌으면 한다.
도시로 오는 전기와 ‘나랏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2년 故 이치우 밀양 주민의 분신 자결이었지만, 밀양 주민들은 2005년부터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이어 왔다. 2000년 ‘제5차 장기전력수급계획’ 이후 2003년에 경과지로 선정되었으나, 2005년 환경영향평가 주민 설명회 개최 소식을 듣고서야 주민들은 처음으로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설명회에 참여한 주민들은 1%가 채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소문으로 송전탑 건설과 그로 인한 피해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전력은 주민 설명회를 개최해 의견을 수렴했다고 주장하지만, 주민 설명회 이후 주민들은 노선 변경과 지중화 등의 대안을 요구했다. 요구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송전탑 건설 백지화 투쟁을 벌였음에도 공사는 강행되었다. 공사 강행을 저지하던 이치우 주민은 용역들의 폭력과 욕설, 비아냥에 시달리다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내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함께하게 된 계기도 故 이치우 밀양 주민의 분신 자결이었다. 당시 재학 중이던 성미산학교에서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에 집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2012년부터 밀양과 연대해 왔다. 처음으로 밀양에 가던 날을 떠올려 보자면, ‘모두가 전기를 소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님비가 아닌가’ 하면서도, 서울에서 편하게 전기를 소비하는 사람으로서 현장에 방문하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전기가 부족하다는 정부와 한전의 주장과 더불어 에너지 생산을 위한 지역들의 희생이 개인의 죄책감으로 다가올 무렵, 아랍에미리트에 핵발전소를 수출하기 위해 신고리 핵발전소 3·4호기 및 송전탑 건설과 가동이 이뤄져야 하고, 페널티를 물지 않기 위해 기간 내에 완공해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탈핵운동가’로서 함께 밝혀낸 주민들과의 만남과 이야기를 통해 그제야 탈핵, 탈송전탑 운동으로 밀양을 마주하게 되었다.
국가는 전력난 해소가 아닌, 핵발전소 수출을 위해 핵발전소와 초고압 송전탑을 건설하고자 했다. ‘나랏일’이라는 명목하에, 개발과 건설을 위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자원을 수탈했고, 이를 위해 투입되는 자본은 ‘밀어붙이기 쉬운 대상’들의 삶을 통제하고 압박하며 다방면으로 개입했다. 밀양에서는 한국전력의 사업임에도 밀양시 공무원들이 개인적인 관계망까지 동원하여 합의를 위해 온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한국전력은 지금 합의하지 않으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주민들을 이간질하고, 합의금인지 보상금인지 알 수도 없는 ‘돈지랄’을 해 댔다. 아직도 모든 과정에 투입된 돈의 항목이나 세부 내역, 지급 기준은 알 수 없다. 이는 단지 밀양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도시를 지탱하기 위해 일명 ‘시골’로 불리는 곳에서, 개발에 맞서 투쟁하는 지역에서, 북반구의 윤택한 삶을 위해 착취당해 온 남반구 국가들에서, 모두 ‘경제 성장’을 위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다.
국가폭력과 부서진 마을
오르기 벅찼던 산길, 경찰을 피해 기어 가던 비탈길, 경찰들이 방패로 바닥을 치던 소리, 헬기가 뜨는 소리, ‘사람 살려’ 외치는 주민과 연대자들, 추운 날 용역과의 대치가 끝나고 피운 모닥불을 경찰이 소화기로 끄던 날, 공사 차량을 막다 경찰이 밀어 배수로에 빠진 날, 경찰들 뒤에 지나가던 용역들이 씨익 웃던 모습, 불침번을 서며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겁을 먹던 날……. 약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선명한 기억들이다.
밀양에서 마주한 국가폭력은 공권력만이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밀양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용역의 폭력과 이를 방관하며 폭력에 동참한 경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9년, 밀양과 청도 송전탑 건설에 관한 경찰청 인권 침해 사건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10월부터 2014년 6월까지 현장에 투입된 경찰은 약 38만 명 이상이었다. 2014년 6월 11일에 행정대집행을 저지하던 주민과 연대자는 약 260명 정도였으나, 경찰은 총 2,100여 명 동원됐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집회·시위 대처 유공으로 표창을 받은 경찰 64.6%가 밀양 송전탑 현장에 투입된 경찰들이었으며, 경찰이 인권을 침해했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수환 밀양경찰서장은 2023년에 경찰청장 다음으로 높은 계급인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뿐만 아니라 밀양에서는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서울에 한번 다녀오면 지난주에 함께 밥을 먹으며 투쟁 전략을 고민했던 주민이, 감을 함께 따며 식구가 된 사람들이, 이번 주에는 합의한 주민이 되어 있었다. 밀양에 많은 연대자들이 찾아오자 ‘밀양에 외부 세력이 와서 주민들을 선동한다’는 기사가 쏟아졌고, 이에 연대자들은 ‘우리가 밀양’이라며 구호를 외쳤다. 나 역시도 ‘밀양의 내부 세력’이라 주장했지만, 파괴되어 가는 마을공동체를 지켜보며, 파괴된 마을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을 접하며, ‘연대자’로서의 역할을 다시금 고민하게 됐다.
마을공동체에 속해 살아온 사람이 아닌, 연대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또한 ‘국가폭력’임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전기, 밀양 - 서울》은 전기가 흐르는 송전탑을 마주하고, 삶의 모든 과정에 함께한 공동체 구성원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평생 일궈 온 삶의 기반에서 고립된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밀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백하게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며, 송전탑 건설 시도부터 결과까지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와 승인으로 ‘정의’가 확인되고 실현되는 과정 없이는 ‘국가폭력’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깊이 공감하며 덧붙여 언젠가는 한국전력과 밀양시, 공권력과 주민들 사이, 주민과 주민 사이만이 아니라, 주민과 연대자, 연대자와 연대자 사이 기록에 담기지 않거나 담기지 못하는 경험들을 포함한 운동 과정에 대해서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탈핵, 탈송전탑 그리고 기후 ‘정의’
밀양 주민들은 탈핵·탈송전탑 운동가로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대응하고,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전력 시스템을 위한 ‘초고압 송·변전 시설 반대 전국네트워크’를 함께 출범했다.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 이후로는 시즌 2를 선언하며 미니팜 협동조합 설립, 탈핵과 탈송전탑 교육 진행, 시민사회운동과의 연대 등을 이어 가기도 했다. 나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계기로 환경, 에너지 관련 단체 등에서 활동했다. 송전탑이 모두 건설된 이후 주민들과 ‘저 송전탑 뽑아서 엿 바꿔 먹으면 그동안 왔던 연대자들 다 나눠 주고도 평생 먹어도 다 못 먹을 엿이 나오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이는 정말 내 삶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핵’을 주제로 환경 외 시민사회운동과의 접점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연대하긴 어려웠다. 연결 고리를 함께 찾아가 보려 해도 ‘에너지, 핵, 송전탑, 전기는 너무 어렵다’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에너지 관련 정책이나 법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주저했고, 전문성이 있나 의심했고, 내가 하는 활동에 자신이 없었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나서야 내가 ‘전문가’가 되고 싶었나 돌아보게 되었고, 이후 우리의 경험과 투쟁을 바탕으로 ‘정의’를 위한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기후 위기 대응과 기후 정의를 촉구하는 운동이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어렵다’거나, ‘나의 문제로 잘 와닿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눈다.[ref] 필자의 기후 정의 운동에 관한 고민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의 이슈페이퍼 12월호 〈기후정의와 재생산정의를 단단하게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srhr.kr/issuepapers)에서 읽어 볼 수 있다. [/ref] 그렇지만 이제 이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진 않는다. 이전의 나는 탈핵, 탈송전탑 운동을 위해 핵발전 원리부터 공부했다면, 이제는 기후 정의와 탈핵, 에너지 정의 운동을 위해 각자의 경험과 이야기들로 ‘정의’의 내용을 채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도 어느 마을 주민인지, 연령대나 주거 환경, 재산 현황 등에 따라 모두 다른 경험을 했고, 연대자들도 어떤 주민을 만났는지, 어느 농성장에 방문했는지에 따라 다른 경험을 했다. 이런 서로 다른 경험들과 이야기들이 만나 마을공동체를 파괴한 국책 사업의 실체와 공권력이 ‘국가폭력’이라고 밝혀낼 수 있었고, 탈핵과 탈송전탑 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발전소나 송전탑 인근 지역 주민들의 피해도, 개발에 맞서는 투쟁 현장의 피해도, 기후 위기로 인한 피해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 삶의 조건과 맥락에 따라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들이 모여 사회 구조적으로 연결 고리를 맺어 가는 것이 바로 연대를 넘어 ‘정의’를 위한 운동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어떤 전문적인 용어, 정책이나 법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와 경험으로 채워 가는 운동들이 서로 만나고 더욱 확장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