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체념이 넘쳐흘러도,
우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
이주희 씀,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 글항아리, 2023
김수영(수엉)
tarassom0@gmail.com
트랜스학 연구자, 미국 에머리 대학교 여성학과 박사 과정
들어가며
수많은 도시 괴담들이 있다. 이를테면, 차별금지법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괴담.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여자 화장실에 남자가 들어와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이야기한다면 누구도 그를 제지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 전용 공간은 속절없이 남성들에게 침범당할 것이고, 여자들은 그곳에서 지금보다 더 많이 다치고 죽을 것이다.’ 이러한 괴담은 화장실의 성별 분리를 추동한다. 하지만 화장실 등 성별 분리 공간이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음은 괴담이 아닌 실제다. 트랜스젠더는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느 화장실도 편히 갈 수 없다. 이는 트랜스젠더의 교육권, 노동권, 혹은 공공장소에 ‘출현할 권리’를 박탈한다.[ref] 주디스 버틀러는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창비, 2020)에서 낙인찍힌 신체들이 공공장소에 함께 출현하고 점유하여 새로운 도시 공간을 만들 가능성을 탐구하며 “출현할 권리”를 개념화했다. 연구모임POP는 이 “출현할 권리” 개념을 바탕으로 약물을 사용한 섹스를 하는 몸의 다양한 이야기가 이 사회의 보편적 인권과 퀴어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연구모임POP(Power of Pleasure)(2022), 〈캠섹스 : 캠섹스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참조하라. [/ref] 이런 구도에서는 트랜스젠더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안전할 권리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폭력을 무서워하고 안전하고 싶어 하는 여성의 감정이 곧바로 트랜스 혐오로 해석되어도 괜찮을까? 이는 결국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또 다른 괴담의 변주일까? 여성으로서 감각하는 정의와 자유에 대한 감정이 트랜스젠더로서 감각하는 정의와 자유에 대한 감정과 대치하는 듯 여겨질 때, 우리는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 혹은 왜 사람들은 부당한 상황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고 다른 감정, 이를테면 순응이나 질투를 할까? 왜 사람들의 분노는 종종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향할까? 불평등과 차별을 분석하고 그에 개입하는 작업에서 감정이 왜 중요할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노동, 여성, 노동자-사용자 관계, 여성 노동자로서의 위치 등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해 온 저자 이주희가 구조화된 차별과 불평등이 차별받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주조하는지 탐구하고, 나아가 그 마음에 어떻게 개입할지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외면하고 싶었던 장면들이 빼곡하며, 그에 대한 성실한 분석이 흘러넘친다. 저자는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 중에서도 체념, 적응, 혐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감정 규칙’을 차근차근 분석해 나간다. 이 서평에서 나는 총 3부로 이루어진 목차 중 2부를 중심으로 이 책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이해해 보고, 이 책 저변에 흐르는 저자의 분석 틀과 관점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동시에 트랜스학 연구자로서 저자의 분석 틀이 성중립 화장실을 둘러싸고 동시대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는 다양한 감정에 대한 분석에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체념에 대하여
차별이 생산하는 불평등, 불평등이 생산하는 차별에 노출된 사회적 소수자는 다양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을 받았을 때 자연스러운 감정 반응이 분노라면, 그리고 분노가 반차별 행동의 자원이라면, 어째서 차별을 생산하는 구조는 약화되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질까?
저자는 구조적 차별을 가리는 장막, 그럼으로써 분노에 기반한 사회 변화를 억제하는 장치로 능력주의를 꼽는다. 사회적 소수자가 받는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능력주의에 따른 공정이기에 그에 대한 분노는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학벌주의와 사회적 지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공정한 시험을 통해 청소년의 능력,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의 인간됨을 등급 매기고, 그에 따라 사회적 기회와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는 현재 한국 사회가 상상하는 가장 공정한 제도이다. 이에 따르면 학력과 학벌에 따라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미래의 어떤 가능성이 정해지는 상황은 공정하다. 자원, 지위, 복지, 삶의 윤택함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입시 부정이 공정함을 해치는 행위이듯 능력주의를 타파하려는 사회사상과 사회운동 역시 불공정을 부추기는 반-사회 행위이며 차별 행위라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입시 부정에 분노하듯 능력주의에 기반하지 않는 사회적 자원과 지위의 분배에 분노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능력주의(는) 사실 능력주의라기보다 시험 서열주의”(본문 101쪽)라고 분석한다. 평등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능력주의 담론은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된 자원에 기반해 구조화된 시험 서열주의에 따라 공정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를 생산할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스튜어트 화이트의 “운 불평등” 분석에 기대어 제시하는 급진적 질문을 살펴보자. 책이 든 예시를 조금 변주해, 당신이 문서를 복사하는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주어진 복사기는 분당 40장을 복사할 수 있는 복사기다. 당신 옆 동료는 분당 10장을 복사할 수 있는 복사기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둘 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일을 했을 때, 당신이 옆 사람보다 4배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공정한가? 만일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면, 당신의 능력이 타인의 능력보다 높다고 임금을 더 받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능력은 그 사람이 우연히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다르게 체화한 경제 자본, 사회 자본, 문화 자본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의 능력은 우연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에 따른 임금 격차를 자연화하는 능력주의, 더 정확히 말해 시험 서열주의는 기존 특권층을 더 특권화하고 불평등을 심화할 뿐이다.
문제는 능력주의, 시험 서열주의, 능력에 따른 임금 격차와 그에 따른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이 이 사회의 지배적인 신념 체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능력에 따른 불평등을 마주했을 때 그가 느끼는 감정은 부당함과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다. 사회적 소수자가 불평등을 경험했을 때 불평등한 구조가 능력주의에 따른 공정의 결과라는 외피를 쓸 때, 불평등에 노출된 소수자는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라고 믿게 된다. 믿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사회 구조로서 시험 서열주의에 대항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체념이라는 집단적 감정을 생산한다.
적응에 대하여
매일매일이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상, 즉 체념하는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적응은 체념을 유발하는 불평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상을 꾸려 가기 위한 생존 전략일 수 있다. 체념하는 이들이 정말로 불평등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을까? 저자는 “그것은 이들이 차별이나 불평등을 인지하고 진단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자신만의 미시적 삶을 구축하는 데, 즉 현재의 삶에 적응했기 때문이다”(본문 131쪽)라고 적는다.
능력주의가 약속했던 능력에 따른 공정한 분배가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음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능력주의, 혹은 저자 표현대로 “시험 서열주의”는 특히 여성에게는 악질적인 거짓말에 가깝다. 이 사회가 구조적 성차별과 능력주의 신화를 동시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에게 사회적 보상을 부여하되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저자는 노동 시장 이중 구조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한편으론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간 여성들이 ‘토큰’[ref] 본래 표시, 징표라는 뜻의 단어 ‘토큰’은 어떤 조직이 자신의 차별 행위와 불공평한 구조를 가리기 위해 아주 소수의 소수자를 집단에 포함시켜 이를 다양성/진보/공정의 상징처럼 활용하는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이 가운데 당사자는 소진되고, 소비되고, 대체된다. [/ref]으로 위치지어지고, 다른 한편으론 여성들이 감정 노동직, 돌봄 노동직, 재생산 노동직 등 저임금 직종에 집중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유리천장을 깨는 여성 성공 신화는 유리천장을 깨는 여성들에 대한 지속적인 토큰화를 조장하고, 다른 지위의 여성을 성공 신화 무대 뒤로 밀어낼 뿐이다. 동시에 채용 성비 평등 추구는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어 왔고, 국민은행, 하나은행, 서울메트로 등의 사례는 금융권과 공공 기관이 여성 지원자의 시험 점수를 낮추는 방식으로 성차별을 자행해 왔음을 폭로하기도 했다. 다른 심각한 문제는 여성 고용이 모두 저임금 직군에 몰리는 현상이다. 저임금 노동과 여성화된 노동은 분리되지 않는데, 여성이 주로 하는 노동이라 평가 절하되어 임금이 적게 측정되고, 임금이 적기 때문에 여성이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여성들은 능력주의에 더욱 의존한다. 성차별적 상황이 부당함은 알지만, 그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아주 적은 사회적 자원도 허용되지 않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체념적 상황이 여성들이 성차별에 적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분석한다. 만약 한 사람이 사회 지배적인 믿음 체계와 제도에 개인적으로 대항한다면, 그 사람은 더욱 불평등과 차별에 노출되어 평온한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삶이 위태로워지는 경험을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혐오에 대하여
체념, 적응과 더불어 구조적인 불평등이 만들어 내는 감정 규칙으로 저자는 소수자를 향한, 특히 소수자 간의 혐오에 주목한다. 불평등이 만연하고 그를 개선할 제도적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사회적 소수자는 자신들이 경험하는 불평등을 다른 사회적 소수자에게 투사하여 혐오하기도 한다. 이미 혐오는 이 시대의 정동이 되었다.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즘 담론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여성 폭력을 추동해 왔음을 밝혀 왔다.[ref] 나는 지금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재출간, 손희정의 《페미니즘 리부트》, 윤보라 등의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문화과학》 2018년 봄호 특집 ‘혐오 효과’, 시우의 《퀴어 아포칼립스》 정도를 떠올리고 있다. [/ref] 그와 함께 퀴어 혐오, 난민 혐오, 트랜스 혐오, 노인 혐오, 비백인 혐오 등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소수자 혐오 생산이 이 사회의 지배 구조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장치인지 밝혀 왔다. 저자 역시 혐오가 어떻게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는지 분석한다. 특히 최근 당을 불문하고 정치권 기득 세력 전반이 더욱 노골적으로 ‘성별 갈라치기’나 ‘동성애 반대’ 등을 통해 혐오를 조장하는 현상에 대한 분석이 날카롭다. 저자는 이를 “분할 지배 전략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본문 166쪽)라고 개념화한다. 분할 지배 전략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소수자 간 갈등으로 틀 짓고, 소수자의 이름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해 낸다. 어떤 소수자를 차별하는 범인이 다른 소수자인 양 느끼게 하면서 그 범인을 혐오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구의 삶도 더 나아지지 않는다. 다만 서로를 원망하고 혐오하게 될 뿐이다.
혐오 정치 비판은 곧잘 혐오하는 사람/혐오받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에 기반하곤 한다. 남성/여성, 이성애자/비이성애자, 시스젠더(비트랜스젠더)/트랜스젠더와 같은 이분법이다. 하지만 저자는 혐오 정치가 정체성에 기반한 동시에 정체성을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며, 혐오 정치는 전 사회적 지배 구조를 가리기 위해 특정 정체성과 특정 감정을 연결시키는 장치라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노인 혐오는 청장년층이 노년층을 향해 가지는 감정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이 노년기에 빈곤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공포와 불안이 특정한 계급의 노년층으로 투사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규칙에 따라 ‘노인’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그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은 ‘그런 노인’이 아니라고 안도하거나 강박하며 그 ‘노인’을 혐오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화장실 이슈를 다룰 때에도 그 저변의 감정 규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자 화장실에 만연한 여성 폭력 문제가 트랜스여성/비트랜스여성 간 갈등으로 축소되고 안전에 대한 여성의 욕망이 트랜스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이 책의 “분할 지배 전략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의 문제 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혐오하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판단하고 억제하려는 노력(이를테면, ‘그 여성의 감정은 트랜스배제적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비판)은 종종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 노력의 근간에 분할 지배 통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이야말로 소수자 혐오의 감정 규칙을 만들어 내는 주체라고 지목하며, 정치적 투쟁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이루어지기보다 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규칙에 대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 흐르는 감정 규칙과 화장실 문제
이 책은 한국에서 3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를 해 온 한 학자가 한국어로 한국 사회에 대해 쓴 책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특징은 한국의 사회과학 담론이 유럽/북미권 도서 번역 출판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상황에서 아주 큰 힘을 가진다. 저자가 독자와 아주 가까운 곳에 머물며 길어 올린 한국 사회 분석은 한국 사회 특유의 감정 규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문재인 정권하에서 2020년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일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불공정’한 처사라는 비난을 받은 일은 반-불평등 운동에 큰 충격을 줬다. 최근 대선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내세우며 당선된 윤석열 정부가 본격화한 성별 갈라치기는 이미 동시대 젠더 정치 지형의 최전선이 되었다. 불평등에 대항하는 어떠한 제도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각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자도생 담론은 사실 한국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결코 각자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체념과 우울 감정과 뒤섞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번역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을 열며 꺼낸 주제인 화장실로 돌아가 보자. 성중립 화장실 괴담은 주로 미국을 참조한다. 미국 사회는 약 50년 전에 차별금지법을 (부족하게나마) 실시했으며, 현재 트랜스젠더/퀴어 인권 담론이 제도 정치 속으로 들어와 법 개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국에 성중립 화장실이 늘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하는 데 참조할 수 있는 하나의 ‘미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공간 분리에 대한 미국의 감정 규칙과 한국의 감정 규칙은 다르다. 미국 사회의 성평등 화장실 운동은 반-인종주의 운동에 기반한 운동 정서와 연속선상에 있다. 미국 역사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 식당, 기차 등에서 공간을 분리하는 제도는 노예제 폐지 이후 노예제에 기반한 인종차별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 소위 분리-평등 원칙(‘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의 일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사회의 성별에 따른 공간 구분은 인종에 따른 공간 구분을 상기시키며 불편함, 부정의, 거부 등의 감정을 야기한다.
한국 사회는 전혀 다른 역사적 참조점과 감정 규칙을 갖고 있다. 공공 장소에서 만연한 여성 살해는 이 감정 규칙을 만드는 주요한 매개였다. 주지하듯 7년 전 강남역 8번 출구 인근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여성 표적 살인이 일어났다. 국가와 제도권 정치는 이 사안을 전 사회적 여성 혐오와 여성 폭력을 해결하는 계기로 삼기는커녕 ‘공용’ 화장실에 대한 공포를 확산했다. 이에 대해 여성운동, 퀴어운동, 장애운동 진영에선 여성 표적 범죄를 ‘남녀 공용 화장실’, ‘남녀 구분 실패’로 축소하는 담론이 전 사회적 여성 혐오를 은폐하는 기제임을 지적해 왔다.[ref] 이를테면, 박서연·루인(2016), “강남역 살인사건, 남녀 공용화장실이 문제라고?”, 〈비마이너〉. [/ref] 하지만 여성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조치는 남녀 분리 화장실 설치 의무 확대가 유일했다. 이러한 허접한 대응은 여성의 공포와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저자의 분석 틀을 빌리자면,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특정한 감정 규칙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여성들은 제도라는 것은 이미 언제나 불공정하며 그것을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개인적으로 안전을 도모해야 했고,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성별에 따른 장소 구분이라는 아주 가는 동아줄이라도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성중립 화장실을 주창하는 집단에 대해 자신의 공포를 투사하여 그 집단에 대한 적대와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중립 화장실 문제가 마치 퀴어/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집단과 여성 집단의 갈등처럼 느껴지는 상황은 “분할 지배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의 전형이라 볼 수도 있겠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화장실 문제를 여성 집단 대 퀴어 집단의 문제로 축소하는 담론은 어느 하나 맞는 구석이 없다. 우선 퀴어/트랜스/논바이너리 집단과 여성 집단이라는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다. 성중립 화장실이 설치된 나라에서 실시된 연구 일체가 성중립 화장실과 여성 혐오 폭력 간의 상관관계가 없음을 입증해 왔고, 성중립적 공간 배치가 여성 표적 폭력의 원인도 아니며 성별 분리가 여성 폭력의 해결책도 될 수 없다는 분석도 넘쳐난다. [ref] 이를테면 [박한희(2020), “모두를 위한 화장실, 화장실의 평등”, 《여성이론》, 42, 63~77쪽]를 참조하라. [/ref]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 불안, 공포의 감정은 전 사회를 떠돌고, 그 감정은 이미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공포, 혐오와 연결되었다. 사회적 감정은 한번 물길이 트이면 그 길을 다시 막기란 아주 어렵다. 그 감정이 옳은지 그른지, 합리적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그러한 논리, 도덕, 윤리와는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특정한 감정과 그 감정을 느끼는 집단에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 감정을 느끼게 한 감정 규칙을 규명하고, 그 감정 규칙이 불평등 구조와 어떤 관계인지 분석하고, 그 감정 규칙에 개입할 방안을 모색한다. 책에 있는 문장은 아니지만 나는 다음의 문장을 상상해 보길 제안한다. “여성들이 화장실과 관련해 느끼는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과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최 범죄 현장으로서 화장실에 대한 공포와 기본소득, 차별금지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그 상관관계를 숙고해 보길 제안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화장실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화장실에서 배제되는 일상에 적응하고 체념할 때, 그들이 느끼는 두 감정 중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더 정당한지, 그래서 어느 편에 힘을 실어야 하는지 판단하고 논의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 “두 감정”을 생산하는 구조를 분석하고, 어떻게 여성 혐오와 트랜스젠더 배제가 분할 통치 전략으로서 기능하며 사회 전반의 젠더 폭력을 은폐하는지 밝혀내고, 그 구조에 개입하기 위해 어떠한 물적 조건을 바꾸어 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가며
저자는 구조적 차별이 극심한 사회에서 개인이 그 차별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러한 상황이 사회적 소수자에게 만들어 내는 감정이 적응, 체념, 그리고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결코 그러한 감정이 잘못되거나 조작되거나 비합리적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그 감정을 느끼는 개인들이 교육이나 지식 습득 등을 통해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저자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구조적 차별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그 차별에 한 개인이 대항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들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희생자가 체념하고 현실에 맞춰 살게 된다.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손상이 너무 커지면 다른 소수자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마음마저 생길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영향을 주는 프레임 규칙과 감정 규칙의 큰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다”(본문 186쪽)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분석과 제언 아래에는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저자의 확고한 방법론이 흐른다. 나는 저자의 이러한 방법론이 체념과 혐오와 우울과 분노와 무력감으로 범벅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방법론임을 믿는다.
실제로 많은 사회운동의 목표가 이런 감정 규칙을 바꾸는 것이다. (……) 감정적 해방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지적인 해방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차별하는 구조 아래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이 더 이상 부차적인 현상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에 작동하는 프레임 규칙과 감정 규칙의 파악이 차별 극복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본문 20쪽
혐오와 체념이 넘쳐흘러도,
우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
김수영(수엉)
tarassom0@gmail.com
트랜스학 연구자, 미국 에머리 대학교 여성학과 박사 과정
들어가며
수많은 도시 괴담들이 있다. 이를테면, 차별금지법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괴담.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여자 화장실에 남자가 들어와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이야기한다면 누구도 그를 제지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 전용 공간은 속절없이 남성들에게 침범당할 것이고, 여자들은 그곳에서 지금보다 더 많이 다치고 죽을 것이다.’ 이러한 괴담은 화장실의 성별 분리를 추동한다. 하지만 화장실 등 성별 분리 공간이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음은 괴담이 아닌 실제다. 트랜스젠더는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느 화장실도 편히 갈 수 없다. 이는 트랜스젠더의 교육권, 노동권, 혹은 공공장소에 ‘출현할 권리’를 박탈한다.[ref] 주디스 버틀러는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창비, 2020)에서 낙인찍힌 신체들이 공공장소에 함께 출현하고 점유하여 새로운 도시 공간을 만들 가능성을 탐구하며 “출현할 권리”를 개념화했다. 연구모임POP는 이 “출현할 권리” 개념을 바탕으로 약물을 사용한 섹스를 하는 몸의 다양한 이야기가 이 사회의 보편적 인권과 퀴어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연구모임POP(Power of Pleasure)(2022), 〈캠섹스 : 캠섹스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참조하라. [/ref] 이런 구도에서는 트랜스젠더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안전할 권리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폭력을 무서워하고 안전하고 싶어 하는 여성의 감정이 곧바로 트랜스 혐오로 해석되어도 괜찮을까? 이는 결국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또 다른 괴담의 변주일까? 여성으로서 감각하는 정의와 자유에 대한 감정이 트랜스젠더로서 감각하는 정의와 자유에 대한 감정과 대치하는 듯 여겨질 때, 우리는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 혹은 왜 사람들은 부당한 상황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고 다른 감정, 이를테면 순응이나 질투를 할까? 왜 사람들의 분노는 종종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향할까? 불평등과 차별을 분석하고 그에 개입하는 작업에서 감정이 왜 중요할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노동, 여성, 노동자-사용자 관계, 여성 노동자로서의 위치 등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해 온 저자 이주희가 구조화된 차별과 불평등이 차별받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주조하는지 탐구하고, 나아가 그 마음에 어떻게 개입할지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외면하고 싶었던 장면들이 빼곡하며, 그에 대한 성실한 분석이 흘러넘친다. 저자는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 중에서도 체념, 적응, 혐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감정 규칙’을 차근차근 분석해 나간다. 이 서평에서 나는 총 3부로 이루어진 목차 중 2부를 중심으로 이 책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이해해 보고, 이 책 저변에 흐르는 저자의 분석 틀과 관점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동시에 트랜스학 연구자로서 저자의 분석 틀이 성중립 화장실을 둘러싸고 동시대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는 다양한 감정에 대한 분석에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체념에 대하여
차별이 생산하는 불평등, 불평등이 생산하는 차별에 노출된 사회적 소수자는 다양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을 받았을 때 자연스러운 감정 반응이 분노라면, 그리고 분노가 반차별 행동의 자원이라면, 어째서 차별을 생산하는 구조는 약화되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질까?
저자는 구조적 차별을 가리는 장막, 그럼으로써 분노에 기반한 사회 변화를 억제하는 장치로 능력주의를 꼽는다. 사회적 소수자가 받는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능력주의에 따른 공정이기에 그에 대한 분노는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학벌주의와 사회적 지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공정한 시험을 통해 청소년의 능력,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의 인간됨을 등급 매기고, 그에 따라 사회적 기회와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는 현재 한국 사회가 상상하는 가장 공정한 제도이다. 이에 따르면 학력과 학벌에 따라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미래의 어떤 가능성이 정해지는 상황은 공정하다. 자원, 지위, 복지, 삶의 윤택함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입시 부정이 공정함을 해치는 행위이듯 능력주의를 타파하려는 사회사상과 사회운동 역시 불공정을 부추기는 반-사회 행위이며 차별 행위라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입시 부정에 분노하듯 능력주의에 기반하지 않는 사회적 자원과 지위의 분배에 분노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능력주의(는) 사실 능력주의라기보다 시험 서열주의”(본문 101쪽)라고 분석한다. 평등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능력주의 담론은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된 자원에 기반해 구조화된 시험 서열주의에 따라 공정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를 생산할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스튜어트 화이트의 “운 불평등” 분석에 기대어 제시하는 급진적 질문을 살펴보자. 책이 든 예시를 조금 변주해, 당신이 문서를 복사하는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주어진 복사기는 분당 40장을 복사할 수 있는 복사기다. 당신 옆 동료는 분당 10장을 복사할 수 있는 복사기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둘 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일을 했을 때, 당신이 옆 사람보다 4배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공정한가? 만일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면, 당신의 능력이 타인의 능력보다 높다고 임금을 더 받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능력은 그 사람이 우연히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다르게 체화한 경제 자본, 사회 자본, 문화 자본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의 능력은 우연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에 따른 임금 격차를 자연화하는 능력주의, 더 정확히 말해 시험 서열주의는 기존 특권층을 더 특권화하고 불평등을 심화할 뿐이다.
문제는 능력주의, 시험 서열주의, 능력에 따른 임금 격차와 그에 따른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이 이 사회의 지배적인 신념 체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능력에 따른 불평등을 마주했을 때 그가 느끼는 감정은 부당함과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다. 사회적 소수자가 불평등을 경험했을 때 불평등한 구조가 능력주의에 따른 공정의 결과라는 외피를 쓸 때, 불평등에 노출된 소수자는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라고 믿게 된다. 믿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사회 구조로서 시험 서열주의에 대항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체념이라는 집단적 감정을 생산한다.
적응에 대하여
매일매일이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상, 즉 체념하는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적응은 체념을 유발하는 불평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상을 꾸려 가기 위한 생존 전략일 수 있다. 체념하는 이들이 정말로 불평등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을까? 저자는 “그것은 이들이 차별이나 불평등을 인지하고 진단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자신만의 미시적 삶을 구축하는 데, 즉 현재의 삶에 적응했기 때문이다”(본문 131쪽)라고 적는다.
능력주의가 약속했던 능력에 따른 공정한 분배가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음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능력주의, 혹은 저자 표현대로 “시험 서열주의”는 특히 여성에게는 악질적인 거짓말에 가깝다. 이 사회가 구조적 성차별과 능력주의 신화를 동시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에게 사회적 보상을 부여하되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저자는 노동 시장 이중 구조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한편으론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간 여성들이 ‘토큰’[ref] 본래 표시, 징표라는 뜻의 단어 ‘토큰’은 어떤 조직이 자신의 차별 행위와 불공평한 구조를 가리기 위해 아주 소수의 소수자를 집단에 포함시켜 이를 다양성/진보/공정의 상징처럼 활용하는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이 가운데 당사자는 소진되고, 소비되고, 대체된다. [/ref]으로 위치지어지고, 다른 한편으론 여성들이 감정 노동직, 돌봄 노동직, 재생산 노동직 등 저임금 직종에 집중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유리천장을 깨는 여성 성공 신화는 유리천장을 깨는 여성들에 대한 지속적인 토큰화를 조장하고, 다른 지위의 여성을 성공 신화 무대 뒤로 밀어낼 뿐이다. 동시에 채용 성비 평등 추구는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어 왔고, 국민은행, 하나은행, 서울메트로 등의 사례는 금융권과 공공 기관이 여성 지원자의 시험 점수를 낮추는 방식으로 성차별을 자행해 왔음을 폭로하기도 했다. 다른 심각한 문제는 여성 고용이 모두 저임금 직군에 몰리는 현상이다. 저임금 노동과 여성화된 노동은 분리되지 않는데, 여성이 주로 하는 노동이라 평가 절하되어 임금이 적게 측정되고, 임금이 적기 때문에 여성이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여성들은 능력주의에 더욱 의존한다. 성차별적 상황이 부당함은 알지만, 그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아주 적은 사회적 자원도 허용되지 않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체념적 상황이 여성들이 성차별에 적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분석한다. 만약 한 사람이 사회 지배적인 믿음 체계와 제도에 개인적으로 대항한다면, 그 사람은 더욱 불평등과 차별에 노출되어 평온한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삶이 위태로워지는 경험을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혐오에 대하여
체념, 적응과 더불어 구조적인 불평등이 만들어 내는 감정 규칙으로 저자는 소수자를 향한, 특히 소수자 간의 혐오에 주목한다. 불평등이 만연하고 그를 개선할 제도적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사회적 소수자는 자신들이 경험하는 불평등을 다른 사회적 소수자에게 투사하여 혐오하기도 한다. 이미 혐오는 이 시대의 정동이 되었다.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즘 담론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여성 폭력을 추동해 왔음을 밝혀 왔다.[ref] 나는 지금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재출간, 손희정의 《페미니즘 리부트》, 윤보라 등의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문화과학》 2018년 봄호 특집 ‘혐오 효과’, 시우의 《퀴어 아포칼립스》 정도를 떠올리고 있다. [/ref] 그와 함께 퀴어 혐오, 난민 혐오, 트랜스 혐오, 노인 혐오, 비백인 혐오 등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소수자 혐오 생산이 이 사회의 지배 구조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장치인지 밝혀 왔다. 저자 역시 혐오가 어떻게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는지 분석한다. 특히 최근 당을 불문하고 정치권 기득 세력 전반이 더욱 노골적으로 ‘성별 갈라치기’나 ‘동성애 반대’ 등을 통해 혐오를 조장하는 현상에 대한 분석이 날카롭다. 저자는 이를 “분할 지배 전략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본문 166쪽)라고 개념화한다. 분할 지배 전략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소수자 간 갈등으로 틀 짓고, 소수자의 이름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해 낸다. 어떤 소수자를 차별하는 범인이 다른 소수자인 양 느끼게 하면서 그 범인을 혐오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구의 삶도 더 나아지지 않는다. 다만 서로를 원망하고 혐오하게 될 뿐이다.
혐오 정치 비판은 곧잘 혐오하는 사람/혐오받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에 기반하곤 한다. 남성/여성, 이성애자/비이성애자, 시스젠더(비트랜스젠더)/트랜스젠더와 같은 이분법이다. 하지만 저자는 혐오 정치가 정체성에 기반한 동시에 정체성을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며, 혐오 정치는 전 사회적 지배 구조를 가리기 위해 특정 정체성과 특정 감정을 연결시키는 장치라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노인 혐오는 청장년층이 노년층을 향해 가지는 감정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이 노년기에 빈곤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공포와 불안이 특정한 계급의 노년층으로 투사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규칙에 따라 ‘노인’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그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은 ‘그런 노인’이 아니라고 안도하거나 강박하며 그 ‘노인’을 혐오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화장실 이슈를 다룰 때에도 그 저변의 감정 규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자 화장실에 만연한 여성 폭력 문제가 트랜스여성/비트랜스여성 간 갈등으로 축소되고 안전에 대한 여성의 욕망이 트랜스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이 책의 “분할 지배 전략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의 문제 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혐오하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판단하고 억제하려는 노력(이를테면, ‘그 여성의 감정은 트랜스배제적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비판)은 종종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 노력의 근간에 분할 지배 통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이야말로 소수자 혐오의 감정 규칙을 만들어 내는 주체라고 지목하며, 정치적 투쟁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이루어지기보다 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규칙에 대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 흐르는 감정 규칙과 화장실 문제
이 책은 한국에서 3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를 해 온 한 학자가 한국어로 한국 사회에 대해 쓴 책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특징은 한국의 사회과학 담론이 유럽/북미권 도서 번역 출판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상황에서 아주 큰 힘을 가진다. 저자가 독자와 아주 가까운 곳에 머물며 길어 올린 한국 사회 분석은 한국 사회 특유의 감정 규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문재인 정권하에서 2020년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일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불공정’한 처사라는 비난을 받은 일은 반-불평등 운동에 큰 충격을 줬다. 최근 대선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내세우며 당선된 윤석열 정부가 본격화한 성별 갈라치기는 이미 동시대 젠더 정치 지형의 최전선이 되었다. 불평등에 대항하는 어떠한 제도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각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자도생 담론은 사실 한국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결코 각자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체념과 우울 감정과 뒤섞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번역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을 열며 꺼낸 주제인 화장실로 돌아가 보자. 성중립 화장실 괴담은 주로 미국을 참조한다. 미국 사회는 약 50년 전에 차별금지법을 (부족하게나마) 실시했으며, 현재 트랜스젠더/퀴어 인권 담론이 제도 정치 속으로 들어와 법 개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국에 성중립 화장실이 늘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하는 데 참조할 수 있는 하나의 ‘미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공간 분리에 대한 미국의 감정 규칙과 한국의 감정 규칙은 다르다. 미국 사회의 성평등 화장실 운동은 반-인종주의 운동에 기반한 운동 정서와 연속선상에 있다. 미국 역사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 식당, 기차 등에서 공간을 분리하는 제도는 노예제 폐지 이후 노예제에 기반한 인종차별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 소위 분리-평등 원칙(‘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의 일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사회의 성별에 따른 공간 구분은 인종에 따른 공간 구분을 상기시키며 불편함, 부정의, 거부 등의 감정을 야기한다.
한국 사회는 전혀 다른 역사적 참조점과 감정 규칙을 갖고 있다. 공공 장소에서 만연한 여성 살해는 이 감정 규칙을 만드는 주요한 매개였다. 주지하듯 7년 전 강남역 8번 출구 인근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여성 표적 살인이 일어났다. 국가와 제도권 정치는 이 사안을 전 사회적 여성 혐오와 여성 폭력을 해결하는 계기로 삼기는커녕 ‘공용’ 화장실에 대한 공포를 확산했다. 이에 대해 여성운동, 퀴어운동, 장애운동 진영에선 여성 표적 범죄를 ‘남녀 공용 화장실’, ‘남녀 구분 실패’로 축소하는 담론이 전 사회적 여성 혐오를 은폐하는 기제임을 지적해 왔다.[ref] 이를테면, 박서연·루인(2016), “강남역 살인사건, 남녀 공용화장실이 문제라고?”, 〈비마이너〉. [/ref] 하지만 여성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조치는 남녀 분리 화장실 설치 의무 확대가 유일했다. 이러한 허접한 대응은 여성의 공포와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저자의 분석 틀을 빌리자면,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특정한 감정 규칙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여성들은 제도라는 것은 이미 언제나 불공정하며 그것을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개인적으로 안전을 도모해야 했고,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성별에 따른 장소 구분이라는 아주 가는 동아줄이라도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성중립 화장실을 주창하는 집단에 대해 자신의 공포를 투사하여 그 집단에 대한 적대와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중립 화장실 문제가 마치 퀴어/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집단과 여성 집단의 갈등처럼 느껴지는 상황은 “분할 지배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의 전형이라 볼 수도 있겠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화장실 문제를 여성 집단 대 퀴어 집단의 문제로 축소하는 담론은 어느 하나 맞는 구석이 없다. 우선 퀴어/트랜스/논바이너리 집단과 여성 집단이라는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다. 성중립 화장실이 설치된 나라에서 실시된 연구 일체가 성중립 화장실과 여성 혐오 폭력 간의 상관관계가 없음을 입증해 왔고, 성중립적 공간 배치가 여성 표적 폭력의 원인도 아니며 성별 분리가 여성 폭력의 해결책도 될 수 없다는 분석도 넘쳐난다. [ref] 이를테면 [박한희(2020), “모두를 위한 화장실, 화장실의 평등”, 《여성이론》, 42, 63~77쪽]를 참조하라. [/ref]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 불안, 공포의 감정은 전 사회를 떠돌고, 그 감정은 이미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공포, 혐오와 연결되었다. 사회적 감정은 한번 물길이 트이면 그 길을 다시 막기란 아주 어렵다. 그 감정이 옳은지 그른지, 합리적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그러한 논리, 도덕, 윤리와는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특정한 감정과 그 감정을 느끼는 집단에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 감정을 느끼게 한 감정 규칙을 규명하고, 그 감정 규칙이 불평등 구조와 어떤 관계인지 분석하고, 그 감정 규칙에 개입할 방안을 모색한다. 책에 있는 문장은 아니지만 나는 다음의 문장을 상상해 보길 제안한다. “여성들이 화장실과 관련해 느끼는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과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최 범죄 현장으로서 화장실에 대한 공포와 기본소득, 차별금지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그 상관관계를 숙고해 보길 제안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화장실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화장실에서 배제되는 일상에 적응하고 체념할 때, 그들이 느끼는 두 감정 중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더 정당한지, 그래서 어느 편에 힘을 실어야 하는지 판단하고 논의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 “두 감정”을 생산하는 구조를 분석하고, 어떻게 여성 혐오와 트랜스젠더 배제가 분할 통치 전략으로서 기능하며 사회 전반의 젠더 폭력을 은폐하는지 밝혀내고, 그 구조에 개입하기 위해 어떠한 물적 조건을 바꾸어 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가며
저자는 구조적 차별이 극심한 사회에서 개인이 그 차별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러한 상황이 사회적 소수자에게 만들어 내는 감정이 적응, 체념, 그리고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결코 그러한 감정이 잘못되거나 조작되거나 비합리적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그 감정을 느끼는 개인들이 교육이나 지식 습득 등을 통해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저자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구조적 차별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그 차별에 한 개인이 대항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들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희생자가 체념하고 현실에 맞춰 살게 된다.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손상이 너무 커지면 다른 소수자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마음마저 생길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영향을 주는 프레임 규칙과 감정 규칙의 큰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다”(본문 186쪽)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분석과 제언 아래에는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저자의 확고한 방법론이 흐른다. 나는 저자의 이러한 방법론이 체념과 혐오와 우울과 분노와 무력감으로 범벅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방법론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