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이야기
(오늘의 교육 2023 7·8월호, 75호)
김혜진(중등 교사,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그간 웹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읽거나 행사에 참여하는 식으로 교육공동체 벗을 만나 오다가 지난 7월에 조합원이 되면서 《오늘의 교육》을 받아 보게 되었다. 벌써 75호라니……. 한 호 안에도 제대로 읽고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은 글들이 많은데 쌓인 것들을 죄다 읽는다면 아마 어떤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그저 스낵처럼 각종 글과 영상을 가볍게 깨작거리고 마는 나에게 《오늘의 교육》은 정크푸드로 망가진 정신과 육체를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이제 막 들판에서 바로 따 온 살아 있는 약초들 같다. 최근 들어 대학원 과제로 인해 읽게 된 논문들도 여럿 있지만 《오늘의 교육》은 때로는 이보다 더 통렬하고, 이보다 더 생생하며, 이보다 더 심오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마주하게 하고, 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을 던져 주며 나를 확장시킨다.
바라건대 이것이 개인의 내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 8월에 열린 《별별 교사들》 북 토크처럼 매 호마다 격월로 ‘글 토크’가 열리면 어떨까? 글쓴이들을 중심으로 분임을 만들고, 참여자들은 희망하는 두세 분임에 참여해 글에서 못다 한 이야기도 듣고, 궁금한 것도 묻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나눈다면, 글이 글로 끝나지 않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더 확장된 나눔과 네트워킹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번 호는 교사라면 응당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별 물음을 던지지 않았던 ‘교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교사이지만 (그리고 교사가 아니어도) 교권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만으로 새로운 도전이고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교권과 관련된 다양한 말과 글이 쏟아지는 요즘, 나는 그 의견들이 모두 각자의 경험과 상황에서 다 맞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경험과 상황을 우리는 감히 알 수 없고, 그것은 각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 함부로 폄하할 수도 없지 않나. 그런데 그 말과 글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면, 그것은 마치 평균의 함정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며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각자가 내는 목소리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냥의 글 〈교권, 근대적 교사론과 폭력적 교권 담론을 넘어〉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칠 수 있는, 생각지도 못한, 그냥 넘기고 말았던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게 해 준 글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공교육 체계 안이지만 자율적인 교육 행위를 요구받기 때문에 그 개별적 행위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권리가 교사에게 부여되는 것이다.(본문 22쪽)
읽으면서 나는 ‘교사들의 자율적인 교육 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금쪽이’들의 행태와 ‘진상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방해’는 우리나라의 공교육 판 자체라는 것을 슬프게도 다시 깨달았다.
글 중 ‘인권과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이해’ 단락을 읽으면서는 무심코, 습관적으로 “교권, 교권” 했던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인권과 권리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배웠다. 특히 “공급자와 수혜자가 존재하는 행위에서 권리를 호명할 때 그것은 공급자의 권리일 수 없다”(본문 27쪽)에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내가 생각한 ‘수업할 권리’, ‘교육할 권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편으로는 과연 교사들은 공급자가 맞는 것인지, 학생들은 수요자 혹은 수혜자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교사들을 공급자로 본다면 분명히 교사들만이 ‘유일한 공급자’는 아닐 것이며, 특히 공교육 교사들은 ‘공급’이 ‘보장’된 공급자이지 않을까? 그래서 일부 ‘팔자 좋은’ 공급자이기를 원하는 교사들은 본인이 공급하는 것의 퀄리티를 굳이, 딱히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반면 ‘유일한 공급자’가 아니기에 사교육으로부터든, 공교육 내에서든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키든지, 누군가를 모방하든지 계속 쳇바퀴를 굴려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은 아닐까 싶다. 학생들의 경우도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학교 다니기’를 통해 그 학교의 각본대로 본인의 삶을 욱여넣어야 하는 이상 진정한 수요자, 수혜자라고 볼 수 있을까 싶다. 고등학교의 경우, 과목 선택권조차 결국에는 대입에 유리하게 선택한다든지, 해당 학교의 교사 수급 등에 의해 강제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든지 하는 게 현실이다.
문득 나는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공교육에서,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 무엇을 ‘공급’하려 해 왔는가,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가, 이렇게 ‘공급’하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영의 〈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는 ‘교사가 처한 문제가 개인 대 개인의 문제이기만 할까? 구조의 문제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던져 주었다.
교사가 자유롭게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권한이 관리자나 학교에 의해 제재되는 것이 교사의 수업권 침해임에도 이는 ‘교권 침해’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주요하게 교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학생이나 학부모로 여겨지기 때문이다.(본문 39~40쪽)
정말 그렇다. 몇몇 학생들, 학부모와의 파국적인 경험은 교권 침해라고 인지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의 교직 일상에 갈등과 번민을 조장하는 ‘짜인 판’은 당사자조차 인지하기 어렵다.
학교의 상황이든 교사의 상황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이 학교 밖 기관의 편의대로 기한을 정해 놓고는 그때까지 무조건 보고하라, 제출하라는 식의 공문들, ‘국가의 뜻이 이러하니 시대는 이렇게 변하고 있으니 앞으로 이렇게 수업하시오, 이렇게 평가하시오’ 하고 끝도 없이 던져지는 암암리의 오더들……. 기껏 용기 내어 나다운 수업과 평가를 했다가는 민원으로 두들겨 맞는 현실……. ‘공동 출제, 공동 평가’를 위해 교사들 간 교육관이 달라도 억지로 맞춰야만 하는 진도와 수업 방식과 수행 평가와 수업 자료들과 각종 안내 및 설명의 워딩들, 그로 인한 교사들의 스트레스와 신경전……. 일제히 내려오는 정책을 열정 페이 ‘선도’ 교사들을 따라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각자도생의 삶들……. 도떼기시장 같은 산만한 교무실 속에 교사들을 욱여넣고, 누가 얼마나 일하는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구조……. 우리끼리의 폭탄 돌리기에 불과한 업무 분장……. 교재 연구와 독서는 사치이자 ‘할 일 없다, 한가하다’라는 한심한 선언으로 여겨지고 마는 업무 중심의 학교……. 이렇게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인식되지 못하는 수많은 구조들이 진짜 ‘교권 침해’의 주범인지도 모른다.
이윤승의 〈‘참교육 전교조’의 운동성을 어디를 향하는가〉는 본인이 속한 조직 속에서 그 조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안목이 그 조직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조직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안목이 나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 주지 않을까?
학생을 문제 집단으로 상정하고 훈계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학생도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입증받으려 했던 시도에 대한 부정이다.(본문 54쪽)
당연히 학생 자체를 문제 집단으로 상정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학생의 행동을 문제 행동으로 발견하는 것, 그래서 알려 주는 것, 그리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교사가 책임감을 가질수록, 무관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 학생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다 자란 성인도 부족한 점, 잘못한 점, 서툰 점이 있는데(많은데) 학생들도 당연히 그럴 수 있음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면서도 잘못된 길이라면 돌이킬 수 있도록,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학생들에게 교사들이 좋은 어른이 되어 줄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을까?
김찬의 〈잠자는 교실은 왜 만들어지는가〉는 교사라면 제목부터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글이었고,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학교 규칙을 지적한 부분을 읽다가 문득 우리 학교의 생활 규정이 궁금했다. ‘염색은 진한 갈색 정도만’, ‘치마 길이나 폭을 변형하지 않기’, ‘귀걸이나 피어싱 자제’, ‘손톱은 너무 길지 않게’, ‘화장은 너무 진하지 않게’, ‘슬리퍼 신고 등교하지 않기’ 등. 이 규정들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교육적인 것인지, 민주적인 것인지 통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마다 학생생활지도부 등이 있어서 누군가는 ‘사명감’을 느끼며 규정을 기준으로 학생들에게 벌점을 부여하느라 애쓰고, 식사 시간조차 조용히 하라고 ‘급식 지도’를 해야 하는데, 참 이해가 안 간다.
“진정 교사들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교육운동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본문 65쪽)는 문장 자체로도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이참에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다 들추어졌으면 좋겠다.
학부모 대 교사, 학생 대 교사의 구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사 대 교사, 관리자 대 교사, 교육 당국 대 교사는 어떠한지를 직시했으면 좋겠다. 수업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무실에서 보내는 교사들에게 교사 간 대립, 갈등, 반목, 무관심, 분열 등으로 인한 고립, 상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를 인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계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우리끼리는 괜찮잖아?’, ‘적은 저쪽이잖아?’ 하고 세뇌당하는 것은 아닌지……. 예전에 교권보호위원회의 교사 명단을 보고 ‘내가 과연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이분들한테 내 심정을 토로할 수 있을까? 이분들이 내 심정을 헤아려 줄 수 있을까?’ 의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교사들이 마냥 피해자이기만 한지도 스스로에게 물었으면 한다. 누가 정해 놓은지도 모르는 관습을 그냥 따르는 것. 부당한 것을 알고도 그냥 넘기는 것. 누군가의 어려움을 보았지만(들었지만) 그냥 거기서 끝내 버리는 것. 인간으로서 상호존중을 하기보다는 ‘관리자의 권리 vs 교사의 권리’, ‘교사의 권리 vs 학생의 권리’ 하며 차등을 두는 것. 교무실이 힘드냐, 행정실이 힘드냐, 네가 힘드냐, 내가 힘드냐 하며 각자의 힘듦을 겨루는 것.
학교 전반과 교직 문화 전반에 스며든 우리의 무수한 모른 척, 무관심, 무정함이 사실은 우리가 서로에게 겨누는 총구인지도 모른다. ‘원래 학교는 그런 거지, 원래 교사는 그래야지’라며 순응했거나 누군가를 종용했다면 우리가 ‘교권 침해’를 방조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정상적인 판에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을 부적응자 혹은 무능한 자로 폄하했다면 우리가 ‘교권 침해’를 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공현의 〈교육의 목표는 학력 보장이 아니어야 한다〉는 기초학력 업무 담당자로서 이 정도의 고민과 문제의식 없이 공문대로, 장학사 요청대로, 해야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아니 그 정도도 못 하고 있는 나 자신에 ‘현타’가 오는 글이었다. 송민순의 〈줄 위의 교육과 기초학력〉을 읽으면서는 우리 사회의 ‘헛똑똑이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학교 공부는 잘했고, 그래서 번듯한 대학은 나왔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성숙한 시민으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기에서 한탄스러운 질문이 또 생긴다. 이 나라 공교육의 목표는 소수의 ‘모범생’을 양산하는 것일까, 대다수의 ‘시민’을 양산하는 것일까? 이 나라에서 학력은, 공부는 무엇이길래 ‘헛똑똑이’를 ‘똑똑이’로 착각하게 만들고,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패배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최현진의 《별별 교사들》 리뷰인 〈그럼에도 학교로 돌아온 별난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글쓴이에게 동료애를 느끼게 한 글이었다. 교무실에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같은 말을 많이 듣는다는 대목을 읽는데 웃음이 나와 버렸다. 나만 들어 본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가 중학생 시절에 만난, ‘자신은 폭력의 방식으로 배웠지만, 폭력의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려 애쓴 선생님’처럼 나도 비록 좋은 것만 보고 배우진 못했지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냉랭한 학교에 홀로 자신만의 답을 써야만 한다.”(본문 257쪽) 여기에 동의하고, 나 역시 그러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스스로도 장담하지 못하겠어서 때때로 서글퍼지기도 한다.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부디, 적어도 학교라는 곳에서는 교사들이나 학생들이나 자신만의 답을 쓰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기를, 그리 큰 결심을 해야 하는 비장한 것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렇게 나의 첫 ‘읽은 이야기’를 써 보았다. 나만의 답을 작성한 기분이어서 떨리지만 한편으로는 보람차다. 수학 문제를 풀 때 해설지를 보지 않고 풀어 나갔듯이 지난 호 ‘읽은 이야기’들을 일부러 읽지 않고 내 방식으로 써 내려 가 보았다. 덕분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힘들어하며, 무엇을 바라는지 더욱 명확해졌다. 이 글은 나만의 답이었고, 독자분들 역시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함께 모여 각자의 답을 공개하고 함께 나누면 좋겠다.
읽은 이야기
(오늘의 교육 2023 7·8월호, 75호)
김혜진(중등 교사,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그간 웹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읽거나 행사에 참여하는 식으로 교육공동체 벗을 만나 오다가 지난 7월에 조합원이 되면서 《오늘의 교육》을 받아 보게 되었다. 벌써 75호라니……. 한 호 안에도 제대로 읽고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은 글들이 많은데 쌓인 것들을 죄다 읽는다면 아마 어떤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그저 스낵처럼 각종 글과 영상을 가볍게 깨작거리고 마는 나에게 《오늘의 교육》은 정크푸드로 망가진 정신과 육체를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이제 막 들판에서 바로 따 온 살아 있는 약초들 같다. 최근 들어 대학원 과제로 인해 읽게 된 논문들도 여럿 있지만 《오늘의 교육》은 때로는 이보다 더 통렬하고, 이보다 더 생생하며, 이보다 더 심오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마주하게 하고, 보다 더 근본적인 고민을 던져 주며 나를 확장시킨다.
바라건대 이것이 개인의 내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 8월에 열린 《별별 교사들》 북 토크처럼 매 호마다 격월로 ‘글 토크’가 열리면 어떨까? 글쓴이들을 중심으로 분임을 만들고, 참여자들은 희망하는 두세 분임에 참여해 글에서 못다 한 이야기도 듣고, 궁금한 것도 묻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나눈다면, 글이 글로 끝나지 않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더 확장된 나눔과 네트워킹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번 호는 교사라면 응당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별 물음을 던지지 않았던 ‘교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교사이지만 (그리고 교사가 아니어도) 교권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만으로 새로운 도전이고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교권과 관련된 다양한 말과 글이 쏟아지는 요즘, 나는 그 의견들이 모두 각자의 경험과 상황에서 다 맞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경험과 상황을 우리는 감히 알 수 없고, 그것은 각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 함부로 폄하할 수도 없지 않나. 그런데 그 말과 글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면, 그것은 마치 평균의 함정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며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각자가 내는 목소리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냥의 글 〈교권, 근대적 교사론과 폭력적 교권 담론을 넘어〉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칠 수 있는, 생각지도 못한, 그냥 넘기고 말았던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게 해 준 글이다.
읽으면서 나는 ‘교사들의 자율적인 교육 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금쪽이’들의 행태와 ‘진상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방해’는 우리나라의 공교육 판 자체라는 것을 슬프게도 다시 깨달았다.
글 중 ‘인권과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이해’ 단락을 읽으면서는 무심코, 습관적으로 “교권, 교권” 했던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인권과 권리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배웠다. 특히 “공급자와 수혜자가 존재하는 행위에서 권리를 호명할 때 그것은 공급자의 권리일 수 없다”(본문 27쪽)에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내가 생각한 ‘수업할 권리’, ‘교육할 권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편으로는 과연 교사들은 공급자가 맞는 것인지, 학생들은 수요자 혹은 수혜자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교사들을 공급자로 본다면 분명히 교사들만이 ‘유일한 공급자’는 아닐 것이며, 특히 공교육 교사들은 ‘공급’이 ‘보장’된 공급자이지 않을까? 그래서 일부 ‘팔자 좋은’ 공급자이기를 원하는 교사들은 본인이 공급하는 것의 퀄리티를 굳이, 딱히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반면 ‘유일한 공급자’가 아니기에 사교육으로부터든, 공교육 내에서든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키든지, 누군가를 모방하든지 계속 쳇바퀴를 굴려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은 아닐까 싶다. 학생들의 경우도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학교 다니기’를 통해 그 학교의 각본대로 본인의 삶을 욱여넣어야 하는 이상 진정한 수요자, 수혜자라고 볼 수 있을까 싶다. 고등학교의 경우, 과목 선택권조차 결국에는 대입에 유리하게 선택한다든지, 해당 학교의 교사 수급 등에 의해 강제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든지 하는 게 현실이다.
문득 나는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공교육에서,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 무엇을 ‘공급’하려 해 왔는가,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가, 이렇게 ‘공급’하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영의 〈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는 ‘교사가 처한 문제가 개인 대 개인의 문제이기만 할까? 구조의 문제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던져 주었다.
정말 그렇다. 몇몇 학생들, 학부모와의 파국적인 경험은 교권 침해라고 인지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의 교직 일상에 갈등과 번민을 조장하는 ‘짜인 판’은 당사자조차 인지하기 어렵다.
학교의 상황이든 교사의 상황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이 학교 밖 기관의 편의대로 기한을 정해 놓고는 그때까지 무조건 보고하라, 제출하라는 식의 공문들, ‘국가의 뜻이 이러하니 시대는 이렇게 변하고 있으니 앞으로 이렇게 수업하시오, 이렇게 평가하시오’ 하고 끝도 없이 던져지는 암암리의 오더들……. 기껏 용기 내어 나다운 수업과 평가를 했다가는 민원으로 두들겨 맞는 현실……. ‘공동 출제, 공동 평가’를 위해 교사들 간 교육관이 달라도 억지로 맞춰야만 하는 진도와 수업 방식과 수행 평가와 수업 자료들과 각종 안내 및 설명의 워딩들, 그로 인한 교사들의 스트레스와 신경전……. 일제히 내려오는 정책을 열정 페이 ‘선도’ 교사들을 따라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각자도생의 삶들……. 도떼기시장 같은 산만한 교무실 속에 교사들을 욱여넣고, 누가 얼마나 일하는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구조……. 우리끼리의 폭탄 돌리기에 불과한 업무 분장……. 교재 연구와 독서는 사치이자 ‘할 일 없다, 한가하다’라는 한심한 선언으로 여겨지고 마는 업무 중심의 학교……. 이렇게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인식되지 못하는 수많은 구조들이 진짜 ‘교권 침해’의 주범인지도 모른다.
이윤승의 〈‘참교육 전교조’의 운동성을 어디를 향하는가〉는 본인이 속한 조직 속에서 그 조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안목이 그 조직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조직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안목이 나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 주지 않을까?
당연히 학생 자체를 문제 집단으로 상정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학생의 행동을 문제 행동으로 발견하는 것, 그래서 알려 주는 것, 그리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교사가 책임감을 가질수록, 무관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 학생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다 자란 성인도 부족한 점, 잘못한 점, 서툰 점이 있는데(많은데) 학생들도 당연히 그럴 수 있음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면서도 잘못된 길이라면 돌이킬 수 있도록,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학생들에게 교사들이 좋은 어른이 되어 줄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을까?
김찬의 〈잠자는 교실은 왜 만들어지는가〉는 교사라면 제목부터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글이었고,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학교 규칙을 지적한 부분을 읽다가 문득 우리 학교의 생활 규정이 궁금했다. ‘염색은 진한 갈색 정도만’, ‘치마 길이나 폭을 변형하지 않기’, ‘귀걸이나 피어싱 자제’, ‘손톱은 너무 길지 않게’, ‘화장은 너무 진하지 않게’, ‘슬리퍼 신고 등교하지 않기’ 등. 이 규정들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교육적인 것인지, 민주적인 것인지 통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마다 학생생활지도부 등이 있어서 누군가는 ‘사명감’을 느끼며 규정을 기준으로 학생들에게 벌점을 부여하느라 애쓰고, 식사 시간조차 조용히 하라고 ‘급식 지도’를 해야 하는데, 참 이해가 안 간다.
“진정 교사들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교육운동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본문 65쪽)는 문장 자체로도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이참에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다 들추어졌으면 좋겠다.
학부모 대 교사, 학생 대 교사의 구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사 대 교사, 관리자 대 교사, 교육 당국 대 교사는 어떠한지를 직시했으면 좋겠다. 수업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무실에서 보내는 교사들에게 교사 간 대립, 갈등, 반목, 무관심, 분열 등으로 인한 고립, 상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를 인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계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우리끼리는 괜찮잖아?’, ‘적은 저쪽이잖아?’ 하고 세뇌당하는 것은 아닌지……. 예전에 교권보호위원회의 교사 명단을 보고 ‘내가 과연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이분들한테 내 심정을 토로할 수 있을까? 이분들이 내 심정을 헤아려 줄 수 있을까?’ 의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교사들이 마냥 피해자이기만 한지도 스스로에게 물었으면 한다. 누가 정해 놓은지도 모르는 관습을 그냥 따르는 것. 부당한 것을 알고도 그냥 넘기는 것. 누군가의 어려움을 보았지만(들었지만) 그냥 거기서 끝내 버리는 것. 인간으로서 상호존중을 하기보다는 ‘관리자의 권리 vs 교사의 권리’, ‘교사의 권리 vs 학생의 권리’ 하며 차등을 두는 것. 교무실이 힘드냐, 행정실이 힘드냐, 네가 힘드냐, 내가 힘드냐 하며 각자의 힘듦을 겨루는 것.
학교 전반과 교직 문화 전반에 스며든 우리의 무수한 모른 척, 무관심, 무정함이 사실은 우리가 서로에게 겨누는 총구인지도 모른다. ‘원래 학교는 그런 거지, 원래 교사는 그래야지’라며 순응했거나 누군가를 종용했다면 우리가 ‘교권 침해’를 방조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정상적인 판에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을 부적응자 혹은 무능한 자로 폄하했다면 우리가 ‘교권 침해’를 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공현의 〈교육의 목표는 학력 보장이 아니어야 한다〉는 기초학력 업무 담당자로서 이 정도의 고민과 문제의식 없이 공문대로, 장학사 요청대로, 해야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아니 그 정도도 못 하고 있는 나 자신에 ‘현타’가 오는 글이었다. 송민순의 〈줄 위의 교육과 기초학력〉을 읽으면서는 우리 사회의 ‘헛똑똑이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학교 공부는 잘했고, 그래서 번듯한 대학은 나왔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성숙한 시민으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기에서 한탄스러운 질문이 또 생긴다. 이 나라 공교육의 목표는 소수의 ‘모범생’을 양산하는 것일까, 대다수의 ‘시민’을 양산하는 것일까? 이 나라에서 학력은, 공부는 무엇이길래 ‘헛똑똑이’를 ‘똑똑이’로 착각하게 만들고,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패배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최현진의 《별별 교사들》 리뷰인 〈그럼에도 학교로 돌아온 별난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글쓴이에게 동료애를 느끼게 한 글이었다. 교무실에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같은 말을 많이 듣는다는 대목을 읽는데 웃음이 나와 버렸다. 나만 들어 본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가 중학생 시절에 만난, ‘자신은 폭력의 방식으로 배웠지만, 폭력의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려 애쓴 선생님’처럼 나도 비록 좋은 것만 보고 배우진 못했지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냉랭한 학교에 홀로 자신만의 답을 써야만 한다.”(본문 257쪽) 여기에 동의하고, 나 역시 그러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스스로도 장담하지 못하겠어서 때때로 서글퍼지기도 한다.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부디, 적어도 학교라는 곳에서는 교사들이나 학생들이나 자신만의 답을 쓰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기를, 그리 큰 결심을 해야 하는 비장한 것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렇게 나의 첫 ‘읽은 이야기’를 써 보았다. 나만의 답을 작성한 기분이어서 떨리지만 한편으로는 보람차다. 수학 문제를 풀 때 해설지를 보지 않고 풀어 나갔듯이 지난 호 ‘읽은 이야기’들을 일부러 읽지 않고 내 방식으로 써 내려 가 보았다. 덕분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힘들어하며, 무엇을 바라는지 더욱 명확해졌다. 이 글은 나만의 답이었고, 독자분들 역시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함께 모여 각자의 답을 공개하고 함께 나누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