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호[특집]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학교라는 ‘장소’ (몽글)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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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_ ‘학부모 혐오’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학교라는 ‘장소’

- ‘서비스’가 된 공교육과 ‘민원인’이 된 학부모

 

 

몽글

iamahumanist@daum.net

교육계 종사자,

초등학생 양육자-‘학부모’



장소와 행위를 만드는 구조

 

시내 번화가 교차로 한가운데 “바르게 살자”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버스나 택시를 타고 오가며 그 바위 글씨를 볼 때마다 ‘바르게 살자고 외치면 바르게 살 수 있나’, ‘바르게 산다는 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곤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른바 캠페인의 효과를 믿지 않는다. ‘~하자’는 설득의 말로 넘어설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삶의 조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맹자(孟子)는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겠냐’는 제후의 말에 ‘항산(恒産)’을 이야기한다. ‘항산’은 일상적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물리적 토대를 의미하는데, 이를테면 농사지을 땅이나 먹고사는 데 필요한 자원을 얻는 일거리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는 항산을 말하면서 백성을 ‘그물질’하지 말라고 말한다. 항산이 있으면 굶주릴 일이 없고 굶주리지 않으면 도둑질할 일도 없는데, 항산을 정치적으로 마련하지 않은 채 도둑질한 백성을 처벌하기만 하는 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품성이 있고 그 품성이 가려지거나 왜곡되지 않는 한 ‘나쁜’ 일로 빠져들지 않을 거라는 맹자의 생각과 믿음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삶의 태도를 규정하는 것이 삶의 조건과 동떨어진 관념적 의지가 아니라는 것, 혹은 정치의 영역에서는 개인의 의지보다 구조적 환경과 사회적 조건들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은 매순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사회적 조건에 따라 선택의 항목과 대상과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선택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비대칭적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하도록 교육하고 강제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도둑질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길거리에 휴지를 버리지 말라 하면서 거리에 휴지통을 마련해 두지 않는 것보다는, 거리에 많은 휴지통을 설치해 두어 구태여 길바닥에 휴지를 버릴 이유가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인 일이다. 모든 경우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도둑질이라는 행위를 만들어 내고 도둑의 장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구조’다.


행위와 장소를 만드는 구조를 지우거나 은폐하면 남는 것은 오롯이 개인이다. 행위는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환원되며, 결과적으로 교화나 처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구조는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에 누가 들어갈지 결정한다.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어떤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소에 부합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으며 이 행위 또한 때론 문화적으로 강제된다. 이 모든 사회적 장면에서 개인이 선택하고 책임질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백 퍼센트의 비율로 구조가 강제하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규율하고 조정하며 배치하는 권력의 효과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볼 것인가, 혹은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볼 때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또한 행위와 장소를 만드는 구조가 이 구조를 지우고 은폐하는 효과 또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워지고 가려진 구조를 발견하고 성찰하는 일은 구조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는 일, 혹은 구조를 다른 방향으로 바꿔 가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할 수 있다.

 


‘악성 민원인’이라는 장소


구조가 행위와 장소를 만든다고 할 때 오늘날 한국의 교육 구조가 만들어 내는 행위와 장소는 어떤 것일까.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교육 관련 담론장에서 최근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은 ‘악성 민원인’이다. 악성 민원인을 만드는 구조는 무엇이고 이 장소에 배치되는 것은 누구일까. 악성 민원인의 반대편에 만들어지는 장소는 무엇이고 이 장소에 배치되는 것은 누구일까.


악성 민원인을 만드는 구조가 전제하는 것은 공교육을 통해 제공되는 것이 ‘교육 서비스’라는 인식이다. 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 학교이고 서비스 제공의 책무를 맡은 1차 담당자는 학급 담임 교사나 교과 담당 교사다. 그리고 이들의 관리자로서 교무부장, 연구부장, 교감, 교장 등의 관리 교사가 존재한다. 통신 서비스에 문제가 생겼을 때 소비자가 전화를 하면 이에 응대하는 콜센터 직원이나, 사용하는 휴대전화에 문제가 생겨 서비스센터를 찾았을 때 휴대전화 수리를 접수하고 직접 수리에 나서는 사람들이 학급 담임 교사나 교과 담당 교사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만든 회사나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와 마찬가지로 1차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들을 관리하는 조직 체계와 관리자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곧 학교 교사 조직과 관리 교사의 존재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학생인가, 아니면 학부모를 비롯한 양육자인가.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은 분명 학생인데 이 서비스의 질을 평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민원인은 학부모다. 방과후수업을 듣거나 돌봄교실에 들어가는 것은 학생인데 이에 대한 결정은 학부모가 한다. 교사는 어떤 방과후수업을 들을 것인지, 혹은 돌봄교실을 신청할 것인지 여부를 학생이 아닌 학부모에게 묻는다. 이런 구조는 학생이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일 때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고등학교에서도 학교 활동에 대한 참여 여부나 비교과 활동 선택 등의 문제에 관해 학생이 아닌 학부모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가 많다. 진학이나 진로에 대한 상담에서도 교사가 상담하는 대상은 학생에 국한되지 않으며, 때로 상담에서 학부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기도 한다.


아이들은 일고여덟 살 무렵부터 열여덟, 열아홉 살에 이르기까지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튕겨다니며 교사와 학부모 사이를 오간다. 이런 통제와 개입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기 삶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택한 일에 대한 결과는 어떻게 책임지는지 알지 못한 채 성년에 이르는 것이다. 칭찬 스티커를 열심히 모은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고 학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은 타인의 칭찬 없이 스스로의 효능감만으로 자기 행동에 대한 충족감을 갖지 못한다. 촘촘한 설계 속에서 살아온 아이들은 설계가 없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기 동기와 능동적 에너지를 잃게 되며, 이렇게 성인이 된 아이들은 주어진 일을 열심히 수행하며 살아가더라도 실제로는 ‘무기력’하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서비스는 이 서비스 수혜자의 평가를 받는다. 이 경우에도 학부모는 서비스 수혜자로서의 지위를 갖고 평가에 임한다. 어떤 경우에는 학생은 평가에 참여하지 않고 학부모만 평가에 참여하기도 한다. 학생이 평가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학부모가 함께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평가 항목은 대체로 5개 정도의 항목으로 구분된다. 질문의 수는 많지 않다. 가정 통신문이나 문자를 통해 발송된 링크에 들어가서 평가를 하거나 서면으로 제출된 질문지에 답을 해서 보내면 되는데 대체로 제출일까지의 기한은 2~3일, 길면 4~5일이다. 퇴근해서 돌아온 부모가 자녀에게 항목별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별 문제가 없다고 하면 모든 항목의 답은 최고 점수인 5에 표기된다. 때론 자녀에게 묻지 않고 부모가 자의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때 학부모 대화 채널을 통해 특별하게 전달받은 문제가 없다면 응답은 대체로 최고 점수에 표기된다.


교육 서비스 수혜자로서 학부모는 민원의 권한을 가지지만, 대부분의 학부모는 스스로의 위치를 병원에 가족을 환자로 맡긴 보호자에 빗대어 생각한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행하는 모든 의료 서비스를 지켜볼 수 없는 보호자는 의료진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위치를 절감한다. 의료진을 불편하게 만들면 환자에게 나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료진을 향한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의료진이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전문 영역을 함부로 건드리는 일은 일종의 ‘역린’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최대한 수용적인 태도로 대화에 임한다. 보호자는 의료진의 모든 의료 행위에 대해 평가하거나 피드백할 수 없다. 의료진에게 질문을 하는 것도 어렵다. 의료진은 바쁘고 보호자가 의료진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방식은 언제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의료 행위의 결과 대부분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의료 행위에 대한 평가는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평가는 간단한 설문 응답이며, 2~3분 안에 완료할 수 있는 것이지만 보호자 또한 바쁘기 때문에 이 또한 건너뛰기 일쑤다.


병원에 환자를 맡긴 보호자처럼 학교에 학생을 맡긴 양육자는 학교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담임 교사에게도 물을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학급의 동료 양육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때로는 학교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도 학교로부터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동료 양육자, 혹은 학부모들과의 접촉면이 없다면 양육 대상 혹은 자녀의 학교생활을 지원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면 방과후수업에 어떤 과목들이 개설되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어떤 과목이 빨리 신청 마감되는지 알기는 어렵다. 대도시의 양육자, 혹은 학부모라면 방과후수업 신청에 앞서 동료 양육자나 학부모에게 정보를 얻고 신청일 아침 접수 시간 개시에 맞춰 컴퓨터나 휴대전화 앞에 앉아 ‘광클(광속도로 클릭하는)’을 준비해야 한다. 이때 클릭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신청 성공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등 다수의 사람들이 신청 접수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 ‘정상가족’과 다른 가족 구성원의 일원인 사람, 혈연 관계가 아닌 사람은 자녀 혹은 양육 대상인 ‘학생’의 학교생활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어렵다.


서비스 제공자로서 교사는 최대한의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한다. 민원이 제기될 만한 상황의 가능성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양육자나 학부모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학교는 학교에 오는 ‘학부모 자원봉사’의 종류를 제한하거나 ‘자원봉사자’의 수를 제한하여 학부모가 학교의 어떤 장면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한다. 이런 일들이 불필요한 관심과 학부모들 사이에 ‘지나치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학교는 사고의 위험 때문에 방과 후 운동장 놀이를 전면 금지한다. 어떤 교사는 날카로운 모든 문구류의 소지를 금지하고 교실 내에 깨질 수 있는 물건을 일체 두지 않는다. 지나친 질문과 논의를 차단하기 위해 학부모 총회나 학생 총회는 최대한 짜여진 틀 내에서 시간 안에 빠듯하게 진행된다. 때로는 수업도 마찬가지다. 수학여행이나 소풍, 현장 활동, 외부 강사 초청 행사 같은 것들을 계획할 때에도 가급적 다른 학교에서 이미 여러 차례 검증을 받은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서비스 제공자로서 교사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방어에 집중하는 한편 서비스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활동도 한다. 학생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부모들의 만족도다. 민원을 넣는 것은 학생이 아니라 학부모이기 때문이다. 면담 시 학부모에게 할 이야기들을 가급적 다양한 내용으로 풍부하게 준비하거나 학습지 같은 것들을 많이 만들고 글쓰기와 서체 연습 등의 별도 활동을 진행하여 학습에 대한 열의가 높은 교사라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들이 활동하는 장면마다 사진을 많이 찍어서 학부모들에게 학교에서 어떤 활동들이 이뤄지는지 알려 주는 동시에 그들의 자녀가 나오는 장면의 사진을 최대한 많이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학부모들을 만날 때에는 가급적 잘 차려입고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 톤도 조정하여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


‘악성 민원인’의 자리 건너편에는 ‘서비스 제공자’로서 교사의 자리가 있다. 서비스 제공자로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태도와 역할은 일반적인 서비스 노동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수호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되는 ‘교권’에는 ‘교사의 노동권’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지만, 교사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악성 민원인의 존재라면 이때 교사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의 장소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악성 민원인의 건너편 자리에 앉는 것은 관리 교사가 아닌 평교사다. 이때 더 높은 확률로 앉게 되는 이는 젊은 교사이며, 비도시 읍·면·동 지역의 초등학교에서는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20~30대 교사다. 학부모들의 질문과 민원이 가장 많은 1학년과 6학년 학급의 담임을 맡는 이 또한 대부분 20~30대 교사다.


선배 교사나 관리 교사가 주목하는 가운데 그들을 향해 ‘인정 투쟁’을 하면서 20~30대 젊은 교사들이 입증해야 하는 능력은 최대한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학부모 민원이 들어오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 학교폭력위원회가 소집되지 않도록 사건을 잘 무마하는 것,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규범을 강화하고 혹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정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문제를 잘 다루지 못하는 교사, 문제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지 못하고 드러내는 교사, 오히려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여 문제를 발견하는 교사는 학교 조직 안에서 동료 선후배 교사들이나 관리 교사들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때로 교사 집단 내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기도 한다.


장소를 만든 구조는 사라진 채 개인만이 그 장소에 덩그러니 남게 되면, ‘폭력 교사’ 혹은 ‘무능력한 교사’와 ‘악성 민원인’만이 남게 된다. 학교라는 구조가 어떤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에 어떤 사람들을 배치하는지, 배후의 권력과 그 권력의 효과는 무엇인지 질문하지 못한 채 일부 몰지각한 개인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데 머물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이 일부 몰지각하고 비규범적인 개인의 서사가 확대 재생산될 때 특정 개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의 정동은 커지고 구조의 효과는 더 깊이 숨어든다.

 


누가 ‘민원인’의 자리로 호출되는가

 

최근 호칭의 문제가 특정 대상을 규정하거나 배제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용어 대신에 ‘양육자’라는 용어를 선택하기도 한다. 학생들을 돌보고 지원하는 이들 가운데 부모가 아니거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 구성원이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재혼 가정 자녀의 경우 양육자가 법적인 부모의 지위를 갖지 못한 경우가 있고, 조부모가 양육자인 경우도 있으며, 보육 시설 교사나 관리자가 양육자의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에서 대부분의 양육자는 여전히 학부모로 가정된다. 이때 ‘부’와 ‘모’는 대칭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입학 설명회나 공개 수업, 학급 교사 상담, 진로 상담, 운동회 등의 행사에 ‘부’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지기는 했지만 학교에 등장하는 학부모 대다수는 ‘모’로 구성된다. ‘부’가 등장하는 경우에도 ‘모’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부’가 주 양육자인 경우 학교 교사와의 접촉면은 상대적으로 다른 학부모에 비해 줄어든다. 공개 수업 같은 경우 행사 이후 학급 내 다른 학부모와 교류가 이루어지고 이때 같은 학교에 고학년 자녀를 둔 부모를 중심으로 학교와 학급, 교사와 각종 학교 내 생활에 대한 정보가 오고 간다. 동료 학부모들과의 교류 장소에서 ‘모’를 동반하지 않은 ‘부’는 다른 ‘모’들을 배려하여 대체로 참석하지 않는데, 참석한 경우에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의 경우 1학년 학생의 성적표가 ‘엄마의 성적표’라는 말이 있다. 학습 준비물, 과제, 기타 공지 사항 등을 학생이 ‘알림장’에 적어 오지만 이것은 사실상 ‘엄마’를 향한 메시지다. 실제로 학생의 학교생활 관련 공지는 ‘부’와 ‘모’가 모두 양육자로 등록되어 있거나 ‘부’가 주 양육자로 등록된 경우에도 모두 ‘모’에게 문자로 발송된다. 학생의 학교생활이 원활하지 않을 때 이에 대한 처벌적 시선은 학생의 엄마에게 가해진다. 교사나 동료 학부모 모두 실제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배제와 소외의 사회적 도구들을 활용한 일종의 ‘처벌’이 가해지는데, 이를 받는 ‘모’ 역시 자신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여긴다. 예를 들면 공개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학생이 수업 준비물을 자꾸 빠뜨리거나 현장 수업 등의 준비 과정에서 아동에 대한 지원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때 해당 학생의 어머니는 문제적인 학부모로 규정되고 동료 학부모 모임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제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어머니가 이 관계에서 배제될 때 아이 역시 함께 관계의 동심원 바깥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모’는 아동의 학교생활 지원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학부모 가운데 ‘모’의 자리에 호출되는 것으로 가정되는 존재는 ‘이성애 정상가족’ 내에서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는 ‘전업주부 여성’이다. 실제 현실은 이와 많이 다르지만, 학교의 행정 서비스와 응대 매뉴얼이 가정하는 학부모의 표준은 이러한 기준에 기반해 있다.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학교의 공지나 전화 알림은 직장인이 근무하는 시간에도 아무 때나 걸려 온다. ‘모’는 지체 없이 이 전화를 받거나 못 받았을 경우 곧바로 다시 걸어야 하며 학교에서 요청한 사안에 대한 피드백 역시 시간을 지체하기 어렵다. 이 모든 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피해를 볼 것은 자녀인 아동이기 때문에 직장인인 ‘모’는 근무 시간 중에도 학교에서 오는 전화를 소홀히 대할 수 없다.


직장인 양육자가 어제 받은 가정 통신문을 오늘 아침에 제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야근을 해서 퇴근이 늦거나 아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제출 기한을 놓치면 그 피해는 피양육자가 입게 된다. 학교에서 가정하는 학부모의 표준과 이상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남성, 직장을 다니는 여성, 컴퓨터 작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려운 성인, 정상가족의 외부에 존재하는 성인 등이 모두 배제되거나 주변부화되어 있다. 학교는 학부모를 젠더와 계층, 리터러시 역량이 모두 다른 이질적 주체로 고려하지 않고, 정상가족의 내에 존재하는 동질적 주체로 가정한다.


물론 이와 같은 학부모의 장소성은 한국 사회가 돌봄과 양육을 이분법적 젠더 역할 구분에 따라 배치하고 조정해 온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돌봄과 양육이 여성의 몫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여성의 표준화된 모델은 이성애에 기반한 정상가족의 어머니가 수행하는 역할과 규범, 문화적 관습 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부모의 장소가 민원인의 자리로 치환될 때 이 ‘모’의 장소는 여성에게 고유한 것으로 가정된 자질들과 쉽게 연결된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가정 내에 화초처럼 갇혀 사회적인 소통에 능숙하지 못하며, 자식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많아 자녀를 과도하게 통제하고, ‘동료 엄마들’과 몰려다니며 학교와 교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학교 일에 과하게 개입하며, 자기 자녀의 입장에서만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어머니로 기술되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가 어느 순간 ‘민원인’으로 나서고 그 민원의 내용이 상식과 관습, 규범의 경계를 넘어설 때 악성 민원인인 어머니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비난의 시선은 종종 여성에 대한 타자화된 시선과 사회적 배제의 기제에 맞물린다. 교사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학부모의 언행이 관습과 규범의 경계를 넘어설 뿐 아니라 심각한 폭력에 해당하는 사례들은 수없이 존재한다. 이런 장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에 해당하는 행동이며, 사회적으로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은 그와 같은 행동을 제어하고 예방하는 대안적 기제와 폭력이 발생한 이후에 회복과 치유를 위해 취해져야 할 타당한 사후 조치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장면에 앞서 ‘악성 민원인=어머니’의 구도에 기반한 인식의 틀이 존재한다. 사회적 장면이 미디어를 통해 서사적으로 기술되며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할 때 이 인식의 틀은 해석을 조정하고, 악성 민원인의 프레임을 젠더 편향적 관점에서 고착시킨다. 이와 같은 순간 사건을 만들어 낸 구조는 사라지고 대안적 기제와 사후적 조치에 대한 논의 역시 휘발된다. 텅 빈 자리에 남는 것은 젠더화된 악성 민원인의 이미지다.

 


교육의 3주체라는 말의 허구

 

학교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교육공동체’라는 것이 있다. 이 교육공동체는 흔히 교육의 3주체인 학생, 교사, 학부모(양육자)로 구성된다.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서 교육 3주체가 함께 모이는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활동이 지향하는 바는 교육 3주체가 함께 모여 의논하고 협력함으로써 더 나은 학교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들 주체는 각각 별도의 논의 기구를 갖고 있는데 이들 기구는 학생자치회, 학부모회, 교사협의회 등으로 불린다.


초등학교의 경우 학생 자치 활동은 주로 5, 6학년 고학년생들이 주도하는데 자치회의 논의 안건은 학생회 임원들을 통해 교사가 제안하거나 암시를 주는 경우가 많다. 작년 이맘때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학생자치회의 의결 내용이 복도 게시판에 공지되어 있었다. 의결된 내용은 ‘복도에서 뛰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이 의결 내용을 실천하느라 여러 학년 학생들이 ‘복도에서 뛰지 말자’는 내용을 담은 다양한 표어와 포스터를 만들어 복도에 전시해 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약 40년 전에도 학급회의나 전교어린이회의 주요 의결 사항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복도에서 뛰지 말자’류의 내용이었다. 그때 ‘예나 지금이나 왜 학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싫어할까’, ‘복도에서 뛰면 안 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은 정말 저런 것을 자치회의 논의 안건으로 삼고 싶었을까’ 등을 생각한 적이 있다.


1년이 지난 올해 가을 아이의 학교를 다시 방문했는데 이번에도 학생자치회의 의결 사항은 ‘복도에서 뛰지 말자’였다. 이 의결 과정의 배후에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해당 사건의 발단은 학생회 임원인 6학년 학생들이 복도에서 뛰다가 관리 교사의 주의를 받는 데서 시작되었다. 주의를 받던 학생 한 명이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교사의 훈육에 의문을 제기하는 바람에 이 학생은 수업도 들어가지 못한 채 1시간 동안 훈육 지침을 들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학생에게 ‘이러면 선생님이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어?’라고 ‘다정하게’ 물었고 아이는 결국 눈물을 떨구며 승복했다. 그리고 승복의 결과 ‘복도에서 뛰지 말자’는 학생들이 스스로 결의하는 학생자치회의 의결 사항이 되었으며, 이 의결은 교사들에 의해 6학년 학생들의 자기반성에서 비롯된 ‘성찰의 결과’로 전교생 앞에 전시되었다. 나는 벽에 걸린 ‘복도에서 뛰지 말자’라는 글귀를 보며 학교가 아동인권에 대해 어떤 감수성을 갖고 있는지, 학생들의 주도성과 능동성이 학교에서 얼마나 참혹하게 짓밟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사들이 주도하는 초등학교의 규율 담론이 학생들의 입을 통해 복화술적으로 재생산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학생들이 ‘좀비’로 나오는 콘텐츠들이 어쩌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한국에 온 지 30년 가까이 된 한 외국 국적의 연구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 한국의 10대들 사이에서 어쩌다가 ‘민주화’나 ‘참교육’이 혐오 용어가 된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그 연구자가 대답하길 자신이 보기에 그건 ‘민주화나 참교육을 파시즘적으로 배워서’라고 말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훈육 요구에 따라 안건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안하고, 교사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교사들이 설계한 방식대로 교사들이 준비한 내용을 차근차근 따라가며 수행하는 자치회의 논의는 ‘자치’라고 할 수도 없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학교에서 논의되고 결정되는 모든 사안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거나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담론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실질적 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 안에서 교육 주체의 논의 참여와 의견 수렴의 과정은 모두 ‘형식적’으로 이뤄진다. 형식적 절차를 따른 모든 논의는 처음부터 발언 기회를 갖지 못하는 물리적 억압보다 더 강력한 ‘침묵의 봉인’이라는 효과를 만든다. 이런 형식적 절차들은 말하고 싶은 마음,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주도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꺾고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논의 기구는 어떨까. 지역에 따라, 학교에 따라 저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교사들의 논의는 대체로 교사협의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교사협의회를 통해 서로 다른 학년이나 교과에서 일어난 일들을 공유하거나, 교사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고민이나 문제를 함께 해결하거나, 학생인권이나 학교교육을 둘러싼 주요 의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교사들은 대부분 지쳐 있고, 문제를 덮는 데 익숙하며, 서로 협력하며 논쟁할 만큼 가깝지 않다. 교사들에게 학교는, 아니 그 무엇보다 교사 집단은 전혀 안전한 곳이 아니다. 교사들은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방어하며 오로지 학교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도록 고도로 훈련되어 있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교육부에서 내세운 대안 가운데 하나로 교육부 학생생활지도 고시안(「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 2023년 8월 17일 자)이 있다. 이것은 9월 새학기 개학에 맞춰 고시되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 9월 말경 별도의 내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고지되었다. 이 고시안은 학교, 특히 교실 안에서 학생 행동 제어와 처벌에 대한 교사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학교의 교사협의회를 통해 이 고시안에 대한 심도 깊은 검토와 논의가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 최근 학사 행정 업무와 교실 안 교사 업무의 양이 최고조에 달하는 학기 말 시즌에 즈음하여 이 고시안에 연동되는 학생생활규정에 대한 교칙안 제안서가 학교마다 학교장을 통해 제출되었다. 이 안에는 교사의 권한과 역할이 분명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로 학생의 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여러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학생 생활 지도 측면에서 교사의 통제 권한 강화가 이른바 ‘교권’을 지키고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이런 행정 고시안과 학칙이 학교교육의 주요 구성원들의 내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지정되고 적용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사안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안의 중요성과 학칙 개정 절차의 원칙을 따른다면, 이 안은 교육 3주체로 소환되는 학생, 학부모, 교사가 각각의 단위에서 일정 기간 심도 깊게 토론하여 의견을 제출한 후 함께 협의해서 의결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교칙 개정은 교육 3주체가 참여한 교칙개정위원회 등의 단위에서 검토한 수정안을 최종적으로 학교운영위원회가 심의하여 제출, 확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전국의 학교에서는 이 과정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을까.


전국의 학교에서는 11월 말 가정 통신문과 학교 공지를 통해 학부모들에게 학칙 개정안의 내용을 알리고 약 1주일간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 개정안은 교육부에서 만들어 제공한 것으로, 학교마다 큰 차이 없이 대동소이하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반드시 답해야 하는 공지문인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경우 공지 내용 자체를 잘 읽지 않는다. 이 개정안에 대한 의견 수렴은 학부모들에게는 자신이 반드시 응답할 필요는 없는 학교의 형식적 절차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관심이 있는 학부모라 하더라도 학칙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어떤 문제에 유의해서 살펴봐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개정안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거나 제출하기 어렵다. 간혹 학교에 따라 기존 학칙에서 달라진 부분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곳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학부모들은 개정안의 문구가 의미하는 바나 거기에 숨어 있는 쟁점 등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나마 개정안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고 정독하는 학부모는 아마 전교에서 한두 명에 불과할 것이다.


학생들 또한 개정안이 자신들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 어떤 항목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하는지, 학칙 개정의 주요 의도와 예상되는 효과는 무엇인지, 우려되는 사항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개정안을 검토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학생들은 개정안을 제공받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 개정안을 제대로 읽을 기회나 시간을 학교나 집에서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모여 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것도 어렵다. 애초에 학생들은 이 개정안이 자신들의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개정안 검토의 필요성을 인식하거나 개정안 검토에 대한 자기 동기를 갖기 어렵다.


그렇다면, 학교운영위원회에 들어오는 운영위원 가운데 이 규정을 세세하게 검토하고 들어오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교사 위원을 제외한 나머지 학부모 위원이나 지역 위원들에게 이 개정안은 정기 운영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검토해야 할 수많은 사안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개정안은 아마도 다른 수많은 안들과 마찬가지로 짧은 형식적 심의를 거쳐 운영위원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아동인권 침해 이슈가 발생하여 학부모들이 학급 담임 교사와 협력하여, 학생인권을 보호하고 학생인권에 대한 학교 조직의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대안을 마련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학부모들은 일하는 틈틈이 관련 자료를 읽고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모여 1~2시간씩 토론을 이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교사와 학부모 모두가 생애 처음으로 ‘교육공동체의 상호 협력에 기초한 교육적 원칙과 이상의 실현’을 구현해 나가는 장면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학칙 개정과 관련해서도 형식적 절차를 진행하려는 학교의 업무 진행에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학부모들이 의견을 모으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야 했으며 학교가 제공하지 않는 자료들을 외부 기관과 단체에서 제공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학부모회 임시 총회를 개최하기 위해 학년별 학부모들의 의견을 모으고 학부모 운영위원을 초대하여 간담회를 개최했으며, 이 모든 과정에서 학교의 어떤 지원과 응원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학교는 새로운 개정안의 신속한 제정을 위해 움직이면서 이에 관한 절차상의 일정들을 일방적으로 학부모들에게 통보해 왔다.


애초에 학부모들로 하여금 학생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학교 안의 사건 대응 측면에서도 학교는 어떤 유능함과 유연함, 혹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수준의 인권 감수성을 보여 주지 못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학교를 관리하는 상급 기관에 민원을 넣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주변에서도 이를 권유하는 이들이 늘어 갔다. 이 논의 과정을 통해 함께 성장하기를 희망한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이 우직하게 논의를 이어 가는 동안 학교는 여전히 교육 주체들의 움직임과 문제 제기에 무관심했고 그 대응은 방어와 수동적 공격에 가까웠다. 학부모들이 만난 대부분의 전문가는 학교 안에서의 해결이 아닌 학교 밖에서의 해결을 제안했다. 변호사는 법정으로 갈 것을, 교육 전문가는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을 것을 제안했고, 최종적으로 만난 교육 공무원은 ‘학교 안에 학생인권을 보호하고 이에 관한 감수성을 제고할 만한 제도적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학부모들의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될 만한 통로나 최종적인 의결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것은 학생이나 일반 평교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이른바 ‘학부모’가 결국 ‘민원인’의 자리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학부모들은 교육 주체로서 학교교육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제출할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소통의 경로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학부모들이 민원인의 자리로 간다면 그들은 제한된 형태로나마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에 대해 평가하고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기회와 권한을 가질 수 있다. 교육 3주체가 평등하고 대등하게, 상호 긴밀하게 소통하고 협력하며 나란히 학교교육의 더 나은 내일을 모색하는 교육공동체의 이상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민원인인 학부모의 건너편에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맨 앞줄에 서서 민원인을 상대하는 교육 노동자가 있다. 민원인의 장소에는 사회적으로 양육과 돌봄을 전담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젠더화된 의무와 규범의 규율적 통제를 받는 ‘여성’이 존재한다. 이들 민원인을 상대하는 교육 서비스 종사자의 장소에는 교육 노동자 집단의 위계 내에서 제일 아래에 위치한 교사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들 사이 그 어디에도 ‘학생’, 혹은 ‘아동’의 장소는 없다. ‘학생’의 장소를 지우고 ‘민원인’과 ‘일선에 선 교육 서비스 제공자’의 장소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장소를 만드는 학교라는 권력, 혹은 그 권력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시스템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은 채 학생의 권리나 교사의 권리가 제자리를 찾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학교가 만들어 내는 신경증

 

고등학교 때 윤리 교사 한 명이 있었는데 그 교사의 수업 시간을 앞두고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교실 안의 모든 책상이 좌우, 대각선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했으며 책상 위에는 세 가지 색깔의 볼펜과 자, 형광펜과 교과서만이 놓여 있어야 했다. 이 무렵 학교생활의 모든 디테일한 장면들은 규격화된 형태의 사물들이 가득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마루 바닥을 닦는 걸레는 한 변이 15㎝인 정사각형 모양이어야 했고 교실 뒤편 게시판의 게시물은 일정한 크기와 내용으로 채워져야 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한 교사는 학생들의 책상 위 물건이 똑같은 모양으로 놓여 있어야 수업을 시작한다. 교과서는 왼쪽, 물통은 오른쪽에 있어야 하고 학생들은 정자세로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모든 물건이 제자리, 제 위치에 규격화된 형태로 놓여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실내화에 이름을 쓰는 위치나 개인이 소지하는 학용품에 각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라벨의 위치도 대체로 정해져 있다. 학급 비품이나 실험실 비품은 모두 정해진 위치에 있어야 하며 이런 규칙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 교실은 급격한 혼란 상태에 빠져드는 것으로 가정된다. 간혹 이와 같은 규범에 대한 강제와 훈육을 강조하지 않는 교사가 등장할 때 이 교사는 학교 안에서 무능력하거나 게으르거나, 혹은 훈육의 책임을 방기한 교육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언젠가 상담 전문가가 교사들을 상대로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연수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3일 전까지 신청자가 많지 않아서 교육이 취소되거나 축소된 형태로 진행될 것을 예상했는데 막상 교육 당일 연수 장소에 갔더니 100명에 가까운 교사들이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상담 전문가인 강사는 교사들에게 ‘누구의 전화를 받고 이 자리에 왔냐’고 물었고 교사들은 대부분 ‘교장’이나 ‘교감’, 혹은 ‘장학사’의 전화를 받고 왔다고 대답했다. 강사는 다시 교사들에게 언제 전화를 받았느냐고 물었고 대부분 교육이 있는 당일 아침, 혹은 그 전날 저녁에 연락을 받았다고 답했다. 강사가 교사들에게 ‘자신에게 연수를 받으러 가라고 말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이 자리에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강사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교사들에게 이것이 ‘학교폭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수의 내용은 학교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상담 전문가인 강사는 교사들의 억압된 분노가 어디로 갔을까 질문했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떠돌다가 약한 고리에서 취약한 대상을 향해 터지기 마련인데 이것은 가다듬고 제어하려 노력한다 해서 완전하게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사들의 억압된 분노는 아마도 교실과 학교 안에서 학생들을 향해 어떤 형태로든지 드러났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화를 내고 어떤 이들은 무기력함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 학교가 폭력을 만들어 내는 구조를 갖고 있다면 단호한 처벌과 규제의 시행으로 이 폭력을 막을 수 있을까.


수많은 공포 영화의 무대 가운데 하나가 ‘학교’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포는 강박과 신경증의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학교는 과잉된 규제와 규범, 통제와 지배의 사회적 기제와 문화적 관습 아래 놓여 있다. 학교가 만들어 내는 규범화된 ‘정상성’은 도달할 수도 없고 실현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이를 향한 강박적 노력은 언제든지 불안과 우울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신경증과 강박, 그리고 불안과 우울이 가득한 공간에서 상호 비방과 폭력, 무기력과 죽음을 향한 열망이 싹트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학교의 강박은 사회와 유리된 채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에 적응하는 삶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일정한 속도’다. 모두의 삶은 제법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역할 수행에 닿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벨트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 속도의 흐름을 단 한 번이라도 놓치면 누군가의 삶은 경계 바깥으로 내쳐진다. 그래서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모든 시간을 잘게 쪼개 사용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한다. 독서 시간은 10분에서 15분으로 구성되며 책을 좀 더 읽고 싶다 하더라도 곧바로 다른 활동으로 이행해야 한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그 문제가 다 풀리지 않았더라도 예정된 다음 시간의 활동으로 행동을 전환해야 한다. 이때도 중요한 것은 속도다. 여러 가지 일들을 정해진 속도에 따라 정해진 분량만큼 정확하게 수행할 줄 아는 것, 이것이 학교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속도의 감각은 몸에 새겨지며 학생들은 이 감각을 몸에 새기는 과정을 통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도구적 존재로 거듭난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속도의 감각을 성공적으로 몸에 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학생들의 미래와 사회 적응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한국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학생들의 미래를 염려하고 자신의 직무에 성실한 교사가, 이 속도와 속도가 만들어 내는 ‘강박’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속도와 강박 속에서 교사도 학생도 서로를 돌보거나 스스로를 돌보는 틈을 만들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 어마어마한 삶의 속도는, 또 그 속도를 밀어붙이는 힘은 좌우를 돌아보거나 자기 자신을 잠깐 흘깃거릴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강박과 신경증, 혹은 불안과 우울이 성찰되거나 해소되지 않은 채 켜켜이 쌓여 갈 때 분출되지 않은 이 에너지는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농축될 것이다. 프로이트가 한 가장 무시무시한 말은 ‘억압된 모든 것은 귀환한다’는 말이다. 억압된 모든 것이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농축된 채 깊숙한 곳 어디엔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귀환하여 현실에 엄습하는 순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애도되지 않은 상실, 애도할 수 없는 상실이 우울이 된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상기할 때 오늘날 한국 교육을 뒤덮은 우울은 수많은 상실의 애도 불가능성에 있다. 한국 교육이 오랜 시간 만들어 온 이 ‘상실’을 애도할 길은 없을까. 서이초 교사의 죽음과 그 뒤를 이은 교사들의 절규는 우리가 애도하지 못한 상실의 광장 위에 있다. 그리고 이 광장에서 여전히 비가시화된 상실들 또한 존재한다.


불안과 우울을 만드는 학교에서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통제권이 강화되면 이 상실을 멈추게 하거나 애도할 기회를 갖게 될까. 혹 이 통제권 강화가 더 큰 강박과 신경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악성 민원인’을 만들어 내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학교가 만드는 불안과 우울, 혹은 그에 연동된 어떤 무기력과 무능력에 닿아 있다면 이 ‘민원인’에 대한 규제만으로 교사나 학생을 향한 폭력이 소거될 수 있을까. 불안을 증폭시키는 구조 안에서 이 구조가 만드는 장소를 그대로 둔 채 그 장소 안에 있는 ‘지나치게 몰상식한 누군가’를 장소 바깥으로 몰아낸다고 해서 학교 안의 폭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은 골라내서 제거하는 ‘그물질’을 통해서가 아니라 ‘위험할 필요가 없는 삶의 조건이 정착되는 환경’을 통해 소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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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