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위기의 세계, 교육의 역할
‘과학’을 비판하는 과학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
- 오염수 방류 논란을 통해 묻는 ‘과학’의 의미
정성식
seongsik@health.re.kr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
지난 8월 24일, 끝내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개시했다. 한국 정부는 별다른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일본 정부의 결정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오염수 방류가 인체와 생태계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많은 시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외면한 채 말이다.
여론 조사 결과가 보여 주듯 대다수 사람들은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선동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그저 안전한 세상에서 살기 원하는 보편적 염원 때문이다. 핵 발전소 사고 오염수 방류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게다가 다핵종 제거 설비(ALPS)를 거치더라도 삼중수소는 정화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사성 물질의 치명력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문제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 10가지 괴담〉이라는 책자를 제작·배포하면서 이러한 우려를 계속 비과학적 주장으로 일축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시민 사회와 언론은 정부 주장의 허점과 모순을 지적하며 정부의 입장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최근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의사회’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합리적 이의 제기를 괴담으로 매도하는 정부 행태를 일갈하며 〈후쿠시마 핵 오염수와 한국 정부 괴담 10문 10답〉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오염수 방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앞세우고 있다. 여기에는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검증되면 사람들의 우려와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압도적 권위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염수 방류가 건강과 안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이 더 타당한 과학적 견해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과학적 논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오염수 방류를 둘러싸고 여러 과학적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오염수의 해양 확산 문제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이 함께 시행한 시뮬레이션 결과, 오염수는 4~5년 뒤에 국내 해역에 도달하고 바닷물에 희석된 삼중수소의 평균 농도는 매우 낮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일찍 국내 해역에 도달하는 것으로 예측하는 국외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ref] “일 방류 오염수 4~5년 뒤 우리 바다로?… “유입 훨씬 빨라질 수도””, 〈노컷뉴스〉, 2023년 8월 26일. [/ref] 이는 연구들마다 조금씩 다른 가정을 적용한 예측 모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데이터와 연구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연구자가 어떤 이론을 참고하여 어떤 변수를 분석 모형에 포함하는지, 또 특정 변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지 등에 따라 분석 결과는 상이할 수 있다. 연구의 과학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연구 설계의 정확성과 재현 가능성 등에 달려 있다. 동료 심사를 거쳐 학술 논문으로 출판되었다는 건 이러한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했다는 의미다. 정부는 과학적 방법으로 수행된 연구들 가운데 자신들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만 취사 선택해 ‘과학적’ 근거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중요한 논쟁은 오염수 내 방사성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건강에 미치는 위해성(risk)은 독성과 노출의 함수로 정의된다. 비윤리적인 실험을 하지 않는 한 어느 수준의 선량이 암을 유발하는지 정확히 입증하기란 매우 어렵다. 100mSv 이하의 피폭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저선량이라 할지라도 피폭량이 누적될수록 건강 위험은 비례해서 커진다는 것이 과학계의 중론이다. 연간 1mSv를 기본 안전 기준으로 정하고 있지만, 그 이하의 피폭은 건강에 무해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삼중수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중수소에 노출된 핵 발전소 종사자들의 사망률과 암 발병률을 분석한 역학 연구들에서 통계적 연관성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피폭량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가 부재한 탓에 삼중수소의 위해성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ref] 한국원자력학회·대한방사선방어학회(2016), 〈삼중수소의 인체 영향에 관한 과학적 분석〉. [/ref] 현재 삼중수소를 둘러싼 핵심 쟁점은 피폭량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 있다. 방류 허용 측은 바닷물에 희석돼 노출량이 미미할 것으로 판단하는 반면, 반대 측은 먹이 사슬을 통한 생물 농축에 의해 DNA 손상 등 인체에 치명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자의 주장대로 위해성이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후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건강상의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과학적 근거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에 따라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결정(informed decision)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위험한 행동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 사전주의 원칙은 흔히 오해하듯 대중의 불안과 공포심에 영합하여 과잉 대응을 조장하는 비과학적 접근을 말하는 게 아니다.[ref] 하대청(2010), 〈사전주의의 원칙은 비과학적인가? : 위험 분석과의 논쟁을 통해 본 사전주의 원칙의 ‘합리성’〉, 《과학기술학연구》, 10(2), 143~174쪽. [/ref] 사전주의 원칙이란 기존 과학 지식과 예측 모형으로 정확히 평가하기 어려운 ‘새로운 위험’에 직면했을 때 이를 ‘수용 가능한 위험(acceptable risk)’으로 처리하려는 학계의 관성에서 벗어나, 그 잠재적 위험의 규모와 영향을 최대한 자세히 조사, 분석, 평가하려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용과 편익을 따지는 경제적 합리성에는 위배될지 모르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추구하는 인권의 관점에 부합하는 접근이다.
사전주의 원칙에 따르면,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과학적 논쟁에 앞서 검증해야 할 중요한 사안은 따로 있다. 바로 데이터의 정확성 문제다. 기존 분석에 활용된 데이터는 이해 당사자인 일본 정부(도쿄전력)가 제공한 것이다. 그것도 수많은 오염수 저장 탱크 중 일부에서 추출한 표본에서 측정한 방사성 핵종의 결과만 공개하고 있다. 만약 이 데이터가 전체 오염수를 대표하는 표본으로 적합하지 않다면 이를 전제로 한 분석과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어쩌면 과학적 판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방류 허용 측 과학자들은 데이터의 수집, 선별 과정에서 심각한 왜곡과 누락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중요하게 검토하고 있지 않다. 일본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공정성을 신뢰하는 건 자유지만 그것이 과학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방류된 오염수에 포함된 모든 방사성 물질의 종류와 양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지 묻고 확인하는 게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기능주의 과학사회학자인 로버트 머튼은 과학 지식이 높은 객관성과 신뢰성을 지닐 수 있는 까닭은 과학자 공동체가 ‘조직화된 회의주의(organised skepticism)’라는 가치 규범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양자역학의 대가인 리처드 파인만 역시 과학은 “의심의 문화”라고 말했다. 이처럼 과학의 본령은 ‘의심하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과학 지식은 확실하고 객관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을 이해하는 철학적 관점은 단일하지 않다. 즉, 어떤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이러한 믿음은 그릇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오늘날 주로 통용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인식은 실증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정부가 방류 허용의 정치적 근거로 삼고 있는 ‘과학’도 이런 의미에서의 과학으로 보인다. 이때 과학은 보편적이고 가치 중립인 것으로 이해된다.
실증주의적 과학관은 관찰과 실험의 경험적 증거를 통해 확인 가능한 지식을 보편적 진술의 형식으로 구성한 것을 과학으로 규정한다. 이 관점에서는 경험적 사실들을 이론으로 일반화하는데, 이러한 귀납 추론은 ‘블랙 스완’ 같은 새로운 경험에 의해 언제든 기존 이론이 기각될 수 있다는 논리적 결함을 안고 있다. 따라서 경험적 일반화는 확률적·통계적 일반화로 후퇴하여 단지 개연성만을 진술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증주의 과학은 과학철학자 칼 포퍼가 말했던 것처럼 ‘반증(falsification)’의 원리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괴담으로 치부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가설에 대한 반증 가능성을 무시하거나 또는 허용범위 내의 오차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스스로 과학적 합리성을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실증주의 과학의 또 다른 중요한 한계는, 실험실 바깥의 세상이 연구 활동에 미치는 영향, 즉 과학의 사회성을 간과하는 데 있다. 앞서 오염수의 해양 확산 시뮬레이션 결과들 사이의 차이가 시사하듯, 과학적 탐구 과정 곳곳에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과학 기술 연구자들은 각자 동기와 이해관계, 신념 등에 따라 당대의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연구 활동을 펼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회들이 투고된 학술 논문에 연구자의 이해 상충 여부를 밝히도록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문제는 개별 과학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 경제적 논리와 불평등한 구조로 인해 특정한 과학 지식의 생산이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남반구 저소득 국가들에 만연한 소외 열대 질환은 연구 필요성이 크지만 경제적 수익성이 낮은 탓에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 않는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의 전형적인 예이다. 우리는 과학에 과도한 인식론적 특권을 부여하는 과학주의를 경계하는 가운데 ‘누구를 위한 과학’인지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을 비판하는 과학의 필요성
이번 오염수 해양 방류 결정 역시 과학의 가치 중립성 신화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새삼 보여 주었다. 오염수 방류를 결정하는 과정 자체부터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해양 방류는 오염수 처리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수증기 증발이나 지하 매설, 지층 주입, 또는 추가로 대형 탱크를 확보해 지금처럼 장기 보관하는 방법과 같은 다른 대안들이 존재했지만, 일본 정부는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가장 저렴한 방법인 해양 방류를 선택하였다.
핵 발전소 사고와 관련해 경제적 가치를 안전보다 앞세운 건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2011년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는 피난 지시 구역을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가 권장하고 있는 연간 피폭량(1~20mSv)의 최대치에 해당하는 20mSv 이상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이렇게 높은 피폭 한도량을 채택한 까닭은 인구 밀도가 높고 후쿠시마현의 행정, 경제 기능의 중심인 후쿠시마시와 고리야마시를 피난 지역에서 제외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경제적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자본주의 산업 사회는 위험을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핵 발전 시스템이다. 핵 발전은 경제 성장에 필요한 막대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생명에 극도로 위험한 물질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다. 만약 핵 발전소에서 중대 사고가 발생한다면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에 포획된 과학은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경시하며 사고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위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사람을 배신하는 과학에 대한 ‘비판적 과학’이다.
이때 ‘비판적 과학’이란 “폭주하는 산업화된 과학 기술이 인류와 자연에 초래하는 다양한 위험을 발견, 분석하고 비판하는” 과학을 의미한다.[ref] 사토 요시유키·다구치 다쿠미, 이신철 옮김(2021), 《탈원전의 철학》, 도서출판비. [/ref] 핵 발전을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관-산-학-언’ 복합체는 핵 발전의 위험성을 가급적 축소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가진다. 따라서 핵 발전 복합체가 주도하여 생산하고 유포하는 연구 결과와 과학 지식은 이들의 이해관계에 유리하도록 편향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 복합체가 어떤 과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비)생산, 유포하는지 감시하는 ‘비판적 과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물론 우리 모두 과학 전문가가 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과학철학과 과학기술학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실증주의적 과학관의 덫에서 벗어나 과학 지식을 상대화할 수 있는 관점(‘인식론적 상대주의’)을 갖추는 것이다. 나아가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위협하는 과학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이를 비판할 수 있는 과학적 태도와 실력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 과학이 위험과 위기를 외면하게 하는 구실이 되는 시대, 우리가 고민해야 할 교육의 역할이다.
기획 / 위기의 세계, 교육의 역할
‘과학’을 비판하는 과학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
- 오염수 방류 논란을 통해 묻는 ‘과학’의 의미
정성식
seongsik@health.re.kr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
지난 8월 24일, 끝내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개시했다. 한국 정부는 별다른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일본 정부의 결정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오염수 방류가 인체와 생태계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많은 시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외면한 채 말이다.
여론 조사 결과가 보여 주듯 대다수 사람들은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선동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그저 안전한 세상에서 살기 원하는 보편적 염원 때문이다. 핵 발전소 사고 오염수 방류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게다가 다핵종 제거 설비(ALPS)를 거치더라도 삼중수소는 정화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사성 물질의 치명력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문제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 10가지 괴담〉이라는 책자를 제작·배포하면서 이러한 우려를 계속 비과학적 주장으로 일축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시민 사회와 언론은 정부 주장의 허점과 모순을 지적하며 정부의 입장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최근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의사회’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합리적 이의 제기를 괴담으로 매도하는 정부 행태를 일갈하며 〈후쿠시마 핵 오염수와 한국 정부 괴담 10문 10답〉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오염수 방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앞세우고 있다. 여기에는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검증되면 사람들의 우려와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압도적 권위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염수 방류가 건강과 안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이 더 타당한 과학적 견해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과학적 논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오염수 방류를 둘러싸고 여러 과학적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오염수의 해양 확산 문제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이 함께 시행한 시뮬레이션 결과, 오염수는 4~5년 뒤에 국내 해역에 도달하고 바닷물에 희석된 삼중수소의 평균 농도는 매우 낮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일찍 국내 해역에 도달하는 것으로 예측하는 국외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ref] “일 방류 오염수 4~5년 뒤 우리 바다로?… “유입 훨씬 빨라질 수도””, 〈노컷뉴스〉, 2023년 8월 26일. [/ref] 이는 연구들마다 조금씩 다른 가정을 적용한 예측 모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데이터와 연구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연구자가 어떤 이론을 참고하여 어떤 변수를 분석 모형에 포함하는지, 또 특정 변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지 등에 따라 분석 결과는 상이할 수 있다. 연구의 과학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연구 설계의 정확성과 재현 가능성 등에 달려 있다. 동료 심사를 거쳐 학술 논문으로 출판되었다는 건 이러한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했다는 의미다. 정부는 과학적 방법으로 수행된 연구들 가운데 자신들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만 취사 선택해 ‘과학적’ 근거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중요한 논쟁은 오염수 내 방사성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건강에 미치는 위해성(risk)은 독성과 노출의 함수로 정의된다. 비윤리적인 실험을 하지 않는 한 어느 수준의 선량이 암을 유발하는지 정확히 입증하기란 매우 어렵다. 100mSv 이하의 피폭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저선량이라 할지라도 피폭량이 누적될수록 건강 위험은 비례해서 커진다는 것이 과학계의 중론이다. 연간 1mSv를 기본 안전 기준으로 정하고 있지만, 그 이하의 피폭은 건강에 무해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삼중수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중수소에 노출된 핵 발전소 종사자들의 사망률과 암 발병률을 분석한 역학 연구들에서 통계적 연관성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피폭량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가 부재한 탓에 삼중수소의 위해성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ref] 한국원자력학회·대한방사선방어학회(2016), 〈삼중수소의 인체 영향에 관한 과학적 분석〉. [/ref] 현재 삼중수소를 둘러싼 핵심 쟁점은 피폭량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 있다. 방류 허용 측은 바닷물에 희석돼 노출량이 미미할 것으로 판단하는 반면, 반대 측은 먹이 사슬을 통한 생물 농축에 의해 DNA 손상 등 인체에 치명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자의 주장대로 위해성이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후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건강상의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과학적 근거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에 따라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결정(informed decision)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위험한 행동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 사전주의 원칙은 흔히 오해하듯 대중의 불안과 공포심에 영합하여 과잉 대응을 조장하는 비과학적 접근을 말하는 게 아니다.[ref] 하대청(2010), 〈사전주의의 원칙은 비과학적인가? : 위험 분석과의 논쟁을 통해 본 사전주의 원칙의 ‘합리성’〉, 《과학기술학연구》, 10(2), 143~174쪽. [/ref] 사전주의 원칙이란 기존 과학 지식과 예측 모형으로 정확히 평가하기 어려운 ‘새로운 위험’에 직면했을 때 이를 ‘수용 가능한 위험(acceptable risk)’으로 처리하려는 학계의 관성에서 벗어나, 그 잠재적 위험의 규모와 영향을 최대한 자세히 조사, 분석, 평가하려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용과 편익을 따지는 경제적 합리성에는 위배될지 모르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추구하는 인권의 관점에 부합하는 접근이다.
사전주의 원칙에 따르면,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과학적 논쟁에 앞서 검증해야 할 중요한 사안은 따로 있다. 바로 데이터의 정확성 문제다. 기존 분석에 활용된 데이터는 이해 당사자인 일본 정부(도쿄전력)가 제공한 것이다. 그것도 수많은 오염수 저장 탱크 중 일부에서 추출한 표본에서 측정한 방사성 핵종의 결과만 공개하고 있다. 만약 이 데이터가 전체 오염수를 대표하는 표본으로 적합하지 않다면 이를 전제로 한 분석과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어쩌면 과학적 판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방류 허용 측 과학자들은 데이터의 수집, 선별 과정에서 심각한 왜곡과 누락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중요하게 검토하고 있지 않다. 일본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공정성을 신뢰하는 건 자유지만 그것이 과학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방류된 오염수에 포함된 모든 방사성 물질의 종류와 양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지 묻고 확인하는 게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기능주의 과학사회학자인 로버트 머튼은 과학 지식이 높은 객관성과 신뢰성을 지닐 수 있는 까닭은 과학자 공동체가 ‘조직화된 회의주의(organised skepticism)’라는 가치 규범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양자역학의 대가인 리처드 파인만 역시 과학은 “의심의 문화”라고 말했다. 이처럼 과학의 본령은 ‘의심하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과학 지식은 확실하고 객관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을 이해하는 철학적 관점은 단일하지 않다. 즉, 어떤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이러한 믿음은 그릇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오늘날 주로 통용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인식은 실증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정부가 방류 허용의 정치적 근거로 삼고 있는 ‘과학’도 이런 의미에서의 과학으로 보인다. 이때 과학은 보편적이고 가치 중립인 것으로 이해된다.
실증주의적 과학관은 관찰과 실험의 경험적 증거를 통해 확인 가능한 지식을 보편적 진술의 형식으로 구성한 것을 과학으로 규정한다. 이 관점에서는 경험적 사실들을 이론으로 일반화하는데, 이러한 귀납 추론은 ‘블랙 스완’ 같은 새로운 경험에 의해 언제든 기존 이론이 기각될 수 있다는 논리적 결함을 안고 있다. 따라서 경험적 일반화는 확률적·통계적 일반화로 후퇴하여 단지 개연성만을 진술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증주의 과학은 과학철학자 칼 포퍼가 말했던 것처럼 ‘반증(falsification)’의 원리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괴담으로 치부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가설에 대한 반증 가능성을 무시하거나 또는 허용범위 내의 오차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스스로 과학적 합리성을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실증주의 과학의 또 다른 중요한 한계는, 실험실 바깥의 세상이 연구 활동에 미치는 영향, 즉 과학의 사회성을 간과하는 데 있다. 앞서 오염수의 해양 확산 시뮬레이션 결과들 사이의 차이가 시사하듯, 과학적 탐구 과정 곳곳에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과학 기술 연구자들은 각자 동기와 이해관계, 신념 등에 따라 당대의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연구 활동을 펼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회들이 투고된 학술 논문에 연구자의 이해 상충 여부를 밝히도록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문제는 개별 과학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 경제적 논리와 불평등한 구조로 인해 특정한 과학 지식의 생산이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남반구 저소득 국가들에 만연한 소외 열대 질환은 연구 필요성이 크지만 경제적 수익성이 낮은 탓에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 않는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의 전형적인 예이다. 우리는 과학에 과도한 인식론적 특권을 부여하는 과학주의를 경계하는 가운데 ‘누구를 위한 과학’인지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을 비판하는 과학의 필요성
이번 오염수 해양 방류 결정 역시 과학의 가치 중립성 신화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새삼 보여 주었다. 오염수 방류를 결정하는 과정 자체부터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해양 방류는 오염수 처리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수증기 증발이나 지하 매설, 지층 주입, 또는 추가로 대형 탱크를 확보해 지금처럼 장기 보관하는 방법과 같은 다른 대안들이 존재했지만, 일본 정부는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가장 저렴한 방법인 해양 방류를 선택하였다.
핵 발전소 사고와 관련해 경제적 가치를 안전보다 앞세운 건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2011년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는 피난 지시 구역을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가 권장하고 있는 연간 피폭량(1~20mSv)의 최대치에 해당하는 20mSv 이상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이렇게 높은 피폭 한도량을 채택한 까닭은 인구 밀도가 높고 후쿠시마현의 행정, 경제 기능의 중심인 후쿠시마시와 고리야마시를 피난 지역에서 제외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경제적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자본주의 산업 사회는 위험을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핵 발전 시스템이다. 핵 발전은 경제 성장에 필요한 막대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생명에 극도로 위험한 물질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다. 만약 핵 발전소에서 중대 사고가 발생한다면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에 포획된 과학은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경시하며 사고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위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사람을 배신하는 과학에 대한 ‘비판적 과학’이다.
이때 ‘비판적 과학’이란 “폭주하는 산업화된 과학 기술이 인류와 자연에 초래하는 다양한 위험을 발견, 분석하고 비판하는” 과학을 의미한다.[ref] 사토 요시유키·다구치 다쿠미, 이신철 옮김(2021), 《탈원전의 철학》, 도서출판비. [/ref] 핵 발전을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관-산-학-언’ 복합체는 핵 발전의 위험성을 가급적 축소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가진다. 따라서 핵 발전 복합체가 주도하여 생산하고 유포하는 연구 결과와 과학 지식은 이들의 이해관계에 유리하도록 편향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 복합체가 어떤 과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비)생산, 유포하는지 감시하는 ‘비판적 과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물론 우리 모두 과학 전문가가 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과학철학과 과학기술학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실증주의적 과학관의 덫에서 벗어나 과학 지식을 상대화할 수 있는 관점(‘인식론적 상대주의’)을 갖추는 것이다. 나아가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위협하는 과학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이를 비판할 수 있는 과학적 태도와 실력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 과학이 위험과 위기를 외면하게 하는 구실이 되는 시대, 우리가 고민해야 할 교육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