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_ 학부모 혐오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
교육의 시장화와 박제된 젠더 규범
- 교사성과 학부모성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글
나임윤경
ynah@yonsei.ac.kr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사랑의 매’로 유지된 호시절에 대한 향수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현직 교사들과의 교육대학원 수업에서 체벌은 언제나 논쟁적 주제였다. 나는 ‘폭력의 사회화’를 반대하며 학생을 향한 ‘폭력 효율성’이 민주 사회의 학교에서라면 가르치고 배워서는 안 될 것이라 주장했고, 교사들은 나에게 체벌이 금지돼 엉망이 된 학교 현장에 무지하다고 했다.
“현장을 모른다”는 말에 꽂혔을까. 이후 몇 년간 일반대학원생들과 함께 소속 대학교 지역 소재 저소득층 중학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 인문학 교육을 진행했었다.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은 부모나 보호자의 학력,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대부분 교사의 교육과 지휘를 거부했다. 새로운 사람들의 등장에 잠시 교단으로 눈길을 줄 만도 한데, 첫날 나와 대학원생을 소개하는 담임 교사에게 귀 기울이는 학생은 그저 두어 명에 불과했다. 담임 교사는 매우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러나 목청껏 우리를 소개했다. “방과 후 아주 재미난 활동으로 우리와 한 학기를 보낼 언니와 형에게 큰 박수 부탁합니다”라는 교사의 마지막 멘트에 몇몇 학생만이 성의 없는 박수를 보냈을 뿐, 대부분의 학생들은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있거나 떠들며 교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식이었다. 막대로 교단을 힘껏 두드리거나 칠판을 치며 학생들의 주의를 모으려는 교사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체벌에 대해 핏대 높이며 반대했던 내 모습이 ‘현장을 모르는’ 대학 교수의 헛소리였음을 깨닫는 데에는 현장에서의 첫날 하루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체벌이 이 모든 상황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2022년 드라마 〈더 글로리〉(넷플릭스)나 〈스물다섯, 스물하나〉(tvN) 속 교사의 체벌은, 교권 남용이고 명백한 반인권이며 반교육이다. 1990년대를 그린 이 드라마 속 체벌 교사의 공통점은 이른바 ‘뒷배’가 없거나 성적 하위권 학생만을 골라 편파적으로 때린다는 것이다(이들의 행위는 ‘학생의 몸에 고통을 줌으로써 훈육한다’는 의미로서의 체벌이 아니라, 본인들의 ‘성질’을 건드린 대가로서의 학생에 대한 ‘제왕적 폭력’일 뿐이다). 훈육이나 교육이기보다는 ‘화풀이’ 대상으로 약하고 어린 학생의 몸이 필요했을 뿐이었지만, 그런 교사들을 위해 당시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들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폭력의 사회화에 일조했다. 종아리, 엉덩이, 그리고 뺨까지도 붉어지도록 ‘사랑의 매’를 맞고 귀가한 자녀에게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했어, 안 했어!”라며 한 번 더 다그치기도 했다. 그랬다. 이렇게 추켜세워진 ‘빈약한’ 교사의 권위였지만, 강의실에서 만난 어떤 교사들은 그 교권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와 찰나의 ‘문화 황금기’, 그리고 무한경쟁
그때의 부모들은 왜 그랬을까. 교사보다 낮은 학력(문화 자본)과 경제력(금융 자본)이 ‘금쪽같은 내 새끼’ 몸에 함부로 손댄 그들에게 침묵한 이유였을까. 아니면 교사의 폭력마저도 불사해야 할 만큼 교육이, 교육으로만 오를 수 있는 ‘계층 사다리’가 절실했던 걸까.
그 이유가 뭐였든 1960~1970년대는 물론 급속한 경제 성장기였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까지 이어지던 교사들의 이른바 ‘호시절’은 2000년대를 넘어서며 급격히 ‘악몽’으로 바뀌었다. 많은 것을 압축적으로 이루고 경험해 온 한국 사회는 ‘돈봉투’는 물론 교사들의 폭력까지도 빠르게 변화시켜 냈다. 1970년대 소수 엘리트에게만 열려 있던 고등교육은 1980년대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로 들어서며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 동안 이른바 ‘87 민주화 체제’를 이뤄 내고 경험한 그들이 학령기 자녀를 두기 시작하는 2000년대를 전후해서는 교사들보다 학력과 학벌은 물론, 대기업이나 은행권의 고액 연봉 덕에 경제력까지 월등한 부모들이 대거 출현함으로써 교사들은 ‘그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지존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90년대로 들어서며 한국 사회는 주린 배를 채우는 동안 모르고 지냈던 ‘문화적 허기(虛氣)’를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 채우기도 하면서 이전의 산업화 시대와는 매우 다른 지향을 갖기 시작한다. 고도 성장기에 늘 가족, 회사와 조직, 그리고 국가 발전 명분에 억압되고 가려져 있던 ‘개인적 욕망’이 표출돼 이전과는 달리 ‘개인’을 사유하기 시작하는 매우 다른 문화적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윤여일의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2023)는 이 시기 쏟아지듯 나온 비평지 등의 잡지, 그리고 동성애, 군가산점제, ‘젠더 갈등’ 등의 담론들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가 나름의 문화 황금기로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부모들의 높아진 학력과 경제력은 한국 사회의 짧았지만 매우 강력하게 다가온 이러한 분위기와 만나며 교사들의 ‘사랑의 매’뿐 아니라 엄격하고 획일화된 학교 문화 전반을 다르게 인식하게 했을 것이다.[ref] 1994년 발표된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 가사는 사회적 성공을 위한 통과 의례로 ‘자연스레’ 여겨졌던 학교를 ‘낯설게’ 보게 된 1990년대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가수들은 이러한 이유로 당시 ‘10대 대통령’으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됐어(됐어)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족해(족해) / (……)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ref]
그러나 그 황금기는 1997년, 한국 사회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고 IMF가 요구한 기업 구조 조정 등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로 빨려 들어가며 ‘찰나’의 순간이 되었다. 친자본·반노동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하 한국 사회는, 확장된 경제 규모만큼 일자리가 늘어나던 산업화 시대와는 달리 일자리 부족을 겪으며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벌이는 무한 경쟁 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가부장적 젠더 규범으로 인한 사교육 주체의 여성화
이른바 1990년대의 문화 황금기가 경제적 위기 없이 찰나로 그치지 않고 충분히 숙성되었다면 어땠을까 자주 되뇌는 것은, 그 충분한 시간이 산업화 시기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고 획일화된 ‘국민 사회’ 곳곳을 다채로움으로 채우며 ‘시민 사회’로의 변모를 이끌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스치듯 황금기가 지나자,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노골화한 소수 좋은 일자리를 중심에 둔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당시 학령기 자녀를 둔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의 부모들(이른바 ‘586 세대’)과 이후 세대로 하여금 ‘출혈’이라 불러도 좋을 과다한 사교육비 경쟁을 마다치 않게 했다. 교육에 관한 한 하위문화가 없는 한국 사회[ref]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특히 서울 강남 아이들의 ‘한 집 걸러’ 미국 등 영어권 국가 유학은 강북권 아이들의 필리핀이나 호주 유학, 경기도권의 영어마을 유치 등의 지형을 만들며 한국 사회의 계층을 초월한 일관된 (영어 중심의) 사교육 욕망 혹은 그에 대한 추종을 보여 준다. 영어마을조차 만들 수 없는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비판 대상이기보다 박탈감만을 안겨 줄 뿐이다. 이에 대한 저항적 담론이나 ‘다른’ 실행력을 갖춘 하위문화 없는 한국 사회의 교육 지형에서 중산층의 결정과 실천 내용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ref]에서는, 중산층이 벌이는 이 사교육 경쟁 속에 저소득층마저 추종 혹은 박탈감의 형태로 포섭되며 중등 공교육은 급격히 ‘졸업장 발급 기관’으로 전락한다.
좋은 일자리는 줄고, 그마저도 AI와 또 나눠 가져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전망이라면, 즉 어떤 스펙으로도 적정 소득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워지는 맥락이라면, ‘좋은’ 직업을 향한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사교육 대신, 고학력의 자신들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른바 교육 선진국의 ‘전인적 교육’을 요구하며 공교육의 입지를 공고화하는 선택지도 가능했을 텐데, 한국 사회 부모들은 ‘과다 출혈’을 동반하는 과잉 경쟁을 택했다. 한국 정부의 공교육에 관한 철학 부재와 상상력 빈곤이 만들고 유도한 이 같은 결과로 인해 전인성을 중심에 둔 교육은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한 ‘대안학교’ 안으로 갇히고 말았다.
1990년대 들어서 더욱 경쟁적으로 변모한 사교육과 이로 인한 공교육 무력화 과정에는 ‘학부모’로 퉁쳐지는 여성, 엄마들이 있다. 1980년대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를 거친 이들은 줄곧 자본주의적 생산성(고소득)을 향한 대사회적 욕망과 실력을 키워 갔으나, 근대 시기의 신여성에게 그러했듯, 준비되지 않은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경제 질서는 그녀들에게도 ‘현모양처’ 역할만을 강요했다.[ref] [경향신문 젠더기획팀(2023),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휴머니스트]는 현모양처의 역할을 부여받은 여성들이 어떻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까지 맡아 왔는지 여성들의 구술을 통해 밝힌다. 그러나 책 제목 중 ‘명함이 없지’가 드러내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 대부분은 여성들의 경제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가계 부양 활동을 ‘생산 활동’으로 간주하지도, 수치화하지도 않음으로써 여성을 비생산 인구로, ‘현모양처’로 묶어 둔다. [/ref] 그랬기에 그녀들은 고학력의 중산층답게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와는 ‘격’이 다른 ‘모성적 생산성’을 향해 질주함으로써 가계 부양자 남성과 호흡하며 ‘가문’을 잇거나 빛낼 자녀 사교육에 몰입했다.[ref] 2010년대 전후로 유행했던 이야기인 중산층 자녀 입시 성공을 위한 네 가지 조건,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정보력, 아주머니의 요리 실력’은 자녀의 대입이 다만 핵가족이 아닌 ‘가문’의 기획임을 보여 준다. 이 기획을 잘 보여 준 드라마로는 〈아내의 자격〉(JTBC, 2012)이 있다. ‘가문’의 기획에 아내인 여성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 제목에서 드러난다.[/ref]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 GGI)[ref]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하는 지수로서 경제적 참여 및 기회, 교육적 성취, 보건 및 생존, 그리고 정치적 권한 등 4개 영역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상대적 참여 혹은 성취를 나타낸다. 한국은 2022년 조사국 146개국 중 99위를 차지했지만 ‘경제적 참여 및 기회’에서는 2021년과 마찬가지로 123위를 차지했다. 특히 경제 활동 영역 중 관리자 직급의 여성 비율은 2021년 125위였고, 관리자 직급에서의 임금 차이 역시 120위였다. 그럼에도 한국이 전체 순위로 100위 안팎에 있는 것은 교육적 성취와 보건 및 생존에 있어 높은 순위를 보이기 때문이다.[/ref]에서 만년 하위권에 머물며, 일하는 여성의 환경을 나타내는 유리 천장 지수는 OECD 회원국 비교 11년째 꼴찌인 한국 사회가 고학력 여성들의 자본주의적 생산성 대신 과도한 모성적 생산성을 목도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70~80%였던 노동 시장 참여율이 결혼 이후 출산과 더불어 50% 안팎으로 크게 줄고, 여성에게 편중된 육아와 가족 돌봄 현실을 무시한 유리 천장에 막혀 노동 시장에 참여한 여성이라도 고위직으로 오르기 어려운 한국 여성들은, 경제 영역에서의 생산성 발휘 기회가 차단되자, ‘풍선 효과’가 그러하듯, 대신 집 안에서 자녀들을 상대로 한 모성적 생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언급했듯, 자녀 교육에 관한 한 하위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 사회에서 고학력 중산층 그녀들의 사교육 실천은 다른 계층의 여성들에게도 확산되어 박탈감 또는 불안감을 안기며 낮은 수준으로나마 이를 좇아가게 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자녀 사교육의 주체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여성들로 인해 온전히 ‘여성화(feminization)’되었다. 좋은 일자리를 줄여 기업과 자신에게 최대의 이윤을 남기고자 반노동적 경제 운용으로 사회 전체를 무한 경쟁의 늪으로 끌고 간 이들은 (글로벌) 엘리트 남성들인데, 그 무한 경쟁 속에서 자녀들을 살아남게 하는 책임은 엘리트 여성들이 떠안고 있는 한국 사회는, 그러므로 가부장적 젠더 규범이 철저히 박제된 곳이다.
교육 소비자의 모성적 생산성 실천에 대한 혐오
20년 전에 이미 낮은 출생율을 염려하며 아이는 자신이 길러 주겠다고 공언한 전직 대통령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중에도 대부분의 엄마들은 정부 운영이 아닌 민영 기관 혹은 ‘이모님’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고, 그런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좋은 일자리를 향한 무한 경쟁은 사교육 시작 연령을 점차 낮추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특히 박제된 젠더 규범으로 자녀 교육을 전담하게 된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은 교육에 대한 ‘고급 정보’를 비교·분석하고 평가하는 ‘현명한’ 교육 구매자, 교육 소비자 감각을 일찍부터 키워 가게 된다. 대사회적 욕망을 품고 키워 왔으나 일터로부터 조기 퇴출당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성들은 그러므로 광활한 교육 시장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영원한 ‘갑’이라는 소비자로 변모하게 됐다. 그러나 학력과 경제력을 갖춘 여성들이 다만 ‘집안의 존재(아내, 엄마, 며느리)’로, 자녀 교육 전담자로서의 교육 소비자로 변모하게 된 것은 호시절을 누렸던 교사들에게는 재앙이다. 막강 소비자가 된 그녀들이 교사들에게 호시절을 걷어들이고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새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친자본·반노동으로 요약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언급했듯 1997년 이후에 노골화되었고, 맥락에 따라 다양한 실행으로 사람들의 인식과 삶의 형태를 바꿔 냈다. 교육 예산은 줄이되 다양한 평가에서 ‘우수(優秀)’로 인정되면 인센티브가 주어졌으므로 각 학교는 줄어든 예산을 만회하기 위해 무한 경쟁 상태에 놓였다. 이렇듯 호시절의 자신들을 성찰하며 학생인권과 같은 시대적 흐름과 호흡하고 새로운 교사상에 대해 고민해 볼 겨를도 없이 교사들은 ‘우수’를 위해 학교생활의 모든 면(수업, 학생 상담, 학교폭력 처리, 학생 성적, 연구 프로젝트 등)을 수치로 환산하고 비교·평가·보고하는 엄청난 행정 업무에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의 역할은 점점 교육이나 훈육이 아닌 ‘관리’가 되어 갔는데, 이는 자녀 교육의 질 평가에 철저한 교육 소비자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ref] 일본 심리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책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2016, 살림) 제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격려하며, 경쟁 상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강조한다. [/ref]라고 했던가. 적극적인 교육과 훈육으로 ‘수준 높은’ 교육 소비자들의 불만족이나 낮은 평가를 받느니, 차라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소극적 ‘관리’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교사들이 판단한 것이다.
중산층 고학력의 그녀들은 최초의 공교육인 초등학교를 만나게 되면 이른바 ‘학부모’로서는 어떻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행동할까. 많은 경우, 특히 대도시의 그녀들은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한때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발휘했을 것이고, 그러나 역시 많은 경우 한국 노동 시장의 고질적 가부장성으로 인해 그 생산성을 모성적 생산성으로 전환했어야 했으며, 모성적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교육 시장에서 현명하고 똑똑한 소비자가 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학군뿐 아니라 교사의 성별, 나이, 전공, 출신 대학교 등 자녀가 경험할 교육의 질 평가에 필요한 모든 객관적 정보뿐 아니라 자녀와 그녀 자신에게 학교와 교사가 어떤 말과 행위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꼼꼼히 비교하고 평가하며, 만족스럽지 않을 때 교사보다 더 유려한 언변과 작문으로 민원을 넣거나, 그 민원이 신속히 원하는 방식대로 처리되지 않을 땐 ‘진상 고객’이 매장을 찾아와 “매니저 나오라 그래!”를 외치듯, 책임자인 교장까지도 불러 세울 것이다.
고위직 자녀의 학폭 사건 보도를 통해 그려 볼 수 있는 이 같은 모습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드물지 않게 재현된다. 2012년 드라마 〈아내의 자격〉(JTBC)이나 2018년 〈스카이 캐슬〉(JTBC)에서 생생히 보여 줬듯 이러한 진상 고객, 교육 소비자는 늘 엄마, 여성이다. 높은 완성도와 시청률에서 보듯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나, 교육 소비자가 된 엄마, 여성들만을 현실적으로 그렸을 뿐, 드라마는 그녀들이 ‘진상’이 된 배경은 다루지 않아 이런 류의 재현은 의도치 않았을 여성 혐오를 부추긴다.
교사들의 슬픔, 그리고 한국 사회의 과제
2023년도에 우리는 근래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중에서도 교사들의 죽음은,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와 함께 오래도록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이후 교사들의 연이은 대규모 집회는 그간의 ‘교권 실추’ 과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큰 무력감에 빠져 왔는지를 보여 줬다. 어떤 부모가 어떤 내용의 민원으로 교사를 괴롭혔는지, 직접 찾아와 어떤 모욕감을 안겼는지, 어떻게 교사들을 궁지로 몰았는지 보도될 때마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출석부로, 몽둥이로, 손으로, 발로 가능한 모든 폭력을 가리지 않고 휘둘렀던 ‘그’ 교사들과 지금 ‘이’ 교사들이 같은 전문가(專門家) 집단[ref] 일반적으로 전문가(專門家)라고 할 때는 한자 ‘家’가 의미하듯 구성원들이 오랜 역사에 걸쳐 축적한 일정한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교수, 학자, 의사, 판사 등이 그러하듯 교사 역시도 그들만의 축적된 지식과 문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문가 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일정 정도의 ‘동일체성(同一體性)’이다. 지금의 판사가 몇십 년 전의 판결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며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이들의 전문가로서의 지식은 시대와 상관없이 일관되어야 한다는 동일체성에 근거하기 때문일 것이다. [/ref]이 맞나 싶을 만큼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질적이기는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라며 주문을 외듯 자녀들에게 교사에 대한 맹종을 강조한 엄마와 “교장 나오라 그래!”라고 소리치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이 압축적으로 변화해 온 한국 사회에서 교사성(敎師性)이나 모성(母性) 혹은 학부모성(學父母性) 역시 20여 년 만에 시계추의 좌우를 오가며 극단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이 젊은 교사들의 죽음이나 엄마들의 극단적 소비자화와 같은 병적인 징후를 드러낸다면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어떤 논의를 해야 할까.
나는 종로의 질서정연한 집회 속 교사들을 보며 “역시 선생님!”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보다, 이전 세대 교사들이 보였던 폭력과 비리, 성적과 경제력을 중심에 둔 학생 편애와 차별, 그로 인해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을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에 대해 성찰했으면 하고 바랐다. 물론 ‘그’ 교사들과 종로의 ‘이’ 교사들은 다른 존재들이지만 교육 전문가로서의 동일체성을 갖고 있다면(앞의 각주 참조), 지금의 모멸감과 교권 실추를 더욱 제대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권리’로서의 교권이 아니라 ‘권위’로서의 교권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지난 세대의 교사성에 대한 성찰이 있었으면 했다.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 문제였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더 좋은 해결을 모색하는 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몇 개의 각론적 법 수정으로 ‘권리’를 보호받으려 한다면, 그 권리는 다른 ‘권리’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에 궁극적인 교사의 ‘권위’는 되찾을 수 없다. 호시절이었을망정 학생을 향한 폭력, 편애, 차별, 그리고 ‘돈봉투’가 내포하는 비리로 겨우 유지될 수 있었기에 한 세대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교사의 권위, 교권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나는 검은 옷으로 연대를 표한 교사들이 생을 마감한 동료에 대한 애도의 시간 동안 과거의 교사성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했으면 바랐다. 그 단단한 성찰 위에 입법부에 하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들이 세우는 새로운 교사성으로 교육 전문가로서의 권위와 위상을 스스로 되찾았으면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향한 고등교육과 이후의 오랜 준비 기간과 욕망이 생애 주기의 하나일 뿐인 출산으로 좌절되면서 한국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녀 사교육을 통한 모성적 생산성의 고양이다. 나는 이것이 여성과 여성의 생애 주기에 적대적인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경제 질서가 낳은 왜곡된 모성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교육에 대해 백 년을 내다보는 국가 주도의 기획력 부재와 인재 양성의 책임을 개인과 시장에 미룬 국가의 뻔뻔함이 근본적 원인이기는 하지만, 여성과 여성 생애 주기에 적대적인 노동 시장을 개혁하기를 미루며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축적된 역량을 재생산 영역으로 제한한 ‘의도적 실책’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교육의 시장화와 박제된 젠더 규범이 오늘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두 축임을 강조하며 글을 마친다.
특집 _ 학부모 혐오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
교육의 시장화와 박제된 젠더 규범
- 교사성과 학부모성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글
나임윤경
ynah@yonsei.ac.kr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사랑의 매’로 유지된 호시절에 대한 향수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현직 교사들과의 교육대학원 수업에서 체벌은 언제나 논쟁적 주제였다. 나는 ‘폭력의 사회화’를 반대하며 학생을 향한 ‘폭력 효율성’이 민주 사회의 학교에서라면 가르치고 배워서는 안 될 것이라 주장했고, 교사들은 나에게 체벌이 금지돼 엉망이 된 학교 현장에 무지하다고 했다.
“현장을 모른다”는 말에 꽂혔을까. 이후 몇 년간 일반대학원생들과 함께 소속 대학교 지역 소재 저소득층 중학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 인문학 교육을 진행했었다.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은 부모나 보호자의 학력,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대부분 교사의 교육과 지휘를 거부했다. 새로운 사람들의 등장에 잠시 교단으로 눈길을 줄 만도 한데, 첫날 나와 대학원생을 소개하는 담임 교사에게 귀 기울이는 학생은 그저 두어 명에 불과했다. 담임 교사는 매우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러나 목청껏 우리를 소개했다. “방과 후 아주 재미난 활동으로 우리와 한 학기를 보낼 언니와 형에게 큰 박수 부탁합니다”라는 교사의 마지막 멘트에 몇몇 학생만이 성의 없는 박수를 보냈을 뿐, 대부분의 학생들은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있거나 떠들며 교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식이었다. 막대로 교단을 힘껏 두드리거나 칠판을 치며 학생들의 주의를 모으려는 교사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체벌에 대해 핏대 높이며 반대했던 내 모습이 ‘현장을 모르는’ 대학 교수의 헛소리였음을 깨닫는 데에는 현장에서의 첫날 하루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체벌이 이 모든 상황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2022년 드라마 〈더 글로리〉(넷플릭스)나 〈스물다섯, 스물하나〉(tvN) 속 교사의 체벌은, 교권 남용이고 명백한 반인권이며 반교육이다. 1990년대를 그린 이 드라마 속 체벌 교사의 공통점은 이른바 ‘뒷배’가 없거나 성적 하위권 학생만을 골라 편파적으로 때린다는 것이다(이들의 행위는 ‘학생의 몸에 고통을 줌으로써 훈육한다’는 의미로서의 체벌이 아니라, 본인들의 ‘성질’을 건드린 대가로서의 학생에 대한 ‘제왕적 폭력’일 뿐이다). 훈육이나 교육이기보다는 ‘화풀이’ 대상으로 약하고 어린 학생의 몸이 필요했을 뿐이었지만, 그런 교사들을 위해 당시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들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폭력의 사회화에 일조했다. 종아리, 엉덩이, 그리고 뺨까지도 붉어지도록 ‘사랑의 매’를 맞고 귀가한 자녀에게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했어, 안 했어!”라며 한 번 더 다그치기도 했다. 그랬다. 이렇게 추켜세워진 ‘빈약한’ 교사의 권위였지만, 강의실에서 만난 어떤 교사들은 그 교권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와 찰나의 ‘문화 황금기’, 그리고 무한경쟁
그때의 부모들은 왜 그랬을까. 교사보다 낮은 학력(문화 자본)과 경제력(금융 자본)이 ‘금쪽같은 내 새끼’ 몸에 함부로 손댄 그들에게 침묵한 이유였을까. 아니면 교사의 폭력마저도 불사해야 할 만큼 교육이, 교육으로만 오를 수 있는 ‘계층 사다리’가 절실했던 걸까.
그 이유가 뭐였든 1960~1970년대는 물론 급속한 경제 성장기였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까지 이어지던 교사들의 이른바 ‘호시절’은 2000년대를 넘어서며 급격히 ‘악몽’으로 바뀌었다. 많은 것을 압축적으로 이루고 경험해 온 한국 사회는 ‘돈봉투’는 물론 교사들의 폭력까지도 빠르게 변화시켜 냈다. 1970년대 소수 엘리트에게만 열려 있던 고등교육은 1980년대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로 들어서며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 동안 이른바 ‘87 민주화 체제’를 이뤄 내고 경험한 그들이 학령기 자녀를 두기 시작하는 2000년대를 전후해서는 교사들보다 학력과 학벌은 물론, 대기업이나 은행권의 고액 연봉 덕에 경제력까지 월등한 부모들이 대거 출현함으로써 교사들은 ‘그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지존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90년대로 들어서며 한국 사회는 주린 배를 채우는 동안 모르고 지냈던 ‘문화적 허기(虛氣)’를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 채우기도 하면서 이전의 산업화 시대와는 매우 다른 지향을 갖기 시작한다. 고도 성장기에 늘 가족, 회사와 조직, 그리고 국가 발전 명분에 억압되고 가려져 있던 ‘개인적 욕망’이 표출돼 이전과는 달리 ‘개인’을 사유하기 시작하는 매우 다른 문화적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윤여일의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2023)는 이 시기 쏟아지듯 나온 비평지 등의 잡지, 그리고 동성애, 군가산점제, ‘젠더 갈등’ 등의 담론들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가 나름의 문화 황금기로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부모들의 높아진 학력과 경제력은 한국 사회의 짧았지만 매우 강력하게 다가온 이러한 분위기와 만나며 교사들의 ‘사랑의 매’뿐 아니라 엄격하고 획일화된 학교 문화 전반을 다르게 인식하게 했을 것이다.[ref] 1994년 발표된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 가사는 사회적 성공을 위한 통과 의례로 ‘자연스레’ 여겨졌던 학교를 ‘낯설게’ 보게 된 1990년대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가수들은 이러한 이유로 당시 ‘10대 대통령’으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됐어(됐어)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족해(족해) / (……)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ref]
그러나 그 황금기는 1997년, 한국 사회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고 IMF가 요구한 기업 구조 조정 등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로 빨려 들어가며 ‘찰나’의 순간이 되었다. 친자본·반노동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하 한국 사회는, 확장된 경제 규모만큼 일자리가 늘어나던 산업화 시대와는 달리 일자리 부족을 겪으며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벌이는 무한 경쟁 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가부장적 젠더 규범으로 인한 사교육 주체의 여성화
이른바 1990년대의 문화 황금기가 경제적 위기 없이 찰나로 그치지 않고 충분히 숙성되었다면 어땠을까 자주 되뇌는 것은, 그 충분한 시간이 산업화 시기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고 획일화된 ‘국민 사회’ 곳곳을 다채로움으로 채우며 ‘시민 사회’로의 변모를 이끌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스치듯 황금기가 지나자,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노골화한 소수 좋은 일자리를 중심에 둔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당시 학령기 자녀를 둔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의 부모들(이른바 ‘586 세대’)과 이후 세대로 하여금 ‘출혈’이라 불러도 좋을 과다한 사교육비 경쟁을 마다치 않게 했다. 교육에 관한 한 하위문화가 없는 한국 사회[ref]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특히 서울 강남 아이들의 ‘한 집 걸러’ 미국 등 영어권 국가 유학은 강북권 아이들의 필리핀이나 호주 유학, 경기도권의 영어마을 유치 등의 지형을 만들며 한국 사회의 계층을 초월한 일관된 (영어 중심의) 사교육 욕망 혹은 그에 대한 추종을 보여 준다. 영어마을조차 만들 수 없는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비판 대상이기보다 박탈감만을 안겨 줄 뿐이다. 이에 대한 저항적 담론이나 ‘다른’ 실행력을 갖춘 하위문화 없는 한국 사회의 교육 지형에서 중산층의 결정과 실천 내용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ref]에서는, 중산층이 벌이는 이 사교육 경쟁 속에 저소득층마저 추종 혹은 박탈감의 형태로 포섭되며 중등 공교육은 급격히 ‘졸업장 발급 기관’으로 전락한다.
좋은 일자리는 줄고, 그마저도 AI와 또 나눠 가져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전망이라면, 즉 어떤 스펙으로도 적정 소득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워지는 맥락이라면, ‘좋은’ 직업을 향한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사교육 대신, 고학력의 자신들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른바 교육 선진국의 ‘전인적 교육’을 요구하며 공교육의 입지를 공고화하는 선택지도 가능했을 텐데, 한국 사회 부모들은 ‘과다 출혈’을 동반하는 과잉 경쟁을 택했다. 한국 정부의 공교육에 관한 철학 부재와 상상력 빈곤이 만들고 유도한 이 같은 결과로 인해 전인성을 중심에 둔 교육은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한 ‘대안학교’ 안으로 갇히고 말았다.
1990년대 들어서 더욱 경쟁적으로 변모한 사교육과 이로 인한 공교육 무력화 과정에는 ‘학부모’로 퉁쳐지는 여성, 엄마들이 있다. 1980년대 고등교육 대중화 시대를 거친 이들은 줄곧 자본주의적 생산성(고소득)을 향한 대사회적 욕망과 실력을 키워 갔으나, 근대 시기의 신여성에게 그러했듯, 준비되지 않은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경제 질서는 그녀들에게도 ‘현모양처’ 역할만을 강요했다.[ref] [경향신문 젠더기획팀(2023),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휴머니스트]는 현모양처의 역할을 부여받은 여성들이 어떻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까지 맡아 왔는지 여성들의 구술을 통해 밝힌다. 그러나 책 제목 중 ‘명함이 없지’가 드러내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 대부분은 여성들의 경제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가계 부양 활동을 ‘생산 활동’으로 간주하지도, 수치화하지도 않음으로써 여성을 비생산 인구로, ‘현모양처’로 묶어 둔다. [/ref] 그랬기에 그녀들은 고학력의 중산층답게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와는 ‘격’이 다른 ‘모성적 생산성’을 향해 질주함으로써 가계 부양자 남성과 호흡하며 ‘가문’을 잇거나 빛낼 자녀 사교육에 몰입했다.[ref] 2010년대 전후로 유행했던 이야기인 중산층 자녀 입시 성공을 위한 네 가지 조건,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정보력, 아주머니의 요리 실력’은 자녀의 대입이 다만 핵가족이 아닌 ‘가문’의 기획임을 보여 준다. 이 기획을 잘 보여 준 드라마로는 〈아내의 자격〉(JTBC, 2012)이 있다. ‘가문’의 기획에 아내인 여성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 제목에서 드러난다.[/ref]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 GGI)[ref]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하는 지수로서 경제적 참여 및 기회, 교육적 성취, 보건 및 생존, 그리고 정치적 권한 등 4개 영역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상대적 참여 혹은 성취를 나타낸다. 한국은 2022년 조사국 146개국 중 99위를 차지했지만 ‘경제적 참여 및 기회’에서는 2021년과 마찬가지로 123위를 차지했다. 특히 경제 활동 영역 중 관리자 직급의 여성 비율은 2021년 125위였고, 관리자 직급에서의 임금 차이 역시 120위였다. 그럼에도 한국이 전체 순위로 100위 안팎에 있는 것은 교육적 성취와 보건 및 생존에 있어 높은 순위를 보이기 때문이다.[/ref]에서 만년 하위권에 머물며, 일하는 여성의 환경을 나타내는 유리 천장 지수는 OECD 회원국 비교 11년째 꼴찌인 한국 사회가 고학력 여성들의 자본주의적 생산성 대신 과도한 모성적 생산성을 목도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70~80%였던 노동 시장 참여율이 결혼 이후 출산과 더불어 50% 안팎으로 크게 줄고, 여성에게 편중된 육아와 가족 돌봄 현실을 무시한 유리 천장에 막혀 노동 시장에 참여한 여성이라도 고위직으로 오르기 어려운 한국 여성들은, 경제 영역에서의 생산성 발휘 기회가 차단되자, ‘풍선 효과’가 그러하듯, 대신 집 안에서 자녀들을 상대로 한 모성적 생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언급했듯, 자녀 교육에 관한 한 하위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 사회에서 고학력 중산층 그녀들의 사교육 실천은 다른 계층의 여성들에게도 확산되어 박탈감 또는 불안감을 안기며 낮은 수준으로나마 이를 좇아가게 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자녀 사교육의 주체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여성들로 인해 온전히 ‘여성화(feminization)’되었다. 좋은 일자리를 줄여 기업과 자신에게 최대의 이윤을 남기고자 반노동적 경제 운용으로 사회 전체를 무한 경쟁의 늪으로 끌고 간 이들은 (글로벌) 엘리트 남성들인데, 그 무한 경쟁 속에서 자녀들을 살아남게 하는 책임은 엘리트 여성들이 떠안고 있는 한국 사회는, 그러므로 가부장적 젠더 규범이 철저히 박제된 곳이다.
교육 소비자의 모성적 생산성 실천에 대한 혐오
20년 전에 이미 낮은 출생율을 염려하며 아이는 자신이 길러 주겠다고 공언한 전직 대통령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중에도 대부분의 엄마들은 정부 운영이 아닌 민영 기관 혹은 ‘이모님’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고, 그런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좋은 일자리를 향한 무한 경쟁은 사교육 시작 연령을 점차 낮추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특히 박제된 젠더 규범으로 자녀 교육을 전담하게 된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은 교육에 대한 ‘고급 정보’를 비교·분석하고 평가하는 ‘현명한’ 교육 구매자, 교육 소비자 감각을 일찍부터 키워 가게 된다. 대사회적 욕망을 품고 키워 왔으나 일터로부터 조기 퇴출당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성들은 그러므로 광활한 교육 시장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영원한 ‘갑’이라는 소비자로 변모하게 됐다. 그러나 학력과 경제력을 갖춘 여성들이 다만 ‘집안의 존재(아내, 엄마, 며느리)’로, 자녀 교육 전담자로서의 교육 소비자로 변모하게 된 것은 호시절을 누렸던 교사들에게는 재앙이다. 막강 소비자가 된 그녀들이 교사들에게 호시절을 걷어들이고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새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친자본·반노동으로 요약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언급했듯 1997년 이후에 노골화되었고, 맥락에 따라 다양한 실행으로 사람들의 인식과 삶의 형태를 바꿔 냈다. 교육 예산은 줄이되 다양한 평가에서 ‘우수(優秀)’로 인정되면 인센티브가 주어졌으므로 각 학교는 줄어든 예산을 만회하기 위해 무한 경쟁 상태에 놓였다. 이렇듯 호시절의 자신들을 성찰하며 학생인권과 같은 시대적 흐름과 호흡하고 새로운 교사상에 대해 고민해 볼 겨를도 없이 교사들은 ‘우수’를 위해 학교생활의 모든 면(수업, 학생 상담, 학교폭력 처리, 학생 성적, 연구 프로젝트 등)을 수치로 환산하고 비교·평가·보고하는 엄청난 행정 업무에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의 역할은 점점 교육이나 훈육이 아닌 ‘관리’가 되어 갔는데, 이는 자녀 교육의 질 평가에 철저한 교육 소비자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ref] 일본 심리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책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2016, 살림) 제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격려하며, 경쟁 상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강조한다. [/ref]라고 했던가. 적극적인 교육과 훈육으로 ‘수준 높은’ 교육 소비자들의 불만족이나 낮은 평가를 받느니, 차라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소극적 ‘관리’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교사들이 판단한 것이다.
중산층 고학력의 그녀들은 최초의 공교육인 초등학교를 만나게 되면 이른바 ‘학부모’로서는 어떻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행동할까. 많은 경우, 특히 대도시의 그녀들은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한때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발휘했을 것이고, 그러나 역시 많은 경우 한국 노동 시장의 고질적 가부장성으로 인해 그 생산성을 모성적 생산성으로 전환했어야 했으며, 모성적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교육 시장에서 현명하고 똑똑한 소비자가 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학군뿐 아니라 교사의 성별, 나이, 전공, 출신 대학교 등 자녀가 경험할 교육의 질 평가에 필요한 모든 객관적 정보뿐 아니라 자녀와 그녀 자신에게 학교와 교사가 어떤 말과 행위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꼼꼼히 비교하고 평가하며, 만족스럽지 않을 때 교사보다 더 유려한 언변과 작문으로 민원을 넣거나, 그 민원이 신속히 원하는 방식대로 처리되지 않을 땐 ‘진상 고객’이 매장을 찾아와 “매니저 나오라 그래!”를 외치듯, 책임자인 교장까지도 불러 세울 것이다.
고위직 자녀의 학폭 사건 보도를 통해 그려 볼 수 있는 이 같은 모습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드물지 않게 재현된다. 2012년 드라마 〈아내의 자격〉(JTBC)이나 2018년 〈스카이 캐슬〉(JTBC)에서 생생히 보여 줬듯 이러한 진상 고객, 교육 소비자는 늘 엄마, 여성이다. 높은 완성도와 시청률에서 보듯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나, 교육 소비자가 된 엄마, 여성들만을 현실적으로 그렸을 뿐, 드라마는 그녀들이 ‘진상’이 된 배경은 다루지 않아 이런 류의 재현은 의도치 않았을 여성 혐오를 부추긴다.
교사들의 슬픔, 그리고 한국 사회의 과제
2023년도에 우리는 근래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중에서도 교사들의 죽음은,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와 함께 오래도록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이후 교사들의 연이은 대규모 집회는 그간의 ‘교권 실추’ 과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큰 무력감에 빠져 왔는지를 보여 줬다. 어떤 부모가 어떤 내용의 민원으로 교사를 괴롭혔는지, 직접 찾아와 어떤 모욕감을 안겼는지, 어떻게 교사들을 궁지로 몰았는지 보도될 때마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출석부로, 몽둥이로, 손으로, 발로 가능한 모든 폭력을 가리지 않고 휘둘렀던 ‘그’ 교사들과 지금 ‘이’ 교사들이 같은 전문가(專門家) 집단[ref] 일반적으로 전문가(專門家)라고 할 때는 한자 ‘家’가 의미하듯 구성원들이 오랜 역사에 걸쳐 축적한 일정한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교수, 학자, 의사, 판사 등이 그러하듯 교사 역시도 그들만의 축적된 지식과 문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문가 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일정 정도의 ‘동일체성(同一體性)’이다. 지금의 판사가 몇십 년 전의 판결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며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이들의 전문가로서의 지식은 시대와 상관없이 일관되어야 한다는 동일체성에 근거하기 때문일 것이다. [/ref]이 맞나 싶을 만큼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질적이기는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라며 주문을 외듯 자녀들에게 교사에 대한 맹종을 강조한 엄마와 “교장 나오라 그래!”라고 소리치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이 압축적으로 변화해 온 한국 사회에서 교사성(敎師性)이나 모성(母性) 혹은 학부모성(學父母性) 역시 20여 년 만에 시계추의 좌우를 오가며 극단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이 젊은 교사들의 죽음이나 엄마들의 극단적 소비자화와 같은 병적인 징후를 드러낸다면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어떤 논의를 해야 할까.
나는 종로의 질서정연한 집회 속 교사들을 보며 “역시 선생님!”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보다, 이전 세대 교사들이 보였던 폭력과 비리, 성적과 경제력을 중심에 둔 학생 편애와 차별, 그로 인해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을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에 대해 성찰했으면 하고 바랐다. 물론 ‘그’ 교사들과 종로의 ‘이’ 교사들은 다른 존재들이지만 교육 전문가로서의 동일체성을 갖고 있다면(앞의 각주 참조), 지금의 모멸감과 교권 실추를 더욱 제대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권리’로서의 교권이 아니라 ‘권위’로서의 교권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지난 세대의 교사성에 대한 성찰이 있었으면 했다.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 문제였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더 좋은 해결을 모색하는 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몇 개의 각론적 법 수정으로 ‘권리’를 보호받으려 한다면, 그 권리는 다른 ‘권리’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에 궁극적인 교사의 ‘권위’는 되찾을 수 없다. 호시절이었을망정 학생을 향한 폭력, 편애, 차별, 그리고 ‘돈봉투’가 내포하는 비리로 겨우 유지될 수 있었기에 한 세대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교사의 권위, 교권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나는 검은 옷으로 연대를 표한 교사들이 생을 마감한 동료에 대한 애도의 시간 동안 과거의 교사성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했으면 바랐다. 그 단단한 성찰 위에 입법부에 하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들이 세우는 새로운 교사성으로 교육 전문가로서의 권위와 위상을 스스로 되찾았으면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향한 고등교육과 이후의 오랜 준비 기간과 욕망이 생애 주기의 하나일 뿐인 출산으로 좌절되면서 한국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녀 사교육을 통한 모성적 생산성의 고양이다. 나는 이것이 여성과 여성의 생애 주기에 적대적인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경제 질서가 낳은 왜곡된 모성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교육에 대해 백 년을 내다보는 국가 주도의 기획력 부재와 인재 양성의 책임을 개인과 시장에 미룬 국가의 뻔뻔함이 근본적 원인이기는 하지만, 여성과 여성 생애 주기에 적대적인 노동 시장을 개혁하기를 미루며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축적된 역량을 재생산 영역으로 제한한 ‘의도적 실책’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교육의 시장화와 박제된 젠더 규범이 오늘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두 축임을 강조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