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특집] 각자도생학교 (정은경)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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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 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 교사들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각자도생 학교


정은경

6년 차 초등 교사, 교육노동자현장실천




각자도생의 사회라고들 한다. 학교도 딱 그렇다. ‘창의·배려·소통으로 꿈을 키우는 행복교육’, ‘존중·배려·협력으로 성장하는 희망교육’, 학교 앞에 걸린 이런 아름다운 수식어들은 다 거짓이다. 각자도생 사회, 서로가 적이 되어 경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도록 사회를 세팅해 놓고 누구도 죽지 않길 바라는 건 모순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를 말했던 학생의 죽음에 이어 ‘업무 폭탄과 학생 난리가 버겁다’라는 말을 남긴 교사의 죽음으로 수많은 교사들이 거리로 나왔다. 1986년 학생의 죽음과 2023년 교사의 죽음은 공통적으로 교육을 경쟁으로 옥죄고 착취의 쳇바퀴를 굴리고 있는 자본주의가 불러온 ‘사회적 타살’이다. 나는 아직 ‘운이 좋아’ 살아 있지만 서이초 교사가 겪은 일은 나의 일,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교사들은 각자도생 학교에서 ‘독박 노동’을 하며 생존의 위기 앞에 서 있다.



분업화된 노동,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교사가 행정 업무에 시달리며 정작 수업 준비를 할 시간은 없다는 말은 하루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신규 발령을 받고 처음 학교에 간 날, 협의 과정 없이 통보받은 학년은 그 학교에서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했던 학년이었다. 주어진 업무는 ‘학습 준비물’, ‘과학’, ‘영재’, ‘환경’이었다. 학교 전체 학습 준비물을 취합해서 주문하고, 과학실 안전 관리와 과학의 날 행사를 추진하고, 영재 교육과 관련한 서류를 처리하고, 각종 환경 관련 공문서를 처리했다. 하루종일 공문서를 들여다보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야 다음 날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신규라서, 저경력이라 서툴러서 당연한 거라 여겼다. 교무실과 행정실을 바쁘게 오가던 어느 날, ‘학교 총괄’ 업무를 맡은 교장이 교장실에서 개인 연주회를 위한 악기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교사로서 내가 맡은 노동이 무엇일까? 학교 안의 노동은 누가 어떻게 분담하고 있을까? 질문하기 시작했다.


교사는 보통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수업이라고 퉁쳐지는 교사의 업무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수업은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학급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수업을 기획하고, 적절한 수업 자료를 만들고, 학생 한 명 한 명과 상호작용하며 피드백을 하는 일련의 노동을 말한다. 학생과 관계를 형성하고 학생의 성장을 지원하는 상호작용과 보호자와 관계 맺고 소통하는 노동도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해결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동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쉽게 간과되며 교사의 ‘업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대신 수업이 아닌 행정 업무가 교사의 ‘업무’로 부과된다. 수업 노동은 오롯이 교사 혼자의 일이 된다.


학교 안 노동은 업무 분장표에 적혀 있듯 빼곡하게 분업화되어 있다. 분업화는 학교에서 각자가 맡은 업무를 철저히 담당자 개인의 몫으로 만든다. 학교 체육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은 모두 함께 고민하고 꾸려 나갈 교육 활동이 아니라 ‘체육교육’ 업무를 맡은 담당 교사의 몫이다.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해도 그건 학교폭력 업무를 맡은 교사의 몫일 뿐이다. 교실에서 학생들 간 갈등이 발생해도 그건 학급을 맡은 교사의 몫일 뿐이다. 포드가 조립 라인을 도입하여 생산성만 강조하면서 노동의 의미를 해체했던 것처럼 교육도 분업화되고 파편화되었다.


학교 안 노동자 정원은 계속 줄어드는 반면 학교가 운영되기 위한 기본적인 업무는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는 계속 과중되어 왔다.❶ 관례적 업무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대신 사회적 문제를 쉽게 교육 탓으로 돌리면서 학교의 업무가 늘어나기도 했다. 늘어난 업무는 학교 안의 약한 고리로 떠밀려 온다. 교장, 교감에서부터 교사에게로 각종 행정 업무와 민원이 떠밀려 온다. 기피 학년과 기피 업무가 신규·저경력 교사나 전입 교사에게 떠밀려 온다. 정규직 교사에게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떠밀려 온다. 이 업무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업무인지, 누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은 지워진 채 그저 각자의 업무에 고립된다. 서로가 업무 말고도 서로를 떠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약한 고리로 밀려 온 업무는 끝내 노동자를 죽음에 잠기게 했다. 하지만 ‘내 담당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능력주의와 무너진 학교 민주주의 속의 독박 노동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며 경쟁 교육과 독박 노동을 정당화시킨다. 나는 ‘성적’이라는 틀에 모든 다양성을 구겨 넣을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숨 쉴 곳을 찾아 새로운 교육을 시도하는 혁신학교로 왔다. 지식 암기 능력을 겨루는 시험 대신, 학생 개개인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 성장 평가를 시행했다. 사실 초등학교는 2011년부터 순차적으로 중간·기말고사 같은 지필 시험이 폐지되고 교과 상시 평가나 성장 평가가 도입되었음❷에도 불구하고 “시험 안 봐요?”가 보호자와 학생의 단골 질문이었다. 안 본다는 대답에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보호자는 답답해했다. 심지어는 보호자가 “학교에서 환경, 인권 이런 거 교육하지 마세요. 그런 건 집에서 알아서 할 거고 학원 보낼 필요 없게 공부나 제대로 시키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능력주의가 얼마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사회가 기대하는 학교교육의 기능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더 놀라웠던 것은 동료 교사들의 반응이었다. 교사들은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을 불안해했고 시험을 통해 ‘학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책무라 여겼다. 매일매일 쪽지 시험과 단원 평가가 시행되었고 학생들은 서로의 점수를 물으며 자랑스러워하거나 위축됐다. 배움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것이 되었다. 학생들은 “내 거 베끼지 마!”, “넌 이것도 몰라?”, “너는 못해서 같이 하기 싫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능력주의가 정당화하는 ‘성적’이라는 틀은 교사에게도 마찬가지다. 승진 제도와 성과급은 교사를 ‘성과’라는 틀에 가뒀다. 승진 제도는 교사가 하는 교육 활동을 점수 매겨 교육 활동을 승진을 잣대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승진 가산점은 학교폭력에도 적용되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학교폭력 예방 교육과 학생 상담도 ‘성과’로 만들어서 학생의 상처마저 교사의 능력으로 계산해 버렸다. 성과를 매겨 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성과급제는 누군가가 기피 학년과 기피 업무를 맡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학교폭력 업무는 S등급’이라는 성과급 기준표는 기피 업무를 돈으로 쉽게 보상해 버림과 동시에 그 업무를 오롯이 개인에게 떠안겨 버렸다. 성과급 기준표를 논의하면서 교사들은 누가 더 힘든지 경쟁하는 한편 더 편한 학년과 업무를 맡기 위해 경쟁한다. 자연스레 교사들의 연대와 협력은 무너졌다.


학교 구성원 간 소통과 신뢰가 무너졌기에 학교 민주주의도 무너졌다. 민주 시민을 양성해야 하는 학교지만 학교에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게 오직 교장이 의사 결정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교직원이 모두 모여 A를 합의해도 B라고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교장에게 있다. 보직 교사 회의, 교사 회의에서 협의를 하고 교장이 결정한다. 어렵게 모아 낸 의견도 교장에 의해 쉽게 뒤집어지는 구조 속에서 교사들은 무기력해진다. 승진 제도는 권위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더욱 어렵게 한다. 협의할 자리조차 주어지지 않고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며 결정을 내리고 통보하는 방식이 대다수 학교의 모습이다. 교사의 목소리는 죽어 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 쉽게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목소리에 익숙해져서일까. 혁신학교에서 시도했던 ‘교직원 다모임’은 교직원이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하는 과정이 비효율적이며 힘들고 시간 낭비라는 평을 들었다.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악화된 노동 환경, 과밀 학급과 과중한 업무는 서로 만날 시간과 공간을 삭제했고 서로를 돌볼 여유를 뺏어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육부는 교원 정원을 줄일 것을 발표했다.❹ 학교 구성원이 모두 모일 시간도, 모일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학교 안에서 서로는 소외되고 병들어 갔다. 동료 노동자가 업무 폭탄으로 힘들어해도, 불안정한 일자리로 생계를 걱정해도, 악성 민원 전화에 상처를 받아도, 폐암으로 죽어 가도 당장 나의 생존이 우선일 뿐이다. 학교공동체는 없다.



동료의 눈을 마주 보는 것부터


노동이 분업화되어 개인에게 떠맡겨지고, 노동자 간 연대와 협력이 무너진 각자도생 학교 안에 남아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동료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공간 밖으로 나와 동료와 눈을 마주 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그리고 함께 외치자. 죽음의 구조를 이제 그만 멈추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동료와 더 많은 인권과 더 많은 민주주의다.❺ 교육은 더 이상 성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경쟁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학교 구성원 모두가 소외되지 않고 목소리 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을 위해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여건과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동료를 신뢰하며 협력하고 연대하는 공동체,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학교여야 하고 우리 사회여야 한다. 우리 함께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 함께 살자. 


❶ “인력 부족·과다 업무에 갈등하는 학교 노동자들”, 〈매일노동뉴스〉, 2022년 10월 28일.

❷ “초등 성장 평가제 도입했더니 ‘학생이 변했다’”, 〈뉴스1〉, 2016년 2월 20일.

❹ “유초중등 교사 채용 감소 예고… 교원단체 “과밀 학급 방치하나””, 〈뉴시스〉, 2023년 8월 9일.

❺ “교사단체들, “윤석열 정권의 ‘교권’ 대책을 거부한다””, 〈민플러스〉, 2023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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