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 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 교사들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교육에는 대화가 있는가
글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교육은 배우는 자의 욕망과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 사이의 갈등이다. 많은 경우에 배우는 자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배우려고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의 효능감이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의 시선은 멀리 보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교육(education)이기보다는 훈련(training)일 경우가 많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몸’을 만드는 것 — 문제를 푸는 ‘머리’도 몸이다 — 에 관심이 집중된다.
반면 가르치는 자가 생각하는 교육은 훈련과는 다르다. 가르치는 자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보다 배우는 자의 현 상태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교육 활동을 기획한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가 요구하는 것과 달리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며 배우는 자의 욕망에 어긋나게 행위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의식 중심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는 ‘의식’을 중심에 둔다.
이 둘 사이에서 교육은 여러 가지 경우에 불가능해진다. 첫 번째는 배우는 자가 아무런 욕망이 없을 때다. 배우는 자가 욕망이 없이 무기력하면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과 만나는 것이 없다. 이 경우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반면 가르치는 자가 문제의식이 없을 경우에도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의 욕망을 추종하기만 한다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맞춤형 상품을 파는 서비스에 불과하다. 거기에 ‘만족’은 있겠지만 성장은 없다.
마지막은 이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만나지 못할 때다. 이 경우 배우지 못한 자의 욕망과 만나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가진 교사는 교육에 대해 ‘환멸’하게 된다. 더구나 그 배우는 자의 욕망이, 최근의 몇몇 사태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배우는 자 본인의 욕망도 아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통해 ‘모니터링’을 하는 ‘학부모’로 대변되고 대표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환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교육이 서비스가 된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자(또는 학부모)의 욕망에 충실한 교사가 제도로부터 ‘유능’한 교사로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 환멸하고 냉소하게 된다.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교육의 핵심인 문제의식은 성과가 되지 않고 대중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추수하는 자가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상황에서 학교가 ‘교육 기관’인지에 대해 환멸하고 냉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훈련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교육이 훈련이라면 가르침(teaching)이 아니라 코칭(coaching)이 필요하다. 얼핏 생각하면 코칭은 티칭과는 달리 배우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실행하며 주도권을 가지고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가르침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활동’은 없고 가르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었기에 교육의 주도권을 ① 배우는 자의 ② 활동에 두는 것이 보다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코칭의 과정은 교육에 포함된다. 그러나 교육은 코칭을 통한 훈련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코칭이 몸을 숙련시키는 과정이라면 교육은 그 몸의 지식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즉 개체(개인)의 개별적 몸에 특정한 역량이 능수능란하게 붙게 하는 훈련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 앎을 개별적인 것에서 도약해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의 핵심은 앎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누구나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교육은 전적으로 언어의 문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훈련은 암묵지의 문제다. 훈련은 코치하는 자의 몸에는 새겨져 있는 암묵지를 반복 훈련을 통하여 배우는 자의 몸으로 이전한다. 이 과정에도 언어는 작용하지만 그보다는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의 몸을 관찰하고 반복적으로 교정해 주면서 코치하는 자의 몸과 같은 몸을 만드는 과정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르치는 자의 암묵지를 배우는 자의 암묵지로 전수하는 것이 코칭이며 훈련이다.
교육은 암묵지를 암묵지로 곧바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명시지의 과정을 거친다. 즉 가르치는 자의 암묵지를 체계적인 이론을 통해 언어로 보편타당한 앎인 명시지로 끌어올린다. 이 명시지는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 이후 교육은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 명시지를 훈련과 같이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는 자의 몸에 새긴다. 이 과정을 통해 교육은 앎을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전승 가능한 것이 된다.
이 점에서 이전 시기 한국의 교육처럼 교육의 과정에서 훈련이 없이 의식의 수준만 강조하는 폐단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교육이 아니라 훈련을 강조하고, 가르침을 부정하며 코칭을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 몸에 익숙해지지는 않은 채 언어의 수준에서 말만 할 줄 아는, 그러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무능한’ 존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 기계가 되어야 하는 한국 입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 또한 일종의 ‘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앉아서 시험 문제를 풀어 정답을 맞히는 훈련만 반복한다. 즉 역설적으로 의식의 수준에만 앎이 머물고 몸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정답을 맞히는 데 최적화된 ‘몸’으로 훈련된 것이다. 머리만 남은 몸이 이 훈련의 결과로서의 몸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르침은 정답을 맞히는 ‘코칭’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물론 교육이 최종적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몸’이다. 그러나 그 몸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몸이 아니라 ‘생각하는 손’으로서의 몸이다. 그 생각한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로 전승할 수 있는 몸이다. ‘말’할 수 없다면, ‘글’로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보편적 앎이 아니다. 우연하고 개별적인 앎은 교육, 특히 근대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교육은 몸에 새겨진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묻는다.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것인가, 아닌가? 반복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일회적인 것인가? 타자에게 전승 가능한 것인가? 따라서 교육은 끊임없는 비판적인 문제 제기의 과정이다. ‘모두’가 모두가 될 때까지 반복하면서 공통된 보편적 앎에 도달하려고 하는 공동의 노력이 교육의 과정이다. 가르치는 자만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의식에 초대되어야 한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문제의식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대화’다. 문제의식을 가로막는 욕망을 통제하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대화’다. 이 대화를 통해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은 배우는 자의 문제의식으로 매개되고(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매개를 통해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 ‘앎’으로 다시 가르치는 자에게 매개된다. 프랑스 철학자 라투르식으로 말한다면 번역을 통해 새롭게 발생한 의미가 원문에 더해지며 앎은 변형적 반복을 거치며 더 풍부해지고 새로워진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육 현장에서 훈련을 품은 배움, 코칭을 품은 가르침으로서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문제’ 제기를 공유하는 대화가 있는가? 문제 제기를 공유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문제를 변주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로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이 가능한가? 교육 현장에서의 대화는 ‘나’의 개별적 앎을 넘어서서 모두를 향한 모두의 앎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유능’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교육 불가능에 의해 자행된 참혹한 사건들을 2023년에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집 | 교실의 슬픔, 교육의 불가능성 | 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 교사들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교육에는 대화가 있는가
글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교육은 배우는 자의 욕망과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 사이의 갈등이다. 많은 경우에 배우는 자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배우려고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의 효능감이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의 시선은 멀리 보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교육(education)이기보다는 훈련(training)일 경우가 많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몸’을 만드는 것 — 문제를 푸는 ‘머리’도 몸이다 — 에 관심이 집중된다.
반면 가르치는 자가 생각하는 교육은 훈련과는 다르다. 가르치는 자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보다 배우는 자의 현 상태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교육 활동을 기획한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가 요구하는 것과 달리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며 배우는 자의 욕망에 어긋나게 행위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의식 중심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는 ‘의식’을 중심에 둔다.
이 둘 사이에서 교육은 여러 가지 경우에 불가능해진다. 첫 번째는 배우는 자가 아무런 욕망이 없을 때다. 배우는 자가 욕망이 없이 무기력하면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과 만나는 것이 없다. 이 경우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반면 가르치는 자가 문제의식이 없을 경우에도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의 욕망을 추종하기만 한다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맞춤형 상품을 파는 서비스에 불과하다. 거기에 ‘만족’은 있겠지만 성장은 없다.
마지막은 이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만나지 못할 때다. 이 경우 배우지 못한 자의 욕망과 만나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가진 교사는 교육에 대해 ‘환멸’하게 된다. 더구나 그 배우는 자의 욕망이, 최근의 몇몇 사태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배우는 자 본인의 욕망도 아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통해 ‘모니터링’을 하는 ‘학부모’로 대변되고 대표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환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교육이 서비스가 된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자(또는 학부모)의 욕망에 충실한 교사가 제도로부터 ‘유능’한 교사로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 환멸하고 냉소하게 된다.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교육의 핵심인 문제의식은 성과가 되지 않고 대중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추수하는 자가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상황에서 학교가 ‘교육 기관’인지에 대해 환멸하고 냉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훈련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교육이 훈련이라면 가르침(teaching)이 아니라 코칭(coaching)이 필요하다. 얼핏 생각하면 코칭은 티칭과는 달리 배우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실행하며 주도권을 가지고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가르침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활동’은 없고 가르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었기에 교육의 주도권을 ① 배우는 자의 ② 활동에 두는 것이 보다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코칭의 과정은 교육에 포함된다. 그러나 교육은 코칭을 통한 훈련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코칭이 몸을 숙련시키는 과정이라면 교육은 그 몸의 지식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즉 개체(개인)의 개별적 몸에 특정한 역량이 능수능란하게 붙게 하는 훈련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 앎을 개별적인 것에서 도약해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의 핵심은 앎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누구나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교육은 전적으로 언어의 문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훈련은 암묵지의 문제다. 훈련은 코치하는 자의 몸에는 새겨져 있는 암묵지를 반복 훈련을 통하여 배우는 자의 몸으로 이전한다. 이 과정에도 언어는 작용하지만 그보다는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의 몸을 관찰하고 반복적으로 교정해 주면서 코치하는 자의 몸과 같은 몸을 만드는 과정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르치는 자의 암묵지를 배우는 자의 암묵지로 전수하는 것이 코칭이며 훈련이다.
교육은 암묵지를 암묵지로 곧바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명시지의 과정을 거친다. 즉 가르치는 자의 암묵지를 체계적인 이론을 통해 언어로 보편타당한 앎인 명시지로 끌어올린다. 이 명시지는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 이후 교육은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 명시지를 훈련과 같이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는 자의 몸에 새긴다. 이 과정을 통해 교육은 앎을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전승 가능한 것이 된다.
이 점에서 이전 시기 한국의 교육처럼 교육의 과정에서 훈련이 없이 의식의 수준만 강조하는 폐단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교육이 아니라 훈련을 강조하고, 가르침을 부정하며 코칭을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 몸에 익숙해지지는 않은 채 언어의 수준에서 말만 할 줄 아는, 그러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무능한’ 존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 기계가 되어야 하는 한국 입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 또한 일종의 ‘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앉아서 시험 문제를 풀어 정답을 맞히는 훈련만 반복한다. 즉 역설적으로 의식의 수준에만 앎이 머물고 몸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정답을 맞히는 데 최적화된 ‘몸’으로 훈련된 것이다. 머리만 남은 몸이 이 훈련의 결과로서의 몸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르침은 정답을 맞히는 ‘코칭’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물론 교육이 최종적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몸’이다. 그러나 그 몸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몸이 아니라 ‘생각하는 손’으로서의 몸이다. 그 생각한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로 전승할 수 있는 몸이다. ‘말’할 수 없다면, ‘글’로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보편적 앎이 아니다. 우연하고 개별적인 앎은 교육, 특히 근대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교육은 몸에 새겨진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묻는다.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것인가, 아닌가? 반복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일회적인 것인가? 타자에게 전승 가능한 것인가? 따라서 교육은 끊임없는 비판적인 문제 제기의 과정이다. ‘모두’가 모두가 될 때까지 반복하면서 공통된 보편적 앎에 도달하려고 하는 공동의 노력이 교육의 과정이다. 가르치는 자만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의식에 초대되어야 한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문제의식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대화’다. 문제의식을 가로막는 욕망을 통제하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대화’다. 이 대화를 통해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은 배우는 자의 문제의식으로 매개되고(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매개를 통해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 ‘앎’으로 다시 가르치는 자에게 매개된다. 프랑스 철학자 라투르식으로 말한다면 번역을 통해 새롭게 발생한 의미가 원문에 더해지며 앎은 변형적 반복을 거치며 더 풍부해지고 새로워진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육 현장에서 훈련을 품은 배움, 코칭을 품은 가르침으로서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문제’ 제기를 공유하는 대화가 있는가? 문제 제기를 공유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문제를 변주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로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이 가능한가? 교육 현장에서의 대화는 ‘나’의 개별적 앎을 넘어서서 모두를 향한 모두의 앎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유능’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교육 불가능에 의해 자행된 참혹한 사건들을 2023년에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