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_ 동맹의 교실, 해방의 교육학 ②
반란의 감각
문자에 의존하는 교육에 맞선
교육적 반란과 앎의 불가능성
서한영교
poetrypunx@gmail.com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아아 오오 우우 그런 비명들이 짊어진 세계
- 허수경, 〈저 나비〉 중에서
지적장애, 언어장애, 지체장애를 교차하며 최중증 발달장애인으로 불리는 그, 는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사실에 아아하다. 그, 는 가출한 부모를 대신해 고모가 양육을 맡다가 정신질환으로 양육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에 오오하다. 그, 는 열다섯 살에 장애인거주시설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우우한다. 그, 는 그렇게 37년을 “꿈도 미래도 없이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그곳”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으으했다. 그, 는 가족을 찾았으나 연고자인 부모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에 이이하다. 그, 는 다른 친척들의 연락 두절에 아아하다. 그, 는 탈시설하기 위해 서류를 발급받다가 아버지가 대만 사람이라 당시 부계혈통주의에 따라 대만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오오한다. 그, 는 대만인으로 살아왔던 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에 우우하다. 그, 는 미등록 상태로 37년 동안 장애인거주시설에 체류했다는 사실을 탈시설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어 으으하다. 그, 는 탈시설하면 체류 자격이 없어 대만으로 강제 퇴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그, 는 출입국관리소에서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상담을 거절당하고 출생 신고를 통해 해결하라는 말에 아아한다. 출생 신고도 없이 대한민국의 제도 안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어어하다. 그, 는 가정 법원에서는 한국 국적자가 아니므로 가족 관계 등록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오오하다. 그, 는 도봉구청에서도 시설 입소 당시 당사자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말에 우우하다. 그리고 다시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외국인 등록증이, 서울외국인청에서는 다시 여권이, 주한대만대표부는 다시 외국인 등록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으으하다. 그, 는 서류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어했다. 불법 체류 상태인 그, 가 국가 복지 제도 안에서 존재했다는 것은 도대체 누가 설명해 줄 수 있는지 의아하다. 그를, 둘러싼 행정 기관들이 서로 책임만 전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이하다.
그, 는 “누구도 남겨 두지 않는다”라는 유엔의 지속 가능한 세계를 향한 슬로건 속에 자신은 없다는 것에 오오한다. 그, 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8조에서 “장애를 이유로 국적 관련 서류 또는 기타 신분 증명 서류를 취득·소유 및 사용하거나 이주의 자유와 관련된 권리 행사에 필요한 절차를 이용할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조항에 어어하다. 그, 는 수많은 서류들을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아 한국 체류 등록을 하려고 하니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3천만 원의 범칙금을 내야 한다는 것에 어어하다. 그, 는 체류 자격을 간신히 받았지만, 외국인으로서 비자를 받음으로써 사회복지 급여 및 서비스 일체가 중단되고 의료 급여까지 끊겨 13만 원의 건강 보험료가 청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에 으으하다. 그, 는 귀화 신청을 하려 했지만 이를 위해 생계 유지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에 으으하다.
그, 의 막막함에 자막을 달 수 없다.
그, 는 2022년 새해와 함께 노들야학 ‘봉고차’를 타고 마침내 도착했다. 그, 는 낮수업으로 열리는 탈탈탈 반에 들어왔다. 탈탈탈 반에는 12명이 있는데, 한 명을 빼고는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미래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채 오랫동안 격리되어 지내 온 이들로, 탈시설을 하거나 탈시설을 준비 중인 그들, 이 속해 있는 반이다. 지적장애-보행장애-시각장애-자폐성장애-정신장애-청각장애-지적장애-섭식장애-언어장애-저신장장애-지체장애 등 다양한 장애 유형들을 교차/중복으로 겪고 있는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이 모여 있다. 그들, 은 2017년부터 노들야학 봉고차에 터질 듯 꽉꽉 채워 타고선 장애인거주시설과 노들야학을 오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들에스쁘와(Nodeul Espoir)를 징검다리 삼아 노들야학과 장애인거주시설을 오고 가며 한 명씩 한 명씩 ‘탈시설’하여 이제는 단 2명만 봉고차를 타고 오간다.
반역적으로나는방향을잃었다
- 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출판법〉 중에서
신입 교사 첫 참관 수업으로 탈탈탈 반에 들어가 처음 그들(앉은 자리에서 계속 손뼉을 치며 쓰스쓰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그n. 끊임없이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며 끼고 있는 마스크에 침을 흠뻑 적시고 있는 그o. 피자를 시켜 먹어야 한다며 계속해서 112에 전화를 걸고 있는 그d. 두 귀를 힘껏 틀어막고 “놀랬지? 놀랬지! 놀랬지?”를 외치는 그e. 끊임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혼잣말하는 그u. 양말을 벗고 발가락 사이 냄새를 하나하나 맡고 있는 그l), 을 만났다.
발달장애인과 한 공간에서 2시간을 넘게 함께 있어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들, 을 처음 만난 그날 자꾸 움찔움찔했다. 보이지 않는 미세 번개들이 몸속 불안정 기류를 타고 몸 구석구석 내리꽂혔다. 차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낯선 느낌에 소스락소스락했다.
노들야학 17년 차 선배 교사 역시 탈탈탈 반의 그들, 을 처음 만났을 때를 “충격적인 낯설음”으로 떠올렸다. “하루하루 충격적이고 낯설고. (……) 처음에는 진짜 충격이 아주 컸어요. 처음에 왔는데 누군지 확인을 해야 되는데 이름 이름 뭐냐고 이렇게 물어봐도 음성으로 정확하게 답해 주시는 분이 거의 없었고 말을, 아예 응답을 안 하시는 분도 있었고. (……) 일상에서 기본적인 소통 할 때도 실패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느낌이 들 정도로 소통이 쉽지 않은 분들이 계시고 (……) 새로 다 배우는 시간이 있었죠.”❶(노들야학 교사 김유미)
다른 교사도 그랬다. “처음 낮수업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경험은, 시골에 살던 제가 처음으로 피자를 먹고 멀미가 났던 때와 비슷합니다. 말로만 들었던 피자라는 음식, 티비로 보고 들었던 피자가 배달되기 전까지의 떨림, 그리고 드디어 그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의 당황스러움…… 낯선 치즈 냄새 때문에 더는 먹지 못하고 멀미가 났었습니다. 처음 낮수업에서 학생분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했어요. (……) 저는 그날 많이 당황”❷했다며 ‘낯선 당혹스러움’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그날은 탈탈탈 반 낮수업인 노들에스쁘와 시간으로 발달장애인과 몸짓으로 소통하며 춤을 추는 시간이었다. 노들에스쁘와 시간에 가장 강밀도 높은 부분은 커뮤니케이션 서클(Communication Circle)이라는 것인데, 이는 동그란 원을 만들어 둘러앉은 뒤, 자신이 춤추고 싶은 상대와 함께 리듬을 맞춰 춤을 추는 방식이다. 두 사람이 원 안으로 나와 춤을 추고 들어가는 식으로 전체가 돌아가며 참여한다. 주로 듀오로 진행하고 상황에 따라서 솔로와 트리오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는 아프리카 만딩고 전통문화의 춤 형태❸로, 노들에스쁘와의 안무가 엠마누엘 사누의 기획으로 지금까지 7년째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서클에서 중요한 부분은 소통을 향한 ‘모방’이다. 상대방의 몸짓을 모방하고, 나의 몸짓을 모방할 수 있게 내어주는 것. 이 몸짓들이라는 것은,
손가락 세 개를 있는 힘껏 펼쳐 들고 좌우로 흔드는 그e의 몸짓, 두 손을 꼭 쥔 채 빙글빙글 천장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s의 눈짓, 먼 바다로 걸어 들어가듯 몸을 늘어뜨린 채 비척비척 앞으로 걸었다가 뒤로 걸었다 하는 그p의 발짓, 다른 사람 손을 낚시하듯 낚아채는 그o의 손짓, 손을 배 위에 얹은 채 물살이를 쫓듯 빠르게 걷는 그i의 걸음짓, 머리통을 떨어뜨리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반복하는 그r의 고갯짓,
이었다. 난생처음 보았다. 이런 찌그러진 박자와 빠그라진 몸짓들. 도대체 저 몸짓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처음 그 몸짓을 따라 하려고 했을 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기묘해 보이는 몸짓을 흉내 내려고 하니, 당혹감과 막막함 사이에서 자꾸만 멈칫멈칫했다. 찌그러지고, 삐걱거리며, 빠개진 몸짓에 나의 몸짓을 섞어야 한다는 것에 주춤주춤했다. 저, 정체불명의 몸짓을 모방해야 한다는 ‘킬러 문항’ 앞에서 당황했다. 결국, 한번 파트너와 맞추어 춤을 춰 보라는 선배 교사의 제안에 응하지 못했다. 사실, 극구 사양했다.
막 찌른다. (……) 내 몸 내 경험이들어앉아있음직한곳
- 이상, 〈I WED A TOY BRIDE〉 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인간의 형상. 인간.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곧은 몸짓. 꼿꼿함. 바른 자세. 그리고 정체불명의 춤. 불명. 국적불명의 춤. 나이불명의 춤. 성별불명의 춤. 불명의 존재. 찌그러진 낱말들이 버스 창밖에서 웅성웅성했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인간적인 것’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촉발시켰다. “섬뜩한 낯설음(unheimlich)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지그문트 프로이트)이어서 그런지 오랫동안 피부 아래에 퇴적되어 있는 장애-감각의 지층들이 버스 창밖으로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 만났던 지적장애를 겪고 있던 그a, 를 둘러싸고 손가락을 머리에 빙빙 돌리며 “바보 새끼” 하고 장애혐오 발언을 해도 별 거슬릴 것 없었던 우리 반의 감각. 성당 여름성경캠프에서 만난 휠체어 이용 지체장애인 그b, 를 두고 많이들 도와줘야 한다는 말에 다 함께 힘껏 고개를 끄덕였던 종교의 감각. 중학교 때 백반증으로 안면장애가 있던 그l, 과 전신화상장애가 있던 그e, 를 보면서 섬뜩한 불쌍함을 공유하던 우리 학교의 감각. 대학 때 알게 된 시각장애를 겪던 그i, 가 안내견과 함께 지나갈 때면 서둘러 길을 비켜 서며 스스로 착하고 선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던 캠퍼스의 감각. 사고 이후 몇 년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친구의 동생 그s, 를 두고 장애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며 함께 한심하다고 느꼈던 우리의 감각. 필리핀 학교에서 일할 때 지적장애인 딸 m, 을 둔 직장 동료를 가엽다고 느끼던 모두의 감각. 이 무수한 장애-감각들이 바람에 책장 넘어가듯 펼쳐졌다.
계집애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여성혐오를 동원하듯,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장애혐오를 축적해 왔던 것은 아닐까. 사회적 무의식 속에서 발달장애인을 ‘순진한 바보 아이’거나 ‘예측 불가한 위험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복제하며 지내 왔던 건 아닐까. 보편적 인간성을 축조해 내는 정상성의 건축술에 따라 구축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나의 감각은 지나치게 왜소한 거 아닌가. 신체 표면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는 무의식적인 장애혐오 감각이 내 안에 아주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에 번개 맞듯 소스라쳤다. 버스 창밖. 거리에서 그들, 의 몸짓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가 그들, 이 49년, 39년, 37년, 32년씩 장애인거주시설에 갇혀 있거나 방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번개 맞듯 소스라쳤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혼자 움찔움찔하고 있는 걸 들킬까 봐,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1시간을 넘게 걸었다. 거리에서 스쳐 간 모두가 반듯한 정박자를 가진 보행인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노들에스쁘와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37년간 불법 체류 당한 그, 와 춤 파트너가 되었다.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 이상, 〈꽃나무〉 중에서
“그게, 그러니까, 그게, 오늘 춤추는 시간이었어. 커뮤니케이션 서클이라고 있어. 춤을 함께 출 파트너와 함께 단둘이서 서클 안에서 춤을 추는 거야. 그러니까, 그, 가 내 파트너였어. 머리가 반쯤 벗겨진. 쓰러질 것만 같이 내게 걸어 드는. 자기 이름이 쓰인 신발을 신은 채. 두 손을 모두 벌려도 어깨 밖으로 간신히 나가는. 그, 가 간신히 걸어와 내 손을 잡았어. 손톱은 지나치게 짧았고, 모든 손가락에 거스러미가 튀어나와 있었어. 불안했어. 간지러웠어. 겁이 났어. 무서웠어. 슬펐어. 이 모든 게 동시에 움찔했어.
그, 의 몸이 자꾸 내 쪽으로 기울었어. 그, 의 손이 자꾸 떨렸어. 그, 가 자꾸 쓰러질 것만 같아 같이 바닥에 누웠어. 한 바퀴 구르자 그, 도 따라 굴렀어. 다시 뒤돌아 구르자 그, 도 같이 굴렀어. 천장을 보고 누워 그, 가 누운 쪽을 보았어. 그, 가 나를 보고 있었어. 우리는 각자 바닥에 누워 서로를 바라보았어. 그, 가 말없이 말했어. “당신과 나의시차를확인하시오.” 누운 채로 왼손을 들자 그, 가 천, 천천, 천천히 왼손을 들었어. 오른손을 들자, 그, 가 오른손을 서, 서서, 서서히 들었어. 우리의 시차 간격이 춤이 되었어. 그, 가 먼저 돌아누워 귀를 바닥에 대고 누웠어. 나도 따라 돌아누웠어. 그, 가 말없이 말했어. “바닥아래소리를들어보시오.” 지하의 바닷소리. 전기 파도 소리. 번개가 끓는 소리. “보도블록 아래에는 해변이 있다”(68혁명 슬로건)는 소리.
다시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 에게로 다가갔어. 그, 도 일어났어. 왜 쓰러지지 않는 거지? 어떻게 저런 자세로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저렇게 걸을 수 있는 거지? 그, 가 쓰러질 것 같아 그를 반쯤 움켜 안고 스텝을 밟았어. 이것은 춤의 장르입니까? 바다의 장르입니까? 쓰러질 것 같다는 예감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어. 그, 는 그저 출렁이고 있을 뿐. 그, 의 출렁이는 바다에 뛰어든 듯 얼마쯤 허우적거렸을까.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손가락으로 전보 보내듯 그가 내 등을 두드렸어. 읽을 수 없어. 그, 가 두드렸어. “읽지않아도됩니다.” 견고한 이쪽(언어-이성-인간-보편-정상-일반) 세계를, 견고한 근대적 나의 어떤 영토를 정확하게 골라 두드렸어. 그, 가 나를 관통했어. 음악이 끝나고 돌아와 앉아 그, 를 바라보았어. 잇몸이 다 벗겨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어. 따라 웃지 않을 수가 없었어. 이토록 ‘평등하게 시원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어.”
- 그날 그 저녁 반려자와 나눈 대화 중에서
웃음은 산산이부서지고도웃는다. 웃는다. 파랗게
- 이상, 〈조감도:광녀의 고백〉 중에서
그러니까, 그, 가 견고한 어떤 나의 부분을 두드려 깨트렸다. 뭐가 깨진 줄도 모른 채 나도 웃었다. “내가 어떤 것으로 인식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 나를 깨부순다”(줄리아 크리스테바). 표정도 해방될 수 있다는 거. 몸도 해방될 수 있다는 거. 그들의 “춤을 보면 나는 대체 무엇이 부끄럽단 말이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김유미)는 거. 문자에서 해방된 말 없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몸의 모음이 해방의 텍스트가 된다는 거. 당신과 나의 해방이 진실로 이어져 있다는 거. 이런 장르의 웃음은 처음 지어 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춤 동작을 모방하면서 그, 와 나는 문자 밖에 놓인 움직이는 언어로 말했다. 춤으로 사유하고 있음을. 몸짓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손끝으로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비정상, 우월/열등의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는 무수히 고유한 리듬으로 저마다 존재하고 있음을 그, 가 가르쳐 주었다.
전자기 현상을 다루는 물리학에서 대전(帶電)이란 어떤 물체를 ‘반복’해서 문지르며 전기를 띠게 하는 현상을 말한다. 대전된 물체는 정전기를 일으켜 인근의 다른 물체들을 ‘끌어’당긴다. 어쩌면 그, 의 몸짓을 모방하면서 나의 신체에 그, 의 신체가 통할 수 있는 전자기장이 형성되어 그, 의 말 없는 말이 나를 ‘끌어’당긴 것은 아닐까. 듣는다는 것은 귀-감각 기관만의 영토가 아니라 몸 전체가 귀가 된다는 거. “모든 리듬은 우리의 근육에다 말하기”(니체)라는 거. 나무들이 뿌리로 미생물과 ‘화학적 대화’를 나누듯, 그, 와 나는 춤 속에서 ‘전류적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닐까.
진보주의 교육운동가이자 철학자 존 듀이❹는 “문자에 의존하는 교육, 상상력을 배제시키며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도외시하는 교육”에 맞선 “교육적 반란”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욕망, 목적, 관심, 반응 양식이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켜 주는 것이 될 때이다. 이때 우리는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귀로 들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 일어난다”라고 덧붙인다.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귀”로 듣고, “그의 손”으로 두드리고, “그의 입”으로 말하는 전류적 언어는 국어사전에 맞선 반란의 언어였다. 그, 가 일으킨 찌릿찌릿한 세계감(世界感) 속 미지의 일부로서, 나의 “존재를 확장시켜” 나가게 하는 전류적 언어는 근대적 주체에 맞선 반란의 존재론이었다. 상호 접속이라는 감응의 조우, 전류적 리듬 속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동조, 소수적 주체들의 미시적 동맹의 장으로서의 세계감을 익힌다는 것.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라는 것이 국어적 문법을 벗어난 반란의 문법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그, 에게 휘말려 들어가 배웠다. 그, 는 내게 반란을 가르쳤다.
나는다시금새로운것을알아야만했다
- 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출판법〉 중에서
노들야학의 교훈은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이다. 1993년에 개교한 이후 발행한 노들야학의 첫 번째 소식지 《부싯돌》 창간호 첫 페이지에 이 교훈을 제목으로 삼은 노래 악보가 실려 있다. 노래 1절의 “나의 몸짓이 불씨가 되고/ 너의 몸짓이 밑불이 되어/ 우리 불꽃으로 타올라야지”라는 노랫말. 이 노랫말과 거의 정확하게 그, 의 몸짓이 밑불이 되어 나, 의 몸짓에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 가 내 머리에 반란의 불을 붙였다. 듣는다는 것에 대해, 언어에 대해,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해, 정상과 일반이라는 것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라고 내게 횃불을 내밀었다.
그, 가 육박하며 질문한다. 누가 듣고 있는가. 누가 들으려고 하는가.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 누구인가.”(고병권) 말은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문자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는 그 언어는 주객 비분리의 지대에서 국어사전에 기름을 부어 태우고 있는 건 아닌가. 인간적인 몸짓이라고 가정된 보편적 신체는 얼마나 속박되어 있는가. 정상성이라는 허구에 매달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비정상이라고 낙인찍어 왔는가.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타자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프란츠 파농)
그, 가 육박하며 반란을 명령한다. “천박한 감각의 고정관념을 버리도록 하라!” 그, 가 육박하며 나를 가르친다. “네 강철 검은 녹슬어 모래 속에 묻혀 있구나/ 바위와 번개와 천둥으로 그 검을 갈고 닦아라!”(프리드리히 니체) 그, 가 불붙여 던진 질문들은 “천둥처럼 쿵쾅쿵쾅”(박경석)스럽게 하나같이 뜨겁다. 타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찌그렁빠그렁한 리듬의 윤리학
그, 가 노들야학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 는 해상도 없는 시선으로 바닥과 허공에 닿아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게 되면서, 그와 눈빛을 ‘맞’추는 이들과 시선을 ‘맞’추면서 몇 개월 만에 그의 눈빛은 몰라보게 또렷해져 갔다. 그리고 몇 개월간 모양을 갖춘 말이 없던 그, 가 말하려 하기 시작했다. 그, 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허리를 기울이며 말의 높이를 ‘맞’추려는 이들이 놓은 경사로를 따라 안농, 물죠, 옷, 신발, 시로 같은 말들이 건너왔다. 그, 는 분명 발음하려 하기 시작했다. 말 없던 그, 가 수다스러워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맞-춤추기
노들에스쁘와의 춤은 단지 눈에 드러나는 신체적인 움직임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과 상호맞-춤을 추는 것에 있다. 눈맞-춤, 손맞-춤, 발맞-춤, 엉거주-춤, 무릎맞-춤과 같은 ‘맞-춤’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춤’이 자리한다. 서로 간 맞-춤의 지향성(in-tension)은 그들, 을 안으로(in) 끌어당기며(tension) 우리는 서로 마주한다. 4분의 4.20박자, 4분의 3.26박자, 4분의 2.19박자, 4분의 1.22박자로 춤을 추는 몸들의 ‘무수히 고유한’ 박자와 맞-춤을 춘다. 오른쪽 발과 왼쪽 발 길이가 달라 주변 사물을 짚으며 걷는 아다지오(adagio) 템포, 1m를 잔걸음으로 서른 보를 넘게 걸어야 갈 수 있는 라르기시모(larghissimo) 템포, 성큼성큼 공간을 가로세로 지르는 알레그로(allegro) 템포, 달콤한 음료를 한잔 마시지 않으면 절대로 걷지 않겠다는 그, 알 수 없는 템포와 맞-춤을 춘다.
무자비한 존중
보이지 않는 상호맞-춤을 출 수 있게 하는 바탕에는 고유함에 대한 ‘무자비한 존중’이 있다. ‘차별과 혐오에는 단호히 무자비해지겠다!’는 선언이 담긴 존중이 있다. 장애인과 리듬을 맞추려 하지 않는 비장애인 중심의 리듬을 거부한다!는 선언이 담긴 존중. 비장애인 기준의 정(상)박자를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 담긴 존중이 있다. 이러한 존중은 동정의 ‘자비로운’ 위계를 넘어, 시혜의 ‘자비로운’ 경계를 넘어, ‘자비로운’ 주체의 본질을 텅 비게 만든다.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저마다의 “고유 리듬(idiorrhythm)”으로 있을 뿐. “유연하고 자유로우며 생동하는 리듬의 공동체”(롤랑 바르트)로 있을 뿐. 노들에스쁘와의 춤은 평등한 리듬의 공동체 속에서 무수히 고유한 몸들과 상호맞-춤을 춘다. 노들에스쁘와의 안무가 엠마누엘 사누는 “조금 느리더라도 각자의 속도대로, 있는 그대로, 누군가의 속도를 받아들이며, 위아래 없이 모두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마다 고유한 박자와 템포를 무자비하게 존중하는 관계의 리듬으로서 찌그렁빠그렁한 윤리가 함께 춤을 춘다.
노들야학에서 종종 사용하기도 하는 ‘찌그렁빠그렁’이라는 말은 “찌그렁빠그렁 노들야학 개학식”이라거나, “찌그렁빠그렁 우리들”이라거나, “올해도 찌그렁빠그렁 굴러왔다” 등으로 쓰인다. 실제로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건 2022년 12월 세계장애인의날을 맞아 1박 2일 집중 결의 대회를 벌이며 삼각지역에서 노숙을 위해 준비하던 때였다. 그날 새벽부터 지하철 선전전을 시작으로 하루 종일 칼바람 맞으며 계속 이어진 결의 대회에 벌벌 떨었던 탓에 온몸이 그야말로 빠개질 것만 같았다. 그때, 지나가던 선배 교사가 “오늘 완전 찌그렁빠그렁한데”. 아! 이거다. 찌그렁빠그렁. 지금 내 상태. 찌그렁빠그렁. 지금 우리 현장. 찌그렁빠그렁. 지금 우리 학교. 찌그렁빠그렁. 이 리듬감 넘치는 ‘찌그렁빠그렁’이라는 말이 노들야학과 리듬적 동기화(rhythmic synchronization)가 딱! 맞아떨어지는 고유 리듬이라고 느껴졌다. 찌그러진 몸과 빠개진 말, 찌그러진 걸음걸이와 빠개져 있는 야학 복도 나무 바닥, 찌그러져 있는 엘리베이터 입구와 빠글빠글 엘리베이터 앞으로 줄지어 선 휠체어들, 방패를 든 경찰 앞에서 찌그리고 있는 눈빛과 그 방패를 빠개듯 돌진하는 대오들까지. ‘찌그렁빠그렁’한 리듬 속에 한데 어우러져 있는 듯했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찌그러지고 빠그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호흡-리듬 같기도,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찌그러트리고, 빠그러트리는 존재들의 투쟁-리듬 같기도 했다. 정확한 어원과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이 말은 국어사전 밖에서 만들어진 생명(문)체의 리듬이었다.
잡종의 번역어
찌그렁한 몸의 모음들을 번역하기 위해 노들에스쁘와의 춤 활동 이후 교사들은 1시간에 가까운 빠그렁한 회의를 매번 진행하고 있었다. 매주 진행되고 있는 이 회의에서는 그날 참여한 학생들 몸짓의 미세한 변화, 주변 환경의 변화됨에 따른 몸짓의 맥락화,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따른 몸짓의 상관관계 영향 분석, 박수 소리 강약의 변화를 바탕으로 한 불안도 측정 등 기상학적, 신경생리학적, 바이오생활공학적, 임상약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정치미학적, 페미니즘적, 장애학적 언어들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 씨가 오늘 수업에 왔는데 다른 사람을 때렸다. 이런 경우 누군가는 배가 고파서 때린 것 같다고 분석하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 씨가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불안한 거 같다거나 이런 식으로 다양한 입장으로 추측을 해 보는 거죠. ○○ 씨는 언어 표현을 하지 않으니 이런 모든 판단이 다 추측인데, 다양한 입장으로 분석해서 원인과 지원 방향을 찾아보는 거죠.”❺
이 추측된 언어는 요즘 간절기라 계절을 타고 있는 것 같다거나, 신경다양성상 신체 접촉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는 것 같다거나, 최근에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거나, 약을 조절 중인 것 같다거나, 다른 학생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그런 것 같다거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된 의견들이 개진된다. 온갖 종류의 번역된 의견들을 조합하여 “더 많은 참여자가 참여할 수 있는 방식, 각자가 새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방식”(노들야학 교사 박임당)에 대해 초점을 맞춰 가며 찌그렁한 몸의 모음과 빠그렁한 잡종의 번역 언어들이 서로 리듬을 맞추기 위한 윤리를 만들어 간다. 노들야학 교사들은 자막을 달 수 없는 말에 귀 기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퀴어 이론가이자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이러한 “번역은 특수한 담론을 초월한 공통 언어를 발견하려는 노력”이자 “사회적 복수성(plurality)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동거의 토대를 수립”하려는 얼룩진 윤리의 언어라고 한다. 이 언어는 “우리에게 어떤 방향도 주지 않지만 새로운 정치적 지도 제작법을 준다”라고 하는데 그 번역의 공간 속 “동맹은 바로 그곳”에서 발견되며 이러한 말하기는 “희망을 위한 말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위한 희망을 창안”하는 것, 이라고 한다.❻
노들에스쁘와의 ‘에스쁘와(espoir)’는 프랑스어로 희망을 뜻한다. 우리의 희망이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거나, 장애를 넘어 희망으로 가자!거나 하는 “희망을 위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가올 희망의 언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희망을 창안”해 나가며 잡종의 번역어(전류적 언어, 바람의 언어, 손뼉의 언어, 바다의 언어 등등)를 통해 말의 희망-해방, 몸의 희망-해방, 세계의 희망-해방을 향해 노들에스쁘와의 교사들은 찌그렁빠그렁하게 나아가고 있다.
찝찝함과 함께하기
매번 반복되는 수업 이후 회의 말미가 되면 가장 중요한 전제가 매번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결국, 알 수 없다”이다. 공연 때만 되면 그렇게 신나하던 그가 왜 자리에서 끝내 일어나지 않았는지, 춤 시간이 돌아오길 매일같이 기다리더니 왜 막상 시작하고 나니 춤은 추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니는지……. 회의가 결국 도착하는 곳은 앎의 불가능성이었다. 이는 허탈함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끝끝내 도달하게 될 ‘앎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긍정했다. 나는 ‘앎의 불가능성’에 도달하는 이 회의 자리가 ‘시적 공간’과 닮아 있다고 여긴다. 시적 공간은 언어의 불가능성, 즉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해 보려 하지만 반복해서 실패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단일한 인과 관계로 설명될 수 없고, 명시적 앎을 확언할 수 없는 복수성의 목소리들이 저마다의 발성으로 공존할 수 있게 시적으로 열린 말의 공간이다. 이곳에선 언어들도 찌그렁빠그렁한 시적인 춤을 춘다. 시를 쓰는 나는 노들야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가능성의 시적 공간에서 교사들은 언제나 찌그렁한 번역의 오류, 빠그렁한 틈새의 곤경을 감당해야만 한다. “넘겨짚는 것 같고, 찝찝함은 있고, 위험한 판단일 수도”(김유미) 있다. 이것은 소통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언어/비언어, 객관/비객관, 이성/비이성의 틈새에서 다른 방식의 소통하기를 창안하게 만드는 육박하는 조건이 된다. 끈질기게 수신 가능성(addressability)을 포기하지 않으며 “찝찝한” 소화 불량의 느낌을 서둘러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봉사한다거나, 우리가 그들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도덕적 속 편안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잡종의 번역어로 얼룩진 ‘윤리적 찝찝함’ 속에서 맞-춤의 역량, 존중의 역량, 듣기의 역량, 번역의 역량, 리듬의 역량을 키워 나가며 오늘도 우리는 춤을 춘다.
찌그렁빠그렁한 리듬의 동맹
노들야학 총회 자리에서 노들야학 상근 교사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진 슬라이드를 넘기며 한 명씩 한 명씩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진 중에 ‘단독’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단체’ 사진 속에서 확대에 확대를 거듭해야지만 소개하려는 교사의 얼굴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민망한 듯 슬라이드를 넘기던 노들야학 사무국장은 “도저히 단독 사진을 찾을 수 없어서 가져온 사진”이라고 했다. 학생들과 함께 집회에 나가 있고, 대오 속에서 함께 행진하고 있거나, 수업 중에 피켓을 들고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뿐이었다. “도저히 단독”으로는 있을 수 없는 노들야학 교사가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단독’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맹의 리듬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 타자와 사물들의 사이-안(정창조)에서-상호연립하여(김도현)-상호기대어(장 뤽 낭시)-상호의존하여(주디스 버틀러)-찌그렁빠그렁한 동맹의 리듬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진들이었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 이상, 〈최후〉 중에서
그, 가 탈시설하려고 했을 때도 무수한 동맹의 리듬이 동시에 움직였다. “국적 없이 36년 시설 거주! 탈시설 지역 사회 정착하기 위해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부여하라!”는 피켓을 들고 그, 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계를 두드리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한국장애포럼-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장애인거주시설인강원-재단법인동천-법조공익모임나우-장애인법연구회-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등은 투쟁했다. 그, 를 지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계를 두드리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주택지원-활동지원-생활상담-자립생활기술교육-통장관리-정보제공및서비스연계 등등을 지원했다. 그, 의 고유함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세계를 두드리며 노들야학은 함께노래짓기-함께춤추기-함께그림그리기-함께밥먹기-함께모꼬지가기-함께이름쓰기-함께권리옹호하기 등등을 함께 수행했다. 그, 의 감동받을 권리를 박탈한 세계를 두드리며 노들야학 주차장 화단에서는 생강-개망초-왕바랭이-명아주-쇠비름-민들레-씀바귀-고추 등등이 함께 솟아 시설로 돌아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는 탈시설했다.
어떻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 이상, 〈파편의경치:△은나의AMUREUSE이다〉 중에서
시설에서 나눠 준 자기 이름이 적힌 신발을 벗고 장애인자립지원주택으로 들어가던 첫날. 37년을 살아온 시설에서 가지고 나온 그의 짐을 옮기는 데 고작 3분이면 되었다. 3분, 단 3분이면 모두 내릴 수 있는 짐을 내리기 위해 37년이 걸렸다.
짐을 옮기는 동안 그, 는 탈시설 기념 노란 꽃다발을 바라보며 4인 ‘가정용’ 나무 식탁에 앉아 새로 만난 세계와 인사하듯 식탁 모서리를 오, 오래, 오래오, 오래오래, 오래오래 쓰, 오래오래 쓰다, 오래오래 쓰다듬,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었다. 그, 는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식탁 모서리도 그렁그렁했다.
탈시설한 그 다음 날 노들야학 복도에서 그, 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천, 천천, 천천히, 천천히 주, 천천히 주머, 천천히 주머니, 천천히 주머니에, 천천히 주머니에서, 서, 서서, 서서히, 서서히 몽, 서서히 몽쉘, 서서히 몽쉘통, 서서히 몽쉘통통, 서서히 몽쉘통통을, 꺼내었다. 재생 속도를 0.077배속 느리게 맞춰 놓은 듯 꼭, 너에게만 주려고 들고 왔다는 듯, 꺼내었다. 얼마나 주머니 안에서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했는지 통통해야 할 몽쉘통통은 찌그러지고 빠그라져 있었다. 몽쉘통통을 건네받는 그 천, 천천, 천천히의 시간 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몽쉘통통도 그렁그렁했다.
이후 그, 는 직접! 고른 모자를 쓰고, 직접! 고른 휴대폰을 들고, 직접! 고른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신발을 신고 오늘도 노들야학에 온다. 내 배를 쿡쿡 찌르며 밥 먹었냐고? 자기 배를 툭툭 치며 나는 먹었다고. 엄지손가락을 슬쩍 치켜들고 맛이 괜찮다고, 다양한 몸짓으로 내게 말한다. 그, 와의 대화는 언제나 모호하고 뚜렷하게 말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발터 벤야민)을 듣고자 한다.
이거리를완보하리라
- 이상, 〈파첩〉 중에서
그, 는 탈시설 이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로 끝나는 서사가 아니라 탈시설 이후 무릎과 팔꿈치, 손목, 손바닥이 성한 날 하루 없이 우당탕탕 집에서 노들야학까지 오고 갔다. 노들야학까지 5분이면 충분히 걸어올 수 있는 길을 찌그렁빠그렁한 걸음으로 15분도 넘게 우당탕탕 걸어 다녔다. 그, 는 우당탕탕하며 자신의 존재를 거리 위로 쏟아 부으며 질문하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게 해 놓았는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를 모르고 싶은 당신은 누구인가!’ ‘함께 살기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함께 살 수 없게 만들어진 문턱은 왜 이리 많은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 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우리를 가르친다”.(존 듀이) “정상과 비정상,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구분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물리적 문턱과 감각의 문턱, 주체성의 문턱과 관계의 문턱을 물어뜯는 싸움”(노들야학 철학 교사 박정수)을 벌이며 우리에게 질문한다. 다양성들을 무책임하게 존중하는 ‘함께 살기’가 아니라, 인식의 비무장지대에서 펼쳐진 감응의 공동 영역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한다. 이때 ‘함께 살기’는 생각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감각의 혁명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해진 감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을 감지하게 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 세계를 뒤집기 전에 먼저 ‘인간’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은 “인간의 혁명,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감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진경)이기 때문이다. 함께 살기 위한 감각의 혁명은 미시적이고 미세한 감각, 감정, 감수성 훈련을 요청한다.
노들에스쁘와의 춤추는 자리에 그 감각적 혁명의 불씨가 있다.
우리는 밑불로 타오를 준비를 마쳤다.
그곳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초대장〉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반 고흐,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882년 7월 21일)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춤 속에 어떤 해방이 깃들어 있는지,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세계 감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 해방된 몸들이 어떤 환호를 지르며 세계를 춤추듯 나아가고 있는지, 당신들에게 보여 주겠다. 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환호하고, 춤추며 세계 감각을 혼란 속으로 휘말려 들게 할 춤의 자리에 당신들을 초대한다. 감각적 반란을 준비하시라.(서한영교,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2023년 10월 13일)
일시 : 2023년 10월 13일 금요일❼ 오후 4시
장소 :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전역
출연 : 노들에스쁘와
❶ 최바름(2023),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에서 최중증발달장애인의 노동자되기 : 권리, 인간됨, 노동〉,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석사 학위 논문, 49~50쪽.
❷ 김지예, 〈우당탕탕 낮수업 파이팅〉, 《노들바람》, 118(2019년 봄호), 34쪽.
❸ 만딩고 전통문화에서는 커다란 서클(circle), 원이 중요하다. 둥근 원을 따라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판이 열린다. 음악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함께 같은 동작을 추기도 하고, 원의 중심에 들어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자신만의 춤을 추기도 한다. 보코(2022), 《춤과 땡땡》, 쿠나디아, 38쪽.
❹ 존 듀이, 박철홍 옮김(2016), 《경험으로서의 예술 2》, 나남.
❺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2), 《좁은 지대에서 넓게 펼치는 질문》, 96쪽.
❻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2016),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시대의창.
❼ 이날은 노들야학 급식비 마련을 위한 ‘평등한 밥상’ 후원 마당 행사가 마로니에공원 전체에서 진행된다. 올해는 노들야학 30주년으로 다양한 행사를 준비 하고 있다. 다양한 비건 음식들과 음료들도 준비된다. 자세한 사항은 웹 페이지 참조. 30th.nodl.or.kr
연재 _ 동맹의 교실, 해방의 교육학 ②
반란의 감각
문자에 의존하는 교육에 맞선
교육적 반란과 앎의 불가능성
서한영교
poetrypunx@gmail.com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아아 오오 우우 그런 비명들이 짊어진 세계
- 허수경, 〈저 나비〉 중에서
지적장애, 언어장애, 지체장애를 교차하며 최중증 발달장애인으로 불리는 그, 는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사실에 아아하다. 그, 는 가출한 부모를 대신해 고모가 양육을 맡다가 정신질환으로 양육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에 오오하다. 그, 는 열다섯 살에 장애인거주시설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우우한다. 그, 는 그렇게 37년을 “꿈도 미래도 없이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그곳”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으으했다. 그, 는 가족을 찾았으나 연고자인 부모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에 이이하다. 그, 는 다른 친척들의 연락 두절에 아아하다. 그, 는 탈시설하기 위해 서류를 발급받다가 아버지가 대만 사람이라 당시 부계혈통주의에 따라 대만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오오한다. 그, 는 대만인으로 살아왔던 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에 우우하다. 그, 는 미등록 상태로 37년 동안 장애인거주시설에 체류했다는 사실을 탈시설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어 으으하다. 그, 는 탈시설하면 체류 자격이 없어 대만으로 강제 퇴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그, 는 출입국관리소에서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상담을 거절당하고 출생 신고를 통해 해결하라는 말에 아아한다. 출생 신고도 없이 대한민국의 제도 안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어어하다. 그, 는 가정 법원에서는 한국 국적자가 아니므로 가족 관계 등록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오오하다. 그, 는 도봉구청에서도 시설 입소 당시 당사자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말에 우우하다. 그리고 다시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외국인 등록증이, 서울외국인청에서는 다시 여권이, 주한대만대표부는 다시 외국인 등록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으으하다. 그, 는 서류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어했다. 불법 체류 상태인 그, 가 국가 복지 제도 안에서 존재했다는 것은 도대체 누가 설명해 줄 수 있는지 의아하다. 그를, 둘러싼 행정 기관들이 서로 책임만 전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이하다.
그, 는 “누구도 남겨 두지 않는다”라는 유엔의 지속 가능한 세계를 향한 슬로건 속에 자신은 없다는 것에 오오한다. 그, 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8조에서 “장애를 이유로 국적 관련 서류 또는 기타 신분 증명 서류를 취득·소유 및 사용하거나 이주의 자유와 관련된 권리 행사에 필요한 절차를 이용할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조항에 어어하다. 그, 는 수많은 서류들을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아 한국 체류 등록을 하려고 하니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3천만 원의 범칙금을 내야 한다는 것에 어어하다. 그, 는 체류 자격을 간신히 받았지만, 외국인으로서 비자를 받음으로써 사회복지 급여 및 서비스 일체가 중단되고 의료 급여까지 끊겨 13만 원의 건강 보험료가 청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에 으으하다. 그, 는 귀화 신청을 하려 했지만 이를 위해 생계 유지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에 으으하다.
그, 의 막막함에 자막을 달 수 없다.
그, 는 2022년 새해와 함께 노들야학 ‘봉고차’를 타고 마침내 도착했다. 그, 는 낮수업으로 열리는 탈탈탈 반에 들어왔다. 탈탈탈 반에는 12명이 있는데, 한 명을 빼고는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미래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채 오랫동안 격리되어 지내 온 이들로, 탈시설을 하거나 탈시설을 준비 중인 그들, 이 속해 있는 반이다. 지적장애-보행장애-시각장애-자폐성장애-정신장애-청각장애-지적장애-섭식장애-언어장애-저신장장애-지체장애 등 다양한 장애 유형들을 교차/중복으로 겪고 있는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이 모여 있다. 그들, 은 2017년부터 노들야학 봉고차에 터질 듯 꽉꽉 채워 타고선 장애인거주시설과 노들야학을 오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들에스쁘와(Nodeul Espoir)를 징검다리 삼아 노들야학과 장애인거주시설을 오고 가며 한 명씩 한 명씩 ‘탈시설’하여 이제는 단 2명만 봉고차를 타고 오간다.
반역적으로나는방향을잃었다
- 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출판법〉 중에서
신입 교사 첫 참관 수업으로 탈탈탈 반에 들어가 처음 그들(앉은 자리에서 계속 손뼉을 치며 쓰스쓰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그n. 끊임없이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며 끼고 있는 마스크에 침을 흠뻑 적시고 있는 그o. 피자를 시켜 먹어야 한다며 계속해서 112에 전화를 걸고 있는 그d. 두 귀를 힘껏 틀어막고 “놀랬지? 놀랬지! 놀랬지?”를 외치는 그e. 끊임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혼잣말하는 그u. 양말을 벗고 발가락 사이 냄새를 하나하나 맡고 있는 그l), 을 만났다.
발달장애인과 한 공간에서 2시간을 넘게 함께 있어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들, 을 처음 만난 그날 자꾸 움찔움찔했다. 보이지 않는 미세 번개들이 몸속 불안정 기류를 타고 몸 구석구석 내리꽂혔다. 차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낯선 느낌에 소스락소스락했다.
노들야학 17년 차 선배 교사 역시 탈탈탈 반의 그들, 을 처음 만났을 때를 “충격적인 낯설음”으로 떠올렸다. “하루하루 충격적이고 낯설고. (……) 처음에는 진짜 충격이 아주 컸어요. 처음에 왔는데 누군지 확인을 해야 되는데 이름 이름 뭐냐고 이렇게 물어봐도 음성으로 정확하게 답해 주시는 분이 거의 없었고 말을, 아예 응답을 안 하시는 분도 있었고. (……) 일상에서 기본적인 소통 할 때도 실패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느낌이 들 정도로 소통이 쉽지 않은 분들이 계시고 (……) 새로 다 배우는 시간이 있었죠.”❶(노들야학 교사 김유미)
다른 교사도 그랬다. “처음 낮수업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경험은, 시골에 살던 제가 처음으로 피자를 먹고 멀미가 났던 때와 비슷합니다. 말로만 들었던 피자라는 음식, 티비로 보고 들었던 피자가 배달되기 전까지의 떨림, 그리고 드디어 그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의 당황스러움…… 낯선 치즈 냄새 때문에 더는 먹지 못하고 멀미가 났었습니다. 처음 낮수업에서 학생분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했어요. (……) 저는 그날 많이 당황”❷했다며 ‘낯선 당혹스러움’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그날은 탈탈탈 반 낮수업인 노들에스쁘와 시간으로 발달장애인과 몸짓으로 소통하며 춤을 추는 시간이었다. 노들에스쁘와 시간에 가장 강밀도 높은 부분은 커뮤니케이션 서클(Communication Circle)이라는 것인데, 이는 동그란 원을 만들어 둘러앉은 뒤, 자신이 춤추고 싶은 상대와 함께 리듬을 맞춰 춤을 추는 방식이다. 두 사람이 원 안으로 나와 춤을 추고 들어가는 식으로 전체가 돌아가며 참여한다. 주로 듀오로 진행하고 상황에 따라서 솔로와 트리오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는 아프리카 만딩고 전통문화의 춤 형태❸로, 노들에스쁘와의 안무가 엠마누엘 사누의 기획으로 지금까지 7년째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서클에서 중요한 부분은 소통을 향한 ‘모방’이다. 상대방의 몸짓을 모방하고, 나의 몸짓을 모방할 수 있게 내어주는 것. 이 몸짓들이라는 것은,
손가락 세 개를 있는 힘껏 펼쳐 들고 좌우로 흔드는 그e의 몸짓, 두 손을 꼭 쥔 채 빙글빙글 천장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s의 눈짓, 먼 바다로 걸어 들어가듯 몸을 늘어뜨린 채 비척비척 앞으로 걸었다가 뒤로 걸었다 하는 그p의 발짓, 다른 사람 손을 낚시하듯 낚아채는 그o의 손짓, 손을 배 위에 얹은 채 물살이를 쫓듯 빠르게 걷는 그i의 걸음짓, 머리통을 떨어뜨리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반복하는 그r의 고갯짓,
이었다. 난생처음 보았다. 이런 찌그러진 박자와 빠그라진 몸짓들. 도대체 저 몸짓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처음 그 몸짓을 따라 하려고 했을 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기묘해 보이는 몸짓을 흉내 내려고 하니, 당혹감과 막막함 사이에서 자꾸만 멈칫멈칫했다. 찌그러지고, 삐걱거리며, 빠개진 몸짓에 나의 몸짓을 섞어야 한다는 것에 주춤주춤했다. 저, 정체불명의 몸짓을 모방해야 한다는 ‘킬러 문항’ 앞에서 당황했다. 결국, 한번 파트너와 맞추어 춤을 춰 보라는 선배 교사의 제안에 응하지 못했다. 사실, 극구 사양했다.
막 찌른다. (……) 내 몸 내 경험이들어앉아있음직한곳
- 이상, 〈I WED A TOY BRIDE〉 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인간의 형상. 인간.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곧은 몸짓. 꼿꼿함. 바른 자세. 그리고 정체불명의 춤. 불명. 국적불명의 춤. 나이불명의 춤. 성별불명의 춤. 불명의 존재. 찌그러진 낱말들이 버스 창밖에서 웅성웅성했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인간적인 것’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촉발시켰다. “섬뜩한 낯설음(unheimlich)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지그문트 프로이트)이어서 그런지 오랫동안 피부 아래에 퇴적되어 있는 장애-감각의 지층들이 버스 창밖으로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 만났던 지적장애를 겪고 있던 그a, 를 둘러싸고 손가락을 머리에 빙빙 돌리며 “바보 새끼” 하고 장애혐오 발언을 해도 별 거슬릴 것 없었던 우리 반의 감각. 성당 여름성경캠프에서 만난 휠체어 이용 지체장애인 그b, 를 두고 많이들 도와줘야 한다는 말에 다 함께 힘껏 고개를 끄덕였던 종교의 감각. 중학교 때 백반증으로 안면장애가 있던 그l, 과 전신화상장애가 있던 그e, 를 보면서 섬뜩한 불쌍함을 공유하던 우리 학교의 감각. 대학 때 알게 된 시각장애를 겪던 그i, 가 안내견과 함께 지나갈 때면 서둘러 길을 비켜 서며 스스로 착하고 선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던 캠퍼스의 감각. 사고 이후 몇 년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친구의 동생 그s, 를 두고 장애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며 함께 한심하다고 느꼈던 우리의 감각. 필리핀 학교에서 일할 때 지적장애인 딸 m, 을 둔 직장 동료를 가엽다고 느끼던 모두의 감각. 이 무수한 장애-감각들이 바람에 책장 넘어가듯 펼쳐졌다.
계집애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여성혐오를 동원하듯,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장애혐오를 축적해 왔던 것은 아닐까. 사회적 무의식 속에서 발달장애인을 ‘순진한 바보 아이’거나 ‘예측 불가한 위험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복제하며 지내 왔던 건 아닐까. 보편적 인간성을 축조해 내는 정상성의 건축술에 따라 구축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나의 감각은 지나치게 왜소한 거 아닌가. 신체 표면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는 무의식적인 장애혐오 감각이 내 안에 아주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에 번개 맞듯 소스라쳤다. 버스 창밖. 거리에서 그들, 의 몸짓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가 그들, 이 49년, 39년, 37년, 32년씩 장애인거주시설에 갇혀 있거나 방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번개 맞듯 소스라쳤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혼자 움찔움찔하고 있는 걸 들킬까 봐,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1시간을 넘게 걸었다. 거리에서 스쳐 간 모두가 반듯한 정박자를 가진 보행인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노들에스쁘와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37년간 불법 체류 당한 그, 와 춤 파트너가 되었다.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 이상, 〈꽃나무〉 중에서
“그게, 그러니까, 그게, 오늘 춤추는 시간이었어. 커뮤니케이션 서클이라고 있어. 춤을 함께 출 파트너와 함께 단둘이서 서클 안에서 춤을 추는 거야. 그러니까, 그, 가 내 파트너였어. 머리가 반쯤 벗겨진. 쓰러질 것만 같이 내게 걸어 드는. 자기 이름이 쓰인 신발을 신은 채. 두 손을 모두 벌려도 어깨 밖으로 간신히 나가는. 그, 가 간신히 걸어와 내 손을 잡았어. 손톱은 지나치게 짧았고, 모든 손가락에 거스러미가 튀어나와 있었어. 불안했어. 간지러웠어. 겁이 났어. 무서웠어. 슬펐어. 이 모든 게 동시에 움찔했어.
그, 의 몸이 자꾸 내 쪽으로 기울었어. 그, 의 손이 자꾸 떨렸어. 그, 가 자꾸 쓰러질 것만 같아 같이 바닥에 누웠어. 한 바퀴 구르자 그, 도 따라 굴렀어. 다시 뒤돌아 구르자 그, 도 같이 굴렀어. 천장을 보고 누워 그, 가 누운 쪽을 보았어. 그, 가 나를 보고 있었어. 우리는 각자 바닥에 누워 서로를 바라보았어. 그, 가 말없이 말했어. “당신과 나의시차를확인하시오.” 누운 채로 왼손을 들자 그, 가 천, 천천, 천천히 왼손을 들었어. 오른손을 들자, 그, 가 오른손을 서, 서서, 서서히 들었어. 우리의 시차 간격이 춤이 되었어. 그, 가 먼저 돌아누워 귀를 바닥에 대고 누웠어. 나도 따라 돌아누웠어. 그, 가 말없이 말했어. “바닥아래소리를들어보시오.” 지하의 바닷소리. 전기 파도 소리. 번개가 끓는 소리. “보도블록 아래에는 해변이 있다”(68혁명 슬로건)는 소리.
다시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 에게로 다가갔어. 그, 도 일어났어. 왜 쓰러지지 않는 거지? 어떻게 저런 자세로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저렇게 걸을 수 있는 거지? 그, 가 쓰러질 것 같아 그를 반쯤 움켜 안고 스텝을 밟았어. 이것은 춤의 장르입니까? 바다의 장르입니까? 쓰러질 것 같다는 예감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어. 그, 는 그저 출렁이고 있을 뿐. 그, 의 출렁이는 바다에 뛰어든 듯 얼마쯤 허우적거렸을까.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손가락으로 전보 보내듯 그가 내 등을 두드렸어. 읽을 수 없어. 그, 가 두드렸어. “읽지않아도됩니다.” 견고한 이쪽(언어-이성-인간-보편-정상-일반) 세계를, 견고한 근대적 나의 어떤 영토를 정확하게 골라 두드렸어. 그, 가 나를 관통했어. 음악이 끝나고 돌아와 앉아 그, 를 바라보았어. 잇몸이 다 벗겨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어. 따라 웃지 않을 수가 없었어. 이토록 ‘평등하게 시원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어.”
- 그날 그 저녁 반려자와 나눈 대화 중에서
웃음은 산산이부서지고도웃는다. 웃는다. 파랗게
- 이상, 〈조감도:광녀의 고백〉 중에서
그러니까, 그, 가 견고한 어떤 나의 부분을 두드려 깨트렸다. 뭐가 깨진 줄도 모른 채 나도 웃었다. “내가 어떤 것으로 인식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 나를 깨부순다”(줄리아 크리스테바). 표정도 해방될 수 있다는 거. 몸도 해방될 수 있다는 거. 그들의 “춤을 보면 나는 대체 무엇이 부끄럽단 말이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김유미)는 거. 문자에서 해방된 말 없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몸의 모음이 해방의 텍스트가 된다는 거. 당신과 나의 해방이 진실로 이어져 있다는 거. 이런 장르의 웃음은 처음 지어 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춤 동작을 모방하면서 그, 와 나는 문자 밖에 놓인 움직이는 언어로 말했다. 춤으로 사유하고 있음을. 몸짓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손끝으로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비정상, 우월/열등의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는 무수히 고유한 리듬으로 저마다 존재하고 있음을 그, 가 가르쳐 주었다.
전자기 현상을 다루는 물리학에서 대전(帶電)이란 어떤 물체를 ‘반복’해서 문지르며 전기를 띠게 하는 현상을 말한다. 대전된 물체는 정전기를 일으켜 인근의 다른 물체들을 ‘끌어’당긴다. 어쩌면 그, 의 몸짓을 모방하면서 나의 신체에 그, 의 신체가 통할 수 있는 전자기장이 형성되어 그, 의 말 없는 말이 나를 ‘끌어’당긴 것은 아닐까. 듣는다는 것은 귀-감각 기관만의 영토가 아니라 몸 전체가 귀가 된다는 거. “모든 리듬은 우리의 근육에다 말하기”(니체)라는 거. 나무들이 뿌리로 미생물과 ‘화학적 대화’를 나누듯, 그, 와 나는 춤 속에서 ‘전류적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닐까.
진보주의 교육운동가이자 철학자 존 듀이❹는 “문자에 의존하는 교육, 상상력을 배제시키며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도외시하는 교육”에 맞선 “교육적 반란”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욕망, 목적, 관심, 반응 양식이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켜 주는 것이 될 때이다. 이때 우리는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귀로 들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 일어난다”라고 덧붙인다.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귀”로 듣고, “그의 손”으로 두드리고, “그의 입”으로 말하는 전류적 언어는 국어사전에 맞선 반란의 언어였다. 그, 가 일으킨 찌릿찌릿한 세계감(世界感) 속 미지의 일부로서, 나의 “존재를 확장시켜” 나가게 하는 전류적 언어는 근대적 주체에 맞선 반란의 존재론이었다. 상호 접속이라는 감응의 조우, 전류적 리듬 속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동조, 소수적 주체들의 미시적 동맹의 장으로서의 세계감을 익힌다는 것.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라는 것이 국어적 문법을 벗어난 반란의 문법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그, 에게 휘말려 들어가 배웠다. 그, 는 내게 반란을 가르쳤다.
나는다시금새로운것을알아야만했다
- 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출판법〉 중에서
노들야학의 교훈은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이다. 1993년에 개교한 이후 발행한 노들야학의 첫 번째 소식지 《부싯돌》 창간호 첫 페이지에 이 교훈을 제목으로 삼은 노래 악보가 실려 있다. 노래 1절의 “나의 몸짓이 불씨가 되고/ 너의 몸짓이 밑불이 되어/ 우리 불꽃으로 타올라야지”라는 노랫말. 이 노랫말과 거의 정확하게 그, 의 몸짓이 밑불이 되어 나, 의 몸짓에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 가 내 머리에 반란의 불을 붙였다. 듣는다는 것에 대해, 언어에 대해,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해, 정상과 일반이라는 것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라고 내게 횃불을 내밀었다.
그, 가 육박하며 질문한다. 누가 듣고 있는가. 누가 들으려고 하는가.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 누구인가.”(고병권) 말은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문자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는 그 언어는 주객 비분리의 지대에서 국어사전에 기름을 부어 태우고 있는 건 아닌가. 인간적인 몸짓이라고 가정된 보편적 신체는 얼마나 속박되어 있는가. 정상성이라는 허구에 매달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비정상이라고 낙인찍어 왔는가.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타자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프란츠 파농)
그, 가 육박하며 반란을 명령한다. “천박한 감각의 고정관념을 버리도록 하라!” 그, 가 육박하며 나를 가르친다. “네 강철 검은 녹슬어 모래 속에 묻혀 있구나/ 바위와 번개와 천둥으로 그 검을 갈고 닦아라!”(프리드리히 니체) 그, 가 불붙여 던진 질문들은 “천둥처럼 쿵쾅쿵쾅”(박경석)스럽게 하나같이 뜨겁다. 타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찌그렁빠그렁한 리듬의 윤리학
그, 가 노들야학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 는 해상도 없는 시선으로 바닥과 허공에 닿아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게 되면서, 그와 눈빛을 ‘맞’추는 이들과 시선을 ‘맞’추면서 몇 개월 만에 그의 눈빛은 몰라보게 또렷해져 갔다. 그리고 몇 개월간 모양을 갖춘 말이 없던 그, 가 말하려 하기 시작했다. 그, 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허리를 기울이며 말의 높이를 ‘맞’추려는 이들이 놓은 경사로를 따라 안농, 물죠, 옷, 신발, 시로 같은 말들이 건너왔다. 그, 는 분명 발음하려 하기 시작했다. 말 없던 그, 가 수다스러워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맞-춤추기
노들에스쁘와의 춤은 단지 눈에 드러나는 신체적인 움직임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과 상호맞-춤을 추는 것에 있다. 눈맞-춤, 손맞-춤, 발맞-춤, 엉거주-춤, 무릎맞-춤과 같은 ‘맞-춤’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춤’이 자리한다. 서로 간 맞-춤의 지향성(in-tension)은 그들, 을 안으로(in) 끌어당기며(tension) 우리는 서로 마주한다. 4분의 4.20박자, 4분의 3.26박자, 4분의 2.19박자, 4분의 1.22박자로 춤을 추는 몸들의 ‘무수히 고유한’ 박자와 맞-춤을 춘다. 오른쪽 발과 왼쪽 발 길이가 달라 주변 사물을 짚으며 걷는 아다지오(adagio) 템포, 1m를 잔걸음으로 서른 보를 넘게 걸어야 갈 수 있는 라르기시모(larghissimo) 템포, 성큼성큼 공간을 가로세로 지르는 알레그로(allegro) 템포, 달콤한 음료를 한잔 마시지 않으면 절대로 걷지 않겠다는 그, 알 수 없는 템포와 맞-춤을 춘다.
무자비한 존중
보이지 않는 상호맞-춤을 출 수 있게 하는 바탕에는 고유함에 대한 ‘무자비한 존중’이 있다. ‘차별과 혐오에는 단호히 무자비해지겠다!’는 선언이 담긴 존중이 있다. 장애인과 리듬을 맞추려 하지 않는 비장애인 중심의 리듬을 거부한다!는 선언이 담긴 존중. 비장애인 기준의 정(상)박자를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 담긴 존중이 있다. 이러한 존중은 동정의 ‘자비로운’ 위계를 넘어, 시혜의 ‘자비로운’ 경계를 넘어, ‘자비로운’ 주체의 본질을 텅 비게 만든다.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저마다의 “고유 리듬(idiorrhythm)”으로 있을 뿐. “유연하고 자유로우며 생동하는 리듬의 공동체”(롤랑 바르트)로 있을 뿐. 노들에스쁘와의 춤은 평등한 리듬의 공동체 속에서 무수히 고유한 몸들과 상호맞-춤을 춘다. 노들에스쁘와의 안무가 엠마누엘 사누는 “조금 느리더라도 각자의 속도대로, 있는 그대로, 누군가의 속도를 받아들이며, 위아래 없이 모두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마다 고유한 박자와 템포를 무자비하게 존중하는 관계의 리듬으로서 찌그렁빠그렁한 윤리가 함께 춤을 춘다.
노들야학에서 종종 사용하기도 하는 ‘찌그렁빠그렁’이라는 말은 “찌그렁빠그렁 노들야학 개학식”이라거나, “찌그렁빠그렁 우리들”이라거나, “올해도 찌그렁빠그렁 굴러왔다” 등으로 쓰인다. 실제로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건 2022년 12월 세계장애인의날을 맞아 1박 2일 집중 결의 대회를 벌이며 삼각지역에서 노숙을 위해 준비하던 때였다. 그날 새벽부터 지하철 선전전을 시작으로 하루 종일 칼바람 맞으며 계속 이어진 결의 대회에 벌벌 떨었던 탓에 온몸이 그야말로 빠개질 것만 같았다. 그때, 지나가던 선배 교사가 “오늘 완전 찌그렁빠그렁한데”. 아! 이거다. 찌그렁빠그렁. 지금 내 상태. 찌그렁빠그렁. 지금 우리 현장. 찌그렁빠그렁. 지금 우리 학교. 찌그렁빠그렁. 이 리듬감 넘치는 ‘찌그렁빠그렁’이라는 말이 노들야학과 리듬적 동기화(rhythmic synchronization)가 딱! 맞아떨어지는 고유 리듬이라고 느껴졌다. 찌그러진 몸과 빠개진 말, 찌그러진 걸음걸이와 빠개져 있는 야학 복도 나무 바닥, 찌그러져 있는 엘리베이터 입구와 빠글빠글 엘리베이터 앞으로 줄지어 선 휠체어들, 방패를 든 경찰 앞에서 찌그리고 있는 눈빛과 그 방패를 빠개듯 돌진하는 대오들까지. ‘찌그렁빠그렁’한 리듬 속에 한데 어우러져 있는 듯했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찌그러지고 빠그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호흡-리듬 같기도,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찌그러트리고, 빠그러트리는 존재들의 투쟁-리듬 같기도 했다. 정확한 어원과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이 말은 국어사전 밖에서 만들어진 생명(문)체의 리듬이었다.
잡종의 번역어
찌그렁한 몸의 모음들을 번역하기 위해 노들에스쁘와의 춤 활동 이후 교사들은 1시간에 가까운 빠그렁한 회의를 매번 진행하고 있었다. 매주 진행되고 있는 이 회의에서는 그날 참여한 학생들 몸짓의 미세한 변화, 주변 환경의 변화됨에 따른 몸짓의 맥락화,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따른 몸짓의 상관관계 영향 분석, 박수 소리 강약의 변화를 바탕으로 한 불안도 측정 등 기상학적, 신경생리학적, 바이오생활공학적, 임상약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정치미학적, 페미니즘적, 장애학적 언어들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 씨가 오늘 수업에 왔는데 다른 사람을 때렸다. 이런 경우 누군가는 배가 고파서 때린 것 같다고 분석하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 씨가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불안한 거 같다거나 이런 식으로 다양한 입장으로 추측을 해 보는 거죠. ○○ 씨는 언어 표현을 하지 않으니 이런 모든 판단이 다 추측인데, 다양한 입장으로 분석해서 원인과 지원 방향을 찾아보는 거죠.”❺
이 추측된 언어는 요즘 간절기라 계절을 타고 있는 것 같다거나, 신경다양성상 신체 접촉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는 것 같다거나, 최근에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거나, 약을 조절 중인 것 같다거나, 다른 학생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그런 것 같다거나……. 다양한 언어들로 번역된 의견들이 개진된다. 온갖 종류의 번역된 의견들을 조합하여 “더 많은 참여자가 참여할 수 있는 방식, 각자가 새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방식”(노들야학 교사 박임당)에 대해 초점을 맞춰 가며 찌그렁한 몸의 모음과 빠그렁한 잡종의 번역 언어들이 서로 리듬을 맞추기 위한 윤리를 만들어 간다. 노들야학 교사들은 자막을 달 수 없는 말에 귀 기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퀴어 이론가이자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이러한 “번역은 특수한 담론을 초월한 공통 언어를 발견하려는 노력”이자 “사회적 복수성(plurality)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동거의 토대를 수립”하려는 얼룩진 윤리의 언어라고 한다. 이 언어는 “우리에게 어떤 방향도 주지 않지만 새로운 정치적 지도 제작법을 준다”라고 하는데 그 번역의 공간 속 “동맹은 바로 그곳”에서 발견되며 이러한 말하기는 “희망을 위한 말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위한 희망을 창안”하는 것, 이라고 한다.❻
노들에스쁘와의 ‘에스쁘와(espoir)’는 프랑스어로 희망을 뜻한다. 우리의 희망이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거나, 장애를 넘어 희망으로 가자!거나 하는 “희망을 위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가올 희망의 언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희망을 창안”해 나가며 잡종의 번역어(전류적 언어, 바람의 언어, 손뼉의 언어, 바다의 언어 등등)를 통해 말의 희망-해방, 몸의 희망-해방, 세계의 희망-해방을 향해 노들에스쁘와의 교사들은 찌그렁빠그렁하게 나아가고 있다.
찝찝함과 함께하기
매번 반복되는 수업 이후 회의 말미가 되면 가장 중요한 전제가 매번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결국, 알 수 없다”이다. 공연 때만 되면 그렇게 신나하던 그가 왜 자리에서 끝내 일어나지 않았는지, 춤 시간이 돌아오길 매일같이 기다리더니 왜 막상 시작하고 나니 춤은 추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니는지……. 회의가 결국 도착하는 곳은 앎의 불가능성이었다. 이는 허탈함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끝끝내 도달하게 될 ‘앎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긍정했다. 나는 ‘앎의 불가능성’에 도달하는 이 회의 자리가 ‘시적 공간’과 닮아 있다고 여긴다. 시적 공간은 언어의 불가능성, 즉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해 보려 하지만 반복해서 실패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단일한 인과 관계로 설명될 수 없고, 명시적 앎을 확언할 수 없는 복수성의 목소리들이 저마다의 발성으로 공존할 수 있게 시적으로 열린 말의 공간이다. 이곳에선 언어들도 찌그렁빠그렁한 시적인 춤을 춘다. 시를 쓰는 나는 노들야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가능성의 시적 공간에서 교사들은 언제나 찌그렁한 번역의 오류, 빠그렁한 틈새의 곤경을 감당해야만 한다. “넘겨짚는 것 같고, 찝찝함은 있고, 위험한 판단일 수도”(김유미) 있다. 이것은 소통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언어/비언어, 객관/비객관, 이성/비이성의 틈새에서 다른 방식의 소통하기를 창안하게 만드는 육박하는 조건이 된다. 끈질기게 수신 가능성(addressability)을 포기하지 않으며 “찝찝한” 소화 불량의 느낌을 서둘러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봉사한다거나, 우리가 그들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도덕적 속 편안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잡종의 번역어로 얼룩진 ‘윤리적 찝찝함’ 속에서 맞-춤의 역량, 존중의 역량, 듣기의 역량, 번역의 역량, 리듬의 역량을 키워 나가며 오늘도 우리는 춤을 춘다.
찌그렁빠그렁한 리듬의 동맹
노들야학 총회 자리에서 노들야학 상근 교사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진 슬라이드를 넘기며 한 명씩 한 명씩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진 중에 ‘단독’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단체’ 사진 속에서 확대에 확대를 거듭해야지만 소개하려는 교사의 얼굴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민망한 듯 슬라이드를 넘기던 노들야학 사무국장은 “도저히 단독 사진을 찾을 수 없어서 가져온 사진”이라고 했다. 학생들과 함께 집회에 나가 있고, 대오 속에서 함께 행진하고 있거나, 수업 중에 피켓을 들고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뿐이었다. “도저히 단독”으로는 있을 수 없는 노들야학 교사가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단독’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맹의 리듬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 타자와 사물들의 사이-안(정창조)에서-상호연립하여(김도현)-상호기대어(장 뤽 낭시)-상호의존하여(주디스 버틀러)-찌그렁빠그렁한 동맹의 리듬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진들이었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 이상, 〈최후〉 중에서
그, 가 탈시설하려고 했을 때도 무수한 동맹의 리듬이 동시에 움직였다. “국적 없이 36년 시설 거주! 탈시설 지역 사회 정착하기 위해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부여하라!”는 피켓을 들고 그, 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계를 두드리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한국장애포럼-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장애인거주시설인강원-재단법인동천-법조공익모임나우-장애인법연구회-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등은 투쟁했다. 그, 를 지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계를 두드리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주택지원-활동지원-생활상담-자립생활기술교육-통장관리-정보제공및서비스연계 등등을 지원했다. 그, 의 고유함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세계를 두드리며 노들야학은 함께노래짓기-함께춤추기-함께그림그리기-함께밥먹기-함께모꼬지가기-함께이름쓰기-함께권리옹호하기 등등을 함께 수행했다. 그, 의 감동받을 권리를 박탈한 세계를 두드리며 노들야학 주차장 화단에서는 생강-개망초-왕바랭이-명아주-쇠비름-민들레-씀바귀-고추 등등이 함께 솟아 시설로 돌아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는 탈시설했다.
어떻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 이상, 〈파편의경치:△은나의AMUREUSE이다〉 중에서
시설에서 나눠 준 자기 이름이 적힌 신발을 벗고 장애인자립지원주택으로 들어가던 첫날. 37년을 살아온 시설에서 가지고 나온 그의 짐을 옮기는 데 고작 3분이면 되었다. 3분, 단 3분이면 모두 내릴 수 있는 짐을 내리기 위해 37년이 걸렸다.
짐을 옮기는 동안 그, 는 탈시설 기념 노란 꽃다발을 바라보며 4인 ‘가정용’ 나무 식탁에 앉아 새로 만난 세계와 인사하듯 식탁 모서리를 오, 오래, 오래오, 오래오래, 오래오래 쓰, 오래오래 쓰다, 오래오래 쓰다듬,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었다. 그, 는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식탁 모서리도 그렁그렁했다.
탈시설한 그 다음 날 노들야학 복도에서 그, 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천, 천천, 천천히, 천천히 주, 천천히 주머, 천천히 주머니, 천천히 주머니에, 천천히 주머니에서, 서, 서서, 서서히, 서서히 몽, 서서히 몽쉘, 서서히 몽쉘통, 서서히 몽쉘통통, 서서히 몽쉘통통을, 꺼내었다. 재생 속도를 0.077배속 느리게 맞춰 놓은 듯 꼭, 너에게만 주려고 들고 왔다는 듯, 꺼내었다. 얼마나 주머니 안에서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했는지 통통해야 할 몽쉘통통은 찌그러지고 빠그라져 있었다. 몽쉘통통을 건네받는 그 천, 천천, 천천히의 시간 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몽쉘통통도 그렁그렁했다.
이후 그, 는 직접! 고른 모자를 쓰고, 직접! 고른 휴대폰을 들고, 직접! 고른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신발을 신고 오늘도 노들야학에 온다. 내 배를 쿡쿡 찌르며 밥 먹었냐고? 자기 배를 툭툭 치며 나는 먹었다고. 엄지손가락을 슬쩍 치켜들고 맛이 괜찮다고, 다양한 몸짓으로 내게 말한다. 그, 와의 대화는 언제나 모호하고 뚜렷하게 말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발터 벤야민)을 듣고자 한다.
이거리를완보하리라
- 이상, 〈파첩〉 중에서
그, 는 탈시설 이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로 끝나는 서사가 아니라 탈시설 이후 무릎과 팔꿈치, 손목, 손바닥이 성한 날 하루 없이 우당탕탕 집에서 노들야학까지 오고 갔다. 노들야학까지 5분이면 충분히 걸어올 수 있는 길을 찌그렁빠그렁한 걸음으로 15분도 넘게 우당탕탕 걸어 다녔다. 그, 는 우당탕탕하며 자신의 존재를 거리 위로 쏟아 부으며 질문하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게 해 놓았는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를 모르고 싶은 당신은 누구인가!’ ‘함께 살기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함께 살 수 없게 만들어진 문턱은 왜 이리 많은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 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우리를 가르친다”.(존 듀이) “정상과 비정상,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구분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물리적 문턱과 감각의 문턱, 주체성의 문턱과 관계의 문턱을 물어뜯는 싸움”(노들야학 철학 교사 박정수)을 벌이며 우리에게 질문한다. 다양성들을 무책임하게 존중하는 ‘함께 살기’가 아니라, 인식의 비무장지대에서 펼쳐진 감응의 공동 영역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한다. 이때 ‘함께 살기’는 생각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감각의 혁명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해진 감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을 감지하게 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 세계를 뒤집기 전에 먼저 ‘인간’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은 “인간의 혁명,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감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진경)이기 때문이다. 함께 살기 위한 감각의 혁명은 미시적이고 미세한 감각, 감정, 감수성 훈련을 요청한다.
노들에스쁘와의 춤추는 자리에 그 감각적 혁명의 불씨가 있다.
우리는 밑불로 타오를 준비를 마쳤다.
그곳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초대장〉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반 고흐,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882년 7월 21일)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춤 속에 어떤 해방이 깃들어 있는지,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세계 감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 해방된 몸들이 어떤 환호를 지르며 세계를 춤추듯 나아가고 있는지, 당신들에게 보여 주겠다. 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환호하고, 춤추며 세계 감각을 혼란 속으로 휘말려 들게 할 춤의 자리에 당신들을 초대한다. 감각적 반란을 준비하시라.(서한영교,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2023년 10월 13일)
일시 : 2023년 10월 13일 금요일❼ 오후 4시
장소 :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전역
출연 : 노들에스쁘와
❶ 최바름(2023),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에서 최중증발달장애인의 노동자되기 : 권리, 인간됨, 노동〉,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석사 학위 논문, 49~50쪽.
❷ 김지예, 〈우당탕탕 낮수업 파이팅〉, 《노들바람》, 118(2019년 봄호), 34쪽.
❸ 만딩고 전통문화에서는 커다란 서클(circle), 원이 중요하다. 둥근 원을 따라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판이 열린다. 음악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함께 같은 동작을 추기도 하고, 원의 중심에 들어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자신만의 춤을 추기도 한다. 보코(2022), 《춤과 땡땡》, 쿠나디아, 38쪽.
❹ 존 듀이, 박철홍 옮김(2016), 《경험으로서의 예술 2》, 나남.
❺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2), 《좁은 지대에서 넓게 펼치는 질문》, 96쪽.
❻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2016),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 시대의창.
❼ 이날은 노들야학 급식비 마련을 위한 ‘평등한 밥상’ 후원 마당 행사가 마로니에공원 전체에서 진행된다. 올해는 노들야학 30주년으로 다양한 행사를 준비 하고 있다. 다양한 비건 음식들과 음료들도 준비된다. 자세한 사항은 웹 페이지 참조. 30th.nodl.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