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기획] 전쟁이 아닌 평화를 준비하는 교육 (장박가람)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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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_ 위기의 세계, 교육의 역할

 

 

전쟁이 아닌 평화를 준비하는 교육

 평화운동의 교육에 대한 제안

 


장박가람

garam.p.jang@gmail.com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우리는 전쟁과 군대에 익숙하다

 

한 가지 간단한 활동을 제안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양면이 흰 종이 한 장, 펜 한 자루, 그리고 타이머 혹은 초시계를 준비한다. 펜을 들어 종이 한 면에 숫자 1부터 10까지를 세로로 적는다. 이제 타이머를 켜고, 생각나는 전쟁 10개를 빠르게 적는다. 몇 초가 나왔는가? 이제 종이를 반대로 뒤집어서 다시 숫자 1부터 10까지를 세로로 적는다. 타이머를 켜고, 이번에는 생각나는 평화운동(혹은 평화와 관련된 사건까지 포함해) 10개를 빠르게 적는다. 몇 초가 나왔는가? 이 활동을 교육 시간에 하면, 10번이면 10번 모두 전쟁을 훨씬 빠르게 나열한다. 평화운동 쪽 페이지는 보통 훨씬 긴 시간 동안 절반도 채 채워지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평화’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그 질문 자체를 어색해한다. 우리는 평화보다 전쟁에 훨씬, 익숙하다.

지난한 인류의 전쟁 역사로부터 조금이나마 배운 바가 반영된 다른 많은 국가들의 헌법처럼, 대한민국의 헌법 역시 평화주의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대표적 규정으로서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헌법」 제5조는 제2항에서 ‘안보(안전보장)’를 ‘국군’의 의무로 규정한다. 즉 대한민국의 ‘안보’는 기본적으로 군대에 의해 지켜진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사유는 우리의 일상 속까지 너무 깊이 파고들어 있어서, 더 강력한 무력에 의해 안전이 보장되고 평화가 지켜진다는 환상은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을 가진 실체로 작동해 왔다.

간혹 평화교육을 할 기회가 생기면 시작할 때 참여자들과 꼭 함께 나누는 질문이 있는데,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이다. 교육 참여자의 인구학적 변수와 관계없이 답변은 대동소이한데, 거의 반드시 공통적으로, 가장 빠르게 나오는 답변이 ‘강력한 군대’이다. 그 뒤로 ‘정부/국가’, ‘외교’, ‘정보’, ‘강력한 지도자’, ‘애국심’, ‘국가 경제력’ 등의 답변이 따라붙는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다루어질 때 폭력은 나쁜 것, 타인에게 가했을 때는 비난이나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 폭력’의 성격이 있다 하더라도 (특히 법정에서는 더더욱) 그 정당성 여부가 면밀한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안보’를 조건으로 행위 주체가 국가가 될 때 마법처럼 폭력은 용인 가능한 수단, 혹은 명분을 갖는 ‘무력’으로 자연스럽게 인정된다.

페미니스트 평화교육 연구자 베티 리어든은 이처럼 전쟁 행위와 강제력의 사용을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 적법화하는 신념 체계를 “군사주의”라고 말한다. 리어든뿐만 아니라 사회학, 여성학, 평화학 등 많은 영역의 연구자들이 군사주의를 군대를 넘어 사회관계 전반에 군사적 관계와 가치가 침투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베티 리어든, 2020; 신시아 인로, 2015; Evans & Newnham, 1998; Mann, 1987; Shaw, 2012) 우리는 왜 ‘안보와 평화를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가 필수적’이라고 말하는가? 나/우리의 평화를 상상하는 데 반드시 ‘적’을 상정하는 군사주의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여기는가? 일반적 교육과정, 혹은 현재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 이것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나 상상은 가능한가?

이처럼 ‘안보’라는 것이 국가에 의해, 군사적인 수단 즉 무력/폭력으로 지키는 평화로 이해될 때, 평화는 곧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층위로 전락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 어떤 국내외 법률도 ‘침략’ 전쟁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전쟁과 무력 개입은 ‘우리 편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몇 개 국가를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비난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마저도 (적어도 명분상의) 출발점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괴롭힘과 집단 학살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를 ‘비(非)무장화, 비(非)나치화’”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었다. 일상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보나 평화가 무력에 의해 지켜지는 것으로서 다루어질 때, 연이은 여성 살해와 불특정 대상 살인, 흉기 난동 예고에 무장한 경찰 특공대와 장갑차를 도심 한복판에 등장시키는 대응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평화교육은 기존의 지배적 담론을 깨고 ‘평화’와 ‘폭력’이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적극적 평화를 위한 비판적 질문들

 

평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자 및 실천가들의 시도가 있었지만,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도 가장 널리 채택되고 활용되는,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수많은 재정의 시도에 영감을 준 것은 여전히 요한 갈퉁의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 그리고 그것을 저해하는 대척 개념으로서의 ‘직접적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 개념일 것이다. 갈퉁은 단순히 직접적이거나 물리적인 폭력이 부재한 상태를 평화로 바라보는 협소한 접근법의 한계를 지적하며 구조적 폭력을 제거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통합을 촉진하는 상태를 적극적 평화로 개념화하여 평화 연구의 저변을 확장시켰다. 갈퉁은 폭력을 전쟁과 같은 직접적 폭력을 포함하여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실현을 그 잠재적 가능성 이하로 떨어뜨리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구조적 폭력은 직접적 폭력과 달리 그 행위 주체가 비가시적이지만 사회 구조 속에 내재되어 이러한 영향을 미치는 폭력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 가능하도록 사회 문화적 조건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문화적 폭력이라 명명하였다.

베티 리어든 역시 폭력을 “생명에 대해 의도적이고 피할 수 없는 손상을 입히는 것, 환경 또는 사회 구조의 생명 유지와 향상 요소들을 해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폭력을 지엽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충분히 입체적으로 분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소극적 평화와 함께 적극적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비판적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전쟁은 정말 필요악인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국제정치학의 수사에 가려진 전쟁의 일상은 어떠한가? 군대는 정말 ‘우리’를 지키는 존재인가? 군대가 아니면 방법이 없는가? 국가에 의해 ‘용인된’ 무장 세력인 군대가 자행한 ‘불법적’ 폭력을 우리는 얼마나 무수히 목격해 왔는가? 군대를 위시한 무력이 지키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를 타자화하고 적대화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가? 누구의 목숨은 애도와 보호의 대상이 되고, 누구의 희생과 죽음은 군사적 목적이 우선하는 ‘부수적 피해’로 매도되는가? 전쟁이, 직접적 폭력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평화로운가? 그 ‘우리’에서 배제된 존재들은 누구인가? 인류 사회가 전쟁을 정당화하고 준비하는 노력만큼 평화를 탐구하고 준비하려고 노력했다면 현재의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평화는 함께 책임지며 만들어 가는 것

 

저명한 평화교육학자 이안 해리스는 평화교육의 정의를 “일상을 지배하는 폭력의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능한 군사주의의 가치에 대항할 수 있는 평화적 역량을 기르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이 정의에 동의하며, 평화교육의 내용 측면에서 단일하거나 확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평화교육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가장 먼저 기를 수 있기를 소망하는 역량 단 한 가지를 평화운동 활동가로서 제안하자면 ‘책임’을 들겠다. 분절되고 파편화되며 경쟁적인 사회 질서와 그것을 재생산하는 교육 체계 속에서, 적극적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필수적인 상호의존성과 상호관계성, 상호연결성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책임’은 가장 본질적인 적극적 평화 조성 역량이다. (……) 적극적 책임은 ‘결과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for’과 대상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to’으로 나뉜다. 결과에 대한 책임에는 전쟁 시스템의 폭력과 불의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가치에 자신이 연류된 대가를 깨닫고 인정하는 것, 산업화된 선진국이 저개발국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개인적·사회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조해 왔음을 인정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 대상에 대한 책임은 세계적인 삶의 그물망에서 불가분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며, 그 조건들을 변화시키려고 행동해야 할 책임이다. 이 세계 체제에서 자신의 공정한 몫을 빼앗겨 온 타자들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그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대안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너무나 유명한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라는 테제처럼,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적대적 관계가 기본값으로 전제될 때에는 하나의 적이 사라지면 반드시 다른 적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화는 상대의 절멸로써 얻어질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상호의존성과 관계성 안에서만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대립과 논쟁과 갈등 사이에서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해결책을 찾는 것, 대화와 협상과 조율과 협력의 모든 과정 그 자체가 평화이고, 그 경험들이 축적되는 과정과 결과가 곧 평화이다.

그래서 평화교육이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묻는다면 앞서 소개한 정의들에 보태어 모든 교육의 가치이자 지향점, 평화 역량이 담보된 삶의 방식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답하겠다. 평화는 정적인 것도, 고정된 것도, 어쩌면 모두에게 동시에 동일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정된 주제나 내용 안에서만 다루어질 수 없다. 평화를 이벤트나 고정된 상태가 아닌 적극적인 과정으로, 전쟁을 개별적 사건이나 상황이 아닌 폭력을 용인하고 조장하는 ‘체제/시스템’으로 인식한다면 평화교육은 인권교육, 생명존중교육, 군축교육, 국제이해교육, 성평등교육, 생태교육, 사회정의교육 등과 분리하여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넓고 추상적인 정의는 실천을 담보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평화교육의 범위와 내용, 방법을 정의하고 분류하고 개념화하고자 했던 많은 평화교육 실천가와 이론가들의 유의미한 노력처럼, “교육자와 시민 모두가 평화교육이 왜 필요하며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추구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이해하도록 평화교육을 정의”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리어든, 2000: 17)

언제 어떤 전쟁이 있었고 누가 이겼는지를 외우고 전쟁 ‘영웅’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대신, 모두가 알고 있는 예정된 참혹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가능하게 해 왔던 구조적 원인은 무엇인지,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인류가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그 결과 지금 어떤 평화 프로세스들이 존재하는지, 그 작동 방식과 한계는 무엇인지를 양과 질 측면에서 더 적극적으로 다루고, 평화교육을 구성하는 가치와 요소에 무엇이 있는지를 더 발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이나 젠더가 교과 내용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넘어 교육과정 및 방법 전체에 적용되는 인권적 관점, 성인지적 관점이 될 수 있어야 하듯이, 궁극적으로는 평화적 관점 및 사유 역시 모든 교과 내용 및 교수 방법에 기본적으로 전제되고 적용되는 가치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

‘교권’이 ‘학생인권’의 반대말로 너무 쉽게 오도되고, 이 사회가 지키는 데 실패한 이들의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투쟁으로 지켜 내야만 하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스스로도 이런 말들이 내뱉기에만 너무 쉬운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교육은 그러한 교육의 지형을 바꾸어 내기 위한 개인적, 사회적 노력까지가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❶ 「대한민국 헌법」 제5조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❷ 베티 리어든, 황미요조 옮김(2020),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나무연필, 47쪽.

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 푸틴이 원하는 바는?”, 〈BBC News 코리아〉, 2022년 2월 25일. 다만 글의 흐름 및 분량 관계상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이래 1년 반을 훌쩍 넘겨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 그리고 휴전이나 종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관해서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나토(NATO), 초국가적 군수 산업체, 군수 물자의 국제적 이동 및 이와 관련된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 우크라이나 정부의 전쟁 기조 등 다면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❹ 물론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는 추구되는 층위가 다를 뿐 함께 실현되어야 하는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❺ Galtung, J.(1969),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Journal of peace research, 6(3), pp. 167-191.

❻ 베티 리어든, 강순원 옮김(2021), 《포괄적 평화교육》, 신학과 학문, 77쪽.

❼ McCarthy, C.(2014), I'd rather teach peace, Orbis Books, p.89.

❽ 베티 리어든(2021), 앞의 책,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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