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호[특집] ‘초라한 경제교육’을 위하여 (하금철)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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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자본주의를 위한 경제교육’을 넘어



‘초라한 경제교육’을 위하여



하금철

hkcsp@hanmail.net

본지 편집위원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에서 최근 이른바 ‘생존경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주식이나 코인 투자에 관한 교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다뤄 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 나이에 적금 통장 하나 개설하는 데도 손이 떨리는 나에게 이런 현상은 그저 별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지구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지구의 생김을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문외한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생경한 현상의 어렴풋한 실루엣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무모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회의에서 거론되었던 KBS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자본주의 학교〉를 시청했다.


직접 시청하기 전까지 이 방송의 기획 의도에 불만은 딱히 없었다. “10대들에게 국·영·수 공부가 아닌 진짜 돈 공부를 알려 준다”는 목표에도 크게 반대하진 않았고, 어린 나이에 미리 주가, 환율, 부동산, 물가 등에 대해 알아 놔서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잠깐 경험담을 말해 보자면,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금융 위기 당시 나의 아버지는 은행의 권유로 퇴직금 등을 모아 놓은 돈을 펀드 통장에 예치해 두고 있었는데, 주가가 연일 폭락하는 것을 보면서 성급하게 돈을 다 빼 버렸다(그 과정에서 주식·펀드 같은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헛똑똑이 운동권 아들의 호들갑도 한몫했다). 1년쯤 지나고 나서야 안 사실인데, 그렇게 멋모르고 호들갑 떨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2000만 원을 날리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10대들이 나 같은 헛똑똑이가 되지 않으려면 어려서부터 금융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소득 스타의 10대 자녀들이 국내 및 해외 주식 투자 혹은 노점 및 일일 카페 경영을 통해 종잣돈 100만 원을 불려 수익에 따라 승자를 가려 내는” 방식의 예능이 공영 방송의 기본 방향과 어긋난다는 지적 역시 율법 선생의 훈장질 같아서 그다지 호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주식 유튜버가 출연하는 예능은 〈자본주의 학교〉 말고도 이미 너무 많은데, 그걸 10대들을 상대로 한다고 해서 특별히 더 비난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식이 담배처럼 유해한 것이라면 금연 캠페인처럼 성인들도 하지 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방송은 내게 이름 붙이기 애매한 껄끄러운 감정을 남겼다. 그것은 아마도 시기나 질투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사는 곳보다 더 넓고 게다가 전망도 좋은 집에 중학생 연예인 혼자 자취한다는 꿈같은 설정을 해 놓고는, 용돈을 절약하기 위해 체크 카드를 쓰지 않고 1주일치 용돈을 ATM에서 10만 원씩 뽑아 쓰는 모습을 보여 준다. 심지어 그의 ‘돈 개념’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나이 지긋한 연예인 선배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급전 4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고, 그는 순순히 계좌 번호를 불러 달라고 답한다. 이건 프로그램이 내걸고 있는 것처럼 ‘생존경제교육’이 아니라 돈 많은 연예인의 과시욕 시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걸 보면서 시청자들이 모종의 열패감 외에 어떤 생존 경제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경제 제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교실


어차피 경제교육의 형식만 갖춘 TV 예능 프로그램이니 웃고 넘어가면 그만인 걸까. 그렇다면 내용도 형식도 모두 경제교육인 경우는 어떠한가.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은 부산의 한 초등학교 교실의 경제교육 현장을 소개하는 기사를 최근 접했다. 이 교실은 ‘미소’라는 가상의 화폐 단위로 움직이는 가상의 국가이며, 그 안에서 학생들은 숙제를 얼마나 성실히 했는지에 따라 신용 등급을 부여받는다. 또한 신용 등급을 바탕으로 공무원, 경찰, 청소부 등 학급 활동에 필요한 직업을 갖고, ‘미소’로 2주에 1번씩 봉급을 받는데, 실제 직장인들처럼 소득세, 건강 보험료 등이 원천 징수된다. ‘선생님의 몸무게’ 같은 주식 상품에 투자할 수도 있는데, 명절에는 음식을 많이 먹을 테니 그 전에 주식을 다량 매수하는 전략 투자에도 도전한다. 나아가 여기에는 정부와 국회도 있어 중요한 결정 사항을 학생들이 직접 논의한다. 이러한 수업 현장을 ‘세금 내는 아이들’이라는 유튜브를 통해 꾸준히 소개해 온 해당 담임 교사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까지 출연했다.


학생들이 매일 경험하는 교실의 일상을 통해 국가와 사회 제도, 경제 시스템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는 면에서 보자면 이는 민주시민교육의 신선한 모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민주시민교육이라고 부르기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 이 작은 국가의 대통령은 담임 교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선거가 있을 리 없다. 이 국가에서 의사 결정 구조는 오직 숙제 노동을 통해 확보한 신용 등급에 따라서만 작동한다. 잘한 일에는 포도알을 붙여 주고 잘못한 일에는 벌점과 체벌을 부과하던 권위주의 통치의 교실에서 순수한 경제 제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교실로의 전환!


이 교실에서 실천되고 있는 경제교육은 분명 〈자본주의 학교〉에 비하면 훨씬 세련되고 건전한 방식인 것 같다. 특히나 내가 〈자본주의 학교〉를 보면서 느꼈던 열패감 같은 것도 여기엔 들어설 틈이 없다. 그야말로 순수한 자본주의 경제 작동 원리를 교실 운영에 접목해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빈부 격차가 교실 경제 작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담임 교사 역시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한다.


“일단 저희 반은 굉장히 공정한 시스템이거든요. 금수저, 흙수저가 없어요. 똑같은 출발선에서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자산이 쌓이는 거예요. 한 학기 정도 지나면 빈부 격차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거는, 빈부 격차 자체가 나쁜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스스로 돈 관리를 해서 그리고 쓰고 싶은 것도 참아서 그렇게 형성된 빈부 격차는 자연스러운 거고 공정한 결과라고 생각을 하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부모에게서 받은 용돈을 미소 화폐 단위로 환전해서 쓸 수 없기 때문에 출발선이 같다는 교사의 지적은 맞는 말일 것이다. 이 교실은 외부의 위계질서와 사회적 배경 등의 영향력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학급 구성원을 순수하게 화폐 단위로 ‘표시’된 인간으로 구현한다. 그렇게 표시된 숫자가 곧 그의 정체성이 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숫자에 가려져 있던 그의 사회적 배경과 그것에 의해 결정되어진 빈부 격차가 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선생님이 만들어 준 가상 공간을 벗어나 ‘진짜 빈부 격차’를 마주했을 때, 이것 역시 ‘스스로 돈 관리를 하고, 쓰고 싶은 것도 참아서 형성된’ 정당한 빈부 격차라고 답해 줘야 할까? 실제 아이들의 ‘생존’을 결정하는 요소는 물가, 환율, 세금, 투자에 대한 개인의 이해도 수준보다는 바로 이런 순수 경제 논리 외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불평등한 경제 구조 앞에서 교육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매우 초라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나 역시 이 지면을 통해 교육이 불평등한 경제 구조에 저항하는 주체화를 시도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동화 또는 저항이라는 말로 포착될 수 없는, 기존의 ‘경제교육’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는 짜투리 같은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서 능동적으로 주식 투자도 할 줄 아는 트렌디한 학생을 키우는 ‘화려한 경제교육’ 말고, ‘초라한 경제교육’을 하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방금 ‘불평등한 경제 구조 앞에서 교육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매우 초라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 초라한 것을 하자는 말이다.



그래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짜 리스크


최근 경제 및 금융 리터러시 향상에 대한 욕구가 늘어난 배경에는 더 이상 노동 소득만으로는 부를 축적할 수 없다는 청년 세대의 절망감이 자리 잡고 있다. 성실함만으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기에 ‘영끌’을 해서라도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과감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실제 경제에 대한 지식과 감각인 것이다.


‘세금 내는 아이들’ 수업은 바로 이 트렌드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수업은 한 가지 역설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새로운 경제 트렌드에 맞춰 능동적으로 투자하는 주체가 될 것을 독려하고 있지만, 실상은 가장 전통적인 노동 윤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실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 자산인 신용 등급을 결정하는 요소가 바로 ‘숙제 노동’ 수행이기 때문이다. 숙제 노동만큼 성실함과 고지식함이 필요한 일도 없다.


사실 교사도 학생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자동화된 AI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가 오더라도, 육체노동은 아무런 부가가치도 창출하지 못한다고 잘난 사람들이 떠들어 댄다 하더라도, 우리들 각자의 하루치 생존을 보존하는 무기는 ‘노동’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아무리 AI 시대에 맞는 교육을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어떤 아이들은 교복을 입고 일을 하러 갈 것이다. 간혹 몇몇 아이들은 자신이 노동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게 될지도 모르며, 의지와는 상관없이 급여를 떼이거나 해고되는 위기에 내몰리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위기는 수요-공급 곡선이나 주식 시세 그래프로는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삶에서 진짜 ‘리스크’는 주식 투자에서처럼 자의적으로 분산시킬 수도 없고, 온몸으로 떠안아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위기들은 본질적으로 본인의 성실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도 하다. 오히려 ‘워킹 푸어’의 시대에는 가난이 성실함을 부르고 (그 성실함에 짓눌려 능동적인 투자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기에) 성실함이 또 가난을 부르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한다.


남편의 정서적 폭력을 피해 아이와 함께 집을 나와 노숙인 쉼터를 전전하다가 남의 집 청소부 일을 하며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드라마 〈MAID〉(한국어판 제목은 〈조용한 희망〉)에는 이 악순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이 일을 하기 위해 청소 용품을 사거나 아이 먹을거리를 살 때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표시된 잔고가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점차 0에 가까워지면 숫자가 빨간색으로 깜빡이는 것이다. 빨간색 경고 등은 자신을 반쯤 도둑 취급하는 청소 용역 업체 관리자 옆에서도, 온갖 증빙 서류와 자격을 요구하는 사회복지사 옆에서도 깜빡인다. 이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동명의 에세이의 저자 스테퍼니 랜드는 이 상황을 다음의 문장으로 집약한다. “돈이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보호 관찰을 받는 것과 사뭇 비슷해 보였다. 생계 수단이 없다는 것이 내 죄목이었다.”


‘초라한 경제교육’이 시작되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교실에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굉장히 공정한 시스템’이라는 주문을 외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지 않은 발밑의 현실을 직시하자고 말하는 것. 다만 그것은 홀로 치러야 하는 죗값이 아니며,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 주저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자신 있게 너의 동료를 만들고 그들과 손을 잡으라고 권하는 것. 독자들은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 이 ‘초라한 경제교육’의 모범적인 사례 하나를 소개해 보려 한다.



“손녀는 부양 의무자 아니야”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 지안은 낮에는 사무실에서 영수증 붙이는 파견 노동자로, 밤에는 뷔페에서 접시 닦는 알바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거동을 못 하는 할머니를 혼자 모시고 있다. 우연히 그녀의 속사정을 안 같은 회사 부장 동훈은 어쩌다 혼자 할머니를 모시게 되었는지 묻는다. 지안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다른 자식도 없고, 요양원에서는 돈을 못 내 쫓겨났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동훈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손녀는 부양 의무자 아니야. 자식 없고 장애 있으면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데, 왜 돈을 못 내서 쫓겨나? 아, 혹시 할머니랑 주소지 같이 되어 있냐? 하……. 주소지 분리해. 같이 사는 데다가 네가 소득이 잡히니까 혜택을 못 받는 거 아니야. 주소지 분리하고 장기 요양 등급 신청해. 그런 거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냐?”


지안이 ‘세금 내는 아이들’ 수업을 들었다면 이걸 알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 수업은 ‘세금 내는 아이들’이지 ‘복지 급여 받는 아이들’이 아니다. 요즘 초등학교에서 기초 생활 수급자는 ‘기생수’라는 약칭으로 불린다는데, 어감상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럴진대 학교에서 ‘기생수’ 되는 법을 가르친다? 학부모들이 항의 시위를 하고도 남을 일이다.


하지만 진짜 ‘생존경제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존의 위기에 내몰렸을 때 기꺼이 자신의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을 사회가 함께 덜어 달라고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은 마치 불이 났을 때 119에 전화해야 한다는 것처럼 기초적인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어떠한 죄책감이나 수치심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기생수’ 되는 법도 가르쳐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걸 하기 위해서 교실 안에 가상의 공간을 만들 필요도 없다. 지금 아이들의 삶이 곧 실전이다.




❶ 홍성일, “[대중문화 클릭하기] KBS ‘자본주의 학교’의 교훈”, 〈미디어오늘〉, 2022년 2월 13일

❷ ““미소 화폐로 일기 면제권 사요” 초등학교 교실 속 작은 국가”, 〈중앙일보〉, 2020년 7월 4일.

❸ 〈이것이 ‘진짜’ 경제 교육입니다! 옥효진 선생님과의 대화 1화〉, 동아사이언스 유튜브 채널, 2022년 3월 15일.(www.youtube.com/watch?v= I7Vc5kav1U0)

❹ 스테퍼니 랜드, 구계원 옮김(2020), 《조용한 희망 -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찬란한 생존의 기록》, 문학동네,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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