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호[후속] ‘돈 되는 교육’과 ‘돈을 위한 교육’을 넘어 (김형성)

2022-06-27
조회수 1185

후속 / ‘자본주의를 위한 경제교육’을 넘어

‘돈 되는 교육’과 ‘돈을 위한 교육’을 넘어



김형성
brunch.co.kr/@gudtjd1004
부산남일고등학교 국어 교사.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공간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돈, 돈, 돈이 문제였던 시대

“얘들아, 이번 수학여행은 취소되었어.” 1998년,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수학여행이 취소되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의 반응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때에도 소위 목소리 큰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대체 왜 못 가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날카롭게 귀에 박혔다. 난 조용히 침묵했다. 열세 살은 IMF를 알 만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가정 형편은 알 나이였다. 기업 부도, 정리 해고 같은 뉴스는 딴 세상 얘기였지만, 집안을 책임지는 엄마의 한숨은 내가 품어야 할 작은 세계였다.


당시 한스밴드의 〈오락실〉이라는 노래가 꽤 유행했다. 출근한 척 가족을 속이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가벼운 멜로디에 얹혀 울려 퍼지곤 했다. 유쾌하고 발랄한 멜로디에 스며든 슬픈 노래 가사는 문학 시간에 배우던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돈 때문에 힘겨운 사람들의 슬픔이 대수롭지 않게 소비되던 시대에, 우리는 살았다. 당시 IMF 경제 위기 극복을 외치며 당선된 대통령은 무너진 사회 안전망 회복을 강조했고, 국민연금은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당시 구청 공무원의 국민연금 가입 권유 전화를 받고 화를 내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살아 있을지도 모를 20년 뒤를 생각하면서 무슨 돈을 내란 말이에요?’


그랬다. 지금, 당장의 먹을거리가 생존의 문제로 여겨지던 시대에, 나는 살았다. 매일 챙겨 가야 하는 점심 도시락의 메뉴가, 소풍에 입고 갈 옷이 하루하루의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래도 견딜 만했다. 나는 하루에 몇백 원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씀씀이가 작은 어린아이였으니까. 그러나 매일 밤 커피포트를 들고 광안리 바닷가에 나가 커피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던 엄마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 슬픔이었다. 국어 수업 시간에 배운 기형도의 〈엄마 걱정〉 속 ‘찬밥처럼 방에 담긴’ 화자는 바로 나였다. ‘배춧잎 같은 발소리를 타박타박’ 내며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화자의 엄마는 바로 우리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가난과 빈곤에 힘겨운 사람이 많았음을, 그들의 절박한 슬픔을, 나는 어린 나이에 알았다.


가난과 빈곤, 애정과 연대를 가르치던 시대

수업에는 교사의 철학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내 수업은 자연스레 변두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비추는 시간이 되었다. 수업을 하며 가난과 빈곤, 애정과 연대를 이야기했다. 〈흥부전〉을 수업하며 지배층의 횡포에 시달렸던 가난한 민중의 삶을, 〈운수 좋은 날〉을 수업하며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빈곤을 가르쳤다. 《비 오는 날》을 가르치며 한국 전쟁 이후 우리 부모 세대가 겪었던 처절한 가난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가르치며 산업화 시대의 그늘 아래 가려진 빈자의 슬픔을 가르쳤다. 경쟁에서 뒤처진 약자들에 대한 애정과 성장과 발전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희생된 타자와의 연대는 내가 수업 시간에 가장 자주 다루는 주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변두리의 삶을 주제로 수업을 꾸리던 시기는 보수 정권이 집권했던 지난 10년(2007~2016년)이었다. 그래서 교실 속 수업을 시대, 현실과 연결해 풀어내기 쉬웠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가르치며 용산 재개발 참사와 뉴타운 열풍에 가려진 자본의 탐욕을 이야기했고, 감세와 의료 민영화가 이야기되던 시대에 소득 재분배와 사회 안전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독서 지문을 읽을 수 있었다. 갭 투자를 통해 300채의 집을 굴리는 투자자의 무용담이 떠돌던 시대에는 학생들과 주거 안전을 주제로 토론하곤 했다.


2012년 대선에서 진보든 보수든 부의 공정한 분배를 주장했고, 이 같은 논의가 자연스레 경제 민주화 담론으로 이어졌다. 2014년,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출간되면서, 과도한 자본 소득의 문제가 다시 한 번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자본 소득은 노동 소득을 압도했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했다. 그래도 당시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대안,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할 제도와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적어도 교실 속 공간만큼은 돈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거센 파도로부터 그 공간만큼은 지켜 낼 힘이 있었다.


“선생님, 테슬라 주식 사세요”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부동산을 투자가 아닌 주거의 수단으로 바라보던 문재인 정부의 선한 의도와 각종 규제가 역효과를 낳았다.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고, 언론은 비난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상황의 복사판이었다. 주거 안전성을 위해 도입한 ‘임대차 3법’이 오히려 서민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2020년,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염병의 유행으로 주식과 가상 화폐 시장이 폭주했다. 각종 금융, 재테크 주제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관련한 유튜브 채널이 흥행했다.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族)’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노동 소득이 아닌 자본 소득을 축적해 일찍 은퇴를 이루는 것이 성공한 인생으로 취급받았다.


덩달아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각종 경제교육이 강조되면서 학교교육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었다. 현실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교육, 투자와 재테크 교육을 강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곧이어 아이들에게 주식을 사 줘야 한다는 유명 증권 회사 대표의 말이 명언처럼 소비됐고, 10대 학생에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을 가르친다는 경제 예능이 화제가 되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경제교육을 하는 한 초등학교 교사는 유튜브에서 참교사의 모범으로 떠올랐다.


어느덧 경제 민주화, 소득 재분배, 유럽형 복지 국가로의 전환과 같은 사회적 어젠다는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대신 ‘파이프라인’, ‘경제적 자유’와 같은 신조어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육체 노동과 직접 노동보다 무형의 자산이 벌어들이는 소득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언론에서는 일찍이 은퇴한 20~40대 젊은이들의 투자 사례를 미담처럼 쏟아냈다. 이제 절대적 가난과 빈곤은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대신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자산 상승의 사다리를 놓쳐 버린 청년 세대의 박탈감을 강조하는 ‘벼락 거지’라는 신조어마저 생겨났다.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제대로 된 기회를 잡아야 자산을 급상승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교훈처럼 울려 퍼졌다.


자연스레 교실 속 학생들의 관심사도 달라졌다. 돈 공부를 하지 않는 개인의 나태함과 어리석음이 의문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점점 가난과 빈곤이 개인의 책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쉬는 시간에 다가와 나에게 비트코인과 테슬라 주식을 샀냐고 질문했다. 선생님도 비트코인과 테슬라 주식을 사면 부자가 될 수 있고, 빨리 은퇴해 파이어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씨름하며 힘들게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학생 나름의 걱정이었다. 변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들려왔다. 한 교사의 이야기를 블로그를 통해 접한 것도 그쯤이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소재로 수업한 뒤 학생들과 토론 수업을 진행하는데, 한 모둠의 학생들이 개발업자에게 속아 입주권을 시세의 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판 ‘난장이’ 가족을 향해 ‘시세를 파악하지 못한 난장이 가족이 어리석다’, ‘난장이 가족이 잘못했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재개발 지역의 원주민들이 20%도 채 정착하지 못하는 현실, 거대한 투기 세력의 탐욕은 학생들의 토론에서 자리매김하기 힘든 주제가 되어 버렸다.


2014년 피케티가 분석하고 예견했던 역사적 현상이 다시금 반복된 것은 놀랍지 않은 현실이었다. 국민 소득 중 자본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소득 분배 상태가 악화한다는 현실은 코로나 이후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늘어 가는 자본 소득의 비중과 불평등한 분배 상태의 강력한 상관 관계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가 이 불평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이상, 과도한 부의 대물림 즉, 세습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를 피할 수 없음에도 대다수 언론은 지난 정부의 과도한 세금 문제를 지적했다. 이제 세금은 무조건 적게 낼수록 좋은 것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이 국민연금을 비난한다. 제대로 돌려받지 못할 돈이라는 이유에서다. 그 돈을 시장 상품에 투자하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소득 재분배 기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알 바가 아니다. 이렇듯 개인의 노후는 중요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노후는 관심 밖이 되어 버렸다. 공동체의 안전을 지킬 울타리가 아닌 각자도생의 유용함을 외치는 시대. 노동과 세금은 무가치한 것으로, 내 직장과 직업은 잠시 거쳐 가는 정류장으로 여겨지는 시대의 미래는 과연 어떠할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같은 현실에서 무엇을 가르칠 수 있고 가르쳐야만 하는 것일까.



자기모순의 함정

“월급만으로는 노후를 보장할 수 없다”, “경제적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 “불로 소득으로 현금 흐름을 만들어라”, “부동산과 주식은 계층 사다리를 오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변 친구들과 각종 언론, 유튜브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난 재테크 책의 정석이라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오는 ‘가난한 아빠’의 전형이었다. 다들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이 가난으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닌, 노동의 가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 나였다. 유년 시절의 슬픔을 기억하며,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나긋이 이야기하던 나였다. 그러나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자신의 노동만을 지켜 가는 사람은 결국 가난을 피하지 못한다’, ‘세금은 최대한 덜 내야 한다’, ‘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학교 교육은 무용하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면서도, 가지 않았다. 아니 공감하기가 싫었다. 고도성장의 길을 걸어온 윗세대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축만으로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거센 파도를 견딜 만큼 내 자아는 견고하지 못했다. 뉴스로만 접하는, 폭등하는 누군가의 자산을 바라보며 벼락 거지가 될까 무서웠고, 비혼의 삶을 선택한 내가 마주할 잿빛 미래의 잔상이 나를 괴롭혔다. 성실한 노동만으로는 이 싸움에서 버티지 못해 쓰러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흘러간 시간을 보상받는 유일한 방법은 내 신념과 철학을 버리고 순순히 자본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 판단했다.


2021년 8월, 나는 세금을 내지 않아 국가에 압수된 한 재개발 지역의 빌라를 낙찰받았다. 그 이후 주택 담보 대출을 받기 위해 수많은 은행을 돌아다니며 상담을 받았다. 주민 등록 등본을 비롯한 각종 서류를 몇 번이나 출력했는지 모른다. 가는 은행마다 나처럼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붐볐다. 내 기다림에는 탐욕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누군가의 절박함과 누군가의 탐욕이 뱉어 내는 냄새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공간에서, 난 내 순서를 놓치지 않으려 대기 번호표를 힘껏 움켜쥐었다. 이 표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유일한 승차권처럼 여겨졌다. 이 열차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 이 절박함이 나를, 나의 신념을, 나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 것이다.



재테크 교육이 아닌, 노동 인권 교육을
부자가 되는 방법이 아닌, 가려진 타자와의 연대를


한동안 자기모순, 자기 부정이라고 할 법한 내 행동에 스스로 많이 힘들고 괴로웠다. 법을 위반한 것도, 윤리적으로 어긋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존재와 신념이 일치해야 한다고 믿으며 살았던 내게, 자본주의의 거센 외풍에 힘없이 스러진 내 존재가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부서지고 망가지는 삶 속에서라도 최소한의 품격을 지키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지난 선택을 합리화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놓쳐서는 안 될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되새겨야 한다고, 그리고 가르쳐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학생들과 다양성(diversity)을 주제로 학기당 한 권의 책을 읽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라는 이름으로 붙여진 이 독서 활동에서 학생들은 원하는 책을 선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다수의 삶에 가려진 주변의 삶에 주목하고자 했다. 자본 논리와 성장 담론에 가려진 흔적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장애, 비혼, 성소수자, 학교폭력, 학업 중단, 가난과 노동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미리 읽고 나만의 도서 목록을 만들었다. 특히 학생들에게 울타리 없는 자본주의의 광풍에 열광하는 지금 이 시대에, 여전히 우리를 힘겹게 하는 가난과 노동에 주목하자고 말했다.


이 활동에서 같은 책을 선택한 학생들이 하나의 모둠이 된다. 8시간 동안 수업 시간에 책을 읽고, 매시간 독서일지를 쓴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내용과 궁금했던 점을 기록하고, 이를 중심으로 2시간가량 대화를 나눈다. 이후 보고서를 쓴다. 한 모둠은 김만권의 《새로운 가난이 온다》를 읽고 ‘클라우드 노동’, ‘컨시어지 노동’, ‘플랫폼 노동’과 같은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새로운 노동 환경에 놓인 노동자의 삶을 읽고, 충분한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우리의 노동 현실을 걱정했다. 박정훈의 《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를 읽은 모둠은 AI 알고리즘의 명령에 따라 분, 초 단위로 노동하며 위태로운 환경 속에서 매 순간 산업 재해의 위기에 처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실태를 깨달았다. 이 모둠은 배달 노동자의 단체 카톡방에 들어가 그들의 노동 현실을 잠시나마 들여다보고 인터뷰한 뒤 개선 방안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한 모둠은 조기현의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읽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9년 동안 돌본 한 아들의 기록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의 실태를, 돌봄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전가하는 사회의 단면을 알게 되었다. 이 모둠은 기초 생활 수급자의 부양 의무자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쓰며 국가의 역할과 책임을 인식했다. 그렇게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어둡게 가려진 삶을 살피고 기록했다.


많은 전문가가 4차 산업 혁명으로 노동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노동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현장 실습을 나가는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들의 죽음은 여전히 이어지지만, 학생들은 학교에서 여전히 ‘성공적인 직업생활’이라는 과목을 배울 뿐 자신을 둘러싼 위태로운 노동 현실을 배우지 못한다.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비롯해 성인이 되자마자 작고 큰 노동을 하며 살아가지만, 졸업하기 전 한두 시간의 노동 인권 교육을 듣는 것이 노동 관련 교육의 전부다. 그러니 대다수 학생이 노동의 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법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이 마주할 현실은 여전히 위태롭기만 하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되었지만, 다수 노동자의 노동 현장은 여전히 위험하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이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에서는 중하위권에 속한다. 뉴스에서는 매일 코스피 지수와 경제 성장률 같은 거시 지표를 이야기하며 국가의 부를 강조하지만, 국가의 부에 기여한 다수 노동자의 삶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언론은 성공적인 노후를 위한 투자와 재테크를 강조하지만, 압도적인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 복지 사각지대와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처럼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 되어 가는 현실에서,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는 주장은 나태와 게으름으로 취급받곤 한다.


누군가는 이 같은 목소리가 공허한 울림과 같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은 교육의 모습이란 플랫폼 기업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며 재무제표를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성장 가치가 있는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는 안목을 쌓고, 이를 통해 경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이른바 경제교육의 외피를 둘러싼 재테크 교육의 모습이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을 당장의 ‘쓸모 있음’에서 찾는 목소리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건 무엇 때문일까. ‘돈 되는 교육’과 ‘돈을 위한 교육’이 교육의 지향점이 되어 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왜일까. 우리가 살아갈 교실 밖 삶은 여전히 냉정하고 엄혹한데, 수치와 그래프로 움직이는 경제를 읽고 이해하면 우리 삶은 과연 행복해질까.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렇게 무한 경쟁을 하는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상처받고 탈락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든든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일어날 기회를 얻어야만 한다.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고, 누구든지 실패할 수 있으니 서로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부를 향해 질주하는 삶 대신, 서로를 돌보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한다. 교실 속 공간만큼은 자본의 논리를 넘어 서로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야수의 속성을 지닌 자본주의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르치고 싶은 전부다.




❶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열 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 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 아빠

❷ 도재형, “김대중 대통령과 복지국가”, 〈한국일보〉, 2019년 8월 19일.
❸ 박정수(2016), 《나는 갭투자로 300채의 집주인이 되었다》, 매경출판.
❹ “10년 전 ‘경제 민주화’ 경쟁하더니… 이번 대선엔 진보·보수 모두 ‘성장’ 우클릭”, 〈비즈한국〉, 2022년 2월 18일.
❺ “최경환 부총리의 끝없는 부동산 사랑”, 〈한겨레〉, 2015년 12월 18일.
❻ 석유나 천연가스 등을 수송하기 위해 매설한 관로. 최근 들어 시간과 노동력을 들이지 않고도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재테크 수단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❼ 생계를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❽ “원주민 쫓아내는 재개발·재건축… 서울 경우 재정착률 20%대 추산”, 〈국민일보〉, 2019년 11월 17일.
❾ “부산 알바 중·고생 약 절반 근로계약서 안 썼다… 노동 인권교육 실태 조사”, 〈뉴스1〉, 2020년 12월 9일.

0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