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_ 위기의 세계, 교육의 역할 ①
계속 탐욕적 인간을 길러 낸다면 미래는 잿빛일 것이다
- 돈이 전부라는 아이들, 개인의 성공만 가르쳐 온 학교
서부원
ernesto55@hanmail.net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교사
“선생님도 편안한 노후를 위해 금융교육 좀 받으셔야겠어요.”
살아온 시간이 30년도 넘게 차이가 나는 어린 제자들에게 이런 충고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동산 투기가 범람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함께 성찰해 보자는 취지로 대화를 나누는 수업 시간이었다. 내심 부동산 매매를 통해 얻은 막대한 불로 소득은 그 액수만큼 국가가 세금으로 환수하는 게 옳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참이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배는 자꾸만 산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부동산 투기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희박했다. 부동산의 매매를 통한 이익과 손해가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는 데 대해선 모두 동의했지만, 그게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지금 거주하는 아파트의 가격이 올라 환호작약하는 이들의 정반대편에, 아무리 저축해도 내 집을 장만하기 힘들다며 절망하는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부동산이든 뭐든, 우리의 삶이 원래 ‘돈 놓고 돈 먹기’ 아닌가요? 오죽하면 ‘눈 감으면 코 베 가는 세상’이라는 말이 나왔겠어요. 의치대나 명문대, 하다못해 ‘인 서울’ 대학 진학을 꿈꾸고, 초등학교 때부터 1년 365일 밤늦은 시간까지 학원과 스터디 카페를 찾아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단 하나, 돈 많이 버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죠.”
한 아이의 솔직한 답변에 모든 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말 그대로 ‘큰 학문(大學)’을 공부하고 싶어 대학에 간다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대뜸 “지금처럼 공부할 거면, 왜 굳이 대학을 가겠느냐”고 반문하는 황당한 경우도 겪었다. 그들에게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뢰도는 차치하고, 최근 모든 대학의 광고에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취업률 1위’라는 문구는 그들을 겨냥한 가장 효과적인 ‘호객 행위’다.
아이들을 ‘고객’이나 ‘돈줄’로 여기는 우리 대학의 참담한 현실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대학교육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라며 분개할 일이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서열화한 학벌 구조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학의 치부를 가려 주는 든든한 뒷배다. 특히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의 경우, 아무리 등록금이 비싸다 해도 합격만 시켜 주면 감지덕지라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전국에 줄을 섰다.
뻔뻔해진 세상
요즘 아이들은 ‘부동산 투기’라는 용어에 낯설어한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매매로 수익을 내는 행위엔 어김없이 ‘투기’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합법적인 거래였다고 할지라도 도덕적으로는 손가락질받는 분위기였다. ‘부동산 부자’는 ‘투기꾼’과 사실상 동의어처럼 여겨졌기에, 누구든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떳떳하지 않은 치부로 여겨 웬만해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랬던 우리 사회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당장 아이들조차 부동산은 ‘투자’해 돈을 버는 효율적인 수단이며, 관련 지식을 공부하는 건 필수적 교양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다양한 정보를 수합하고 법률 지식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는 건 외려 권장할 일 아니냐고 반문하는 상황이 됐다. 발품도 팔고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니, 부동산 투자로 벌어들인 소득을 ‘불로 소득’으로 낙인찍는 것도 온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불법’의 정의도 납작하기 이를 데 없다. 권력에 줄을 대어 미리 개발 정보를 빼낸 뒤 부동산을 사들였다거나, 반대로 사들인 부동산이 개발되도록 정부에 압력을 넣는 행위 정도만 불법의 예시로 거론되었다. 심지어 부동산도 엄연히 헌법이 보장한 사유 재산인 만큼 여느 재화와 달리 취급될 이유가 하등 없다며 짐짓 두둔하기까지 했다.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꼴이 됐다. 부동산 투자를 백안시해선 안 되고, 매매 차익을 불로 소득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아이들 중 다수였다. 부동산 투자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땀 흘려 일해서 버는 노동 소득보다 더 많다면 누가 애써 일하겠느냐는 반론은 아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자기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는 게 이미 온 국민의 일상이 된 만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뜻이다.
고등학생 정도라면 주택 담보 대출이나 갭 투자와 같은 부동산 관련 용어는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한 아이는 부모님이 20년 넘게 구독해 온 종합 일간지를 얼마 전에 끊고 경제 신문으로 갈아탔다고 귀띔했다. 신문 대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즐겨 본다는 그도 정치와 사회 관련 소식보다 스포츠와 경제 관련 기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학교에도 여러 경제 신문이 꾸러미로 놓여 있는 풍경을 매일 아침 출근길에 보게 된다.
“돈이 돈을 버는 요즘 같은 세상엔 부동산과 주식 투자 기법 등을 모르는 사람이 문맹이래요. 거기에 코인까지도 미리 배워 두면 좋대요.”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부지불식간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집에서 부모님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씀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각박한 현실을 그대로 당신의 자녀에게 옮겨 전한 푸념일 테지만,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라는 속담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참으로 낯 뜨거운 조언이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 사회에선 가난하면 무시당한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다.
이는 아이들에게 결코 해선 안 될 말이다. 돈이 돈을 버는 각박한 사회를 만들어 놓은 기성세대로서, 부끄러움을 내팽개친 뻔뻔한 짓이다. 자칫 아이들이 그런 말에 길들다 보면 ‘돈이 전부인 줄로 아는’ 비뚤어진 사람으로 자라날지도 모른다. 수업 중에 이따금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 물신주의가 창궐하는 공동체는 끝내 파멸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이미 허물어져 더 무너질 공동체도 없다”라는 조롱으로 맞받아친다.
가난은 죄, 돈이 정의인 시대
무소불위한 돈의 힘을 알아 버린 아이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나서는 모습을 보노라면 안타까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학생이라는 신분에 개의치 않을뿐더러 편법과 불법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과거에는 편의점이나 식당, 주유소 등에서 최저 시급을 받으며 시간제로 일하는 게 보편적이었지만, 이젠 양상이 확연히 달라졌다. 아이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손에 쥔 스마트폰을 이용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중고 제품을 거래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각종 물건을 팔아 쏠쏠한 수익을 내기도 한다. 짧은 시간에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아이들의 행동은 염치고 뭐고 따지는 법이 없다. 기성세대가 전수한 대로, 그들에게도 돈이 ‘정의’다.
가난하면 ‘죄’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과거 5공화국 시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범죄자 지강헌의 울부짖음은 TV 방송을 탄 이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래도 그땐 큰 죄를 짓고도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잘도 빠져나가는 부자들의 파렴치함을 꾸짖는 표현이었다. 돈이 없으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시대를 반영한 비유였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선 그런 표현조차 본래의 비판적 의미를 상실했다. 가난하면 무능한 것이고, 무능의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하다고 여긴다. 승자독식이라는 능력주의의 결과에 대해 문제 삼으면 십중팔구 또래들로부터 ‘지질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돈이 ‘정의’고 가난이 ‘죄’인 시대에, 아이들은 경제적 양극화도 불가피한 사회 현상 정도로 치부한다. 그 해악을 모르진 않지만, 아이들 역시 ‘파이를 키우려면 분배보다 성장이 우선’이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보다 그 과정이 공정했는지에 더 관심을 두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객관식 시험 성적’을 통한 줄 세우기다. 면접은 말할 것 없고, 서술형 시험조차 채점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며 불신하기 일쑤다. 1등이 누리는 혜택과 꼴등이 견뎌 내야 하는 고통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1등이 수십억, 수백억 원의 연봉을 받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 프랑스 축구 스타 음바페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축구 클럽으로부터 우리 돈으로 1조 원이 넘는 연봉을 제안받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누구보다 축구를 잘하잖아요”라고 심드렁하게 답한다. 1조 원이면, 우리나라 1년 예산의 1/600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돈벌이에 ‘가성비 갑’이라고 알려진 건 뭐니 뭐니 해도 인터넷 도박이다.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으면 일사천리다. 버젓이 교실에서 어느 사이트가 가입하기 쉽고 확률이 높은지 ‘투자 정보’를 교환하는 아이들도 있다. 누가 얼마를 베팅해 벌었는지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고, 별 관심도 없던 아이들까지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한다. 대화가 무르익어 가다 보면, ‘베팅 고수’는 일약 교실 내에서 ‘인싸’로 등극하게 된다.
굳이 정부 통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아이들의 인터넷 도박은 학교 안팎에서 중독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될 만큼 이미 간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금 도박에 빠져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아이는 물론 없지만, 웬만한 인터넷 도박 사이트는 아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 도박 중독에 대한 아이들의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최근 학교마다 청소년 대상 예방 교육이 진행되고 있으며, 가정 통신문을 통해 학부모와도 심각성을 공유하고 있다.
도박이 학교폭력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른이고 아이고 돈을 빌리고 갚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는 건 피할 길이 없다. 학칙상 액수와 상관없이 교내에서 아이들끼리의 금전 거래는 모두 불법인 까닭에 도박 문제는 사달이 벌어지고 나서 드러나는 게 보통이다. 아이들끼리 변제 각서를 쓰기도 하고, 이자도 사채 금리를 뺨치는 수준이어서, 그들에겐 학교가 도박장이었나 싶을 때도 있다.
도박과 관련된 학교폭력 사안은 100% 학부모들끼리의 다툼으로 전이된다. 특히 거래 금액이 큰 경우, 왕왕 양측에서 변호사까지 동원해 법적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학교가 어찌 손써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학교폭력 문제가 되면 사안에 따라 엄한 처벌을 받게 되지만, 혼자 인터넷 도박을 하다 적발된 경우엔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생활지도위원회를 열어 선도하지만 교내외 봉사 활동과 예방 교육 이수 등이 사실상 학교가 내릴 수 있는 처분의 전부다. 학교에서 하는 예방 교육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수백 명을 한데 모아 놓고 진행하는 강의는 그저 ‘교육을 위한 교육’일 뿐이다. 경청하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대부분은 채 10분도 못 견디고 엎드려 잔다. 그런데도 전국의 모든 학교가 의무적으로 실시한다. 추상 같은 정부의 지침을 일선 학교가 거스를 순 없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사달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면책 수단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나날이 인터넷 도박에 빠져드는 아이들은 늘어만 간다. 학교가 실시하는 형식적인 예방 교육 정도로는 ‘돈이 전부’라고 여기는 아이들의 맹목적인 확신을 돌려세울 수 없다. 아무리 엄벌하겠다고 을러대도 아이들에게서 겁먹은 기색은 찾아 보기 힘들다. ‘50%의 이윤이 남는다면 모험을 감수하고, 100%라면 법을 위반하며, 200%라면 목숨까지 걸게 된다’는 맑스의 말이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이 인생의 전부라면
이 와중에 주식과 선물 투자 기법 등을 가르치는 금융교육을 교육과정에서 필수 교과로 지정하자는 이야기가 최근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기존의 이론 중심의 낡은 경제 교육을 지양하고, 현실 생활에 보탬이 되는 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자는 주장이다. 학부모들은 물론, 일부 교사들까지도 가세하는 모양새다.
그러잖아도 학교마다 주식 투자 관련 동아리가 꾸려져 있고, 특히 대학에 상경 계열로 진학하려는 아이들에겐 금융 관련 공부가 필수 코스처럼 받아들여지는 실정이다. 근래엔 비트 코인 등 암호 화폐에 관한 관심도 부쩍 늘어 동아리 활동 시간이나 방과 후에 따로 모여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 어렵다는 금융 관련 용어도 척척 설명해 내는, 자타공인 ‘예비 투자자들’이다.
주식 투자는 언제부턴가 교사들 사이에서도 보편화됐다. 어느 기업의 주식이 오르고 내렸는지는 요즘 교사들끼리 나누는 흔한 대화 주제다. 원칙적으로 교사는 겸직이 금지되어 있지만, 근무 시간만 아니라면 주식 투자를 법적으로 문제 삼긴 어렵다. 국내외 주식 시장에 대한 전망은 어느덧 교사들 사이에서도 필수 교양처럼 여겨지고 있다. 듣자니까, 평소 월급보다 주식 투자를 통해 벌어들인 소득이 더 많은 교사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교사가 부업’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더는 어색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들 중에는 국내외 경기의 변동을 정확히 꿰뚫고 투자처를 해외로까지 넓혀 가는 전문 투자자도 적지 않다. 증권가 애널리스트 못지않은 국어 교사도 있고, 경제 평론가 뺨치는 영어 교사도 있다.
이젠 주식을 넘어 부동산 투자에 관련된 지식까지도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뭐든 알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거다. 학교에서 주식과 부동산 등을 한데 묶어 배우도록 하면 효과적일 거라며 구체적인 교육 방안까지 내놓고 있다. 학교 안팎의 들썩이는 분위기만 봐서는, 머지않아 교육과정 내에 금융 관련 교과가 별도로 개설될 듯도 하다. 설마 그러랴 싶지만, 이러다 국영수에 버금가는 수능 필수 과목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학교의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도박 중독이 우려된다며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식과 부동산 투자 관련 교육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친다. 아무리 도박은 불법이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는 합법이라고 해도,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점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거칠게 말해서, ‘투자’와 ‘투기’처럼 둘 사이는 ‘깻잎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도박 중독 예방 교육이든, 주식과 부동산 투자 교육이든, 이를 통해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건 단 한 가지다. 바로 돈이 인생의 전부라는 것! 돈이 없으면 주위로부터 업신여김당한다는 세태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큰돈을 쉽게 벌 수 있는지를 가르치면서 도박은 안 된다고 하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아이들에게 추상같은 학칙을 들이밀어 을러대고 도박 중독의 위험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끊임없이 돈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현실에선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다. 부모는 ‘인생 대박’을 꿈꾸며 매주 로또를 사서 긁고, 교사조차 주식과 부동산 시세 분석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이젠 열 살도 안 된 초등학생조차 장래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선선히 답한다. 이렇듯 각박한 세태를 되돌리기에 우리 교육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욕망이 커질수록 세상은 망가진다
편안한 노후를 위해 금융교육을 받으라고 권하는 아이 앞에서 다시금 오랜 다짐을 되새기게 된다. 난 지금껏 단 한 번도 로또를 사거나 주식 투자를 해 본 적이 없고, 굳이 그걸 아이들 앞에서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로또로 조성된 종잣돈이 사회복지에 쓰이고, 주식이 경제에 활력을 주는 시장 경제의 최고 발명품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다만, 교사로서 사행심과 투기 욕망 등이 미래 세대 아이들에게 심어 줄 수 있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건 징후적이다. 돈에 경도된 물신주의 사회에서 각자도생의 가치관과 개인별 파편화는 당연한 수순이다. 지금 아이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능력주의 또한 물신주의의 아류일 뿐이다. 한 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암호 화폐에 투자하라’는 내용의 책 한 권이 눈에 거슬린다. 그는 동서양의 그 어떤 고전보다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들을 천박한 물신주의로부터 보호하려면, 당장 우리 교육의 목표부터 수정되어야 한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교육이 ‘성공’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라고 다그치지만, 그 종착역에서 마주하게 될 미래의 현실은 잿빛일 수밖에 없다. 만약 개인의 ‘성공’이 영원한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거라면, 이미 그러한 시대는 가고 없다. ‘성공’하는 개인이 늘어나고 물질적 욕망이 커질수록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일찍이 인도의 지성 마하트마 간디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경고했다. ‘지구는 수십억 사람들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한 사람의 탐욕은 채워 줄 수 없다’라고. 어쩌면 지금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전대미문의 이상 기후 현상들은 지구가 우리에게 보내는 최후의 경고음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지구의 적’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요즘, 사람들의 끝 모를 갈증을 채워 주려면 지구가 몇 개라도 모자랄 테다.
요컨대, 돈에 모든 걸 다 거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은 탐욕적 인간을 길러 내어 온 우리 교육의 거울상이다. 가던 길을 멈춰 성찰하고 바루지 않고서는 공동체의 붕괴, 나아가 지구적 환경 파괴가 불가피하다.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고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걸 지표로 삼고, 교육의 목표와 교육과정을 재편하는 것이 시급하다. 단언컨대, 지금은 물신주의를 부추길 게 뻔한 금융교육의 필요성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 ‘성공’을 향한 경쟁에 매몰돼 가는 현실 속에 더 늦기 전에 우리는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한다.
기획 _ 위기의 세계, 교육의 역할 ①
계속 탐욕적 인간을 길러 낸다면 미래는 잿빛일 것이다
- 돈이 전부라는 아이들, 개인의 성공만 가르쳐 온 학교
서부원
ernesto55@hanmail.net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교사
“선생님도 편안한 노후를 위해 금융교육 좀 받으셔야겠어요.”
살아온 시간이 30년도 넘게 차이가 나는 어린 제자들에게 이런 충고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동산 투기가 범람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함께 성찰해 보자는 취지로 대화를 나누는 수업 시간이었다. 내심 부동산 매매를 통해 얻은 막대한 불로 소득은 그 액수만큼 국가가 세금으로 환수하는 게 옳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참이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배는 자꾸만 산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부동산 투기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희박했다. 부동산의 매매를 통한 이익과 손해가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는 데 대해선 모두 동의했지만, 그게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지금 거주하는 아파트의 가격이 올라 환호작약하는 이들의 정반대편에, 아무리 저축해도 내 집을 장만하기 힘들다며 절망하는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부동산이든 뭐든, 우리의 삶이 원래 ‘돈 놓고 돈 먹기’ 아닌가요? 오죽하면 ‘눈 감으면 코 베 가는 세상’이라는 말이 나왔겠어요. 의치대나 명문대, 하다못해 ‘인 서울’ 대학 진학을 꿈꾸고, 초등학교 때부터 1년 365일 밤늦은 시간까지 학원과 스터디 카페를 찾아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단 하나, 돈 많이 버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죠.”
한 아이의 솔직한 답변에 모든 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말 그대로 ‘큰 학문(大學)’을 공부하고 싶어 대학에 간다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대뜸 “지금처럼 공부할 거면, 왜 굳이 대학을 가겠느냐”고 반문하는 황당한 경우도 겪었다. 그들에게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뢰도는 차치하고, 최근 모든 대학의 광고에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취업률 1위’라는 문구는 그들을 겨냥한 가장 효과적인 ‘호객 행위’다.
아이들을 ‘고객’이나 ‘돈줄’로 여기는 우리 대학의 참담한 현실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대학교육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라며 분개할 일이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서열화한 학벌 구조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학의 치부를 가려 주는 든든한 뒷배다. 특히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의 경우, 아무리 등록금이 비싸다 해도 합격만 시켜 주면 감지덕지라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전국에 줄을 섰다.
뻔뻔해진 세상
요즘 아이들은 ‘부동산 투기’라는 용어에 낯설어한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매매로 수익을 내는 행위엔 어김없이 ‘투기’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합법적인 거래였다고 할지라도 도덕적으로는 손가락질받는 분위기였다. ‘부동산 부자’는 ‘투기꾼’과 사실상 동의어처럼 여겨졌기에, 누구든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떳떳하지 않은 치부로 여겨 웬만해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랬던 우리 사회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당장 아이들조차 부동산은 ‘투자’해 돈을 버는 효율적인 수단이며, 관련 지식을 공부하는 건 필수적 교양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다양한 정보를 수합하고 법률 지식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는 건 외려 권장할 일 아니냐고 반문하는 상황이 됐다. 발품도 팔고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니, 부동산 투자로 벌어들인 소득을 ‘불로 소득’으로 낙인찍는 것도 온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불법’의 정의도 납작하기 이를 데 없다. 권력에 줄을 대어 미리 개발 정보를 빼낸 뒤 부동산을 사들였다거나, 반대로 사들인 부동산이 개발되도록 정부에 압력을 넣는 행위 정도만 불법의 예시로 거론되었다. 심지어 부동산도 엄연히 헌법이 보장한 사유 재산인 만큼 여느 재화와 달리 취급될 이유가 하등 없다며 짐짓 두둔하기까지 했다.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꼴이 됐다. 부동산 투자를 백안시해선 안 되고, 매매 차익을 불로 소득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아이들 중 다수였다. 부동산 투자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땀 흘려 일해서 버는 노동 소득보다 더 많다면 누가 애써 일하겠느냐는 반론은 아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자기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는 게 이미 온 국민의 일상이 된 만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뜻이다.
고등학생 정도라면 주택 담보 대출이나 갭 투자와 같은 부동산 관련 용어는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한 아이는 부모님이 20년 넘게 구독해 온 종합 일간지를 얼마 전에 끊고 경제 신문으로 갈아탔다고 귀띔했다. 신문 대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즐겨 본다는 그도 정치와 사회 관련 소식보다 스포츠와 경제 관련 기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학교에도 여러 경제 신문이 꾸러미로 놓여 있는 풍경을 매일 아침 출근길에 보게 된다.
“돈이 돈을 버는 요즘 같은 세상엔 부동산과 주식 투자 기법 등을 모르는 사람이 문맹이래요. 거기에 코인까지도 미리 배워 두면 좋대요.”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부지불식간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집에서 부모님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씀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각박한 현실을 그대로 당신의 자녀에게 옮겨 전한 푸념일 테지만,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라는 속담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참으로 낯 뜨거운 조언이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 사회에선 가난하면 무시당한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다.
이는 아이들에게 결코 해선 안 될 말이다. 돈이 돈을 버는 각박한 사회를 만들어 놓은 기성세대로서, 부끄러움을 내팽개친 뻔뻔한 짓이다. 자칫 아이들이 그런 말에 길들다 보면 ‘돈이 전부인 줄로 아는’ 비뚤어진 사람으로 자라날지도 모른다. 수업 중에 이따금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 물신주의가 창궐하는 공동체는 끝내 파멸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이미 허물어져 더 무너질 공동체도 없다”라는 조롱으로 맞받아친다.
가난은 죄, 돈이 정의인 시대
무소불위한 돈의 힘을 알아 버린 아이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나서는 모습을 보노라면 안타까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학생이라는 신분에 개의치 않을뿐더러 편법과 불법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과거에는 편의점이나 식당, 주유소 등에서 최저 시급을 받으며 시간제로 일하는 게 보편적이었지만, 이젠 양상이 확연히 달라졌다. 아이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손에 쥔 스마트폰을 이용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중고 제품을 거래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각종 물건을 팔아 쏠쏠한 수익을 내기도 한다. 짧은 시간에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아이들의 행동은 염치고 뭐고 따지는 법이 없다. 기성세대가 전수한 대로, 그들에게도 돈이 ‘정의’다.
가난하면 ‘죄’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과거 5공화국 시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범죄자 지강헌의 울부짖음은 TV 방송을 탄 이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래도 그땐 큰 죄를 짓고도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잘도 빠져나가는 부자들의 파렴치함을 꾸짖는 표현이었다. 돈이 없으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시대를 반영한 비유였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선 그런 표현조차 본래의 비판적 의미를 상실했다. 가난하면 무능한 것이고, 무능의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하다고 여긴다. 승자독식이라는 능력주의의 결과에 대해 문제 삼으면 십중팔구 또래들로부터 ‘지질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돈이 ‘정의’고 가난이 ‘죄’인 시대에, 아이들은 경제적 양극화도 불가피한 사회 현상 정도로 치부한다. 그 해악을 모르진 않지만, 아이들 역시 ‘파이를 키우려면 분배보다 성장이 우선’이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보다 그 과정이 공정했는지에 더 관심을 두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객관식 시험 성적’을 통한 줄 세우기다. 면접은 말할 것 없고, 서술형 시험조차 채점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며 불신하기 일쑤다. 1등이 누리는 혜택과 꼴등이 견뎌 내야 하는 고통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1등이 수십억, 수백억 원의 연봉을 받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 프랑스 축구 스타 음바페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축구 클럽으로부터 우리 돈으로 1조 원이 넘는 연봉을 제안받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누구보다 축구를 잘하잖아요”라고 심드렁하게 답한다. 1조 원이면, 우리나라 1년 예산의 1/600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돈벌이에 ‘가성비 갑’이라고 알려진 건 뭐니 뭐니 해도 인터넷 도박이다.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으면 일사천리다. 버젓이 교실에서 어느 사이트가 가입하기 쉽고 확률이 높은지 ‘투자 정보’를 교환하는 아이들도 있다. 누가 얼마를 베팅해 벌었는지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고, 별 관심도 없던 아이들까지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한다. 대화가 무르익어 가다 보면, ‘베팅 고수’는 일약 교실 내에서 ‘인싸’로 등극하게 된다.
굳이 정부 통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아이들의 인터넷 도박은 학교 안팎에서 중독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될 만큼 이미 간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금 도박에 빠져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아이는 물론 없지만, 웬만한 인터넷 도박 사이트는 아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 도박 중독에 대한 아이들의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최근 학교마다 청소년 대상 예방 교육이 진행되고 있으며, 가정 통신문을 통해 학부모와도 심각성을 공유하고 있다.
도박이 학교폭력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른이고 아이고 돈을 빌리고 갚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는 건 피할 길이 없다. 학칙상 액수와 상관없이 교내에서 아이들끼리의 금전 거래는 모두 불법인 까닭에 도박 문제는 사달이 벌어지고 나서 드러나는 게 보통이다. 아이들끼리 변제 각서를 쓰기도 하고, 이자도 사채 금리를 뺨치는 수준이어서, 그들에겐 학교가 도박장이었나 싶을 때도 있다.
도박과 관련된 학교폭력 사안은 100% 학부모들끼리의 다툼으로 전이된다. 특히 거래 금액이 큰 경우, 왕왕 양측에서 변호사까지 동원해 법적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학교가 어찌 손써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학교폭력 문제가 되면 사안에 따라 엄한 처벌을 받게 되지만, 혼자 인터넷 도박을 하다 적발된 경우엔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생활지도위원회를 열어 선도하지만 교내외 봉사 활동과 예방 교육 이수 등이 사실상 학교가 내릴 수 있는 처분의 전부다. 학교에서 하는 예방 교육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수백 명을 한데 모아 놓고 진행하는 강의는 그저 ‘교육을 위한 교육’일 뿐이다. 경청하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대부분은 채 10분도 못 견디고 엎드려 잔다. 그런데도 전국의 모든 학교가 의무적으로 실시한다. 추상 같은 정부의 지침을 일선 학교가 거스를 순 없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사달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면책 수단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나날이 인터넷 도박에 빠져드는 아이들은 늘어만 간다. 학교가 실시하는 형식적인 예방 교육 정도로는 ‘돈이 전부’라고 여기는 아이들의 맹목적인 확신을 돌려세울 수 없다. 아무리 엄벌하겠다고 을러대도 아이들에게서 겁먹은 기색은 찾아 보기 힘들다. ‘50%의 이윤이 남는다면 모험을 감수하고, 100%라면 법을 위반하며, 200%라면 목숨까지 걸게 된다’는 맑스의 말이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이 인생의 전부라면
이 와중에 주식과 선물 투자 기법 등을 가르치는 금융교육을 교육과정에서 필수 교과로 지정하자는 이야기가 최근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기존의 이론 중심의 낡은 경제 교육을 지양하고, 현실 생활에 보탬이 되는 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자는 주장이다. 학부모들은 물론, 일부 교사들까지도 가세하는 모양새다.
그러잖아도 학교마다 주식 투자 관련 동아리가 꾸려져 있고, 특히 대학에 상경 계열로 진학하려는 아이들에겐 금융 관련 공부가 필수 코스처럼 받아들여지는 실정이다. 근래엔 비트 코인 등 암호 화폐에 관한 관심도 부쩍 늘어 동아리 활동 시간이나 방과 후에 따로 모여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 어렵다는 금융 관련 용어도 척척 설명해 내는, 자타공인 ‘예비 투자자들’이다.
주식 투자는 언제부턴가 교사들 사이에서도 보편화됐다. 어느 기업의 주식이 오르고 내렸는지는 요즘 교사들끼리 나누는 흔한 대화 주제다. 원칙적으로 교사는 겸직이 금지되어 있지만, 근무 시간만 아니라면 주식 투자를 법적으로 문제 삼긴 어렵다. 국내외 주식 시장에 대한 전망은 어느덧 교사들 사이에서도 필수 교양처럼 여겨지고 있다. 듣자니까, 평소 월급보다 주식 투자를 통해 벌어들인 소득이 더 많은 교사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교사가 부업’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더는 어색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들 중에는 국내외 경기의 변동을 정확히 꿰뚫고 투자처를 해외로까지 넓혀 가는 전문 투자자도 적지 않다. 증권가 애널리스트 못지않은 국어 교사도 있고, 경제 평론가 뺨치는 영어 교사도 있다.
이젠 주식을 넘어 부동산 투자에 관련된 지식까지도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뭐든 알아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거다. 학교에서 주식과 부동산 등을 한데 묶어 배우도록 하면 효과적일 거라며 구체적인 교육 방안까지 내놓고 있다. 학교 안팎의 들썩이는 분위기만 봐서는, 머지않아 교육과정 내에 금융 관련 교과가 별도로 개설될 듯도 하다. 설마 그러랴 싶지만, 이러다 국영수에 버금가는 수능 필수 과목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학교의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도박 중독이 우려된다며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식과 부동산 투자 관련 교육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친다. 아무리 도박은 불법이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는 합법이라고 해도,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점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거칠게 말해서, ‘투자’와 ‘투기’처럼 둘 사이는 ‘깻잎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도박 중독 예방 교육이든, 주식과 부동산 투자 교육이든, 이를 통해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건 단 한 가지다. 바로 돈이 인생의 전부라는 것! 돈이 없으면 주위로부터 업신여김당한다는 세태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큰돈을 쉽게 벌 수 있는지를 가르치면서 도박은 안 된다고 하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아이들에게 추상같은 학칙을 들이밀어 을러대고 도박 중독의 위험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끊임없이 돈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현실에선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다. 부모는 ‘인생 대박’을 꿈꾸며 매주 로또를 사서 긁고, 교사조차 주식과 부동산 시세 분석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이젠 열 살도 안 된 초등학생조차 장래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선선히 답한다. 이렇듯 각박한 세태를 되돌리기에 우리 교육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욕망이 커질수록 세상은 망가진다
편안한 노후를 위해 금융교육을 받으라고 권하는 아이 앞에서 다시금 오랜 다짐을 되새기게 된다. 난 지금껏 단 한 번도 로또를 사거나 주식 투자를 해 본 적이 없고, 굳이 그걸 아이들 앞에서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로또로 조성된 종잣돈이 사회복지에 쓰이고, 주식이 경제에 활력을 주는 시장 경제의 최고 발명품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다만, 교사로서 사행심과 투기 욕망 등이 미래 세대 아이들에게 심어 줄 수 있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건 징후적이다. 돈에 경도된 물신주의 사회에서 각자도생의 가치관과 개인별 파편화는 당연한 수순이다. 지금 아이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능력주의 또한 물신주의의 아류일 뿐이다. 한 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암호 화폐에 투자하라’는 내용의 책 한 권이 눈에 거슬린다. 그는 동서양의 그 어떤 고전보다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들을 천박한 물신주의로부터 보호하려면, 당장 우리 교육의 목표부터 수정되어야 한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교육이 ‘성공’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라고 다그치지만, 그 종착역에서 마주하게 될 미래의 현실은 잿빛일 수밖에 없다. 만약 개인의 ‘성공’이 영원한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거라면, 이미 그러한 시대는 가고 없다. ‘성공’하는 개인이 늘어나고 물질적 욕망이 커질수록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일찍이 인도의 지성 마하트마 간디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경고했다. ‘지구는 수십억 사람들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한 사람의 탐욕은 채워 줄 수 없다’라고. 어쩌면 지금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전대미문의 이상 기후 현상들은 지구가 우리에게 보내는 최후의 경고음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지구의 적’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요즘, 사람들의 끝 모를 갈증을 채워 주려면 지구가 몇 개라도 모자랄 테다.
요컨대, 돈에 모든 걸 다 거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은 탐욕적 인간을 길러 내어 온 우리 교육의 거울상이다. 가던 길을 멈춰 성찰하고 바루지 않고서는 공동체의 붕괴, 나아가 지구적 환경 파괴가 불가피하다.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고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걸 지표로 삼고, 교육의 목표와 교육과정을 재편하는 것이 시급하다. 단언컨대, 지금은 물신주의를 부추길 게 뻔한 금융교육의 필요성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 ‘성공’을 향한 경쟁에 매몰돼 가는 현실 속에 더 늦기 전에 우리는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