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3학년 2학기, 공백과 비틀거림의 시간
현장실습생을 응원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내일을 응원하는 일
오성훈 garachim@naver.com
서울로봇고 교장
보이지 않는 아이들
지난 수능 날 아침 7시. 온 나라가 수험생을 응원하던 그 시간에, 현장실습 중인 직업계고 학생들은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일터로 향했다. 웹 포털에는 수능 응원 영상이 쏟아지고, 후배들은 선배들에게 엿과 찰떡을 건넸다. 그러나 현장실습생들에게 수능은 여전히 ‘나와 상관없는 날’이었다.
며칠 후, 현장실습 중인 한 학생이 기숙사로 퇴근하다 나에게 인사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왜 우리는 뉴스에 나오지 않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부끄러움과 무력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대신 작업복을 입은 채 지친 몸으로 학교 기숙사로 향하던 그 학생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학생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취업을 선택했다. 이를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간 길’로 해석하곤 한다. 숙련된 손기술로 만들어 갈 그들의 미래가, 왜 이토록 조용히 지워지는지 생각했다.
고3 전체의 약 18%에 이르는 20만 명의 직업계고 학생들은 시험장이 아닌 작업장에서, 교과서가 아닌 도면과 공구로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들은 학생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다. 때로는 집안의 생계를 함께 책임지기도 한다. 최근 들어 서울시 교육감과 대통령이 현장실습생을 포함한 고3 응원 영상을 내보내고, 〈오마이뉴스〉에 내가 쓴 기사❶에도 공감이 모이기 시작했다. 노동자 출신 노동부 장관의 등장 역시 시대의 변화를 보여 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그러나 여전히 응원과 관심의 무대에 직업계고 학생은 ‘주요 등장인물’로 서지 못한다. 그들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그들의 자리를 제대로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눈물’이 말해 주는 것
최근, 쿠팡 노동자 문제로 눈물 흘린 검사와 진술 조작을 폭로한 변호사의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사법고시와 로스쿨이라는 능력주의의 정점을 통과했지만, 시스템 앞에서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정말 시험을 잘 본 사람의 결정이 곧 정의인가?’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오랫동안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다. 시험 점수는 계급을 가르는 칼이 되었고, 학력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교육은 ‘생각하는 인간’ 대신 ‘선발되는 인간’을 길렀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엘리트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구조의 가장 아래층에 놓인 직업계고 학생들은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능력주의의 그림자 아래에서 가장 먼저 지워지는 존재는 언제나 목소리가 약한 청소년들이다. 특히 현장실습생들은 학교와 산업, 두 체계 어디에서도 완전히 포용되지 못한 채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로 머무른다. 이 모순된 구조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언어조차 갖지 못한 채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현되지 않는 삶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쓴 허태준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고 말했다. 직업계고 졸업생, 현장실습생, 청년 노동자, 산업기능요원. 그 어떤 말로도 자신의 실제 삶이 온전히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공장에서 3년 7개월을 일하며 깨달은 것은, 20대 청년이라고 하면 으레 대학생으로 전제되는 사회적 시선이었다. 모임에 참여하려 할 때마다 “대학생이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나요?”를 묻는 일이 반복되었다.
드라마와 영화, 소설 속에서 20대 청년은 대부분 캠퍼스를 걷거나 정장을 입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하지만 공장으로 향하는 작업복의 하루, 기술자가 되어 가는 19세의 삶을 담은 서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살아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죽음이 닥쳤을 때만 그들의 존재를 비로소 기록했다. 구의역 사고와 제주, 태안의 현장실습생 사고처럼, 청년 노동자의 일상은 사라지고 비극만 남는 사회. 그 어두운 현실이 우리가 마주한 진실이었다.
편견의 삼단 구조와 수평 폭력
은유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자신이 여상 출신임에도 “특성화고 졸업생을 본 적 없다”라고 말하던 상대의 말을 떠올린다. 편견은 대개 ‘모자람’이 아니라 ‘잘 모름’에서 생긴다. 즉, 경험이나 이해가 부족해 생기는 오해인 것이다.
직업계고를 향한 시선도 다르지 않다. 교실 안에서는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이 자라나고(내부의 패배감), 교실 밖 어른들은 이 아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판단한다(외부의 무지). 둘 사이에 접점이 없으니,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나눌 기회도 사라진다(만남의 부재). 이 세 가지가 겹쳐지면 편견은 쉽게 깨지지 않는 벽이 된다.
더 아픈 상처는 ‘수평 폭력’이다. 이는 같은 계층 안에서 약자끼리 서로 상처를 주는 현상이다.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인들이 지배자의 시선을 내면화한다고 말했는데, 우리 사회도 능력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불평등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위로 향해야 할 분노는 옆으로 흐른다. 교실에서 ‘성적’으로 평가받던 시절의 상처는 사회에 나와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또 다른 약자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영화 〈3학년 2학기〉에서 주인공 창우의 사수인 송 대리도 분명 창우와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 대신, 자신보다 약한 현장실습생을 몰아세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현장실습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조기 복교하는 학생들의 생생한 증언과 송 대리의 모습은 묘하게 겹쳐진다. 이것이 직업계고 현장실습생들이 겪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이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능력 중심 사회가 만들어 낸 구조적 결과임을 잊어선 안 된다.
저무는 시험 능력주의
오래된 경쟁의 규칙도 이제 흔들리고 있다. 생성형 AI가 정답을 더 빨리 맞히는 시대가 오면서, ‘시험 잘 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진다’는 능력주의의 신화에도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가 여전히 ‘수업–시험–인정’의 좁은 문만 고집하면, 학생들은 결국 AI가 대신할 수 있는 능력만 배우게 된다. 이제 교육은 ‘선발되는 인간’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을 키워야 한다. 그 변화는 노동을 천시하던 오래된 감수성까지 함께 바꾸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암기와 반복으로 측정되는 능력은 더 이상 미래의 경쟁력이 아니다.
시험 능력주의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능력을 기르게 해야 할까. 단지 “시험이 중요하지 않다”라는 선언으로는 부족하다. 시험이 판단하던 영역 자체가 기술 변화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학교가 아직도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벼랑 끝의 직업교육
학령인구 감소는 직업교육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고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60만 명을 넘었던 직업계고 학생 수는 2025년 현재 약 2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단순한 수적 감소가 아니라, 구조적 기반이 잠식된 것이다. 직업교육은 단순히 하나의 교육 분야가 아니다. 이는 산업에 필요한 숙련 인력을 키우는 기반이며, 지역 경제의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축이다. 학교가 사라지면 산업이 흔들리고, 산업이 무너지면 학교도 설 자리를 잃는다. 직업계고가 그 역할을 유지하려면 교육, 산업, 지역 사회가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직업교육은 학력 체계 주변부로 밀려나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대학을 가는 게 낫지 않나요?” 입학 설명회에서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 질문 뒤에는 ‘대학=성공, 직업계고=차선’이라는 암묵적 서열이 숨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숫자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2025년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직업계고 졸업생 중 실제 취업자 비율은 25.6%에 불과하지만, 진학자를 제외한 취업률은 55.2%로 일반고 졸업 후 대학을 거쳐 취업하는 경로보다 4~5년 빠르게 경제 활동을 시작한다. 20대 중반이면 이미 실무 경력 5년 차가 되어 있고, 같은 또래 대졸 신입 사원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유’다. 현장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필요하다면 재직자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 열려 있다. 실무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배우는 이론은 훨씬 깊이 있게 체화된다. 반대로 대학을 나와 뒤늦게 기술을 배우려 하면 현장 적응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문제는 ‘대학 진학 vs. 직업계고 취업’의 우열이 아니다. 각자의 적성과 상황에 맞는 선택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구조다. 어떤 학생에게는 19세에 현장으로 나가 기술을 익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그 선택을 ‘어쩔 수 없는 차선’이 아니라 ‘주도적인 인생 설계’로 인정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내 삶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직업계고 학생들은 또래보다 일찍 자신의 길을 찾고, 책임을 지고, 경제적 독립을 이루며 그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구조적 변화의 여파는 결국 현장실습을 나가는 19세 청소년의 어깨로 가장 먼저 내려앉는다. 학교와 산업, 지역 사회의 토대가 흔들릴수록, 학생들은 더 불안한 발판 위에서 첫 노동을 시작하게 된다.
침묵 속의 땀방울
나는 수능장 밖의 19세들을 생각하면, 비바람 속에서 우산 없이 출근하는 아이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청소년 노동자가 혹여나 사회의 구조적 폭력 속에서 홀로 비를 맞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현장실습생은 마지막 학기를 학교 밖에서 보내며 스스로를 ‘예비 전문인’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안전 교육도 없이 위험한 작업을 맡거나, 전공과 무관한 업무에 투입되는 일도 빈번하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설계 문제이며, 우리가 아직 청소년 노동을 ‘배움의 과정’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용접 불꽃처럼 이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미래는 분명 반짝인다. 하지만 그 불꽃 뒤에는 언제나 구조적 위험이 숨어 있다. 부와 가난의 대물림, 지방 청년의 축소된 미래,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현실……. 이는 개별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실패이자 우리 모두의 실패다.
교실의 변화
아이들이 불행한 나라가 행복한 시민을 길러 낼 수 있을까. 교육은 결국 민주주의의 토양이다. 직업교육 역시 산업화 시대의 뒤따라가기 전략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아이들은 기술을 ‘암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
이런 변화는 거대한 정책 선언만으로 오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교실에서부터 조용히 시작된다. 우리 학교에서는 지난해부터 ‘나의 실패 이야기’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 발표 실패, 자격증 시험 낙방, 각종 대회 탈락, 심지어 사랑의 실패까지학생들은 자신이 겪은 실패를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 낸다. 한 학생은 ‘실패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다’고 적었다.
공모전에 나온 이야기와 실패한 작품들은 복도 ‘실패박물관’에 전시한다. 추락한 드론 영상, 작동하지 않는 코드, 엉망이 된 3D 출력물……. 실패는 더 이상 숨겨야 할 흠이 아니라, 배움의 흔적으로 자리 잡는다. 나의 실패가 다른 친구에게는 중요한 힌트가 되기도 한다.
수업 방식도 바꾸고 있다. ‘페어 디자이닝’ 수업에서는 한 학생이 설계를 맡고, 다른 한 학생은 질문만 던진다. “왜 이렇게 설계했어?”,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라는 질문이 사고의 깊이를 만든다. AI 역시 답을 대신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토의할 거리를 던져 주는 도구로 사용한다.
‘존재 확인 프로젝트’도 있다. 매주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를 주제로 발표하지만, 성적이나 수상 경력 같은 스펙은 금지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힘들 때 찾는 장소, 사소한 습관, 꿈 등을 나눈다.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네가 더 잘 이해된다”라는 말이 오갈 때, 학생들은 점수 너머의 자신을 확인한다. 교실이 교과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는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런 시도는 우리 학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만 마음먹으면, 어느 교실이나 복도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변화다. 교실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앞으로의 노동 세계와 시민 사회의 민낯을 예고할 것이다.
존엄을 가르치는 사람
얼마 전 현장실습을 중단하고 복교를 원한 학생이 있었다. 과거 같았으면 “네가 더 버텨야 한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학교는 그 학생의 말을 먼저 들었다. 전공과 다른 반복 업무로 무력감을 느꼈다는 토로에, 우리는 학생의 편이 되기로 했다.
기업과 협의해 복교 절차를 밟았고, 학생은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복교 후 생활은 오히려 더 바빠졌다. 담임–학과장–취업담당 부장–상담 교사–교장으로 이어지는 ‘복교 응원 프로그램’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응원 프로그램의 핵심은 복교 학생을 따뜻하게 품어 주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실패를 낙인이 아닌 경험으로 받아들이도록 곁을 지키는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지만, 분명한 변화다. 교장실에서 복교한 학생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기업도 조금씩 긍정의 손을 내밀고 있음을 느낀다. 직업계고와 현장실습 업체의 변화가 복교 학생에게 ‘실패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디딤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제 선택을 믿고, 복교를 응원해 준 학교와 실습 나간 회사에 감사드립니다.”
학생이 인사하며 교장실을 나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생이 주체’라는 원칙이 실제로 작동한 순간이었다. 33년 동안 직업계고 교사로 살아오며 나는 알게 되었다. 학생 한 명의 성장은 거칠고 두꺼운 임파스토처럼, 실패와 좌절과 재도전의 층위들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진다는 것을. 교사는 그 과정 곁에서 색을 고르고 다시 칠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존엄주의로, 경쟁 교육에서 연대 교육으로. 무엇보다 ‘언어’부터 바꾸어야 한다. “공부 못해서 직업계고 갔다”라는 낙인 대신, “기술과 실무를 배우기 위해 선택했다”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말이 필요하다. 직업 교육의 성취 앞에서 “그래도 잘하네”라는 유보적인 칭찬이 아니라 “정말 잘하네”라고 인정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하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제도적 안전망을 세우고, 채용 시스템이 실질적 역량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학생은 산업의 투입 인력이 아니라, 지역의 청년으로 뿌리내릴 인재이기 때문이다. 33년 전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나는 내가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결국 교사는 ‘존엄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수능장 밖 아이들에게 건네는 사회적 연대
나는 종종 생각한다. 지금 현장에서 땀 흘리며 실습 중인 이 학생들이 불과 몇 달 뒤면 우리의 동료가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내년이면 정식 노동자가 되고, 월급을 받고, 세금을 낼 것이다. 그 세금은 다시 국가의 재정이 되고, 그 재정은 동년배 청년들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도 쓰일 것이다. 한 교실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19세들이,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 옆에서 묵묵히 기술을 가르치는 선배 노동자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한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가장 실제적인 연대다. 청소년 노동자가 비를 맞고 서 있을 때 옆에서 우산을 들어 주는 그 마음이야말로, 산업과 지역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는 토대다.
나는 앞으로 수능 시험장으로 향하게 될 학생과 그 부모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치는 작업복 입은 또래를 향해, “저 아이(친구)도 내 아이(친구)이자 동료 시민”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 달라고. 수능 날 뉴스에 시험장 앞 풍경이 나오면, 화면에는 잡히지 않지만 작업복 입고 출근하는 18%의 고3 학생들이 있다는 것도 함께 떠올려 보자. 대학 진학을 위해 치열하게 달려온 청소년들이 있듯이, 오늘도 새벽 전철을 타고 일터로 향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두 길이 결코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속도의 성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노동 위에 서 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도, 그 학생을 응원하는 부모도, 일터에서 기술을 배우는 현장실습생도, 그 옆에서 조용히 기술을 전수하는 선배 노동자도 결국 한 사회의 순환 안에 있다. 교실의 배움이 현장으로 흘러가고, 현장의 땀방울이 다시 교실의 질문으로 돌아오듯이, 우리의 삶도 서로에게 이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현장실습생을 응원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내일을 응원하는 일이라고. 수능장 밖에서 비를 맞으며 출근하는 아이에게 건네는 작은 격려는, 곧 우리 사회의 품격이라고. 그리고 학생이 던진 “선생님, 왜 우리는 뉴스에 나오지 않죠?”라는 질문에 선배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 행동으로 답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❶ “수능 시험 보는 날, 로봇고 3학년 실습생의 출근길 동행기”, 〈오마이뉴스〉, 2025년 11월 14일.
참고 문헌
김동춘(2013), 《사회정의와 사회정책》, 돌베개.
프란츠 파농, 노서경 옮김(2008),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은유 (2020),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돌베개.
허태준(2020),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호밀밭.
교육부(2025). 〈2025년 직업계고 졸업자 취업 통계 조사 결과 발표〉.
교육공동체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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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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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현장실습 중인 한 학생이 기숙사로 퇴근하다 나에게 인사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왜 우리는 뉴스에 나오지 않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부끄러움과 무력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대신 작업복을 입은 채 지친 몸으로 학교 기숙사로 향하던 그 학생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학생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취업을 선택했다. 이를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간 길’로 해석하곤 한다. 숙련된 손기술로 만들어 갈 그들의 미래가, 왜 이토록 조용히 지워지는지 생각했다.
고3 전체의 약 18%에 이르는 20만 명의 직업계고 학생들은 시험장이 아닌 작업장에서, 교과서가 아닌 도면과 공구로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들은 학생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다. 때로는 집안의 생계를 함께 책임지기도 한다. 최근 들어 서울시 교육감과 대통령이 현장실습생을 포함한 고3 응원 영상을 내보내고, 〈오마이뉴스〉에 내가 쓴 기사❶에도 공감이 모이기 시작했다. 노동자 출신 노동부 장관의 등장 역시 시대의 변화를 보여 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그러나 여전히 응원과 관심의 무대에 직업계고 학생은 ‘주요 등장인물’로 서지 못한다. 그들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그들의 자리를 제대로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눈물’이 말해 주는 것
최근, 쿠팡 노동자 문제로 눈물 흘린 검사와 진술 조작을 폭로한 변호사의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사법고시와 로스쿨이라는 능력주의의 정점을 통과했지만, 시스템 앞에서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정말 시험을 잘 본 사람의 결정이 곧 정의인가?’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오랫동안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한 전쟁’이었다. 시험 점수는 계급을 가르는 칼이 되었고, 학력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교육은 ‘생각하는 인간’ 대신 ‘선발되는 인간’을 길렀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엘리트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구조의 가장 아래층에 놓인 직업계고 학생들은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능력주의의 그림자 아래에서 가장 먼저 지워지는 존재는 언제나 목소리가 약한 청소년들이다. 특히 현장실습생들은 학교와 산업, 두 체계 어디에서도 완전히 포용되지 못한 채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로 머무른다. 이 모순된 구조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언어조차 갖지 못한 채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현되지 않는 삶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쓴 허태준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고 말했다. 직업계고 졸업생, 현장실습생, 청년 노동자, 산업기능요원. 그 어떤 말로도 자신의 실제 삶이 온전히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공장에서 3년 7개월을 일하며 깨달은 것은, 20대 청년이라고 하면 으레 대학생으로 전제되는 사회적 시선이었다. 모임에 참여하려 할 때마다 “대학생이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나요?”를 묻는 일이 반복되었다.
드라마와 영화, 소설 속에서 20대 청년은 대부분 캠퍼스를 걷거나 정장을 입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하지만 공장으로 향하는 작업복의 하루, 기술자가 되어 가는 19세의 삶을 담은 서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살아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죽음이 닥쳤을 때만 그들의 존재를 비로소 기록했다. 구의역 사고와 제주, 태안의 현장실습생 사고처럼, 청년 노동자의 일상은 사라지고 비극만 남는 사회. 그 어두운 현실이 우리가 마주한 진실이었다.
편견의 삼단 구조와 수평 폭력
은유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자신이 여상 출신임에도 “특성화고 졸업생을 본 적 없다”라고 말하던 상대의 말을 떠올린다. 편견은 대개 ‘모자람’이 아니라 ‘잘 모름’에서 생긴다. 즉, 경험이나 이해가 부족해 생기는 오해인 것이다.
직업계고를 향한 시선도 다르지 않다. 교실 안에서는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이 자라나고(내부의 패배감), 교실 밖 어른들은 이 아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판단한다(외부의 무지). 둘 사이에 접점이 없으니,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나눌 기회도 사라진다(만남의 부재). 이 세 가지가 겹쳐지면 편견은 쉽게 깨지지 않는 벽이 된다.
더 아픈 상처는 ‘수평 폭력’이다. 이는 같은 계층 안에서 약자끼리 서로 상처를 주는 현상이다.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인들이 지배자의 시선을 내면화한다고 말했는데, 우리 사회도 능력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불평등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위로 향해야 할 분노는 옆으로 흐른다. 교실에서 ‘성적’으로 평가받던 시절의 상처는 사회에 나와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또 다른 약자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영화 〈3학년 2학기〉에서 주인공 창우의 사수인 송 대리도 분명 창우와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 대신, 자신보다 약한 현장실습생을 몰아세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현장실습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조기 복교하는 학생들의 생생한 증언과 송 대리의 모습은 묘하게 겹쳐진다. 이것이 직업계고 현장실습생들이 겪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상이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능력 중심 사회가 만들어 낸 구조적 결과임을 잊어선 안 된다.
저무는 시험 능력주의
오래된 경쟁의 규칙도 이제 흔들리고 있다. 생성형 AI가 정답을 더 빨리 맞히는 시대가 오면서, ‘시험 잘 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진다’는 능력주의의 신화에도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가 여전히 ‘수업–시험–인정’의 좁은 문만 고집하면, 학생들은 결국 AI가 대신할 수 있는 능력만 배우게 된다. 이제 교육은 ‘선발되는 인간’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을 키워야 한다. 그 변화는 노동을 천시하던 오래된 감수성까지 함께 바꾸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암기와 반복으로 측정되는 능력은 더 이상 미래의 경쟁력이 아니다.
시험 능력주의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능력을 기르게 해야 할까. 단지 “시험이 중요하지 않다”라는 선언으로는 부족하다. 시험이 판단하던 영역 자체가 기술 변화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학교가 아직도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벼랑 끝의 직업교육
학령인구 감소는 직업교육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고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60만 명을 넘었던 직업계고 학생 수는 2025년 현재 약 2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단순한 수적 감소가 아니라, 구조적 기반이 잠식된 것이다. 직업교육은 단순히 하나의 교육 분야가 아니다. 이는 산업에 필요한 숙련 인력을 키우는 기반이며, 지역 경제의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축이다. 학교가 사라지면 산업이 흔들리고, 산업이 무너지면 학교도 설 자리를 잃는다. 직업계고가 그 역할을 유지하려면 교육, 산업, 지역 사회가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직업교육은 학력 체계 주변부로 밀려나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대학을 가는 게 낫지 않나요?” 입학 설명회에서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 질문 뒤에는 ‘대학=성공, 직업계고=차선’이라는 암묵적 서열이 숨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숫자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2025년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직업계고 졸업생 중 실제 취업자 비율은 25.6%에 불과하지만, 진학자를 제외한 취업률은 55.2%로 일반고 졸업 후 대학을 거쳐 취업하는 경로보다 4~5년 빠르게 경제 활동을 시작한다. 20대 중반이면 이미 실무 경력 5년 차가 되어 있고, 같은 또래 대졸 신입 사원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유’다. 현장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필요하다면 재직자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 열려 있다. 실무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배우는 이론은 훨씬 깊이 있게 체화된다. 반대로 대학을 나와 뒤늦게 기술을 배우려 하면 현장 적응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문제는 ‘대학 진학 vs. 직업계고 취업’의 우열이 아니다. 각자의 적성과 상황에 맞는 선택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구조다. 어떤 학생에게는 19세에 현장으로 나가 기술을 익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그 선택을 ‘어쩔 수 없는 차선’이 아니라 ‘주도적인 인생 설계’로 인정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학력이 아니라 ‘내 삶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직업계고 학생들은 또래보다 일찍 자신의 길을 찾고, 책임을 지고, 경제적 독립을 이루며 그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구조적 변화의 여파는 결국 현장실습을 나가는 19세 청소년의 어깨로 가장 먼저 내려앉는다. 학교와 산업, 지역 사회의 토대가 흔들릴수록, 학생들은 더 불안한 발판 위에서 첫 노동을 시작하게 된다.
침묵 속의 땀방울
나는 수능장 밖의 19세들을 생각하면, 비바람 속에서 우산 없이 출근하는 아이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청소년 노동자가 혹여나 사회의 구조적 폭력 속에서 홀로 비를 맞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현장실습생은 마지막 학기를 학교 밖에서 보내며 스스로를 ‘예비 전문인’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안전 교육도 없이 위험한 작업을 맡거나, 전공과 무관한 업무에 투입되는 일도 빈번하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설계 문제이며, 우리가 아직 청소년 노동을 ‘배움의 과정’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용접 불꽃처럼 이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미래는 분명 반짝인다. 하지만 그 불꽃 뒤에는 언제나 구조적 위험이 숨어 있다. 부와 가난의 대물림, 지방 청년의 축소된 미래,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현실……. 이는 개별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실패이자 우리 모두의 실패다.
교실의 변화
아이들이 불행한 나라가 행복한 시민을 길러 낼 수 있을까. 교육은 결국 민주주의의 토양이다. 직업교육 역시 산업화 시대의 뒤따라가기 전략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아이들은 기술을 ‘암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
이런 변화는 거대한 정책 선언만으로 오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교실에서부터 조용히 시작된다. 우리 학교에서는 지난해부터 ‘나의 실패 이야기’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 발표 실패, 자격증 시험 낙방, 각종 대회 탈락, 심지어 사랑의 실패까지학생들은 자신이 겪은 실패를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 낸다. 한 학생은 ‘실패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다’고 적었다.
공모전에 나온 이야기와 실패한 작품들은 복도 ‘실패박물관’에 전시한다. 추락한 드론 영상, 작동하지 않는 코드, 엉망이 된 3D 출력물……. 실패는 더 이상 숨겨야 할 흠이 아니라, 배움의 흔적으로 자리 잡는다. 나의 실패가 다른 친구에게는 중요한 힌트가 되기도 한다.
수업 방식도 바꾸고 있다. ‘페어 디자이닝’ 수업에서는 한 학생이 설계를 맡고, 다른 한 학생은 질문만 던진다. “왜 이렇게 설계했어?”,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라는 질문이 사고의 깊이를 만든다. AI 역시 답을 대신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토의할 거리를 던져 주는 도구로 사용한다.
‘존재 확인 프로젝트’도 있다. 매주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를 주제로 발표하지만, 성적이나 수상 경력 같은 스펙은 금지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힘들 때 찾는 장소, 사소한 습관, 꿈 등을 나눈다.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네가 더 잘 이해된다”라는 말이 오갈 때, 학생들은 점수 너머의 자신을 확인한다. 교실이 교과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는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런 시도는 우리 학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만 마음먹으면, 어느 교실이나 복도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변화다. 교실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앞으로의 노동 세계와 시민 사회의 민낯을 예고할 것이다.
존엄을 가르치는 사람
얼마 전 현장실습을 중단하고 복교를 원한 학생이 있었다. 과거 같았으면 “네가 더 버텨야 한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학교는 그 학생의 말을 먼저 들었다. 전공과 다른 반복 업무로 무력감을 느꼈다는 토로에, 우리는 학생의 편이 되기로 했다.
기업과 협의해 복교 절차를 밟았고, 학생은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복교 후 생활은 오히려 더 바빠졌다. 담임–학과장–취업담당 부장–상담 교사–교장으로 이어지는 ‘복교 응원 프로그램’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응원 프로그램의 핵심은 복교 학생을 따뜻하게 품어 주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실패를 낙인이 아닌 경험으로 받아들이도록 곁을 지키는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지만, 분명한 변화다. 교장실에서 복교한 학생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기업도 조금씩 긍정의 손을 내밀고 있음을 느낀다. 직업계고와 현장실습 업체의 변화가 복교 학생에게 ‘실패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디딤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제 선택을 믿고, 복교를 응원해 준 학교와 실습 나간 회사에 감사드립니다.”
학생이 인사하며 교장실을 나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생이 주체’라는 원칙이 실제로 작동한 순간이었다. 33년 동안 직업계고 교사로 살아오며 나는 알게 되었다. 학생 한 명의 성장은 거칠고 두꺼운 임파스토처럼, 실패와 좌절과 재도전의 층위들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진다는 것을. 교사는 그 과정 곁에서 색을 고르고 다시 칠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존엄주의로, 경쟁 교육에서 연대 교육으로. 무엇보다 ‘언어’부터 바꾸어야 한다. “공부 못해서 직업계고 갔다”라는 낙인 대신, “기술과 실무를 배우기 위해 선택했다”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말이 필요하다. 직업 교육의 성취 앞에서 “그래도 잘하네”라는 유보적인 칭찬이 아니라 “정말 잘하네”라고 인정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하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제도적 안전망을 세우고, 채용 시스템이 실질적 역량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학생은 산업의 투입 인력이 아니라, 지역의 청년으로 뿌리내릴 인재이기 때문이다. 33년 전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나는 내가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결국 교사는 ‘존엄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수능장 밖 아이들에게 건네는 사회적 연대
나는 종종 생각한다. 지금 현장에서 땀 흘리며 실습 중인 이 학생들이 불과 몇 달 뒤면 우리의 동료가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내년이면 정식 노동자가 되고, 월급을 받고, 세금을 낼 것이다. 그 세금은 다시 국가의 재정이 되고, 그 재정은 동년배 청년들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도 쓰일 것이다. 한 교실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19세들이,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 옆에서 묵묵히 기술을 가르치는 선배 노동자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한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가장 실제적인 연대다. 청소년 노동자가 비를 맞고 서 있을 때 옆에서 우산을 들어 주는 그 마음이야말로, 산업과 지역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는 토대다.
나는 앞으로 수능 시험장으로 향하게 될 학생과 그 부모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치는 작업복 입은 또래를 향해, “저 아이(친구)도 내 아이(친구)이자 동료 시민”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 달라고. 수능 날 뉴스에 시험장 앞 풍경이 나오면, 화면에는 잡히지 않지만 작업복 입고 출근하는 18%의 고3 학생들이 있다는 것도 함께 떠올려 보자. 대학 진학을 위해 치열하게 달려온 청소년들이 있듯이, 오늘도 새벽 전철을 타고 일터로 향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두 길이 결코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속도의 성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노동 위에 서 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도, 그 학생을 응원하는 부모도, 일터에서 기술을 배우는 현장실습생도, 그 옆에서 조용히 기술을 전수하는 선배 노동자도 결국 한 사회의 순환 안에 있다. 교실의 배움이 현장으로 흘러가고, 현장의 땀방울이 다시 교실의 질문으로 돌아오듯이, 우리의 삶도 서로에게 이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현장실습생을 응원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내일을 응원하는 일이라고. 수능장 밖에서 비를 맞으며 출근하는 아이에게 건네는 작은 격려는, 곧 우리 사회의 품격이라고. 그리고 학생이 던진 “선생님, 왜 우리는 뉴스에 나오지 않죠?”라는 질문에 선배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 행동으로 답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❶ “수능 시험 보는 날, 로봇고 3학년 실습생의 출근길 동행기”, 〈오마이뉴스〉, 2025년 11월 14일.
참고 문헌
김동춘(2013), 《사회정의와 사회정책》, 돌베개.
프란츠 파농, 노서경 옮김(2008),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은유 (2020),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돌베개.
허태준(2020),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호밀밭.
교육부(2025). 〈2025년 직업계고 졸업자 취업 통계 조사 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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