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취약함들이 만들어 내는 교육의 자리
- 《우정과 연대의 교육학》

박지원 jiwon8669@daum.net
대학 강사,
교육학 연구자
흔히들 열악한 환경에 놓일수록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말한다.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은 교육을 ‘노력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로 축소하여 교육 평등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취약함을 깨끗하게 표백해야만 삶의 기회가 열린다는 차별적인 감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게다가 내가 보고 느낀 교육은 그런 논리와는 사뭇 달랐다.
나는 지금 대학에서 교사가 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은 대체로 제도 교육에 잘 적응한 편이어서 세상의 편견처럼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바라는 면모가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교사 됨’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교육의 순간’은 백이면 백 좋은 학군이나 교육 자본이 주는 기회가 아니라 ‘나 자신이나 타인의 취약성을 마주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장애인 친구와 짝이 되어 잘 지내려고 애써 보았거나 이주 배경 학생이 따돌림을 당할 때 방관하며 죄책감을 느꼈던 일, 젠더 때문에 차별받은 기억들, 자신이 거주하는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순간들처럼 이질적인 세계를 마주한 기억은 찰나일지라도 상흔처럼 오래도록 각인된다. 교사로서 나중에 만날 낯설고 연약한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하고 평등하게 대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길 때 더욱 그렇다. 학교와 사회에서 고성취자로서 받은 인정이나 교사와 성인이라는 권력적 위치, 주류 규범에 적합한 정체성, 그렇게 살아오며 내면화한 동일성의 욕망 등이 자칫 그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이들을 상처 입히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는 낯설고, 비효율적이고,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만남으로부터 온다. 학생들은 “그때는 내가 잘해서 그 친구를 도와준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 친구를 만나 내가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는 타자를 자기 성장 서사 속에 도구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당신을 만나지 못한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폭력적인 존재였을지 깨닫는 아찔한 자기 고백에 가깝다. 또 이러한 말들은 순간순간 가르치는 위치에 선 나를 교육의 권력으로부터 구출하기도 한다.
《우정과 연대의 교육학 - 서로를 살리는 배움의 여정》은 약한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삶의 기회와 교육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 과정(11~12학년) 학생들이 수행한 수년간의 필드워크(fieldwork) 수업을 기록하고 있다. 필드워크는 혼자 혹은 팀을 이루어서 사회 곳곳 연대가 필요한 장소에 찾아가 직접 참여하는 장기간의 프로젝트이다. 일시적으로 체험하는 수준을 넘어서 몸과 마음, 시간을 쏟아 현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이 수업의 핵심이다. 그렇게 해서 만난 현장은 그야말로 다채롭고도 다성적이다. 퀴어, 장애인, 이주민, 참전 군인, 일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 세월호 유가족, 미얀마 시민, 무연고 사망자, 비인간 동물과 나무, 국가나 자본과 맞서 싸우는 지역 사회의 주민들……. 목록을 모아 놓고 보니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급진적인 액티비즘의 집합체를 보는 듯하다. 이 과정은 성인이 되기를 앞둔 학생들에게 좋은 일(good work)을 모색하게 하는 진로교육의 기능을 겸한다. 실제로 학생들은 현장에서 목격한 것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관련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거나 그때 맺은 인연으로 활동가로서 살아가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은 아주 특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내가 목격한 제도 교육 속 ‘교육의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연대한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 본문 204쪽
인용구에 담긴 멕시코 한 원주민 여성의 목소리는 책에 담긴 연대의 의미를 관통하고 있다. 이 말은 그간 연대가 이루어지는 여러 현장에서 고매한 이념이나 개인의 선한 마음에 기대거나 지식인과 강자가 주도하는 연대의 한계를 자성하는 언어로 인용되었다. ‘나의 해방과 당신의 해방의 연결’은 정치적 구호보다는 존재론적인 사실에 가깝다. 모든 존재는 생태, 역사, 사회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목숨과 권리를 빚진 채 살아간다. 나는 당신의 목소리로 불림으로써 존재하고, 당신의 노동과 돌봄에 기대어 살아가며, 당신의 살을 뜯어먹고 생명을 유지한다. 나아가 이 사실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왜 응답해야 하는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고통을 왜 모른 척할 수 없는지 설명해 주기도 한다.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건 우리가 가진 약함 때문이다. 전쟁과 군사주의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준비하는 이담(쿵쿵토끼)은 자신이 무시무시한 군사 권력에 대항할 만큼 강해서가 아니라 다만 ‘연약해서’, ‘폭력이 두려워서’ 군대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젠더·퀴어 연구로 잘 알려진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내가 너무도 약해서 용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역설이 아니다. 근대적 관점에서 인간은 이성적이고 강한 생명체로 설명되곤 하지만 버틀러는 그보다는 ‘상처 입기 쉬움/취약성(vulnerability)’이 인간의 본질을 훨씬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여린 살갗을 가지고 있으며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쉽게 약자가 된다. 동시에 취약한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하거나 혹은 더한 방식으로 취약한 타인의 고통 앞에 속절없이 슬퍼하고 그 결과 도저히 그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윤리는 타자의 비명에 압도당할 때 그에 대한 수동적 응답으로서 출현한다. 취약성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권력자에게는 도무지 감지되기 어려운 어떤 것이기도 하다.
필드 위에서 발견한 취약함은 서로 다른 존재의 해방을 연결하는 강한 고리가 된다. 성미산학교 내부에서 진행된 ‘모두를 위한 화장실’ 프로젝트는 이분법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소외된 퀴어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지만, 획일적인 형태의 화장실을 사용하기 어려운 영유아나 장애인의 문제로 확장되면서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권력’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N번방 사건 이후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위협을 느낀 한다영(크림)과 윤소연(그냥)은 자신이 처한 위기와 전쟁 시기 위안소의 성 착취, 기지촌 성매매 문제를 엮어 내었다. 이들은 자발적 성매매냐 아니냐를 묻는 남성 중심적·군사주의적 질문을 걷어 내고, 젠더 권력에 의해 구조적으로 착취당하는 여성의 위치를 복원하여 서로 다른 폭력, 과거와 현재, 약자와 약자를 날줄과 씨줄로 연결한다. 베트남 참전 군인을 인터뷰하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본인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기로 한 박혜진(노랭)의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와 동료들은 그 과정에서 전쟁에 동원되거나 쉽게 지워지는 존재들을 발견하고, 말했지만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상상해 보며, 과거의 군사주의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비인간에 대한 착취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취약성은 생명 그 자체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1인분의 생명을 가졌다. 이솔은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 중 ‘먹는 것’에 집중하여 난민과 미등록 이주자를 위한 무국적 레스토랑을 열었다. 농사짓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현동민(레이지)과 박영민은 함께 길러 수확한 농산물로 멀리서 온 사람들과 음식을 지어 먹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등한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고 했다. 법적 지위 유무나 문화적 차이는 낯선 사람들을 차별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모두 언젠가 죽는 생명이라는 사실, 살아 있는 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평등의 토대이다. 생명의 평등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 물질을 가로지르는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을 위한 축·수산업, 제약 산업, 볼거리 산업에 착취당하는 비인간 동물을 구출하는 일이나 기후 위기와 인간의 실수로 불타 버린 산에 나무를 심고 숲을 복원하는 활동은 우리와 그들이 다르지 않고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권력은 생명이 지닌 평등한 가치를 차등적으로 할당한다. ‘정상 규범에 속한 자격이 있는 국민’이 국가가 지켜야 하는 가치로운 생명이라면, 그 밖에는 죽게 내버려둬도 상관없는 생명과 죽여 마땅한 생명이 있다. 무연고 사망자들은 죽음을 외면해도 되는 생명에 해당한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공영 장례 활동에 참여한 이자민(마농)은 모두가 평등하게 죽지만 사회가 죽은 자와 남겨진 자를 대하는 태도는 평등하지 못하다는 진실을 목격했다. 그와 함께 무연고 노숙인의 장례에 참여한 한 수녀님은 ‘고인을 존엄하게 대우해야 남은 사람들의 삶도 이어질 수 있다’며 정성스레 고인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한편, 전쟁 중에 ‘소탕’당한 이들은 죽여 마땅한 생명의 사례이다. 한국 전쟁기에 사상을 이유로 골령골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마주한 정은결은 ‘극좌 사상’을 가진 존재는 죽여도 되는지 되묻는다. 사상의 옳고 그름, 네 편과 내 편 이전에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외면당하는 ‘벌거벗은 생명’일지라도 그 삶은 모두 남은 이의 삶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무연고자의 장례를 치르는 활동이나 역사 속에서 잊힌 학살된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은 애도하고 기억함으로써 생명의 평등을 끝끝내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럼에도 취약성은 힘이 세다. 굴종시키고 억압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자의 힘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힘이 약한 이들에게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곁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웃기고, 먹이고, 살리는 ‘비폭력의 힘’이다. 수요집회에 나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들의 삶이 망가졌으리라는 편협한 생각과 달리 매 순간 명랑함과 다정함으로 자기의 삶과 타인을 존엄하게 대한다. 가족을 잃은 이들 역시 계속해서 비탄에 빠져 있지만은 않는다. 문해람(인)은 4.16 합창단을 ‘유머’로 기억한다. 이들은 애끓도록 슬퍼하지만 때로는 농담으로 서로를 웃기며 그렇게 함께 버틴다. 최여울(이응)은 밀양과 제주, 군산 등에서 개발주의에 맞서 지역을 지키는 여러 투쟁 현장을 지키며 ‘상상력, 따뜻한 나눔과 즐거운 이야기, 노래와 유머, 무력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을 챙기는 다정함’ 속에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한다. 취약한 이들이 서로를 살리는 연대의 과정은 숲이 하는 일을 닮았다. 숲은 그 모양새나 지위가 어떠하든 생명으로 이 세계에 온 것들에 자리를 내어주고 환대한다. 연대는 “숲이라는 그 아름다운 과정 안에 같이 엮이는”(본문 304쪽) 과정이고 나아가 이 세계를 거대한 생명의 숲으로 만드는 꿈을 꾸는 것이다.
트러블과 함께 곁에 머물기
우정과 연대는 물론 귀하지만 그 과정에 서린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기엔 부족한 말이라고 의심해 왔다. 상호 간 비대칭적인 권력을 감지하지 못한 채 맺는 관계는 종종 착취를 은폐하며, 특히 청소년이 중심이 되는 연대는 ‘인간 전체의 희망’을 보여 주는 증거로 쉽게 수단화되기도 한다. 나 역시 믿었던 우정이 깨어지고 힘겹게 맺은 연대가 바스러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필드워크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든 순간이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곁에 있어서 좋았고 사랑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들에게 우정과 연대가 완성해야 할 목표가 아닌 매 순간 위태롭게 흔들리고 표류하는 과정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책 속에는 일반화할 수 없는 제각각의 고유한 실패담이 가득하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미 오염된 땅 위에서 훼손된 몸을 가진 채 어려운 삶의 조건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들과 함께 살아가는 실천을 ‘트러블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라고 표현했다.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경험한 우정과 연대는 숱한 실패 속에서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희미한 가능성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가는 트러블과 함께하기 그 자체이다.
들여다보면 타인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패는 완전한 실패만은 아니다. 대안학교 학생으로서 남들이 칭송하는 ‘주체성’과 ‘자율성’에 과부하가 걸린 듯한 낭패감에 빠지기도 하고, 사회적 소통 방식이 전혀 다른 발달장애인이나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만나기만 하면 뭔가 사 달라고 하는 이주 배경 어린이들에게 ‘호구 잡힌’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타인의 위치에서 나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미얀마 청년 활동가의 시각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보고, 비장애인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장애인에게 일상이었음을 깨닫고, ‘사 달라’는 어린이의 말이 그간 맺어 온 후원 관계를 함의하고 있음을 알고는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함께 놀기’를 고안하기도 한다. 특히 필드워크에서 예술은 새로운 관계를 발명하는 중요한 방법론이다. 예술은 소외되기 쉬운 감정과 감각을 매개로 하여 사이를 잇는 기술이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만든 연극 〈난잡한 자기소개〉는 왜 사람들과 원활하게 소통해야만 하는지 세상을 향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서 만든 그림책, 나뭇잎과 벌레와 동물들의 소리와 몸짓을 담은 애니메이션, 활동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는 과거와 현재, 사람과 생명, 감정과 기억을 연결한다. 투쟁 현장에서 평화를 기원하며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는 “두려움을 없애 주고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본문 387쪽).
연대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서 ‘무력감과 상실감이 지배’할 때이다. 횟감으로 떠지기 직전인 방어와 나의 해방이 도대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고, 나무 몇 그루 심어서 뭐가 달라질까 하는 냉소에 빠지기도 하고, 구조한 돌고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총체적으로 망가진 세계 안에서 해방이란 얼마나 요원한 과제인지를 뼈아프게 깨닫는다. 사회적 참사에 연대할 때는 그 슬픔이 너무 무거워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생명이 공평하게 1인분이듯 우리에게 허락된 실천 역시 1인분이기에 한계를 넘어서는 애씀은 고통이 되기도 한다. 왜 더 하지 못했을까, 뭐가 부족했을까,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에 휩싸일 때는 과감히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믿어야 한다. 곁에 있는 이들이 건네주는 우정에 기대어 잠시 쉬거나 때로는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제로 웨이스트 운동에 참여한 박가현은 언젠가 자신이 그만둔다 해도 누군가 오솔길을 만들 거라 믿는다. 이들은 스스로 모든 걸 해내기보다는 자신이 지나온 길에 작은 조약돌을 놓음으로써 ‘나 다음에 올 타자’를 부른다. 낯선 얼굴로 다가와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어갈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들이 바로 다음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으면서.
학교의 의미, 교육의 자리
이 생생한 활동 기록들은 왜 ‘생태주의 운동론’이나 ‘사회 참여론’이 아니라 ‘교육학’으로 이름 지어졌을까?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은 학교를 벗어나는 듯하지만 결국 ‘학교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로 돌아온다. 읽을수록 필드워크는 대안학교에서만 가능한 낭만적이고 특수한 활동이라기보다 학교의 보편적인 의미를 회복하는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드워크를 이끈 교사 최경미(사이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팬데믹으로) 학교가 중단되자 역설적으로 그동안 학교가 해 왔던 기능과 역할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학교는 가난과 폭력 등 취약한 삶의 조건들로부터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인 동시에 돌봄의 기능도 맡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는 그동안 미래로 ‘유예된 존재’로 여겨져 온 청소년들이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온 공간이었다는 점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 본문 23쪽
벨기에의 교육철학자 마스켈라인과 시몬스는 《학교를 변론하다》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팬데믹 이후 강제로 가정에 머무르게 된 학생들은 그 전에는 귀찮고 답답하게 여겼던 학교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두 학자는 그들이 누군가의 자녀로서 느끼는 사적인 감정(타고난 배경이 주는 압박감, 부모의 기대 등)과 자아실현을 준비하는 예비적 존재라는 긴장감을 벗어나서, 온전히 자유로운 ‘나’로서 공적인 세계 안에서 타인과 더불어 지내는 평등한 경험을 그리워한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는 몸을 고유한 시간과 공간에 붙박아 두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대끼게 만든다. 함께 공부하고 놀고 밥 먹고 그저 곁에 머무는 일상 그 자체, 그리고 그 공통된 세계 안에서 누리는 소박한 자유와 평등이 학교가 지닌 본래적이고 실존적인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가 실현되려면 당연하게도 학생이 자유와 평등의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최경미(사이다)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미래로 유예된 존재들’에게 현재의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다. 투쟁 현장에 들어선 학생들은 기특하고 대견하다며 무례하게 추켜세워지기도 하고, 철없는 어린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무시당하는 수치를 겪기도 한다. 청소년의 앎과 실천을 칭찬받아야 할 행동으로 보거나 멋모르는 치기로 여기는 것은 그들의 시간을 오지 않은 미래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거울상이다. 청소년은 미래의 희망도 덜 완성된 존재도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인간은 저마다 늘 미래를 준비 중이고, 미완의 상태이다. 진실을 다 알지도 못하고 책임도 다 질 수 없다. 청소년도 마찬가지로 부족하고 실수와 실패를 일삼는 그 모습 그대로 현재를 산다. 청소년을 주체로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보다 똑똑하거나 성숙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한 군데씩은 모자라고 미덥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사회고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필드워크는 학생을 한 사람의 성숙한 주체로 훌륭하게 키워 내는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모습 그대로 권리와 목소리를 가진 주체로서 현재를 살게 하는 학교이다.
학교는 세상의 온갖 압박을 유예하도록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적어도 학교에서만은 ‘취약한 삶의 조건들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며 그저 배우는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학교(school)의 어원인 그리스어 스콜레(scholē)는 ‘여가’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민 남성은 학교에서 생계 고민 없이 자유로운 여가를 누리며 지적 탐구와 정치, 예술에 몰두했다. 물론 그들이 누린 자유는 노동을 여성과 노예에게 떠넘기고 얻은 특권이긴 했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학교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압박에서 유예되어 자유를 누릴 권리를 한시적으로나마 누구에게나 열어 놓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필드워크는 고전적인 학교의 의미를 복원하는 시도이다. 필드에서 보내는 2년간 학생들은 주류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자유를 얻는다. 이는 돈이 많아서 얻은 자유가 아니라, 졸업 후에 세상의 논리에 순응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중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자유이다. 이 시간은 세상이 주입하는 미래상을 의심하고 온전히 내가 좋다고 믿는 방식으로 미래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자유를, 그 가능성을 실험하고 구현하는 과정에 내 몸을 온전히 가져다 놓을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유예하지 않고 유예하기’는 학교를 학교답게 하는 중요한 전제이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불안한 미래라는 환상을 떨친 채 각자가 지닌 성장 가능성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고, 편견에 물든 사회적 잣대에 기대지 않고 타인과 평등하게 만날 수 있다. 이때에 학교는 비로소 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학생을 주체로 대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책임은 학생에게 떠넘기는 학교는 정확히 그와 반대로 하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필드워크는 예외적인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학교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보편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필드워크는 세계를 ‘넓은 의미의 학교’로 재구성하는 실험이기도 하다. 성미산학교 학생들은 길 위에서 수많은 인연을 맺으며 그들 옆에 머무르고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경험을 한다. 그곳은 또한 무언가 박탈당하기 쉬운 장소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취약해지고, 문자 그대로 서로의 해방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래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방법을 함께 발명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장소야말로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기회가 열리는 교육의 자리일 것이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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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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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연구자
흔히들 열악한 환경에 놓일수록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말한다.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은 교육을 ‘노력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로 축소하여 교육 평등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취약함을 깨끗하게 표백해야만 삶의 기회가 열린다는 차별적인 감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게다가 내가 보고 느낀 교육은 그런 논리와는 사뭇 달랐다.
나는 지금 대학에서 교사가 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은 대체로 제도 교육에 잘 적응한 편이어서 세상의 편견처럼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바라는 면모가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교사 됨’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교육의 순간’은 백이면 백 좋은 학군이나 교육 자본이 주는 기회가 아니라 ‘나 자신이나 타인의 취약성을 마주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장애인 친구와 짝이 되어 잘 지내려고 애써 보았거나 이주 배경 학생이 따돌림을 당할 때 방관하며 죄책감을 느꼈던 일, 젠더 때문에 차별받은 기억들, 자신이 거주하는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순간들처럼 이질적인 세계를 마주한 기억은 찰나일지라도 상흔처럼 오래도록 각인된다. 교사로서 나중에 만날 낯설고 연약한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하고 평등하게 대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길 때 더욱 그렇다. 학교와 사회에서 고성취자로서 받은 인정이나 교사와 성인이라는 권력적 위치, 주류 규범에 적합한 정체성, 그렇게 살아오며 내면화한 동일성의 욕망 등이 자칫 그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이들을 상처 입히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는 낯설고, 비효율적이고,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만남으로부터 온다. 학생들은 “그때는 내가 잘해서 그 친구를 도와준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 친구를 만나 내가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는 타자를 자기 성장 서사 속에 도구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당신을 만나지 못한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폭력적인 존재였을지 깨닫는 아찔한 자기 고백에 가깝다. 또 이러한 말들은 순간순간 가르치는 위치에 선 나를 교육의 권력으로부터 구출하기도 한다.
《우정과 연대의 교육학 - 서로를 살리는 배움의 여정》은 약한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삶의 기회와 교육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 과정(11~12학년) 학생들이 수행한 수년간의 필드워크(fieldwork) 수업을 기록하고 있다. 필드워크는 혼자 혹은 팀을 이루어서 사회 곳곳 연대가 필요한 장소에 찾아가 직접 참여하는 장기간의 프로젝트이다. 일시적으로 체험하는 수준을 넘어서 몸과 마음, 시간을 쏟아 현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이 수업의 핵심이다. 그렇게 해서 만난 현장은 그야말로 다채롭고도 다성적이다. 퀴어, 장애인, 이주민, 참전 군인, 일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 세월호 유가족, 미얀마 시민, 무연고 사망자, 비인간 동물과 나무, 국가나 자본과 맞서 싸우는 지역 사회의 주민들……. 목록을 모아 놓고 보니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급진적인 액티비즘의 집합체를 보는 듯하다. 이 과정은 성인이 되기를 앞둔 학생들에게 좋은 일(good work)을 모색하게 하는 진로교육의 기능을 겸한다. 실제로 학생들은 현장에서 목격한 것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관련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거나 그때 맺은 인연으로 활동가로서 살아가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은 아주 특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내가 목격한 제도 교육 속 ‘교육의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연대한다
인용구에 담긴 멕시코 한 원주민 여성의 목소리는 책에 담긴 연대의 의미를 관통하고 있다. 이 말은 그간 연대가 이루어지는 여러 현장에서 고매한 이념이나 개인의 선한 마음에 기대거나 지식인과 강자가 주도하는 연대의 한계를 자성하는 언어로 인용되었다. ‘나의 해방과 당신의 해방의 연결’은 정치적 구호보다는 존재론적인 사실에 가깝다. 모든 존재는 생태, 역사, 사회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목숨과 권리를 빚진 채 살아간다. 나는 당신의 목소리로 불림으로써 존재하고, 당신의 노동과 돌봄에 기대어 살아가며, 당신의 살을 뜯어먹고 생명을 유지한다. 나아가 이 사실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왜 응답해야 하는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고통을 왜 모른 척할 수 없는지 설명해 주기도 한다.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건 우리가 가진 약함 때문이다. 전쟁과 군사주의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준비하는 이담(쿵쿵토끼)은 자신이 무시무시한 군사 권력에 대항할 만큼 강해서가 아니라 다만 ‘연약해서’, ‘폭력이 두려워서’ 군대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젠더·퀴어 연구로 잘 알려진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내가 너무도 약해서 용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역설이 아니다. 근대적 관점에서 인간은 이성적이고 강한 생명체로 설명되곤 하지만 버틀러는 그보다는 ‘상처 입기 쉬움/취약성(vulnerability)’이 인간의 본질을 훨씬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여린 살갗을 가지고 있으며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쉽게 약자가 된다. 동시에 취약한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하거나 혹은 더한 방식으로 취약한 타인의 고통 앞에 속절없이 슬퍼하고 그 결과 도저히 그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윤리는 타자의 비명에 압도당할 때 그에 대한 수동적 응답으로서 출현한다. 취약성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권력자에게는 도무지 감지되기 어려운 어떤 것이기도 하다.
필드 위에서 발견한 취약함은 서로 다른 존재의 해방을 연결하는 강한 고리가 된다. 성미산학교 내부에서 진행된 ‘모두를 위한 화장실’ 프로젝트는 이분법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소외된 퀴어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지만, 획일적인 형태의 화장실을 사용하기 어려운 영유아나 장애인의 문제로 확장되면서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권력’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N번방 사건 이후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위협을 느낀 한다영(크림)과 윤소연(그냥)은 자신이 처한 위기와 전쟁 시기 위안소의 성 착취, 기지촌 성매매 문제를 엮어 내었다. 이들은 자발적 성매매냐 아니냐를 묻는 남성 중심적·군사주의적 질문을 걷어 내고, 젠더 권력에 의해 구조적으로 착취당하는 여성의 위치를 복원하여 서로 다른 폭력, 과거와 현재, 약자와 약자를 날줄과 씨줄로 연결한다. 베트남 참전 군인을 인터뷰하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본인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기로 한 박혜진(노랭)의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와 동료들은 그 과정에서 전쟁에 동원되거나 쉽게 지워지는 존재들을 발견하고, 말했지만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상상해 보며, 과거의 군사주의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비인간에 대한 착취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취약성은 생명 그 자체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1인분의 생명을 가졌다. 이솔은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 중 ‘먹는 것’에 집중하여 난민과 미등록 이주자를 위한 무국적 레스토랑을 열었다. 농사짓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현동민(레이지)과 박영민은 함께 길러 수확한 농산물로 멀리서 온 사람들과 음식을 지어 먹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등한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고 했다. 법적 지위 유무나 문화적 차이는 낯선 사람들을 차별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모두 언젠가 죽는 생명이라는 사실, 살아 있는 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평등의 토대이다. 생명의 평등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 물질을 가로지르는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을 위한 축·수산업, 제약 산업, 볼거리 산업에 착취당하는 비인간 동물을 구출하는 일이나 기후 위기와 인간의 실수로 불타 버린 산에 나무를 심고 숲을 복원하는 활동은 우리와 그들이 다르지 않고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권력은 생명이 지닌 평등한 가치를 차등적으로 할당한다. ‘정상 규범에 속한 자격이 있는 국민’이 국가가 지켜야 하는 가치로운 생명이라면, 그 밖에는 죽게 내버려둬도 상관없는 생명과 죽여 마땅한 생명이 있다. 무연고 사망자들은 죽음을 외면해도 되는 생명에 해당한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공영 장례 활동에 참여한 이자민(마농)은 모두가 평등하게 죽지만 사회가 죽은 자와 남겨진 자를 대하는 태도는 평등하지 못하다는 진실을 목격했다. 그와 함께 무연고 노숙인의 장례에 참여한 한 수녀님은 ‘고인을 존엄하게 대우해야 남은 사람들의 삶도 이어질 수 있다’며 정성스레 고인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한편, 전쟁 중에 ‘소탕’당한 이들은 죽여 마땅한 생명의 사례이다. 한국 전쟁기에 사상을 이유로 골령골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마주한 정은결은 ‘극좌 사상’을 가진 존재는 죽여도 되는지 되묻는다. 사상의 옳고 그름, 네 편과 내 편 이전에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외면당하는 ‘벌거벗은 생명’일지라도 그 삶은 모두 남은 이의 삶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무연고자의 장례를 치르는 활동이나 역사 속에서 잊힌 학살된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은 애도하고 기억함으로써 생명의 평등을 끝끝내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럼에도 취약성은 힘이 세다. 굴종시키고 억압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자의 힘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힘이 약한 이들에게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곁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웃기고, 먹이고, 살리는 ‘비폭력의 힘’이다. 수요집회에 나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들의 삶이 망가졌으리라는 편협한 생각과 달리 매 순간 명랑함과 다정함으로 자기의 삶과 타인을 존엄하게 대한다. 가족을 잃은 이들 역시 계속해서 비탄에 빠져 있지만은 않는다. 문해람(인)은 4.16 합창단을 ‘유머’로 기억한다. 이들은 애끓도록 슬퍼하지만 때로는 농담으로 서로를 웃기며 그렇게 함께 버틴다. 최여울(이응)은 밀양과 제주, 군산 등에서 개발주의에 맞서 지역을 지키는 여러 투쟁 현장을 지키며 ‘상상력, 따뜻한 나눔과 즐거운 이야기, 노래와 유머, 무력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을 챙기는 다정함’ 속에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한다. 취약한 이들이 서로를 살리는 연대의 과정은 숲이 하는 일을 닮았다. 숲은 그 모양새나 지위가 어떠하든 생명으로 이 세계에 온 것들에 자리를 내어주고 환대한다. 연대는 “숲이라는 그 아름다운 과정 안에 같이 엮이는”(본문 304쪽) 과정이고 나아가 이 세계를 거대한 생명의 숲으로 만드는 꿈을 꾸는 것이다.
트러블과 함께 곁에 머물기
우정과 연대는 물론 귀하지만 그 과정에 서린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기엔 부족한 말이라고 의심해 왔다. 상호 간 비대칭적인 권력을 감지하지 못한 채 맺는 관계는 종종 착취를 은폐하며, 특히 청소년이 중심이 되는 연대는 ‘인간 전체의 희망’을 보여 주는 증거로 쉽게 수단화되기도 한다. 나 역시 믿었던 우정이 깨어지고 힘겹게 맺은 연대가 바스러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필드워크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든 순간이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곁에 있어서 좋았고 사랑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들에게 우정과 연대가 완성해야 할 목표가 아닌 매 순간 위태롭게 흔들리고 표류하는 과정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책 속에는 일반화할 수 없는 제각각의 고유한 실패담이 가득하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미 오염된 땅 위에서 훼손된 몸을 가진 채 어려운 삶의 조건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들과 함께 살아가는 실천을 ‘트러블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라고 표현했다.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경험한 우정과 연대는 숱한 실패 속에서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희미한 가능성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가는 트러블과 함께하기 그 자체이다.
들여다보면 타인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패는 완전한 실패만은 아니다. 대안학교 학생으로서 남들이 칭송하는 ‘주체성’과 ‘자율성’에 과부하가 걸린 듯한 낭패감에 빠지기도 하고, 사회적 소통 방식이 전혀 다른 발달장애인이나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만나기만 하면 뭔가 사 달라고 하는 이주 배경 어린이들에게 ‘호구 잡힌’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타인의 위치에서 나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미얀마 청년 활동가의 시각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보고, 비장애인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장애인에게 일상이었음을 깨닫고, ‘사 달라’는 어린이의 말이 그간 맺어 온 후원 관계를 함의하고 있음을 알고는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함께 놀기’를 고안하기도 한다. 특히 필드워크에서 예술은 새로운 관계를 발명하는 중요한 방법론이다. 예술은 소외되기 쉬운 감정과 감각을 매개로 하여 사이를 잇는 기술이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만든 연극 〈난잡한 자기소개〉는 왜 사람들과 원활하게 소통해야만 하는지 세상을 향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서 만든 그림책, 나뭇잎과 벌레와 동물들의 소리와 몸짓을 담은 애니메이션, 활동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는 과거와 현재, 사람과 생명, 감정과 기억을 연결한다. 투쟁 현장에서 평화를 기원하며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는 “두려움을 없애 주고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본문 387쪽).
연대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서 ‘무력감과 상실감이 지배’할 때이다. 횟감으로 떠지기 직전인 방어와 나의 해방이 도대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고, 나무 몇 그루 심어서 뭐가 달라질까 하는 냉소에 빠지기도 하고, 구조한 돌고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총체적으로 망가진 세계 안에서 해방이란 얼마나 요원한 과제인지를 뼈아프게 깨닫는다. 사회적 참사에 연대할 때는 그 슬픔이 너무 무거워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생명이 공평하게 1인분이듯 우리에게 허락된 실천 역시 1인분이기에 한계를 넘어서는 애씀은 고통이 되기도 한다. 왜 더 하지 못했을까, 뭐가 부족했을까,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에 휩싸일 때는 과감히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믿어야 한다. 곁에 있는 이들이 건네주는 우정에 기대어 잠시 쉬거나 때로는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제로 웨이스트 운동에 참여한 박가현은 언젠가 자신이 그만둔다 해도 누군가 오솔길을 만들 거라 믿는다. 이들은 스스로 모든 걸 해내기보다는 자신이 지나온 길에 작은 조약돌을 놓음으로써 ‘나 다음에 올 타자’를 부른다. 낯선 얼굴로 다가와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어갈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들이 바로 다음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으면서.
학교의 의미, 교육의 자리
이 생생한 활동 기록들은 왜 ‘생태주의 운동론’이나 ‘사회 참여론’이 아니라 ‘교육학’으로 이름 지어졌을까?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은 학교를 벗어나는 듯하지만 결국 ‘학교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로 돌아온다. 읽을수록 필드워크는 대안학교에서만 가능한 낭만적이고 특수한 활동이라기보다 학교의 보편적인 의미를 회복하는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드워크를 이끈 교사 최경미(사이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벨기에의 교육철학자 마스켈라인과 시몬스는 《학교를 변론하다》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팬데믹 이후 강제로 가정에 머무르게 된 학생들은 그 전에는 귀찮고 답답하게 여겼던 학교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두 학자는 그들이 누군가의 자녀로서 느끼는 사적인 감정(타고난 배경이 주는 압박감, 부모의 기대 등)과 자아실현을 준비하는 예비적 존재라는 긴장감을 벗어나서, 온전히 자유로운 ‘나’로서 공적인 세계 안에서 타인과 더불어 지내는 평등한 경험을 그리워한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는 몸을 고유한 시간과 공간에 붙박아 두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대끼게 만든다. 함께 공부하고 놀고 밥 먹고 그저 곁에 머무는 일상 그 자체, 그리고 그 공통된 세계 안에서 누리는 소박한 자유와 평등이 학교가 지닌 본래적이고 실존적인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가 실현되려면 당연하게도 학생이 자유와 평등의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최경미(사이다)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미래로 유예된 존재들’에게 현재의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다. 투쟁 현장에 들어선 학생들은 기특하고 대견하다며 무례하게 추켜세워지기도 하고, 철없는 어린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무시당하는 수치를 겪기도 한다. 청소년의 앎과 실천을 칭찬받아야 할 행동으로 보거나 멋모르는 치기로 여기는 것은 그들의 시간을 오지 않은 미래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거울상이다. 청소년은 미래의 희망도 덜 완성된 존재도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인간은 저마다 늘 미래를 준비 중이고, 미완의 상태이다. 진실을 다 알지도 못하고 책임도 다 질 수 없다. 청소년도 마찬가지로 부족하고 실수와 실패를 일삼는 그 모습 그대로 현재를 산다. 청소년을 주체로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보다 똑똑하거나 성숙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한 군데씩은 모자라고 미덥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사회고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필드워크는 학생을 한 사람의 성숙한 주체로 훌륭하게 키워 내는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모습 그대로 권리와 목소리를 가진 주체로서 현재를 살게 하는 학교이다.
학교는 세상의 온갖 압박을 유예하도록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적어도 학교에서만은 ‘취약한 삶의 조건들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며 그저 배우는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학교(school)의 어원인 그리스어 스콜레(scholē)는 ‘여가’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민 남성은 학교에서 생계 고민 없이 자유로운 여가를 누리며 지적 탐구와 정치, 예술에 몰두했다. 물론 그들이 누린 자유는 노동을 여성과 노예에게 떠넘기고 얻은 특권이긴 했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학교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압박에서 유예되어 자유를 누릴 권리를 한시적으로나마 누구에게나 열어 놓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필드워크는 고전적인 학교의 의미를 복원하는 시도이다. 필드에서 보내는 2년간 학생들은 주류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자유를 얻는다. 이는 돈이 많아서 얻은 자유가 아니라, 졸업 후에 세상의 논리에 순응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중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자유이다. 이 시간은 세상이 주입하는 미래상을 의심하고 온전히 내가 좋다고 믿는 방식으로 미래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자유를, 그 가능성을 실험하고 구현하는 과정에 내 몸을 온전히 가져다 놓을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유예하지 않고 유예하기’는 학교를 학교답게 하는 중요한 전제이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불안한 미래라는 환상을 떨친 채 각자가 지닌 성장 가능성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고, 편견에 물든 사회적 잣대에 기대지 않고 타인과 평등하게 만날 수 있다. 이때에 학교는 비로소 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학생을 주체로 대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책임은 학생에게 떠넘기는 학교는 정확히 그와 반대로 하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필드워크는 예외적인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학교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보편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필드워크는 세계를 ‘넓은 의미의 학교’로 재구성하는 실험이기도 하다. 성미산학교 학생들은 길 위에서 수많은 인연을 맺으며 그들 옆에 머무르고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경험을 한다. 그곳은 또한 무언가 박탈당하기 쉬운 장소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취약해지고, 문자 그대로 서로의 해방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래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방법을 함께 발명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장소야말로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기회가 열리는 교육의 자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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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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