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돌봄 사회로의 전환과 교육의 과제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돌봄과 교육
-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관점과 쟁점
백영경
paix@jejunu.ac.kr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더 나은 돌봄, 돌봄-교육간 위계 탈피의 조건
돌봄과 교육의 통합을 표방하는 늘봄학교 추진과 함께, 돌봄과 교육의 경계를 둘러싼 논의에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미 〈돌봄과 교육, 그 분리와 위계의 역사〉[ref]《오늘의 교육》, 59(2020년 11·12월).[/ref]에서 채효정은 돌봄과 교육 사이에 존재해 온 오래된 위계를 비판하면서 돌봄 속에 존재하는 교육 이상의 교육적 의미를 지적하고, 돌봄과 교육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이후에는 돌봄의 의미가 점차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주변의 존재들, 그 존재들이 담긴 시공간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새로운 관계 맺음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세계를 재조직할 수 있는 활동까지도 돌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느끼며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중심에 돌봄을 두어야 한다고 보게 되면, 돌봄과 교육이 분리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어려움은 ‘돌봄’과 ‘교육’ 모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돌봄의 권리와 의무를 제도화하자는 논의가 확산하는 과정을 보면, 무엇이 되었든 돌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 좋은 일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제도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돌봄 서비스’에 가깝게 축소되는 돌봄의 의미는 결국 교육과 돌봄 사이의 위계를 다시금 공고화할 우려가 있다. 이 글은 교육과 돌봄이 함께하면서 각각의 의미를 심화시킬 수 있으려면, 일단 현재 돌봄 기본권 제도화 논의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을 짚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돌봄이라는 의제를 통해 교육의 의미와 교육 현장을 실제 변화시킬 수 있으려면, 막연한 돌봄 가치의 강조를 넘어서 더 나은 돌봄을 위한 정치적 기획은 어떻게 가능할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돌봄이 서비스로 이해되고 돌봄 노동자들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돌봄과 교육에 대한 전향적인 논의 역시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봄 기본권은 어떤 권리여야 하는가
지난 총선에서 여야의 돌봄 관련 공약은 모두 새로운 게 없었지만 돌봄에 대한 쟁점 자체를 전면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ref]“돌봄이 전면으로, 21대 총선 교육 공약··· 양당 모두 돌봄 정책 ‘재탕’”, 〈경향신문〉, 2024년 3월 26일.[/ref]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면 돌봄 기본권 보장을 위한 ‘돌봄 기본법’ 제정 논의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이며, 「헌법」 개정 논의가 시작되면 돌봄을 국민의 권리와 의무로 명시함으로써 돌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돌봄 민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힘을 받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적어도 구호로만 보면 돌봄 중심 사회로의 대전환 요구가 더는 소수의 목소리가 아닌 상황이다. 돌봄은 현재 한국에서 그만큼 뜨거운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며, 돌봄을 대하는 방식에서 큰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돌봄권 및 돌봄 중심 사회 논의가 확산하는 것과 돌봄을 둘러싼 현실의 환경이 개선되는 건 별개이다. 지금처럼 돌봄 노동자들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돌봄은 여전히 이루기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박주영, 2023), 돌봄 논의가 확산되었다고는 하지만 구체적 대안의 차원에서는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쟁점이든 기본법 제정으로 바로 해결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중에서도 돌봄은 시민들의 생활 영역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로서 기본법 제정이나 헌법화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돌봄 중심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동력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돌봄이라는 이슈가 이미 공론장에서 다른 모든 여성 관련 의제들을 압도해 버렸다는 불만의 소리도 있다. 듣기에 아름답고 누구나 한마디씩은 할 말이 있는 듯한 돌봄 논의가,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갈등을 연상시키는 ‘젠더 폭력’이라든가 ‘직장 내 성희롱’, ‘성과 재생산 권리’ 같은 이슈들을 모두 묻히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봄을 기본권으로 법제화하자는 측에서는 누구나가 누려야 할 권리로서 돌봄에 관해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는 일이 당장에 돌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돌봄의 가치와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고 국가의 역할을 강제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희망한다. 담론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인간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는 보편적 취약성 개념에 기대고 있으며(황정아, 2021), 여기에서 돌봄이 모든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존재로서 돌봄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보편적 취약성에 호소하면서 돌봄을 누구나가 누려야 할 권리로 취급하는 방식은 과거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주장했던 복지 국가의 이상과 큰 차이가 없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돌봄이 필요하다고 해서, 정치적 논쟁과 투쟁 없이 돌봄권이 실효를 가지게 되리라 기대하는 건 이제까지 돌봄을 둘러싸고 존재해 온 기나긴 정치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돌봄 이론의 발전 과정은 1970년대 이후 복지 국가 축소에 저항해 온 역사이자, 소수자 집단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 온 역사였다(달라 코스따, 2017; 페데리치, 2014; 김성희, 2023; 백영경, 2023).
실제로 돌봄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페미니즘의 역사와 늘 함께해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Dowler et als., 2019). 백인 페미니즘과 제국주의 사이의 껄끄럽고도 복잡한 관계에 천착해 온 페미니스트 우마 나라얀은 1995년에 쓴 〈식민주의와 그 타자들 : 권리들과 돌봄 담론들에 대한 고찰(Colonialism and its others : Considerations on rights and care discourses)〉이라는 글에서 이미 돌봄 담론이 식민지 피지배자들에 대한 보호를 표방하면서 지배를 정당화했던 역사를 비판했다. 권리에 기반한 현실의 돌봄 담론은 그간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온 많은 부정의를 은폐할 우려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돌봄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현실의 인종적, 계급적, 식민주의적 부정의의 문제에 주목해야만 돌봄을 확대할 수 있다.
나라얀의 이러한 주장은 돌봄의 글로벌 분업이 가지는 신식민적인 현실을 비판하면서 돌봄 윤리와 포스트 콜로니얼한 문제의식을 결합해야 한다는 지적으로 이어져 왔다(파레냐스, 2009; Spivak, 2015).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중산층이 꿈꾸는 안락하고 좋은 삶과 그에 필요한 돌봄은 “제국적인 생활 양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브란트·비센, 2020). 삶의 방식을 그대로 두고 돌봄의 결핍만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며, 돌봄을 문제 해결을 위해 조달해야 할 서비스로 접근하게 되면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수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ref]“총선 앞 정부·여당이 불붙인 ‘외국인 가사 도우미’··· 공(公)약인가, 공(空)약인가”, 〈경향신문〉, 2024년 3월 27일; “[폴리노믹스② 조정훈] ‘월 100만원 가사 근로자’, 본질은 차등 임금제”, 〈FortuneKorea〉, 2023년 9월 1일.
보건복지부의 2023년 제5차 장기요양위원회 개최 보도 자료 역시 요양 보호사 인력 부족 문제를 지적하면서 “해외 인력 도입 등 인력 공급 경로 다변화”를 대책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ref]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분업의 문제나 인종주의의 문제, 서구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면 모두 낙후된 것으로 취급하거나 탄압하고 차별해 온 역사에 대한 구체적 인식 없이 돌봄은 대안적 가치가 되기 어렵다. 자칫 모두가 돌볼 시간이 없고 돌볼 역량이 되지 않는 사회를 불가피한 사회이자 “현대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대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돌봄을 조달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돌봄은 대안적인 가치는커녕 새로운 문제 발생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백영경, 2022).
돌봄과 커먼즈: 돌봄이 가진 정치적 힘의 회복
돌봄이 권리로 이해될 때 생겨나는 더 큰 문제는 결국 권리 보장의 주체는 1차적으로 국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돌봄은 국가가 책임지고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영역에 위치하게 된다. 물론 복지 차원에서 국가가 져야 할 돌봄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야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의존이 존엄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의 좋은 돌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의 책임과 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돌봄을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기본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국가 주도의 복지를 비판할 때 지적된 관료적 복지 체제 속에서의 탈인격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돌봄이라는 것은 그 성격 자체가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시공간에 대한 관심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일상 속에서 늘 다르게 수행해야 하는 일이지, 표준화된 국가 시스템이나 시장 기제에 맡겨 생산하고 분배하면 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나는 국가가 시장을 통해 조달한 돌봄 서비스를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한 돌봄 문제에서 국가와 시장은 생각처럼 거리가 멀지 않다고 보면서 돌봄 문제에서 커먼즈적 접근이 필요함을 주장해 왔다(백영경, 2017).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로서 돌봄을 이해해서는 자유주의적 기획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따라서 현재 시장과 관료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돌봄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공동 자원뿐만 아니라 공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돌봄의 방식을 공동체 스스로 구성원들의 필요에 맞게 조직하고 활용할 수 있는 ‘돌봄의 커먼즈’를 지향해야 한다.
현실에서 돌봄을 커먼즈와 연결하려는 운동은 돌봄이라는 생각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힘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오드리 로드가 돌봄을 일종의 정치적 전쟁이며, 생존의 위기에 몰린 집단들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으로 보았듯이(Lorde, 2017), 돌봄이 권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현재 돌봄의 결핍을 가져오고 생존을 위협하고 생계 수단에 대한 접근을 제약하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분석, 해결을 위한 투쟁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급진적 돌봄 운동들은 인종주의 반대 운동이나 원주민 권리 운동 등과 결합하여 나타나고 있다(Hobart & Kneese, 2020). 커먼즈 운동은 현재 삶에 필수적인 물, 토지, 전기, 교육, 의료 등이 인클로저로 구획되어 점점 접근하기 어려운 자원이 되어 가는 현실에 맞서, 삶에 필요한 자원들을 재분배하고 평등, 상호성, 책임의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돌봄에서도 공동 육아나 공동 부엌의 의미는 단지 육아나 식사 같은 돌봄 노동을 공동으로 수행한다는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니다. 가족과 함께하지 않아도,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아 함께 생활할 공간을 만들고 공유하는 것은 가족이 운명을 좌우하지 않아도 되는 삶, 재산 형성에 온 삶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의료 및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행위 역시 삶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는 다양한 경로를 만듦으로써 사회를 변화시켜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돌봄의 커먼즈가 추구하는 권리는 삶의 기본에 대한 평등한 권리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누구도 삶의 권리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해서 모두의 생존을 위한 방식으로 공존을 추구하는 돌봄 커먼즈는 국가의 지원을 부정하지 않으나, 국가가 보장하는 돌봄 기본권이라는 발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돌봄을 권리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기존의 사회 구조에 대항하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국가에 대해서도 대안적 형태의 거버넌스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저항의 성격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Ticktin, 2024).
돌봄 가치를 법에 명시함으로써 사회적 인정을 추구한다는 전략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그동안 돌봄 노동이 낮은 평가를 받은 까닭이 단순히 돌봄의 역할을 인정받지 못해서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돌봄은 “사랑의 노동”이며 따라서 가격으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고, 시장의 서비스로는 대체될 수 없다는 사고가 지배해 왔다(커테이, 2017; 폴브레, 2023). 여성들에게는 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의 노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 노동을 하면서 여성스럽지 못한 여성으로 취급받을 것인가의 딜레마가 주어졌다(페데리치, 2014). 돌봄 노동 중에서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이 있다는 돌봄의 상징 구조가 지속되면서, 돌봄 노동은 분절적으로 이해되었고 현실의 돌봄 노동 종사자들의 노동은 가치 절하 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돌봄을 찬양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이는 코로나19 이후의 현실에서도 확인되는 바로서, 한국 사회는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필수 노동자들이 얼마나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 상상하지 못한 많은 영역에서 돌봄이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면서 그들에 대한 찬양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계기로, 돌봄 노동을 저숙련, 저임금 노동으로 간주하고 돌봄 노동자에게 사회적으로 낮은 대우를 하는 현실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올 거라는 기대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자
앞서 인용한 우마 나라얀은 같은 글에서 중요한 것은 돌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조건들”을 질문하는 일이라 지적한다. 실제로 돌봄의 확대는 돌봄을 막연하게 권리로 주장하거나 명시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돌봄을 상찬해 오면서도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우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코로나19 이후 돌봄 노동자들을 그토록이나 찬양했음에도 실제적인 노동 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이제까지 제대로 된 돌봄을 가로막아 온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함께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 함께 있을 때 돌봄은 확대될 수 있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돌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나는 일단 돌봄 노동자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서 “양질의 돌봄 노동을 확보”하자는 식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돌봄 노동자가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임금 수준을 올리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한다고 해서 필요한 돌봄을 모두 돌봄 노동자에게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에 대한 논의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몸을 가진 인간들은 누구나 태어나서 나이 들어 가고, 앓다가 죽기도 하는 그런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잘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일들이 모두의 삶에서 중심이 될 수 있어야 하고,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서도 그럴 만한 시간과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사회가 돌봄 중심 사회로의 대전환이 추구하는 지향점이어야 한다. 그 방향은 현재의 경쟁적 시간 결핍 사회, 인간과 생태가 모두 이윤으로 추출되는 사회를 그대로 살아가면서, 유지되지 않는 삶을 돌봄 노동자의 노동으로 메우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물론 현재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기여를 더 가시화하고 그들의 노동이 단지 단순노동이 아님을 드러내면서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목적은 더 많은 돌봄 노동자를 확보하고 양질의 돌봄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돌봄을 수행해 온 사람들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돌봄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은, 동시에 돌봄이란 삶에서 떼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돌봄 노동자들을 늘려서 맡긴다고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어야 한다. 또 돌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획된 돌봄 의제에 갇히지 말고, 돌봄을 실제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배치를 바꾸어 내야만 한다.
정말 제대로 된 돌봄이란 무엇이며 이를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럴 때라야 돌봄을 가로막는 요건들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이 가능하고, 돌봄을 통한 새로운 정치와 연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며, 교육의 의미와 교육 현장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투쟁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돌봄을 중요한 투쟁의 현장으로 삼되, 동시에 돌봄을 보는 방식을 끝없이 재정의하고, 나아가 지금 돌봄이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을 해체하여 새로운 삶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돌봄이 마주하고 있는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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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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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돌봄, 돌봄-교육간 위계 탈피의 조건
돌봄과 교육의 통합을 표방하는 늘봄학교 추진과 함께, 돌봄과 교육의 경계를 둘러싼 논의에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미 〈돌봄과 교육, 그 분리와 위계의 역사〉[ref]《오늘의 교육》, 59(2020년 11·12월).[/ref]에서 채효정은 돌봄과 교육 사이에 존재해 온 오래된 위계를 비판하면서 돌봄 속에 존재하는 교육 이상의 교육적 의미를 지적하고, 돌봄과 교육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이후에는 돌봄의 의미가 점차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주변의 존재들, 그 존재들이 담긴 시공간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새로운 관계 맺음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세계를 재조직할 수 있는 활동까지도 돌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느끼며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중심에 돌봄을 두어야 한다고 보게 되면, 돌봄과 교육이 분리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어려움은 ‘돌봄’과 ‘교육’ 모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돌봄의 권리와 의무를 제도화하자는 논의가 확산하는 과정을 보면, 무엇이 되었든 돌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 좋은 일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제도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돌봄 서비스’에 가깝게 축소되는 돌봄의 의미는 결국 교육과 돌봄 사이의 위계를 다시금 공고화할 우려가 있다. 이 글은 교육과 돌봄이 함께하면서 각각의 의미를 심화시킬 수 있으려면, 일단 현재 돌봄 기본권 제도화 논의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을 짚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돌봄이라는 의제를 통해 교육의 의미와 교육 현장을 실제 변화시킬 수 있으려면, 막연한 돌봄 가치의 강조를 넘어서 더 나은 돌봄을 위한 정치적 기획은 어떻게 가능할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돌봄이 서비스로 이해되고 돌봄 노동자들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돌봄과 교육에 대한 전향적인 논의 역시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봄 기본권은 어떤 권리여야 하는가
지난 총선에서 여야의 돌봄 관련 공약은 모두 새로운 게 없었지만 돌봄에 대한 쟁점 자체를 전면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ref]“돌봄이 전면으로, 21대 총선 교육 공약··· 양당 모두 돌봄 정책 ‘재탕’”, 〈경향신문〉, 2024년 3월 26일.[/ref]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면 돌봄 기본권 보장을 위한 ‘돌봄 기본법’ 제정 논의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이며, 「헌법」 개정 논의가 시작되면 돌봄을 국민의 권리와 의무로 명시함으로써 돌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돌봄 민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힘을 받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적어도 구호로만 보면 돌봄 중심 사회로의 대전환 요구가 더는 소수의 목소리가 아닌 상황이다. 돌봄은 현재 한국에서 그만큼 뜨거운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며, 돌봄을 대하는 방식에서 큰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돌봄권 및 돌봄 중심 사회 논의가 확산하는 것과 돌봄을 둘러싼 현실의 환경이 개선되는 건 별개이다. 지금처럼 돌봄 노동자들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돌봄은 여전히 이루기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박주영, 2023), 돌봄 논의가 확산되었다고는 하지만 구체적 대안의 차원에서는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쟁점이든 기본법 제정으로 바로 해결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중에서도 돌봄은 시민들의 생활 영역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로서 기본법 제정이나 헌법화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돌봄 중심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동력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돌봄이라는 이슈가 이미 공론장에서 다른 모든 여성 관련 의제들을 압도해 버렸다는 불만의 소리도 있다. 듣기에 아름답고 누구나 한마디씩은 할 말이 있는 듯한 돌봄 논의가,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갈등을 연상시키는 ‘젠더 폭력’이라든가 ‘직장 내 성희롱’, ‘성과 재생산 권리’ 같은 이슈들을 모두 묻히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봄을 기본권으로 법제화하자는 측에서는 누구나가 누려야 할 권리로서 돌봄에 관해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는 일이 당장에 돌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돌봄의 가치와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고 국가의 역할을 강제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희망한다. 담론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인간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는 보편적 취약성 개념에 기대고 있으며(황정아, 2021), 여기에서 돌봄이 모든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존재로서 돌봄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보편적 취약성에 호소하면서 돌봄을 누구나가 누려야 할 권리로 취급하는 방식은 과거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주장했던 복지 국가의 이상과 큰 차이가 없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돌봄이 필요하다고 해서, 정치적 논쟁과 투쟁 없이 돌봄권이 실효를 가지게 되리라 기대하는 건 이제까지 돌봄을 둘러싸고 존재해 온 기나긴 정치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돌봄 이론의 발전 과정은 1970년대 이후 복지 국가 축소에 저항해 온 역사이자, 소수자 집단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 온 역사였다(달라 코스따, 2017; 페데리치, 2014; 김성희, 2023; 백영경, 2023).
실제로 돌봄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페미니즘의 역사와 늘 함께해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Dowler et als., 2019). 백인 페미니즘과 제국주의 사이의 껄끄럽고도 복잡한 관계에 천착해 온 페미니스트 우마 나라얀은 1995년에 쓴 〈식민주의와 그 타자들 : 권리들과 돌봄 담론들에 대한 고찰(Colonialism and its others : Considerations on rights and care discourses)〉이라는 글에서 이미 돌봄 담론이 식민지 피지배자들에 대한 보호를 표방하면서 지배를 정당화했던 역사를 비판했다. 권리에 기반한 현실의 돌봄 담론은 그간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온 많은 부정의를 은폐할 우려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돌봄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현실의 인종적, 계급적, 식민주의적 부정의의 문제에 주목해야만 돌봄을 확대할 수 있다.
나라얀의 이러한 주장은 돌봄의 글로벌 분업이 가지는 신식민적인 현실을 비판하면서 돌봄 윤리와 포스트 콜로니얼한 문제의식을 결합해야 한다는 지적으로 이어져 왔다(파레냐스, 2009; Spivak, 2015).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중산층이 꿈꾸는 안락하고 좋은 삶과 그에 필요한 돌봄은 “제국적인 생활 양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브란트·비센, 2020). 삶의 방식을 그대로 두고 돌봄의 결핍만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며, 돌봄을 문제 해결을 위해 조달해야 할 서비스로 접근하게 되면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수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ref]“총선 앞 정부·여당이 불붙인 ‘외국인 가사 도우미’··· 공(公)약인가, 공(空)약인가”, 〈경향신문〉, 2024년 3월 27일; “[폴리노믹스② 조정훈] ‘월 100만원 가사 근로자’, 본질은 차등 임금제”, 〈FortuneKorea〉, 2023년 9월 1일.
보건복지부의 2023년 제5차 장기요양위원회 개최 보도 자료 역시 요양 보호사 인력 부족 문제를 지적하면서 “해외 인력 도입 등 인력 공급 경로 다변화”를 대책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ref]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분업의 문제나 인종주의의 문제, 서구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면 모두 낙후된 것으로 취급하거나 탄압하고 차별해 온 역사에 대한 구체적 인식 없이 돌봄은 대안적 가치가 되기 어렵다. 자칫 모두가 돌볼 시간이 없고 돌볼 역량이 되지 않는 사회를 불가피한 사회이자 “현대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대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돌봄을 조달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돌봄은 대안적인 가치는커녕 새로운 문제 발생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백영경, 2022).
돌봄과 커먼즈: 돌봄이 가진 정치적 힘의 회복
돌봄이 권리로 이해될 때 생겨나는 더 큰 문제는 결국 권리 보장의 주체는 1차적으로 국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돌봄은 국가가 책임지고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영역에 위치하게 된다. 물론 복지 차원에서 국가가 져야 할 돌봄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야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의존이 존엄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의 좋은 돌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의 책임과 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돌봄을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기본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국가 주도의 복지를 비판할 때 지적된 관료적 복지 체제 속에서의 탈인격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돌봄이라는 것은 그 성격 자체가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시공간에 대한 관심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일상 속에서 늘 다르게 수행해야 하는 일이지, 표준화된 국가 시스템이나 시장 기제에 맡겨 생산하고 분배하면 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나는 국가가 시장을 통해 조달한 돌봄 서비스를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한 돌봄 문제에서 국가와 시장은 생각처럼 거리가 멀지 않다고 보면서 돌봄 문제에서 커먼즈적 접근이 필요함을 주장해 왔다(백영경, 2017).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로서 돌봄을 이해해서는 자유주의적 기획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따라서 현재 시장과 관료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돌봄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공동 자원뿐만 아니라 공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돌봄의 방식을 공동체 스스로 구성원들의 필요에 맞게 조직하고 활용할 수 있는 ‘돌봄의 커먼즈’를 지향해야 한다.
현실에서 돌봄을 커먼즈와 연결하려는 운동은 돌봄이라는 생각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힘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오드리 로드가 돌봄을 일종의 정치적 전쟁이며, 생존의 위기에 몰린 집단들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으로 보았듯이(Lorde, 2017), 돌봄이 권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현재 돌봄의 결핍을 가져오고 생존을 위협하고 생계 수단에 대한 접근을 제약하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분석, 해결을 위한 투쟁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급진적 돌봄 운동들은 인종주의 반대 운동이나 원주민 권리 운동 등과 결합하여 나타나고 있다(Hobart & Kneese, 2020). 커먼즈 운동은 현재 삶에 필수적인 물, 토지, 전기, 교육, 의료 등이 인클로저로 구획되어 점점 접근하기 어려운 자원이 되어 가는 현실에 맞서, 삶에 필요한 자원들을 재분배하고 평등, 상호성, 책임의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돌봄에서도 공동 육아나 공동 부엌의 의미는 단지 육아나 식사 같은 돌봄 노동을 공동으로 수행한다는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니다. 가족과 함께하지 않아도,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아 함께 생활할 공간을 만들고 공유하는 것은 가족이 운명을 좌우하지 않아도 되는 삶, 재산 형성에 온 삶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의료 및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행위 역시 삶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는 다양한 경로를 만듦으로써 사회를 변화시켜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돌봄의 커먼즈가 추구하는 권리는 삶의 기본에 대한 평등한 권리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누구도 삶의 권리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해서 모두의 생존을 위한 방식으로 공존을 추구하는 돌봄 커먼즈는 국가의 지원을 부정하지 않으나, 국가가 보장하는 돌봄 기본권이라는 발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돌봄을 권리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기존의 사회 구조에 대항하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국가에 대해서도 대안적 형태의 거버넌스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저항의 성격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Ticktin, 2024).
돌봄 가치를 법에 명시함으로써 사회적 인정을 추구한다는 전략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그동안 돌봄 노동이 낮은 평가를 받은 까닭이 단순히 돌봄의 역할을 인정받지 못해서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돌봄은 “사랑의 노동”이며 따라서 가격으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고, 시장의 서비스로는 대체될 수 없다는 사고가 지배해 왔다(커테이, 2017; 폴브레, 2023). 여성들에게는 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의 노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 노동을 하면서 여성스럽지 못한 여성으로 취급받을 것인가의 딜레마가 주어졌다(페데리치, 2014). 돌봄 노동 중에서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이 있다는 돌봄의 상징 구조가 지속되면서, 돌봄 노동은 분절적으로 이해되었고 현실의 돌봄 노동 종사자들의 노동은 가치 절하 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돌봄을 찬양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이는 코로나19 이후의 현실에서도 확인되는 바로서, 한국 사회는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필수 노동자들이 얼마나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 상상하지 못한 많은 영역에서 돌봄이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면서 그들에 대한 찬양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계기로, 돌봄 노동을 저숙련, 저임금 노동으로 간주하고 돌봄 노동자에게 사회적으로 낮은 대우를 하는 현실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올 거라는 기대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자
앞서 인용한 우마 나라얀은 같은 글에서 중요한 것은 돌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조건들”을 질문하는 일이라 지적한다. 실제로 돌봄의 확대는 돌봄을 막연하게 권리로 주장하거나 명시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돌봄을 상찬해 오면서도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우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코로나19 이후 돌봄 노동자들을 그토록이나 찬양했음에도 실제적인 노동 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이제까지 제대로 된 돌봄을 가로막아 온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함께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 함께 있을 때 돌봄은 확대될 수 있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돌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나는 일단 돌봄 노동자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서 “양질의 돌봄 노동을 확보”하자는 식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돌봄 노동자가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임금 수준을 올리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한다고 해서 필요한 돌봄을 모두 돌봄 노동자에게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에 대한 논의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몸을 가진 인간들은 누구나 태어나서 나이 들어 가고, 앓다가 죽기도 하는 그런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잘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일들이 모두의 삶에서 중심이 될 수 있어야 하고,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서도 그럴 만한 시간과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사회가 돌봄 중심 사회로의 대전환이 추구하는 지향점이어야 한다. 그 방향은 현재의 경쟁적 시간 결핍 사회, 인간과 생태가 모두 이윤으로 추출되는 사회를 그대로 살아가면서, 유지되지 않는 삶을 돌봄 노동자의 노동으로 메우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물론 현재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기여를 더 가시화하고 그들의 노동이 단지 단순노동이 아님을 드러내면서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목적은 더 많은 돌봄 노동자를 확보하고 양질의 돌봄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돌봄을 수행해 온 사람들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돌봄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은, 동시에 돌봄이란 삶에서 떼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돌봄 노동자들을 늘려서 맡긴다고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어야 한다. 또 돌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획된 돌봄 의제에 갇히지 말고, 돌봄을 실제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배치를 바꾸어 내야만 한다.
정말 제대로 된 돌봄이란 무엇이며 이를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럴 때라야 돌봄을 가로막는 요건들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이 가능하고, 돌봄을 통한 새로운 정치와 연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며, 교육의 의미와 교육 현장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투쟁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돌봄을 중요한 투쟁의 현장으로 삼되, 동시에 돌봄을 보는 방식을 끝없이 재정의하고, 나아가 지금 돌봄이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을 해체하여 새로운 삶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돌봄이 마주하고 있는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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