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포퓰리즘 시대에
극우파에 맞서는 법
인권 담론·정책은 왜 폐지당하고 있는가
장석준
gramsci@empas.com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기획위원
지난 4월, 서울시의회가 학생인권조례 폐지조례안을 통과시켰다. 폐지가 결정된 날, 서울시의회를 에워싼 폐지 지지 시위대는 “동성애, 성 전환, 낙태 등을 옹호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하라”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극우 정치 세력이 이런 근거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플래카드를 곳곳에 걸어 왔고, 보수적 개신교 교회 주변에서도 이런 주장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바로 이런 세력들이 마침내 보수 진영 전체를 움직여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런데 이게 요즘 대한민국만의 별난 광경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학교와 직접 연결되지 않더라도, “동성애, 성 전환, 낙태 등을 옹호하는 ○○○ 반대” 같은 혐오 정서와 논리를 바탕으로 기존의 민주적 권리나 제도를 공격하고 해체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유럽의 극우 세력 부상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미국의 트럼프주의다.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서 극우 포퓰리즘 선동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트럼프는 특히, 낙태 반대, 동성 결혼 반대, 진화론 수업 반대 등을 내걸며 ‘문화 전쟁’을 펼쳐 온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미국-멕시코 국경으로 유입되는 이민과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공격을 통해 러스트 벨트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로부터도 지지를 끌어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반페미니즘, 반성소수자 담론과 백인 노동자들의 호응을 받은 반이민 담론이 트럼프주의라는 용광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해 “WASP(영미계 백인 개신교도)의 나라 미국의 정체성을 지키자”는 강력한 메시지로 변신했다. 얼마나 강력한지, 심지어는 트럼프가 권좌에서 밀려난 뒤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주 정부가 임신 중단을 금지하는 입법을 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1973년에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로 대 웨이드’ 재판)로 미국 여성들이 획득한 임신 관련 자기결정권이 이로써 무참히 폐지됐다.
미국만이 아니다. 올해 6월 말, 7월 초에 걸쳐 실시된 프랑스 입법부 선거에서는 극우 정당인 ‘국민결집(RN)’이 약진했다. 국민결집은 미국에서 트럼프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그와 꼭 닮은 반이민, 반무슬림 선동으로 하위 중간 계급과 노동 계급을 파고든 정당이다. 2022년 총선에서 총 577석 중 89석을 획득하며 삽시간에 원내 제3세력으로 부상한 국민결집은 이번 총선에서는 줄곧 여론 조사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집권 일보 직전까지 갔다. ‘다행히도’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2차 투표에서 국민결집은 14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3세력에 머물렀다. 집권은 이렇게 불발했지만, 그래도 국민결집이 여전히 성장세임을 보여 준 선거 결과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파 집권을 일단 막았다고 하지만, 유럽 안의 또 다른 주요 국가에는 이미 극우파 정권이 들어서 있다. 이탈리아다. 2022년 총선에서 네오파시스트 정당의 후신인 ‘이탈리아형제단’이 25.98%를 얻으며 1위를 기록했고, 그래서 이 당의 대표인 조지아 멜로니가 지금까지 총리를 맡고 있다. 2022년은 무솔리니가 ‘로마 행진’이라는 의회 밖 실력 행사를 통해 국왕에게 총리로 임명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였다. 하필이면 이 해에 파시즘의 명맥을 잇는, 실제로 무솔리니 가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당이 집권한 것이다. 유럽의 현 정세를 잘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멜로니 정부는 선거에서 공약한 대로 난민 입국을 규제하고 이민자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총리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몰아주는 개헌안과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하여 정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전 세계가 이 모양이다. 2010년대 내내 대서양 양쪽(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에서 극우 포퓰리즘(혹은 포스트 파시즘) 세력이 급부상하더니, 2020년대 중반에 접어드는 지금까지 이런 양상이 끝날 줄 모른다. 일단 집권한 극우파는 이주민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매몰차게 공격하면서, 이제껏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성취로 이해되던 시민적 권리들을 야금야금 무력화시킨다.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던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님이 뼈아프게 증명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바로 이런 지구적 흐름의 일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흔들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2010년대에 좌우를 불문하고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신흥 세력이 대서양 양안 국가들의 정치를 뒤흔들자 여러 진단이 나왔다. 자유주의 입장에 선 논평가들은 예외 없이 포퓰리즘을 병리적 현상으로 보고, 자유주의 질서의 수호를 부르짖었다. 현실 정치 세력으로는 트럼프주의에 맞선 미국 민주당 주류(클린턴-오바마 노선)가 이런 입장을 대변했고, 각국에서 ‘리버럴’ 혹은 ‘중도파’라 불리는 기성 주류 정당들이 대개 이를 따랐다. 그러나 포퓰리즘에 맞서 자유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런 호소는 무력함을 드러냈다. 21세기 포퓰리즘을 분석한 이들 가운데에는 일찌감치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비판한 인물이 있었다. 벨기에의 노장 정치학자 샹탈 무페다.
무페는 원서가 2018년에 나온 저작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이승원 옮김, 2019)에서, 포퓰리즘 현상이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가 서로 만나는 역사적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대중의 반응이라 봤다. 2007년 금융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전성기는 끝났다. 물론 아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대체할 경제 사회 패러다임이 출현하지 않고 있지만, 자산 시장 부양을 통해 상당수 중간 계급과 노동 계급까지 체제의 지지자로 흡수하던 신자유주의의 전성기는 분명히 종식됐다. 이미 그 전부터 신자유주의 지구화/금융화/정보화를 통해 많은 이들이 소외와 배제, 격차와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금융 위기 이후에는 이것이 아예 대다수 시민의 보편적 생활 양상이 되었다. 그러자 금융 위기의 직접적 충격을 받은 나라들을 중심으로 다수 대중이 대안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이제껏 익숙하게 투표해 온 정당들 가운데에서는 이런 대안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주류 정당들은 좌파든 우파든 모두 경제 사회 정책이 신자유주의로 수렴되었다. 미국은 공화당이, 영국은 보수당이 1980년대에 시장지상주의 정책을 시작했지만, 경쟁 상대인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 역시 1990년대부터는 확실하게 이 정책 기조에 합류했다. ‘신자유주의’라는 말 자체가 1990년대에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전임 레이건-부시 공화당 정부의 탈뉴딜 정책을 이어받으면서 등장한 표어다. 영국 노동당의 경우에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신자유주의와 구식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걷겠다고 표방하면서 교묘하게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에 동참했다. 이게 금융 위기 직전까지 대다수 국가의 정치-정책 지형이었고, 지금도 ‘중도’ 좌파나 ‘중도’ 우파라 표방하는 정당들은 이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불만을 갖기 시작한 이들은 이런 지형에서 절망과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때 대안으로 부상하는 것이 기성 정치권과 거리가 먼 신흥 정치 세력이다. 이들은 그 출발점이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주류 정당들을 경제 사회 위기의 책임자로 싸잡아 비판한다. 대체로 대중을 무시하거나 대중과 충돌하는 ‘엘리트’ 혹은 ‘기득권층’으로 주류 정치 세력을 규정하고, 이들이 민주주의 질서를 위축시키고 부패시켰기 때문에 지금 대중의 삶이 위험에 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은, 이런 엘리트/기득권층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아 다시 대중의 무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과 학계는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정치 세력들을 뭉뚱그려 ‘포퓰리즘’이라 부르곤 한다.
무페는 이런 식의 대중 정치를 구사하는 세력이 잠시 유행하다 말 운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앞으로 상당 기간 정치 지형 전체를 주도하리라 전망한다. 신자유주의는 저무는데 기성 정치는 출구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세력들이 대중의 현실과 정치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페는 우리 시대를 ‘포퓰리스트 모멘트’라 판정한다. 달리 말하면, ‘포퓰리즘 시대’다. 새로운 정책 합의가 자리를 잡아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경제 사회 질서가 구축될 때까지 이 시대는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포퓰리즘 시대의 주인공 자리를 압도적으로 극우파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의 시리자(SYRIZA)나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한때 영국 노동당을 주도했던 코빈주의, 미국의 버니 샌더스 바람처럼 사회민주주의 내지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잠시나마) 포퓰리즘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좀 더 꾸준히 성장하면서 실제 집권에까지 이른 사례는 대부분 ‘극우’ 포퓰리즘 쪽에서 나오는 형편이다. 좌파 포퓰리즘이 자본가와 부유층을 적으로 지목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향에서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면, 극우 포퓰리즘은 좌파,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무슬림 같은 특정 사회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중이 단결해 국민/민족 정체성을 되찾자고 호소한다. 좌파 포퓰리즘과 마찬가지로 극우 포퓰리즘 세력도 민주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실은 ‘반민주주의’의 가면일 뿐이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그간 약자나 소수자들이 쟁취한 한 줌도 안 되는 권리나 제도를 ‘반민주적’이라 규정하면서 이것들을 폐지해야 다수 대중이 정상적 삶을 되찾을 수 있는 것처럼 선동한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런 담론이 지금 각 나라에서 최소 30% 이상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포퓰리즘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평등과 인권의 정치를 통합하는 ‘진보적 포퓰리즘’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참칭하면서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흐름에 맞서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이 물음에 대한 무페의 답은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무페만이 이런 답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도 ‘진보적 포퓰리즘’론을 통해 비슷한 전망을 탐색한다.
프레이저의 현실 진단은 무페의 논의와 얼추 비슷하다. 프레이저는 극우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도록 만든 배경이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있다고 파악한다.[ref]낸시 프레이저, 김성준 옮김(2021),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책세상; 낸시 프레이저, 장석준 옮김(2023),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ref] ‘진보적 신자유주의’란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에 동참한 리버럴 혹은 중도 좌파의 입장, 노선을 말한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계급 구조를 뒤흔들거나 부의 재분배를 추진하여 불평등에 맞서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신분 상승 사다리를 약자나 소수자 집단에게 일부 개방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주로 여성이나 유색인 같은 정체성을 자격 기준으로 삼는 할당제나 문화 정책(‘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 사용 등)에 주력한 것이다. 불평등에 불만을 갖고 있지만 이런 할당제에서는 제외된 인구 집단에게 이런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자기 삶과는 상관없거나 오히려 훼방을 놓는 흐름으로 다가온다. 극우 포퓰리즘 세력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득권자가 아닌 피해 대중 사이에서 유사 파시즘의 새로운 지지층을 결집해 낸다. 프레이저는 이런 지형을 만들어 놓은 책임이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 주류 같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있다고 일갈한다.
이런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 극우 포퓰리즘이 있고 또한 프레이저가 권하는 진보적 포퓰리즘이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방향성은 극우 포퓰리즘과 진보적 포퓰리즘이 서로 확연히 다르다. 우선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즉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전제하면서 여성운동이나 흑인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다.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조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를 언급한 이후 한국의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들도 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과 민주화 담론을 서로 결합했다. 반면에 극우 포퓰리즘은 민주화 담론 쪽을 집중 공략하면서 경제 사회 현실에 불만을 가진 대중을 이런 극우적 공세에 동원하고 있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약점을 예리하게 공격하여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되,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경제적 불평등을 진지하게 부각시키거나 교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 둘에 맞서 진보적 포퓰리즘은 진보적 인권, 문화 담론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를 새로운 정책 조합에 통합시키려 한다. 이 정책 조합의 또 다른 축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자와 극우 포퓰리스트 모두 제대로 고민하거나 시도하지 않는 탈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이다. 불평등을 반전시키기 위해 현재의 경제 구조를 과감히 뜯어고치려는 정책 말이다. 이런 지향과 결합할 때에만 극우 공세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비록 시간은 걸리더라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집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포퓰리즘 시대에
극우파에 맞서는 법
인권 담론·정책은 왜 폐지당하고 있는가
장석준
gramsci@empas.com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기획위원
지난 4월, 서울시의회가 학생인권조례 폐지조례안을 통과시켰다. 폐지가 결정된 날, 서울시의회를 에워싼 폐지 지지 시위대는 “동성애, 성 전환, 낙태 등을 옹호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하라”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극우 정치 세력이 이런 근거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플래카드를 곳곳에 걸어 왔고, 보수적 개신교 교회 주변에서도 이런 주장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바로 이런 세력들이 마침내 보수 진영 전체를 움직여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런데 이게 요즘 대한민국만의 별난 광경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학교와 직접 연결되지 않더라도, “동성애, 성 전환, 낙태 등을 옹호하는 ○○○ 반대” 같은 혐오 정서와 논리를 바탕으로 기존의 민주적 권리나 제도를 공격하고 해체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유럽의 극우 세력 부상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미국의 트럼프주의다.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서 극우 포퓰리즘 선동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트럼프는 특히, 낙태 반대, 동성 결혼 반대, 진화론 수업 반대 등을 내걸며 ‘문화 전쟁’을 펼쳐 온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미국-멕시코 국경으로 유입되는 이민과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공격을 통해 러스트 벨트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로부터도 지지를 끌어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반페미니즘, 반성소수자 담론과 백인 노동자들의 호응을 받은 반이민 담론이 트럼프주의라는 용광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해 “WASP(영미계 백인 개신교도)의 나라 미국의 정체성을 지키자”는 강력한 메시지로 변신했다. 얼마나 강력한지, 심지어는 트럼프가 권좌에서 밀려난 뒤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주 정부가 임신 중단을 금지하는 입법을 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1973년에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로 대 웨이드’ 재판)로 미국 여성들이 획득한 임신 관련 자기결정권이 이로써 무참히 폐지됐다.
미국만이 아니다. 올해 6월 말, 7월 초에 걸쳐 실시된 프랑스 입법부 선거에서는 극우 정당인 ‘국민결집(RN)’이 약진했다. 국민결집은 미국에서 트럼프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그와 꼭 닮은 반이민, 반무슬림 선동으로 하위 중간 계급과 노동 계급을 파고든 정당이다. 2022년 총선에서 총 577석 중 89석을 획득하며 삽시간에 원내 제3세력으로 부상한 국민결집은 이번 총선에서는 줄곧 여론 조사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집권 일보 직전까지 갔다. ‘다행히도’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2차 투표에서 국민결집은 14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3세력에 머물렀다. 집권은 이렇게 불발했지만, 그래도 국민결집이 여전히 성장세임을 보여 준 선거 결과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파 집권을 일단 막았다고 하지만, 유럽 안의 또 다른 주요 국가에는 이미 극우파 정권이 들어서 있다. 이탈리아다. 2022년 총선에서 네오파시스트 정당의 후신인 ‘이탈리아형제단’이 25.98%를 얻으며 1위를 기록했고, 그래서 이 당의 대표인 조지아 멜로니가 지금까지 총리를 맡고 있다. 2022년은 무솔리니가 ‘로마 행진’이라는 의회 밖 실력 행사를 통해 국왕에게 총리로 임명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였다. 하필이면 이 해에 파시즘의 명맥을 잇는, 실제로 무솔리니 가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당이 집권한 것이다. 유럽의 현 정세를 잘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멜로니 정부는 선거에서 공약한 대로 난민 입국을 규제하고 이민자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총리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몰아주는 개헌안과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하여 정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전 세계가 이 모양이다. 2010년대 내내 대서양 양쪽(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에서 극우 포퓰리즘(혹은 포스트 파시즘) 세력이 급부상하더니, 2020년대 중반에 접어드는 지금까지 이런 양상이 끝날 줄 모른다. 일단 집권한 극우파는 이주민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매몰차게 공격하면서, 이제껏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성취로 이해되던 시민적 권리들을 야금야금 무력화시킨다.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던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님이 뼈아프게 증명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바로 이런 지구적 흐름의 일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흔들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2010년대에 좌우를 불문하고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신흥 세력이 대서양 양안 국가들의 정치를 뒤흔들자 여러 진단이 나왔다. 자유주의 입장에 선 논평가들은 예외 없이 포퓰리즘을 병리적 현상으로 보고, 자유주의 질서의 수호를 부르짖었다. 현실 정치 세력으로는 트럼프주의에 맞선 미국 민주당 주류(클린턴-오바마 노선)가 이런 입장을 대변했고, 각국에서 ‘리버럴’ 혹은 ‘중도파’라 불리는 기성 주류 정당들이 대개 이를 따랐다. 그러나 포퓰리즘에 맞서 자유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런 호소는 무력함을 드러냈다. 21세기 포퓰리즘을 분석한 이들 가운데에는 일찌감치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비판한 인물이 있었다. 벨기에의 노장 정치학자 샹탈 무페다.
무페는 원서가 2018년에 나온 저작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이승원 옮김, 2019)에서, 포퓰리즘 현상이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가 서로 만나는 역사적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대중의 반응이라 봤다. 2007년 금융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전성기는 끝났다. 물론 아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대체할 경제 사회 패러다임이 출현하지 않고 있지만, 자산 시장 부양을 통해 상당수 중간 계급과 노동 계급까지 체제의 지지자로 흡수하던 신자유주의의 전성기는 분명히 종식됐다. 이미 그 전부터 신자유주의 지구화/금융화/정보화를 통해 많은 이들이 소외와 배제, 격차와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금융 위기 이후에는 이것이 아예 대다수 시민의 보편적 생활 양상이 되었다. 그러자 금융 위기의 직접적 충격을 받은 나라들을 중심으로 다수 대중이 대안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이제껏 익숙하게 투표해 온 정당들 가운데에서는 이런 대안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주류 정당들은 좌파든 우파든 모두 경제 사회 정책이 신자유주의로 수렴되었다. 미국은 공화당이, 영국은 보수당이 1980년대에 시장지상주의 정책을 시작했지만, 경쟁 상대인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 역시 1990년대부터는 확실하게 이 정책 기조에 합류했다. ‘신자유주의’라는 말 자체가 1990년대에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전임 레이건-부시 공화당 정부의 탈뉴딜 정책을 이어받으면서 등장한 표어다. 영국 노동당의 경우에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신자유주의와 구식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걷겠다고 표방하면서 교묘하게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에 동참했다. 이게 금융 위기 직전까지 대다수 국가의 정치-정책 지형이었고, 지금도 ‘중도’ 좌파나 ‘중도’ 우파라 표방하는 정당들은 이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불만을 갖기 시작한 이들은 이런 지형에서 절망과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때 대안으로 부상하는 것이 기성 정치권과 거리가 먼 신흥 정치 세력이다. 이들은 그 출발점이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주류 정당들을 경제 사회 위기의 책임자로 싸잡아 비판한다. 대체로 대중을 무시하거나 대중과 충돌하는 ‘엘리트’ 혹은 ‘기득권층’으로 주류 정치 세력을 규정하고, 이들이 민주주의 질서를 위축시키고 부패시켰기 때문에 지금 대중의 삶이 위험에 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은, 이런 엘리트/기득권층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아 다시 대중의 무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과 학계는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정치 세력들을 뭉뚱그려 ‘포퓰리즘’이라 부르곤 한다.
무페는 이런 식의 대중 정치를 구사하는 세력이 잠시 유행하다 말 운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앞으로 상당 기간 정치 지형 전체를 주도하리라 전망한다. 신자유주의는 저무는데 기성 정치는 출구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세력들이 대중의 현실과 정치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페는 우리 시대를 ‘포퓰리스트 모멘트’라 판정한다. 달리 말하면, ‘포퓰리즘 시대’다. 새로운 정책 합의가 자리를 잡아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경제 사회 질서가 구축될 때까지 이 시대는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포퓰리즘 시대의 주인공 자리를 압도적으로 극우파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의 시리자(SYRIZA)나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한때 영국 노동당을 주도했던 코빈주의, 미국의 버니 샌더스 바람처럼 사회민주주의 내지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잠시나마) 포퓰리즘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좀 더 꾸준히 성장하면서 실제 집권에까지 이른 사례는 대부분 ‘극우’ 포퓰리즘 쪽에서 나오는 형편이다. 좌파 포퓰리즘이 자본가와 부유층을 적으로 지목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향에서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면, 극우 포퓰리즘은 좌파,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무슬림 같은 특정 사회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중이 단결해 국민/민족 정체성을 되찾자고 호소한다. 좌파 포퓰리즘과 마찬가지로 극우 포퓰리즘 세력도 민주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실은 ‘반민주주의’의 가면일 뿐이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그간 약자나 소수자들이 쟁취한 한 줌도 안 되는 권리나 제도를 ‘반민주적’이라 규정하면서 이것들을 폐지해야 다수 대중이 정상적 삶을 되찾을 수 있는 것처럼 선동한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런 담론이 지금 각 나라에서 최소 30% 이상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포퓰리즘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평등과 인권의 정치를 통합하는 ‘진보적 포퓰리즘’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참칭하면서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흐름에 맞서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이 물음에 대한 무페의 답은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무페만이 이런 답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도 ‘진보적 포퓰리즘’론을 통해 비슷한 전망을 탐색한다.
프레이저의 현실 진단은 무페의 논의와 얼추 비슷하다. 프레이저는 극우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도록 만든 배경이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있다고 파악한다.[ref]낸시 프레이저, 김성준 옮김(2021),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책세상; 낸시 프레이저, 장석준 옮김(2023),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ref] ‘진보적 신자유주의’란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에 동참한 리버럴 혹은 중도 좌파의 입장, 노선을 말한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계급 구조를 뒤흔들거나 부의 재분배를 추진하여 불평등에 맞서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신분 상승 사다리를 약자나 소수자 집단에게 일부 개방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주로 여성이나 유색인 같은 정체성을 자격 기준으로 삼는 할당제나 문화 정책(‘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 사용 등)에 주력한 것이다. 불평등에 불만을 갖고 있지만 이런 할당제에서는 제외된 인구 집단에게 이런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자기 삶과는 상관없거나 오히려 훼방을 놓는 흐름으로 다가온다. 극우 포퓰리즘 세력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득권자가 아닌 피해 대중 사이에서 유사 파시즘의 새로운 지지층을 결집해 낸다. 프레이저는 이런 지형을 만들어 놓은 책임이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 주류 같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있다고 일갈한다.
이런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 극우 포퓰리즘이 있고 또한 프레이저가 권하는 진보적 포퓰리즘이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방향성은 극우 포퓰리즘과 진보적 포퓰리즘이 서로 확연히 다르다. 우선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즉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전제하면서 여성운동이나 흑인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다.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조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를 언급한 이후 한국의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들도 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과 민주화 담론을 서로 결합했다. 반면에 극우 포퓰리즘은 민주화 담론 쪽을 집중 공략하면서 경제 사회 현실에 불만을 가진 대중을 이런 극우적 공세에 동원하고 있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약점을 예리하게 공격하여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되,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경제적 불평등을 진지하게 부각시키거나 교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 둘에 맞서 진보적 포퓰리즘은 진보적 인권, 문화 담론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를 새로운 정책 조합에 통합시키려 한다. 이 정책 조합의 또 다른 축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자와 극우 포퓰리스트 모두 제대로 고민하거나 시도하지 않는 탈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이다. 불평등을 반전시키기 위해 현재의 경제 구조를 과감히 뜯어고치려는 정책 말이다. 이런 지향과 결합할 때에만 극우 공세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비록 시간은 걸리더라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