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특집 - 키워드로 읽는 한국 교육 10년 / 공정] 공정의 담론에 갇혀 버린 교육, 그래서 더 비극적인 (정용주)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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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공정의 담론에 갇혀 버린 교육, 그래서 더 비극적인

 

정용주

edcom234@gmail.com

본지 편집위원, 초등 교사


키워드로 읽는 한국 교육 10년 / 공정

지난 10년 동안 교육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주제들을 키워드별로 뽑아서 흐름과 쟁점 사항, 전망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번 호에는 공정, 안전, 교원노조, 진보 교육감, 페미니즘, 미래 교육 등 14개의 키워드가 담겨 있다. 다음 호에서는 혁신학교, 마을교육, 재난, 교사 양성 제도, 일베, 능력주의 등의 키워드를 다룰 계획이다. 다양한 키워드를 압축적이고 밀도 있게 정리한 기획을 통해 오늘날 한국 교육의 풍경을 한눈에 그려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19년의 이른바 ‘조국 사태’는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었다. 조국 사태는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맥락화될 수 있는데, 크게 두 가지 프레임이 형성되었다. 첫 번째는 인권 침해 프레임이었다. 법무부 장관 임명 과정에서 이루어진 가족에 대한 과도한 수사는 개혁에 저항하는 검찰을 포함한 보수 기득권 세력이 개혁의 전면에 선 조국 장관의 가족을 볼모로 벌이는 과잉 수사로 인한 인권 침해의 문제로 해석되면서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또 다른 하나는 입시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특권층 세력의 입시 부정, 즉 교육을 통한 계층 세습 프레임이었다. 개혁을 주장하던 조국 장관이 자녀의 입시 문제에서는 편법을 일삼는 등 보수 기득권 세력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입시에 대한 국민들의 지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조국 사태에 대한 두 가지 프레임은 서로 교차하면서 진보 개혁 진영의 내부 분열을 가속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교육에서 성찰해야 할 지점을 놓치게 만들었다. 논쟁의 선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면서 입시 부정 프레임은 공정 담론에 더욱 매몰되어 엉뚱한 방향의 해결책이 만들어졌다. 특히 조국 사태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시험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시 제도에서 공정성에 과몰입하는 반응을 보였다.

 


잘못된 진단, 잘못된 대응

 

대통령은 2019년 국회 시정 연설에서 “국민들은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 내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학생부 종합 전형(학종) 전면 실태 조사를 엄정하게 추진하고 고교 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조국 사태에 대한 대응은 정시 확대와 특목고 등의 폐지라는 두 정책으로 수렴되었다. 특히 공정한 입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화하면서 ‘수능과 학종 중에 무엇이 더 공정한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조국 사태에 대한 교육계의 대응 역시 수능과 학종 둘 중 어느 것이 다른 하나보다 더 공정하며 불평등을 덜 유발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축소되었다.


제도적 측면에서 보면 수능과 학종 모두 과거보다 진일보한 입시 제도이다. 둘 다 단순 지식을 얼마나 잘 암기했는지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창의력이나 문제 해결력, 비판적 사고력 같은 역량을 얼마나 잘 길렀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학종을 기반으로 하는 수시 전형은 학생의 성장과 발달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며 과거의 학력과 현재의 학력 그리고 잠재 가능성으로서 미래의 학력을 복합적으로 판단하는 입시 제도로 시험지를 통해 문제 해결력과 비판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수능보다 더 나은 입시 제도로 평가되었다. 대부분의 교육 전문가들이 수능(정시)보다 학종(수시)이 더 좋은 대입 제도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두 제도 모두 교육적으로는 올바른 제도일지 모르지만 계층 불평등의 완화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현실은 정반대였다.


수능과 학종은 ‘어느 것이 금수저 전형인가’를 논할 필요 없이 모두 계층 불평등을 재생산하거나 심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학종의 경우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농어촌 특별 전형 등이 일정 부분 계층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낸 것이 사실이지만 성장과 발달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의 수집이라는 제도의 방향은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정보의 수집을 요구했고 전형에 맞는 사교육 시장을 확대시켰다. 결국 다양한 입시 제도에 적응할 수 있는 계층에게 유리해졌다. 수능이 학종에 비해 입시 전형이 단순해서 입시를 준비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논리라면 저소득층은 창의력이 높다기보다는 단순 암기를 잘하며, 이들에게는 수능보다 학력고사가 더 유리한 입시 제도라는 퇴행적 사고를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떤 입시 제도도 저소득층에게 유리한 제도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불평등의 문제는 차치하고) 왜 교육 관계자들은 수능보다 학종을 선호하는 것일까? 교육학자들 입장에서 보면 시험지를 통해 평가하는 것보다 실제적 맥락에서 학생 개개인의 적성을 존중하고 교육 활동의 과정을 중시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장에서는 입시에서 폭넓은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학종을 선호한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의 수시 전형은 학과에 따라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어 학종으로 대학을 지원하는 학생은 지원하는 학과에 맞춘 교과 및 비교과 활동을 수행하면서 스펙을 쌓고 자기소개서를 통해 자신이 해당 학과에 맞는 학생임을 잘 표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지원 학과에 대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며 전공에 대한 심리적 충성도를 높이게 되고, 대학은 전공과 밀착된 입시 제도인 학종을 선호하게 되었다. 교사들도 학생부 위주 전형을 선호한다.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학종은 수업에 대한 주도권과 평가 권한을 대폭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교사가 교육과정 운영과 수업, 평가, 기록에 대한 권한을 넓히는 것이기 때문에 교사들에게 학종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입시에 특화된 특목고와 사교육 시장도 이 제도를 선호한다. 수시 전형이 엄청나게 복잡해진 데는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배타적인 진입 장벽을 만들고 사교육 시장에 영업 기회를 넓혀 주며 특목고에 선택권을 강화시켜 주기 위함도 컸다.


이 같은 이유로 교사, 대학, 사교육 시장 등 대다수 교육 관련자가 학종을 선호하는 반면 저소득층 학부모에게는 학종이 깜깜이 전형, 즉 불투명성이 증가되는 전형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복잡한 전형과 교사의 평가 주관성을 문제 삼으며 수능(정시) 확대를 주장해 왔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했다. 입시의 공정성 확보가 계층 불평등의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으로 오인된 것이다. 한 세대 간의 불평등은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 가족 문화라는 문화 자본에 의해, 장기간의 세대 간의 불평등은 이러한 요소들이 집약된 유전 효과와 자본의 요소에 의해 전승된다. 수능이든 학종이든 이러한 계층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공정성만 보장되면 누구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담론에 의해 은폐되었다.

 


‘가족 개인’의 탄생과 능력주의

 

그럼 조국 사태를 통해 교육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우선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정’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공정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공정이 정의의 원칙으로 심화되거나 넓게 확장되지 못하고 빈약한 개념이 되어 버린 것을 성찰해야 한다. 공정이 지배하는 교육에서는 오로지 능력만 중요해지며 적대적 경쟁만이 남는다. 능력과 성공은 물신화되어 적자생존, 승자독식이 유일한 가치로 추구된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상당한 동의를 얻어 실행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고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에 관철되는 규범적 원리이다. 능력주의는 재능의 낭비를 극소화한 효율적인 사회공학이고, 개인에게는 사회 이동의 꿈이며, 사회적으로는 갱신되어 공정하다고 인가되는, 불평등(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진보로 상찬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자유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강화, 정당화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제한된 일자리와 그것을 얻는 데 효력이 있는 증명서인 대학 졸업장은 우리 일생을 지배하고, 학생들은 대학 입학 때부터 시작한 스펙 쌓기를 계속 하느라 진이 빠진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특목고에서 명문대로의 엘리트 트랙을 밟기 위해 초등학생 시기부터 학습 노동이 시작되고 이는 어느덧 자율성으로 위장되어 능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공정 담론이 개인화되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모색은 상상하지 못하거나 신빙성 없다고 내치고 각개약진하는 것의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


교육은, 믿을 것은 오직 내 한 몸이라 꾸준히 나를 계발하고 나를 키우라고 닦달한다. 자기 힘으로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는 이러한 자립의 윤리는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져 저마다 생존 능력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는 조국 사태를 통해서 이러한 능력주의와 공정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을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오직 능력주의나 공정이 불충분하거나 변질되었기 때문에 문제라고 인식했을 뿐이다. 본래 능력주의는 인간을 신분적, 가족적 결속과 구속으로부터 떼어 내 국가가 일반 의지와 보편 이익을 대변하여 각각을 동등하게 고려하고 공정하게 보상한다는 이념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국가의 일반 의지는 교육에서 구현된다. 그래서 가족이 구현하는 특수성과 특권, 불평등을 국가의 보편성과 공정성과 평등이 일소해야 한다. 그런데 능력주의의 총아인 개인은 속해 있는 가족에 따라 힘이 다르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 단위로 행위할 때 이미 힘이 있는 자의 성공 가능성은 월등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능력주의는 가족의 영향력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데 실제 능력주의가 작동하는 맥락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 개인’이다. 가족 개인이 제도화되면서 특권이 있는 사람들은 현대 사회가 가장 영리한 사람들에 의해서 통치된다고 믿는다. 신분에 의한 귀족제나 돈에 의한 금권 정치가 아니라 능력주의에 의해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정당화된다.


그럼 어떤 정책과 경로를 거쳐야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상속을 향한 열정의 동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을 지나친 경쟁으로 내모는 우리의 생활 양식이 실질적 합리성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문제를 전면화해야 한다. 구체적 경로가 무엇이 되든 공정한 능력주의 밑에 있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는 모든 계급의 권리를 돌보는 교육이 필요하다. 가장 높은 지위의 시민 못지않게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시민의 권리와 행복을 세심하게 도모하는 교육을 추구해야 한다.



❶ 김동춘(2020), 《한국인의 에너지, 가족주의》, 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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