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호[기획] 떠나게 하는 교육, 내보내는 지역을 성찰하다 (황민호)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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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지역을 배반하는 교육

 

떠나게 하는 교육, 내보내는 지역을 성찰하다

 

 

황민호

minho@okinews.com

옥천신문 상임 이사

 


 

인구 늘리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인구’ 이야기는 사람을 숫자로 본다. 숫자에 매몰되어 어떻게든 1명이라도 늘려 보려는 노력은 참 가상하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실, 수치에 매몰되어 어떻게든 인구를 늘리겠다는 그 몸부림은 기실 뭐라도 해야겠기에 하는 ‘쇼’에 그치는 수가 많다.


안팎에서 ‘지역 소멸’이라는 프레임으로 여기저기 압박을 해 대며 지도에 빨갛게 표시하고 몇 년이면 소멸될 지역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리니, 사는 사람은 덜컥 겁이 난다. 숫자에 매몰되면 사실 답이 없다. 5만 명이 무너졌니, 3만 명이 무너졌니 하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역이 금방 소멸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과한 호들갑으로 여기저기 회자되기 시작하면 마치 곧 그렇게 될 것처럼 느껴지는 집단 망상의 경험을 선사하려고 애들 쓴다.


숫자가 아니라 구조를 봐야 한다. 군 단위 안에서도 지역별 균형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 세대별 균형이 잘 이뤄지고 있는가. 들여다보면 인구 구조가 얼마나 병약한지 알 수 있다. 옥천만 놓고 봐도 9개 읍·면이 있는 지역인데 군 전체 5만 명 남짓한 인구 중에 읍에 거주하는 인구가 무려 3만에 가깝다. 한곳에 집중이 심하다는 것은 다른 변방 주변 지역은 열악하다는 것이다. 고르게 균형 잡힌 곳으로 만들지 않고서 인구를 늘리겠다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이들은 나름의 출사표로 옥천읍과 인근 면 몇 개를 묶어 옥천시로 만들자는 이야기도 했다. 면 지역들은 아예 버리겠다는 처사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솔깃하게 먹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세대별 균형이다. 고령화 비율이 30%를 넘나드는 농촌은 노인 인구가 많다. 왜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마저 떠나는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고 그냥 ‘농촌이니까’, ‘농촌은 노인들이 사는 곳’ 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여 버린다. 이렇게 기형적으로 뒤틀려 버린 인구 구조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모든 세대가 균형 있게 살아야 끌어 주고 당겨 주며 성장할 수 있다. 역피라미드형 구조로 고착화된 인구 구조에서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이 마치 농촌의 ‘종특’인 양 굳어져 있는 자체가 큰 문제다. 그런 점에 대한 아무런 개선 없는 인구 늘리기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다.

 


안팎으로 포위당한 농촌 교육

 

면은 농촌의 가장 기본 단위이다. 옛날 오일장이 열렸고 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자치와 자급의 거점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면이다. 한 면에 초등학교가 많게는 5개까지 있는 데도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폐교되어 1면 1교만 어렵게 유지되고 있다. 면 소재지는 읍과 가까울수록 약화되고 모든 서비스 기능이 읍으로 통합되는 모양새다. 그나마 면의 구심을 갖고 버티는 것은 면사무소, 보건지소 등 행정 기구와 초등학교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기타 공공 서비스 기관과 시장, 상점이 사라지는 것과 학교가 사라지는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폐교는 지역별, 세대별 균형을 확 깨뜨리며 지역 소멸의 정점을 찍는 행위이다. 어린 주민들이 더 이상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지역에 더 이상 미래가 없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낙인이다. 학교마저 사라지면 지역은 소거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지금 농촌은 바로 이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농촌 교육은 안팎으로 포위당해 있다. 교육이 자체 사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관심한 지자체와 일선 시·군교육지원청 중심이 아니라 도교육청 중심으로 이뤄지는 교육 사무는 시·군 단위 교육의 사각지대를 만든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농촌 학교를 폐교시켜야 재개발하는 신도시에 학교를 설립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사실상 폐교를 부추긴다. 학교 통폐합을 장려하며 각종 지원금에 통학 버스 또는 기숙사형 학교를 만든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해 사람들을 혹하게 만든다.


농촌의 교육 문화 공간 인프라와 서비스 인프라는 열악하기 그지없으며, 농촌 학교에서도 농업, 농촌, 지역을 잘 모르는 도시, 서울, 글로벌 중심의 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학생 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통폐합의 압박은 거세다. 사면초가 형국이다. 기대고 비빌 만한 언덕 자체가 없다. 학생 수는 줄고, 통합해야 그나마 유지할 수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 앞에 선택지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통합하는 순간, 그나마 지역과 끈이 있었던 학교는 지역과 유리되고 더욱더 섬이 된다. 지역성이 거세되고 이질적인 존재로 남는 것이다. 그렇게 학교가 있어도 있는 게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통 중학교의 경우 2~3개 면에 있는 중학교들을 그나마 학생 수가 많은 1개의 학교로 몰아서 통폐합하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재정을 투자하여 기숙사를 짓거나 특별 활동 등을 신설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홍보를 하며 학생을 모집한다. 그러면 학생들이 제법 온다. 교육과정과 시설 등 눈에 보이는 것들로 유혹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숙형 학교라니 굳이 이사를 하지 않아도 학생만 보낼 수 있으니 더 쉽게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학교는 하나의 교육 서비스 기관으로만 이용된다. 지역에 있다는 의미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는 특목고, 자사고 등의 학교뿐만 아니라 대안학교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지역 연계 교육이라고 이름은 붙이지만, 지역의 자원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수평적인 교류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학생들이 지역으로 굳이 올 일이 없다. 지역에 대한 추억도 관계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농촌 학교의 현실은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열악한 농촌의 인프라

 

읍내 한 아파트 관리동 복도, 2칸 정도 뜨는 와이파이의 데이터를 수혈받으려고 안간힘으로 벽에 밀착하여 걸터앉는다. 여러 명의 청소년들이 그렇게 남는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동네에서 딱히 갈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참 뛰어놀다가 잠시 잠깐 그늘에서 땀도 식힐 겸 스마트폰 게임도 맘 놓고 하려면 와이파이가 잡히는 공간을 탐색하게 되고 지하수의 맥을 짚듯이 그렇게 찾아낸 와이파이는 청소년들의 단골 공간이 된다. 대충 비만 피하고 앉을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데이터 빈곤층인 청소년들에겐 그만한 적지가 없다.


경로당과 마을회관은 도처에 있지만, 그곳은 나이 든 어른들만 가는 곳이고, 청소년들이 마실 가듯 자연스레 찾아갈 곳은 손에 꼽는다. 그나마도 돈이 있어야 하는 카페나 PC방, 코인 노래방, 방방, 롤러장 등이 대부분이다. 도서관은 숨죽여 조용히 있어야 하고 책이라도 펴야 하는 강박에 시달려서 기피한다. 청소년수련관은 가 보지 않은 청소년들은 익숙하지 못하다. 프로그램 하나라도 참여해 지도자와 안면을 트고 공간이 익숙해져야 그나마 발을 들일 텐데, 나름의 정서적 문턱이 있는 셈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대부분 읍으로 나온다. 면에 있는 고등학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을 때, 고민거리도 그만큼 커진다. 사실 그럴 때는 친구가 큰 복지다. 친구와 같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버팀목이 생기는 것과 같다. 머리가 커질수록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 하고 동년배 친구와 연대 의식을 가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밤을 새워도 끝이 없는 그 이야기들은 기실 지친 삶의 윤활유다. 이래저래 불투명한 진로,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가족 간의 문제, 선생님과의 불화, 친구 간의 관계, 애정 전선 등 이래저래 고민은 한 움큼씩 쌓여 가고 빨리 꿈을 갖고 직업과 전공을 정해야 한다는 압박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그래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방구이기도 하다. 학교 끝나고 같이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며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는 크지만, 버스 시간이 그것을 가차 없이 끊어 버린다. 면에 사는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버스 막차 시간에 무지막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집의 통금 시간이야 대화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다지만, 버스 막차는 어쩔 수 없는 통금 시간을 정하게 만든다. 그것도 저녁 6시, 길어 봐야 7시다. 빠듯하게 가야만 하는 막차 시간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달려야 하고 혹시 놓치면 큰일이다. 어렵게 모은 용돈으로 택시를 잡거나 정말 어렵게 전화를 해서 부모님한테 부탁을 해야 하는데 사실 이 둘 다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든지 잔소리를 옴팡 뒤집어쓰든지 둘 중 하나는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렇게 정서적 결핍이 생긴다.


버스 시간은 면 지역에 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정말 달달 외우고 다녀야 할 만큼 중요하다. 버스 하나 놓치면 1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양반이고 1시간 30분, 족히 2시간을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버스를 2번 갈아탈 때도 있다. 버스를 놓치면 차라리 걸어간다. 10리 길은 사실 가뿐하다. 옛날 시골 사람들 얘기가 아니라 20리, 30리도 그냥 하염없이 걷는다. 버스를 놓치면 막상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동의 자유가 철저하게 제한적이다 보니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감내해야 할 것이 이 부분이다. 면 지역 청소년들에게 물어봤더니 제발 버스가 1시간에 1대씩이라도 다니고, 막차가 밤 10시까지는 안 바라도 밤 9시까지라도 있었음 좋겠다고 하더라. 하지만 이런 것은 별 고려 대상이 아니라서 사실 위에선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시내버스가 적자니까, 타는 사람 별로 없으니까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읍내와 인접한 곳에 사는 청소년들은 축복받은 이들이다. 걸어서 지척에 모든 편의 시설과 공공 시설이 있으니 정말 ‘개꿀’이다. 이것도 부모 잘 만나야 한다. 시가지와 인접할수록 땅값과 집값이 비싸기 때문에 함부로 읍내에 진입할 수 없다. 농사짓는 부모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면에 살면 면 소재지가 생활권인데 면 소재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2,000명 미만 인구의 면 단위에는 정말 식당 1~2개, 농협,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정도가 다인 경우가 많다. 그럼 학교 끝나면 갈 만한 곳이 없다.


아까 말했듯이 친구가 가장 큰 복지인데, 학교가 파하자마자 버스 시간과 스쿨버스로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하니 이야기할 시간도 공간도 마땅찮다. 시골 마을은 마을마다 뚝뚝 떨어져 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 몇 명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 외로움을 온전히 혼자 다 감당해야 한다. 한번 놀려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고, 인도도 없어서 위험한 경우가 태반이라 쉽게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디든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공용 자전거 타고, 공용 킥보드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원치 않는 고립이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이를 벗어나려면 도시로 이사 가는 방법과 얼른 독립하여 자가용을 사는 방법 말고는 없다. 어린 주민들은 이처럼 이동권을 강력하게 제한받는다.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학교 끝나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라도 있으면 좀 다를까. 작은 도서관이나 청소년 문화 공간 같은 곳 말이다.

 


지역을 배반하는 교육

 

“공부 못하면 너 여기 남아서 농사지을 거야.” 몇 년 전 학교 교사가 이런 말을 해서 몹시 속상하다고 한 학생이 말했다. 아버지가 농사짓는 것을 보면 농사는 정말 머리가 좋아야 하는데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해 정말 기분이 안 좋다는 투였다. 사실 옥천만 해도 공무원의 30% 이상, 경찰 공무원의 50% 이상, 교육 공무원의 70% 이상이 대전에서 출퇴근한다. 도시에서 사는 교사들은 자연히 농촌에 산다는 것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존중하는 태도는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에야 이런 막돼먹은 말을 하는 교사가 별로 없겠지만, 여전히 수업 시간에 도시 편향적이고 글로벌 편향적인 말을 은연중에 하는 것은 뭐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로 ‘서울로, 세계로’를 입 밖에 자연스럽게 내고 그런 꿈을 가진 청소년들을 칭찬해 준다.


비단 학교뿐일까. 비단 교육뿐일까. 수많은 언론과 다양한 미디어는 전방위적으로 도시 중심 서울 중심, 미국, 유럽 중심의 이야기를 쏟아 내고 그리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청소년들은 교육과 미디어, 수많은 관계 안에 포박되고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떠밀리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하는 교육을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것이다. 교사들은 지역과 농촌과 농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학교에서는 이에 대해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교가 전혀 지역의 영속성과 농촌, 농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폄훼하는 교육을 은연중에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크면 클수록 청소년들이 지역에 남는 꼴을 잘 못 본다. 이쯤 되면 청소년들은 지역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떠밀려 내보내지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떠나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지역에 남으면 실패자가 되고 ‘루저’가 된다는 인식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퍼져 있다. 가령 이런 말들이다. “걔는 학교 졸업하고 대학 안 갔어? 집에서 뭐 한대? 대학 가서 공부 안 할 거면 취업이라도 해야 할 텐데.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것 아녀? 참 큰일이다.” “요즘 집에서 뭐 하니? 어떻게 학교는 잘 간겨? 취업은 한겨?” 나름 관심 가져 준다고 하는 말이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길 가다가 아는 어른 만나기가 무서운 게 그 때문이다.


어느 청소년은 상고를 나와 대기업 반도체 공장 생산직에 취업하여, 잘됐다고 학교 정문 펼침막에 이름이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가 보니 2교대로 정말 기계처럼 일했다고 한다. 6개월 넘는 인턴이라 눈칫밥을 한참 먹어야 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쓸 틈이 없으니 돈은 모였으나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만두었더니 여기저기서 듣는 차가운 말들. “걔는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뒀대? 배가 불렀네. 어디서 그런 월급을 지가 받어.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건데, 아이고.” “그래, 그거 그만두고 뭐 한대? 그것도 못 하고 그만두면 어디 가서 밥 빌어먹고 살겄어.” 이런 말들은 비수처럼 꽂힌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면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공동체의 관계성은 때로는 자유롭게 날개를 단 익명을 잡아먹는 감옥이 되고 지옥이 된다. 사실 곳곳이 지뢰밭이다. 어딜 가서 누굴 만나는 것도 다 부모님 귓속으로 들어오니 말이다.


 

그렇게 탈출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사 가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족 안에서 청소년들 목소리가 지분을 얻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이사를 본격적으로 계획하는 집이 늘어난다. 교육에 신경을 쓰는 집일수록 더욱 그렇다. 일찌감치 탈출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조금 더 큰 학교에 보내야 경쟁을 해서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떤 믿음에 가깝고 종교와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 학년이 올라가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도시 유학을 보내거나 집이 통째로 이사 가는 일에 관해 굳이 더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 그냥 당연한 귀결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생 수가 줄어든다. 전교생이 20명 내외로 줄어들면 폐교 이야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도교육청에서 은근히 작업이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분교로 결정되면 폐교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복식 학급이 되는 순간 학업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인구가 적은 농촌이라도 1면 1교의 초등학교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곧 무너질 성싶다. 별달리 이런 추세를 바꿔 낼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지자체는 교육 관련 일은 교육청 소관이라고 관여를 하지 않으려는 기본 속성이 있고, 시·군교육장은 선출직도 아닐뿐더러 정책이 도교육청 중심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일선 학교를 유지시키려는 의지나 생각도 별로 없다. 시스템상 그렇다. 교육 사무를 아예 다루지 않는 지자체와 광역 중심으로 굴러가는 교육 체계가 이런 비극을 잉태하는 셈이다. 작은 학교, 농촌 학교에 대한 뚜렷한 철학과 실천 의지를 가진 교육감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냥 이렇게 굴러가는 것이다. 그렇게 폐교 위기의 작은 학교에 대한 뉴스가 어디선가 나올 것이고 안타깝지만 마지막 졸업식을 하게 됐다는 소식이 또 뉴스를 장식할 것이다.


 

학교 통폐합의 유혹과 그 끝

 

‘학교 통폐합하면 더 좋은 학교 만들 겁니다. 기숙형 통합 학교를 만들어 타 지역에서도 많이 올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출 겁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학교를 통폐합할 때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통폐합한 학교는 대부분 지역성을 상실하고 기숙 학교로 장소만 지역에 있을 뿐, 지역의 학교로 기능하지 못한다. 시골의 자연환경을 접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학습을 하는 학교로 부각되며 나름 대안적인 교육을 희망하는 도시 중산층 부모의 눈에 띄어 학생들이 보내지고 거쳐 가는 학교가 된다. 그 학교가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오히려 지역에 있는 학생들은 그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밀려난다. 가까운 지역에 있는 학교를 성적 때문에 가지 못하는 서글픔이란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학부모회장과 학생회 간부를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다 점하게 되어 버리면 사실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허망하게 객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기숙 학교의 특성상 부모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청소년을 보낼 뿐 직접 이사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학교는 지역과 더 유리되어, 지역에 있지만 지역과 점점 무관한 곳이 되는 것이다.


대안교육을 표방하는 운동적 성격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어느 지역은 작은 학교 살리기 ‘어벤져스 교사들’을 꾸려 다 같이 한 학교에 내신을 내고 들어가 학교를 확 바꾸는 프로젝트를 하는 곳도 있다. 미리 이 학교에 가서 이렇게 학교를 싹 바꾸겠다고 하며 학부모들에게 홍보하면 반신반의하면서도 학생들이 모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시도의 첫 마음이야 애틋하고, 복지부동하는 교육 공무원에 비하면 이들의 시도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성과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똑같이 학교의 지역성을 상실하고 상품을 쇼핑하듯 학교를 골라 소비하는 것 이상으로 진척되지 못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지역은 대상화되고 그 학교가 유명해질수록 오히려 지역 아이들은 가기 힘들거나 밀려나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에 남지 않는다. 이용만 할 뿐 정주하거나 뿌리내리지 않는다. 물론 지역 경제 측면에서는 그 학교가 있어서 유동 인구가 많아지고 그만큼 지역에 와서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역이 알려지는 나름의 성과가 있지만,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는 정말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다.


 

서울대 많이 보내는 게 좋다는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최근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교육 이주 주택’ 같은 용어를 만들어 내며 정책으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내용을 뜯어 보면 집을 지어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도시민이 이주해 오면 월 10만 원 내외로 정말 저렴하게 임대하는 것이 큰 골자이다. 뭐, 이렇게 애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잘 움직이지 않는 지자체에서 이런 것도 한다니 좋게 봐 줄 용의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 버린다. 지역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일자리도 필요하고, 면 소재지에서도 도시에 비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문화, 교육 환경도 필요하다. 사람도 없고 돈도 안 돌다 보니 시장이 일찌감치 철수한 지역에, 공공성으로 그 빈틈을 어떻게 채울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부에서 하는 걸 보면 말만 그럴싸한 농촌 협약 어쩌고저쩌고하는데, 뜯어 보면 열악한 면 지역 몇 개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하려는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365 생활권 구축(30분 내 보건, 보육, 소매 등 기초 생활 서비스, 60분 내 문화, 교육, 의료 등 복합 서비스 접근 보장, 5분 내 응급 상황 대응 시스템 구축)’ 등 말만 화려하다. 결국 공모 사업으로 통합을 시키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생활권이 다른 몇 개 마을을 행정적으로 조정할 필요는 있지만, 대체로 면 생활권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로가 뻥뻥 뚫려 교통과 통신이 예전과 달라졌으니 통폐합하여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소리일랑 한번 살아 보고서 얘기하길 권해 드린다. 거리가 가까워져도 오랫동안 전해지고 축적된 관계와 정서, 문화란 게 있는 것이다.


워낙 바닥인 상황이니 여러 시도와 성과 들을 나름 챙겨 주고 후하게 쳐 주는 경향이 없지 않다. ‘농촌 작은 학교에서 이런 일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부각시키는 것은 나름의 애정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접근이 잘못되면, 지향을 잘못 잡으면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교육 문제는 사실 인구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러니 인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교육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인구는 어떻게든 많이 늘리는 게 좋고, 교육은 어떻게든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게 좋다고 하는 이상은 답이 없다.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 하나만 키우면 지역이 산다는 이런 안일한 발상을 가진 엘리트들이 여전히 있다. 지역에 남은 청소년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식어 버린 찬밥처럼 생각하고, 서울 유명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에게 서울에 기숙사도 제공하고 장학금도 주며 별의별 혜택을 주는 지자체가 여전히 많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하고 글로벌한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이 교육 이념을 지배하고 있으니 변할 수가 없다. 대안적 교육을 이야기하며 농업, 농촌의 중요성, 기후 위기 등을 가르치면서도, 지역을 거쳐 가는 곳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다른 결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찌 됐든 지역은 계속 이용당하고 착취당하고 수탈당할 것이다.


 

뿌리내리는 교육이 필요하다

 

뿌리내리는 교육, 지역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같이 사유하고, ‘서울로, 세계로’ 가지 않아도 자긍심과 자존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을 독점해 버린 학교를 넘어, 새로운 지역 사회 교육을 설계할 때가 되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배신하며 비하하는 교육 따위일랑 이제는 철수해야 한다. 지역, 농촌에 남아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농업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충분히 성찰하고 숙의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과정에 이를 담아내야 한다. 교육과정에 담아낼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가 이를 어떻게 행할지 고민해야 한다.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너도나도 여행에 빠지고 관광에 목맬 때, ‘노마드’라는 말이 괜스레 멋있어 보이는 세상에서 뿌리내리며 정착하여 산다는 것은 참 답답하고 답이 없어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열패자가 되는 길이 아니며 생활권 중심의 지역 사회를 스스로 만드는 소중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지역에 사는 한 주민으로서 자치와 자급, 순환과 공생을 고민하며 스스로 지역의 미래를 더불어 만드는 중요한 행동이다. 각각 자치하는 코뮌으로 지속성이 담보될 때, 더 이상 지역에서 청소년들이 빠져나가지 않고 뿌리내리며 스며들고 번질 때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천 개 만 개의 지역학이 만개하여 영속 가능한 다양성의 문화가 살아 숨 쉬면 좋겠다.


걷잡을 수 없는 성장 중독과 발전 강박의 시대, 통합과 효율만이 강해지고 커질 수 있는 길이라는 명제가 깊게 심긴 이 시대에 이미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농촌과 더 작아지기도 어려운 작은 학교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는 새로운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작은 학교의 낭만에 취하지도 말 것이며, 시골의 풍광과 인심에만 매몰되지도 말지어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❶ '유목민',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삶을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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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