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호[특집] 고교 학점제, 학생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정용주)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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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선택권이라는 함정 - 고교 학점제, 체제를 강화할 것인가 변혁할 것인가


고교 학점제, 학생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 고교 학점제가 새로운 경로를 만들 수 있을까


정용주

edcom234@gmail.com

서울 탑산초 교사, 본지 편집위원.




2025년이 되면 모든 고등학생이 교육과정을 선택하는 새로운 교육 체제로서 고교 학점제가 전면 실행된다. 고교 학점제란, 고등학생들이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하여 학점이 누적되면 졸업하는 제도이다. 


정부의 고교 학점제 도입 취지를 살펴보면 고교 학점제 실시 이후 고등학교 교육은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질 듯하다. 고등학교 교육이 대입에 종속되어 획일적으로 운영되고 지나친 성적 경쟁을 유발하는 등 공교육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문제점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이다.



지금 고등학생/청소년들의 삶은 행복한가?


그렇다면 과연 고교 학점제로 전환되면, 모든 학생의 잠재력과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고등학생들은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으며, 학교를 떠나는 학교 밖 청소년도 더 이상 생기지 않게 될 것인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고등학생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최근 전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공간과 다를 바 없다. 교사들은 공정한 심판자가 되어 경기를 주관하고 있고, 학생들은 졸업까지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게임에 참여하는 말이다. 


우리가 수능 난이도를 이야기하고 과학고와 외고, 국제고, 자사고 학생들의 입시 공정성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마이스터 고등학교의 높은 취업률과 대학 진학률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학을 갈 실력이 안 되는 일반고 학생들 그리고 경제적 이유로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삶은 소수 상위권 학생의 입시 성과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실력이 없어 형편없는 직장에 취직하거나 대학을 못 가는 학생으로 분류될 뿐이다. 고등학교까지는 시민으로서 역량을 국가가 키워 주어야 하는 의무 교육 기간이라고 말하면서, 고교 교육을 무상화하는 것 외에는 이들을 위한 조치는 없다. 누구나 고등학교에 다닐 수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은 죽게 내버려 두는 시스템 속에서 이들은 ‘벌거벗은 삶’을 살아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못하거나 가지 않은 일반고 졸업생, 그리고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취업한 고졸 청년 노동자들의 삶은 어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민으로서 시민권과 노동자로서 노동권을 보장받고 있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들의 삶은 더 비참하다. 이들은 전철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죽는 노동자가 되거나, 부두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죽거나, 화력 발전소 하청 노동자로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고 험한 일을 하다가 사망하거나, 아파트 외벽 청소를 하다가 밧줄이 끊어져 사망하는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이들을 우리는 고졸 청년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들이 의미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는 것, 졸업 후 취업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단지 이들의 낮은 학력이 문제인 것으로 치환된다.


정부나 기업 모두 성적이 낮은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들에 관해 학력 문제를 이야기한다. 시민으로서 기본적 역량을 기르는 과정, 인간으로서 행복한 미래를 준비하는 고등학교를 만드는 노력은 주변으로 밀려나, 오직 인재를 키운다는 사고와 선별의 논리가 고등학교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학생들이 성적과 무관하게 행복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 수 있을까? 졸업 후 존엄한 노동자로서의 삶이 보장되지 못하는데 고교 학점제가 이들의 고등학교 시절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학생의 행복이 철저하게 제거된 사회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고교 학점제가 실시되면 행복할 수있을까? 아니면 고교 학점제는 성공하는데 학생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될까?



경로 의존성과 결정적 계기


학교교육은 다양한 정치 사회적 요구가 결합하여 형성된 정책 경로에 영향을 받는다. 하나의 제도와 정책에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가 반영되어 있어, 일단 형성된 정책이나 제도는 이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고착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정책이나 제도가 잘 바뀌지 않고 영향력을 미치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 경로 의존성 path dependency이다. 경로 의존성은 한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즉, 일정한 경로가 형성되고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다른 경로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과거에 의존했던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성향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경로 의존성은 주로 제도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통해 특정 제도를 존속 혹은 변화시키는 기제를 밝히는 정책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개념 틀은 특정 제도가 어떻게 지속되는지 설명하기도 하지만, 제도 자체의 논리 변화, 대안적 경로를 보여 주는 역할 모델의 존재 등 경로 이탈 현상을 통해 새로운 제도로의 이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이론적 분석 틀로 활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경로 의존성은 이미 형성된 경로와 새로운 경로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이지, 과거에 의존했던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성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정책과 제도의 중력장이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실행되어 지속되는 정책과 제도 그리고 새로운 제도와 정책 사이에서는 밀고 당기는 관계가 작동한다. 선행 조건antecedent condition으로부터 새로운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기존의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계기가 기존의 경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결정적 계기critical juncture를 자동적으로 형성 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 연관된 정책과 제도를 지속적으로 실행하면서 새로운 제도적 패턴을 형성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 선행 조건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러한 운동 과정에서는 기존에 존재하던 제도와 새롭게 도입된 제도 간의 대항 관계가 작용한다. 


공중으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이 지표면으로부터 멀어져 중력장이 약화되는 곳까지 날아가면 추락하지 않고 하나의 궤도를 형성하여 지구를 도는 것처럼, 새로운 제도에 대한 비판 담론을 새로운 제도가 흡수하면서 대항력을 갖추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경로가 구축된다. 반대로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는 데 실패하면 인공위성이 지표면으로 추락하듯이 정책은 선행 조건이 만든 기존의 경로에 통합된다.


경로 의존성의 개념으로 볼 때, 고교 학점제는 하나의 정책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 정부가 기존의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교 학점제가 정책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새로운 경로를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더 현실성이 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교육 정책이 정부 수립 후 만들어진 교육 노동 체제(노동 시장 균열과 학벌 체제)가 만들어 낸 경로에 포섭되면서 입시 체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이후 형성된 경로를 바꾸려는 시도가 바로 5.31 교육 개혁이었는데, 5.31 교육 체제 역시 ‘고교 다양화’라는 방식으로 입시 경쟁 체제를 강화하면서 고등학교 교육이 대입에 종속되어 획일적으로 운영되도록 했고, 지나친 성적 경쟁을 유발했다. 이러한 선행 조건 속에서 실시되는 고교 학점제도 ‘학생 선택’이라는 껍데기만 남아 입시 체제를 강화하면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학생 중심 교육 경로를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


여기서 잠시 학생 중심 교육 경로를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좌절의 역사를 살펴보자. 


학습자의 주도성과 자발성을 중심에 두고 삶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한 것은 고교 학점제가 처음이 아니다. 사실 학생이 학교에서 행복하게 생활하고 배움에서 주체가 되는 교육을 구현하는 것은 학교와 교육과정의 존재 이유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교육 개혁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시도로 구체적으로는 제도권 안에선 혁신교육과 열린교육이 그리고 제도권 밖에선 대안교육이 있었다. 이렇게 제도권 안팎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재량과 소질에 맞게 진로를 찾아가도록 하는 교육을 하려고 했던 개혁 운동은 대학 진학 논리에 좌절되었다. 초등학교에서 단기적으로 효과를 냈고 중학교까지 열린교육과 혁신교육이 확산되었지만, 고등학교로는 제대로 확산되지 못했다. 대안학교와 공립형 대안학교도 같은 이유로 한계에 빠지고 말았다.


학습자 주체성을 구현하는 방법은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는 방법, 교육과정 안에서 주도성을 발휘하도록 하는 방법, 학교를 선택하도록 하는 방법 등 다양하다. 


그런데 학교를 선택하도록 하는 제도는 미국의 차터 스쿨을 포함해 다양한 나라에서 시도되었는데, 입시의 영향이 강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스웨덴의 사례를 살펴보면, 1990년대 초 우파 정권에 의해 학교 선택제와 자율 학교제가 도입되면서 교육 환경이 좋지 않은 가정의 학생들이나 이민 배경의 학생들에게 긍정적이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 교육이 평등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이처럼 ‘선택’은 교육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것을 강화할 수 있다. 이것이 심화되면 모든 학생을 위한 학교라는 평등주의에 입각한 학교교육은 자유주의에 의한 선택제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고교 학점제는 학교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 안에서 과목 개설과 선택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여 교육과정의 다양화를 구현하려 한다. 이는 학교 선택제와 같은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선택으로 인한 문제의 심각성이 은폐될 수 있다. 


선택이라는 제도는 학생의 다양성과 주체성을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 학교, 지역, 교원의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에서 선택제를 실시하면서 학생들이나 부모들의 이념이나 선호도가 선택 행위에 반영되어 학교의 교육과정 운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고교 학점제가 학교 선택제와 같이 부모의 배경에 따라 학교가 분리되고 근대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더라도, 선택이라는 것이 교육을 사적 가치 체계의 영역으로 옮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교 선택제 등이 학생들이 부모의 소유물이 되는 것을 심화시키며 부모들의 가치 체계에 따라 공부하게 되는 것을 구조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어느 정도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이 구조화되면 시민적 권리가 구현되어야 하는 교육과정이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사적 과정으로 변하게 되어 시민 양성이 아니라 소비자 주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왜곡될 수있다.


결론적으로, 교육과정 안에서 학습자의 다양성과 주체성을 실현하려던 정책은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본래 의도했던 정책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 고 1, 2학년 선택 교육과정이 도입된 후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이 확대되었고, 교과군, 학년군, 집중 이수제도 도입되었으며,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공통 과목 도입, 일반 선택, 진로 선택의 이원화가 이루어졌고,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학점제형 교육과정으로의 개편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율성 보장의 흐름은 일제식 교육, 집단의 동일화, 학생 소외, 자기 관리 능력 상실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심화시켰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육은 개인으로서 성장만이 아니라 부모의 중상류층 지위를 대물림해 재생산하는 주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선발 및 배분 과정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넘어, 시험이라는 형태로 지적 능력을 평가하여 상급 학교로 진학하는 교육 자격을 생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는 사회의 자격 제도와 시험 제도를 결합함으로써 선발 및 분배의 기능을 핵심적으로 수행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학교에서 선택이라는 방식을 제도로 구현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나라에서 경험한 바 있다. 


특히 후기 중등 단계를 공통 교육 단계에서 분리시키는 작업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고등학교 단계가 하나의 고유한 단계가 되지 못하고 대학 진학을 위한 보다 살벌한 전장이 되었다. 


고등학생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진로와 무관하게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 대부분의 학생이 대학 전공과 무관하게 취직하는 나라에서 후기 중등 단계에서 구현되는 선택과 다양성은, 계속해서 말하지만 정책 의도와 반대로 입시 체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려가 아니다. 그동안의 모든 교육 개혁이 그 의도와 반대로 학생들의 다양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학생들을 획일화시켰다.


결국 후기 중등교육 단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어느 수준과 어떤 방법으로 학습자의 다양성과 주체성을 구현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입시와 대학의 허수아비가 된 고등학교를 해방시키고, 학생이 학습의 주체로서 적성과 진로에 따라 필요한 과목을 선택하여 학습하고, 교사는 수업 평가에 대한 전문성과 자율성을 보다 폭넓게 존중받을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고교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내용과 방식의 ‘선택’을 교육과정에서 구현할 것인가?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고등학교 교육의 완성과 대학 입시를 분리시켜, 교육과정 편성 운영의 자율성을 학교에 주고, 학교에서 교사들이 전문성을 발휘하여 학습자의 주체성과 다양성이 보장되도록 하는 책임 교육을 구현하는 경로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새로운 경로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2025년


고교 학점제가 입시와 대학에 종속된 획일적 체제에서 벗어나 경로를 만들어 갈지, 이미 존재하는 경로에 흡수될지는 단언할 수없다. 


고교 학점제가 기존의 고교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단지 고교 학점제를 성공시키는 요소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선택 과목을 개설하고 학교 간 공동 교육과정을 운영하거나 학교 밖의 경험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고교 학점제가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입 제도 개선, 평가 방식 개선, 교육과정의 자율화, 지역 불평등 해소 방안 마련, 교원 양성 및 자격 체제 개편 등까지 고려한 연계 정책을 추진한다고 해도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기는 어렵다. 


고교 교육은 입시 교육이고 입시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라기보다 노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 의 말이 되어 공부하면서 모두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창의적인 기업가가 되는 판타지를 가지지만, 게임에서 지면 제2의 김용균이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노동 시장의 구조적 차별을 해결하지 않고 고교 학점제가 구현하려는 새로운 경로를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노동 시장의 균열과 학벌주의, 입시가 모든 개혁을 무력화하는 현 체제에서 교육 개혁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조건들을 고려하면서 고교 체제의 새로운 경로를 구축할 것인가? 


고교 학점제 자체가 갖는 의미는 크지 않지만 함께 진행되는 교육 정책들이 정책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제2기 취임 3주년 기자 회견문에서 현재 우리의 교육이 1995년 5.31 교육 개혁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교육 개혁이 아닌 ‘5.31 교육 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교육 개혁이 아닌 교육 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이전까지 한국의 교육은 모든 정책 결정을 국가가 주도했고 그 실행 방식도 권위주의적이었는데, 5.31 교육 체제로 인해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을 벗어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2000년대, 학생인권이 강화되고 다양한 혁신이 이루어지고 자치와 민주주의가 교육 행정과 학교 안에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이 5.31 교육 체제가 가져온 긍정적 기여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조희연 교육감이 5.31 교육 체제의 긍정적 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아니다. 


2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5.31 교육 개혁이 가져온 효과와 한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5.31 교육 체제는 ‘교육 수요자’라는 개념을 전면화시켰고 선택과 자율이라는 논리는 학교 서열화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동 시장의 서열화에 따른 대학 서열화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학생의 교육 수요란 내면에서 우러난 배움에 대한 갈증이라기보다 인기 직업과 학벌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여졌고, 인기 직업과 학벌을 향한 학생의 경쟁을 교육이 지원해야 한다는 뜻으로 통용되어 경쟁 교육과 학교 서열화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어 버렸다. 비유하자면 자율이라는 논리로 자기 책임의 윤리, 각자도생의 논리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조희연 교육감의 진단처럼 우리는 ‘5.31 교육 체제’가 가져온 ‘교육의 시장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이 개발 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되었고 국가는 부유해졌지만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교육이 계층 상승과 세대 간의 지위를 대물림하는 도구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자양분 삼아 사교육 시장은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유·초·중등교육에서는 5.31 체제의 교육 시장화 원리가 압도하는 상황에서도, 주민 직선에 의해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교육청에서는 혁신교육, 마을교육공동체, 학생인권조례 등 5.31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졌고 어느 정도 시장 논리를 완화시키는 힘이 작용했다. 하지만 국가 주도 교육과정 체제, 자사고, 외고, 국제고, 일반고로 계층화된 고교 체제, 학생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입시 중심의 교육은 강력한 경로를 형성하여 교육 개혁을 좌초시켰다.


2025년은 기존 체제의 경로가 새로운 경로로 전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중요한 정책과 제도가 2025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선 문재인 정부에서 결정된 자율형 사립고, 국제고, 외국어고의 일반고 전환이 이루어지는 해가 2025년이다.


고교를 다양화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자율형 사립고가 현실에선 교육과정 다양성이나 학교 운영상 강점을 보여 주지 못한 채, 오히려 고교 서열화와 그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야기하였다. 그렇기에 고교 체제를 서열화하고 대입에 종속된 교육과정을 운영했던 자사고, 외고, 국제고의 일괄 일반고 전환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변화는 학교 안에서 교육과정의 다양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2025년부터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이전의 교육과정과 비교해 대단히 혁신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의 지점이 있다. 


우선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대강화되고 시·도교육청과 학교의 권한이 보다 강화되는 교육과정이 될 것이며, 수업 혁신과 평가 혁신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초등의 수업 혁신, 중학교의 성취 평가제와 자유 학기제 시행 그리고 석차 백분율 폐지가 고등학교에서의 수업·평가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환의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수업과 평가의 혁신이 반영된 학생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기록이 대입과 연계되면서, 학생들의 과거의 학력과 현재의 수행, 미래의 전공과 관련된 학력이 서로 연계되는 방향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25년은 고교 학점제가 전면 실시되는 해이다.


현행의 제도는 학년제를 기반으로 하여 출석 일수를 채우고 성적과 무관하게 일정 단위를 이수하면 졸업이 되는 단위 이수제인데, 이를 크게 바꾸는 정책이다. 다양한 교과목을 학생이 선택함으로써 학습 동기를 부여하고 자기 주도적 학습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며, 단순한 과목 선택을 넘어 학생 참여형 수업과 성장과 발달을 돕는 평가로의 혁신을 추진하고, 수업 평가에 대한 교사의 자율성을 강화하여 모든 학생에 대한 책임 교육을 실현하는 것, 그래서 민주적 학교 문화를 기반으로 학생들의 역량을 지원하는 배움터를 조성하는 것이 고교 학점제의 도입 취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응하고 학생 수 급감에 따른 교육 여건 변화를 미래형 교육 실현을 위한 기회로 활용한다는 이유로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교육 공약으로 고교 학점제를 제시하였다.


물론 교육 정책은 철학, 이념, 지향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대학 입시나 교육과정과 같은 이미 존재하는 거대한 선행 조건을 절대적인 것으로 접근할 수도 없다. 한국 사회의 거시적 사회 구조의 변화 흐름과 교육의 현실을 함께 되짚어 보면서 사회 전체적인 맥락에서 균형 잡힌 접근과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져야 교육 정책이 성공할 수있기 때문이다. 


고교 학점제가 아무리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고교 학점제가 구현되는 다양한 상황적 맥락과 과제를 고려해야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만약 고교 학점제가 분권과 자율 중심의 개정 교육과정의 현장 적용, 일반고로의 고교 체제 일괄 전환, 여기에 더해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과 연결되어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게 된다면 노동 시장과 대학 서열화, 입시로 이어지는 견고한 선행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고교 학점제, 어떤 경로를 그릴 것인가


고교 학점제가 어떤 경로를 그릴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 등에서는 2025년 고교 학점제 전면 시행을 염두에 두고 연구 지원 센터와 대응 부서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선택 과목 개설을 통한 학생 선택 폭 확대, 진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 증가,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 증가, 학교 공간의 변화를 복합적으로 고려하면서 학점제형 교육과정 개발, 선택 과목 확대 방안(학교 간 온라인 공동 교육과정, 지역 사회 학습장), 선택 과목 다양화와 더불어 내실 있는 선택 과목 운영 방안 등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계속해 왔다. 그러면서 예상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다각도로 준비해 왔다.


하지만 고교 학점제는 입시 체제를 더욱 강화할 것이며, 학생과 학부모의 소비자로서의 권리만을 강화하여 교육과정을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교사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교사들은 특히 고교 학점제가 교원 자격 체계를 개방하여 현재의 사범대·교대 체제를 무력화할 것이며, 학교의 지역 간 격차를 심화시켜 사실상 학교 선택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교사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수능과 학교생활기록부 교과 전형이 유지되는 한 대학 입학 시 학생 변별을 위한 요구가 확대될 것이고 이에 따라 내신에 유리한 선택 과목 위주의 운영이 되는 것, 입시 제도의 영향력이 강력한 상황에서 이수 요건 미충족 시 재이수 제도의 도입이 형해화되는 것이다. 


많은 학자도 미이수 제도가 학교의 책임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 교육을 가정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를 강화시켜 사교육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고교에서 갑자기 기초 학력 부진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및 중학교 단계에서 부진이 발생하여 누적된 상태에서 고교에 진학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고교에서 미이수 제도를 도입하여 책임 교육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또 한 가지, 고교 학점제를 위해 내신을 절대 평가제로 바꿀 경우 대학이 내신을 대입 전형 자료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전형 방식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풍선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지적도 되새겨볼 만하다. 


또한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교과 체제를 벗어나자는 요구는 계속 있었지만 학문 분류를 곧 교과 단위로 하는 교육과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고교 체제 개편, 고교 학점제, 대입 제도 개선을 통해 학습량을 감축하고 학습 난이도 조정이 이루어지더라도, 교과 교육과정에 대한 질적·양적 혁신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조건이 있다. 교육과정의 질적·양적 혁신을 위해서는 교과서, 수업 방식, 평가 방식, 학습량 등의 변화가 연계되어야 하지만 교과 교육과정이라는 틀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럼 고교 학점제를 왜 하려는 것일까? 


모든 정책은 그 정책이 구현하려는 고유한 목적이 있는데 고교 학점제의 목적은 소수의 상위권 학생들이 아닌 일반 학생들이 경쟁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행복한 고등학교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경로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구현하지 못하면 고교 학점제는 의미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고교 학점제가 의미를 가지려면 고교 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다수의 학생이나 입시가 아닌 배움의 의미를 학교 밖에서 찾는 학생들에게 행복이라는 경험을 선물해야 한다.


많은 우려가 있음에도 고교 학점제의 의의를 하나 이야기하라면 나는 학교 내 학습 경험과 학교 밖 학습 경험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꼽고 싶다. 


현행 교육은 학교 내 학습 경험, 즉 소속된 학교에서 개설한 필수 교과에 한정된 학습 경험이 주가 되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학교교육과 학교 밖 교육이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입시와 무관하게 의미 있는 배움을 이어 가려는 학생은 ‘학교 밖 청소년’이 되는 수밖에 없다. 


평생교육과 학교교육, 청소년 정책과 교육 정책이 분리되어 학교교육의 혁신, 탈학교교육 혹은 비학교교육이 비체계적으로 혼합되게 된다. 


결국 어떤 유의미한 학습 경험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학교교육은 경직된다. 마을교육공동체 등을 만들며 학교 밖의 다양한 교육 경험을 만들고 있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교육 인프라가 부족한 농산어촌에서는 대도시와 달리 교육 경험의 장이 분산되어 있어 이를 연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고교 학점제는 이러한 학교교육 정책과 청소년 정책 사이의 문제점을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 우선 고교 학점제를 플랫폼 삼아, 교육이 학교 간 교육과정의 융합과 개방이라는 방식으로 확장되어 다른 학교에서 개설한 교과로 선택의 폭이 확장된다. 


이렇게 되면 학교, 학년, 학급이라는 전통적 구분에서 벗어나 공통된 과목을 함께 공부하는 새로운 의미의 배움의 단위가 활성화된다. 


여기에 더해 학교 밖 학습 경험으로까지 배움의 경험을 확장할 수 있다. 학교와 교육 기관이 협력과 지원 체계를 강화하고 인프라와 콘텐츠를 통합하면서 학생의 학습 경험이 학교를 넘어 지역 사회를 학습 공간으로 만들게 되면, 학교에서는 학생, 학교 밖에서는 ‘비학생 청소년’이라는 구분도 완화될수 있다. 


고교 학점제의 아이디어가 미인가 대안학교에서 학생의 진정한 배움과 성장을 돕는 맞춤형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수도 있다. 여기에 최근의 비대면 학습 경험이 결합되면 배움의 장은 한층 더 확장될 수 있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은 대도시권 학교에 비해 재학생 감소로 통폐합이 거론되는 농산어촌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될 수 있다. 이수 기준을 공유하면서 각각의 프로그램이 통합되면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선택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어 자신의 적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최근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비대면 학습이 확장되면서 입시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대학을 포함해 다양한 기관에서 진행하는 질 좋은 강의가 개방되고 유료 콘텐츠로 일반에 판매되는 경향,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실감형 학습 콘텐츠 등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의 학습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이들이 고교 학점제를 고리로 연결된다면 학습자의 주도성과 다양성이 보장되는 고등학교 체제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학교와 학교 밖의 경계, 학생과 비학생 청소년의 경계는 완화되고, 학생들이 각자의 관심에 따라 진로를 탐색해 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교 학점제를 넘어


고교 학점제는 학점과 이수라는 두 제도가 결합된 것으로, 이상적으로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학습 경험이 일어나게 하여 유의미한 학교생활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고교 학점제가 성공할 수 있으려면 교육 경험의 통합을 위한 시간을 주고 적극적으로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고등학교 체제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2025년 전면 시행을 앞둔 실제의 고교 학점제는 모든 학생이 대학과 상관없이 행복한 고등학교 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괴리되고 있다. 


앞서 말한 노동과 학벌 체제의 문제와 선발 및 배분 기능을 수행하는 교육의 문제도 있지만, 고교 학점제 자체에 관한 논의도 수능을 보고 나면 입시 전문가들이 나와 킬러 문항을 분석하고 상위권 대학의 예상 커트라인을 분석하는 것처럼 상위권 학생을 중심으로 대입 제도에서 선별의 문제 등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상위권 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입 제도와 연계성이 강조되면서 고교 학점제는 교과 교육과정의 논리에 지배당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기는 교과 공부에 치중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고교 학점제가 실행되더라도 학년 구분 없이 자유로운 과목을 수강하면서 학생 참여형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정은 수사적 수준에 머물게 된다. 역설적으로 선거가 다음 선거까지는 시민의 정치적 참여가 끼어들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처럼, 과목 선택 이후 좋은 수업을 만드는 학생과 교사의 공동 책임의 문제는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선택이라는 방식이 수준과 관심이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모이게 하는 효과를 강화하여 사실상 수준별 수업, 수준별 교육과정으로 변형될 수 있다.


우리는 고교 학점제를 넘어서 대다수의 학생이 대학과 상관 없이 행복한 고등학교 시기를 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고교 학점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고교 학점제가 대다수 학생에게 행복한 고등학교 시기를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고교 학점제 실시 이후, 학생들의 삶은 무엇이 달라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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