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호[시] 음악 시간 외 | 이상인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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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시간

산마을 학교 2



교실 한가운데 장작 난로가 이글거리는

산마을 학교, 4교시 음악 시간

키 큰 선생님의 오르간 소리를 타고

창밖에는 싸륵싸륵 눈이 내리고

아이들은 비비새 떼처럼 노래를 부른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꽃송이


아직도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몇몇과

서울 삼촌이 보낸 빨간 장갑 한 켤레를

서로서로 부러워하는 아이들,

앓는 꿈의 머리맡으로 눈이 내리고

바라뵈는 산읍山邑의 한쪽 어깨가 다 젖는다.


나무에도 들판에도 동구 밖에도

골고루 –  나부끼네 아름다워라


교실은 열둘 더덕꽃 같은 입술 속에서

펑펑 쏟아지는 송이 눈으로 자욱해지고

전나무들이 파랗게 떨며 안을 기웃거릴 때

선생님은 오르간을 끄고

속살이 노란 고구마를 쪼개 주며

눈 녹은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골고루 나부끼지만

가 닿지 않는 삶의 골짜기도 있단다.

이 세상엔 그래서

깊은 가슴으로부터 내리는

따뜻한 사랑의 눈이 필요한 거란다.


선생님의 말씀 끝에 아이들은 다시

교실을 떠메 갈 듯 노래를 부르고

창밖의 나무들과 마을과 산들은

희디흰 물감 속으로 서둘러 사라지고 있었다. 





한솔이 일기

산마을 학교 6  



교실 유리창가 화분,

한솔이가 심어놓은 봉숭아 허리에

한 송이 빨간 슬픔이 매달렸다.

아빠는 여태 일어나지 못하신다고

벌써 서너 주일이 지났다며

몇 송이는 또 목덜미에 매달린다.

오늘도 엄마는 아빠의 일을 해결하러

하청업체를 찾아갔다.

엄마의 어두운 귀가를 읽은

한솔이의 눈물 송이 같은 꽃들

나는 온몸에 핀 그 슬픔이 시들기 전에

몇 잎 따다가 새끼손톱 물들였다.

그때부터 내 가슴속에도

빨간 슬픔 몇 송이 환하게 켜진다.





시작 노트

1980년대 중반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지가 산촌, 거기서도 더 깊숙이 들어간 작은 분교였다. 첫눈이 내리면 아빠들이 장작을 싣고 와 한쪽에 쌓아 두고 가고 늦은 아침이 되면 아이들은 깊은 골짜기에서 그림자처럼 모여들었다. 당시만 해도 도시락을 싸 오거나 굶는 경우가 많았다. 도시락을 난로 위에 층층이 올려놓고 가끔 뒤집어 가며 데웠다. 학교 텃밭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꾼 고구마도 난로 속에 넣어서 굽곤 하였다. 간식이 변변치 않던 그 시절 달콤한 군고구마를 나누어 먹으며 책 읽기, 동시 쓰기를 수시로 하였는데 그때 동시를 일간지 학생문예란에 투고하여 실렸던 제자가 나중에 유명 문예지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는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 오기도 하였다.

그 제자의 당선 소감을 읽어 보니 초등학교 시절 많은 책 읽기, 동시 쓰기,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으로 달려가 다슬기를 잡으며 체험했던 것들, 1,000m가 넘는 상봉 오르기, 흑염소 뒤를 따라다니던 기억과 웅숭깊은 뒤안에서 고슴도치와 놀던 기억들이 시를 쓰게 한 문학적인 자양분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초임지인 산마을 학교! 선생님의 서툰 오르간 소리에 맞춰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밖에는 아득한 눈보라가 물결치는 산맥을 뒤덮으며 내려와 손바닥만 한 운동장을 지우고 교실을 온통 하얗게 무너뜨릴 듯이 쏟아졌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힘차고 세상의 모든 어려움에 맞서 넉넉하게 이겨 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시도 그때부터 익기 시작하여 20여 편의 ‘산마을 학교’ 연작을 쓰게 되었고 그 작품들로 인해 얼마 있다가 문단에 등단도 하였다. 어느덧 나는 정년퇴직하였고 중년이 된 그 아이들과 가끔 만나 저녁을 먹으며 술도 한잔씩 나눈다. 내 가슴속에 남아 있는 40여 년 전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풍경만큼이나 만나는 제자들도 그때를 회상하며 즐거움에 건배를 외친다.


이상인(lisiin@hanmail.net)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시가 당선되었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에 동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해변주점》, 《연둣빛 치어들》, 《UFO 소나무》, 《툭, 건드려주었다》, 《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불쑥, 물앵두꽃이 피었다》와 동시집 《민들레 편지》가 있다. 송순문학상과 우송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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