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호[연속 기획/특수에서 보편으로] 특수교육대상자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평가받아야 하나 | 정예현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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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육대상자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평가받아야 하나

- 배우지 않아도 평가는 받아야 하는 중등 통합교육의 아이러니



정예현

btyeppy@googlemail.com

전국통합교육학부모협의회 서울위원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싶은 어른인 나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중학생인 특수교육대상자를 양육하고 있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수십 년 전과 많이 달라진 학교를 보면서 늘 자녀의 학교생활을 동경해 왔다.

학급당 학생 수가 예전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말만 들어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만히 앉아서 듣고 쓰기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오감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수업을 하는 것도 부러웠다. 흙 놀이를 한다고 더러워져도 되는 옷을 입고 오라는 가정통신문을 보면서 큰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학교에서 옷이 더러워지기라도 하면 칠칠치 못하다는 핀잔을 학교에서 만나는 어른들부터 시작해서 하굣길에 만나는 모든 어른들에게 백만 번 듣고 ‘아니,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뭘 하길래 옷이 이 모양이냐’로 하루가 마무리되던 수십 년 전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자체에서 아이들을 버스에 태워 수영장에 놀러 간다는 소식에 내가 다 설렜으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러 학교 근처 물가로 산책 간다는 이야기에는 ‘좋겠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수업 시간에 동네를 탐험하는 아이들을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 이런 게 학교 다니는 맛이지. 이러니 아이들이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안 하지!’ 학교의 이런 변화가 너무나 반가웠다.

나는 학교를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고 싶다. 



초등학교에서 교육과정 설명회를 접하다


초등학교 예비 소집일에는 ‘선행 학습 안 하고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데가 대한민국 학교’라는 선배 보호자들의 이야기나 언론 보도와 달리 ‘학생들 한글교육은 초등학교에서 시작합니다’라는 안내를 받았다. 겁도 없이 이 안내문 하나만 믿고 당장 집에서 하던 어설픈 ‘초등 입학 준비를 빙자한 한글 문자 교육’을 그만두었다. 설마,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안내를 해 놓고 ‘아니, 한글도 모르는 애를 학교에 보내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보호자를 원망하지는 않겠지. 믿었다. 

다행히도 ‘한글도 못 떼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내 자녀는, 초등학교 1년을 열심히 다니면서 담임 선생님이 준비해서 꾸려 가는 학교생활에 잘 참여하면서 놀고 웃으며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글자라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입학식에서 여전히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하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게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었다. 학교에서는 ‘학교/학년별/학급별 교육과정 설명회’라는 것을 했다. 학년부장 선생님이 진행한 학년별 교육과정 설명회 시간에는 초등학교 1학년의 신체적, 사회적, 인지적 발달 단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초등 교육과정과 거기에 연계된 다양한 교육 활동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미 나는 들뜨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학생들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 교육과정이 섬세하게 잘 짜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육과정이 내 자녀에게 잘 스며들기를 바랐다.

그 엄혹한 코로나19 유행 시기에도 교육과정 설명회는 온라인으로 이어졌고, 초등 6년 동안 빠짐없이 참여하며 학령기 아이들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그 6년 동안 교육과정 설명회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자녀가 아니라, 자녀가 만나는 또래 친구들은 어떻게 커 가는지를 알기 위해서 교육과정 설명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 자녀의,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지만 명확히 느린 성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회’라는 이름으로건, 상담이라는 이름으로건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고, 그저 ‘아, 언젠가 선생님이 말했던 그 단계를 이 아이가 지금 지나고 있나 보다’ 추측할 뿐이었다. 통지표를 보면 아이의 발달 상태에 대해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통지표에는 ‘○○○을 할 수 있다’는 나열형 문장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자란다


담임 선생님께 ‘저는 긍정적인 언어로 가득 찬 통지표도 좋지만, 또래들 속에서 내 자녀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솔직한 선생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부탁도 드려 보았지만 학교생활을 하루하루 하다 보면 부탁한 나도, 부탁받은 선생님도 잊기 일쑤였다.

가끔 자녀의 어려운 점에 대해서 언급한 통지표를 받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자녀가 말하지 않거나 못하는 이야기를 신경 써서 알려 주시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보호자로부터 ‘자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민원 제기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니 내가 그런 보호자가 아니라고 믿어 준 선생님께 더 감사하게 된다.)

한때는 학년마다 아이들이 도달해야 할 성취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그중에서 자녀의 통지표에는 없는 내용이 나오면 이건 내 자녀가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구나 비교해 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올해도 무사히 잘 지나갔구나’ 생각하며 통지표도 꼼꼼하게 읽어 보지 않았다. 

그래도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또래 친구들이 배우고 익히는 것을 내 자녀도 같이 경험할 수 있었다. 학습 의지를 상실할 만큼 배우고 익히는 속도 차이가 큰 수업 시간에는 특수학급으로 이동해 특수학급 선생님과 함께 천천히 배우고 익혔다. 통합학급과 특수학급을 오가면서 수업을 받느라 때로 여러 교과목을 아우르며 한 주제에 대해 익혀 나가는 수업에서는 단절감에서 오는 소외감을 자녀가 느끼기도 하였지만, 그럭저럭 또래들 속에서 배움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의 배움만으로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운 학생들은 가정에서도 배움을 이어 나가야 하는데, 내 자녀는 “배우는 속도가 나보다 빠른 사람들이랑 하루에 6교시를 같이 있어 봐. 내가 힘들겠어, 안 힘들겠어. 집에서는 절대 안 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나도 비위를 맞춰 가며 ‘공부를 시키기’가 힘들고 귀찮아 ‘학교를 믿자’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실컷 놀았다. 

그래도 내가 믿는 구석은 학교였다. 친구들보다 이해하는 속도도 느리고 이해하는 폭이 좁을 때도 있지만, 산에서 주운 돌을 보면서 “퇴적암인가?”라고 하기도 하고 뉴스를 보면서 욕을 하는 부모 옆에서 “민주주의가 잘 안 되나?”라는 말도 했다. 어느 날에는 잠깐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휴대전화와 1만 원짜리를 들고 가출을 해서는 요즘 유행한다는 신기한 과자를 파는 편의점을 검색하고 인터넷 지도를 보며 기어이 동생 것까지 사 온 자녀를 보면서 역시 내가 믿을 구석은 학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일일이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들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친구들 속에서 배우고 익혀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자녀가 기특했다. 또래들 속에서 부대끼며 세상을 살아가는 연습을 할 수 있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초등학교에서 6년을 보낸 소감은 그러했다. 



중학교, 너에게도 나에게도 낯선 그 이름


소위 본격적인 입시의 시작이라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초등학교 때처럼 많은 걸 새로 배우기는 어렵더라도, 그저 친구들이 하는 공부를 배우는 시늉이라도 해 보고 친구들이 하는 체험도 함께 해 보면서 즐겁게 지내기를 바랐다. 과밀 특수학급이라 촘촘한 개별 지원은 어려워지겠지만 같은 학년 특수교육대상 학생이 제법 많으니 그 친구들과 우정을 쌓아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학교생활의 목표는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당장은 교복이라는, 중학생임을 가장 실감 나게 하는 문물을 만났고, 십수 명의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수업을 하는 신기한 환경도 조성되었다. 상냥한 선생님도 있고 좀 무서운 선생님도 있고 정말 재밌는 선생님도 있고 지루한 선생님도 있어서 다양한 선생님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었다. 교과목도 여럿이라 도저히 한마디도 알아듣기 힘든 수업이 있다가도 환기가 되는 수업도 있고, 그도 너무 힘들 때면 ‘도움반’이라 이름 붙은 개별 학습 공간에서 특수교육대상 학생들과 함께 쉬엄쉬엄 공부할 수도 있으니 이 정도면 그럭저럭 학교에 잘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건 직접 경험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비장애인인 보호자의 바람이자 조금이라도 아이가 힘들어하면 ‘이렇게 재밌는 곳인데?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다’라고 꼬드기는 비장의 무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무기로는 어림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각자도생의 시간, 중학교


중학교 입학 후 확정된 시간표를 받았는데,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표정이 굳어졌다. 초등학교 때는 학생이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또래가 배우는 것은 다 열심히 경험할 수 있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욕심은 버리라고 하는 것일까? 애초에 특수교육대상자들은 목표가 다르니 이쯤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물러서라는 것일까? 

초등학교 때 자녀가 관심을 많이 가졌던 사회와 과학이 시간표에서 사라졌다. 철자는 모르지만 영어 단어를 발음과 뜻으로 익히고 가끔 잘난 척하곤 했는데, 영어 수업도 사라졌다. 특수학급에 모여서 수업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은 ‘할 수 있다’는 기준으로 수업 참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밀 특수학급의 상황에 맞추어 수업 참여가 결정되었다. 

물론, 학생이 원하면 사회 시간에도 과학 시간에도 영어 시간에도 통합학급에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통합학급 수업 시간에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특수교육대상 학생을 수업에 참여시킬 방안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교과 선생님들이 극소수지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 자녀에게 그런 행운이 닥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루에 한두 교시는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받고 나머지 네다섯 교시는 통합학급에서 덩그러니 홀로 수업받는 자녀가 안타까워 점심시간이 지나면 자녀를 조퇴시키는 보호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수업 시간에 방해된다고 특수학급으로 분리당하지 않기만 해도 다행인 경우가 허다하다. (애초에 특수학급은 학생을 분리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개별 수업을 하는 학생의 공간이다.) 심지어 2023년 9월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라는 게 시행된 이후, 수업 시간에 큰 소리를 냈다고 분리 조치가 내려졌는데 학교에 분리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며 가정 학습으로 내몰린 장애 학생 이야기도 들려온다.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특수교육대상 학생을 수용하는 학교를 비난해야 하는가, 따라가지도 못하는 특수교육대상 학생을 일반 학교로 보낸다고 비난받아야 하는가.

매 학기 초 적응 기간이라고 해서 1~2주 동안 통합학급에서 온종일 수업을 듣는 기간이 있는데, 그 기간에 이미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은 알아 버린다. 이 수업 시간이 나를 포용하는지 아닌지. 이름은 ‘적응 기간’이라 뭔가 미래 지향적인 느낌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호의적인지 아닌지를 알아차리게 만드는 이 시간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학생이 원하는 시간에 통합학급에서 수업을 듣게 되는 경우에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특수학급에서의 수업 시간에 연속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학교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특수학급에서도 개별 교과목 수업을 짜인 계획 속에서 진행하게 되는데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통합학급으로 이동하게 되면 특수학급에서의 수업에 결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나마 학생에게 눈높이가 맞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수업 시간인데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겪으면서 나와 내 자녀는 나름의 결단을 내렸다. 공부는 어른이 되어서도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에 집중하자는 것. 힘든 수업 시간에 참여하느라 너무 큰 에너지를 쏟지 말고 그런 시간에는 ‘아~ 비장애 친구들은 이 시기에 이런 걸 하는구나’ 구경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면 된다. 그리고 즐거운 수업 시간에는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고, 하루 세 교시 정도 되는 특수학급 수업 시간에는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쌓아 가기로 했다. 

이 결정을 내릴 무렵 우리는 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무시무시한 ‘평가’였다. 



수업은 안 들어도 평가는 무조건 해야 한다


중간고사 통지표가 왔는데 각 과목별 성취 기준과 자녀의 도달 정도가 서술형으로 쓰여 있었다. 수업을 듣지 않는 과목은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나 봤더니 ‘순회교육으로 특이 사항 없음’ 또는 ‘순회교육으로 활동 내용 없음’이라고 돼 있었다. 엄밀히 말해 내 자녀는 순회교육 대상자가 아니기 때문에 틀린 표현이지만 수업을 듣지 않는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낸 매우 양심적인 표현으로 보였다.❶

그렇다면 다른 학교에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통지표에 쓰는지 궁금하여 수소문해 보았다. 주변 학교 특수교육대상자 보호자와 인맥이 있는 특수 교사들에게 물었는데, 대부분 ‘그럴듯하게 지어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란으로 비워 둘 수는 없으니 무조건 무슨 말이라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모두의 답변은 같았다. “시험은 무조건 다 봐야 해.” “그냥 찍는 거지 뭐. 3번으로 찍으면 점수가 제일 잘 나오더라.” “그래도 꼴찌 아닌 과목도 많아.”

나는 이 상황이 무척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중학교 교과 수준은 대부분의 특수교육대상자들에게 너무 어렵다. 그 어려운 수업을 쉽게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다. 애초에 가능할지도 의구심이 든다. 그렇지만 똑같은 시험으로 똑같이 평가하는 게 공정한 ‘원칙’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르쳤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보고 그 시험 성적을 기록할 뿐.

발달 정도의 차이 때문에 특수교육대상자들은 소위 개별화교육을 받는데, 애초에 개별화교육계획에 ‘중학교 1학년 학생이지만 수학은 초등학교 5학년 수준으로 수업을 한다’고 적고 실제로 이렇게 수업을 하고 별도의 평가를 하더라도 정기 고사는 중학교 1학년 학생들 모두와 똑같이 봐야 하고 점수를 기록해야 한다. 주어진 시험 시간 동안 OMR 카드에 이름과 반, 번호를 무사히 기입하고 외계어처럼 쓰인 시험지를 보고 의미 없이 정답처럼 보이는 번호를 검게 색칠한다.

이런 행위를 반복해서 하는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에게 학교는 부끄럽지 않을까? 미안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장애가 있는 사람을 대하는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가르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일까?

지난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 왔을 텐데, 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까? 

‘과정 중심의 평가’가 점점 학교 현장에 많이 도입된다고 하는데, ‘배움의 과정’ 자체가 없는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에게는 어떤 과정 중심의 평가가 가능할까? 설령 특수교육대상 학생을 ‘배려’한 쉬운 수행 평가를 하는 보기 드문 선량한 교사가 있다고 한들, 배우는 과정 자체가 없었던 학생들에게 ‘평가’를 위한 평가를 들이미는 것 역시도 괴롭힘으로 보인다.

애초에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걸까. 전문가가 아닌 내가 답을 알 리는 만무하지만, 얕은 생각으로 도달한 결론은 ‘목표의 부재’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개별화교육


지금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아예 없다고 하면 좀 억울할 수도 있으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고 비유를 해 보면 어떨까. 교육과정 총론이니 하는 글을 보면 공통 교육과정❷과 기본 교육과정❸을 마련해 뒀으니,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개별 학생’에게 적절한 교육적 목표를 열심히 잘 찾아보라고 한다. 

적절한 교육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현행 수준에 대한 평가도 정확하게 되어야 하는데, 비장애 학생들 사이에서 어영부영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평가 결과를 토대로 그 어떤 교육 목표를 세울 수 있을까?

특수교육의 핵심은 개별화교육이라고 한다. 어떤 수업 시간에 통합학급에 있고, 언제 특수학급에 가는지, 어떤 보조 기기가 필요한지, 현장체험학습을 갈 때는 누가 지원해 주는지, 급식 시간 지도는 누가 하는지, 숙박형 체험학습을 가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생존 수영 수업은 어떤 지원을 받아 참여하는지, 문제 행동이 있을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지, 방과후수업은 무엇을 하는지, 특수교육 관련 서비스는 무엇을 받고 있는지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이런 개별화교육계획을 논하기 전에 학교가 어떤 교육적 목표를 가지고 어떤 교육과정으로 학생을 교육할 것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면 안 될까? 

학생이 12년 교육의 긴 여정에서 어디쯤 도달했는지, 평가 자료를 바탕으로 보호자와 교사가 함께 짚어 보고 이번 학기에는 어디까지 가 볼까 머리를 맞대 보면 어떨까.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우리에게는 무리일까? 

물론, 보호자에게 이런 판단을 할 만한 역량이 지금은 충분하지 않다. 부족한 우리들이 더 잘할 수 있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특수교육지원센터는 보호자 교육을 통해서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의 개별 교육적 요구가 무엇이고 어떤 교육적 목표를 세울 수 있는지 알려 주어야 한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은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 그 안에서 특수교육대상자의 자리는 어디인지, 어떻게 찾아 주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교육부는 학급당 정원을 줄이고 적절한 지원을 통해 교사가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특수 교사뿐만 아니라 일반 교사들도 어떤 수업 설계를 통해 특수교육대상 학생을 수업에 참여하게 만들지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교육 당국이 자리를 마련해 주면 좋겠다. 그런 토대가 마련되고 나서야 비로소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에게 개별화교육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수교육대상자는 비장애 학생의 9년보다 3년이 더 긴 12년이 의무 교육 기간이라고 여기저기 자랑만 하지 말고, 국가는 ‘의무 교육’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촘촘한 교육 계획을 세우기 바란다. 또한 학교는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모든 학생들에게 배움이 일어나는 소중한 공간이 되고, 교사에게는 수업을 통해 학생의 배움을 일으키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일터가 되면 좋겠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준비하느라 각급 학교들이 몹시도 분주하다. 특수교육대상자들이 어떤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름도 생소한 AIDT(Artificial Intelligence Digital Textbook, AI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한다고 나라가 시끄럽다. 이런 와중에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차가운 기기가 아니라 온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순회교육이란 “특수교육교원 및 특수교육 관련서비스 담당 인력이 각급학교나 의료기관, 가정 또는 복지시설 등에 있는 특수교육대상자를 직접 방문하여 실시하는 교육”이다.(「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2조 제6호) 학교에 다니면서도 순회교육을 받는 경우는 특수학급이 설치되지 않은 학교에 다니는 특수교육대상자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특수학급이 있는 학교에 다니는 내 자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교육부에서 발간한 〈2021 중·고등학교 장애학생 교과학습발달상황 평가 도움 자료〉 16쪽에 “개별교육에 따라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장애가 심하여 교과 수업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특수학급에서 생활 기능 중심의 교육을 받는 학생의 경우’ 이렇게 쓸 수 있다고 한다. 애초에 내 자녀의 경우 교과 담당 교사와 특수 교사가 협력하여 특수학급에서 해당 교과를 교육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현재 특수학급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침서이다. 자녀의 학교 특수 교사는 이런 지침에 의한다면 국어, 수학, 도덕, 과학, 사회, 한문, 영어 수업을 교과 담당 교사와 협력하여 직접 해야 한다. 우리나라 중등 교육과정에서 한 명의 교사가 이런 다양한 교과목을 동시에 수업할 수 있을까?

공통 교육과정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공통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과정이다. 현재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공통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으며 고등학교에서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따른다.

기본 교육과정은 공통 교육과정이나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적용하기 어려운 지적장애 학생의 발달 수준을 고려한 교육과정이다. 보호자들 사이에서는 ‘특수학교 교육과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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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