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요한 건 교육이 아니야!
- 잘 키워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에 집중하기❶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본지 편집위원,
경남 초등 교사
폭력의 유구한 역사
2024년 7월 말, 보도되기 시작한 성 착취 허위 영상물❷(일명 딥페이크) 사태는 이전과 다른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조명받기 시작했다.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엄청난 수의 폭력 범죄가 드러났다는 것이 경악스럽고 폭력의 행태가 가족·지인·학교 및 지역 단위로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사건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잔혹함이었다. 또한 밝혀진 가·피해자의 70~80%가 10대라는 것에 많은 사람이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청소년이 가해자인 디지털 성범죄의 성격은 다른 성범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모든 성범죄는 유구한 강간 문화의 답습이다. 오랜 시간 부지기수의 여자들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 줄 것인지 결정할 권리를 잃고 치욕적인 이미지와 낄낄거리는 담론, 성폭력 속에서 몸의 자율성과 인격권을 침해당해 왔다(이소은·최순욱, 2023).
자본주의, 구체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면서 성 역시 보다 세부적으로 상품화되었고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보다 훨씬 더 큰 시장에서 더 빈번하게 거래된다. 예쁜 얼굴과 ‘미드(가슴 크기를 칭하는 말)’뿐 아니라 직각 어깨, ‘애플 힙’, 가는 팔뚝, 짧은 중안부, 좁고 봉긋한 이마……. 몸은 분절적으로 평가되고 팔린다.
핵심은 자율권과 인격권의 침해
디지털 세상에서 몸은 ‘이미지’로 재현되어 한 번 더 성-상품화된다. 현실에서보다 카메라 앞에서 더 아름답기 위한 노력들은 물론, ‘보정’을 통해 픽셀 단위로 통제되는 것이다. 보정이 더 극대화된 딥페이크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나서 몸의 각 부분들은 조합되고 분해되고 있다. 한 개인의 신체가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인의 신체가 합성되고 가상의 신체에 덧붙여지며 이 과정에서 몸의 자율권과 인격권은 철저하게 분쇄된다.
특히 딥페이크 프로그램은 인공지능(AI)을 이용하기에 몸에 대한 대량의 데이터를 사전에 학습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동의나 사용에 대한 고지 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의 기본 약관 속에, 사진 편집 어플의 사용 권한 속에 동의 여부가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 그것을 모두 거부하고 디지털 사회에서 살아가기는 매우 힘들다. 우리는 디지털시민으로서 ‘자기정보결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독자 중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영상과 사진 중 어느 것이 AI에게 학습되었고 어느 것은 학습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자기정보결정권의 침해는 이에 취약한 집단에서 더욱 심각하다. 성 착취 허위 영상물은 포르노 영상에 얼굴만 합성하는 방식이 많은데 이 경우 얼굴만 피해자로 인정된다. 하지만 몸이 사용된 것 역시 심각한 인권의 침해다. 많은 성 판매 여성/모델과 배우들이 어떠한 동의나 고지 없이 수많은 허위 합성물 영상에서 자신의 몸 이미지가 사용된 것을 확인하고 경악하고 있다. 이것은 ‘사태’ 이후에도 피해로 언급조차 거의 되지 않는다.
얼굴이 아니라 신체 이미지의 합성으로 인한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 한 고등학교에서 행사 포스터를 만들며, 교복을 입은 학생이 등장하는 콘셉트를 구상했다. 요즘 같은 상황에 학생의 얼굴 이미지가 있는 포스터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직접 촬영하여 포스터를 만들되, 학생의 몸 이미지는 그대로 두고 얼굴은 애니메이션화한 다른 이미지를 붙였다. 그렇게 제작되어 공개된 포스터를 본 촬영 당사자는 포스터의 모델이 나라고 말할 수 없으면서 모든 학교 구성원들이 자신의 몸을 객체화하여 보고 있는 상황에 당황스러워했다. 이것 역시 허위 합성물로 인한 고통이지 않은가.
앞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허위 영상물을 포함하여 디지털 성폭력의 핵심은 자율권과 인격권의 침해에 있다. 불법 합성물이 성 착취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은 그 영상이 성적(sexual)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적 맥락에서 자율권과 인격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시해 보이는 영상은 자본화되지만 허위 영상물 유포는 협박의 소재가 되는 것은 영상과 영상의 유포가 자율권과 인격권을 파괴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현행법에서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사진/영상의 촬영 및 합성은 ‘성적(sexual)’이냐 아니냐로 위법 여부가 판단된다. 여전히 「성폭력처벌법」 안에서만 동의 없는 사진/영상의 촬영 및 합성이 범죄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결과인 사진과 영상도 ‘음란물’의 지위를 가진다. 이러한 법체계는 사람들의 인식과도, 디지털화되어 있는 사회적 상황과도 괴리가 크다. 계속 사진/영상에 대한 합성이 성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문제의 핵심에서 미끄러진다. ‘딥페이크 중에 내 것도 있으면 어떻게 해’라는 걱정을 듣고 ‘너는 안 예뻐서 그런 데 안 올라가’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한 중학교 학생들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폭력이 성적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폭력이기에 문제라는 것을 한국의 반-성폭력운동은 부단히 외쳐 왔다. 그래서 노인 강간에 대하여, 남성 강간 피해자에 대하여, 군대 문화에 대하여 끊임없이 가시화시키는 운동을 실천해 왔다. 성폭력이 예쁘고 매력적인 대상을 ‘탐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젠더적 위계 권력관계하에서 행해지는 침탈과 지배, 강제적 전유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음란함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같은 구덩이로 빠져 버려서는 안 된다. 폭력이 섹슈얼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섹슈얼리티를 취약점으로 삼아 타인의 자율권과 인격권을 침탈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폭력의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덜 야한 인터넷 문화’ 혹은 ‘건전한 인터넷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 자율권과 인격권의 회복, 시민으로서 자기결정권의 보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정녕 교육인가
디지털 성폭력이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대두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9년 N번방 사태, 웰컴투비디오 손정우, 성 착취물을 업로드하고 팔면서 디지털 장의사 사업까지 겸한 위디스크 양진호, 인터넷에 만연한 여성혐오……. 그래서 최근의 사태에도 어차피 늘 털리는 사진이고 어차피 다 망해서 별 다를 게 없다는 반응을 보인 청소년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절한 대응 방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이소은·최순욱, 2023).
이것은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성평등교육을 지지하는 주장이든, 반대하는 주장이든 대부분의 논리가 학생들을 바르게 ‘키워 내지 못한다’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실패를 논한다. 뭐, 교육이 실패하는 건 한두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과연 교육의 실패인가? 아니면 현재의 권리의 박탈이자 침해인가.
일상적으로 교통안전교육이 필요하지만 교통사고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경찰과 보험사다. 사건 처리도 하기 전에 당사자를 붙잡고 다음부터는 운전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것은 물색없고 부적절한 행동일 뿐이다. 지금 사태가 그렇다. 피해자가 (모르는 사람만 모를 뿐)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경남의 경우 디지털 성범죄 특화 상담소에 접수된 디지털 성범죄 상담 건수가 2024년 한 해만 이미 2,000건이 넘었다. 피해자 지원도 그 상담소 한 군데에서만 100명 넘게 하고 있다. 경남의 다른 상담소들에서도 각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을 하고 있다. 교육청도 허위 영상물 사태 이후 지원하고 있는 피해자가 90명을 넘겼다는 소식을 11월에 들었다. 제도에 접근하여 지원을 받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10대 피해자가 경남만 약 200명 수준인 것이다. 전국적으로는 얼마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보통 성범죄는 신고율이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더구나 디지털 성폭력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늦게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럼 실제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이미 불타는 도로 위에 서 있다.
이 상황에서 성평등교육,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이다. 너무 단호하여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 필요한 게 정말 교육일까? 물론 교육은 항상 필요하다. 하지만 또 늘 만만한 게 교육이고 공개된 것이 학교 명단인 상황에서, 가·피해자 80%가 10대라는 이유로 교육부와 각 시·도교육청에 성 착취 허위 영상물 사태의 책무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온라인 서버를 압수 수색할 수 있는가? 유포된 영상을 삭제할 수 있는가? 지금처럼 불타는 도로 위에서 필요한 것은 사법 권력의 적극적 대처, 피해자를 위한 지자체와 정부의 전면적 지원이다. 우리는 사적 제재가 불법인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제도상에서 국민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조치는 국가만이 할 수 있고, 이는 정부와 입법 기관, 사법 기관의 책무다.
특히 이번 정부 들어 절반 이상 삭감된 피해자 지원 예산을 다시 만들어 내라고 의회를 들들 볶고 지자체를 두들겨야 하고, 경찰 수사 인력 증대를 위해 지역별로 시끄럽게 나서야 한다. 지금은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를 하러 가도 증거 없이는 접수를 받아 주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10대 피해 당사자들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텔레그램방에 스스로 잠입하는 위태위태한 상황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신고된 사건도 압수 수색 영장이 나오는 데 3~4주씩 걸리기 때문에 결국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디지털 성폭력은 다른 사람의 디지털 기기와 계정을 들여다보아야 하기에 공권력에 의한 수사가 아니면 검거가 불가능하다. 또, 복사와 유포가 쉽기에 보통 법적 대응은 3년 내외, 유포된 영상의 삭제 지원은 그 이상의 피해자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걸 지금 안 하고 있다. 활활 타고 있는 이 급한 불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김희경은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가족화, 가족주의의 문제를 짚으며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대응할 때 역시 가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을 때 항의하고 신고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이지, 우리가 모두 이웃의 아이를 함께 지키는 대가족 구성원의 마음자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폭행하는 가정폭력에 대한 해법으로 공동체의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아동폭력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어릴 뿐 온전한 인간인 ‘작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인권 유린을 없애는 게 우선이다.❸
2018년 스쿨미투 공론화 때도 같은 문제를 우린 이미 겪었다. 스쿨 미투의 피해자인 청소년들을 피해자 시민으로 대하지 않고 ‘아파하는 우리 아이들’로 바라보며,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이 더 강하게 작동했다. 2024년 현재도 많은 시·도교육청에서 허위 영상물 가·피해자에게 관계 회복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어느 폭력 사안에 대하여 경찰조사, 재판, 피해자 1차 회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가·피해자 관계 회복이 지원되는가. 한 학교에서는 관계 회복을 위한 써클 대화의 형식으로 ‘가해자의 심정 되어 보기’라는 질문도 제시되었다고 한다. 총체적 난국이지 않은가? 이것은 결국 10대의 피해는 온전한 피해로 존중되지 않고 어서 빨리 화해해서 친하게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잘 지내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는 억압의 재생산일 뿐 피해자의 회복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또한 여전히 성폭력 예방 교육의 맥락에서 ‘내 딸이라면’, ‘내 동생이라면’, ‘우리 가족이라면’이라는 가족주의적 비유가 동원된다. 내 가족이 아니라면 괜찮은 문제가 아니지 않나. 김희경의 말처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확대가족 혹은 모든 ‘어른’들의 성교육 강사화가 아니다.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단호한 대처다.
사태의 차별성
반복된 일련의 사태들이지만, 이전까지의 사태와 최근의 ‘딥페이크 사태’가 구별되는 지점들도 존재한다. 그 점을 짚어 보자.
여성혐오 폭력의 일상화
여성혐오 폭력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반면 앞서 발생했던 디지털 성폭력 사태들은 각각의 구별성을 가진다. 손정우의 사례는 한국의 법제가 얼마나 성폭력에 관대한지를 입증했고 양진호의 사례는 웹하드 등의 플랫폼을 통해 성 착취 동영상으로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학습시켰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례는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서 돈을 주고 구매를 해야 하는 허들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성 착취물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위장이 존재했다.
반면, N번방과 이번 ‘딥페이크 사태’는 특정 웹사이트나 공간을 통해서가 아닌, 텔레그램방을 통해 상시적이면서 공개적이고 집단적으로 성 착취물을 공유한 특징을 가진다. 성 착취 텔레그램방에 입장하려면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때 여러 개인정보를 요구받게 되므로 ‘텔레그램은 완전한 익명이라 괜찮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정폭력 경험률이 50%가 넘을 때도 숨어서 때렸고, 조선 시대에 노비 여성에 대한 강간도 물레방앗간이나 헛간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토록 여성혐오 폭력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폭력이 일상적으로 만연한 것은 역사상 처음 목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의 ‘상용화’, 그리고 관계의 전복
최근 사태의 가장 큰 특징은 허위 영상물 제작이 가족을 포함한 지인을 능욕하는 성 착취물의 형태로 주로 제작되었고 또한 이것이 재화로서 거래되었다는 데 있다.
우선, 이번 사태가 기존 디지털 성범죄 문제와 유사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점은 성 착취물을 제작하기 위한 기술로서의 딥페이크가 ‘상용화’된 단계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정부가 방치한 결과 이를 막기 위한 기술 개발이 늦춰지거나 상용화되지 않으면서 피해와 가해의 규모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이소은·최순욱, 2023).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이 기술적으로 지원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관계성이다. ‘딥페이크 텔레그램방’은 입장 시에 인증 절차로 여러 가지를 요구했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인 능욕’이었다. 텔레그램방 구성원 모두를 공범자로 만드는 절차이기도 했다. 지인 능욕으로 가입 인증을 하는 사례는 오래전부터 일베나 일부 커뮤니티에도 있었고 그때에도 교사나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 합성물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용자’라고 칭송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허위 영상물 사태에서는 이것이 일부 ‘용자’들의 행위가 아니라 다수가 되고 입장 조건이 된 것이다. 즉 이번 사태의 핵심 중 하나는 관계의 전복, 혹은 관계에 대한 폭력적 ‘찢어발김’, 친밀한 관계의 폭력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돌봄 노동이 가시화되었지만 저평가되고 비하되어 온 근래의 시간들이 배경일 것이다. 더불어 돌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돌봄(을 독박하거나 전담하고 있는) 여성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성장이자 자립이라고 여겨져 온 시간들이 우리에게 폭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친밀한 신뢰 관계를 뒤엎고, 별것 아닌 듯이 대우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이 ‘용자’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일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이다. 과거 전통적 남성상에서 여성 배우자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 ‘남성다움’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계성을 다시 전복시키거나 새로운 관계성을 정립해야 한다. 가·피해자가 남매간이라 공간 분리가 불가능해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 자신의 가해자인 아들의 입시를 지원해야 하는 양육자……. 이토록 폭력적인 관계성을 그냥 두고 폭력만 제거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전선은 학교에 있다
딥페이크 범죄 피의자의 80% 이상이 10대라는 통계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학교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학교가 딥페이크 성 착취의 격전지이자 최전선이기 때문이다.❹
우리 사회가 10대 대부분을 학교 제도 안에 가둬 놓고 있는 상황에서, 10대들은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학교공동체 안에서 구성하게 된다. 즉 가해도 피해도 10대끼리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성적 권리는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미 지니고 있고 그렇기에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존엄한 권리이자, 국가가 보장해야 할 기본권”이다(김윤정, 2021). 즉 성적 권리는 미래에 담보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과 발전은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고 신기술이 등장한 직후, 즉 신기술이 민주적 통제를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대상화하는 데 활용되었다(이소은·최순욱, 2023). 교육계에도 신기술은 민주적 통제 없이 도입되었고 학교에서 찍힌 사진, 교육 활동 중에 촬영된 영상, 졸업 앨범이 딥페이크의 재료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형식적인 예방 교육에 그치거나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고 안내장 정도 배부하고 있다. 어떠한 안전장치도 추가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 2025년에 디지털 성폭력 관련 예산을 추가로 배정한 시·도교육청, 지방자치단체는 내가 알기론 한 군데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성평등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성평등한 사람이 되어라’고 가르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모든 학습자는 ‘성적(sexual)’ 시민이다. 성적 시민권은 가부장적이고 이성애 중심의 사회질서 속에서 성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비-시민의 성적 권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미성숙하고 위험한 존재로 관리와 통제가 필요한, 자기결정권을 가지기 어려운 존재로 여기면서 그들의 성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친밀성에 기반한 폭력’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리게 된다(남미자 외, 2022). 따라서 학생들이 성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하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실천(향유)해 가도록 하는 시민교육으로서 성평등교육이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평등은 젠더 간의 평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교 성교육은 성(sexuality)을 인간으로서 보편적 권리에서부터 성 정치학까지, 다시 말해 성교육은 성적 시민권(sexual citizenship)을 중심 원리로 다루어야 한다. ‘성차별 하지 마! 성폭력 가해하지 마!’라는 예방적 교육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성적 권리를 보장받고 섹슈얼리티를 층위로 가지는 차별과 폭력, 부조리와 비합리를 삶의 장면 장면에서 발견해 낼 수 있는, 그리고 변화를 요구하고 지금 이 사태를 책임져야 할 대상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지금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의 절대 다수가 청소년인 것은 신기술에 먼저 적응하는 세대적 특성과 온라인 커뮤니티의 내화 정도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5년 뒤, 10년 뒤 우리 사회가 그대로라면 그때도 가해자의 절대 다수가 청소년일까? 혹은 가해자 연령층이 다양해질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반복해서 강조하건대, 성폭력은 개인의 경험‘만’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교육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변혁이다. 비정규직 임금 차별이 개개인의 적은 급여 하나하나의 총합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성폭력 그리고 성 착취 허위 영상물 피해도 일부 피해자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 속에서 아무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멸망 91일 째
나의 다이어리에 2024년 8월 26일, 중·고등학교와 대학들의 명단으로 텔레그램 딥페이크 ‘겹지인방’이 수백 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된 날은 “세계 멸망”이라고 적혀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우리는 다 망해 버렸다. 그러니까 지금은 멸망 이후를 살고 있는 것이다.
❶
이 글은 2024년 9월 3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개최한 ‘성평등·성교육 도서 검열에 맞서, 성평등 정치 전략 논의를 위한 운동사회 토론회’, 그리고 2024년 10월 24일 경북혁신연구소 공감에서 개최한 ‘청소년 디지털성범죄 증가,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발표한 내용을 종합하고 고민을 좀 더 보태어 쓰였다.
❷
‘딥페이크 영상’이라는 말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페이크(fake)’라는 말이 사기나 농담, 장난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에 심각한 폭력을 가볍게 여기게 한다는 비판이 있고 모든 딥페이크 영상이 성 착취물이 아니기에 정확하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몰카’라는 말이 방송에서 ‘깜짝쇼’처럼 쓰였던 명칭이고 여전히 가벼운 의미로 쓰이기에 좀 더 명확하게 ‘불법 촬영’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 착취 불법 영상 합성물’, ‘성 착취 허위 영상물’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허위 영상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폭력이고 불법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허위라는 점에 핵심이 있으며, 법의 잣대가 모든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다.
❸
김희경(2022),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동아시아, 279쪽.
❹
이슬기(2024), “[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딥페이크’ 이후의 교육”, 〈여성신문〉.
참고 문헌
김윤정(2021), “여성청소년, 권리로서 성적 권리에 대해 말하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블로그, 2021년 3월 7일.
김희경(2022),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동아시아.
남미자·김자영·이희진·배정현(2022), 〈중고등학생의 페미니즘 백래시 실태와 대응방안〉, 경기도교육연구원.
이소은·최순욱(2023), 《딥페이크의 얼굴 – 기술이 만든 얼굴이 우리에게 묻는 것》, 스리체어스.
이슬기(2024), “[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딥페이크’ 이후의 교육”, 〈여성신문〉.
지금 중요한 건 교육이 아니야!
- 잘 키워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에 집중하기❶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본지 편집위원,
경남 초등 교사
폭력의 유구한 역사
2024년 7월 말, 보도되기 시작한 성 착취 허위 영상물❷(일명 딥페이크) 사태는 이전과 다른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조명받기 시작했다.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엄청난 수의 폭력 범죄가 드러났다는 것이 경악스럽고 폭력의 행태가 가족·지인·학교 및 지역 단위로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사건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잔혹함이었다. 또한 밝혀진 가·피해자의 70~80%가 10대라는 것에 많은 사람이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청소년이 가해자인 디지털 성범죄의 성격은 다른 성범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모든 성범죄는 유구한 강간 문화의 답습이다. 오랜 시간 부지기수의 여자들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 줄 것인지 결정할 권리를 잃고 치욕적인 이미지와 낄낄거리는 담론, 성폭력 속에서 몸의 자율성과 인격권을 침해당해 왔다(이소은·최순욱, 2023).
자본주의, 구체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면서 성 역시 보다 세부적으로 상품화되었고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보다 훨씬 더 큰 시장에서 더 빈번하게 거래된다. 예쁜 얼굴과 ‘미드(가슴 크기를 칭하는 말)’뿐 아니라 직각 어깨, ‘애플 힙’, 가는 팔뚝, 짧은 중안부, 좁고 봉긋한 이마……. 몸은 분절적으로 평가되고 팔린다.
핵심은 자율권과 인격권의 침해
디지털 세상에서 몸은 ‘이미지’로 재현되어 한 번 더 성-상품화된다. 현실에서보다 카메라 앞에서 더 아름답기 위한 노력들은 물론, ‘보정’을 통해 픽셀 단위로 통제되는 것이다. 보정이 더 극대화된 딥페이크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나서 몸의 각 부분들은 조합되고 분해되고 있다. 한 개인의 신체가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인의 신체가 합성되고 가상의 신체에 덧붙여지며 이 과정에서 몸의 자율권과 인격권은 철저하게 분쇄된다.
특히 딥페이크 프로그램은 인공지능(AI)을 이용하기에 몸에 대한 대량의 데이터를 사전에 학습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동의나 사용에 대한 고지 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의 기본 약관 속에, 사진 편집 어플의 사용 권한 속에 동의 여부가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 그것을 모두 거부하고 디지털 사회에서 살아가기는 매우 힘들다. 우리는 디지털시민으로서 ‘자기정보결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독자 중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영상과 사진 중 어느 것이 AI에게 학습되었고 어느 것은 학습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자기정보결정권의 침해는 이에 취약한 집단에서 더욱 심각하다. 성 착취 허위 영상물은 포르노 영상에 얼굴만 합성하는 방식이 많은데 이 경우 얼굴만 피해자로 인정된다. 하지만 몸이 사용된 것 역시 심각한 인권의 침해다. 많은 성 판매 여성/모델과 배우들이 어떠한 동의나 고지 없이 수많은 허위 합성물 영상에서 자신의 몸 이미지가 사용된 것을 확인하고 경악하고 있다. 이것은 ‘사태’ 이후에도 피해로 언급조차 거의 되지 않는다.
얼굴이 아니라 신체 이미지의 합성으로 인한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 한 고등학교에서 행사 포스터를 만들며, 교복을 입은 학생이 등장하는 콘셉트를 구상했다. 요즘 같은 상황에 학생의 얼굴 이미지가 있는 포스터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직접 촬영하여 포스터를 만들되, 학생의 몸 이미지는 그대로 두고 얼굴은 애니메이션화한 다른 이미지를 붙였다. 그렇게 제작되어 공개된 포스터를 본 촬영 당사자는 포스터의 모델이 나라고 말할 수 없으면서 모든 학교 구성원들이 자신의 몸을 객체화하여 보고 있는 상황에 당황스러워했다. 이것 역시 허위 합성물로 인한 고통이지 않은가.
앞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허위 영상물을 포함하여 디지털 성폭력의 핵심은 자율권과 인격권의 침해에 있다. 불법 합성물이 성 착취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은 그 영상이 성적(sexual)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적 맥락에서 자율권과 인격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시해 보이는 영상은 자본화되지만 허위 영상물 유포는 협박의 소재가 되는 것은 영상과 영상의 유포가 자율권과 인격권을 파괴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현행법에서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사진/영상의 촬영 및 합성은 ‘성적(sexual)’이냐 아니냐로 위법 여부가 판단된다. 여전히 「성폭력처벌법」 안에서만 동의 없는 사진/영상의 촬영 및 합성이 범죄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결과인 사진과 영상도 ‘음란물’의 지위를 가진다. 이러한 법체계는 사람들의 인식과도, 디지털화되어 있는 사회적 상황과도 괴리가 크다. 계속 사진/영상에 대한 합성이 성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문제의 핵심에서 미끄러진다. ‘딥페이크 중에 내 것도 있으면 어떻게 해’라는 걱정을 듣고 ‘너는 안 예뻐서 그런 데 안 올라가’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한 중학교 학생들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폭력이 성적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폭력이기에 문제라는 것을 한국의 반-성폭력운동은 부단히 외쳐 왔다. 그래서 노인 강간에 대하여, 남성 강간 피해자에 대하여, 군대 문화에 대하여 끊임없이 가시화시키는 운동을 실천해 왔다. 성폭력이 예쁘고 매력적인 대상을 ‘탐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젠더적 위계 권력관계하에서 행해지는 침탈과 지배, 강제적 전유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음란함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같은 구덩이로 빠져 버려서는 안 된다. 폭력이 섹슈얼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섹슈얼리티를 취약점으로 삼아 타인의 자율권과 인격권을 침탈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폭력의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덜 야한 인터넷 문화’ 혹은 ‘건전한 인터넷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 자율권과 인격권의 회복, 시민으로서 자기결정권의 보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정녕 교육인가
디지털 성폭력이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대두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9년 N번방 사태, 웰컴투비디오 손정우, 성 착취물을 업로드하고 팔면서 디지털 장의사 사업까지 겸한 위디스크 양진호, 인터넷에 만연한 여성혐오……. 그래서 최근의 사태에도 어차피 늘 털리는 사진이고 어차피 다 망해서 별 다를 게 없다는 반응을 보인 청소년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절한 대응 방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이소은·최순욱, 2023).
이것은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성평등교육을 지지하는 주장이든, 반대하는 주장이든 대부분의 논리가 학생들을 바르게 ‘키워 내지 못한다’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실패를 논한다. 뭐, 교육이 실패하는 건 한두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과연 교육의 실패인가? 아니면 현재의 권리의 박탈이자 침해인가.
일상적으로 교통안전교육이 필요하지만 교통사고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경찰과 보험사다. 사건 처리도 하기 전에 당사자를 붙잡고 다음부터는 운전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것은 물색없고 부적절한 행동일 뿐이다. 지금 사태가 그렇다. 피해자가 (모르는 사람만 모를 뿐)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경남의 경우 디지털 성범죄 특화 상담소에 접수된 디지털 성범죄 상담 건수가 2024년 한 해만 이미 2,000건이 넘었다. 피해자 지원도 그 상담소 한 군데에서만 100명 넘게 하고 있다. 경남의 다른 상담소들에서도 각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을 하고 있다. 교육청도 허위 영상물 사태 이후 지원하고 있는 피해자가 90명을 넘겼다는 소식을 11월에 들었다. 제도에 접근하여 지원을 받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10대 피해자가 경남만 약 200명 수준인 것이다. 전국적으로는 얼마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보통 성범죄는 신고율이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더구나 디지털 성폭력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늦게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럼 실제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이미 불타는 도로 위에 서 있다.
이 상황에서 성평등교육,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이다. 너무 단호하여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 필요한 게 정말 교육일까? 물론 교육은 항상 필요하다. 하지만 또 늘 만만한 게 교육이고 공개된 것이 학교 명단인 상황에서, 가·피해자 80%가 10대라는 이유로 교육부와 각 시·도교육청에 성 착취 허위 영상물 사태의 책무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온라인 서버를 압수 수색할 수 있는가? 유포된 영상을 삭제할 수 있는가? 지금처럼 불타는 도로 위에서 필요한 것은 사법 권력의 적극적 대처, 피해자를 위한 지자체와 정부의 전면적 지원이다. 우리는 사적 제재가 불법인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제도상에서 국민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조치는 국가만이 할 수 있고, 이는 정부와 입법 기관, 사법 기관의 책무다.
특히 이번 정부 들어 절반 이상 삭감된 피해자 지원 예산을 다시 만들어 내라고 의회를 들들 볶고 지자체를 두들겨야 하고, 경찰 수사 인력 증대를 위해 지역별로 시끄럽게 나서야 한다. 지금은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를 하러 가도 증거 없이는 접수를 받아 주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10대 피해 당사자들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텔레그램방에 스스로 잠입하는 위태위태한 상황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신고된 사건도 압수 수색 영장이 나오는 데 3~4주씩 걸리기 때문에 결국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디지털 성폭력은 다른 사람의 디지털 기기와 계정을 들여다보아야 하기에 공권력에 의한 수사가 아니면 검거가 불가능하다. 또, 복사와 유포가 쉽기에 보통 법적 대응은 3년 내외, 유포된 영상의 삭제 지원은 그 이상의 피해자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걸 지금 안 하고 있다. 활활 타고 있는 이 급한 불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김희경은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가족화, 가족주의의 문제를 짚으며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대응할 때 역시 가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을 때 항의하고 신고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이지, 우리가 모두 이웃의 아이를 함께 지키는 대가족 구성원의 마음자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폭행하는 가정폭력에 대한 해법으로 공동체의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아동폭력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어릴 뿐 온전한 인간인 ‘작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인권 유린을 없애는 게 우선이다.❸
2018년 스쿨미투 공론화 때도 같은 문제를 우린 이미 겪었다. 스쿨 미투의 피해자인 청소년들을 피해자 시민으로 대하지 않고 ‘아파하는 우리 아이들’로 바라보며,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이 더 강하게 작동했다. 2024년 현재도 많은 시·도교육청에서 허위 영상물 가·피해자에게 관계 회복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어느 폭력 사안에 대하여 경찰조사, 재판, 피해자 1차 회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가·피해자 관계 회복이 지원되는가. 한 학교에서는 관계 회복을 위한 써클 대화의 형식으로 ‘가해자의 심정 되어 보기’라는 질문도 제시되었다고 한다. 총체적 난국이지 않은가? 이것은 결국 10대의 피해는 온전한 피해로 존중되지 않고 어서 빨리 화해해서 친하게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잘 지내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는 억압의 재생산일 뿐 피해자의 회복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또한 여전히 성폭력 예방 교육의 맥락에서 ‘내 딸이라면’, ‘내 동생이라면’, ‘우리 가족이라면’이라는 가족주의적 비유가 동원된다. 내 가족이 아니라면 괜찮은 문제가 아니지 않나. 김희경의 말처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확대가족 혹은 모든 ‘어른’들의 성교육 강사화가 아니다.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단호한 대처다.
사태의 차별성
반복된 일련의 사태들이지만, 이전까지의 사태와 최근의 ‘딥페이크 사태’가 구별되는 지점들도 존재한다. 그 점을 짚어 보자.
여성혐오 폭력의 일상화
여성혐오 폭력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반면 앞서 발생했던 디지털 성폭력 사태들은 각각의 구별성을 가진다. 손정우의 사례는 한국의 법제가 얼마나 성폭력에 관대한지를 입증했고 양진호의 사례는 웹하드 등의 플랫폼을 통해 성 착취 동영상으로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학습시켰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례는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서 돈을 주고 구매를 해야 하는 허들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성 착취물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위장이 존재했다.
반면, N번방과 이번 ‘딥페이크 사태’는 특정 웹사이트나 공간을 통해서가 아닌, 텔레그램방을 통해 상시적이면서 공개적이고 집단적으로 성 착취물을 공유한 특징을 가진다. 성 착취 텔레그램방에 입장하려면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때 여러 개인정보를 요구받게 되므로 ‘텔레그램은 완전한 익명이라 괜찮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정폭력 경험률이 50%가 넘을 때도 숨어서 때렸고, 조선 시대에 노비 여성에 대한 강간도 물레방앗간이나 헛간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토록 여성혐오 폭력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폭력이 일상적으로 만연한 것은 역사상 처음 목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의 ‘상용화’, 그리고 관계의 전복
최근 사태의 가장 큰 특징은 허위 영상물 제작이 가족을 포함한 지인을 능욕하는 성 착취물의 형태로 주로 제작되었고 또한 이것이 재화로서 거래되었다는 데 있다.
우선, 이번 사태가 기존 디지털 성범죄 문제와 유사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점은 성 착취물을 제작하기 위한 기술로서의 딥페이크가 ‘상용화’된 단계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정부가 방치한 결과 이를 막기 위한 기술 개발이 늦춰지거나 상용화되지 않으면서 피해와 가해의 규모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이소은·최순욱, 2023).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이 기술적으로 지원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관계성이다. ‘딥페이크 텔레그램방’은 입장 시에 인증 절차로 여러 가지를 요구했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인 능욕’이었다. 텔레그램방 구성원 모두를 공범자로 만드는 절차이기도 했다. 지인 능욕으로 가입 인증을 하는 사례는 오래전부터 일베나 일부 커뮤니티에도 있었고 그때에도 교사나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 합성물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용자’라고 칭송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허위 영상물 사태에서는 이것이 일부 ‘용자’들의 행위가 아니라 다수가 되고 입장 조건이 된 것이다. 즉 이번 사태의 핵심 중 하나는 관계의 전복, 혹은 관계에 대한 폭력적 ‘찢어발김’, 친밀한 관계의 폭력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돌봄 노동이 가시화되었지만 저평가되고 비하되어 온 근래의 시간들이 배경일 것이다. 더불어 돌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돌봄(을 독박하거나 전담하고 있는) 여성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성장이자 자립이라고 여겨져 온 시간들이 우리에게 폭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친밀한 신뢰 관계를 뒤엎고, 별것 아닌 듯이 대우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이 ‘용자’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일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이다. 과거 전통적 남성상에서 여성 배우자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 ‘남성다움’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계성을 다시 전복시키거나 새로운 관계성을 정립해야 한다. 가·피해자가 남매간이라 공간 분리가 불가능해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 자신의 가해자인 아들의 입시를 지원해야 하는 양육자……. 이토록 폭력적인 관계성을 그냥 두고 폭력만 제거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전선은 학교에 있다
딥페이크 범죄 피의자의 80% 이상이 10대라는 통계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학교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학교가 딥페이크 성 착취의 격전지이자 최전선이기 때문이다.❹
우리 사회가 10대 대부분을 학교 제도 안에 가둬 놓고 있는 상황에서, 10대들은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학교공동체 안에서 구성하게 된다. 즉 가해도 피해도 10대끼리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성적 권리는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미 지니고 있고 그렇기에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존엄한 권리이자, 국가가 보장해야 할 기본권”이다(김윤정, 2021). 즉 성적 권리는 미래에 담보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과 발전은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고 신기술이 등장한 직후, 즉 신기술이 민주적 통제를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대상화하는 데 활용되었다(이소은·최순욱, 2023). 교육계에도 신기술은 민주적 통제 없이 도입되었고 학교에서 찍힌 사진, 교육 활동 중에 촬영된 영상, 졸업 앨범이 딥페이크의 재료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형식적인 예방 교육에 그치거나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고 안내장 정도 배부하고 있다. 어떠한 안전장치도 추가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 2025년에 디지털 성폭력 관련 예산을 추가로 배정한 시·도교육청, 지방자치단체는 내가 알기론 한 군데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성평등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성평등한 사람이 되어라’고 가르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모든 학습자는 ‘성적(sexual)’ 시민이다. 성적 시민권은 가부장적이고 이성애 중심의 사회질서 속에서 성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비-시민의 성적 권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미성숙하고 위험한 존재로 관리와 통제가 필요한, 자기결정권을 가지기 어려운 존재로 여기면서 그들의 성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친밀성에 기반한 폭력’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리게 된다(남미자 외, 2022). 따라서 학생들이 성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하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실천(향유)해 가도록 하는 시민교육으로서 성평등교육이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평등은 젠더 간의 평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교 성교육은 성(sexuality)을 인간으로서 보편적 권리에서부터 성 정치학까지, 다시 말해 성교육은 성적 시민권(sexual citizenship)을 중심 원리로 다루어야 한다. ‘성차별 하지 마! 성폭력 가해하지 마!’라는 예방적 교육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성적 권리를 보장받고 섹슈얼리티를 층위로 가지는 차별과 폭력, 부조리와 비합리를 삶의 장면 장면에서 발견해 낼 수 있는, 그리고 변화를 요구하고 지금 이 사태를 책임져야 할 대상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지금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의 절대 다수가 청소년인 것은 신기술에 먼저 적응하는 세대적 특성과 온라인 커뮤니티의 내화 정도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5년 뒤, 10년 뒤 우리 사회가 그대로라면 그때도 가해자의 절대 다수가 청소년일까? 혹은 가해자 연령층이 다양해질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반복해서 강조하건대, 성폭력은 개인의 경험‘만’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교육이 아니라 전 사회적인 변혁이다. 비정규직 임금 차별이 개개인의 적은 급여 하나하나의 총합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성폭력 그리고 성 착취 허위 영상물 피해도 일부 피해자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 속에서 아무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멸망 91일 째
나의 다이어리에 2024년 8월 26일, 중·고등학교와 대학들의 명단으로 텔레그램 딥페이크 ‘겹지인방’이 수백 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된 날은 “세계 멸망”이라고 적혀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우리는 다 망해 버렸다. 그러니까 지금은 멸망 이후를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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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4년 9월 3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개최한 ‘성평등·성교육 도서 검열에 맞서, 성평등 정치 전략 논의를 위한 운동사회 토론회’, 그리고 2024년 10월 24일 경북혁신연구소 공감에서 개최한 ‘청소년 디지털성범죄 증가,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발표한 내용을 종합하고 고민을 좀 더 보태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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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페이크 영상’이라는 말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페이크(fake)’라는 말이 사기나 농담, 장난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에 심각한 폭력을 가볍게 여기게 한다는 비판이 있고 모든 딥페이크 영상이 성 착취물이 아니기에 정확하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몰카’라는 말이 방송에서 ‘깜짝쇼’처럼 쓰였던 명칭이고 여전히 가벼운 의미로 쓰이기에 좀 더 명확하게 ‘불법 촬영’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 착취 불법 영상 합성물’, ‘성 착취 허위 영상물’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허위 영상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폭력이고 불법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허위라는 점에 핵심이 있으며, 법의 잣대가 모든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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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2022),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동아시아, 279쪽.
❹
이슬기(2024), “[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딥페이크’ 이후의 교육”, 〈여성신문〉.
참고 문헌
김윤정(2021), “여성청소년, 권리로서 성적 권리에 대해 말하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블로그, 2021년 3월 7일.
김희경(2022), 《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동아시아.
남미자·김자영·이희진·배정현(2022), 〈중고등학생의 페미니즘 백래시 실태와 대응방안〉, 경기도교육연구원.
이소은·최순욱(2023), 《딥페이크의 얼굴 – 기술이 만든 얼굴이 우리에게 묻는 것》, 스리체어스.
이슬기(2024), “[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딥페이크’ 이후의 교육”, 〈여성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