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호[특집] ‘교육 사법화’와 ‘교권 강화’를 넘어, 함께 책임지는 공동체로 (전세란)

202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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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아동학대법, 교사는 왜 불안한가


‘교육 사법화’와 ‘교권 강화’를 넘어, 함께 책임지는 공동체로




전세란
junseran@gmail.com
서울 초등 교사, 인권교육을 위한 교사모임 샘



지난 1월 초, 근무하는 학교에서 신년회 겸 정년 퇴임을 앞둔 교사의 퇴임식이 있었다.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전 교직원이 다 같이 모여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날의 주인공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는데, 운이 좋아 무사히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운이 좋다’라는 말은 여러 함의를 지닌 듯 보였다. 크고 복잡한 세대 차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년의 나이까지 아이들과 만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사안들을 무사히 넘겨 왔다는 것 등.


그날 한자리에 앉은 교사들은 각자 겪은, 혹은 주변 교사로부터 전해 들은 학교에서 ‘운이 좋지 않았던’ 상황을 화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한 교사가 어느 초등 교사가 정서적 학대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를 화젯거리로 꺼내었다. 교사들은 각자 분노하기도 하고, 속상해하기도 하고, 그 교사의 지도 방법에 대해 찝찝함을 표하기도 했다. 여러 말이 오가다 끝에는 ‘이제 수업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라며 자조하듯 선언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2022년에 전교조가 발표한 〈아동학대 사안 처리과정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신도 아동학대로 신고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초등 교사는 90%가 넘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급에선 줄 서기, 정리 정돈, 급식 지도 등 아동의 생활 습관 형성을 돕는 것이 교사의 큰 역할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교사의 엄한 태도에 아동이 느끼는 속상함, 억울함 등의 감정이 ‘정서적 학대’와 연결될까 봐 주춤하게 된다는 교사들이 많았다. 또 교사들은 지속적으로 수업을 방해하거나 갑작스러운 공격 행동을 드러내는 아이에게 강하게 대응했다가 그 방식이 문제의 소지가 될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교사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언행이 교실의 맥락과 관계가 삭제된 채 법적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특히 초등에서는 생활교육의 책임이 온전히 담임 교사에게 맡겨지기에, 법 앞에서도 자신의 언행은 정당한 교육 활동의 일환이었음을 철저히 그 개인이 홀로 증명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은 법적 고립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한다. ‘아동학대’, ‘교사’라고 검색하면 법무법인이나 변호사의 홍보용 블로그 글이 쏟아지고 많은 교사들은 소송 비용을 지원해 주는 보험 상품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학교에서의 사회적 갈등을 법의 판단 앞에 가져다 놓는 ‘교육의 사법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법률, 규정, 절차를 철저히 준수하는 것을 우선시하며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교육 활동만 하고자 마음먹는 교사들은 점점 늘어난다.


침해되는 ‘교권’은 무엇인가

이런 상황에서 많은 교사들은 교권이 추락한, 혹은 침해되고 있는 사태를 우려하며, 두려움 없이 자율적으로 교육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교권을 강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교실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에게 교사 개인이 직접 교육적 조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의 실질적인 보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교권 강화 대책의 일환으로 2022년 12월, 교사에게 생활 지도권을 부여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교권’을 이야기하는 뉘앙스가 저마다 다르다. 현행법에서도 ‘교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언급된 것이 전부일 뿐, 교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개념은 법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다.


먼저 ‘교권이 추락했다’라는 말을 곧 ‘교사의 권위가 떨어졌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위란 남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말하는데, 권력과 다른 것은 권위는 따르고자 하는 이의 ‘자발성’에 기인해 생기는 힘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교사라는 직위를 가진 것만으로도 전통적 권위가 인정되던 시절에는 교육을 빌미로 신체적 학대에 해당하는 체벌도, 학생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아동학대 수준의 언행들도 모두 ‘선생님이 다 너 잘되라고 그러’려니 용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권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아동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 주체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며 학교도 자연스레 달라졌다.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에 당연하게 따라오던 전통적인 권위가 줄었고 학생들은 자신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부당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여전히 전통적 권위를 권력처럼 누리던 일부 교사들은 이전에는 용인되었던 자신의 언행에 대한 학생이나 보호자로부터의 문제 제기에 당황해하며 교사의 권위, 즉 ‘교권’이 추락한 세태에 한탄한다. 그러나 ‘선생님’이기에 당연히 갖는 권위라는 의미의 교권이 사라진 것은 아동학대 신고와 관련하지 않더라도 이미 당연한 흐름이다. 교사 역시 상호 관계에서의 신뢰를 쌓아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권은 학생의 학습권 실현을 위해 교사에게 부여된 직무 권한이라는 설명이 더 정확하다. 즉, 국민의 기본권인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적 권리’에 가깝다. 이러한 직무 권한은 교사 개인에게 주어진 권리라기보다는 ‘교육 활동’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고, 따라서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 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에서도 ‘교권 침해 행위’가 아니라, ‘교육 활동 침해 행위’에 대한 조치를 명시하며 교육 활동을 보호한다.


그런데 ‘교육 활동 과정에서의 정당한 생활 지도’를 위한 권한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범위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교사들은 혼란을 줄이기 위해 개인 교사가 가지는 권한의 범위가 제시된 구체적인 매뉴얼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교실 안은 매우 다양하기에 상황과 맥락이 빠진 채 행위만 기술된 매뉴얼의 정립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 매뉴얼에 제시되지 않은 관계 맺음의 다양한 유형이 위축될 수 있다.


‘교권’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교권을 개인 교사가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으로 거대하게 인식하면 오히려 학교 현장의 소통은 단절되고 교사들의 각개 전투는 심해질 것이다.


초등에서 각 교실은 이미 서로 간섭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체벌을 하는 등 명백하게 아동학대로 판단할 수 있으면 모를까, 설령 다른 교실에서 자주 큰소리가 들리거나 거의 매일 교실 밖으로 쫓겨나는 아이가 있어도 동료 교사로서 문제의식을 내비치기 어렵다. 어쩌다 한 교사가 과도하게 훈육했음을 관리자가 인지해도 해당 교사의 ‘교권’을 침해할까 봐 개입을 머뭇거린다(물론 관리자가 정당한 교육 활동에 대해 간섭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이런 돼지우리에서 공부하는데 니들이 돼지지 사람이야!”라고 말한 기간제 교사에게 보호자 민원이 들어왔다고 전하자 그럼 안 나오겠다며 하루 만에 일방적으로 계약을 끝내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이미 아동학대 신고로 넘어가 버린 사안에는 말을 얹기가 더욱 어렵다. 신고한 내용만을 단편적으로 보면 경계를 넘나드는 교사의 행위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관련 조사 과정의 모든 법적인 절차를 교사 혼자 준비하는 것을 보면 걱정스럽지만, 신고 이전에 소통을 통해 ‘교권’을 아슬아슬하게 행사해 오던 방법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에 안타깝기도 하다.


보호자와의 관계에서 ‘교권’은 더욱 예민해진다. 상담-피드백-민원의 경계에서 보호자도, 교사도 조심스럽다. 수업 시간, 밤낮, 주말을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교육 내용을 포함한 교육 활동에 대해 과도하게 간섭하며 말 그대로 ‘교육 활동을 침해’하는 보호자도 있다. 그러나 자녀에 대한 부탁이나 교사의 언행 및 교육 활동과 관련한 문제 제기를 모두 ‘정당한 교육 활동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서적 학대를 명확히 밝히기 어렵듯, 교권 침해라고 판단하는 상황도 저마다 달라 모호하다. 교권을 교실에서 교사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인식한다면 실제로 자녀가 겪는 어려움을 나누고자 하는 보호자의 조심스런 우려마저도 과도한 간섭이자 교권을 침해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또 보호자의 간섭을 막기 위해 애초부터 소통을 최소화하다가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에도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켜 신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교권’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교사를 대상으로 한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 → 교권 침해’라는 납작한 구도는 오히려 각 교실마다 다른 촘촘한 상황을 가릴 뿐이다. 개인이 판단하고 조치할 수 있는 교권의 확장이라는 접근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동을 도울 수 없으며 조치와 관련한 보호자와의 대응도 교사의 몫으로 남겨둔다. 나와 믿을 만한 동료 교사들이 신고의 두려움 없이 학교에서의 다양한 역동을 기꺼이, 안전하게 마주하기 위해서는 교실을 지원하는 다른 관점과 방안이 필요하다.

행동 이면의 사정

무엇보다 교실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촘촘하게 들여다봐야 할 대상은 학생들이다. 내게도 몇 년 전, 소위 학교에서 유명하다는 학생을 학급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수업 중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분에 못 이겨 큰 소리를 지르며 교실 창문에 매달려 떨어지겠다고 하다가 말리는 친구들에게 씩씩대며 가위를 들고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치며 자해까지 시도했다. 눈이 시뻘게지며 스스로도 너무 답답해 보였는데 도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진정시키고 소통해야 할지 몰랐다. 보호자 상담 때 아이의 교실 모습을 얼핏 전했지만 아이가 좀 예민하다고만 하실 뿐 아이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나누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 더 엄하게 대하면 된다는 조언만 주고 갔다.


아직 담임 경력이 2년뿐인 6년 차 교사였던 나는 매일이 아슬아슬했다. 가만히 달래다가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고, 손목을 꽉 붙잡고 멈추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엄마한테 전화하겠다며 협박하기도 하고, 그렇게 화낼 거면 나가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비폭력 대화, 학습 코칭, 회복적 생활교육 등 잘해 보겠다고 배우고 있던 모든 방법들이 빗나가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돌발 상황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이든, 언어로든, ‘힘’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방어적으로 대하는 보호자와 소통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당시 학교엔 상담실도 없었고 아이는 복지 대상 아동도 아니라서 도움을 요청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옆 반 교사들이나 학년 부장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위로가 이어졌지만 다시 교실에서 분투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우연히 만난 교장은 시들어 가는 내 모습을 보고 교장, 교감이 담임, 보호자와 함께 자리를 마련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마뜩잖게 제안을 수락한 보호자는 따뜻한 차와 함께 부드럽게 아이에 대해 묻는 교장의 이끎에 천천히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와 아빠의 서로 다른 교육관 사이에서 아이가 느끼는 압박감과 혼란, 병원에서 어떤 검사들을 하였고 아이가 어떤 진단을 받아 무슨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알려 주셨다. 그제야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데만 급급해 보이지 않았던 아이의 입체적인 시간과 마음이 상상되기 시작했다. 그날 보호자는 아이가 익숙한 공간인 가정과 불안한 요소들이 많은 학교에서의 모습이 달라 자신도 잘 몰랐다며, 아이가 교실에서 위험한 행동을 할 때 교무실로 잠시 분리하는 등의 방법을 함께 정했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귀했다. 나는 아이의 삶을 좀 더 총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고, 아이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냥 불안하지 않았다. 만약 그 시간이 없이 아이의 공격적인 행동이 더 악화되었다면? 그 상황에서 내가 아이를 말리기 위해 더 센 조치를 취했다면? 아마 나도 아동학대 신고 혹은 교실에서의 사고를 트라우마로 삼고 있는 교사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덕분에 나는 다른 아이들을 볼 때도 아이들의 행동 이면의 사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함께 고민하고 책임지는 교육공동체

당시의 경험이 내게 힘이 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아이를 이해하고 맞춰 나가는 과정에 ‘학교가 함께 있다’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에 교무실에서 업무를 맡기 시작하며 가장 공을 들였던 것은 담임 교사를 혼자 두지 않고 한 아이를 함께 이해하고 돕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마침 교육청에서 기초 학력 지원을 위한 다중 지원팀을 구성하라는 예산이 내려왔고, 우리는 말 그대로 ‘다중 지원’을 할 수 있는 팀을 꾸렸다. 다행히 교장, 교감이 먼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지역 사회복지 전문가, 상담 교사, 보건 교사, 특수 교사까지 모여 한 달에 한 번 담임 교사가 의뢰한 학생, 그 교사와 학급을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깊이 논의했다.


교실에서 보면 ‘담임 교사와 급우들을 힘들게 하는 학생’이지만, 다양한 구성원이 각자 파악하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아이가 가정에서 겪는 심리적 어려움부터 인지적, 신경다양성의 특성까지 그 이면을 살펴 문제 행동에 대한 대처 방안도 세심하게 세우게 된다. 교사들은 점차 교실 문을 열고 나와 교실 속에서 막막했던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매시간 교실 바닥을 구르고 뛰어다니는 아이가 있어 힘들다는 교실에는 학급 지원 봉사자를 배치했고, 교사 몰래 공격적 행동을 드러내는 아이가 있는 교실에는 상담 교사와 관리자가 며칠간 직접 들어가 아이의 상태를 관찰하고 상담을 연계했다. 경계선 지능 등의 이유로 교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으면 예산을 어떻게든 마련해 협력 강사 시간을 늘렸고, 교사 개인 지원을 위한 컨설팅을 연결하기도 했다.


또한 보호자와의 소통도 다중 지원팀과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아동에게 필요한 조치나 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동의가 필수적이지만, 보호자가 그 제안을 불편해하거나 오히려 담임 교사의 지도 방법을 문제 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보호자의 성향과 담임 교사와의 관계에 따라 상담 교사나 지역의 사회복지 전문가가 대신 이야기하거나, 담임 교사가 교장, 교감과 동석하여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보호자의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이런 내용을 공유해 함께 신고하고 대응했다.


내 ‘운’이 좋지 않아도

사실 이런 일련의 방법들이 교사가 학생들과 맺는 관계의 모습을, 그리고 그 교실의 역동을 일순간에 드라마틱하게 바꿔 내지는 못한다. 또 교사, 학생, 보호자 개개인의 성향과 사정은 너무도 다르기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웠고, 에너지만 많이 들이고 도움이 되지 못한 때도 많았다. 그러나 적어도 교사가 교실 문을 열고 문제를 나누었다는 것, 교사와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학교가 함께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한 아이를 지원하는 과정에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며 책임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갈등 상황이 발생한다. 닫혀 있는 교실에서는 각 교사의 가치관과 역량에 따라 그 갈등을 다루어 낼 수밖에 없다. 다루기 힘든 아이에 대한 생활교육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보호자와의 소통도 오롯이 교사 개인이 감내해야 한다. 그에 따른 책임도 개인이 지게 되니 갈등을 환영하지 못하고 교실이 안전하기만을 바라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사히 보낸 한 해는 ‘운이 좋았던’ 시간이 된다.


그렇게 각자의 ‘운’에 맡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학교 사법화를 불러오고 또 거기에서 기인하는 공포는 각자도생하듯 법 앞에 ‘개인 대 개인’으로 서는 데서 온다. 교실의 위기를 차담에서 나누고 위로로 끝낼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드러내어 적절한 지원을 받으며 끊임없이 교실 관계를 재조정해 나가는 과정을 함께 만들 수 있는 공동체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❶ “저학년 아이 공개 망신 준 교사 징역형 집행유예…“아동학대””, 〈한겨레〉, 2022년 12월 26일.

❷ 특히 학교폭력을 다루는 과정에서 ‘교육의 사법화’는 눈에 띄게 드러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끼리의 일시적인 다툼마저도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학교폭력에 해당하는지를 밝히기 위해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선임되곤 한다는 소식은 이미 유명하다.

❸ 김기홍(2019), 〈학부모의 고소를 경험한 교사의 비판적 자문화기술지〉, 《교육사회학연구》, 29(2), 33~66쪽.

❹ “교사의 교육권,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나?”, 〈에듀인뉴스〉, 2019년 3월 19일.

❺ 어떤 경우에는 교육 활동 침해를 넘어 교사가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도 하는데, 건설 현장이나 공장에서 노동자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작업을 중지하듯 교육 현장에서 역시 교사 개인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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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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