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누구에게든 성교육이되 ④
삶의 경험이 공유되고
반영되는 트랜지션
- 의료 차별과 무지의 장벽을 넘어
최예훈
yhoon13@naver.com
산부인과 전문의, 색다른의원 원장,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에브리바디 플레져랩팀
들어가며
트랜지션[ref]젠더와 관련한 용어들의 변화 속도가 빠르고 맥락에 따라 다르게 사용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 글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먼저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태어날 때 외부 생식기 모양에 따라 정해져 출생 증명서에 기재되는 성별과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따라서 스스로 여성이나 남성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을 가리키는 논바이너리까지 포함한다. ‘트랜지션’은 지정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사회적, 의료적, 법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한편 트랜지션이라는 용어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가장 최근의 과학적인 근거들에 따르면 성별을 깔끔하게 이분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트랜지션은 2개의 성별을 전제한 용어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도 모순이라는 의견이 있고, 이에 동의한다. 다만 아직까지 이를 대체할 용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트랜지션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ref]을 ‘무엇이든 물어보셰어’의 주제 중 하나로 다루자고 결정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주제보다도 방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소위 트랜스젠더라 불리는 집단이 겪는 의료 차별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며, 가족 구성, 주거, 교육, 노동 등 다양한 권리의 차원에서 나쁜 상황이 악순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랜스젠더의 의료 접근성을 논의할 때에는 성별 이분법 사회에서 이들이 겪게 되는 낙인과 가족, 학교, 직장을 비롯한 일상 공간에서의 폭력, 직업적 제한으로 인한 계급 문제, 그리고 이러한 체계적인 폭력이 가능해지는 구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의료 차별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글이 특정 집단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전시하여 온정주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연대의 힘은 서로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중층으로 구조화된 차별을 조직하는 데 누구도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길러진다.
타인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성소수자 관련 서적을 읽었다면, 주로 맨 앞이나 뒤에 몇 페이지에 걸쳐 친절하게 정리해 놓은 젠더 정체성 관련 용어 해설을 본 적 있을 것이다. 트랜스젠더와 다른 취약성을 가진 집단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말하기에 앞서 젠더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다. 본격적인 문제를 꺼내기도 전에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논의하는 자체가 커다란 진입 장벽이 된다. 하지만 젠더에 관해서라면 심지어 트랜지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논의된 적이 없다. 스스로를 복잡한 젠더 용어로 정체화하고 나서야 트랜지션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체화와 별개로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필요를 먼저 느끼는 사람도 있고, 법적 성별 정정 없이도 이미 오랜 기간 사회적 트랜지션을 통해 주변인들의 지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젠더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트랜지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젠더에 대한 ‘느낌적인 느낌’이 사회적 규범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이미 많다는 의미일 테다. 트랜스젠더에 관한 의학적 진단 기준에도 등장하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위화감, 성별 불쾌감)’라는 말이 있다. 젠더 디스포리아는 출생 시 지정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된 성별 규범에 자신의 느낌이 조화롭지 않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흔히 통용되는 정의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트랜지션 편의 이야기 손님으로 참여한 정글(별칭)은 젠더 디스포리아의 범위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젠더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시스젠더 레즈비언 부치가 유방에 대한 위화감을 느껴 유방 제거술을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얼굴은 젠더를 인식하는 중요한 신체 부위인데, 안면장애가 있는 사람의 수술에 대한 욕망은 젠더 디스포리아로 설명할 수 없을까. ‘디스포리아를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이나 고통이라 했을 때 어디까지가 젠더 디스포리아이고 어디부터가 단순한 디스포리아인지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약제를 사용하는 시스젠더의 갱년기 호르몬 치료와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치료는 디스포리아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젠더를 인식하게 되었는지 돌아보자. ‘남자야, 여자야?’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악의 없는 질문은 어릴 때부터 젠더가 한눈에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머리 길이, 목소리와 같은 외양뿐 아니라 옷차림, 말투, 걸음걸이 등의 특징을 젠더와 연결 짓는다. 더구나 외부 성기는 결정적으로 특정 젠더를 가리키는 언어와 결합하는데, 어릴 때부터 재미로도 만지면 안 되는 금기의 장소, 혹은 자랑스럽거나 반대로 숨기고 부끄러운 것으로 교육받는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경우 처벌이 뒤따른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학습한다. 신체 일부에 자부심과 수치심 등 다양한 감정과 느낌이 몸에 각인되면서 젠더는 당위성을 가진 규범으로 작동한다. 더 자라면서 가슴이 나오기 시작할 때,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출혈이 시작되었을 때, 목소리가 굵어질 때, 외부 성기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생리적으로 반응할 때 젠더를 확실하게 자각한다. 여기에 더해 섹슈얼리티의 위계, 남성 중심주의, 가부장 체제하의 젠더 규범은 신체의 경험을 비틀고 억압한다. 예를 들어 질과 음경의 접촉은 단순한 물리적인 접촉 이상이다. 접촉의 사회적 의미는 성 역할과 규범, 임신과 출산, 생명의 성스러움, 자본주의적 생산성, 남성 중심의 폭력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복잡한 사회 구조적인 맥락 속에서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차별과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젠더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혼란은 단순히 생물학적 요소만으로 젠더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렇다면 타인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앞서 우리는 ‘월경 건강’ 주제를 통해서 다양한 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개개인마다 경험하는 월경에 대한 수많은 감정과 동반하는 증상은 자궁과 난소가 있는 신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월경에 대해 어떤 불쾌한 느낌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 젠더 디스포리아는 아닐 것이다. 월경을 나의 경험과 분리시키고 싶은 욕망은 극심한 통증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고, 월경에 부착된 젠더와 결합한 부정적 의미 때문일 수도 있고, 두 가지가 모두 섞여서 생길 수도 있다. 신체는 세계를 인식하는 장소이다. 다른 신체를 가진 우리는 타인이 느끼는 젠더 디스포리아를 오직 상상으로만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신체가 젠더로 식별되는 세계에서 젠더 디스포리아를 깔끔하게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찍이 자신의 젠더를 의심하고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여성이라고 느꼈다’, ‘트랜스여성이 아니라 그냥 여성이다’, ‘여성도 남성도 나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젠더에 대한 바로 그 ‘느낌적인 느낌’이 젠더 디스포리아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설명은 있을 수 없다. 젠더를 경험하는 다양한 차원과 방식 때문에 결국 ‘우리 모두가 트랜스’일 수 있다는 정글의 말은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동안 자신의 젠더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여겨 왔다면 더더욱 질문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부터 어떻게 나의 젠더를 인식하게 되었는가? 나는 나의 젠더를 의식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젠더를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를 나의 젠더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가? 나의 젠더가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와 삶을 강제하는 세상에서 살기 원하는가? 나의 젠더로 나의 가족 관계, 주거, 교육, 노동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조건이 모두 바뀐다면, 그걸 감내할 용기가 있는가?
트랜지션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위하여
처음 누군가를 만나면 젠더 정체성을 밝힐 필요 없이 바로 대화를 시작하고, 화장을 하고 싶으면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싶은 날이면 치마를 입고, 생리 현상이 생기면 화장실을 가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아프면 병원에 가는 일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젠더로 타인에 의해 한순간에 파악되어 내 삶이 멋대로 전제되고 생략된다면 어떨까? 그런 경우 일상은 긴장 상태의 연속이면서, 시선의 폭력에 직면해야 하고, 삶이 곧 투쟁이고 저항이 된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기 전에 미리 젠더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방을 속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속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후에 복잡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젠더가 이들에게만 특별히 중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젠더로 읽히고 파악되어 모든 관계 형성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트랜지션은 지정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으로 살아가고자 의학적, 사회적, 법적으로 변화하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법적 성별, 주민번호를 변경하는 것은 물론 옷이나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이름이나 호칭을 바꾸는 것도 포함된다. 당연히 트랜스젠더 모두가 의료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데, 어떤 사람은 옷이나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 디스포리아가 완화되거나 본인이 원하는 젠더로 인정되기도 한다. 그중 의료적 트랜지션은 호르몬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과적 방법과 수술 등의 개입을 말한다. 의료적 트랜지션으로 인한 신체 및 감정의 변화, 사회적 경험은 트랜지션을 시작한 나이, 가까운 이들의 지지, 사회 경제적 기반 등 여러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신나는 경험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외롭고 아픈 경험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트랜지션 이전의 삶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길 바라며, 누군가는 트랜지션 이전의 삶을 지우고 싶어 한다.
트랜지션을 경험한 많은 이들이 트랜지션은 종착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순간순간, 그저 삶의 연속이라고 한다. 트랜지션이 과정이라면, 각자가 자신의 젠더로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는 지점을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글의 말처럼 트랜지션의 목적이 있다면,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변 사람들과 이 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녀의 커밍아웃, 배우자의 커밍아웃, 친구의 커밍아웃이 당사자에 대한 이해를 넘어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삶을 바꾸는 경험이 되는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ref]참고할 만한 책으로 [성소수자부모모임(2018), 《커밍아웃 스토리》, 한티재]가 있다.[/ref]
의료적 트랜지션을 수행하는 의료계의 태도 변화도 트랜지션을 경험한 사람들과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내부의 적극적인 투쟁과 노력의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늘날 트랜스젠더라 불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 성별을 둘로 나누려는 사회 문화적인 작동과 제도의 정착은 근대에 와서 이루어진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의학은 신의 영역을 넘어선 과학이라는 영역을 등에 업고 인간과 생명을 정의하고, 개인으로 개별화하고, 인종, 성 등으로 범주화하는 거대한 지식 체계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현재 여성/남성, 정상/비정상, 인간/비인간 구분 짓기에 대한 집착은 이미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트랜스젠더의 비병리화는 의학계 내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공고히 선언하고 있는 바이다.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ICD-11)에서는 기존의 ‘성전환증’, ‘성주체성 장애’를 폐기하고 ‘젠더 불일치(Gender incongruence)’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트랜스젠더를 정신장애 범주에서 제외하였다.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에서도 당사자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정신 건강 전문가의 평가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젠더 정체성에만 초점을 맞춘 상담이 성별 확정 치료(gender affirming care)의 전제 조건은 아니며, 당사자의 살아 있는 경험과 자기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ref]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 한정연 외 옮김(2023),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WPATH SoC8)〉[/ref]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들로부터 축적된 지식을 의료 현실에 반영하고, 진료 지침으로 만들어 다시 적용하는 셈이다.
의료적 트랜지션의 현실과 비전
이에 비해 법과 제도적 현실은 훨씬 뒤처져 있다. 얼마전 국가인권위원회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트랜스젠더의 입원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불수용한 일이 있었다.[ref]“복지부, 트랜스젠더 의료 서비스 개선 의지 부족”, 〈의학신문〉, 2023년 11월 28일.[/ref] 상식적으로 병원 이용은 성별과 무관한 모든 환자의 권리로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보건 당국이 대한병원협회에 안내한 내용은 법적 성별 변경 허가 기준으로 지방 법원들이 인용하는 것이었다. 현재 국내에는 성별 변경을 위한 법률이 없고, 2006년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성별 변경을 허가하는 판례가 나온 이후,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라는 대법원 내부의 가이드라인만 있다. 당시 대법원은 세미나 및 비공개 심문을 통해 의료계의 입장을 참고하였는데,[ref]홍성수 외(2021),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95쪽.[/ref] 이에 따르면 성별 변경을 위해 “성전환수술을 받아 외부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었는지 여부”와 “생식능력을 상실하였고, 향후 종전의 성으로 재전환할 개연성이 없거나 극히 희박한지 여부”를 조사받아야 한다. 2020년에 와서 이 규정들이 조사 사항이 아니라 참고 사항으로 개정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법원에서 성별 정정 허가 여부 기준으로 손쉽게 사용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수술이 강제되고 있는 현실이다.[ref]2013년 유엔 고문특별조사위원 보고서는 트랜스젠더의 생식 능력 상실을 요구하는 것은 ‘고문’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ref]
이처럼 의료계의 이해 부족은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적 차별로도 연결된다. 무엇보다도 의료 서비스 제공의 측면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의료인들의 이해 수준은 매우 낮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들 역시 의료진의 편견과 차별적인 태도를 경험하거나 치료를 거절당하기 일쑤이다.[ref]2014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장서연 외)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의료 기관을 이용한 적이 있는 트랜스젠더 35.9%가 의료진에게 부적절한 질문이나 비난을 받는 등 의료 기관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하였다.[/ref] 이는 의료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고 표준화되고 안전한 의료 환경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 결과 아예 의료 기관 방문 자체를 기피하고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한편 트랜스젠더의 특수한 의료적 필요 때문에 일부 의료 서비스는 필히 제공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특히 트랜스젠더 정신 건강은 여러 자료에서 그 심각성이 보고되었는데, 일반인에 비해 트랜스젠더 인구의 우울 증상은 6~10배 높았으며, 자살 생각은 7~19배, 자살 시도는 10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ref]이승현 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2022), 《차별 없는 병원 - 진료실을 바꿀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 휴머니스트, 99쪽.[/ref]
성별 이분법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제도나 법은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삶을 비가시화하는 정책적 한계를 가진다.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트랜지션 편의 이야기 손님 김결희 성형외과 전문의는 의료적 트랜지션의 접근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 성별 확정 치료의 가시화와 다학제적 접근이 중요하다고 본다. 본보기가 될 만한 해외 클리닉의 경우 성확정수술을 위해 의료인뿐만 아니라 사회사업팀, 심리상담사, 커뮤니티 위원회 등과 같은 병원 내부 시스템이 함께 연동되어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공의 교육이 가능한 종합 병원 혹은 대학 병원 내에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상담 역량을 가진 의료진과 사회사업팀을 주축으로 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다학제적 팀의 구성 이외에도 수년간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수술의 지속성을 위해 더 많은 임상 의사의 양성 과정이 필수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볼 때 성확정수술이 건강보험으로 보장되어도 수술 가능한 의사 수의 부족으로 몇 년의 긴 대기 기간을 가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성별 확정 치료에 드는 비용 중에서 성확정수술은 몇천만 원대 정도로 가장 높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안면 수술, 지방 이식, 보형물 삽입과 같은 신체 윤곽 시술, 제모 등 여러 젠더 표현을 위한 의료적 트랜지션에도 많은 비용이 든다. 현재 모두 미용 수술처럼 취급되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충분한 재원이 없는 경우 수년간 여러 개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으거나 하루라도 빨리 목표 금액을 벌기 위해 쉬는 날도 없이 일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음주, 흡연, 폭식과 같이 건강을 해치는 생활 습관이 몸에 배기도 하고, 그 기간 동안 자신다운 삶을 포기하거나 지연시킨다. 성확정수술은 미용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결국 젠더가 자신의 정체성 중에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참여자들은 현재 트랜지션에 대한 의료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고 신뢰성 있는 자료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질문들이 오갔다. 정책적 부재와 의료인들의 이해 부족 속에서 정보 접근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트랜지션에 대한 대부분의 관련 정보는 “인터넷 검색 엔진(구글, 네이버 등)에서 검색”하거나 “트랜스젠더 관련 웹 페이지 또는 인터넷 카페”, “SNS(페이스북, 트위터 등)”를 통해서 얻고 있다.[ref]이승현 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2022), 앞의 책, 97쪽.[/ref] 최근에는 커밍아웃한 당사자의 회고록이나 저서들이 출판되어 더 생생한 경험으로 트랜지션을 이해할 수도 있는데, 개인에 따라 그 필요가 모두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의료 서비스처럼 트랜지션도 정부나 학회의 표준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쉬운 경로를 통해 양질의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최근 여러 임상 의사들과 의료진이 모여 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그동안 해외 통계나 지식에만 의존해 왔던 것에 한계를 느끼고 국내 임상 자료의 축적과 관련 연구를 하는 중이다.[ref]국내에서 성소수자 진료를 하는 임상 의사들의 모임으로 2020년에 시작한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KALM)는 2025년 1월 18일 발족식을 가졌다. 또한 국내 최초로 8개 의료 기관에서 성별 확정 치료를 받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KITE 연구(한국 트랜스젠더·성별 다양성이 있는 사람 코호트 구축 및 건강 추적관찰 연구)를 2024년부터 진행 중이다.[/ref]
나가며
트랜스젠더의 의료 접근성 문제에 접근할 때 사람이 아닌 의료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면 임신 중지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사회적 낙인과 의료진의 편견으로 갈 수 있는 병원이 없거나 거절당하고, 적절한 의료 서비스 제공을 받기 위해 장거리 이동을 감수해야 한다. 건강보험이 보장되지 않아서 높은 비용이 요구되고, 양질의 표준적인 서비스를 받기 어려우며, 결국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해외에서 약을 구입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는 특정한 사람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아니라 의료적 필요를 권리로서 보장하지 않는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할 때 병원을 안전하게 갈 권리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이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트랜스젠더 의료 차별의 실태를 계속해서 알리는 이유는 특정 집단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현실을 바꾸기 위함이다. 젠더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배워야 한다. 나이나 겉모습만으로 어떤 사람의 경험치를 함부로 가늠하지 않는 것처럼 누군가를 특정한 젠더로 전제하지 않는 것도 의식적이고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 태어나자마자 특정한 성별로 호명되는 그 순간에 의사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성별을 통해 비로소 식별 가능한 인간으로서 정상성을 부여받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젠더를 인식하는 동시에 젠더만으로 우리를 규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젠더가 가족, 주거, 교육, 노동, 의료 환경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결정하는 세상은 이상하다. 우리는 서로의 젠더를 인정하면서도 서로의 성적 권리와 즐거움을 존중할 수 있다. 젠더를 이유로 의료적 필요를 무시하는 사회에 함께 저항할 수 있다. 노동, 교육, 건강 전반에 걸쳐 취약성을 구조화하는 사회적 자원을 정의롭게 재분배해야 한다.
나는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가? 이 세상에 차별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는가? 내가 그런 존재라고 느끼거나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참고할 수 있는 트랜지션 관련 한국어 자료
● 강동성심병원 LGBTQ+센터 사이트 lgbtqplus.kr ● 김결희 외(2021), 〈트랜스젠더 성확정수술을 위한 의료정보 가이드북〉, 성소수자부모모임. www.pflagkorea.org/books/2394 ● 색다른의원 네이버 블로그 자료실 blog.naver.com/sdrclinic22 ●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 한정연 외 옮김(2023),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WPATH SoC8)〉. (한글판 포함) wpath.org/publications/soc8/translation ● 이승현 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2022), 《차별 없는 병원 - 진료실을 바꿀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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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누구에게든 성교육이되 ④
삶의 경험이 공유되고
반영되는 트랜지션
- 의료 차별과 무지의 장벽을 넘어
최예훈
yhoon13@naver.com
산부인과 전문의, 색다른의원 원장,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에브리바디 플레져랩팀
들어가며
트랜지션[ref]젠더와 관련한 용어들의 변화 속도가 빠르고 맥락에 따라 다르게 사용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 글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먼저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태어날 때 외부 생식기 모양에 따라 정해져 출생 증명서에 기재되는 성별과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따라서 스스로 여성이나 남성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을 가리키는 논바이너리까지 포함한다. ‘트랜지션’은 지정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사회적, 의료적, 법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한편 트랜지션이라는 용어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가장 최근의 과학적인 근거들에 따르면 성별을 깔끔하게 이분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트랜지션은 2개의 성별을 전제한 용어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도 모순이라는 의견이 있고, 이에 동의한다. 다만 아직까지 이를 대체할 용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트랜지션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ref]을 ‘무엇이든 물어보셰어’의 주제 중 하나로 다루자고 결정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주제보다도 방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소위 트랜스젠더라 불리는 집단이 겪는 의료 차별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며, 가족 구성, 주거, 교육, 노동 등 다양한 권리의 차원에서 나쁜 상황이 악순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랜스젠더의 의료 접근성을 논의할 때에는 성별 이분법 사회에서 이들이 겪게 되는 낙인과 가족, 학교, 직장을 비롯한 일상 공간에서의 폭력, 직업적 제한으로 인한 계급 문제, 그리고 이러한 체계적인 폭력이 가능해지는 구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의료 차별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글이 특정 집단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전시하여 온정주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연대의 힘은 서로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중층으로 구조화된 차별을 조직하는 데 누구도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길러진다.
타인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성소수자 관련 서적을 읽었다면, 주로 맨 앞이나 뒤에 몇 페이지에 걸쳐 친절하게 정리해 놓은 젠더 정체성 관련 용어 해설을 본 적 있을 것이다. 트랜스젠더와 다른 취약성을 가진 집단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말하기에 앞서 젠더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다. 본격적인 문제를 꺼내기도 전에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논의하는 자체가 커다란 진입 장벽이 된다. 하지만 젠더에 관해서라면 심지어 트랜지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논의된 적이 없다. 스스로를 복잡한 젠더 용어로 정체화하고 나서야 트랜지션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체화와 별개로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필요를 먼저 느끼는 사람도 있고, 법적 성별 정정 없이도 이미 오랜 기간 사회적 트랜지션을 통해 주변인들의 지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젠더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트랜지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젠더에 대한 ‘느낌적인 느낌’이 사회적 규범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이미 많다는 의미일 테다. 트랜스젠더에 관한 의학적 진단 기준에도 등장하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위화감, 성별 불쾌감)’라는 말이 있다. 젠더 디스포리아는 출생 시 지정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된 성별 규범에 자신의 느낌이 조화롭지 않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흔히 통용되는 정의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트랜지션 편의 이야기 손님으로 참여한 정글(별칭)은 젠더 디스포리아의 범위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젠더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시스젠더 레즈비언 부치가 유방에 대한 위화감을 느껴 유방 제거술을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얼굴은 젠더를 인식하는 중요한 신체 부위인데, 안면장애가 있는 사람의 수술에 대한 욕망은 젠더 디스포리아로 설명할 수 없을까. ‘디스포리아를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이나 고통이라 했을 때 어디까지가 젠더 디스포리아이고 어디부터가 단순한 디스포리아인지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약제를 사용하는 시스젠더의 갱년기 호르몬 치료와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치료는 디스포리아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젠더를 인식하게 되었는지 돌아보자. ‘남자야, 여자야?’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악의 없는 질문은 어릴 때부터 젠더가 한눈에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머리 길이, 목소리와 같은 외양뿐 아니라 옷차림, 말투, 걸음걸이 등의 특징을 젠더와 연결 짓는다. 더구나 외부 성기는 결정적으로 특정 젠더를 가리키는 언어와 결합하는데, 어릴 때부터 재미로도 만지면 안 되는 금기의 장소, 혹은 자랑스럽거나 반대로 숨기고 부끄러운 것으로 교육받는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경우 처벌이 뒤따른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학습한다. 신체 일부에 자부심과 수치심 등 다양한 감정과 느낌이 몸에 각인되면서 젠더는 당위성을 가진 규범으로 작동한다. 더 자라면서 가슴이 나오기 시작할 때,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출혈이 시작되었을 때, 목소리가 굵어질 때, 외부 성기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생리적으로 반응할 때 젠더를 확실하게 자각한다. 여기에 더해 섹슈얼리티의 위계, 남성 중심주의, 가부장 체제하의 젠더 규범은 신체의 경험을 비틀고 억압한다. 예를 들어 질과 음경의 접촉은 단순한 물리적인 접촉 이상이다. 접촉의 사회적 의미는 성 역할과 규범, 임신과 출산, 생명의 성스러움, 자본주의적 생산성, 남성 중심의 폭력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복잡한 사회 구조적인 맥락 속에서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차별과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젠더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혼란은 단순히 생물학적 요소만으로 젠더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렇다면 타인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앞서 우리는 ‘월경 건강’ 주제를 통해서 다양한 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개개인마다 경험하는 월경에 대한 수많은 감정과 동반하는 증상은 자궁과 난소가 있는 신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월경에 대해 어떤 불쾌한 느낌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 젠더 디스포리아는 아닐 것이다. 월경을 나의 경험과 분리시키고 싶은 욕망은 극심한 통증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고, 월경에 부착된 젠더와 결합한 부정적 의미 때문일 수도 있고, 두 가지가 모두 섞여서 생길 수도 있다. 신체는 세계를 인식하는 장소이다. 다른 신체를 가진 우리는 타인이 느끼는 젠더 디스포리아를 오직 상상으로만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신체가 젠더로 식별되는 세계에서 젠더 디스포리아를 깔끔하게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찍이 자신의 젠더를 의심하고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여성이라고 느꼈다’, ‘트랜스여성이 아니라 그냥 여성이다’, ‘여성도 남성도 나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젠더에 대한 바로 그 ‘느낌적인 느낌’이 젠더 디스포리아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설명은 있을 수 없다. 젠더를 경험하는 다양한 차원과 방식 때문에 결국 ‘우리 모두가 트랜스’일 수 있다는 정글의 말은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동안 자신의 젠더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여겨 왔다면 더더욱 질문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부터 어떻게 나의 젠더를 인식하게 되었는가? 나는 나의 젠더를 의식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젠더를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를 나의 젠더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가? 나의 젠더가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와 삶을 강제하는 세상에서 살기 원하는가? 나의 젠더로 나의 가족 관계, 주거, 교육, 노동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조건이 모두 바뀐다면, 그걸 감내할 용기가 있는가?
트랜지션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위하여
처음 누군가를 만나면 젠더 정체성을 밝힐 필요 없이 바로 대화를 시작하고, 화장을 하고 싶으면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싶은 날이면 치마를 입고, 생리 현상이 생기면 화장실을 가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아프면 병원에 가는 일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젠더로 타인에 의해 한순간에 파악되어 내 삶이 멋대로 전제되고 생략된다면 어떨까? 그런 경우 일상은 긴장 상태의 연속이면서, 시선의 폭력에 직면해야 하고, 삶이 곧 투쟁이고 저항이 된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기 전에 미리 젠더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방을 속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속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후에 복잡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젠더가 이들에게만 특별히 중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젠더로 읽히고 파악되어 모든 관계 형성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트랜지션은 지정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으로 살아가고자 의학적, 사회적, 법적으로 변화하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법적 성별, 주민번호를 변경하는 것은 물론 옷이나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이름이나 호칭을 바꾸는 것도 포함된다. 당연히 트랜스젠더 모두가 의료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데, 어떤 사람은 옷이나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 디스포리아가 완화되거나 본인이 원하는 젠더로 인정되기도 한다. 그중 의료적 트랜지션은 호르몬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과적 방법과 수술 등의 개입을 말한다. 의료적 트랜지션으로 인한 신체 및 감정의 변화, 사회적 경험은 트랜지션을 시작한 나이, 가까운 이들의 지지, 사회 경제적 기반 등 여러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신나는 경험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외롭고 아픈 경험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트랜지션 이전의 삶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길 바라며, 누군가는 트랜지션 이전의 삶을 지우고 싶어 한다.
트랜지션을 경험한 많은 이들이 트랜지션은 종착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순간순간, 그저 삶의 연속이라고 한다. 트랜지션이 과정이라면, 각자가 자신의 젠더로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는 지점을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글의 말처럼 트랜지션의 목적이 있다면,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변 사람들과 이 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녀의 커밍아웃, 배우자의 커밍아웃, 친구의 커밍아웃이 당사자에 대한 이해를 넘어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삶을 바꾸는 경험이 되는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ref]참고할 만한 책으로 [성소수자부모모임(2018), 《커밍아웃 스토리》, 한티재]가 있다.[/ref]
의료적 트랜지션을 수행하는 의료계의 태도 변화도 트랜지션을 경험한 사람들과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내부의 적극적인 투쟁과 노력의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늘날 트랜스젠더라 불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 성별을 둘로 나누려는 사회 문화적인 작동과 제도의 정착은 근대에 와서 이루어진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의학은 신의 영역을 넘어선 과학이라는 영역을 등에 업고 인간과 생명을 정의하고, 개인으로 개별화하고, 인종, 성 등으로 범주화하는 거대한 지식 체계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현재 여성/남성, 정상/비정상, 인간/비인간 구분 짓기에 대한 집착은 이미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트랜스젠더의 비병리화는 의학계 내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공고히 선언하고 있는 바이다.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ICD-11)에서는 기존의 ‘성전환증’, ‘성주체성 장애’를 폐기하고 ‘젠더 불일치(Gender incongruence)’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트랜스젠더를 정신장애 범주에서 제외하였다.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에서도 당사자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정신 건강 전문가의 평가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젠더 정체성에만 초점을 맞춘 상담이 성별 확정 치료(gender affirming care)의 전제 조건은 아니며, 당사자의 살아 있는 경험과 자기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ref]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 한정연 외 옮김(2023),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WPATH SoC8)〉[/ref]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들로부터 축적된 지식을 의료 현실에 반영하고, 진료 지침으로 만들어 다시 적용하는 셈이다.
의료적 트랜지션의 현실과 비전
이에 비해 법과 제도적 현실은 훨씬 뒤처져 있다. 얼마전 국가인권위원회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트랜스젠더의 입원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불수용한 일이 있었다.[ref]“복지부, 트랜스젠더 의료 서비스 개선 의지 부족”, 〈의학신문〉, 2023년 11월 28일.[/ref] 상식적으로 병원 이용은 성별과 무관한 모든 환자의 권리로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보건 당국이 대한병원협회에 안내한 내용은 법적 성별 변경 허가 기준으로 지방 법원들이 인용하는 것이었다. 현재 국내에는 성별 변경을 위한 법률이 없고, 2006년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성별 변경을 허가하는 판례가 나온 이후,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라는 대법원 내부의 가이드라인만 있다. 당시 대법원은 세미나 및 비공개 심문을 통해 의료계의 입장을 참고하였는데,[ref]홍성수 외(2021),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95쪽.[/ref] 이에 따르면 성별 변경을 위해 “성전환수술을 받아 외부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었는지 여부”와 “생식능력을 상실하였고, 향후 종전의 성으로 재전환할 개연성이 없거나 극히 희박한지 여부”를 조사받아야 한다. 2020년에 와서 이 규정들이 조사 사항이 아니라 참고 사항으로 개정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법원에서 성별 정정 허가 여부 기준으로 손쉽게 사용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수술이 강제되고 있는 현실이다.[ref]2013년 유엔 고문특별조사위원 보고서는 트랜스젠더의 생식 능력 상실을 요구하는 것은 ‘고문’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ref]
이처럼 의료계의 이해 부족은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적 차별로도 연결된다. 무엇보다도 의료 서비스 제공의 측면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의료인들의 이해 수준은 매우 낮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들 역시 의료진의 편견과 차별적인 태도를 경험하거나 치료를 거절당하기 일쑤이다.[ref]2014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장서연 외)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의료 기관을 이용한 적이 있는 트랜스젠더 35.9%가 의료진에게 부적절한 질문이나 비난을 받는 등 의료 기관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하였다.[/ref] 이는 의료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고 표준화되고 안전한 의료 환경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 결과 아예 의료 기관 방문 자체를 기피하고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한편 트랜스젠더의 특수한 의료적 필요 때문에 일부 의료 서비스는 필히 제공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특히 트랜스젠더 정신 건강은 여러 자료에서 그 심각성이 보고되었는데, 일반인에 비해 트랜스젠더 인구의 우울 증상은 6~10배 높았으며, 자살 생각은 7~19배, 자살 시도는 10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ref]이승현 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2022), 《차별 없는 병원 - 진료실을 바꿀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 휴머니스트, 99쪽.[/ref]
성별 이분법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제도나 법은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삶을 비가시화하는 정책적 한계를 가진다.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트랜지션 편의 이야기 손님 김결희 성형외과 전문의는 의료적 트랜지션의 접근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 성별 확정 치료의 가시화와 다학제적 접근이 중요하다고 본다. 본보기가 될 만한 해외 클리닉의 경우 성확정수술을 위해 의료인뿐만 아니라 사회사업팀, 심리상담사, 커뮤니티 위원회 등과 같은 병원 내부 시스템이 함께 연동되어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공의 교육이 가능한 종합 병원 혹은 대학 병원 내에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상담 역량을 가진 의료진과 사회사업팀을 주축으로 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다학제적 팀의 구성 이외에도 수년간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수술의 지속성을 위해 더 많은 임상 의사의 양성 과정이 필수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볼 때 성확정수술이 건강보험으로 보장되어도 수술 가능한 의사 수의 부족으로 몇 년의 긴 대기 기간을 가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성별 확정 치료에 드는 비용 중에서 성확정수술은 몇천만 원대 정도로 가장 높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안면 수술, 지방 이식, 보형물 삽입과 같은 신체 윤곽 시술, 제모 등 여러 젠더 표현을 위한 의료적 트랜지션에도 많은 비용이 든다. 현재 모두 미용 수술처럼 취급되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충분한 재원이 없는 경우 수년간 여러 개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으거나 하루라도 빨리 목표 금액을 벌기 위해 쉬는 날도 없이 일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음주, 흡연, 폭식과 같이 건강을 해치는 생활 습관이 몸에 배기도 하고, 그 기간 동안 자신다운 삶을 포기하거나 지연시킨다. 성확정수술은 미용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결국 젠더가 자신의 정체성 중에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참여자들은 현재 트랜지션에 대한 의료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고 신뢰성 있는 자료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질문들이 오갔다. 정책적 부재와 의료인들의 이해 부족 속에서 정보 접근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트랜지션에 대한 대부분의 관련 정보는 “인터넷 검색 엔진(구글, 네이버 등)에서 검색”하거나 “트랜스젠더 관련 웹 페이지 또는 인터넷 카페”, “SNS(페이스북, 트위터 등)”를 통해서 얻고 있다.[ref]이승현 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2022), 앞의 책, 97쪽.[/ref] 최근에는 커밍아웃한 당사자의 회고록이나 저서들이 출판되어 더 생생한 경험으로 트랜지션을 이해할 수도 있는데, 개인에 따라 그 필요가 모두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의료 서비스처럼 트랜지션도 정부나 학회의 표준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쉬운 경로를 통해 양질의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최근 여러 임상 의사들과 의료진이 모여 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그동안 해외 통계나 지식에만 의존해 왔던 것에 한계를 느끼고 국내 임상 자료의 축적과 관련 연구를 하는 중이다.[ref]국내에서 성소수자 진료를 하는 임상 의사들의 모임으로 2020년에 시작한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KALM)는 2025년 1월 18일 발족식을 가졌다. 또한 국내 최초로 8개 의료 기관에서 성별 확정 치료를 받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KITE 연구(한국 트랜스젠더·성별 다양성이 있는 사람 코호트 구축 및 건강 추적관찰 연구)를 2024년부터 진행 중이다.[/ref]
나가며
트랜스젠더의 의료 접근성 문제에 접근할 때 사람이 아닌 의료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면 임신 중지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사회적 낙인과 의료진의 편견으로 갈 수 있는 병원이 없거나 거절당하고, 적절한 의료 서비스 제공을 받기 위해 장거리 이동을 감수해야 한다. 건강보험이 보장되지 않아서 높은 비용이 요구되고, 양질의 표준적인 서비스를 받기 어려우며, 결국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해외에서 약을 구입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는 특정한 사람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아니라 의료적 필요를 권리로서 보장하지 않는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할 때 병원을 안전하게 갈 권리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수자 친화적인 병원이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트랜스젠더 의료 차별의 실태를 계속해서 알리는 이유는 특정 집단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현실을 바꾸기 위함이다. 젠더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배워야 한다. 나이나 겉모습만으로 어떤 사람의 경험치를 함부로 가늠하지 않는 것처럼 누군가를 특정한 젠더로 전제하지 않는 것도 의식적이고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 태어나자마자 특정한 성별로 호명되는 그 순간에 의사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성별을 통해 비로소 식별 가능한 인간으로서 정상성을 부여받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젠더를 인식하는 동시에 젠더만으로 우리를 규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젠더가 가족, 주거, 교육, 노동, 의료 환경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결정하는 세상은 이상하다. 우리는 서로의 젠더를 인정하면서도 서로의 성적 권리와 즐거움을 존중할 수 있다. 젠더를 이유로 의료적 필요를 무시하는 사회에 함께 저항할 수 있다. 노동, 교육, 건강 전반에 걸쳐 취약성을 구조화하는 사회적 자원을 정의롭게 재분배해야 한다.
나는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가? 이 세상에 차별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는가? 내가 그런 존재라고 느끼거나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참고할 수 있는 트랜지션 관련 한국어 자료
● 강동성심병원 LGBTQ+센터 사이트 lgbtqplus.kr
● 김결희 외(2021), 〈트랜스젠더 성확정수술을 위한 의료정보 가이드북〉, 성소수자부모모임. www.pflagkorea.org/books/2394
● 색다른의원 네이버 블로그 자료실 blog.naver.com/sdrclinic22
●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 한정연 외 옮김(2023),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WPATH SoC8)〉. (한글판 포함) wpath.org/publications/soc8/translation
● 이승현 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2022), 《차별 없는 병원 - 진료실을 바꿀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