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꽃
아기 염소가 일어납니다.
무릎을 접고 땅을 짚습니다.
바위를 밀치고 우뚝 일어섭니다.
무릎 털이 벗겨집니다.
무릎이 까졌다고 혀를 차지 마세요.
혼자서 피운 꽃입니다.
어미를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구릉마다 까만 봉우리가 솟습니다.
벼랑 끝으로 꽃이 내달립니다.
낭떠러지로 고꾸라져도
스스로 핀 꽃은 지지 않습니다.
무릅쓰고 꽃이 피었습니다.
무릎이 꺾여도 끝끝내 지지 않는
무릎꽃이 피었습니다.
미리 말하랬잖아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언제나 미리 말했잖아요
괜히 방문을 쾅쾅 닫았겠어요
침대에 누워 일부러 발을 굴렀겠어요
눈길 마주친 적 오래됐잖아요
앞머리로 검은 커튼을 치고 다녔잖아요
휴대폰 배터리도 빼 놓은 채 이어폰 끼고 있었잖아요
카톡 상태 메시지 보셨잖아요
겨울잠 자는 곰도 아닌데 왜 불 끄고 있냐고
스위치 올려 준 적 많잖아요
토요일 일요일에도 몇 주째 잠만 잤잖아요
아침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첫차 타고 학교에 갔잖아요
현관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내 등짝을 떠민 적 있잖아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점심 급식 끊을까 말했잖아요
수학여행 가지 말까 말했잖아요
기숙학원에 갈까 말했잖아요
휴지 한 통을 껴안고 이불 뒤집어쓴 적 많았잖아요
붉어진 눈을 보고 눈병 걸렸냐고 물은 적 있잖아요
자다 깨어 골목길을 스무 바퀴나 돈 적도 있잖아요
새벽에 땀범벅이 되어 들어오는 나를 봤잖아요
격투기나 권투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었잖아요
학교 사진은 다 찢어 버렸잖아요
다 알고 계셨잖아요
시작 노트
땡감에는 감꽃 향기와 홍시의 아름다운 빛깔이 숨어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주먹처럼 단단하게 뭉쳐 있습니다. 주먹은 의지의 표현 같기도 하고 분노의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땡감에는 감꽃과 홍시에는 없는, 타닌이라는 떫은맛이 있습니다. 방어와 물리침의 힘이 있습니다. 어디에 섞여도 자신의 떫은맛으로 상대를 제압합니다. 알코올이나 이산화탄소로 서둘러 타닌을 제거하지 마세요. 청춘의 타닌은 〈햇빛 우리기〉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더딘 햇살의 시간을 주세요. 세상 모든 사람은 감나무입니다. 감꽃 목걸이와 태풍의 생채기와 홍시의 겨울밤이 있습니다. 청춘시집은 떫은맛이 제격입니다.
이정록(mojiran@hanmail.net)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청소년 시집으로 《까짓것》,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반할 수밖에》와 시집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동심언어사전》, 《그럴 때가 있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풀꽃문학상 등을 받았다.
무릎꽃
아기 염소가 일어납니다.
무릎을 접고 땅을 짚습니다.
바위를 밀치고 우뚝 일어섭니다.
무릎 털이 벗겨집니다.
무릎이 까졌다고 혀를 차지 마세요.
혼자서 피운 꽃입니다.
어미를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구릉마다 까만 봉우리가 솟습니다.
벼랑 끝으로 꽃이 내달립니다.
낭떠러지로 고꾸라져도
스스로 핀 꽃은 지지 않습니다.
무릅쓰고 꽃이 피었습니다.
무릎이 꺾여도 끝끝내 지지 않는
무릎꽃이 피었습니다.
미리 말하랬잖아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언제나 미리 말했잖아요
괜히 방문을 쾅쾅 닫았겠어요
침대에 누워 일부러 발을 굴렀겠어요
눈길 마주친 적 오래됐잖아요
앞머리로 검은 커튼을 치고 다녔잖아요
휴대폰 배터리도 빼 놓은 채 이어폰 끼고 있었잖아요
카톡 상태 메시지 보셨잖아요
겨울잠 자는 곰도 아닌데 왜 불 끄고 있냐고
스위치 올려 준 적 많잖아요
토요일 일요일에도 몇 주째 잠만 잤잖아요
아침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첫차 타고 학교에 갔잖아요
현관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내 등짝을 떠민 적 있잖아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점심 급식 끊을까 말했잖아요
수학여행 가지 말까 말했잖아요
기숙학원에 갈까 말했잖아요
휴지 한 통을 껴안고 이불 뒤집어쓴 적 많았잖아요
붉어진 눈을 보고 눈병 걸렸냐고 물은 적 있잖아요
자다 깨어 골목길을 스무 바퀴나 돈 적도 있잖아요
새벽에 땀범벅이 되어 들어오는 나를 봤잖아요
격투기나 권투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었잖아요
학교 사진은 다 찢어 버렸잖아요
다 알고 계셨잖아요
시작 노트
땡감에는 감꽃 향기와 홍시의 아름다운 빛깔이 숨어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주먹처럼 단단하게 뭉쳐 있습니다. 주먹은 의지의 표현 같기도 하고 분노의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땡감에는 감꽃과 홍시에는 없는, 타닌이라는 떫은맛이 있습니다. 방어와 물리침의 힘이 있습니다. 어디에 섞여도 자신의 떫은맛으로 상대를 제압합니다. 알코올이나 이산화탄소로 서둘러 타닌을 제거하지 마세요. 청춘의 타닌은 〈햇빛 우리기〉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더딘 햇살의 시간을 주세요. 세상 모든 사람은 감나무입니다. 감꽃 목걸이와 태풍의 생채기와 홍시의 겨울밤이 있습니다. 청춘시집은 떫은맛이 제격입니다.
이정록(mojiran@hanmail.net)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청소년 시집으로 《까짓것》,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반할 수밖에》와 시집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동심언어사전》, 《그럴 때가 있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풀꽃문학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