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호[시] 첫눈 / 함양(咸陽) | 김천영

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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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하얀 가로등 불빛 아래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눈이 펑펑 내리네요. 우리 언젠가 첫눈 오면 만나자고 부질없는 약속을 했던가요. 

어깨에 쌓인 눈 털듯 당신이 잊히면 좋겠네요. 머리에 쌓인 눈 툭, 

털어내듯 당신을 잊으면 좋겠네요.     




함양(咸陽)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지도를 펼쳐놓고 고심한 끝에 함양으로 가기로 했다. 아는 이는 없었다. 다만, 어느 해인가 휴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읍내를 지나가 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지리산이 가깝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을까.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근처 골목에 월세방을 구하고 살았다. 가져온 거라곤 백석(白石)의 시집 한 권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만남도 이별도 없이 메말라 갔다.

햇살이 가득한 봄날, 상림(上林)을 거닐면 부는 바람이 다독여 주었다. 여름날, 반소매 차림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골목을 지날 때면 잠에서 깨어 나와 앉아 있곤 했다. 가을날엔 지리산 자락을 거닐며 쓰러져간 청춘의 파르티잔을 그려보기도 하고, 눈보라 치는 날엔 창가에 서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생각했다.




시작 노트

강원도 분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덩그러니 운동장가에 앉아 있다 보면 구름도 지나고 바람도 지나고, 소나기도 지나갔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옷이 헐겁다고 느끼거나 너무 꽉 끼인다는 느낌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왔다 가곤 했다. 눈이 오는 날엔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앞에 보이는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 잠시 생각도 멈추고 한숨도 날아갔다. 그러다 다시 경기도 여주의 작은 학교로 왔다. 눈이 펑펑 내리던 늦은 저녁 퇴근길, 학교 앞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던 날이었다. 누구나 추억이 있다. 추억을 먹고 살 필요는 없지만 부정할 일도 아니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가끔 혼자 지리산에 가곤 했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길은 수십 가지도 넘는다. 그중 경상도 쪽 계곡을 타기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무더운 여름날 지리산을 가다 본 읍내가 함양이었다. 창가에 기대 바라본 작은 읍내는 내가 자란 안성과 많이 닮았다. 저녁 늦게 민박집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 날 일찍 산에 올랐다. 그날은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되어 학기 중의 피로도 채 풀리지 않았고 전날 과음한 탓도 있었다. 겨우 기다시피 하여 천왕봉에 올랐다. 집에 돌아와 며칠이 지나니 지리산보다는 함양이라는 곳이 문득 더 생각이 났다. 다 집어치우고 이런 데 와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한동안 떠나질 않았다.


김천영(hiaryda@naver.com)      경기 여주 대신초 교사. 1989년 ‘교사문학’ 동인지에 시 〈그러나 백묵이여〉 발표로 시작 활동. 시집으로 《산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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