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청소년들 - 중도입국 청소년과 교육의 과제
0점과 불법 어디쯤
해영과 건의 몫
한채민
chaemin02@naver.com
각색교사모임,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내가 5년간 있던 서울의 한 중학교는 중국 이주배경 학생이 비공식적으로 절반 정도 됐다.[ref]주민번호 대신 외국인번호를 사용하는 외국인 학생과 달리, 주민번호를 가진 다문화가족 학생은 학생이 직접 이주배경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주배경 학생으로 곧바로 집계되지 않는다. 많은 다문화가족 학생이 자신이 이주배경임을 굳이 먼저 알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파악되는 이주배경 학생은 실제보다 적은 편이다.[/ref] ‘이주배경 학생’은 ‘다문화가족 학생’과 ‘외국인 학생’을 부르는 용어다.[ref]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다. 부득이 정책적인 호명이 필요할 경우 ‘다문화가족 학생’, ‘다문화학생’ 같은 용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다문화가족지원법」상 외국 국적 학생, 동포 학생은 ‘다문화가족 학생’에 포함되지 않아 해당 법의 적용을 받는 정책 대상에서 제외된다. ‘다문화가족 학생’은 부모 중에 한쪽이라도 한국 국적인 경우이다. 2023년 10월, 「초·중등교육법」 제28조의2가 신설되면서 ‘다문화가족 학생’과 ‘외국인 학생’을 모두 포함하는 용어로 ‘다문화학생’이 명시되었다.[/ref] 지금은 공식적으로 조사된 이주배경 학생 비율도 절반 가까이 된다. 그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일찍 한국에 자리를 잡아서 의사소통이나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학생들도 있고, 중학교 때 한국에 와서 한국어와 한국에서의 일상이 낯선 학생들도 있다. 이 글에 등장할 해영과 건도 중국에서 이주해 온 학생들이다.[ref]내가 만난 두 학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누구의 이야기인지 짐작할 수 없도록 가명을 붙이고, 다른 학생들의 이야기, 인근 학교의 사례를 섞기도 하며 재구성하였다.[/ref]
해영은 0점짜리 노력을 했나
해영은 일상생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로 한국어 공부를 한 뒤 한국의 중학교로 편입했다. 하지만 한국어를 써서 새로운 내용을 배우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든 영어 시간이 특히 난감했다. 중국에서 영어를 배우기는 했어도, 한국처럼 영어가 강조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영어로 단어와 문장을 읽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알파벳으로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것을 ‘한어병음’이라고 하는데, 같은 알파벳이지만 한어병음을 읽는 법과 영어 단어를 읽는 법이 달라 헷갈렸다. 귀에도 입에도 설은 외국어(한국어)로 또 다른 외국어(영어)를 배우다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to 부정사니, 관계대명사니 하는 영문법 용어들은 영어가 더 싫어지게 하는 주문이었고, 영어 본문을 한국어로 해석하는 모둠 활동만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영어 교사인 나에게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학생들 간 학습 출발점 격차가 클수록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수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를 포함한 교실 속 대부분의 구성원에게 외국어인 영어야말로 어쩌면 새로운 소통의 도구가 될 수도 있을까? 형식은 틀리더라도 의미 전달이 목적인 영어 수업을 하고, 본문 내용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시험 범위가 될 단어나 문법을 설명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해 금방 흐지부지됐다. 영어 단어 목록에 중국어 의미를 함께 표기하거나, 수업의 속도를 늦추고, 대화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시각 자료를 넣고, 쉽고 친숙한 예시를 드는 정도로 조율할 뿐이었다. 해영에게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사전을 찾거나 번역기를 사용[ref]그러나 이것은 번역기가 꽤나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는 일부 언어의 경우이다. 소수 언어의 경우 번역기가 완전히 오역을 하는 바람에 학생과 교사 간에 오해가 쌓이는 경우가 있다.[/ref]해도 된다고, 필요하다면 수업 내용을 녹음해도 괜찮다고 말해 두었다. (아, 휴대전화를 수거하거나 엄격하게 사용을 금지하는 상황이었다면 해영도 나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처음 몇 주간 해영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영어 시간을 수면 시간으로 썼다. 다문화특별학급[ref]그러나 이것은 번역기가 꽤나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는 일부 언어의 경우이다. 소수 언어의 경우 번역기가 완전히 오역을 하는 바람에 학생과 교사 간에 오해가 쌓이는 경우가 있다.[/ref] 방과후수업에서 중국어로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들었지만, 학습 격차를 좁히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해영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영에게 학습 동기를 불어넣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공부는 할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는 거니까.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한국식 교육에도 적응을 해야 하니까. 경쟁 교육에 문제가 많긴 하지만, 여기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해영에게 동기를 주입할 수 있다는 태도도, 경쟁 시스템에 편입시키는 것이 해영을 위한 일이라는 확신도, 내가 해영이 겪는 어려움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내 안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내가 살아온 세계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서면 곧 깨닫게 되는 착각이었다.
수행 평가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해영은 참여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수행 평가에 전혀 참여하지 않을 경우 0점을 받게 될 것이었다. 나는 해영을 따로 불러 ‘미래’ 운운하며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잘 못하는 것도 끈기 있게 노력해 본 사람과 노력하지 않고 포기한 사람의 미래는 아주 다를 거예요”와 같은 말을 해 버렸다! 그런 말을 하는 스스로에게 잠깐 고무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해영이 말했다.
“너무 피곤해요. 2시간 잤어요.” 해영의 말에 나는 왜 그렇게 조금밖에 못 잤느냐고 물었다. 늦게까지 게임하거나 유튜브 봤겠지, 생각하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아기 보다가요.”
그때 이후로 나는 차츰 해영의 이야기를 알아 가게 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해영은 중국에서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오래전 어머니가 일하러 한국에 갔기 때문이다. 해영도 한국에 가서 가끔 어머니를 만나고 오기도 했지만 둘만 있는 건 어색하고 어려웠다.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사실상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한국에서 재혼을 하며 자리를 잡은 어머니가 해영을 한국으로 불렀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어머니의 부름에 중국에 있는 친구, 학교, 할머니를 떠나 한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해야 한다며 자신을 버릴 때는 언제고, 가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낯선 곳으로 불러들이는 어머니에게 해영은 분노했다. 한국이 싫었다. 그나마 편입을 한 한국 중학교에 중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해영처럼 부모의 부름에 갑작스레 한국으로 오게 된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한국에 들어올 무렵, 해영의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다. 출산 뒤 한국인 남편과 별거를 하게 된 어머니는 일을 나가느라 해영에게 아기를 맡기고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아침에 들어온 어머니에게 동생을 넘기고 육퇴(육아 퇴근)와 동시에 등교를 하는 식이었다. 해영이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그런 해영의 노력에 ‘전혀 참여하지 않음’으로 0점을 매기려고 했다. 해영 앞에 ‘끈기’, ‘미래’, ‘노력’, ‘포기’와 같은 말을 무조건 반사처럼 늘어놓은 자신을, 그런 말의 무용함을, 편협한 나의 세계를 마주했다. 조언을 한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해영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어차피 공부 필요 없어요.”
해영이 말했다. 수업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말이 아니었다. 해영에게는 더 근본적인 불안이 있었다. 또다시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중국으로 돌려보내질지도 모른다는, 한국 사회가 자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불안이었다. 해영은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의 미성년 자녀가 성년까지 한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F-1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다. 중도입국 자녀[ref]교육부 산하 중앙다문화교육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중도입국 자녀는 ‘결혼이민자가 한국인과 재혼한 이후에 본국에서 데려온 자녀, 한국인과 결혼이민자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결혼이민자의 본국에서 성장하다가 입국한 경우 등’을 말한다.[/ref]로 불리는 외국인 학생들의 많은 경우가 해영과 같은 종류의 비자를 받아 한국에 온다. 해영이 성년 이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F-1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미리 비자를 바꿀 준비를 해 두어야 했다. 내가 이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다. 어머니의 한국인 배우자가 해영을 입양해서 해영이 영주권을 획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학에 입학해서 유학생 비자를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하면 좋겠지만, 한국에서 취업이 가능한 비자를 받으려면, 학사 학위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중국에 돌아가야 하나? 중국에 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해영은 막막했다. 중국에 있는 친구들과의 연락은 뜸해져 가고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영은 여전히 한국이 싫지만, 계속 한국에서 살아간다면 어떨지 그려 보기도 했다.
“그래도 한국이랑 너무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는 한국인 남편과 별거하게 되었고, 대학 입학 조건을 맞추는 일은 해영에게 매우 까다로운 일이었으므로 성년이 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할 가능성이 컸다.[ref]2024년 9월 법무부는 〈신(新) 출입국·이민정책〉에서 “이민 2세대 등 외국인 청소년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취업 비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국내에서 가족과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이며 “외국인 청소년의 학업·취업, 자립·정착을 돕기 위하여 관계 부처와 협업하여 실질적 방안을 모색해 나가겠”다고 밝혔으므로 변화를 지켜보아야 하겠다.[/ref] 외국인이 한국 대학에 입학하거나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이 시험은 시험 접수부터 난관이다. 응시 모집 인원보다 훨씬 많은 희망자가 몰려서 남은 자리를 찾아 먼 지역까지 가서 시험을 치는 응시자들, 접수에 실패한 유학생들의 사례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ref]“한국 취업에 필수인데… 토픽 점수 따는 건 ‘하늘의 별 따기’”, 〈JTBC〉, 2024년 6월 4일.[/ref] 운 좋게 필요한 시기에 맞춰 시험을 봐서 원하는 등급을 받아도, 대부분의 대학에서 유학생의 재정 능력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1600만~2000만 원을 모아 두어야 한다. 해영의 F-1 비자[ref]F-1 비자를 받은 외국인에게 소득 기록이 남는 경우, 향후 영주권을 획득하는 데에 큰 문제가 된다고 한다. 이 비자를 가진 학생이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현장 실습에도 참여하지 못한다.[/ref]로는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데 그런 돈을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까.
더 이른 시기에 중도입국한 학생들은, 한국에서 정체성을 형성하여 당연하게도 한국 문화와 한국어 소통을 훨씬 편안하게 느낀다. 양육자의 모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경우라도 비자 종류에 따라 성년이 되기 전에 영주권을 획득하거나 유학생 신분으로 변경하지 못하면 한국에서 거주할 수 없게 된다. 낯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자 유형과 체류 조건을 잘 모르고 있다가, 준비 없이 시간이 지나고 체류 기간이 초과되어 갑자기 미등록 외국인이 되는 사례가 들려오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일상에 정들고 싶지 않다던 해영의 마음을 감히 짐작해 본다.
해영의 체류 조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때, 교무실에서 해영에 관해 주고받던 대화는 이랬다. 중학생에게 아기를 맡긴 무책임한 어머니, 불쌍한 해영이, 그래도 해영이 본인이 의지를 가지고 적응해야 하는데 무기력하기만 하고 공부할 의지가 없어 안타깝다는, 해영이가 있어 반 평균이 크게 떨어진다는, 선량하고 모범적인 존재들의 시선. 그 사이에는 나도 있었다. 존재 자체의 불안감을 겪어 보지 않은, 대체로 나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해서 교사가 된 비청소년 선주민에게 수업 시간 해영의 모습은 문제적인 것으로 비쳤다. 누군가는 해영에게 너는 외국인이라 좋은 대학 진학이 유리하니까 지금부터 마음잡고 공부해 보라고 했다. 외국인 학생 누구나 한국에서 살길 원하며, 한국어만 익숙해지면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체로 자신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살아온 해영의 무게를 다 알겠다는 듯 이리저리 재어 보면서 해영의 삶에 대해 함부로, 어림도 없는 훈수를 뒀다.
그러나 지금은 무기력하고 의지가 없는 듯, 노력하지 않는 듯 보이는 해영의 모습이 그가 택한 방어와 저항의 방식이자 외로움의 표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가 자신의 노력 바깥에 존재하는 더 커다란 중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예상되는 상처와 혼란을 줄이는 방향으로 해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외치고 있었다.
해영의 동생 육아는 해영의 어머니가 별거 중인 남편과 양육의 부담을 나누게 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해영이 ‘다문화가족 자녀’에 해당되지 않는 외국인 학생이어서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지역의 기관에서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해영은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하니 오히려 한국에서의 시간을 잘 써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말하는 해영의 후련한 표정을 보니 응원할 수 있었다. 해영이 선택한 것은 포기도 실패도 아닌 자신의 미래였다.
건에게 허용된 '합법적'인 삶은 마땅한 삶일까?
건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지만, 나이는 동급생들보다 한 살 많았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 학교는 중국인 학생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며 건을 거부했다.[ref]당시는 중도입국 학생이 학교로 직접 방문해서 편입학 신청을 했다. 학교가 중도입국 학생들의 편입학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학생 비율이 높은 학교로 중도입국 학생들의 편입학이 몰렸다. 중도입국 학생의 편입학을 거부하는 것, 특정 학교에 다문화학생이 몰리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지금은 거주지 관할 교육지원청에서 중도입국 학생의 거주지 학교 결원 등을 고려하여 배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중도입국 학생들의 편입학을 거부하는 학교 사례가 있다.[/ref] 몇 군데를 더 다녀 보았다. 모두 건을 거부했다. 건을 거부한 마지막 학교의 교감은 다문화특별학급을 운영하는 중학교가 있다며 그곳에 입학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 학교에 가서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건이 다니게 된 그곳이 바로 내가 있던 학교다. 건은 다문화특별학급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고, 여러 학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한 뒤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지만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로 편입 안내를 해 주는 곳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수차례 거부를 당하다가 간단한 통역 안내를 받으니 환영받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어 레벨 테스트를 하고, 다문화언어강사의 통역으로 건의 아버지가 담임 교사와 상담을 했다. 학교 가정통신문 중 일부는 중국어로 번역본이 제공되었다.
건이 한국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아버지뿐이었다. 건도 해영처럼 아버지와 떨어져 산 기간이 길었다. 낯선 한국에서 의지할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는 상황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곳곳의 건설 현장을 돌며 일하느라 자주 집을 비웠다. 아버지가 재혼했다는 한국인 새어머니는 만난 적도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보통 아버지가 보내 주는 용돈으로 집에서 배달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거나 중국어로 된 영상을 봤다.
학교 점심은 거의 걸렀다. 종이 치고 식당으로 달려 나가는 학생들 무리에 건은 없었다. 당시 나는 2학년 수업을 하지 않았는데, 건을 알게 된 건 점심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2학년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학생 한 명이 교실에 혼자 남아 책상에 엎드려 있기에, 들어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대로 엎드려 게임을 했다. 나는 담임 교사에게 교실에 학생이 있는데,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고 식사도 거른 것 같다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대화를 나누다가 건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건이 학교에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을 시점이었다. 담임 교사는 처음에 건이 바뀐 환경에서 스트레스가 심한 것일지,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한 것일지 추측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 뒤 건을 유심히 살펴보며 자주 대화를 시도하던 한 교사에게 건이 귀찮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 음식 맛없어요.”
급식을 먹으러 학교에 온다는 학생들(과 교사들)이 있을 정도로 점심 식사는 학교에서 최고로 중요한 일과다.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니. 뜻밖의 답변에 교사는 당황했지만 그렇다면 건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꿔바로우랑 훠궈요.”
건이 점심을 거르는 이유를 알게 된 교사는 영양 교사에게 찾아갔다. 중국 배경 학생이 많은 학교이니 식단에도 다양한 문화를 담아 주실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영양 교사 역시 흔쾌히 중국 요리를 식단에 반영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한 달에 두 번, ‘중식의 날’을 운영하기로 했다. 건이 좋아한다는 꿔바로우와 훠궈 대신 마라탕[ref]마라탕과 훠궈는 비슷한 요리이지만, 훠궈는 샤브샤브처럼 끓여 가며 먹는 음식이기에 급식으로 제공하기 어려웠다.[/ref]이 함께 나온 날, 교사는 건에게 오늘은 급식을 한번 먹어 보자고, 네가 좋아하는 메뉴가 나왔다고 건을 앞세워 급식실에 들어갔다. 꿔바로우 배식을 더 받으려는 학생들을 보며 어쩐지 으쓱해하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밥을 먹고 나온 건에게 교사는 맛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이건 한국 음식이에요. 그래도 맛 괜찮아요.”
건의 반응이 어딘지 찜찜한 느낌을 주어서 교사는 중국에서 온 다른 학생들에게 오늘 급식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중국 마라탕 이렇게 싱겁지 않아요. 꿔바로우는 그냥 한국 탕수육 같아요’라고 했단다. 사실은 입에 맞지 않았지만, 건으로서는 교사의 성의를 생각한 최선의 답이었던 것이다. 건은 이후로도 급식을 거르고, 중식의 날에도 가끔 밥을 먹었다. 정작 중식의 날을 반긴 건 선주민 학생들이었다.
건이 밥을 먹지 않는 이유가 한국 음식이 맛없어서였다는 사실을 듣고 누군가는 ‘공짜 밥 먹으면서 고마운 줄 모르고 투정 부린다’고 그냥 두라고 했다. 학교에서마저 이런 시혜적 시선이 이주배경 학생들을 따라다닌다. 교육청이나 민간 단체에서 이주배경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프로그램과 예산, 지원 물품 같은 것이 오면 ‘내가 낸 세금 들여 이렇게 잘해 주는데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거나 ‘나보다 외국인이 더 대우받네’ 하고 말하는 이가 실제로 학교에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원인데 말이다. 같은 학교 학생이더라도 국적에 따라 차별하자는 것인가? 모든 어린이·청소년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라도 기본적인 안전을 제공받고 차별받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비청소년 학교 구성원들이여, 함께 분노해 주시길. 저런 시각이 비단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건에게 취향과 입맛이 있다는 사실이 왜 비난받아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이듬해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시작됐다. 건은 중학교 3학년이 됐다. 당시 온라인 수업 플랫폼에 외국인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었다. 플랫폼 가입에 필요한 내용을 기입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본인 인증 절차도 외국 국적 학생에게는 원활하지 않았다. 교실에서는 주변 학생들의 반응이나 분위기를 보고 따라 할 수 있었던 것이 온라인 수업에서는 오롯이 개인에게 던져졌다. 그래서 다문화특별학급 학생들은 온라인 기간에도 시간표를 달리해서 등교했다.
1년간 한국어 실력이 제법 늘어 대부분의 수업을 다문화특별학급이 아닌 원래 학급에서 듣고 있던 건은 온라인으로 수업에 참여해야 했다. 건의 출석률은 매우 낮았다. 담임 교사가 건에게 수차례 연락을 해야 한 번을 참여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담임 교사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건이 게임을 하느라 온라인 수업을 듣지 않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임을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루 종일 게임 아이템을 모으고, 이것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다. 수입이 꽤 크고, 건이 거기에 매우 소질이 있어서 특정 아이템을 찾는 의뢰도 온다고 했다.
등교가 재개되면서는 건이 학교에 오지 않거나 매우 늦게 오는 날이 늘었다. 건은 학교에 오는 시간이 아깝다고 했다. 그 시간에 게임 아이템을 모아 돈을 버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담임 교사는 건의 아버지를 상담했다. 건의 아버지는 자신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 건이 혼자 집에 있느라 달리 할 것이 없어서 게임에 빠진 거라고 받아들였다. 용돈을 부족하지 않게 보내 주고 있기에 돈이 필요해서 게임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건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온 동네 청년들에게 건이 혼자 있지 않도록 함께 어울려 달라고 부탁했다.
동네 형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건이 게임을 하는 시간은 줄었고, 학교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업 시간 내내 엎드려 잤다. 쉬는 시간에 잠깐 깨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을 빼면 잠을 자러 학교에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담임 교사는 건에게 몸이 좋지 않은 거냐고 물었다.
“밤에 아르바이트했어요.”
건의 비자로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다. 이런 건의 상황을 이미 겪어 봐서 잘 아는 동네 형들이 미리 돈을 벌어 두라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가게를 소개시켜 주었다. 저녁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청소와 배달을 해도 최저임금보다 적은 돈을 주는 곳이었다. F-1 비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뒷정리할 일이 많은 날에는 새벽까지 일하기도 했다.
담임 교사가 건에게 왜 그렇게까지 일을 하느냐고, 아버지가 생활에 필요한 돈을 보내 주시는데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겼느냐고 묻자, 건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돈을 모아 둬야 해요.”
학교생활이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일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뿐더러,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자체로 체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교사가 만류했지만, 건은 계속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된 것은 가게 사장이 건의 임금을 체불하면서였다. 근로계약서를 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체류 조건을 위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자백이 되기에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이주배경 청소년들 중에는 체류 조건 때문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고 최저임금보다 적은 시급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생계 목적인 경우도 있고,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년이 되면 더 이상 한국에서 체류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건은 중국에 돌아가기보다는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중국에 가까운 가족이 없기도 했다.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대학에 진학해서 유학 비자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취업 비자를 받고, 영주권까지 받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 것이었다.
돈을 벌지 않고서 대학 입학 시 재정 능력 증명을 하고, 등록금을 대고, 취업을 준비하기란 불가능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애초에 방문 동거 중인 외국인 청소년이 한국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곳으로 내몰리는 상황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경로 설계라고까지 보인다. 보이스피싱 범죄인 줄 모르고 돈을 벌기 위해 출금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사를 받은 학생도 있었다. 외국 국적 청소년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경로가 턱없이 부족하고 부실한 것은 조명받지 못하고, 범죄에 연루된 이들 중 외국 국적의 청소년이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는 언론 보도를 보면 안타깝다. 이런 프레임은 외국인에 대한 혐오, 외국인 청소년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강화된 혐오는 외국인 청소년들의 안전한 일상과 삶을 만들어 가는 흐름을 방해한다.
건은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하고 원하던 대로 유학 비자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건의 소식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뒤 들을 수 없었다.
안쓰럽군요, 탕후루라도 사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나는 지인 앞에 ‘교사 됨’의 고충을 잔뜩 토해 놓고 말았다. 그래 놓고는 민망해져서 부랴부랴 주워 담는답시고 ‘교사는 좋은 직업이에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좋은 교사가 되는 일이잖아요. 직업 세계에서 얼마나 희소한 일치감인가요’라고 좋고 좋은 말을 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좋은 교사 하려다 사람 구실 못 했구나 싶었던 낭패의 기억들이 반발하며 줄줄이 달려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해 왔던 대로, 선의에서,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해영에게, 건에게, 학생 개개인에게 ‘부적응’의 책임을 돌렸던 순간이.
앞으로는 해영, 건과 같은 이주배경 학생들을 더 많은 학교에서,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ref]서울시교육청의 〈2024년 다문화교육 기본계획〉에 따르면, 2023년 서울시 전체 학생 수는 787,949명으로 2021년과 비교하여 40,597명 감소한 데 반해, 2023년 서울시 다문화학생 수는 20,388명으로 2021년과 비교하여 1,020명 증가하였다. 전체 학생 인구가 계속 감소하는 추세인 데 반해 다문화학생 수는 증가하고 있다. [/ref] 그때마다 이주배경 학생 개개인의 노력과 적응만을 기대해야 할까. 학교는 다양한 구성원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해야 한다. 학생 인권 감수성이 높은 통역 지원, 정서 및 심리 상담 지원처럼 이주배경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선주민만의, 오직 선주민에 의한, 선주민이 설계한 학교 체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구성원을 맞이하며 바뀌어야 하는 것은 선주민의 문화와 선주민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이다. 선주민도 괴로운 시스템이니 그대로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 더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시스템에서 선주민은 시혜를 베푸는 자나 피해를 입는 자가 아니라 수혜자가 될 것이다.
해마다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해 와서는[ref]“내년 E9 이주노동자 역대 최대 16만 5000명··· 음식점도 고용 허용”, 〈경향신문〉, 2023년 11월 27일.[/ref] 함부로 대하는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 사회에 적응을 마쳤으며, 가족도 한국에 있는 외국인 학생들을 성년이 되면 쫓아내는 상황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안정적인 체류가 가능한 조건이었다면 해영과 건,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상황의 외국인 청소년들의 삶의 모양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국 사회의 품은 얼마나 넓어졌을까.
다행한 것이 있다면 해영, 건과 같은 이주배경 학생들과의 만남으로 몇몇 교사들이 새로운 상황에 대해 배우고 천천히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선주민 세계관에 작은 균열이 난 것이다. 새로운 구성원을 환대할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구성원의 다양성이 커지다 보면, 모두가 고통받음에도 잘도 유지되는 이 기이한 차별의 세계관이 차츰 전복되고, 새로운 구성원을,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구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주배경 주민들의 이야기를 접해 본 적이 없으면서 편견에 사로잡힌 분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분들이 속한 좁은 세계가 안쓰러워서 탕후루라도 하나 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 좁다란 우물 같은 곳에서 답답하지 않으신가요. 코로나 시기에는 내가 근무하던 지역의 전염병 확산을 걱정하며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 동포 커뮤니티는 선주민들보다 더 철저히 마스크를 쓰고 방역에 힘썼다. 동포분들이 싸웠던 것은 확산되는 전염병이 아니라 확신을 얻는 혐오였다. 어떤 이들은 양꼬치와 마라탕 맛집에 대해 신나게 알은체를 하다가도 영화 〈청년경찰〉과 〈범죄도시〉를 언급하며 위험하니 어두운 거리를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해가 다 진 뒤에 양꼬치를 먹고 마라탕을 먹으러 골목골목을 활보하는 것처럼, 나는 5년간 부랴부랴 출근하고 활기차게 퇴근했다. 끝내주는 지삼선을 먹고, 뜨끈한 누룽지탕을 먹으러.
정말로 위험한 것은 내가 살아온 방식이 학생들을 위한 유일한 방식이라는 확신, 가장 필요한 것은 단일한 세계관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을 겪더라도 그것을 예외로, 그래서 제외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을 용기, 기존의 세계관을 조금씩 허물어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 볼 다문화적 세계관으로의 당당한 입장인 것이다.
경계에 선 청소년들 - 중도입국 청소년과 교육의 과제
0점과 불법 어디쯤
해영과 건의 몫
한채민
chaemin02@naver.com
각색교사모임,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내가 5년간 있던 서울의 한 중학교는 중국 이주배경 학생이 비공식적으로 절반 정도 됐다.[ref]주민번호 대신 외국인번호를 사용하는 외국인 학생과 달리, 주민번호를 가진 다문화가족 학생은 학생이 직접 이주배경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주배경 학생으로 곧바로 집계되지 않는다. 많은 다문화가족 학생이 자신이 이주배경임을 굳이 먼저 알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파악되는 이주배경 학생은 실제보다 적은 편이다.[/ref] ‘이주배경 학생’은 ‘다문화가족 학생’과 ‘외국인 학생’을 부르는 용어다.[ref]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다. 부득이 정책적인 호명이 필요할 경우 ‘다문화가족 학생’, ‘다문화학생’ 같은 용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다문화가족지원법」상 외국 국적 학생, 동포 학생은 ‘다문화가족 학생’에 포함되지 않아 해당 법의 적용을 받는 정책 대상에서 제외된다. ‘다문화가족 학생’은 부모 중에 한쪽이라도 한국 국적인 경우이다. 2023년 10월, 「초·중등교육법」 제28조의2가 신설되면서 ‘다문화가족 학생’과 ‘외국인 학생’을 모두 포함하는 용어로 ‘다문화학생’이 명시되었다.[/ref] 지금은 공식적으로 조사된 이주배경 학생 비율도 절반 가까이 된다. 그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일찍 한국에 자리를 잡아서 의사소통이나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학생들도 있고, 중학교 때 한국에 와서 한국어와 한국에서의 일상이 낯선 학생들도 있다. 이 글에 등장할 해영과 건도 중국에서 이주해 온 학생들이다.[ref]내가 만난 두 학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누구의 이야기인지 짐작할 수 없도록 가명을 붙이고, 다른 학생들의 이야기, 인근 학교의 사례를 섞기도 하며 재구성하였다.[/ref]
해영은 0점짜리 노력을 했나
해영은 일상생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로 한국어 공부를 한 뒤 한국의 중학교로 편입했다. 하지만 한국어를 써서 새로운 내용을 배우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든 영어 시간이 특히 난감했다. 중국에서 영어를 배우기는 했어도, 한국처럼 영어가 강조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영어로 단어와 문장을 읽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알파벳으로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것을 ‘한어병음’이라고 하는데, 같은 알파벳이지만 한어병음을 읽는 법과 영어 단어를 읽는 법이 달라 헷갈렸다. 귀에도 입에도 설은 외국어(한국어)로 또 다른 외국어(영어)를 배우다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to 부정사니, 관계대명사니 하는 영문법 용어들은 영어가 더 싫어지게 하는 주문이었고, 영어 본문을 한국어로 해석하는 모둠 활동만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영어 교사인 나에게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학생들 간 학습 출발점 격차가 클수록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수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를 포함한 교실 속 대부분의 구성원에게 외국어인 영어야말로 어쩌면 새로운 소통의 도구가 될 수도 있을까? 형식은 틀리더라도 의미 전달이 목적인 영어 수업을 하고, 본문 내용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시험 범위가 될 단어나 문법을 설명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해 금방 흐지부지됐다. 영어 단어 목록에 중국어 의미를 함께 표기하거나, 수업의 속도를 늦추고, 대화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시각 자료를 넣고, 쉽고 친숙한 예시를 드는 정도로 조율할 뿐이었다. 해영에게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사전을 찾거나 번역기를 사용[ref]그러나 이것은 번역기가 꽤나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는 일부 언어의 경우이다. 소수 언어의 경우 번역기가 완전히 오역을 하는 바람에 학생과 교사 간에 오해가 쌓이는 경우가 있다.[/ref]해도 된다고, 필요하다면 수업 내용을 녹음해도 괜찮다고 말해 두었다. (아, 휴대전화를 수거하거나 엄격하게 사용을 금지하는 상황이었다면 해영도 나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처음 몇 주간 해영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영어 시간을 수면 시간으로 썼다. 다문화특별학급[ref]그러나 이것은 번역기가 꽤나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는 일부 언어의 경우이다. 소수 언어의 경우 번역기가 완전히 오역을 하는 바람에 학생과 교사 간에 오해가 쌓이는 경우가 있다.[/ref] 방과후수업에서 중국어로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들었지만, 학습 격차를 좁히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해영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영에게 학습 동기를 불어넣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공부는 할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는 거니까.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한국식 교육에도 적응을 해야 하니까. 경쟁 교육에 문제가 많긴 하지만, 여기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해영에게 동기를 주입할 수 있다는 태도도, 경쟁 시스템에 편입시키는 것이 해영을 위한 일이라는 확신도, 내가 해영이 겪는 어려움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내 안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내가 살아온 세계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서면 곧 깨닫게 되는 착각이었다.
수행 평가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해영은 참여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수행 평가에 전혀 참여하지 않을 경우 0점을 받게 될 것이었다. 나는 해영을 따로 불러 ‘미래’ 운운하며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잘 못하는 것도 끈기 있게 노력해 본 사람과 노력하지 않고 포기한 사람의 미래는 아주 다를 거예요”와 같은 말을 해 버렸다! 그런 말을 하는 스스로에게 잠깐 고무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해영이 말했다.
“너무 피곤해요. 2시간 잤어요.” 해영의 말에 나는 왜 그렇게 조금밖에 못 잤느냐고 물었다. 늦게까지 게임하거나 유튜브 봤겠지, 생각하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아기 보다가요.”
그때 이후로 나는 차츰 해영의 이야기를 알아 가게 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해영은 중국에서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오래전 어머니가 일하러 한국에 갔기 때문이다. 해영도 한국에 가서 가끔 어머니를 만나고 오기도 했지만 둘만 있는 건 어색하고 어려웠다.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사실상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한국에서 재혼을 하며 자리를 잡은 어머니가 해영을 한국으로 불렀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어머니의 부름에 중국에 있는 친구, 학교, 할머니를 떠나 한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해야 한다며 자신을 버릴 때는 언제고, 가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낯선 곳으로 불러들이는 어머니에게 해영은 분노했다. 한국이 싫었다. 그나마 편입을 한 한국 중학교에 중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해영처럼 부모의 부름에 갑작스레 한국으로 오게 된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한국에 들어올 무렵, 해영의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다. 출산 뒤 한국인 남편과 별거를 하게 된 어머니는 일을 나가느라 해영에게 아기를 맡기고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아침에 들어온 어머니에게 동생을 넘기고 육퇴(육아 퇴근)와 동시에 등교를 하는 식이었다. 해영이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그런 해영의 노력에 ‘전혀 참여하지 않음’으로 0점을 매기려고 했다. 해영 앞에 ‘끈기’, ‘미래’, ‘노력’, ‘포기’와 같은 말을 무조건 반사처럼 늘어놓은 자신을, 그런 말의 무용함을, 편협한 나의 세계를 마주했다. 조언을 한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해영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어차피 공부 필요 없어요.”
해영이 말했다. 수업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말이 아니었다. 해영에게는 더 근본적인 불안이 있었다. 또다시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중국으로 돌려보내질지도 모른다는, 한국 사회가 자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불안이었다. 해영은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의 미성년 자녀가 성년까지 한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F-1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다. 중도입국 자녀[ref]교육부 산하 중앙다문화교육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중도입국 자녀는 ‘결혼이민자가 한국인과 재혼한 이후에 본국에서 데려온 자녀, 한국인과 결혼이민자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결혼이민자의 본국에서 성장하다가 입국한 경우 등’을 말한다.[/ref]로 불리는 외국인 학생들의 많은 경우가 해영과 같은 종류의 비자를 받아 한국에 온다. 해영이 성년 이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F-1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미리 비자를 바꿀 준비를 해 두어야 했다. 내가 이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다. 어머니의 한국인 배우자가 해영을 입양해서 해영이 영주권을 획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학에 입학해서 유학생 비자를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하면 좋겠지만, 한국에서 취업이 가능한 비자를 받으려면, 학사 학위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중국에 돌아가야 하나? 중국에 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해영은 막막했다. 중국에 있는 친구들과의 연락은 뜸해져 가고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영은 여전히 한국이 싫지만, 계속 한국에서 살아간다면 어떨지 그려 보기도 했다.
“그래도 한국이랑 너무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는 한국인 남편과 별거하게 되었고, 대학 입학 조건을 맞추는 일은 해영에게 매우 까다로운 일이었으므로 성년이 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할 가능성이 컸다.[ref]2024년 9월 법무부는 〈신(新) 출입국·이민정책〉에서 “이민 2세대 등 외국인 청소년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취업 비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국내에서 가족과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이며 “외국인 청소년의 학업·취업, 자립·정착을 돕기 위하여 관계 부처와 협업하여 실질적 방안을 모색해 나가겠”다고 밝혔으므로 변화를 지켜보아야 하겠다.[/ref] 외국인이 한국 대학에 입학하거나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이 시험은 시험 접수부터 난관이다. 응시 모집 인원보다 훨씬 많은 희망자가 몰려서 남은 자리를 찾아 먼 지역까지 가서 시험을 치는 응시자들, 접수에 실패한 유학생들의 사례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ref]“한국 취업에 필수인데… 토픽 점수 따는 건 ‘하늘의 별 따기’”, 〈JTBC〉, 2024년 6월 4일.[/ref] 운 좋게 필요한 시기에 맞춰 시험을 봐서 원하는 등급을 받아도, 대부분의 대학에서 유학생의 재정 능력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1600만~2000만 원을 모아 두어야 한다. 해영의 F-1 비자[ref]F-1 비자를 받은 외국인에게 소득 기록이 남는 경우, 향후 영주권을 획득하는 데에 큰 문제가 된다고 한다. 이 비자를 가진 학생이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현장 실습에도 참여하지 못한다.[/ref]로는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데 그런 돈을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까.
더 이른 시기에 중도입국한 학생들은, 한국에서 정체성을 형성하여 당연하게도 한국 문화와 한국어 소통을 훨씬 편안하게 느낀다. 양육자의 모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경우라도 비자 종류에 따라 성년이 되기 전에 영주권을 획득하거나 유학생 신분으로 변경하지 못하면 한국에서 거주할 수 없게 된다. 낯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자 유형과 체류 조건을 잘 모르고 있다가, 준비 없이 시간이 지나고 체류 기간이 초과되어 갑자기 미등록 외국인이 되는 사례가 들려오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일상에 정들고 싶지 않다던 해영의 마음을 감히 짐작해 본다.
해영의 체류 조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때, 교무실에서 해영에 관해 주고받던 대화는 이랬다. 중학생에게 아기를 맡긴 무책임한 어머니, 불쌍한 해영이, 그래도 해영이 본인이 의지를 가지고 적응해야 하는데 무기력하기만 하고 공부할 의지가 없어 안타깝다는, 해영이가 있어 반 평균이 크게 떨어진다는, 선량하고 모범적인 존재들의 시선. 그 사이에는 나도 있었다. 존재 자체의 불안감을 겪어 보지 않은, 대체로 나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해서 교사가 된 비청소년 선주민에게 수업 시간 해영의 모습은 문제적인 것으로 비쳤다. 누군가는 해영에게 너는 외국인이라 좋은 대학 진학이 유리하니까 지금부터 마음잡고 공부해 보라고 했다. 외국인 학생 누구나 한국에서 살길 원하며, 한국어만 익숙해지면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체로 자신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살아온 해영의 무게를 다 알겠다는 듯 이리저리 재어 보면서 해영의 삶에 대해 함부로, 어림도 없는 훈수를 뒀다.
그러나 지금은 무기력하고 의지가 없는 듯, 노력하지 않는 듯 보이는 해영의 모습이 그가 택한 방어와 저항의 방식이자 외로움의 표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가 자신의 노력 바깥에 존재하는 더 커다란 중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예상되는 상처와 혼란을 줄이는 방향으로 해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외치고 있었다.
해영의 동생 육아는 해영의 어머니가 별거 중인 남편과 양육의 부담을 나누게 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해영이 ‘다문화가족 자녀’에 해당되지 않는 외국인 학생이어서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지역의 기관에서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해영은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하니 오히려 한국에서의 시간을 잘 써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말하는 해영의 후련한 표정을 보니 응원할 수 있었다. 해영이 선택한 것은 포기도 실패도 아닌 자신의 미래였다.
건에게 허용된 '합법적'인 삶은 마땅한 삶일까?
건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지만, 나이는 동급생들보다 한 살 많았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 학교는 중국인 학생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며 건을 거부했다.[ref]당시는 중도입국 학생이 학교로 직접 방문해서 편입학 신청을 했다. 학교가 중도입국 학생들의 편입학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학생 비율이 높은 학교로 중도입국 학생들의 편입학이 몰렸다. 중도입국 학생의 편입학을 거부하는 것, 특정 학교에 다문화학생이 몰리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지금은 거주지 관할 교육지원청에서 중도입국 학생의 거주지 학교 결원 등을 고려하여 배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중도입국 학생들의 편입학을 거부하는 학교 사례가 있다.[/ref] 몇 군데를 더 다녀 보았다. 모두 건을 거부했다. 건을 거부한 마지막 학교의 교감은 다문화특별학급을 운영하는 중학교가 있다며 그곳에 입학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 학교에 가서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건이 다니게 된 그곳이 바로 내가 있던 학교다. 건은 다문화특별학급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고, 여러 학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한 뒤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지만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로 편입 안내를 해 주는 곳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수차례 거부를 당하다가 간단한 통역 안내를 받으니 환영받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어 레벨 테스트를 하고, 다문화언어강사의 통역으로 건의 아버지가 담임 교사와 상담을 했다. 학교 가정통신문 중 일부는 중국어로 번역본이 제공되었다.
건이 한국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아버지뿐이었다. 건도 해영처럼 아버지와 떨어져 산 기간이 길었다. 낯선 한국에서 의지할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는 상황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곳곳의 건설 현장을 돌며 일하느라 자주 집을 비웠다. 아버지가 재혼했다는 한국인 새어머니는 만난 적도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보통 아버지가 보내 주는 용돈으로 집에서 배달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거나 중국어로 된 영상을 봤다.
학교 점심은 거의 걸렀다. 종이 치고 식당으로 달려 나가는 학생들 무리에 건은 없었다. 당시 나는 2학년 수업을 하지 않았는데, 건을 알게 된 건 점심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2학년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학생 한 명이 교실에 혼자 남아 책상에 엎드려 있기에, 들어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대로 엎드려 게임을 했다. 나는 담임 교사에게 교실에 학생이 있는데,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고 식사도 거른 것 같다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대화를 나누다가 건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건이 학교에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을 시점이었다. 담임 교사는 처음에 건이 바뀐 환경에서 스트레스가 심한 것일지,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한 것일지 추측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 뒤 건을 유심히 살펴보며 자주 대화를 시도하던 한 교사에게 건이 귀찮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 음식 맛없어요.”
급식을 먹으러 학교에 온다는 학생들(과 교사들)이 있을 정도로 점심 식사는 학교에서 최고로 중요한 일과다.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니. 뜻밖의 답변에 교사는 당황했지만 그렇다면 건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꿔바로우랑 훠궈요.”
건이 점심을 거르는 이유를 알게 된 교사는 영양 교사에게 찾아갔다. 중국 배경 학생이 많은 학교이니 식단에도 다양한 문화를 담아 주실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영양 교사 역시 흔쾌히 중국 요리를 식단에 반영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한 달에 두 번, ‘중식의 날’을 운영하기로 했다. 건이 좋아한다는 꿔바로우와 훠궈 대신 마라탕[ref]마라탕과 훠궈는 비슷한 요리이지만, 훠궈는 샤브샤브처럼 끓여 가며 먹는 음식이기에 급식으로 제공하기 어려웠다.[/ref]이 함께 나온 날, 교사는 건에게 오늘은 급식을 한번 먹어 보자고, 네가 좋아하는 메뉴가 나왔다고 건을 앞세워 급식실에 들어갔다. 꿔바로우 배식을 더 받으려는 학생들을 보며 어쩐지 으쓱해하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밥을 먹고 나온 건에게 교사는 맛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이건 한국 음식이에요. 그래도 맛 괜찮아요.”
건의 반응이 어딘지 찜찜한 느낌을 주어서 교사는 중국에서 온 다른 학생들에게 오늘 급식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중국 마라탕 이렇게 싱겁지 않아요. 꿔바로우는 그냥 한국 탕수육 같아요’라고 했단다. 사실은 입에 맞지 않았지만, 건으로서는 교사의 성의를 생각한 최선의 답이었던 것이다. 건은 이후로도 급식을 거르고, 중식의 날에도 가끔 밥을 먹었다. 정작 중식의 날을 반긴 건 선주민 학생들이었다.
건이 밥을 먹지 않는 이유가 한국 음식이 맛없어서였다는 사실을 듣고 누군가는 ‘공짜 밥 먹으면서 고마운 줄 모르고 투정 부린다’고 그냥 두라고 했다. 학교에서마저 이런 시혜적 시선이 이주배경 학생들을 따라다닌다. 교육청이나 민간 단체에서 이주배경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프로그램과 예산, 지원 물품 같은 것이 오면 ‘내가 낸 세금 들여 이렇게 잘해 주는데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거나 ‘나보다 외국인이 더 대우받네’ 하고 말하는 이가 실제로 학교에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원인데 말이다. 같은 학교 학생이더라도 국적에 따라 차별하자는 것인가? 모든 어린이·청소년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라도 기본적인 안전을 제공받고 차별받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비청소년 학교 구성원들이여, 함께 분노해 주시길. 저런 시각이 비단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건에게 취향과 입맛이 있다는 사실이 왜 비난받아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이듬해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시작됐다. 건은 중학교 3학년이 됐다. 당시 온라인 수업 플랫폼에 외국인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었다. 플랫폼 가입에 필요한 내용을 기입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본인 인증 절차도 외국 국적 학생에게는 원활하지 않았다. 교실에서는 주변 학생들의 반응이나 분위기를 보고 따라 할 수 있었던 것이 온라인 수업에서는 오롯이 개인에게 던져졌다. 그래서 다문화특별학급 학생들은 온라인 기간에도 시간표를 달리해서 등교했다.
1년간 한국어 실력이 제법 늘어 대부분의 수업을 다문화특별학급이 아닌 원래 학급에서 듣고 있던 건은 온라인으로 수업에 참여해야 했다. 건의 출석률은 매우 낮았다. 담임 교사가 건에게 수차례 연락을 해야 한 번을 참여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담임 교사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건이 게임을 하느라 온라인 수업을 듣지 않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임을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루 종일 게임 아이템을 모으고, 이것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다. 수입이 꽤 크고, 건이 거기에 매우 소질이 있어서 특정 아이템을 찾는 의뢰도 온다고 했다.
등교가 재개되면서는 건이 학교에 오지 않거나 매우 늦게 오는 날이 늘었다. 건은 학교에 오는 시간이 아깝다고 했다. 그 시간에 게임 아이템을 모아 돈을 버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담임 교사는 건의 아버지를 상담했다. 건의 아버지는 자신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 건이 혼자 집에 있느라 달리 할 것이 없어서 게임에 빠진 거라고 받아들였다. 용돈을 부족하지 않게 보내 주고 있기에 돈이 필요해서 게임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건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온 동네 청년들에게 건이 혼자 있지 않도록 함께 어울려 달라고 부탁했다.
동네 형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건이 게임을 하는 시간은 줄었고, 학교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업 시간 내내 엎드려 잤다. 쉬는 시간에 잠깐 깨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을 빼면 잠을 자러 학교에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담임 교사는 건에게 몸이 좋지 않은 거냐고 물었다.
“밤에 아르바이트했어요.”
건의 비자로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다. 이런 건의 상황을 이미 겪어 봐서 잘 아는 동네 형들이 미리 돈을 벌어 두라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가게를 소개시켜 주었다. 저녁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청소와 배달을 해도 최저임금보다 적은 돈을 주는 곳이었다. F-1 비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뒷정리할 일이 많은 날에는 새벽까지 일하기도 했다.
담임 교사가 건에게 왜 그렇게까지 일을 하느냐고, 아버지가 생활에 필요한 돈을 보내 주시는데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겼느냐고 묻자, 건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돈을 모아 둬야 해요.”
학교생활이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일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뿐더러,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자체로 체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교사가 만류했지만, 건은 계속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된 것은 가게 사장이 건의 임금을 체불하면서였다. 근로계약서를 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체류 조건을 위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자백이 되기에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이주배경 청소년들 중에는 체류 조건 때문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고 최저임금보다 적은 시급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생계 목적인 경우도 있고,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년이 되면 더 이상 한국에서 체류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건은 중국에 돌아가기보다는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중국에 가까운 가족이 없기도 했다.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대학에 진학해서 유학 비자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취업 비자를 받고, 영주권까지 받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 것이었다.
돈을 벌지 않고서 대학 입학 시 재정 능력 증명을 하고, 등록금을 대고, 취업을 준비하기란 불가능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애초에 방문 동거 중인 외국인 청소년이 한국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곳으로 내몰리는 상황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경로 설계라고까지 보인다. 보이스피싱 범죄인 줄 모르고 돈을 벌기 위해 출금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사를 받은 학생도 있었다. 외국 국적 청소년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경로가 턱없이 부족하고 부실한 것은 조명받지 못하고, 범죄에 연루된 이들 중 외국 국적의 청소년이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는 언론 보도를 보면 안타깝다. 이런 프레임은 외국인에 대한 혐오, 외국인 청소년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강화된 혐오는 외국인 청소년들의 안전한 일상과 삶을 만들어 가는 흐름을 방해한다.
건은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하고 원하던 대로 유학 비자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건의 소식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뒤 들을 수 없었다.
안쓰럽군요, 탕후루라도 사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나는 지인 앞에 ‘교사 됨’의 고충을 잔뜩 토해 놓고 말았다. 그래 놓고는 민망해져서 부랴부랴 주워 담는답시고 ‘교사는 좋은 직업이에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좋은 교사가 되는 일이잖아요. 직업 세계에서 얼마나 희소한 일치감인가요’라고 좋고 좋은 말을 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좋은 교사 하려다 사람 구실 못 했구나 싶었던 낭패의 기억들이 반발하며 줄줄이 달려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해 왔던 대로, 선의에서,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해영에게, 건에게, 학생 개개인에게 ‘부적응’의 책임을 돌렸던 순간이.
앞으로는 해영, 건과 같은 이주배경 학생들을 더 많은 학교에서,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ref]서울시교육청의 〈2024년 다문화교육 기본계획〉에 따르면, 2023년 서울시 전체 학생 수는 787,949명으로 2021년과 비교하여 40,597명 감소한 데 반해, 2023년 서울시 다문화학생 수는 20,388명으로 2021년과 비교하여 1,020명 증가하였다. 전체 학생 인구가 계속 감소하는 추세인 데 반해 다문화학생 수는 증가하고 있다. [/ref] 그때마다 이주배경 학생 개개인의 노력과 적응만을 기대해야 할까. 학교는 다양한 구성원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해야 한다. 학생 인권 감수성이 높은 통역 지원, 정서 및 심리 상담 지원처럼 이주배경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선주민만의, 오직 선주민에 의한, 선주민이 설계한 학교 체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구성원을 맞이하며 바뀌어야 하는 것은 선주민의 문화와 선주민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이다. 선주민도 괴로운 시스템이니 그대로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 더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시스템에서 선주민은 시혜를 베푸는 자나 피해를 입는 자가 아니라 수혜자가 될 것이다.
해마다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해 와서는[ref]“내년 E9 이주노동자 역대 최대 16만 5000명··· 음식점도 고용 허용”, 〈경향신문〉, 2023년 11월 27일.[/ref] 함부로 대하는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 사회에 적응을 마쳤으며, 가족도 한국에 있는 외국인 학생들을 성년이 되면 쫓아내는 상황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안정적인 체류가 가능한 조건이었다면 해영과 건,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상황의 외국인 청소년들의 삶의 모양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국 사회의 품은 얼마나 넓어졌을까.
다행한 것이 있다면 해영, 건과 같은 이주배경 학생들과의 만남으로 몇몇 교사들이 새로운 상황에 대해 배우고 천천히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선주민 세계관에 작은 균열이 난 것이다. 새로운 구성원을 환대할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구성원의 다양성이 커지다 보면, 모두가 고통받음에도 잘도 유지되는 이 기이한 차별의 세계관이 차츰 전복되고, 새로운 구성원을,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구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주배경 주민들의 이야기를 접해 본 적이 없으면서 편견에 사로잡힌 분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분들이 속한 좁은 세계가 안쓰러워서 탕후루라도 하나 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 좁다란 우물 같은 곳에서 답답하지 않으신가요. 코로나 시기에는 내가 근무하던 지역의 전염병 확산을 걱정하며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 동포 커뮤니티는 선주민들보다 더 철저히 마스크를 쓰고 방역에 힘썼다. 동포분들이 싸웠던 것은 확산되는 전염병이 아니라 확신을 얻는 혐오였다. 어떤 이들은 양꼬치와 마라탕 맛집에 대해 신나게 알은체를 하다가도 영화 〈청년경찰〉과 〈범죄도시〉를 언급하며 위험하니 어두운 거리를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해가 다 진 뒤에 양꼬치를 먹고 마라탕을 먹으러 골목골목을 활보하는 것처럼, 나는 5년간 부랴부랴 출근하고 활기차게 퇴근했다. 끝내주는 지삼선을 먹고, 뜨끈한 누룽지탕을 먹으러.
정말로 위험한 것은 내가 살아온 방식이 학생들을 위한 유일한 방식이라는 확신, 가장 필요한 것은 단일한 세계관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을 겪더라도 그것을 예외로, 그래서 제외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을 용기, 기존의 세계관을 조금씩 허물어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 볼 다문화적 세계관으로의 당당한 입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