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호[후속] ‘교사가 허락하는 민주주의’의 한계 |여름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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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교사가 허락하는 민주주의’의 한계



여름

초등교사




초등 4학년 사회 과목에는 ‘민주주의’를 배우는 단원이 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학생 자치, 주민 자치 등 일상생활 속에서 학생들이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배우는 단원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나눈 의견을 통해 함께 정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하려는데,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이미 들켜 버린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학교의 모습은 민주주의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공부한다는 것은, 마치 한국에서 사막을 공부하듯 완전히 멀리 떨어진 무언가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이미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물론 갈 길이 멀었지만) 민주주의를 향해 가야 하기에, 단지 개념으로만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학교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 준 

‘찢어진 편지’ 사건


‘학교에서 학생인권을 주제로 학생들과 피케팅이라도 해 볼까?’ 싶어 피켓으로 쓸 만한 박스를 야금야금 주워 모으던 차에,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도 학생자치회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있다고 답했고, 가만 생각해 보니 4학년 학급 임원인 반장과 부반장을 학생자치회에 소집하는 안내를 그동안 한 번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간제 교사를 했던 여러 학교에서는 대체로 3학년 또는 4학년부터 학생자치회에 참석했는데, 지금 내가 있는 학교는 왜 4학년의 참석을 요청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학생 자치 담당 선생님께 문의하니, 우리 학교는 5, 6학년 학급 임원만 학생자치회에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학생 자치는 4학년 교육과정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내용인데, 4학년 학생이 학생자치회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교감 선생님께 건의했지만 실제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은 담당 선생님께 우리 반 학생들의 의견을 자치회에 대신 전달하는 방식이라도 취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 선생님께서 흔쾌히 학생을 보내 달라고 하여, 학생에게 담당 교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우리 반 학생 중 한 명이 학교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고, 학생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학생 자치 선생님께 드릴 제안서를 챗GPT의 도움을 받아 가며 열심히 썼다. 편지의 시작은 “존경하는 선생님께”였다.


하지만 ‘존경하는 선생님’에게서 돌아온 답장은, 편지가 찢겨 버려지는 것이었다. 문방구를 운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담당 선생님이 자신의 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반 학생의 제안서를 찢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천하기 어려운 제안이라고 해서 교사가 학생의 글을 찢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모두 분노했다. 머리가 멍해지고 몸이 떨렸다. 제안서를 쓴 학생은 물론이고, 응원하고 함께 들떠 있었던 학생들 모두의 마음이 타인에 의해 찢긴 상황이었다. 이미 찢어진 종이는 버려졌지만, 찢어진 마음을 다시 붙여 모으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각자 ‘찢어진 편지’ 사건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과 생각이 들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마음 나누기를 한 후 학급 회의를 열었다. 이 상황을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여러 의견들 중, 남아 있는 학급비를 사용하여 교실에서 미니 문방구를 1회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다행히 학생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미니 문방구를 아주 좋아했다. 학급 회의를 통해 열게 된 행사를 성황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찢어진 마음을 다시 붙일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 마음에는 찢어진 모양대로 울퉁불퉁한 선이 남아 있기는 할 것이었다.


사회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민주주의’라는, 발음이 어렵지도 않은 이 네 글자를 입 밖에 꺼내기가 망설여졌던 것이 괜한 노파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었다. 민주주의를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서럽고 험난할 일인가.(아무래도 민주주의라는 것은 역시나 투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었던가?)


학생자치회에 안건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교실 안에서 회의를 통해 학생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결정해서 미니 문방구를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학생 자치’라고 당당히 말하기에는 또 망설여지는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학급 회의를 하고 결정 사항을 진행하는 데 나라는 담임 교사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처럼, ‘교사가 허락하는 민주주의’는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한 구석이 있다.


교사의 허락하에 작동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방식에서도 허점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A 교사가 허락한 민주주의는 A 교사가 부재하는 순간 지켜지기 어렵다. B 교사가 인정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많은 학교에서는 다치거나 아프지 않은 이상 학생들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게 한다. 우리 학교도 그렇다. 한번은 학생들이 “선생님들은 아프지 않아도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학생들은 평소에 타지 못하게 하는 건 차별”이라고 문제 제기했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며 “누구든 엘리베이터가 필요한 상황일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학생들은 ‘엘리베이터 타도 된다고 하는 선생님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고, 곧이어 “그런데 엘리베이터 타다가 ○○○ 선생님한테 걸리면 어차피 혼날걸?” 하며 걱정했다.


그렇다. 학생들과 차별, 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떻게든 학생들이 평등한 주체로서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조금씩(정말 조금씩밖에 못 하지만) 모색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내가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나면 학생들은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선생님에게 혼나는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들의 교장실 시위에 돌아온 말


그럼에도 학생들은 교사가 없을 때에도, 교사가 ‘허락’하며 관여하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이 있다. 나는 계기 수업을 열심히 하는 편인데, 얼마 전에는 동료 선생님께서 할로윈 때 10.29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서 계기 수업을 할 거라고 하셔서 반가웠다. 하지만 ‘헉, 저 선생님도 10.29 참사 수업을 하시다니!’라는 생각을 한 순간, “사람 많은 데 가지 않도록 수업할 예정”이라는 말이 이어져 시무룩 풀이 죽었다.


나는 10.29 참사 수업을 통해, 사람이 많은 축제에 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안전 관리를 하지 않은 책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짚고 싶었다. 지금까지 해 온 계기 수업의 포커스 또한 대체로 참사와 학살의 책임자가 저지른 잘못을 아는 것, 그들이 뒤늦게라도 책임을 지게 하려면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 속에서 동료 시민들이 해 온 집회와 시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고, 학생들은 저항의 방식으로써 일어나는 시위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실제로 학생들이 시위를 도모하는 일이 일어났다.


2학기 때 새로 부임한 전담 선생님은 상벌점제를 (엄격히) 운영하는 분이셨다. 학생들은 작은 행동에도 벌점을 받고 벌점이 쌓이면 벌 청소를 해야 하는 상황을 부당하다고 느꼈다. 불만이 쌓인 가운데 누군가 외친 “우리 교장실에 시위하러 가자!” 한마디에 분위기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교장실에 누가 갈지, 가서 어떤 말을 할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고, 결국 한 명이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작성해서 같이 교장실에 찾아갔다. 놀란 교장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과 의논한 뒤 나를 찾아와 “아무래도 학생들이 한 게 아닌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여름 선생님이 애들을 시킨 것 아니냐’라는 말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어진 말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아무래도 학부모님이 학생을 통해 민원을 제기하시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곤란에 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순간 생각했지만,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놀라기도 했다. 정제된 문장으로 의견을 제기한 것이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런데 교사를 향한 비판이니 교사가 ‘시켰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해, 아마 학부모가 ‘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정당하게 요구한 내용에 대해 비청소년인 누군가가 종용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씁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학생들은 이미 충분히 정치적인 존재들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모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무언가 의문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선택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들 또한 정치적인 존재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교사들은 대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데 굉장히 몰두하고, 따라서 오히려 ‘중립을 바람으로써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생각과 선택을 하는 존재’가 되곤 한다. 중립(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을 선택한다는 것 또한 ‘정치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려면


정치적인 이야기를 굉장히 꺼리는 분위기 때문에 계기 수업을 할 때 스스로도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올해 1학기에는 대통령 탄핵 정국이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이루어진 날, 많은 교사가 탄핵과 관련된 수업을 하고 선고 중계를 실시간으로 학생들과 함께 보았지만, 대체로 ‘중립’을 지키며 그 상황을 함께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탄핵 재판에 서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권리가 학생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실’을 알릴 뿐이었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존재인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주체로서 본인들만의 판단을 할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정치적인 수업을 했다’는 이유로 민원이 들어와 동료 교사들에게 여러 비판을 듣는 등의 피곤한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이 피어오른 것도 사실이었다.


교육과정에도 공식적으로 들어 있는 내용인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가면서 ‘수박에는 씨가 있다’, ‘물은 투명하다’ 같은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사들부터 ‘정치적인 것’에 지나치게 민감한 문제, 이렇게까지 교사들을 ‘정치적 중립’이라는 허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교사의 정치 기본권 제한 문제가 있는 한, 교사가 민주주의를 가르치기에 위축되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 속에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일은 오직 교실에서 수업을 꾸리는 교사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민주주의는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 시작부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가르치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 환경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일구어 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누가 누구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부터가 어쩌면 교사는 주는 존재, 학생은 받는 존재라는 위치 관계를 형성시킬 위험성이 있는 것 아닐까. 민주적인 구석이라곤 없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민주주의를 단지 개념으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가 동료로서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하며 함께 민주적인 교실과 학교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일지 자문해 본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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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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